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창비시선 444
고형렬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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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시읽기

노래책시렁 147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고형렬

 창비

 2020.5.20.



  2004년 어느 때였는데, 어느 헌책집 지기님이 “최종규 씨라면 ‘헌책’이라는 이름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헌책’이라고 하면 죄 싸구려나 낮게만 보는데, 헌책이 싸구려나 낮지 않잖아요?” 하고 물은 적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서 그 뒤 꾸준히 생각하지만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2020년에 이르러 어느 날 ‘손길책’이란 이름이 떠올랐어요. ‘헌책’이라고 가리키는 책은 누구 손길이 탄 책이에요. 한 사람이든 열 사람이든 즈믄 사람이든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이야기가 새롭게 자라는 책이지요. 그래서 이 결을 ‘손길책’이란 이름으로 담으면 어울리겠다고 느끼는데, 저한테 새 이름을 바란 책집지기님은 이제 책집을 그만두셨어요.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을 읽는데 어쩐지 치레질이 눈에 밟힙니다. 왜 이렇게 글을 써야 할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한알의 감자는 서너개의 눈을 가졌다”는 뭔 소리일까요? 씨감자를 묻는 흙지기가 이런 말을 할까요? “감자 한 알에는 눈이 여럿이다”일 뿐인걸요. 글을 오래도록 쓰더라도 마음을 흙빛으로 가누지 않는다면 겉멋치레에 쉽게 빠져들고 마는구나 싶습니다. ㅅㄴㄹ



아이는 아버지처럼 하루를 내다보곤 했다 / 이제 아이의 후년(後年)이 되어서 / 동쪽 산에 빨가니 날이 밝아오면 / 그는 소년보다 더 소년적인 어른이 되었다 / 눈 찌푸린 해가 풀잎 사이로 떠오른다 / 시인은 자신에게 풀이 사라졌나 두려웠다 / 소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풀편篇/13쪽)


칼로 감자를 조각조각 여몄다 늙은 그 여자가 // 한알의 감자는 서너개의 눈을 가졌다 // 감자 조각을 재통에 붓고 뒤섞었다 그 늙은 여자는 / 베어진 얼굴에 하얀 재가 묻은 감자들은 / 시커먼 얼굴이 되고 말았다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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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앙앙앙 창비시선 443
류진 지음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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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46


《앙앙앙앙》

 류진

 창비

 2020.4.10.



  저는 향긋물(향수)을 뿌리거나 쓴 적이 아예 없습니다. 얼굴에 뭘 바르지 않고, 이제는 비누조차 안 써요. 그렇지만 누구는 향긋물이나 얼굴가루나 비누를 쓰겠지요. 이런 것을 늘 곁에 둘 테고요. 저는 나뭇잎을 볼에 대면 몹시 즐겁습니다. 흙을 맨발로 디디고 맨손으로 쓰다듬으면 상큼하다고 느껴요. 빗물로 몸을 씻으면 개운하지요. 《앙앙앙앙》을 쓴 분은 어떤 곳에서 어떤 삶을 보내려나요? 아마 저하고는 사뭇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큰고장에서 여러 가지를 누리며 살아가겠지요. 이리하여 이녁이 쓴 글에는 이녁이 살아가는 하루가 고스란히 흐릅니다. 이런 글은 큰고장에서 지내는 분한테는 재미날 만하고, 말놀이로 여길 만하지 싶습니다. 그러나 숲바람하고 숲그늘로 하루를 누리고 싶은 사람한테는 뜬구름을 잡는구나 싶으면서, 말장난으로 볼 만하지 싶어요. 여름이 저무는 8월에 한껏 피어나는 까마중 흰꽃하고 도깨비바늘 노란꽃을 바라봅니다. 이 들꽃은 눈가림이나 눈속임을 안 합니다. 그저 까마중답게 줄기를 올리고 꽃망울을 터뜨려요. 오직 도깨비바늘답게 꽃대가 솟으며 꽃송이가 벌어집니다. 날이 저물며 멧새 노랫소리가 한결 그윽합니다. ㅅㄴㄹ



착지했는데 목성일 때 / 당겼는데 빗줄기일 때 // 나무떼가 철컥철컥 갑옷일 때 // 마음인데 차가운 햄일 때 / 물병 속의 물결인데 빠졌을 때 // 청군이 이기기로 했습니다 (우르비캉드의 광기/10쪽)


맥주와 공권력이 발끝을 적신 고장에서 왔습니다 / 죽으십시오, 이 건조무미한 곳으로 이주를 지원하는 바입니다 / 여기 지옥은 무슨 맛입니까 (칭다오 지네튀김/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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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창비시선 445
박형준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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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45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박형준

 창비

 2020.6.25.



  서울에서 고흥까지 틈틈이 찾아와서 빈터에 풀꽃이랑 나무를 심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문득 저를 부르더니 우리 집에서 고양이를 기르느냐고 묻습니다. 저희는 아무 짐승을 안 기릅니다. 다만 마을고양이 가운데 가장 비실거리던 아이가 다른 마을고양이한테 얻어맞고 치이다가 우리 집 처마 밑에서 잠만 얻어자려고 찾아들 뿐입니다. 이 마을고양이가 그분이 일구는 꽃밭에 똥을 누고는 똥을 덮는다면서 흙을 판다더군요. 힘센 고양이한테 시달리다가 밤잠을 얻어 자려고 찾아오는 마을고양이인 터라 이 고양이한테 뭐라 말하기는 어렵지요. 아니, 마을고양이더러 “똥을 가려!” 하고 말할 수 있을는지부터 아리송합니다.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을 읽다가 ‘시란, 머리로 짜맞추는 글재주는 아닐 텐데’ 싶었습니다. 기린이란 짐승이 참말로 줄무늬를 슬퍼할까요? 기린한테 물어봤을까요? 기린하고 마음을 나누었을까요? 동물원 아닌 들판을 달리고 숲에서 풀노래를 부르는 기린하고 사귀었을까요? 사람이 사람이라면, 상냥하게 사랑하는 살가운 숨결이 새롭게 샘솟으면서 슬기롭게 속삭이기 때문이겠지요. 글재주 아닌 살림노래가 그립습니다.



