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가 아이를 바꾼다 - 우리 아이 놀 권리 회복하기
김민아 외 지음 / 시사일본어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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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63



놀이가 사라지면 인류한테는 ‘재앙’이 된다

― 놀이가 아이를 바꾼다

 김민아·김차명·김청연·이영애·이희원·지정우 글

 시사일본어사 펴냄, 2016.6.30. 11500원



  집에서 찹쌀떡을 빚으려고 이모저모 살핍니다. 옛날이라면 어머니한테 여쭈어서 배웠을 테고, 때로는 이웃집에 여쭈기도 했을 텐데, 오늘날에는 인터넷으로도 찹쌀떡 빚기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집에서 저마다 다르게 빚는 찹쌀떡을 여러 날 들여다봅니다. 이러면서 우리 집에 걸맞게 우리 집다운 새로운 찹쌀떡을 빚어 보자고 생각합니다.


  팥고물은 일찌감치 마련합니다. 찹쌀떡을 빚기 앞서 아이들하고 함께 찐빵을 해 보았거든요. 찐빵을 해 보면서 팥고물을 잔뜩 마련했어요. 오늘은 아침밥을 지으면서 찹쌀가루 반죽을 합니다. 아버지가 반죽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큰아이는 저도 해 보고 싶답니다. 그럼 네가 해 보렴. 나는 큰아이한테 국자를 넘기고 아침밥 짓기를 마무리짓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심심하면 함께 놀 사람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놀 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놀면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었고, 친구도 사귀었다. (6∼7쪽)


(노래방에서) 두세 시간씩 고성을 지르는 노래는 노래라기보다 화난 사람이 악쓰는,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지만 그래도 무척 즐겁다고 했다. (21쪽)



  아이들이 아침을 다 먹을 즈음 찹쌀떡 익반죽을 마무리짓습니다. 밥을 먹는 동안 찜기가 찹쌀떡 익반죽을 잘 해 주었어요. 밥상을 치우고서 익반죽을 조금씩 떼어 도마에 올립니다. 익반죽을 올리기 앞서 도마에는 쌀겨가루를 뿌립니다. 다른 집에서는 녹말가루를 쓴다지만, 우리 집에서는 쌀겨가루를 뿌려서 고물로 묻히기로 합니다. 큰아이는 익반죽에 팥소를 넣고 뭉치기가 잘 안 되는지 자꾸 터집니다. “얘야, 그냥 입에 넣어.” “입에?” “찹쌀떡은 팥소를 넣다가 터지면 그냥 바로 먹으면 돼.”


  어느새 작은아이가 누나 곁에 달라붙어 두 아이는 팥고물을 동그랗게 뭉치면서 놉니다. 네, 신나게 놉니다. 부엌을 온통 팥고물범벅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깔깔거리며 동글동글 팥고물을 뭉치며 놀아요.



아이에게서 놀이를 빼앗는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까? 발달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을 충분히 표현할 통로가 사라지게 돼 아이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심리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려워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이뿐 아니라 인류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85쪽)



  김민아·김차명·김청연·이영애·이희원·지정우, 이렇게 여섯 사람이 함께 쓴 《놀이가 아이를 바꾼다》(시사일본어사,2016)를 읽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놀이가 사라진 까닭을 살피고, 놀이를 되찾아야 하는 까닭을 밝히며, 놀이와 놀이터를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다루고, 놀이와 일과 아이와 어른은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가 하는 대목을 헤아립니다.


  책이름처럼 놀이가 아이를 바꾼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그러면 놀이가 아이를 어떻게 바꿀까요? 놀이는 아이를 씩씩하게 바꾸어 준다고 해요. 놀이는 아이를 아름답게 바꾸어 준다고 해요. 놀이는 아이를 슬기롭게 바꾸어 준다고 해요. 놀이는 아이를 착하며 맑고 싱그러운 마음결이 되도록 바꾸어 준다고 해요. 무엇보다 놀이는 아이가 이 땅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보람을 물씬 느끼도록 바꾸어 준다고 합니다.



건축가의 관점에서 확대해 봤을 때 ‘동네가 놀이터’ 자체일 때 가장 이상적인 놀이 공간이자 배움 공간이고 그것이 입체적으로 구성되었을 때 확장된 놀이터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113쪽)


형태를 흉내내기만 하는 껍데기 식의 놀이기구는 경계해야 한다. 돌이 아닌데 마치 돌을 쌓은 것같이 형태를 만드는 것은 거짓이다. 나무가 아닌데 마치 나무처럼 색을 칠해 놓은 것은 가짜다. (133쪽)



  《놀이가 아이를 바꾼다》를 함께 쓴 여섯 사람은 저마다 전문가 눈길로 놀이를 되찾고 되살려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놀이터는 억지스레 꾸미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무엇보다도 아이한테 억지로 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요.


  아무렴 그렇습니다. 아이들더러 ‘놀라고 시킬’ 수 없어요. 아이들한테 ‘하루 몇 분이나 몇 시간을 따로 놀이 시간’으로 챙겨 줄 수 없어요.


  놀이는 저절로 일어나요. 놀이는 저절로 생기지요. 마음 깊은 곳에서 싱그러이 샘솟는 웃음처럼 누리는 놀이예요. 누가 시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놀이예요. 스스로 우러나서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놀이예요.


