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거주불능 지구 - 한계치를 넘어 종말로 치닫는 21세기 기후재난 시나리오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지음, 김재경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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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26


《2050 거주불능 지구》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김재경 옮김

 추수밭

 2020.4.22.



불과 몇 해가 지나지 않았음에도 (2016년 파리기후)협약의 요구 조건을 제대로 이행하는 산업 국가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2도 상승이라는 기준은 놀랍게도 최상의 시나리오에 가까워 보이며, 2도 상승을 넘어서는 끔찍한 미래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그런 전망은 대중의 시야에서 교묘히 숨겨지고 있다. (25쪽)


지난 100여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는 도시 생활을 나아가야 할 미래상이라고 생각했으며 결과적으로 대도시의 규모는 인구 500만 명 이상, 1000만 명 이상, 2000만 명 이상으로 계속 늘어났다. (81쪽)


지구 표면의 70퍼센트가 물로 뒤덮여 있다는 점에서 바다는 지구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우세한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수많은 역할에 더해 바다는 일단 우리를 먹여살린다. (147쪽)


오대호에서는 조사한 어류 중 과반수가, 북서대서양에서는 조사한 어류 중 73퍼센트가 미세플라스틱을 함유하고 있었다. (161쪽)


컴퓨터 덕분에 효율성과 생산성이 올라가기는 했지만 동시에 기후변화 때문에 기술 혁신의 영향력이 줄어들거나 완전히 상쇄돼서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났을 수 있다. (183쪽)


아이러니하게도 기후변화 연구를 통해 드러나는 내용이 암울해질수록 전문가의 조심성은 점점 더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235쪽)


지난 몇백 년 동안 수많은 서양사람이 진보와 번영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던 요소가 사실 거대한 기후재난의 전조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301쪽)



  1997년에 교토의정서가 나왔다 하고, 2016년에 파리기후협약이 나왔다 합니다. 하나는 스무 해가 지났고, 다른 하나는 다섯 해쯤 되었는데, 막상 이 두 가지를 제대로 지킨 나라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라를 이끄는 벼슬아치만 안 지켰을까요? 우리가 함께 안 지킨 셈 아닐까요?


  시골 군청은 어디를 가도 으리으리합니다. 아직 으리으리하지 않은 군청이 남았다면 머잖아 으리으리하게 올리려고들 합니다. 해가 가면 갈수록 시골 지자체는 어린이하고 푸름이하고 젊은이가 빠르게 사라지면서 사람도 줄고, 남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더 늙습니다. 그러나 시골 지자체 벼슬아치는 외려 나날이 늘어납니다.


  서울은 나날이 더 뚱뚱해집니다. 서울 곁에 있는 큰고장도 뚱뚱해집니다. 나즈막한 아파트는 빠르게 사라지면서 높다란 아파트로 바뀝니다. 이제 시골 읍내에까지 높다란 아파트가 올라섭니다.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오래된 아파트를 허물 적에 나오는 시멘트랑 플라스틱 쓰레기는 모두 어디로 갈까요? 찻길을 새로 깔면서 나오는 낡은 아스팔트 쓰레기는 다 어디로 갈까요? 핵발전소를 돌리면 핵쓰레기가 나오는데, 핵방사능 쓰레기는 몽땅 어디에 있을까요? 화력발전소를 돌리면 석탄쓰레기가 나오는데, 석탄쓰레기는 또 어디에 있을까요?


  전남 고흥은 2020년에 ‘스마트팜’을 나라돈을 받아서 짓는다고 합니다. 널따란 ‘고흥 스마트팜’을 짓는 자리에 석탄쓰레기가 엄청나게 파묻혔습니다. 석탄쓰레기더미에 시멘트를 잔뜩 들이붓고, 여기에 유리온실을 세워서 스마트팜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이 스마트팜에서 거둔 남새는 모조리 큰고장으로 보내겠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시멘트 바닥 밑에 석탄쓰레기를 어마어마하게 파묻은 유리온실에서 거둔 ‘수경재배 남새’를 먹으면서 즐거울 만할는지요? 튼튼한 몸이 되고 아름다운 마음이 될 만한지요?


