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리아나 - 오스카 와일드의 찬란한 문장들 쏜살 문고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명숙 엮음.옮김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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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70



말 한 마디로 피어나고 빛나는 생각

― 오스카리아나

 오스카 와일드 글

 박명숙 옮김

 민음사 펴냄, 2016.8.5. 9800원



  《오스카리아나》(민음사,2016)를 읽습니다. ‘오스카리아나’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가 쓴 글 가운데 환하게 빛날 만한 글을 따로 뽑아서 엮은 책에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오스카 와일드 곁님이 이러한 책을 맨 처음 내놓았고, 나중에 부피가 늘었다고 해요.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그중 누군가는 별을 바라보고 있다. (24쪽)


자신의 경험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다. (44쪽)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해 온 것은 사실 고통도 쾌락도 아닌 삶 자체다. (69쪽)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다. (182쪽)



  생각을 틔우고 삶을 밝히며 사랑을 북돋운다고 하는 ‘오스카리아나’를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누군가는 별을 바라본다”고 하는 말을 헤아립니다. 이 같은 말을 곁에 두고 늘 되새긴다면 참말로 기운이 나겠구나 싶어요. “내가 겪은 일을 나 스스로 등돌리려 한다면 나 스스로 발돋움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을 생각합니다. 참말 그렇지요. 잘 해낸 일이든 잘 하지 못한 일이든 나로서는 뜻있는 일, 경험, 살림이에요. 어떤 일을 겪든 배워요. 배우기에 앞으로 달라질 수 있고, 배우는 동안 앞으로 나아질 수 있어요.



사랑만이 누구라도 살아 있게 할 수 있다. (184쪽)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솔직히 말할 수 없다면 우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18쪽)


행복할 때는 언제나 선할 수 있다. 그러나 선하다고 해서 언제나 행복한 것은 아니다. (262쪽)


당신이 읽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다. (293쪽)



  사랑이 있기에 누구나 살아갈 수 있겠지요. 참으로 그렇다고 느낍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야 어떤 일을 할 만할까요. 사랑이 없는 채, 풀이 죽은 채, 아무 꿈도 뜻도 없는 채, 어떤 일을 즐겁게 할 만할까요.


  서로 아끼는 동무 사이라면 날카롭든 따스하든 ‘도움말’을 해 줄 수 있습니다. 입에 발린 말로는 동무 사이가 되지 않아요.


  즐거운 사람은 그야말로 착하게 산다고 느껴요. 그런데 착하다고 늘 즐겁지는 않다니, 그럴 만한가 하고 돌아보면, 착한 사람이 너무 착하기에 겪는 안타까운 일이 떠올라요. 어쩌면 착하기 때문에 고달플 수 있는데, 착한 사람은 고달픈 일을 겪어도 이 고달픈 일을 ‘살아가는 밑거름’으로 삼겠지요.



우리 시대에는 사람들이 책을 너무 많이 읽다 보니 감탄할 시간이 없고, 글을 너무 많이 쓰다 보니 생각할 시간이 없다. (301쪽)


모든 사물은 우리가 보고 있기에 존재하고,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예술에 따라 달라진다. (365쪽)


상상력은 곧 세상을 비추는 빛이다. (404쪽)



  “내가 읽는 것은 바로 나”라는 말을 되새깁니다. “생각이 온누리를 비춘다”는 말을 곱씹습니다. “내가 바라보기에 뜻이 있고, 내가 이름을 붙여 주기에 값이 있다”고 할 만해요.


  그러면 우리는 나를 어떻게 읽고, 나를 어떻게 가꿀 적에 아름다운 삶이 될까요? 온누리를 비춘다는 ‘생각’이라면, 우리는 우리 생각을 어떻게 북돋우거나 살찌울 적에 사랑스러운 지구별로 거듭나는 길을 걸을 만할까요?



