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우정에 관하여 - 자매애에서 동성애까지, 그 친밀한 관계의 역사
메릴린 옐롬.테리사 도너번 브라운 지음, 정지인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66



여성이 맺는 평화로운 우정을 생각한다

―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

 메릴린 옐롬·테리사 도너번 브라운 글

 정지인 옮김

 책과함께 펴냄, 2016.8.1. 19500원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글로 남은 책은 거의 모두 사내가 썼습니다. 오늘날에는 글을 쓰는 가시내도, 대학교수나 정치인인 가시내도 많지만, 얼마 앞서까지만 해도 ‘가시내가 무슨 글을?’ 하는 얘기가 있었어요. ‘얼마 앞서’란 고작 서른 해 안팎입니다. 그 서른 해 안팎 즈음 ‘가시내가 글을 쓴다’고 한다면 ‘시나 소설이나 수필’에 머물러야 한다고 여기기도 했는데, 조금 더 앞당겨 쉰 해나 일흔 해쯤 앞서는 ‘시나 소설이나 수필’조차 가시내가 쓰기는 매우 어려웠어요.



기원전 600년부터 서기 1600년까지 서구 역사의 첫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정에 관한 거의 모든 기록은 오직 남자들만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기록의 대부분은 당연히 남성 저자들이 다른 남성들을 위해 쓴 것이었다. (15쪽)


중세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공공연히 함께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베긴회 공동체에서는 여성 친구들이 존중받으며 함께 살아갈 수 있었다. (91쪽)



  메릴린 옐롬 님하고 테리사 도너번 브라운 님이 함께 쓴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책과함께,2016)를 읽으면서 ‘사내와 가시내 사이에 놓인 길’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이 책은 유럽과 미국에 ‘남은 기록’을 바탕으로 삼아서 지난 2000년 사이에 ‘여성 사이에 어떤 우정이 있었나?’를 밝히는 역사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가시내 이름’은 우리가 흔히 배우는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책 뒤쪽에 나오는 ‘엘리너 루즈벨트’쯤은 세계사 교과서에도 이름이 오를락 말락 할는지 모르나 ‘루즈벨트 대통령’이 아닌 ‘엘리너 루즈벨트’를 세계사 교과서에서 다루기는 ‘쉽지 않은 사회 현실’이라고 느껴요. 더욱이 엘리너 루즈벨트라고 하는 사람이 ‘여성 사이에 맺은 우정’뿐 아니라 ‘여성 인권과 평등과 평화’를 이루려고 땀흘린 발자취를 세계사 교과서에서 다루기도 쉽지 않겠지요.



셰익스피어는 여성 친구들이 존재했음을 확인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관계에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고, 서로 협력하여 행복한 결말을 이끌어내는 두 여인의 행위에 의지해 플롯을 풀어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 셰익스피어는 어머니가 이모들이나 여자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여성들 간의 유대가 풍기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흡수했던 것 같다. (101, 103쪽)


19세기 초에 책을 접할 수 있었던 여성들 상당수는 독학에 몰두했다. 공교육은 어차피 아직 허술한 수준이었지만, 그런 교육의 기회조차 여성들에게는 잘 돌아오지 않았다. (216쪽)



  한자말 ‘우정’은 “친구 사이에 흐르는 정”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러한 한자말이 우리 삶자락에 들어오기 앞서 ‘동무’나 ‘벗’이라는 낱말을 썼어요. 가까이에서 사귀기에 ‘동무’이고, 나이나 생각이 비슷하기에 ‘또래’이며, 가까이에서 사귈 뿐 아니라 나이하고 생각이 비슷하기에 ‘벗’입니다. 둘이나 여럿 사이에 우정이 흐른다면, 나이를 넘고 재산을 넘으며 신분을 넘어서 서로 아끼면서 어루만질 수 있는 사이라는 뜻이라고 느껴요.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는 ‘글로 남은 자료’에 나온 ‘가시내 사이에 흐르던 따스한 마음’을 살핍니다. 가시내 스스로 남길 수 있던 글은 너무 적다 하고, 더욱이 사내 눈치를 안 보면서 홀가분하게 쓸 수 있던 글은 몹시 적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글을 훑고 살피면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벗’은 사내 사이에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가시내 사이에도 얼마든지 있다는 대목을 밝혀요. 나이가 들어도 가시내 사이에 흐르는 서로 아끼는 마음은 빛이 바래지 않는다는 대목을 보여주고, 집안일과 아이키우기를 온통 도맡으면서도 마을과 나라와 사회를 바라보는 슬기로운 눈길이 깊었다는 대목도 보여줍니다.



