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팔레트 문학과지성 시인선 540
강혜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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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시읽기

노래책시렁 154


《밤의 팔레트》

 강혜빈

 문학과지성사

 2020.5.9.



  미리내를 두 눈에 새긴 때는 아홉 살이었지 싶지만, 아마 더 일찍 마음에 새겼으리라 생각합니다. 외사촌 언니들을 따라서 들길을 걷거나 멧길을 타면서 비로소 깨달은 미리내가 아홉 살이었고, 이미 갓난쟁이 무렵부터 어머니 옛집에 마실을 가서 이모 등에 업혀 콜콜 잠들었다고 하더군요. 이모 등판에서 잠들며 보았을 테고, 그분들 시골집에서 잠들며 꿈에서도 보았을 테지요. 스무 살이 갓 넘어 강원도 양구에서 군대살이를 하며 다시금 미리내를 보았고, 살림을 전남 고흥으로 옮긴 2011년부터는 구름 없는 날이면 맨눈으로 늘 별빛잔치를 누립니다. 자, 우리 함께 미리내를 보는 곳에서 밤을 맞이해 봐요. 전깃불빛이 없는 곳에서 밤빛을 맞이해 봐요. 책이나 사진으로 말고, 또 유튜브로도 말고, 우리 눈으로 저 하늘 별빛을 맞아들이기로 해요. 잎망울을 쓰다듬는 마당을 누릴 터에서 하루를 지어 봐요. 자동차도 셈틀도 손전화도 아닌 우리 손길로 잎자락을 어루만져 봐요. 《밤의 팔레트》를 쓴 분은 서울(큰고장) 한복판에서 매캐한 숨에서 살아남으려고 밤을 허위적거렸지 싶어요. 자, 그러면 이제 떠나요. 붓을 내려놓고서 노래할 수 있는 별빛마을로 가요. ㅅㄴㄹ



옆집은 밤중에만 못을 박고 / 세탁기를 흔들어 깨운다 // 벽에 귀를 대보면 조용해지는 / 혼자 사는 사람이 흘리는 / 물은 얼마나 될까. (드라이아이스/10쪽)


뉴스는 토마토의 보관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 설탕에 푹 절여지고 싶어 / 사소한 기침이 시작된다 / 내 컵을 쓰기 전에 혈액형을 알려줄래? (커밍아웃/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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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에 뜨는 달 신생시선 40
서경원 지음 / 신생(전망)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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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49


《유리에 뜨는 달》

 서경원

 신생

 2014.12.1.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어린이는 없지 싶습니다. 어린이가 거짓말을 할 줄 안다면, 이미 어린이가 아닌 ‘죽은이’로구나 싶어요. 어린 나이부터 마음이 죽은 셈입니다. 또는 둘레에서 어른들이 사납고 차갑게 윽박지르고 괴롭힌 나머지 그만 스스로 마음을 죽여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셈일 테고요. 어른은 거짓말을 잘 할까요? 어느 모로 보면 어른은 순 거짓말투성이입니다. 재미없어도 억지로 웃고, 내키지 않아도 상냥한 척하며, 다른 일로 바빠도 살살 맞춰 주지요. 《유리에 뜨는 달》을 읽으면서 ‘멋스러이 쓰는 글에 맞추어서 잘 보이려고 하는 글결’을 자꾸 느낍니다. 굳이 멋스러이 써야 글이 될까요? 구태여 시라는 옷을 입혀야 시일까요? 우리는 너무도 잘못 알면서 살아갑니다. 누구하고라도 사랑할 수 있지만 아무하고나 사랑하지 않기에 사람입니다. 무엇이든 사랑할 줄 알지만 아무렇게나 사랑하지 않아서 사람이에요. 겉멋은 겉멋일 뿐 시가 아닙니다. 겉치레는 겉치레일 뿐 문학이 아니에요. 껍데기는 그저 껍데기예요. 그럴듯하게 꾸미지 말아요. 문학강좌나 문학비평가가 떠드는 소리에 맞추어 짜맞춘다면 아예 글조차 되지 않습니다. ㅅㄴㄹ



늙은 여자는 소녀에게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말한다 / 소녀의 눈동자는 문 밖에 있다 / 치마를 나풀거리며 달려가는 소녀의 긴 머리칼 / 늦은 오후의 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늙은 화가와 소녀/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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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시인선 146
김희준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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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50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김희준

 문학동네

 2020.9.10.



  낫으로 벤 풀은 곧 새로 돋습니다. 재미있어요. 석석 베는 손길 따라 풀이 삭삭 눕는데, 낫으로 풀을 벨 적에는 보드라우면서 향긋하게 푸른바람이 일렁입니다. 저는 자동차도 안 몰고 기계낫(예초기)도 안 씁니다만, 둘레에서 기계낫으로 풀밭을 쓸어버리면, 풀은 한동안 숨을 죽일 뿐 아니라 두려워 떨면서 더 악을 쓰면서 올라옵니다. 참말 그래요. 낫으로 풀을 베면 풀이 다시 올라오기까지 좀 더디지만 보드라운데, 기계낫을 쓰면 무시무시하게 악바리로 올라오려고 할 뿐더러, 냄새가 고약해요. 죽음냄새가 훅 퍼집니다.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을 읽는 내내 풀내음을 생각합니다. 가장 좋기로는 풀을 안 베고서 지켜보기입니다. 우리가 풀한테 속삭이면 되거든요. 풀은 풀대로 자라나야 할 뜻이 있어 자라는데 억지로 벨 까닭이 없어요. 다만 풀베기를 해야 한다면 먼저 풀하고 나긋나긋 마음을 나누고서 가만히 눕힐 노릇입니다. 풀밭은 그냥 풀밭이 아닌 풀벌레 보금자리요, 거미에 벌나비에 개미도 함께 사는 터예요. 사람만 바라본다면 풀빛을 모릅니다. 푸른별을 바라보기에 풀빛을 알 만하고, 시들지 않는 시를 쓸 수 있겠지요. ㅅㄴㄹ