학교는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가 되어야 한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의무를 다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다음날 학교 가는 걸 금지하는 것이 그들에게 내리는 벌이 되게 해야 한다. (423쪽)


최악의 노예 소유주는 자신의 노예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사람이다. 그럼으로써 노예 제도로 고통받는 이들이 그 제도의 끔찍함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그 제도를 고찰하는 이들이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512∼513쪽)



  《오스카리아나》는 한글하고 영문을 나란히 적어 놓습니다. 번역이 내키지 않는다면 영어로 찬찬히 읽으면서 뜻과 느낌을 새롭게 짚을 수 있어요.


  짤막한 글도 길게 적은 글도, 하나하나 환하게 빛나면서 마음밭에 고이 스며들 만하다고 봅니다. 오스카 와일드 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수많은 나날을 보내며 수많은 생각을 이녁 마음속에 담았기에 이처럼 환한 말마디를 펼칠 수 있었으리라 느껴요.


  마음을 살찌우는 말이 있어서 참말로 마음을 기쁘게 살찌웁니다. 생각을 일으키는 말이 있어서 참으로 생각을 따스히 일으켜요.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말을 혀에 얹으면서 나 스스로 아름답게 거듭나자고 생각합니다. 사랑스러움을 어루만지는 말을 눈앞에 그리면서 나 스스로 사랑스럽게 움직이자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우리 스스로 삶을 짓는 결에 맞추어 ‘말잔치’를 이루고 ‘말빛’을 뽐내며 ‘말꽃’을 피울 수 있을 테지요. 말 한 마디로 잔치가 되고, 말 한 마디로 빛나며, 말 한 마디로 곱게 피어나는 생각이자 삶이요 사랑이고 꿈이라고 느낍니다. 2016.10.3.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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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라이트 밀스 - 실천적 지식인과 사회학적 상상력
데니얼 기어리 지음, 정연복 옮김 / 삼천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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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68



빵을 손수 굽지 않는다고 동무를 나무란 사회학자

― C. 라이트 밀스

 대니얼 기어리 글

 정연복 옮김

 삼천리 펴냄, 2016.8.28. 28000원



  찰스 라이트 밀스, 또는 C. 라이트 밀스(1916∼1962)로 알려진 미국사람이 쓴 책으로 《들어라 양키들아》나 《제3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나 《사회학적 상상력》이나 《파워 엘리트》나 《화이트칼라》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한국에 나왔습니다. 《C. 라이트 밀스》(삼천리,2016)라는 책은 바로 이 사회학자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을 이녁이 남긴 글하고 책으로 돌아보면서 ‘왜 미국에서 사회학인가?’를 묻고, ‘지식인 한 사람이 글쓰기와 강연 말고 무엇으로 사회를 바꾸는 밑힘이 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밀스는) 오토바이를 직접 고쳤고, 자기가 살아온 집 가운데 두 채를 함께 지었으며, 자신이 먹을 빵을 스스로 굽지 않는다고 친구들을 몹시 나무랐다. (11쪽)


밀스가 보기에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사고 과정이라는 개념이 자신들이 처한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 나온다는 점, 그리고 어디에나 다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더욱이 생각이 사회 현실을 반영한다는 일반적 진술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용주의자들은 특정 개인의 사고가 어떻게 특정한 사회구조 속에서 일어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지침을 제공하지 못했다. (44쪽)



  사회학자는 사회를 읽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회를 읽기만 한대서 사회학자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사회를 읽으면서 이 사회가 나아갈 길을 새롭게 밝히는 슬기를 품거나 가꿀 때에 비로소 사회학자이지 싶습니다. 사회학 논문을 내거나 책을 쓰기에 사회학자가 아닐 테지요. 사회비평을 할 줄 알기에 사회학자가 아닐 테고요.


  오늘날 사회가 어떤 모습인가를 읽고, 지난날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헤아리며, 앞으로 맞이할 사회는 어떤 모습일 때에 다 같이 아름다운 삶터를 이룰 수 있는가를 내다볼 때에 비로소 사회학자이지 싶습니다. 지식이 있기에 지식인이 아니라, 지식을 다룰 수 있기에 지식인이며, 지식을 새로 짓고 나누면서 이 지식으로 삶을 꿈꾸는 숨결이어야 비로소 지식인이라고 할까요.