1880년부터 1900년 사이에 성년이 된 1세대 신여성들은 자신들이 청년기 초기에 누렸던 자유가 결혼과 함께 끝나버릴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 노동계급 여성들은 대체로 결혼한 후에도 원하지 않아도 일을 해야 했고, 이민자들의 경우에는 특히 더 그랬다. (242, 243쪽)


여자들은 일단 남편만 ‘낚아채면’ 자기 운명에 만족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특히 대공황의 불안한 구름이 채 걷히지 않았던 1930년대에는 더 그러했다. (297쪽)



  가시내 사이에 맺는 따스한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사내인 나로서는 이 따스한 마음을 알기 어렵습니다. 아마 가시내인 몸으로 사내 사이에 맺는 따스한 마음을 알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시내이든 사내이든 ‘성별이라는 껍데기’를 내려놓고서 ‘사람이라는 넋’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아끼는 따스한 마음’을 알 수 있으리라 느껴요.


  그러니까 ‘남녀 사이에 우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거나 ‘남자 사이 우정이 더 깊다’거나 ‘여자 사이 우정이 더 깊다’ 같은 말은 할 수 없겠지요. 남녀 사이가 되든 여여 사이가 되든 남남 사이가 되든, 서로 ‘사람으로서 아끼고 사랑할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우정이라고 하는 마음이 싹트지 싶어요.



맞벌이 가정에서는 남편이 가사일의 부담을 공평하게 나누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경우라고 해도 주부/어머니가 해야 할 일들로 이루어진 ‘추가 근무’는 여전히 주로 아내의 몫으로 남는다. (332쪽)



  나는 시골에서 살며 집일을 도맡습니다. 아이키우기도 제가 도맡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면서 바깥일도 모두 해요. 오늘날 사회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사내가 바깥일하고 집일을 모두 한다’고 하는 대목을 놓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이 꽤 많습니다. ‘사내가 바깥일을 하면 가시내가 집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 하고 여기거든요. 그러면 거꾸로 생각해서 ‘가시내가 바깥일을 한다’면 이때에는 어떻게 해야 즐거운 살림이 될까요? 사내하고 가시내가 함께 바깥일을 한다면 이때에는 또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살림이 될까요?


  ‘가시내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마음’이 남다를 수 있는 바탕이라면, 집 안팎으로 모든 살림을 헤아리는 눈길이 있으면서, 아이를 마주하는 손길까지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사내는 으레 ‘남자가 밖에서 돈을 벌면 집에서는 쉬어도 되지!’ 하는 생각이기 일쑤인데, 가시내는 이 같은 생각을 ‘으레 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바깥일이야 바깥일이요, 집에서는 집대로 누구나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옷을 입으니, 집일이란 ‘바깥일을 하거나 말거나 누구나 스스로 즐겁게 맡아서 할’ 일이요 살림이에요.



소셜미디어는 장기적인 유대 관계를 이어가게 해줄 뿐 아니라, 새로운 친구를 발견하고 사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도 열어 놓았다. (334쪽)



  2010년대에 나온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는 지난 2000년에 걸친 ‘가시내 사이 우정’과 얽힌 글 가운데 ‘지난날 모습’을 들춥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덮으면서 문득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 서른 해만 더 흘러도, 또 쉰 해나 백 해쯤 더 흐른다면, 그때에는 2050년대나 2100년대쯤에 누군가 새롭게 쓸 ‘여성 우정’ 이야기는 훨씬 깊고 넓으면서 삶도 사회도 아름다우면서 평화롭고 평등하게 북돋우는 즐거운 노래라고 하는 대목이 돋보이지 않을까 하고 말이지요. 2016.8.25.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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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계승자 별의 계승자 1
제임스 P. 호건 지음, 이동진 옮김 / 아작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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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65



5만 해 앞서 ‘다른 지구’가 전쟁으로 사라졌다면?

― 별의 계승자

 제임스 P.호건

 이동진 옮김

 아작 펴냄, 2016.7.25. 14800원



  1977년에 처음 나왔다고 하는 《Inherit the star》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2016년에 《별의 계승자》(아작)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한국말로 나옵니다. “별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책은 이 이름처럼 ‘별을 이어주고 이어받은 사람’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룹니다. 자, 그럼 누가 별을 이어주었을까요? 누가 별을 이어받았을까요? 이어주거나 이어받은 별은 어디에 있는 어떤 별일까요?



콜드웰은 긴장된 공기 속에서 냉기가 서린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찰리는 5만 년 전에 죽었습니다.” (56쪽)


그들은 기계를 만들고 건물을 짓고 도시를 형성하며 대량의 철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 발전했던 흔적을 보여주는 기념비를 과거 몇 세기 동안 이루어져 온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61쪽)



  《별의 계승자》 첫머리는 ‘어느 별’에서 두 사람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헤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느 별’에서 한 사람은 죽어 갑니다. 다른 한 사람은 도무지 죽을 수 없다면서 ‘다른 어느 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불끈 쥡니다.