  우리 집 두 아이는 아침 밥상을 물린 뒤 함께 찹쌀떡 빚는 ‘놀이’를 하다가 덥다면서 마을 어귀 빨래터로 달려갑니다. 나는 밥상을 치우고 부엌을 씁니다. 오늘 다 먹지 못할 만큼 빚은 찹쌀떡 몇 점은 냉동실에 넣습니다. 아이들이 빨래터에 다녀와서 바로 즐겁게 먹을 수 있도록 예쁜 접시에 예쁘게 찹쌀덕을 얹습니다.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빨래를 해서 마당에 넙니다. 아이들은 빨래터에서 샘물을 온몸에 끼얹으며 논다면, 나는 집에서 찬물을 몸에 끼얹으면서 더위를 식힙니다.


  아이는 신나게 놀아야 튼튼하게 자란다고 느껴요. 어른도 신나게 일할 수 있어야 즐거운 살림이 되리라 느껴요. 놀면서 자라는 아이들이 일이나 살림도 언제나 놀이처럼 가볍고 싱그러이 마주할 만하리라 느껴요. 이 여름에 온누리 아이들이 모두 바람 타고 구름 타며 파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듯이 씩씩하고 기쁘게 놀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놀이하는 마음’을 고이 되찾을 수 있기를 빌어요. 2016.8.1.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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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역사 - 최초의 아내 이브부터 <인형의 집> 노라까지, 역사 속 아내들의 은밀한 내면 읽기
매릴린 옐롬 지음, 이호영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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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62



‘집일’ 하는 몸종인가 ‘곁님’ 같은 사랑인가

― 아내의 역사

 매릴린 옐롬 글

 이호영 옮김

 책과함께 펴냄, 2012.5.11. 28000원



  아무리 더운 여름이어도 밥을 짓고 빨래를 합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어도 밥을 하고 청소를 합니다. 아무리 힘든 하루여도 아이들을 돌보고 씻기고 먹이고 재웁니다. 아주 자그마한 말 한 마디여도 아이들이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배우니, 어버이로서 아주 짤막한 말 한 마디라 하더라도 더 마음을 기울여서 쓰려고 합니다.


  더운 날씨이기에 밭일을 안 해도 되지 않습니다. 바쁜 하루이기에 아이들을 돌보지 않아도 되지 않아요. 밥을 먹으려면 밥을 차려야지요. 밥을 먹은 뒤에는 밥상을 치워야지요. 밥을 차리려면 먹을거리를 장만해야 하고, 먹을거리는 손수 밭에서 기르거나 저잣거리에서 사들여야 합니다. 밥상맡에 앉아서 수저만 드는 사람이라면 ‘제때에 밥이 오르기를 바랄’ 테지만, 밥상을 차리는 사람으로서는 밭짓기랑 저자마실을 비롯해서 철이나 날을 따라 다 다른 밥차림을 올리려고 온힘을 쏟기 마련입니다.



돈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면, 잘생긴 외모나 훌륭한 인품은 여기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것이었다. 여성에게는 처녀성이 요구되었고, 남성에게는 예의 바르고 믿음직하며 활력이 넘칠 것이 요구되었다. (58쪽)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은 안정적인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다. (82쪽)



  요새는 옷 한 벌을 퍽 손쉽게 가게에서 돈을 치러서 살 수 있습니다. 신이나 모자도 손쉽게 살 수 있어요. 이불이나 담요도 돈으로 쉽게 장만할 만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이 모두를 집집마다 손수 바느질을 하거나 뜨개질을 해서 지어야 했어요. 옷도 이불도 손수 지었고, 버선도 갓도 손수 지었지요. 짚신이든 미투리이든 모두 손수 삼습니다. 더구나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려면 실하고 바늘도 손수 지어야 하지요. 물레를 잣고 베틀을 밟습니다. 풀줄기에서 실을 얻기까지 길고 고된 나날을 거쳐야 하고요.


  그런데 말이지요, 가만히 살피면, 옷짓기나 밥짓기하고 얽힌 일은 으레 가시내가 도맡았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도, 유럽이나 미국도 모두 매한가지예요. 힘을 무척 많이 써야 하는 일일 텐데 뜻밖에도 이런 일을 사내가 좀처럼 안 하려고 했습니다.



도시 바깥에 사는 농부의 아내들은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하며, 소젖을 짜고 닭과 돼지에게 먹이를 주고 채마밭을 가꾸고 우물이나 개울에 가서 물을 길어 오고 집 근처의 연못이나 개울가에 나가 빨래를 하고, 물레로 실을 잣고 바느질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게다가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를 기르는 한편 좀 더 큰 아이들을 보살피고 아픈 이들과 노인들까지 돌보아야 했다. 또한 밭에 나가 괭이질, 제초, 추수, 그리고 추수 후의 이삭줍기를 도왔다. 이 모든 일을 하는 데 자식 이외에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124쪽)



  매릴린 옐롬 님이 쓴 《아내의 역사》(책과함께,2012)라는 책을 읽으며 ‘아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 책 《아내의 역사》는 고대와 근대와 현대를 가로지르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아내’라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했는가를 짚습니다. 서양도 동양(또는 한국)하고 엇비슷하게 ‘아내’는 집안에서 온갖 집일을 도맡으면서 쉴 겨를이 거의 없다시피 한 나날을 보냈다고 해요. 이러면서 아이들을 보살피는 몫에다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몫까지 온통 가시내가 도맡았다고 합니다. 더 헤아려 본다면, ‘아내’인 가시내는 아이도 낳지요. 아이를 낳는대서 집일을 쉬거나 걸러도 되지 않아요.