밀스의 전쟁 반대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과 이후 미국 사회를 특징짓게 만들 중요한 경향들을 직시하게끔 했다. 이를테면 행정부 안에서의 정치권력 집중, 대기업과 연방정부의 협력, 미국의 군사주의화가 그러했다. (110쪽)


밀스가 보기에 지식인들은 남의 의지에 따라 뭔가 결정되는 ‘캐치-22’에 직면해 있었다. 통치 제도 안에서 권력의 자리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비판적 독립성과 그 결과 진리에 도달하는 길, 다시 말해 스스로 진정한 지식인으로 존재하는 길을 잃고 말 것이다. (120∼121쪽)



  밀스라는 분은 집을 손수 지었다고 합니다. 밀스라는 분은 스스로 먹는 밥(빵)을 손수 구웠다고 합니다. 이밖에 또 무엇을 손수 했을까요? 아쉽게도 《C. 라이트 밀스》라는 책에서는 이 대목을 더 다루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밀스라는 분이 쓴 글하고 책에서 사회학이 삶을 살리는 실마리를 찾으려 합니다. 밀스라는 분이 손수 지은 삶이나 살림에서는 따로 사회학을 이루는 바탕을 찾지는 않아요.


  책 첫머리에 짤막하게 나온 대목이지만, 이 책 《C. 라이트 밀스》를 읽으면서 이 대목을 퍽 눈여겨보아야겠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남자 사회학자’나 ‘남자 지식인’은 집안일이나 집살림을 어떻게 하는가 하고 맞대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깥일이 바쁜 나머지 집안일이나 집살림에는 데면데면하다면, 집 바깥에서 외치는 목소리에 얼마나 깊거나 큰 힘이 실릴 만할까 궁금해요. 평화도 평등도 민주도 언제나 여느 집살림에서 비롯해서 사회로 뻗을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해요.


  집을 짓는 사회학자나 철학자가 되고, 밥(빵)을 짓는(굽는) 경제학자나 교육학자가 되며, 빨래를 하고 아이를 돌보는 국회의원이나 군수나 시장이 된다면, 우리 사회는 한 걸음 나아가거나 새롭게 거듭날 만하지 싶습니다. 책상맡에만 머물지 않고 밭자락하고 부엌에서 살림을 짓는 길을 걷는 지식인이 늘어날 적에 사회도 문화도 교육도 아름다워지지 싶어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사람들한테서 “위신을 빌려온다”고 밀스는 주장했다 … 밀스한테 가장 큰 두려움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그 어떤 소외감도 경험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만일 인간의 본성에 무한히 융통성이 있다면,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어쩌면 현대의 억압적 관료 조직이 만들어낸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상징할 거라고 밀스는 생각했다. 그것은 곧 “명랑한 로봇”이었다. (221, 224쪽)



  그러나 지식인만 집살림을 할 수 있어야 하지는 않겠지요. 여느 회사원이나 공무원도 집살림을 즐겁게 가꾸는 숨결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우리 누구나 아름다운 평화와 평등을 헤아리고, 즐거운 평화와 평등을 생각하며, 사랑스러운 평화와 평등을 꿈꾸는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할 테고요.


  밀스라는 분은 사회학을 밑바탕으로 삼아서 여러 가지 책과 글을 썼습니다. 사회학을 밑바탕으로 두면서 ‘아름다운 미국’이 되기를 바라는 뜻을 펼쳤어요. 군사강대국 미국이 아닌 아름다운 미국을 바란 사회학입니다. 경제강국 미국보다는 아름다운 평화를 이루는 미국을 바란 사회학이에요.


  한국 사회에는 어떤 사회학이 있을 때에 아름다울까요. 한국 사회는 군대와 전쟁무기를 어떻게 바라볼 때에 아름다울까요. 한국 사회는 아직도 경제발전에 너무 얽매이면서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삶이나 살림하고 자꾸 멀어지지 않을까요.