  아리송한 이야기로 첫머리를 열더니 한참 알쏭달쏭한 이야기가 더 흐르는 《별의 계승자》인데 56쪽에 이르러 이 책을 이루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는 실마리가 될 한 마디가 비로소 불쑥 나옵니다. “지구 옆에 있는 달에서 우주옷을 입은 채 5만 해 앞서 숨을 거둔 사람”이 나왔다고 하는 한 마디가 흘러요.


  《별의 계승자》라는 책은 1977년에 처음 나왔습니다. 이즈음 지구에서 몇몇 나라가 ‘우주 개척’을 하려고 온힘을 쏟아부었어요. 《별의 계승자》는 1970년대보다 앞선 어느 무렵에 지구에서 ‘달쯤은 가볍게 탐사를 하고 여행도 다니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런데 이런 ‘지구사람’들이 달을 탐사하다가 ‘5만 해라고 하는 꽤 아득한 지난날에 우주옷을 입고 온갖 첨단장비를 몸에 붙인 채 죽은 사람’을 보았다고 하지요.



더 이상 헌트가 할 말이 없었다. 눈앞에는 두 가지 미래가 놓여 있다. 하나는 메타다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또 하나는 무한한 우주를 향하는 것이다. 그가 첫 번째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은 인류가 다시 바닷속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았다. (126쪽)


“하지만 지금까지 당신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그 이유를 모르니까.” (158쪽)


월인과 미네르바인이 동일인종인지 아닌지도 밝혀지지 않은 채, 새로운 수수께끼가 추가되었다. 가니메데인은 어디서 온 것인가? (184쪽)



  《별의 계승자》는 글쓴이가 생각을 활짝 펼쳐서 빚은 꿈 같은 소설일까요? 어쩌면 여느 사람들한테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수수께끼를 살짝 엿보고서 넌지시 써낸 작품일까요?


  어느 쪽이 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요. 5만 해에 이르는 어느 앞날에 별에서 죽은 사람이 오늘날보다 더 앞선 과학기술이나 문명을 누릴 수 있지요. 5만 해 앞서 엄청난 지각변동이나 다른 일 때문이 아니라 ‘최첨단 과학기술로 만든 전쟁무기’ 때문에 아무런 유물(발자취)을 남길 수 없었을 수 있어요.


  또는 이 태양계에 ‘지구 아닌 다른 별에 먼저 ‘사람’이 살았으나, 지구 아닌 다른 별’은 ‘사람이 일으킨 끔찍한 전쟁 때문에 먼지처럼 태양계에서 사라졌을’ 수 있어요.



(5만 년 전 월인이 남긴 수첩에 적힌 글) 미네르바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모든 일이 있고 나서 우리 자손들은 밝은 태양 아래에서 살 수 있을까. 만약 살아남는다면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이해를 해 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공장이나 광산, 군대에서의 삶이 아닌 좀더 의미 있는 삶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른다. 우리는 그 이외의 삶을 알지 못한 채 지냈다. (226쪽)



  책을 읽다가 한동안 덮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책에 흐르는 ‘5만 해 앞서 지구 아닌 다른 별에 있었던 엄청난 문명’ 못지않게 오늘날 이 지구를 이루는 문명도 전쟁무기를 어마어마하게 갖추었습니다. 지구에서 여러 나라가 갖춘 전쟁무기는 지구라는 별을 수없이 터뜨리고도 남을 만하다고 해요. 그런데 전쟁무기를 새로 갖추거나 만드는 몸짓을 멈추지 않아요. 아직도 이 지구에서 수많은 나라는(한국을 비롯해서) 전쟁무기를 더 끔찍하고 더 세게 만드는 데에 끝없는 돈을 바쳐요.


  《별의 계승자》에 나오는 ‘5만 해 앞서 죽은 사람’이 남긴 수첩에 적힌 글을 ‘지구 과학자’가 몇 해에 걸쳐서 파고든 끝에 찬찬히 읽어 낸다고 합니다. 달에서 숨을 거둔 옛사람이 남긴 수첩에는 그즈음 사람들(오늘날 지구사람한테 조상이 될 사람)은 ‘살아가는 참다운 뜻’을 하나도 몰랐다고 털어놓아요. 공장, 광산, 군대 이 세 가지 굴레에서만 맴돌았다고 털어놓아요.



과거의 그 자신은 미래의 자신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앞만 보고 왔지만 언제나 현재는 과거의 모습에서 앞으로 될 모습으로 변하는 과정이었다. (284쪽)


의식의 심층부로부터 한순간 표면으로 나왔던 오솔길은 다시 막혔다. 환영은 노출되었고 모순은 해소되었다. 자명한 이치를, 그것도 인류 역사 이전부터 있었던 진실을 누가 의심하려고 했을까. (287쪽)



  이야기책 《별의 계승자》에 흐르는 이야기는 수수께끼로 가득하지만 수수께끼가 아닐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은 5만 해 앞서 옛사람이 하던 짓하고 비슷하거나 똑같은 짓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5만 해 앞서 옛사람이 바보스러운 전쟁으로 스스로 별을 깨뜨려서 모조리 죽음 수렁으로 빠져들었듯이, 이 지구라는 별마저 깨뜨려서 몽땅 죽음 구덩이로 빠져들 수 있어요.