당신과 늪가에 있는 샘을 보러 간 날 / 샘물 속에서 울려나오는 깊은 울림에 / 나뭇가지에 매달린 눈(雪)이 / 어느새 꽃이 되어 떨어져 / 샘의 물방울에 썩어간다 / 그때 내게 사랑이 왔다 (달나라의 돌/10쪽)


꽃은 무릎 같다 / 꽃 앞에 서면 마음이 어려진다 / 그리하여 나는 나른하기만 한 / 내 앞을 지나가는 다정한 노부부의 / 무릎 나온 바지를 찬양하게 된다 (오후 서너시의 산책 길에서/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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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의 노래 문학과지성 시인선 533
이설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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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43


《울타리의 노래》

 이설빈

 문학과지성사

 2019.11.4.



  저는 인천이란 고장에서 나고 자란 터라 1982년에 프로야구가 첫발을 내딛을 적에 도원야구장으로 날마다 찾아가서 삼미 슈퍼스타즈 경기를 보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어린이가 ‘야구 일정’을 미리 알기 어렵고, 뻔질나게 야구장으로 달려가서 경기를 하나 안 하나 살폈어요. 1983년은 장명부를 앞세워 반짝했지만 이내 시들했는데, 야구장에서는 으레 갖은 거친말이랑 방망이로 퍽퍽 패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감독이 선수를 나무라거나 얼차려를 시키는데, 1루 관중석에 앉은 어른 사이에서도 “하, 아무리 져도 경기 중이고 아이들도 경기를 보는데 좀 심하네.” 하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울타리의 노래》에서 옥탑칸 이야기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노래님은 옥탑칸이 참 싫었나 봐요. 저도 옥탑칸에서 제법 살았는데,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지만, 햇살이 눈부시고 바람이 훌륭하지요. 삶이란 언제나 바라보기 나름이에요. 때로는 가난하기에 싫지만, 때로는 돈이 많아서 싫다고도 합니다. 때로는 짝꿍이 없어서 쓸쓸하다지만, 때로는 짝꿍이 많아서 고달프다지요. 울타리는 남이 씌우지 않습니다. 스스로 세우면서 스스로 제자리걸음이기에 울타리입니다.



나는 틈만 나면 잠을 모으지 / 뿔이 악몽을 한 점에 집중할 때까지 / 몸의 내륙이 쩍쩍 갈라질 때까지 / 기린, 우린 벼락 맞는 나무의 / 가장 위태로운 가지 같아 (기린의 문/9쪽)


내 옥탑방 앞에는 빛나는 위성접시 / 너의 방 창문에는 / 벽돌과 벽돌들 그리고 / 키 낮은 담벼락 // 나의 지붕은 기와지붕 / 지붕 있는 옥탑방 / 無窮花 흐드러진 화단 // 나는 화단을 짓밟고 / 올라가 지붕을 부수고 / ―없어 / ―없다고 (태양 없이/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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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 쿠튀르 문학과지성 시인선 539
이지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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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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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 쿠튀르》

이지아

문학과지성사

20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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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속도와 힘으로 가득한 것이다. 놀리고 싶은 것들이 생길 때는 그 뒤에서 따라 했는지도 모른다. 가령 희망이거나 가능성, 아니면 상관없어 이런 말들 (들판 위의 챔피언/11쪽)

- 기존의 치과는 데이터에 기반해서 문제를 찾아내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고 다양한 오더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치과에 가지 않는 네온사인들은 무엇에 문제가 있나. (어떤 유괴 방식과 Author/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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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 쿠튀르’란 프랑스말을 들으니, 프랑스에서 택시를 몰다가 우리나라로 돌아온 어느 분이 스물 몇 해 앞서 ‘똘레랑스’란 프랑스말을 읊고, 〈한겨레〉란 신문에 이 말을 끝없이 되풀이한 일이 떠오릅니다. 프랑스한테서 배우자는 뜻으로 프랑스말을 읊으셨겠으나, ‘너그러움’이나 ‘열린마음’이나 ‘어울림’이란 말을 읊으면 어린이도 함께 배울 만하겠지요. 비싼 옷이면 “비싼 옷”이라 하면 됩니다. 아름다운 옷이면 ‘아름옷’이나 ‘꽃빔’이라 하면 됩니다. 그러나 굳이 영어나 프랑스말이나 일본말을 만지작거리고 싶은 분도 있을 테지요. 《오트 쿠튀르》를 읽는 내내 이 가없는 말잔치로 글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는구나 싶어 더부룩했습니다. 문학이 되어야 하니 자꾸 말잔치가 되어야 할까요. 시란 이름을 붙여야 하니 줄기차게 덫을 깔아야 할까요. 하루를 놀듯이 노래하면 좋겠습니다. 노래란 어렵지 않습니다. 놀이도 어렵지 않아요. 시나 문학이 어려워야 할 까닭이 없고, 이래저래 덫을 놓거나 치레를 하거나 밑밥을 깔아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노래할 하루를 그리면서, 웃음눈물로 피어날 놀이 한 자락을 펼치면 됩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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