  ‘아내를 둔’ 사내는 어떤 바깥일을 하면서 살았을까요? 집일을 온통 가시내한테 맡기면서 수천 해를 살았다는 사내는 집 바깥에서 어떤 살림을 지었을까요? 왜 서양이나 동양(또는 한국)에서 사내는 집일을 등지고 집살림을 안 맡으며 아이키우기에 손을 놓았을까요?



여자 노예들은 농장에서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했다. 들판에서 일하는 여자 노예들은 쟁기질과 괭이질에다 목화 따기, 심지어 장작을 패는 일까지 했다. 집 안에서 일하는 여자 노예들은 요리, 바느질, 빨래, 다림질, 젖 주기, 아이들 보살피기, 나아가 안주인과 주인의 개인적인 요구까지 일일이 챙겨야 했다. 그들은 비누를 만들고 염색을 했으며 바구니를 짰고 심부름을 했다. 그러고 나면 정작 자기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쓸 시간이 없었다. (322쪽)



  문득 드는 생각인데, 동양이든 서양이든 ‘혼인 제도’에서 가시내는 ‘아내’라는 이름을 받으면서 거의 ‘몸종’처럼 살아야 한 셈이었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름은 아내이지만 막상 도맡아야 하는 수많은 일은 거의 ‘종’을 부리는 모습이라고 할 만합니다.


  가시내(아내)는 사내바라지(남편바라지)를 해야 하는 정치·사회·문화·교육 얼거리인 셈이라고도 할 만하지 싶어요. 오늘날에는 이 틀이 많이 깨지거나 바뀌었다고 할 텐데, 그래도 제법 많은 여느 집이나 사회에서도 ‘가시내’ 자리는 ‘아내’여야 한다고 여긴다고 느껴요.


  바깥일을 하는 가시내라 하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면 집일을 거의 도맡아야 하는 얼거리는 좀처럼 안 깨지는구나 싶어요. 이 대목을 더 따져 본다면, 오늘날 학교교육에서는 아이들(사내와 가시내 모두)한테 집일을 가르치지 않아요.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밥짓기나 옷짓기나 집짓기를 가르치지 않아요.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직업인이 되어 돈을 잘 버는 길만 가르쳐요. 아이들이 스스로 살림을 짓거나 꾸리도록 이끌거나 북돋우지 못하는 학교예요.



대공황 때는 일하는 아내가 “남자의 직업을 뺏는다”는 이유로 공공연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면, 이제는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일하는 아내가 칭송되었다. (483쪽)


직장 여성이 남자 아내를 가진다는 것은 여전히 매우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아내들은 힘겹게 두 개의 장소에서 두 개의 ‘교대 근무’를 그때그때 적당히 해 나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574쪽)


기혼 여성들이 일을 하고 싶어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제일 큰 이유는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579쪽)



  시골집에서 모든 집안일을 도맡으면서 바깥일까지 하는 아버지(사내)로서 《아내의 역사》라는 책을 찬찬히 읽습니다. 이러면서 우리 사회 모습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집안일하고 바깥일을 함께 하자면 그야말로 등허리가 휘어요. 새벽부터 밤까지 살짝이나마 쉴 겨를을 내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여기에 아이들을 돌보거나 가르치는 몫도 맡으니 ‘내 한 몸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 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나는 옛사람이 아니라서 물레잣기나 베틀밟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손빨래가 고되면 기계(세탁기)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정 고단해서 밥상을 차리기 어렵다면 읍내에 가서 한끼를 사다가 먹을 수 있습니다. 요새는 고기 한 점 먹기도 수월해서 읍내 가게에서 고기 한 점을 사서 집에서 쉽게 구워먹을 수 있기도 해요. 옛날처럼 소나 돼지나 개나 닭을 집에서 손수 잡아서 손질해야 비로소 얻는 고기가 아닌 흐름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계가 있고 시설을 갖추었어도, 기계나 시설을 다루는 몫은 사람이 합니다. 세탁기이든 청소기이든 사람이 다루어야지요. 아이들을 마주할 적에도 사람이 마주해요. 세탁기가 빨래를 해 주어도, 널고 말리고 개고 건사하는 몫은 오로지 사람이 맡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하루살림을 고된 일거리로 바라본다면 집안일은 언제나 고될밖에 없구나 싶어요. 우리 보금자리를 즐겁게 가꾸자는 마음이 되어 아이한테 심부름도 시키고, 이모저모 가르치고 나 스스로도 새롭게 배우면서 건사한다면 재미난 집안살림(집안‘일’이 아닌 집안‘살림’)으로 거듭날 만하지 싶어요.