  그러나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죽음 수렁이나 구덩이로 빠져들더라도 오직 한두 사람이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다른 별로 빠져나갈 수 있을는지 모르지요. 그래서 그 한두 사람이 발판이 되어 다시 5만 해에 이르는 ‘진화 과정’을 거쳐서 태양계 다른 별에서 ‘사람 문명과 문화’가 태어날 수 있겠지요.


  참말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알 길이 없어요. 지구라는 별이 깨지면서 다른 별이 태양계에서 ‘사람이 살 만한 별’로 바뀔 수 있어요. 지구에서 달로 가까스로 빠져나간 뒤에, 이 달이 태양계를 벗어나서 다른 은하에서 ‘사람이 살 만한 별’에 가 닿을 수 있어요.


  어떤 앞날이 우리한테 찾아오든 우리가 생각할 대목은 한 가지이지 싶어요. 오늘 우리한테 이 별을 이어준 옛사람은 ‘죽어 가던 그 자리’에서 ‘아이들한테 전쟁과 군대는 물려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깨달아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아직 아이들한테 전쟁과 군대를 물려주고, 또 쳇바퀴처럼 맴도는 굴레를 자꾸 물려주고 말아요.



지구의 녹색 산하와 푸른 바다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요소가 아니었으며 다만 한때 현실이었던 흔적에 불과했다. 헌트는 현실이란 잠시 떠났다가 돌아갈 수 있는 절대적인 곳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그에게 유일한 현실은 우주선이고, 일시적이지만 그가 남기고 온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머지않아 인류는 심연을 향해 뱃머리를 돌리고 은하들 사이로 나아갈 것이다. 안도감을 주는 태양도, 별도 없다. 은하계는 무한한 공간 속 흐릿한 그림자와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258∼259쪽)



  이 지구에서 아이들이 어른한테서 물려받았으면 하는 아름다운 것을 헤아려 봅니다. 이 지구에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한 아름다운 것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이루는 엄청난 과학기술과 문명과 문화를 ‘전쟁무기와 군대’에 쓸 노릇인지, 아니면 그 대단한 과학기술과 문명과 문화로 ‘지구라는 별에서 서로 돕고 사랑하는 살림’에 쓸 노릇인지 곰곰이 되뇌어 봅니다. 2016.8.19.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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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 역사, 그 너머의 역사
미즈노 나오키.문경수 지음, 한승동 옮김 / 삼천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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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65



일본도 한국도 받아들이지 않은 ‘재일조선인’

― 재일조선인, 역사 그 너머의 역사

 미즈노 나오키·문경수 글

 한승동 옮김

 삼천리 펴냄, 2016.8.15. 15000원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나 《일제 식민지 시기 새로 읽기》 같은 책을 함께 썼고, 《창씨개명》 같은 책을 선보이기도 했던 미즈노 나오키 님은 문경수 님하고 함께 《재일조선인, 역사 그 너머의 역사》(삼천리,2016)라는 책을 선보입니다. 어느덧 일본에서 백 해가 넘도록 삶을 짓는 ‘재일조선인’ 발자취를 찬찬히 헤아리는 책입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간 수많은 조선사람은 일본 사회 밑바닥에서 가장 푸대접받는 일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즈음에는 총알받이 군인으로 끌려가거나 군수공장에서 무기를 만들어야 했던 재일조선인이라고 해요.


  일본으로서는 전쟁에 지고, ‘식민지였던 조선’으로서는 해방이 된 뒤, 재일조선인은 기쁨으로 고향에 돌아가기도 했으나 일본에 그대로 남아서 아이들하고 새로운 살림을 짓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즈음 일본 정부는 미국을 등에 업고서 일제강점기 못지않은 푸대접으로 재일조선인을 억눌렀다고 해요.



일본 내지의 경찰 당국은 병합 전부터 거주 조선인 명부를 작성해서 감시와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병합 뒤에도 그런 관행에는 변함이 없었다. (25쪽)


제사공장과 함께 ‘여공애사’를 상징하는 방적공장은 일본의 공업화를 견인한 부문이었는데, 급격한 성장 탓에 노동자가 부족한 공장도 많았다. 그 때문에 조선에서 여성 노동자를 집단으로 데려와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24시간 조업하는 공장의 장시간 노동에 투입되었을 뿐 아니라, 먼지와 소음이 심한 노동 현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26쪽)



  일제강점기에는 ‘황민화 교육’을 받지 않으려고 스스로 학교를 세우다가 학교를 빼앗긴 재일조선인이라고 합니다. 해방 뒤에는 ‘일본화 교육’을 받지 않으려고 다시금 스스로 학교를 세운 재일조선인이라고 하는데, 이때에도 일본은 여러모로 법을 비틀거나 ‘통달문’을 내려서 ‘재일조선인 자립교육’을 막으려고 했다는군요.