비의 근육을 잡느라 하루를 다 썼네 손아귀를 쥘수록 속도가 빨라졌네 빗방울에 공백이 있다면 그것은 위태로운 숨일 것이네 속도의 폭력 앞에 나는 무자비했네 얻어맞은 이마가 간지러워 간헐적인 평화였다는 셈이지 (악수/13쪽)


어머니 엎드려보세요 세상은 내가 껴안을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황금 나무가 꿀을 품고 천장까지 자랄 것입니다 가지를 타는 흰 뱀은 환생을 꾀하고 거북이는 백사장 가득 알을 낳겠지요 (태몽집/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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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사랑을 한다 문학동네 시인선 144
김복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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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151


《희망은 사랑을 한다》

 김복희

 문학동네

 2020.7.20.



  종이기저귀를 안 쓰고 천기저귀를 쓴다고 하니까 우리 어머니는 “이그, 엄마는 너네 형한테는 천기저귀를 썼지만, 너때는 힘들어서 종이기저귀 썼어. 얼마나 힘든데. 너도 종이기저귀 쓰면 안 되니?” 하셨고, 곁님 어머니는 “아이그, 천기저귀 쓰면 일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가뜩이나 할 일도 많으면서 어떻게 천기저귀를 쓴다고 그래? 그래도 천기저귀를 쓰면 아기가 좋아하지. 아이를 생각하면 천기저귀를 써야 맞는데.” 하셨습니다. 힘들면 얼마나 힘들고, 안 힘들면 얼마나 안 힘들까요? 기저귀를 아이한테 몇 해나 대어줄까요? 《희망은 사랑을 한다》를 읽다가 두 아이를 돌본 지난날이 어렴풋이, 아니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하루를 옴팡 아이한테 바치면서 하루에 삼십 분쯤 눈을 붙이기도 벅찬 나날이었지만, 언제나 사랑이 가득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저는 늘 누구한테나 말해요. 사랑을 하고 싶다면 사랑을 하면 돼요. 무서워하는 채로 살고 싶다면 그저 무서워하는 채로 살아가면 되지요.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면 오직 사랑만 마음에 새기면서 생각을 펴면 되어요. 사랑 아닌 두려움을 ‘희망’이란 껍데기에 함부로 들씌우지 않기를 바라요. ㅅㄴㄹ



그는 벌레를 무서워한다 나는 그를 무서워 한다 / 그는 잠드는 것을 무서워한다 나는 그를 무서워한다 / 그는 술 없이 잠드는 것을 무서워한다 나는 그를 무서워한다 (왼손이 하는 오른손의 일/20쪽)


신보다 신의 사자를 사랑해선 안 되는 걸까 그림 속의 꽃을 내가 그린 꽃을 / 독을 (세라핀의 꽃, 꽃의 세라핀/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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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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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책

노래책시렁 157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허연

 문학과지성사

 2020.6.17.



  큰아이가 태어난 해는 2008년이요, 작은아이가 태어난 해는 2011년입니다. 큰아이는 가시내인 몸인 터라 세이레까지 날마다 천기저귀를 쉰두 자락씩 내놓았고, 작은 아이는 사내인 몸이라 세이레까지 나날이 천기저귀를 서른 자락씩 내놓았습니다. 사내를 먼저 낳고 가시내를 나중 낳았다면 “우와, 장난 아니네?” 했을 텐데, 가시내가 먼저 태어나 준 보람으로 작은아이를 돌보며 “우와, 고작 하루에 서른 자락만 빨면 되네?” 하고 여겼습니다.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를 읽다가 생각합니다. 시를 쓰고 싶다면 다른 사람이 쓴 시를 안 읽어야지 싶습니다. 아니, 책으로 배워서 쓰는 시를 읽지 말고, 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가르치는 시를 읽지 말아야지 싶습니다. 삶을 사랑하면서 하루하루 살림을 지으면 모든 나날이 시가 되거든요. 노래를 부르고 싶다면 오로지 마음소리를 귀여겨들을 줄 알아야지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을 살리는 바람이랑 해랑 비랑 풀꽃나무랑 흙이랑 구름이랑 별빛을 읽을 줄 알아야지 싶습니다. 아이들 똥기저귀에 오줌기저귀에 이불이며 배냇저고리에 이것저것 빨아서 마당에 널면 늘 멧새가 구름을 타고서 노래하거든요. ㅅㄴㄹ



우린 나쁜 번호를 뽑았던 거야 // 지친 밀랍인형들 틈으로 / 나비 한 마리 날아올랐다 / 은혜처럼, 혹은 / 다시 찾은 영혼처럼 (만원 지하철의 나비/18쪽)


뼈의 입장이 되어버린 /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다가 // 이미 알고 있었던 일들이 / 나를 놀라게 한다는 걸 알았다 // 모든 예상된 일은 / 예상치 않게 나를 흔든다 / 물론 알고 있었다 / 어머니가 뼈가 됐다는 걸 (이장/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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