많은 여성들이 지난 이삼십 년 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아내가 되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593쪽)



  집안일은 가시내만 해야 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집안일은 사내가 더 해야 한다고도 느끼지 않습니다. 집안일을 일보다 살림으로 느껴서 집안살림을 함께 꾸리고 가꾸며 돌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사내도 가시내도 ‘아내’나 ‘남편’이라는 이름에서 한 걸음 나아가 ‘살림꾼’이 되거나 ‘살림지기’가 되거나 ‘살림님’이 될 수 있으면 즐거울 만하리라 생각해요.


  한국말사전에서 ‘아내’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혼인하여 남자의 짝이 된 여자”로 풀이합니다. 이와 맞서는 낱말로는 한자말 ‘남편(男便)’이 있습니다. 사내한테는 한자말로 이름을 붙여 준다면, 가시내한테도 한자말로 이름을 붙여서 ‘여편(女便)’을 쓸 듯하지만, 정작 ‘남편·여편’처럼 쓰는 일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편 + 네’ 꼴인 ‘여편네’는 혼인한 가시내를 낮잡을 적에 쓰는 낱말이 되어요.


  이밖에 한국말로는 ‘안사람·바깥사람’이라는 낱말이 있어요. 이는 가시내를 ‘집 안쪽’에 머물면서 일하는 사람으로 바라보고, 사내를 ‘집 바깥쪽’으로 나돌면서 일하는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이 같은 ‘안팎’을 놓고 한자말로 ‘내외(內外)’를 쓰기도 해요.


  혼인을 해서 두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로서 부름말을 살피니 어느 하나도 내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새로운 말을 짓기로 합니다. 가시내하고 사내를 따로 가르기보다는 서로 스스럼없이 어깨동무하는 삶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곁님’이라는 이름을 지어 봅니다. 곁에 있는 님, 곁에서 돌보는 님, 곁에서 서로 어깨동무하는 님, 곁에서 즐겁게 살림을 함께 짓는 님, 이런 여러 가지 뜻을 실어서 ‘곁님’이라는 이름으로 ‘아이 어머니’를 부릅니다. 그러면 ‘아이 어머니’도 나(아이 아버지)를 곁님으로 부를 수 있어요.



아내가 된다는 것은 명예의 배지를 다는 일이 아니지만 불행의 배지를 다는 일도 아니다. (17쪽)



  새로운 이름을 지어 보는 까닭은 앞으로 집살림도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성평등이라는 틀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즐거운 살림’과 ‘기쁜 보금자리’로 거듭날 때에 아름다운 삶이 되리라 생각해요. 이럴 때에 우리는 비로소 “아내의 역사”가 아니라 “함께 짓는 살림”을 누릴 테고, 지난 수천 해에 걸쳐서 동양과 서양 모두 ‘아내’를 ‘몸종’처럼 부리던 굴레를 씩씩하게 떨쳐내면서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고 하는 새로운 길로 노래하며 걸어갈 만하리라 봅니다.


  가시내도 ‘살림님’이 되고, 사내도 ‘살림지기’가 될 수 있기를 꿈꾸어요. 너랑 나랑 다 같이 ‘살림벗’이 되어, 우리 보금자리를 우리가 스스로 사랑할 수 있기를 꿈꾸어요. 2016.7.31.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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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읽다, 독일 세계를 읽다
리처드 로드 지음, 박선주 옮김 / 가지출판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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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61



두 얼굴로 드러나는 독일이라는 나라

― 세계를 읽다, 독일

 리처드 로드 글

 박선주 옮김

 가지 펴냄, 2016.7.10. 15000원



  《세계를 읽다》(도서출판 가지)라는 책이 여섯 권째 나옵니다. 2014년에 ‘터키’하고 ‘호주’ 이야기가 한국말로 나왔고, 2015년에 ‘프랑스’하고 ‘이탈리아’하고 ‘핀란드’ 이야기가 나왔어요. 2016년에 여섯째 책으로 ‘독일’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계를 읽다》는 지구별에 있는 여러 나라 속내를 차분히 풀어내는 ‘인문여행 길잡이’로 삼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이러면서 ‘그 나라로 삶터를 옮겨서 살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한테도 여러모로 길잡이가 될 만하다고 느낍니다.


  《세계를 읽다, 독일》을 살피면 모두 열 갈래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독일이라는 나라에 들어설 때 처음 받는 느낌을 풀어놓고, 독일이라는 터전과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다룹니다. 독일을 이루는 사람들이 마음에 품으려는 생각을 짚고, 독일이 흘러온 사회 얼거리를 들여다본 뒤에, ‘독일에서 살아보기’를 이야기합니다.



독일인은 주말이나 공휴일 자유시간을 이용해서 전원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나는 것을 무척 즐긴다. 불행히도 몇몇 명소는 이런 순수한 주말 여행객을 소화하기에도 이미 과포화 상태이고, 독일의 유명한 숲들 대부분이 방문객의 자동차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질로 질식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23쪽)


프랑크푸르트가 고향인 장인어른과 함께 바이에른의 작은 마을에 관한 텔레비전 방송을 보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 마을 사람들이 하는 말은 강한 사투리 때문에 4분의 1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장인어른 역시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하셨다. (32쪽)



  《세계를 읽다》를 보면, 여러 나라 이야기를 쓴 사람은 ‘그들이 머문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다른 문화를 누리고 다른 사회를 맛보다가 ‘새로운 나라’에 젖어들면서 뿌리를 내려요. 제법 긴 햇수를 ‘태어난 곳’이 아닌 ‘뿌리를 내리려는 곳’에서 살고 난 뒤에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독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독일말 배우기’를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요? 독일에서 나고 자란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테지만,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쓰는 독일말을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하는 사람한테는 모든 대목에서 낯설면서 어려울 수 있어요.