  일본 정부는 왜 이토록 재일조선인을 억누르거나 괴롭히려 했을까요. 제국주의나 전쟁주의로 치닫던 때에는 바보스러웠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끝난 뒤에 왜 스스로 평화로운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1920년대에는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방면위원 제도가 정비되었으나, 방면위원이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삼은 적은 거의 없었다. (77쪽)


1930년대 중반에 조선인의 자주적인 교육기관이 폐쇄된 뒤 조선인 아이들은 일본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당국은 학교교육을 통해 일본으로 동화시키고 일본 정신을 주입하기 위해 그때까지 취하던 방임적 자세를 버리고 조선인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학교에서 받아들여 ‘협화 교육’, ‘황민화 교육’을 시키는 쪽으로 방침을 전환했다. 그러나 조선인 어린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차별적인 대우였고 자기부정을 강요당하는 교육 내용이었다. (81쪽)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한국도 일본 못지 않게 평화하고는 등을 졌다고 느낍니다. 일본은 일본대로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바보짓을 했고, 한국은 한국대로 해방 뒤에 반민주와 반평화로 치닫는 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꽤 오랫동안 군사독재가 이어졌어요.


  해방 뒤에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했거나 일본에 눌러앉아서 씩씩하게 살아가려 했던 이들이 남·북녘을 바라볼 적에는 씁쓸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느껴요. 서로 ‘한 나라’가 되어서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해도 이웃 다른 나라들 등쌀에 고단한데, 외려 남·북녘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군사무기를 늘리면서 툭탁거렸거든요. 남·북녘 모두 평화롭거나 민주다운 정치를 보여주지 못했어요. 더욱이 남녘은 새마을운동 바람에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며 시골이 텅 비고, 도시는 도시대로 도시빈민이 부쩍 늘어났어요.



일본 당국은 조선인들을 동화해서 전쟁 동원의 대상으로 삼는 한편으로 후방의 사회질서를 교란할지도 모르는 존재라고 보았다. (96쪽)


통달 한 통으로 외국인이 되어 버린 재일조선인들은 법률 제126호에 따라 당분간의 체류는 허용되었지만, 국외로 퇴거강제 규정을 집어넣은 출입국관리령의 대상이 되어 외국인등록증을 상시 휴대하고 지문날인을 하는 게 의무 사항이 되었다. (145쪽)



  일본은 재일조선인한테만 손그림(지문)을 찍도록 오랫동안 시켰습니다. 한국은 한국사람 모두 손그림을 찍도록 아직도 시키지요. 오늘날 남녘 사회는 외국여행이 자유롭고 여러모로 ‘자유’를 많이 누립니다만, 이렇게 ‘자유’로운 지 얼마 안 되어요. 일본은 재일조선인을 푸대접하거나 괴롭힌다지만, 한국은 이주노동자를 푸대접하거나 괴롭히는 얼거리가 아직도 굳게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재일조선인하고 얽힌 발자국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재일조선인》은 재일조선인이 일본 사회에서 지난 백 해에 걸쳐서 얼마나 슬프고 아프며 괴로웠는가를 다루면서, 재일조선인 스스로 씩씩하게 일어나서 새로운 삶을 지으려고 하는 모습까지 두루 건드립니다. 이러면서 한 가지를 넌지시 물어요.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한테 모진 짓을 오랫동안 일삼았다면, 한국 정부는 ‘바로 한국사람’한테, 그러니까 ‘한국사람인 재일조선인’한테 어떤 몸짓인가를 묻고, 오늘날에는 이주노동자한테 어떤 몸짓인가를 묻습니다.



전후 한국에서는 외국인 주민의 국적 취득 장벽도 두터워, 5년 이상의 체류 실적과 ‘품위’, 그리고 ‘독립적 생계’ 가능 여부 등이 국적법에 규정되어 있는 외에도, 법무부의 국적 업무 처리 지침에는 면접과 필기 시험을 통해 한국어 능력과 풍습에 대한 이해 등 ‘국민으로서의 소양’을 시험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재일조선인이 재일조선인으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여지는 거의 없었다. (245쪽)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사람이 제 나라를 떠나야 했습니다. 해방 뒤에 무척 많은 사람이 제 나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제국주의와 차별 정책 때문에 재일조선인을 ‘종’이나 ‘전쟁 총알받이’로 삼다가 해방 뒤에는 재일조선인을 내치거나 괴롭히거나 따돌렸다면, 한국 정부는 식민지로 살던 무렵에는 제 나라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고 보살피지 못했다가, 해방 뒤에도 똑같이 지키지 못했고 보살피지 못했구나 싶어요.