  미국에서 뉴욕 한복판에 사는 어느 분이 《2050 거주불능 지구》(데이비드 월러스 웰즈/김재경 옮김, 추수밭, 2020)라는 책을 써냈다고 합니다. 앞으로 서른 해쯤 뒤에 이 별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목숨붙이도 살아남을 만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서른 해쯤 뒤에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만, 서른 해가 아닌 2020년 오늘을 돌아볼 적에 이 별이 얼마나 살 만한지부터 생각해야지 싶어요.


  돌림앓이가 크게 퍼지는 요즈음 이 별은 얼마나 살 만할까요? 돌림앓이가 크게 퍼지면서 거의 모든 하늘길이 멈춥니다. 하늘길이 멈추고 공장도 꽤 많이 멈추고 자동차물결도 이럭저럭 줄어드니, 하늘빛이 파랗게 바뀝니다.


  멀리 내다보지 않아도 되어요. 오늘 여기를 보면 되어요. 우리는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 정년퇴직을 맞이할 때까지 회사원이 되어 톱니바퀴로 굴러야 한다는 생각,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의무교육을 차근차근 밟고서 입시지옥을 거쳐 대학졸업장을 거머쥐어야 한다는 생각, 목돈이 좀 생기면 여러 나라를 비행기 타고 휘휘 돌며 사진을 찍어서 누리집에 올려야 한다는 생각, 조금 더 크고 시커먼 자가용을 굴려야 한다는 생각, 마당 한 뼘도 없는 시멘트 아파트를 몇 억이든 십 억이든 이십 억이든 들여서 장만해야 비로소 숨을 돌릴 만하다는 생각, …… 갖은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삽니다. 하늘빛을 볼 겨를도 못 내지만, 하늘빛을 보자는 생각도 안 합니다. 하늘빛을 안 보니 흙빛도 풀빛도 나무빛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미국만 아니라 한국도 ‘조개 플라스틱’이나 ‘물고기 플라스틱’을 알아보면, 또 ‘돼지고기 플라스틱’이나 ‘소고기 플라스틱’을 따진다면 엄청 무시무시할 만하리라 봅니다. 가게에서 비닐자루를 쓰지 않도록 법을 마련한다지만, 정작 ‘비닐바구니 아닌 천바구니’를 쓰더라도 웬만한 먹을거리는 진작에 비닐로 겹겹이 싸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는 책, 《2050 거주불능 지구》조차 겉종이를 비닐로 씌웠어요.


  사람들이 먹는 거의 모든 남새는 비닐밭에서 거둡니다. 고추밭도 비닐밭이지만, 배추밭도 비닐밭입니다. 여름에 나와야 알맞을 딸기가 겨울 한복판부터 가게에 나돌아요. 딸기는 겹겹이 비닐로 두른 집에서 석유난로를 때어서 거둡니다. 그러니까, 겉모습은 딸기이지만, 속알은 비닐하고 석유로 둘러친 것을 먹는 셈이에요.


  한겨울에도 딸기를 사다 먹을 만하니 살기 좋은 나라인가요, 아니면 무늬만 딸기인 비닐하고 석유를 목돈 들여 사다 먹으니 살기 나쁜 나라인가요?


  이제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 나라에서 우두머리를 맡는 분한테도, 새로 국회의원으로 뽑힌 이한테도, 시장·군수뿐 아니라 여느 공무원 모두한테도, 또 누구보다 우리 스스로 물어볼 노릇입니다. 맨발로 디딜 풀밭이나 맨흙이 싱그러운 마당 한 뼘조차 누리지 못하면서 자가용하고 시멘트집을 오가며 벌어들이는 돈으로 우리 삶은 얼마나 즐겁거나 아름다운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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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어 마음사전 걷는사람 에세이 6
현택훈 지음, 박들 그림 / 걷는사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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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24


《제주어 마음사전

 현택훈 글

 박들 그림

 걷는사람

 2019.11.20.