  독일에서 집을 얻거나 일자리를 찾거나 회사를 열려고 할 적에도 이와 같습니다. ‘독일 토박이’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하고 ‘독일로 건너와서 뿌리내리는 사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때때로 같거나 비슷할 테지만 적잖이 다르리라 느껴요.



독일에는 불법체류자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몇 배에 달하는 외국인 거주자가 독일인처럼 세금을 내고 법규를 준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독일 정부의 건강 및 주택 보조 기금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비록 독일인처럼 온전한 혜택을 누릴 수는 없지만 말이다. (84쪽)


나는 이 나라에서 편협하게 사용하는 ‘외국인’이라는 말이 특별히 비 북유럽계 외국인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이 내가 편향된 독일인이 집착하는 악독한 서열을 알게 된 계기이다. (88쪽)



  《세계를 읽다, 독일》을 쓴 분이 ‘독일 여러 고장 사투리’를 다루는 대목에서 살며시 웃음이 났습니다. 잘못 쓰거나 틀리게 쓴 이야기가 아니지만 웃음이 났어요. ‘독일말에도 고장마다 사투리가 틀림없이 있을’ 텐데, 이 대목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싶어서 웃음이 났습니다.


  영어도 영국하고 미국이 다르게 쓰지만, 영국에서도 고장마다 영어를 다 다르게 써요. 한국말도 고장마다 다 다릅니다. 요즈음은 방송과 인터넷과 의무교육 때문에 고장말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표준말만 남는 한국말이지만, 방송과 인터넷과 의무교육을 덜 받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아직도 ‘구수한 고장말’을 마음껏 쓰셔요.


  그러니 우리가 ‘표준 독일말’을 잘 익혀서 독일로 가더라도 ‘베를린하고 떨어진 시골자락인 독일’에서는 서로 ‘의사소통조차 힘들 수 있다’고 할 만하겠지요.



독일인은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친구’라는 단어를 별 생각 없이 아무 데나 쓴다며 때때로 어리둥절해한다. 내가 친구라고 지칭하는 사람 대부분을 독일인이라면 그냥 ‘잘 아는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110쪽)


독일에서는 다른 문화권과 달리 선물을 반드시 가져갈 필요는 없다. 그래도 선물하고 싶다면 꽃이나 포도주 한 병, 또는 주인이 관심 있어하는 주제의 책 한 권 정도가 적절하다. (114쪽)



  독일은 이주노동자를 무척 많이 받아들인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국에서도 독일로 돈을 벌려고 건너간 사람이 참으로 많아요. 독일은 ‘비북유럽계’를 으레 ‘외국인’으로 여긴다고 하는데, 곰곰이 따지면 바로 이들 ‘비북유럽계 이주노동자’가 독일에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았고, 때로는 ‘정치·사회·문화·과학에서 돋보이는 일’을 맡기도 하기 때문에, 독일 사회가 한결 튼튼하면서 굳셀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한국 사회도 이와 같아요. 한국으로 돈을 벌려고 찾아온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바로 한국 사회와 경제와 정치를 받쳐 주는 힘이에요. 비록 한국 사회 ‘이주노동자’는 한국에서 의료 혜택이나 문화 혜택이나 복지 혜택을 거의 못 누리지만 말이지요. 《세계를 읽다, 독일》을 읽으면서 독일이나 한국 사회는 이 대목에서 아직 여러모로 뒷걸음을 걷는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그리고 한국도 독일 못지않게 ‘비북유럽계’인 외국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그리 따스하지 않습니다. 독일에서 ‘비북유럽계 외국인’을 썩 달가이 여기지 않는다고 하는 눈길은 유럽계나 북유럽계가 아닌 한국에서도 사뭇 차가운데, 앞으로 한국사람은 이웃나라를 한결 너그럽고 따스하게 마주할 수 있을까요. 외국인을 따로 가르지 말고, 또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따지지 말고, 다 함께 아름다운 이웃이라는 대목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오늘날 독일은 노동자의 권리뿐 아니라 노동자의 시간 투입 면에서도 모범적인 나라가 되었다. 즉, 노동자들이 얻어낸 것 중의 하나가 짧은 근로시간과 많은 유급 휴가이다. 그 대신에 다른 나라보다 파업으로 손실되는 근로시간이 훨씬 적다. 물론 완벽한 제도란 없고, 독일 역시 파업과 태업, 작업정지로 종종 업무에 차질을 빚기도 하지만 수십 년간 모든 상황이 훌륭하게 잘 돌아가고 있다. (235쪽)



  그런데 독일은 한국하고 크게 다르다 할 만큼 앞걸음을 내달리는 자리가 많아요. 이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 권리’하고 ‘노동 효과’이지 싶어요. 짧게 일하면서도 넉넉히 휴가와 일삯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독일 노동 제도’는 이와 맞물려서 ‘파업으로 빼앗기는 노동시간이 매우 적다’고 해요.