  이 같은 흐름은 언제까지 이어져야 할까요. 앞으로 이 같은 고리를 싹뚝 끊고서 아름다운 평화와 자유와 민주와 통일이라는 바람이 남·북녘을 비롯해서 ‘재일조선인이 사는 일본’에서도 불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사랑스러운 평화와 자유와 민주와 통일이라는 물결이 남·북녘뿐 아니라 ‘재일조선인이 뿌리를 내린 일본’에서도 즐겁게 물결칠 수 있어야지 싶어요. 부디 전쟁이나 따돌림이라고 하는 바보짓이 모조리 사라질 수 있기를 비는 마음으로 《재일조선인》을 읽습니다. 2016.8.15.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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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6
강상중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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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64



자살하려던 사람을 살린 나쓰메 소세키

―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강상중 글

 김수희 옮김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펴냄, 2016.7.25. 8900원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명예교수로 있다는 강상중 님이 쓴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2016)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이와나미 서점’에서 먼저 나왔다고 합니다.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출판사는 ‘이와나미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책을 한국말로 옮기는데, ‘재일조선 학자’로서, 또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여기에 ‘일본에서 널리 사랑받는 작가’ 한 사람 이야기를 새롭게 바라보는 작은 책이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라고 느낍니다.



소세키는 교육의 의미를 좀더 폭넓게 파악하여, 학생에게 정직함을 원한다면 가르치는 사람도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115쪽)


여성은 “선생님이 바래다 주시는 것은 정말 영광입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대해 소세키는 “정말로 그리 생각하십니까?”라고 묻고 여자가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렇다면 죽지 말고 살아가세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143∼144쪽)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끝자락을 보면 나쓰메 소세키 님한테 찾아온 어느 여성 이야기가 나와요. 이 여성은 이녁 삶이 너무 끔찍해서 살아야 할는지 죽어야 할는지 모르겠다면서 나쓰메 소세키 님한테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고 묻습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죽겠다’고 마음을 품은 사람한테 ‘이대로 죽으면 될는’지, 아니면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를 묻는 셈이지요.


  책을 거의 다 읽다가 이 대목에서 한참 멈추었습니다. 묻는 분도 참으로 딱한 노릇이고, 물음에 대꾸해야 할 나쓰메 소세키 님도 여러모로 딱한 노릇입니다. 삶이 고단한 나머지 소설가 한 사람한테까지 찾아가서 응어리나 아픔을 털어놓지요. 어설프거나 어줍짢은 말로는 마음을 달랠 수 없는 노릇이지요.


  삶이 삶답지 못해서, 죽음만도 못한 삶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이웃한테 어떤 말을 들려줄 수 있을까요.


  나쓰메 소세키 님은 딱히 아무런 말을 들려줄 수 없었지만, 어느 여성이 찾아와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날이 저물었다고 해요. 그래서 이 여성을 바래다 주기로 했답니다. 이때에 이 여성은 “선생님이 바래다 주시는 것은 정말 영광입니다”라 말했다 하고, 이 말을 들은 나쓰메 소세키 님은 비로소 실마리를 얻었다고 해요. 내(나쓰메 소세키)가 바래다 준 자그마한 일 하나가 그토록 ‘영광’이라면 이 ‘영광’을 가슴에 안고 씩씩하게 살라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해요.



자기 스스로를 객관적인 웃음거리로 삼아 소설을 쓰는 행위를 통해 소세키는 자신 안의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22쪽)


소세키는 겁이 많고 신중하면서도 이렇듯 시대와 승부하는 대담한 일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세키는 지금도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국민 작가’ 중 한 사람이지만, 실은 교과서에는 차마 실을 수 없는 비판적인 글도 적지 않으며 ‘반국가적’인 측면 역시 현저한 작가입니다. (35쪽)



  시골에서 두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꾸리는 어버이로서 곰곰이 생각을 기울여 봅니다. 나도 내 삶에서 무엇이 기쁨이나 보람, 그러니까 영광이 될 만한가를 생각해 봅니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잘 자라는 아이들이 나한테 더없는 기쁨이요 보람이요 영광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내가 날마다 차리는 밥을 즐겁게 먹어 주는 모습으로도 기쁘면서 보람차지요. 내 손을 잡고 나들이를 다니는 아이들이 영광입니다. 내 말을 듣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나하고 눈을 마주치며 노는 아이들이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이라고 느껴요.


  살아가는 뜻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찾는 셈일까요. 살아가는 기쁨도 보람도 영광도 언제나 우리 둘레에서 마주하는 셈일까요. 나쓰메 소세키라는 분이 빚어서 펼친 문학은 바로 이 수수하지만 곱게 빛나는 이야기를 다루지 싶습니다. 대단한 것이나 커다란 것이나 엄청난 것으로 사람들을 놀래키는 문학이 아닌, 수수하면서 작은 것으로 사람들 마음을 따사로이 보듬는 문학이라고 할까요.