밀스는 진리를 말하고 불의한 권력에 맞서야 할 지식인들의 특별한 책임을 늘 강조했지만, 이제 간청의 범위를 넓혀 보다 큰 사회 계층에게 호소했다. 따라서 밀스는 〈어느 이교도의 설교〉에서 목사들에게 “왜 당신들 스스로를 중요 인물로 만들지 않습니까? 왜 당신들은 회중, 즉 도덕을 지향하며 도덕적으로 서 있는 신도들의 모임을 공개 토론장으로 만들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했다. (332쪽)



  정치권력하고 가까운 사회학이 있을 때하고, 수수한 사람들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사회학이 있을 때를 생각해 봅니다. 정치권력을 비판할 줄 모르는 사회학이 있을 때하고, 수수한 사람들하고 길벗이 되는 사회학이 있을 때를 생각해 봅니다. 사회학뿐 아니라 교육학이나 인문학도 정치권력을 고분고분 따를 적에는 학문다운 학문이 되기는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옳은 길을 살피고, 바른 길을 북돋우며, 고운 길을 가꿀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학문다운 학문이 된다고 느껴요. 학문이 바로서면서 삶이 바로설 때에 사회가 나아지겠지요? 《C. 라이트 밀스》를 덮으면서 한국 사회에는 어떤 뜻있고 듬직하며 당찬 사회학자가 있었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앞으로 한국 사회에는 어떤 젊은이가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사회학자로 우뚝 설 만할까 하고 헤아립니다. 2016.9.18.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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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정말, 아무 말이나 다 믿는구나 - 지적 자기방어를 위한 매뉴얼
소피 마제 지음, 배유선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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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67



‘따지는 목소리’가 사회를 바꾼다

― 너희 정말, 아무 말이나 다 믿는구나!

 소피 마재 글

 배유선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2016.8.22. 15000원



  프랑스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며 ‘지적 자기방어 교실’을 꾸리기도 한다는 소피 마재 님이 쓴 《너희 정말, 아무 말이나 다 믿는구나!》(뿌리와이파리,2016)는 책이름처럼 어린이나 푸름이가 ‘아무 말이나 다 믿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왜 이렇게 되었나를 돌아보는 인문책입니다. 글쓴이는 자꾸자꾸 묻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말을 믿느냐고 묻습니다. 책에 적힌 말이라면 다 믿을 만하느냐고 묻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면 모두 믿을 만하느냐고도 묻습니다. 교사가 들려주는 말이라면 다 믿어야 하느냐고도 물어요.



내 마음을 가장 답답하게 한 것은 아이들에게 비판 정신이 결여되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 비판력을 제대로 발휘할 줄 모른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15쪽)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매번 같은 ‘전문가’들이 초대되는 것은 그들의 실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능하단 뜻이 아니라, 그들 못지않게 유능한 다른 이들도 많다는 의미다. 다만 초대되는 전문가들은 방송 책임자들의 기준에 맞는 큰 장점을 갖고 있다. 부르면 응답한다는 것이다. (32∼33쪽)



  아이들이 무엇을 믿고 안 믿어야 하는가를 가리기란 만만하지 않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학교라고 하는 곳은 ‘아이들이 믿을 만한 이야기’를 가르치는 자리로 서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믿지 못할 만하다거나 배울 만하지 않은 이야기를 가르친다면 학교가 학교일 수 없겠지요.


  그런데 때로는 ‘정치권력 입맛에 맞추는 교과서’가 나오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교과서 때문에 말썽이 생기기도 하지만, 지난날에는 버젓이 대놓고 ‘정치권력 입맛에 맞추기’가 일어났어요. 이를테면 ‘국민교육헌장’이 있고, ‘반공 웅변대회’가 있어요. 새마을운동을 벌이던 때에는 ‘제비집 헐기’를 으레 하기도 했으니, 이런 여러 가지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치려는 몸짓이 되었을까요.



