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신



  가벼운 신을 발에 꿰고 달린다. 이러다가 신이 벗겨진다. 에헤헤 웃으면서 다시 신을 발에 꿴다. 새롭게 땅을 박차면서 달린다. 가벼운 신을 꿰고 가볍게 달린다. 가벼운 신을 꿰었으니 가볍게 바람을 가른다.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짚신 말고는 딱히 신을 꿰지 않았고, 옛날에는 어디나 풀밭 길이요, 흙도 보드라웠으니 맨발로 어디로든 다녔겠지.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다진 땅에서는 맨발이 좋지 않으니 신을 꿰어야 하는데, 쉬우면서 가볍게 꿰고 쉬우면서 가볍게 빨아서 말리는 신이 아이한테나 어른한테나 가장 좋으리라 느낀다. 발을 부드럽고 포근하게 감싸는 신이라면 땅도 하늘도 바람도 해도 물도 풀도 더욱 살가이 맞아들일 만하리라 본다. 2016.6.4.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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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라는 곳



  하룻밤 서울마실을 잘 마치고 고흥으로 돌아왔다. 하루 동안 바깥일을 보느라 시외버스에서 아홉 시간 남짓 보내고, 잠은 거의 자지 못하는 채 이틀에 걸쳐서 사람들을 만나서 기운을 쏟으니, 고흥 읍내에 내려서 저잣마실을 하고 택시를 불러서 마을로 오기까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서울에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졸음이 엄청나게 쏟아져서 가방에 기대어 눈을 붙였고, 시외버스에서도 자다가 깨다가 책을 읽다가 하면서 팔에 힘이 오르지 못했다.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에 닿아 아이들하고 인사하고 짐을 풀고 씻고 저녁거리를 내놓은 뒤 비로소 숨을 돌리는데, 천천히 새 기운이 솟는다. 조용한 바람을 느끼고, 싱그러운 개구리 노랫소리를 느낀다. 재잘거리는 아이들 말소리를 느끼고, 하룻밤 아이들하고 잘 지낸 곁님 숨결을 느낀다. 그저 좋다. 2016.5.3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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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



  그제 밤부터 서울마실을 헤아리며 짐을 챙기고 막바지 원고 교정을 했다. 이 막바지 원고 교정은 한 번 더 해야 한다. 아무튼 고흥집에서 밤을 새다시피 원고 교정을 했고, 어제 아침에 이웃마을에서 읍내로 가는 군내버스를 여덟 시에 타려고 일곱 시 사십 분에 집을 나서기까지도 원고 교정을 했고, 군내버스에서도 시외버스에서도 내내 원고 교정을 했는데, 이때에 한 가지를 아주 뚜렷하게 느꼈다. 집안일을 안 하고 아이들을 돌보지 않으면서 원고 교정에만 오롯이 마음을 쓰다 보니, 원고 교정이 아주 빨리 끝났다. 원고지 삼천 장에 이르는 원고 교정을 참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집에서는 아이들을 쳐다보면서 이 일을 여러 날에 걸쳐 해도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했는데 혼자 시간을 보내면서 ‘그리 어렵지 않은 일’로 맞이했다. 시외버스가 성남이라는 곳을 가로지를 즈음 원고 교정을 마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고맙고 예쁜가, 아버지가 혼자 바깥일을 보러 나들이를 나올 수 있도록 마음을 써 주면서 저희끼리 고흥집에서 놀아 주는 이 아이들이란 얼마나 사랑스럽고 훌륭한가 하고 생각했다. 겉으로만 보자면 나는 ‘내 이름’만 ‘내가 쓴 책’에 올리지만, 막상 내가 쓴 모든 책에는 곁님뿐 아니라 아이들 숨결이 고이 깃들면서 네 사람, 아니 여섯 사람(먼저 떠난 두 아이를 더해서) 손길이 깃들었다고 할 노릇이지 싶다. 2016.5.3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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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그림 놀이



  손등에 그림을 그리며 논다. 손등에 즐거운 이야기를 앙증맞게 그리며 논다. 이 손그림은 꼭 하루만 간다. 하루가 저무는 저녁에 손이랑 발이랑 낯을 씻으며 모두 지워진다. 그러나 이렇게 손그림을 그리며 논 하루는 오래오래 가슴에 남아 기쁜 이야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모든 놀이는 언제나 온몸을 기울여서 즐긴 뒤에 온마음이 새롭게 태어나도록 북돋우는 씨앗이리라 본다. 2016.5.30.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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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손길을



  너희 손길을 타면서 일손이 수월하다. 너희 손길을 받으면서 일손이 줄어든다. 너희 손길을 나누면서 일손이 즐겁다. 너희 손길을 얻으면서 일손에 새로운 웃음이 피어난다. 너희 손길을 바라본다. 너희 손길을 생각한다. 너희 손길을 사랑하는 살림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꿈길이 될까 하고 마음으로 곰곰이 되돌아본다. 2016.5.27.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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