완전히 서양화되지 못한 일본인을 부정하려고 했던 오가이와 달리, 소세키는 아무리 예복을 몸에 걸치고 서양인 흉내를 내 봤자 결국에는 도저히 숨길 수 없었던 일본인의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있는 그대로 응시하며 묘사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37쪽)



  강상중 님은 일본문학 한 가지를 찬찬히 읽으면서 새롭게 이야기를 짓습니다. 논문이나 비평이나 논평이나 서평이 아니라, 강상중 님 삶으로 나쓰메 소세키 문학을 새롭게 읽습니다. 문학을 논리나 이론으로 따지거나 재지 않습니다. 문학을 이녁 삶으로 읽으면서 강상중 님 나름대로 즐겁게 지으려 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바라봅니다.


  책 한 권에서 배울 대목을 찾고, 글 한 줄에서 이웃하고 누릴 즐거움을 살핍니다. 작가 한 사람한테서 느끼는 사랑을 헤아리며, 앞으로도 두고두고 읽힐 문학이 우리한테 어떤 씨앗으로 스밀 만한가를 돌아봅니다.



박사학위를 너무 감사해 하면 박사학위를 취득한 극소수의 ‘학자적 귀족’이 권력을 장악해 버릴 것 같아 두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목에서도 권위에 대한 소세키의 반항심이 엿보입니다. (45쪽)



  자살하려던 사람을 살립니다. 살면서 지치거나 고된 일도 틀림없이 따라올 수 있지만, 즐겁거나 기쁜 일을 가슴에 품자는 마음이 되어 봅니다. 작고 수수한 이웃이 아파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글 한 줄에 눈물과 웃음을 함께 담아서 나를 둘러싼 작고 수수한 이웃이 스스럼없이 읽으면서 씩씩하게 일어서도록 북돋울 살림을 짓습니다. 한여름에 아이들을 재우며 부채질로 가볍게 더위를 식히며 생각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몸짓으로 어떤 사랑을 지을 만한가를 생각합니다. 내 삶에 기쁜 노래가 될 만한 보람을 어디에서 찾으려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2016.8.14.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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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플라크, 스물세 번의 노크 - 어느 예술가 부부의 아주 특별한 런던 산책
송정임.김종관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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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63



프레드 머큐리가 살던 집 앞을 서성이면서

― 블루 플라크, 스물세 번의 노크

 송정임·김종관 글

 송정임 그림

 뿌리와이파리 펴냄, 2015.11.20. 15000원



  영국 런던에는 ‘파란 이름표(blue plaque)’가 붙은 집이 무척 많다고 합니다. 파란 이름표는 아무 집에나 붙지 않지만 영국 런던에서 살거나 지냈던 이들이 ‘머문 집’에 붙는다고 해요. 사람들한테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보람이나 사랑이나 웃음이나 눈물을 자아낸 어느 한 사람이 ‘머문 집’을 기리면서, 그 집에 깃들었던 고요하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넋을 떠올리도록 한답니다.


  어떤 이는 어느 집에서 나고 자랐을 수 있어요. 어떤 이는 어느 집에서 몇 달이나 몇 주만 머물렀을 수 있어요. 이제 그 집에는 그 어떤 이하고 아무것도 안 얽히는 사람이 살 수 있지만, 기나긴 나날이 흐르면서 우리가 저마다 남기는 발자국을 찬찬히 되돌아보도록 이끌려는 뜻에서 ‘파란 이름표’를 붙인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마 자신들의 결정에 스스로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용감했으니까. 진실이었으니까. 사랑 때문에 가슴이 두근대고 즐거워서 고통이나 근심 따위는 그저 단어일 뿐 자신들은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33쪽)


한 시대가 강요하는 관습과 지배논리에 대한 랭보의 냉소와 반항은 펑크정신의 뿌리가 되었고, 이는 비단 펑크의 대모라 불리는 패티 스미스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랭보라 불렀고 패티 스미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엇던 도어스의 짐 모리슨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67쪽)



  송정임·김종관 두 분이 함께 글을 쓰고, 송정임 님이 따로 그림을 그려서 빚은 《블루 플라크, 스물세 번의 노크》(뿌리와이파리,2015)를 읽습니다. 이 책을 함께 쓴 두 사람은 가시버시입니다. 두 사람은 영국에서 노래도 그림도 삶도 사랑도 새롭게 배우면서 지내는 동안 바지런히 나들이를 다녔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사는 집에서 두 다리로 걸어서 다니는 나들이였고, 이 골목 저 골목 조용히 거닐면서 생각에 잠기거나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해요.


  《블루 플라크, 스물세 번의 노크》라는 책은 두 사람이 영국 런던에서 지내는 동안 골목에서 마주친 ‘스물세 가지 파란 이름표’하고 얽힌 발걸음을 들려줍니다. 스물세 군데 집을 골목에서 만났고, 스물세 군데 집을 거친 스물세 사람하고 얽힌 발자취를 되새깁니다.