  두 얼굴이라고 할 만하지 싶습니다. 한쪽에서는 여러모로 발돋움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 발돋움하지 못하는 모습이 있거든요.


  그러면 한국 사회는 어떤 얼굴이 될까요? 독일 사회나 정치나 문화에서 두 얼굴을 엿볼 수 있다면, 한국 사회는 얼마나 스스로 발돋움하면서 한결 나아지려는 모습이라고 할 만할까요? 알맞게 일해서 제대로 열매를 맺으면서, 노동자하고 고용주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길을 어느 만큼 열 만할까요? ‘토박이’라는 사람하고 ‘이주노동자’라는 사람이 똑같이 ‘한국사람’으로서 즐거이 어우러질 만한 문화나 정치나 사회를 한국에서는 언제쯤 이룰 만할까요?


  그나저나 독일은 고속도로나 찻길이 제법 잘 깔렸다고 하더라도 워낙 자동차를 모는 사람이 많아서 으레 길이 막히고, 아름드리 숲도 엄청난 자동차 매연 때문에 시름시름 앓는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한국 사회도 엇비슷하네 하고 느낍니다.


  《세계를 읽다》가 다음으로는 어느 나라 이야기를 들려줄는지 기다려 봅니다. 2016.7.28.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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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정원
조병준 글.사진 / 샨티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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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61



‘바람이 달다’는 할아버지처럼 늙는 기쁨

― 기쁨의 정원

 조병준 글·사진

 샨티 펴냄, 2016.6.30. 17000원



  아침부터 마당이 살짝 부산합니다. 마루문을 거쳐서 마당을 가만히 내다봅니다. 마당에 우람하게 선 후박나무가 흔들립니다. 이러면서 여러 가지 소리가 울립니다. 후박잎이 몇 땅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이윽고 푸드득 소리가 나면서 날갯짓하는 새가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후박나무에 후박꽃이 지고 후박알이 맺을 즈음 멧새는 우리 집 마당을 한결 자주 찾아듭니다. 아니, 아침저녁으로 거의 나무에서 산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이런 데에도 나비 애벌레는 새 부리에서 용케 벗어나서 깨어나곤 합니다. 새한테는 살점이 통통하게 오른 애벌레도 맛날 테지만, 후박나무 열매도 맛있으니, 후박알을 훑느라 애벌레를 놓칠 수 있어요.


  후박알을 훑는 새는 저를 내가 나무 밑에 서서 빤히 쳐다보는 줄도 모르는 채 열매 훑기에 바쁩니다. 나뭇가지 맨 아래쪽까지 내려와서 열매를 훑다가 나하고 눈이 마주치면 저도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뒤늦게 놀랐는지 푸득푸득 더 바삐 날갯짓을 하면서 우듬지 쪽으로 올라갑니다.



엄마의 옥상 텃밭에 먹을거리 채소만 초대받았던 건 아니다. 초여름이 되면 빨간 나리꽃도 피었고, 여름이 깊어지면 연보랏빛 비비추도 꽃대를 올렸다. 그리고 엄마의 텃밭에선 쑥갓도 꽃을 피웠다. (25쪽)


이름 모를 잡초는 사진을 찍으면서, 그 오래된 인연의 얼굴을 한 번도 찍지 않았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익숙한 피사체의 함정.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50년 동안 익숙했던 그 얼굴을 처음으로 내 카메라에 담았다. 내 엄마의 얼굴이 들어 있는 규석이 아줌마의 얼굴을. (95쪽)



  조병준 님이 빚은 이야기책 《기쁨의 정원》(샨티,2016)을 읽습니다. 이 책은 조병준 님이 쉰 줄 나이를 넘어서면서 털어놓는 이야기책입니다. 그동안 ‘멋모르’고 살았노라 하는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동안 ‘멋부리’며 살았구나 하는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옛말에 업은 아기를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했고, 파랑새는 마당에 있는데 엉뚱한 데에서 찾는다 했어요. 조병준 님은 조병준 님 스스로 찾던 기쁨은 언제나 조병준 님 삶자리에 있었는데, 이제껏 이를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고 《기쁨의 정원》이라는 책에서 털어놓습니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로 여행을 가서 그 먼 나라 이웃을 사진으로 찍을 줄 알았어도,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텃밭을 돌보면서 남새랑 들꽃을 사진으로 찍을 줄 알았어도, 막상 쉰 해 동안 이웃으로 지낸 이웃 아주머니를 사진으로 찍을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고 수수하게 털어놓습니다.



내 막내삼촌도 ‘아이스께끼’ 통 메고 다니며 팔았다. 내 막내여동생도 오빠가 군대 간 사이에 엄마와 함께 시장통 노점상에서 파 한 단을 팔았다. 50년 전에, 35년 전에,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았다. (254쪽)


왜 좋으세요? 할아버지의 답이 조금 길어졌다. 통역이 할아버지의 답을 전했다. “시미엔은 바람이 달아.” 통역자에게 되물었다. 정말 저 할아버지가 바람이 달다고 하셨어? 네, 바람이 달대요. (263쪽)



  먼길을 달려야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다. 지구 끝까지 샅샅이 훑어야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다. 멋진 모습은 먼 데에도 있지만, 우리 곁에도 늘 있어요. 아름다운 모습은 지구 끝에도 있을 테지만, 우리 둘레에도 언제나 있어요.