쌀밥을 ‘곤밥’이라 부른 것은 보리밥이나 조밥을 주로 보다가 쌀밥을 보니 그 하얀 빛깔이 고와서 ‘곤밥’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23쪽)


할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저 ‘굴룬각시’ 보라.” 그 말은 부정적인 여자를 보며 하는 말이었다. ‘굴룬각시’가 있으니 ‘굴룬서방’도 있다. 물론 ‘내연남’이라는 뜻이다. (37쪽)


그런데 이젠 제주도 하천에서 뱀을 보기 어렵다. 버려진 농약병이 가끔 보일 뿐이다. 뱀도 개구리도 아이들도 없다. (50쪽)


곤조. 일본말이다. 우리말로 하면 ‘근성’이다. 삼촌은 그 말을 할 때만은 구부정한 어깨를 순간 활짝 폈다. (71쪽)


중학생 때 잠깐 만난 그 교생 선생님 때문에 나는 이렇게 시를 쓰고 있다. ‘몰멩진’ 아이에게 관심을 가져준 그 교생 선생님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실까. (87쪽)



  우리가 쓰는 말은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하루를 그대로 나타냅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이 삶을 바라보고 생각하기에 저마다 다른 삶말이 흐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은 우리를 낳아 돌본 어버이가 맨 먼저 알려주었습니다. 이윽고 우리 어버이를 둘러싼 여러 이웃이며 동무가 찾아와서 들려주었지요. 어느새 찾아간 학교나 일터나 삶터 곳곳에서 보고 듣고 마주한 온갖 말 가운데 스스로 마음에 든다고 여긴 몇 가지를 차곡차곡 품으면서 생각을 한껏 폅니다.


  서울사람은 서울말을 씁니다. 부천사람은 부천말을 쓰고, 하남사람은 하남말을 씁니다. 고장이란 틀로는 경기도일 테지만, 고을은 저마다 다르니 다른 말씨예요. 고장이란 틀로는 경상도라 하더라도 대구랑 부사 말씨는 대구랑 부산 삶터만큼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제주사람이 제주란 터전에서 언제나 마주하면서 맞아들인 제주말은 어떤 빛깔이거나 결일까요?


  시를 쓰는 길을 걸으며 제주말을 새삼스레 돌아본 이야기가 《제주어 마음사전》(현택훈 글·박들 그림, 걷는사람, 2019)에 한 땀 두 땀 흐릅니다. 글쓴님은 어릴 적 어버이한테서 들은 말을, 또 할매가 읊은 말을, 또 동무에 여러 살붙이가 알린 말을 문득 곱새깁니다. 어릴 적에는 심드렁하게 지나치던 말씨가 어른이 되고 보니 새삼스럽다지요. 어릴 적부터 간직하던 말씨가 어른이 되고 보니 더욱 빛난다지요.


  이 책을 보면 글쓴님은 ‘곤조’는 일본말이고 ‘근성’이 한국말이라 적은 대목이 있는데, 이는 알맞지 않아요. ‘근성’이란 한자말을 일본사람이 ‘곤조’로 읽을 뿐이요, ‘근성’은 한국말이 아니거든요. 한국말은 ‘배짱’입니다. 또는 ‘뱃심’이에요.

  한 가지 제주말을 놓고서 한 가지 삶자락을 펼쳐 놓은 《제주어 마음사전》입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제주님은 제주말로 제주살이를 그렸다면, 부산님은 부산말로 부산살이를 그리면 재미있을 테고, 강릉님은 강릉말로 강릉살이를 그리면 아름답겠구나 싶어요.



  서울 표준말은 ‘서울에서 표준으로 나고 자라며 살아온 사람’한테는 걸맞을는지 모르나, 나라 곳곳 다 다른 터전에 따라 다 다르게 나고 자라며 꿈꾼 사람한테는 썩 어울릴 만하지 않다고 느껴요. 같은 낱말 하나를 놓고서 다 다른 삶이 자란다는 숨결을, 그냥그냥 낱말 하나가 아닌 저마다 다른 사랑을 받고 태어나서 저마다 다른 꿈을 키운 어제를 오늘 되새겨 본다면, “순창말 마음노래”나 “봉화말 마음꾸러미”나 “홍천말 마음밭” 같은 책이 하나둘 깨어날 만하지 싶습니다. 다 다른 고장 다 다른 글님이 다 다른 삶을 노래한다면 참으로 좋겠어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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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의 영혼 - 경이로운 의식의 세계로 떠나는 희한한 탐험
사이 몽고메리 지음, 최로미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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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22


《문어의 영혼》

 사이 몽고메리

 최로미 옮김

 글항아리

 2017.6.16.