그는 그 이후 정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내었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끊임없이 창조했고 어떠한 복종도 없는 자유인으로 살아갔다. (151쪽)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연일 장사진을 이루는 셜록 홈스 뮤지엄과는 대조적으로 환자가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던 그때처럼 지금도 이 집 주변은 한산하기만 하다. 그저 현관 입구의 벽에 ‘아서 코난 도일, 여기서 일하고 글을 썼다’는 내용의 녹색 플라크만이 쓸쓸히 붙어 있다. (191쪽)



  ‘파란 이름표’는 퍽 작다고 합니다. 길을 가다가 쉬 지나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이름표를 찾아보려고 눈여겨보아도 못 볼 수 있다고 해요. 담쟁이덩굴이라든지 나무에 가릴 수 있다고도 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좀 엉성하게 붙인 이름표일 텐데, 이렇게 붙인 데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 싶어요. 무엇보다도 ‘지난날 살던 사람’보다 ‘오늘 사는 사람’을 헤아리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살며 새롭게 살림을 짓는 사람들이 있기에 지난날 이곳에서 살림을 지은 사람들 발자취를 떠올리거나 기릴 수 없어요. 이른바 ‘문화 유적지’는 ‘담당 공무원’이 있어야 지킬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을에서 살며 마을을 돌보는 여느 사람들 손길이 바로 ‘옛사람 발자취’를 고이 지켜 줄 만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지난날 대단했던 누군가 이 집에서 살았어도,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누군가 대단하게 이야기를 지을 수 있어요. 앞으로 이곳에서 다시금 새롭게 누군가 태어나면서 아름다운 삶을 노래할 수 있을 테고요. 이러면서도 오늘 이곳을 일구거나 짓거나 빛낸 사람들이 흘린 땀방울하고 웃음을 늘 마음으로 돌아보자는 뜻으로 조그맣게 파란 이름표를 붙이지 싶습니다.



이 집에서 제임스 배리가 《피터 팬》을 썼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개를 데리고 집에서 가까운 켄싱턴 가든으로 산책을 다녔다. 그리고 피터 팬 이야기의 영감이 되어 준 이웃집 데이비스 부인의 아이들을 켄싱턴 가든에서 만났다. (251쪽)



  기념관이나 전시관을 세워도 나쁘지 않습니다. 박물관이나 도서관까지 지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그마한 이름표 하나로 고운 넋을 기릴 수 있도록 해 주어도 좋아요. 마을사람으로서 마을길을 걷다가 ‘내 이웃집’에 붙은 파란 이름표를 문득 알아채고는 ‘아, 이 집에서 이런 사람이 이런 일을 하기도 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요. 역사책에 적히는 역사로 ‘훌륭한 사람 이름을 외우는’ 몸짓이 아니라, 날마다 수수하게 살면서 늘 내 곁에 감도는 즐거운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은 예전에 어떤 사람이 즐겁게 걷던 길입니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은 예전에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걷던 길입니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은 예전에 어떤 사람이 노래하고 춤추며 걷던 길입니다. 우리가 걷던 이 길은 예전에 어떤 사람이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픈 채 걷던 길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 집에서 죽었다. 프레디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죽음이나 그의 병에 대한 어떤 말도 입에 담지 않았고 오로지 음악 얘기밖에 하지 않았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보드카 몇 잔을 주욱 들이키고는 녹음실로 들어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298쪽)



  오늘 이 길을 새롭게 걸으면서, 또 오늘 우리 보금자리에서 저마다 새롭게 살림을 지으면서, 파란 하늘 같은 바람을 고요히 마십니다. 먼 옛날 흐르던 바람이 오늘에도 흐를 수 있고, 몇 해 앞서 이웃집에서 흐르던 바람이 지구별을 골골샅샅 돌다가 오늘 내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갈 수 있어요.


  내가 걷는 길을 이 다음에 누가 또 걸을는지 몰라요. 우리 아이들이 걸을 수 있고, 낯선 이웃이 걸을 수 있어요. 어쩌면 내가 걷는 이 길은 내가 잘 모르는 이슬떨이 한 분이 씩씩하게 갈고닦아 놓은 길일 수 있습니다. 쉰 해나 백 해 앞서뿐 아니라, 오백 해나 오천 해 앞서 누군가 웃음지으며 걷던 길일 수 있어요.


  파란 이름표가 붙은 집이건 아무 이름표가 붙지 않은 집이건 저마다 발자취가 깃듭니다. 앞으로 어느 집은 푸른 이름표라든지 노란 이름표라든지 빨간 이름표라든지 하얀 이름표가 붙을 수 있어요. 아무 이름표가 없어도 마음으로 느끼거나 읽을 이야기가 서릴 테고요. 2016.8.8.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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