  남이 키운 꽃밭만 이쁘지 않아요. 내가 돌보는 텃밭도 이쁩니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들꽃만 곱지 않아요. 우리 텃밭에서 함께 자라는 크고작은 들꽃도 고와요.


  여행길에서 마주하는 이웃만 사랑스럽지 않아요. 우리 아이들도 사랑스럽고, 우리 집에서 늘 한솥밥을 먹는 모든 살붙이도 사랑스럽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간추려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을 ‘즐거운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있으리라 봅니다. ‘기쁜 이야기’는 남들한테서 얻는다기보다 스스로 마음속에서 길어올릴 만하다고 봅니다.



이 지구에 순수한 원시 종족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 미디어는 광고를 팔아먹기 위해 순수니 원시니 하는 거짓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리고 나도 그런 거짓말에 동참했다. 먹고살기 위해서, 라는 핑계를 대면서. (271쪽)



  조병준 님은 《기쁨의 정원》이라는 책에서 이녁이 지난날 저질렀던 잘잘못을 꾸밈없이 털어놓기도 합니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핑계를 스스로 둘러치면서 스스로 복사기처럼 글장사를 했다고 털어놓아요. 이제 이렇게 이 책에서 이녁 발자국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새 길을 곰곰이 되새긴다고 합니다. 작은 텃밭에서 싱그러이 숨쉬는 꽃내음을 노래하자고, 작은 꽃밭에서 해맑게 춤추는 꽃물결을 어루만지자고, 작은 보금자리에서 퍼지는 숲빛을 사랑하자고 다짐합니다.


  손수 밥을 짓고, 손수 살림을 지어요. 손수 흙을 짓고, 손수 이야기를 지어요. 손수 노래를 짓고, 손수 글이나 사진을 지어요. 손수 웃음을 짓고, 손수 눈물을 지어요. 기쁨도 슬픔도 늘 우리 마음속에서 흐릅니다. 남새도 들꽃도 늘 우리 밭자락에서 올망졸망 올라오면서 바람 따라 한들한들 춤사위를 베풉니다.


  어느덧 쉰 줄을 넘는 조병준 님은 곧 예순 줄을 넘을 테고, 일흔 줄이나 여든 줄도 넘을 테지요. 머잖아 조병준 님도 이녁이 어느 고요한 나라를 여행할 적에 만난 할아버지가 들려준 “바람이 달아” 하는 말마디를 이녁 삶에서 녹아든 목소리로 넌지시 이웃한테 들려줄 테지요. 골목 한켠에서 조용히 골목밭을 일구어 골목꽃을 피우는 숨결로 천천히 늙는 ‘조병준 할아버지’ 모습을 그려 봅니다. 2016.7.20.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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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 - 인권이 해답이다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표창원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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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59

 


‘소수(시골)’가 희생하는 나라에 평화는 없다
―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
 인권연대 기획
 표창원·오인영·선우현·이희수·고병헌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6.7.12. 13000원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아픔이나 슬픔이 자꾸 불거지곤 합니다. 어느 한쪽에서는 재개발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철거를 하는데, 막상 재개발 대상이 되는 곳에서 살던 사람은 앞으로 어떤 살림을 꾸려야 하는가를 살피지 않기 일쑤입니다. 다 같이 즐거이 살림을 짓는 길보다는 그저 겉보기에 깔끔하거나 돈이 더 나오는 길을 살피는구나 싶어요.


  때로는 무턱대고 공사를 밀어붙이기도 합니다. 송전탑이나 핵발전소나 군부대를 손꼽을 만한데요, 이들 송전탑이나 핵발전소나 군부대는 ‘도시 한복판’에 들어서지 않아요. 이런 시설은 모두 ‘도시하고 멀리 떨어진 시골’이나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작은 마을’에 들어서기 일쑤입니다. 이른바 ‘다수(도시)’를 헤아려서 ‘소수(시골)’가 희생해야 한다는 투가 되기 일쑤예요.

 


다수결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저항을 이기주의로 매도하지요. 이를 탄압하는 국가 권력을 옹호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공정한 절차를 거쳐 선정했다는 논리로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정말 ‘공정’했을까요? 공정하다면 다수를 위해 희생하는 게 당연한 걸까요? (46쪽)

 


  오늘날 민주주의에서는 투표를 거쳐 다수결로 어떤 일을 꾀하곤 합니다. 민주주의에서 투표나 다수결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에서 투표나 다수결만 옳다고 밀어붙인다면, 투표나 다수결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쪽은 늘 눌리거나 밟히거나 밀리거나 죽어야 하기 일쑤입니다.