“뇌 없는 동물이 무언가를 ‘원할’ 수 있을까? 더구나 자신의 욕구를 다른 종에게 전달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42쪽)


“한낱 문어가 이처럼 영리하다면, 저 너머에 이처럼 영리할 수 있는 동물이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가 의식과 개성과 기억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동물들 말이에요.” (79쪽)


“될 대로 되라지. 문어가 지루해하잖아! 그러니 우리 문어랑 놀아 보자고.” (107쪽)


“문어의 생각을 읽는 어려움은 표현이 너무 풍부하다는 데 있어요.” 난 아쿠아리움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내가 알던 어떤 종보다도 표현이 더 풍부했다. “우리에게는 시와 춤과 음악과 문학이 있죠. 하지만 우리에게 갖가지 음성과 의상과 화필과 점토와 기술이 있더라도, 문어가 자기 피부만으로 말할 수 있는 표현에 따라갈 수나 있을까요?” (112쪽)


“대개 물고기들은 당신을 관찰하며 알아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쳐다보지는 않죠. 문어들은 마치 쳐다보면서 학습하는 듯했어요.” (301쪽)



  문어를 알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문어를 다룬 책을 찾아볼까요? 문어를 다루는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가르치는 대학교에 가면 될까요? 문어를 사고파는 가게나 저잣거리를 찾아가면 될까요?


  아니면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문어를 만나면 될까요? 바다에 뛰어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틔워서 문어를 마음소리로 부르고는 마음말을 주고받으면 될까요?


  물살이터에 잡아 놓고 기르면서 사람들한테 구경을 시키는 문어를 만난 이야기를 다룬 《문어의 영혼》(사이 몽고메리/최로미 옮김, 글항아리, 2017)을 읽다가 꽤 지쳤습니다. 첫머리에서는 ‘문어라고 하는 숨결’은 ‘사람 눈이나 생각으로 섣불리 보면 안 된다’고 하는 대목을 짚는가 싶더니, 자꾸자꾸 곁다리로 빠지고 말더군요.


  무엇보다도 곁에서 늘 마주하는 문어가 아닌, 물살이터에 갇힌 문어를 마주하는데, 돌봄이가 들려주는 말에 기대어 생각할 뿐, 글쓴이 스스로 문어한테 마음으로 말을 거는 대목이 너무 적습니다. 아니, 없다시피 합니다.


  아직도 ‘과학(생물학)’이라고 하면, 마음으로 마음을 읽어서 길을 살피고 찾아내는 이야기를 다루지 못하는 셈일까요. 또는 이 책을 쓴 분이 미처 못 짚거나 못 다룰 뿐일까요.


  인문책 《문어의 영혼》은 ‘구경한 문어’ 이야기를 ‘물살이터 돌봄이 목소리’를 따와서 엮기만 했다면 차라리 나았겠다고 생각합니다. 문어하고 동떨어진 얘기를 자꾸 끼워넣느라 막상 ‘문어가 어떤 숨결이며 넋이고 마음이자 빛인가’ 하는 대목은 뒷전이 되더군요. 문어가 온몸으로 사람을 지켜보고 마주하며 생각을 읽고 마음을 느끼듯, 우리도 문어를 온마음으로 어깨동무하면서 이 별을 처음부터 다시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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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적 마음 - 김응교 인문여행에세이, 2018 세종도서 교앙부분 타산지석S 시리즈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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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23


《일본적 마음》

 김응교

 책읽는고양이

 2017.11.30.



가령 ‘안녕하세요’는 일본어로 ‘곤니찌와(今日は)’인데, 우리말로 직역하면 그저 ‘오늘은……’ 하고 여운을 둔 말에 불과하다. 뒷말이 어떻든 인사가 되는 것이다. 일종의 생략과 여운을 즐기는 것이다. (21쪽)


일본에서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숙명’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진다. (58쪽)


거대한 권력의 폭력은 모든 사회에 스며들어 폭력을 행사하고, 그 폭력은 질서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된다. (85쪽)


아름답게 미화된 죽음, 큰 것을 위해서는 죽어도 된다는 생각이 문화물 곳곳에 스며 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일본이란 나라의 큰 거짓말은 미화된 죽음올 감추어져 유지되어 오고 있다는 것을 몇몇 일본 지성인이 솔직히 인정하기도 한다. (146쪽)