  인권연대에서 기획하고, 표창원·오인영·선우현·이희수·고병헌 다섯 사람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철수와영희,2016)를 읽으면서 투표와 다수결이라고 하는 오늘날 민주주의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송전탑이나 핵발전소를 놓고 본다면, 송전탑이나 핵발전소는 ‘도시에 사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 때문에 세워야 한다고 합니다. 시골에서는 커다란 발전소를 들일 일이 없고 커다란 송전탑을 세울 일이 없습니다. 어느 시골이든 볕이 잘 들기 마련이기에, 시골에서는 집이나 마을에 맞추어 지붕에 햇볕전지판만 붙여도 ‘전기 자가수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도시에서는 엄청나게 많으면서 높다란 건물, 지하상가, 지하철과 전철, 수많은 편의시설과 문명과 문화가 있기 때문에 전기를 어마어마하게 써야 하지요.


  핵발전소이든 화력발전소이든 커다란 발전소는 도시 때문에 세워야 하는데, 정작 도시에는 커다란 발전소를 안 세워요. ‘다수’가 있는 곳에 큰 발전소를 세우면 ‘안전하지 않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소수’가 있는 곳에서는 ‘안전하지 못한 시설’이 있어도 괜찮을까요?
 

 

가해자들의 상당수는 학대의 피해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집이나 학교에서 폭력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존감도 상당히 낮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대를 당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매우 수치스러운 존재로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한 분노가 가슴속에 남아 있다가 어떤 대상을 향해 폭발하게 되는 거예요. (54쪽)

 

몇 명 없앴다고 친일파가 사라지겠느냐, 이런 말에 임옥윤이 답합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힘들고 어렵더라도, 맞서 싸우자고 말해야 한다는 거예요. 언젠가는 바뀔 거라는 믿음을 갖고 말이에요. (88쪽)

 


  초등학교 옆에 군부대나 미사일기지를 세우려고 정책을 꾀할 어른은 없으리라 봅니다. 설마 있을까요? 서울이나 부산 한복판에 군부대나 미사일기지를 세우겠다고 할 어른도 없으리라 봅니다. 그렇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신 시골에는 온갖 것을 자꾸 세우려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런 일이 자꾸 불거질까요?


  평화로우면서 깨끗한 전기를 얻어서 도시와 시골이 모두 평화로우면서 깨끗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 데에 마음을 기울이고 슬기를 빛내며 돈을 쓰는 정책이 서기가 어려울까요? 다수도 소수도 아닌 ‘모두’를 살필 줄 아는 똑똑한 정치가 서기는 힘들까요?


  남녘에 군부대나 미사일기지를 늘리려 한다면, 북녘에서도 똑같이 하리라 느낍니다. 이렇게 되면 북녘에서 새로 늘어날 군부대와 전쟁무기에 발맞춰 남녘에서도 군부대와 전쟁무기를 더 늘리겠다는 정책이 서겠지요. 이는 끝이 없습니다. 북녘에서 먼저 멈추든 남녘에서 먼저 그치든 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남북녘 정치 우두머리가 한자리에 모여서 이 말썽거리를 슬기롭게 푸는 길을 찾아야지 싶습니다. 군부대와 전쟁무기에 돈을 쓸 노릇이 아니라, 평화롭게 살림을 지어서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길에 돈도 힘도 마음도 쓸 노릇이라고 느껴요.

 


대테러 전쟁으로 희생된 이슬람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요? 내 부모, 내 가족이 미국의 공습으로 죽었다면? 당연히 증오와 분노가 생기겠지요. (164쪽)

 

이 모델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문화에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선악과 우열도 존재하지 않아요. (175쪽)

 


  다수 의견이 옳거나 소수 의견이 틀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소수 의견이 맞거나 다수 의견이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다수와 소수일 뿐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다수나 소수라고 하는 숫자가 아닌 ‘모두’여야지 싶고, ‘함께’여야지 싶어요.


  그리고 모두 나아갈 길이나 함께 열 길이란, 언제나 평화와 사랑이어야지 싶습니다. 투표와 다수결로만 그치는 민주주의가 아닌, 슬기롭게 서로 아끼면서 보살피는 손길이 되는 참다운 민주가 넘실거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대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행복해질 수 있느냐고 물었던 그 학생에게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공부는 바로 우리 삶과 관련해서 중요한 질문을 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한 번뿐인 삶을 헌신해서 실현하고 싶은 행복이 무엇인지, 아니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선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이지요. (220쪽)

 


  인문책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소수가 희생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다수가 희생할 까닭도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누구도 ‘희생’하지 말고, 서로 따사롭고 넉넉하게 아낄 줄 아는 몸짓으로 ‘어깨동무’하는 길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바로 이 어깨동무이지 싶습니다. 손을 맞잡으면서 즐겁게 노래하는 길을 걸어야지 싶습니다. 서로 환하게 웃음짓는 얼굴로 바라보면서 춤을 출 수 있는 잔치마당을 이루어야지 싶습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희생’은 사라져야지 싶습니다. ‘희생받거나 억눌리는 소수’가 목소리를 높이는 아프거나 슬픈 몸짓을 제대로 바라보아야지 싶습니다. 어깨동무를 할 때에 평화가 섭니다. 손을 맞잡을 적에 사랑이 샘솟습니다. 도시와 시골이, 아이와 어른이, 남녘과 북녘이, 경계나 울타리 같은 허울은 걷어내어 새롭게 기쁨을 지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2016.7.11.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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