곳곳에 전쟁패배로 우는 아이들 모습,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사진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내가 만일 일본 아이였다면, 저런 사진을 보면서 복수심에 불긋불긋 치솟았을 법하다. 아닌 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청년이 모자라, 나중에는 소학교 학생들까지 동원하기까지 했다. 폭탄을 안고 적진을 뚫고 들어간 소년특공대는 유명했다. 그때 죽은 아이들이 신으로 등록되어 있고 ……. (191쪽)



  일본하고 한국은 참으로 가깝습니다. 오늘은 두 덩이로 나뉜 나라이지만, 지난날에는 하나로 있던 터전이었을는지 모릅니다. 일본만이 아니라 이 별에 있는 모든 나라가 처음에는 하나였을 테지요. 하나로 흐르던 터전이 조금씩 골골샅샅 흩어지면서 다 다른 날씨에 다 다른 살림에 다 다른 말이며 이야기로 흘러가지 싶습니다.


  이 일본은 한국으로 숱하게 쳐들어왔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도 곧잘 일본을 치러 갔습니다. 한쪽에서만 쳐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여느 사람들 사이에서는 마음이며 살림을 나누는 길이 있되, 나라지기나 우두머리쯤 되면 싸울아비를 거느리면서 힘자랑을 하기 일쑤였어요. 일본이 더 죽음을 곱게 꾸민다거나 우러른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한국도 ‘싸우다 죽은 이’를 받들거나 섬깁니다.


  우리는 역사나 사회나 문화를 어느 자리에서 어느 눈으로 읽을 마음일까요? 《일본적 마음》(김응교, 책읽는고양이, 2017)은 일본답거나 일본스러운 마음을 이루는 바탕은 무엇일까 하고 헤아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책을 찬찬히 읽노라면 ‘오늘 일본은 이러하구나.’ 싶으면서 ‘오늘 한국도 이러한데?’ 싶습니다. 두 나라는 얼핏 달라 보여도 속으로는 한 갈래라고 할까요.


  한자말 ‘평화’는 “밥을 나누는 길”을 말한다고 합니다만, ‘밥나눔’은 아무하고나 하지 않습니다. 사이가 좋아야 비로소 나눕니다. 사이좋을 적에는 밥뿐 아니라 말도 나누고 생각도 나누지요. 무엇이든 나누는 둘 사이에는 이야기가 흐르면서 시나브로 사랑이 피어나요. 다시 말해, 참다운 평화라면 사랑으로 가는 길이라고 여겨요. 그저 다투지 않는 모습이라면 ‘안 다툼’일 뿐, ‘평화도 사랑도’ 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이웃나라 마음을 읽는 길이란, 우락부락한 나라지기나 벼슬아치나 우두머리가 휘두르는 정치·사회·문화가 아닌, 여느 자리에서 살림을 짓는 사람들이 어깨동무하는 사랑을 찾으려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사로운 일본 마음을 찾고, 포근한 한국 마음을 찾아야지 싶습니다. 넉넉한 일본 마음을 아끼고, 푸짐한 한국 마음을 보듬어야지 싶습니다. 바야흐로 사랑길로, 참길로, 살림길로 가기를 바라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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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내가 싫었습니다 - 자기혐오를 벗어나는 7개의 스위치 자기만의 방
오카 에리 지음, 다키나미 유카리 그림, 황국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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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19


《오랫동안 내가 싫었습니다》

 오카 에리 글

 D.유카리 그림

 황국영 옮김

 자기만의방

 2020.1.7.



한 곳을 깨끗이 치우자 다른 공간의 지저분함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체험을 이때 했습니다. (35쪽)


병원에서는 약으로 증상을 억제시켜 주었지만, 행복해지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지는 않았습니다. (61쪽)


‘설령 나를 버리려 했던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나일 뿐. 그 사람이 나를 업신여기거나 부정해도 내 가치는 떨어지지 않아.’ (123쪽)


“쓰레기 더미 한가운데서 몸을 일으켜 페트병을 치운 네가 참 대견해. 그날부터 인생이 즐거워졌어. 고마워.” (170쪽)



  아무리 뛰어난 국회나 시청·군청이나 병원이나 학교나 연구실이나 절집이 있더라도 우리 삶을 즐겁거나 아름답게 가꾸어 주지 않습니다. 저마다 전문이라고 하는 자리에 있을 적에는 ‘처방·행정·치료·복지’란 이름이 있을 뿐이거든요. 사랑이라는 손길로 다스려서 짓는 밥이 아닌, 솜씨로만 뛰어나게 지은 밥으로는 즐겁거나 넉넉하게 누리는 살림으로 나아가지 않아요.


  뛰어난 솜씨를 뽐낸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는 가슴을 적시지 못합니다. 가슴을 적시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라면, 언제나 오롯이 사랑일 때입니다. 그저 즐겁게 노래하는 사랑을 담아서 쓰기에 마음을 찡 울리는 글이며 그림이며 사진이 됩니다.


  쓰레기로 가득한 밑바닥에서 뒹굴던 사람이 이 쓰레기를 어떻게 하나둘 걷어냈는가 하는 이야기를 담은 《오랫동안 내가 싫었습니다》(오카 에리/황국영 옮김, 자기만의방, 2020)는 ‘싫은 모습’을 아주 신물이 나도록 지켜보면서 조금씩 나아간 발자취를 그립니다. ‘오랫동안’이라 했는데, 얼마나 긴 나날이었을까요. 그리고 신물나도록 지켜본 ‘싫은 나’를 걷어내고 나니, 그 나날이 뜻밖에도 얼마나 안 긴 발자취였을까요.


  하기까지는 언제나 더디거나 오래 걸리는 듯합니다. 하고 나면 아무것이 아닐 뿐더러 그리 힘들지도 않습니다. 다만, 한꺼번에 하자면 벅차겠지요. 하루아침에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을 테지만, 서두를 까닭이란 없어요. 하나씩 하면 되거든요.


  한 땀 두 땀 모여 이루는 뜨개옷이에요. 마름하는 천도 실이 한 올씩 씨줄날줄로 모입니다. 멀디멀어 보이기에 첫발을 뗄 뿐이에요. 아주 조그마한 일을 하고서 스스로 빙그레 웃음짓습니다. 아이를 바라보셔요. 그 삐뚤빼뚤한 글씨를 하나 그리기까지 얼마나 오랜 나날을 손가락에 손목에 힘을 주고서 바들바들 떠는가요.


  어른이 보기에 글씨야 슥슥 그리면 될 뿐인지 모르나, 아이는 글쓰기라는 밭으로 들어서기까지 엄청나게 땀흘리고 마음쓰면서 온사랑으로 하루를 살았습니다. 잘하지 못한다면 잘하지 못할 뿐이에요. 오늘부터 다시 한 발짝을 내딛으면서 차근차근 가면 됩니다. 가다가 넘어지면? 넘어지면 툭툭 털어도 되고, 으앙 울어도 되어요. 뒤돌아가도 좋고요. 구태여 빨리 가야 하지도, 얼른 가야 하지도 않습니다. 언제라도 환하게 노래하면서 가면 되어요. ㅅㄴㄹ



  느낌글을 마치면서 뭔가 찜찜해서 글쓴이 이름 ‘岡映里’으로 일본 아마존을 찾아보았습니다다. 일본에서 나온 글쓴이 책은 “I Love The Way You Be Yourself Depression by Changed Flattering Come with 7 Switch”이거나 “自分を好きになろう”라는 책이름입니다. 게다가 겉그림이 확 다르군요. 가벼운 차림으로 노래를 들으며 바람을 쐬며 걷는 아가씨가 나옵니다. 일본 책이름을 한국말로 풀면 “나를 좋아하자”입니다. 그래요, 책을 읽으면서도 어쩐지 책이름이 찜찜했는데, ‘싫은 나를 바닥까지 드러내는 줄거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나를 스스로 좋아할 수 있지? 나를 좋아하고 싶어!’ 하는 가느다란 목소리였어요. “오랫동안 내가 싫었습니다”란 책이름이 나쁘지 않지만, 글쓴이 뜻인 “나를 좋아하자”하고는 확 다릅니다. 일본 글쓴이한테 여쭈고서 책이름을 한글판에서 바꿀 수도 있습니다만, 이래서야 처음 들려주려고 했던 뜻하고는 아주 엇나가기 쉽습니다.


책이름을 엉뚱하게 바꾼 출판사가 짜증스러워서 별점을 4->3으로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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