우리의 시각은 ‘우리 머릿속 이미지들’의 집합에 따라 형성된다. 언론이 보여주는 불완전한 허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 인식 속 현실을 만들어낸다. (37쪽)


드라마 한 편이 유권자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드라마를 통해 메시지를 퍼뜨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거액이라도 기꺼이 지불할 의사가 있다면 또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할까? (67쪽)



  예전부터 학교에서는 교과서로 ‘원자력 발전소는 가장 깨끗한 전기를 얻도록 한다’고 가르쳤어요. 그러나 이렇게 가르치면서도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쓰레기(폐기물)는 너무 무시무시하고 너무 오래 가기 때문’에 ‘폐기물 처리’에 어마어마한 시간과 돈이 든다고 했으며, 자칫 방사능이 조금이라도 새어나오면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는다고 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가 터질 일이 없다고 그토록 가르쳤으나 막상 원자력 발전소가 터지고 말았어요.


  무엇이 참일까요. 무엇이 거짓일까요. 무엇을 읽고 듣고 생각하면서 알아야 할까요. 무엇을 믿고 어떤 살림을 지어야 할까요.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어떤 이야기를 가르치고 어떤 삶터를 물려줄 수 있어야 할까요.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제대로 된 정보나 지식을 골고루’ 알려주거나 보여주기는 할까요? 이제는 거짓말이 뻔히 드러난 ‘4대강 살리기 사업’인데, ‘살리기’가 아닌 ‘죽이기’를 했는데에도 수많은 언론과 책은 그동안 ‘살리기’를 했다고 외쳤어요.



집단행동과 과민 반응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대장균 감염으로 갑작스러운 사망자가 속출해서일까, 아님 언론의 부채질 때문일까? 둘 다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둘 점은 우리 먹거리의 생산지인 ‘자연’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비이성적 공포로 치닫게 된다는 사실이다. 불안해 할 이유가 없을 때조차도. (130쪽)


그린워싱 광고 문구에서 말하는 ‘행동’이란 것은 결국 구매 행위다. (139쪽)



  《너희 정말, 아무 말이나 다 믿는구나!》에서 말하기도 하는데,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자연에서 멀어지’면서 ‘내가 먹는 밥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자꾸 잊습니다. 손수 씨앗을 심고 길러서 먹는 밥이 아니라, 돈으로 사다가 먹는 밥이 되는 흐름이기 때문에 ‘조류독감’을 비롯한 이야기가 떠돌 적에 ‘소비자인 도시사람으로서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어요.


  전기에서도 이와 비슷하지요. 더운 여름에 에어컨을 쓸 수밖에 없다는 사람이 늘어나지만, 정작 전기를 자가발전이나 마을발전으로 얻지 못합니다. 시골에 커다랗게 지은 발전소에서 끌어들이는 전기인 터라 ‘엄청난 전기세’를 한여름에 떠안아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해요.


  자,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믿을 수 있어야 할까요? ‘도시에서 살며 자연이나 시골이 깨끗하도록’ 하자면, 이리하여 ‘도시에서 살며 먹는 모든 것이 깨끗하도록’ 하자면 어떻게 하는 길을 걷거나 어떤 지식을 익혀야 할까요? ‘도시가 안전하도록’ 원자력 발전소나 커다란 발전소나 위해시설을 ‘도시 바깥인 시골’에 짓기 마련인데, 시골이라는 터전은 바로 ‘도시사람이 먹는 모든 것을 짓는 터전’이기도 해요.


  원자력 발전소나 위해시설이 들어서기를 반대하는 ‘작은 시골 작은 사람들 목소리’를 섣불리 지역이기주의로 몰아세워도 될까 하는 대목을 생각해 보아야지 싶습니다. 그리고 발전소나 위해시설을 ‘도시 바깥에 두어 도시를 안전하게’ 한다는 길이 참말로 ‘도시나 시골 모두한테 안전할’ 만한지도 생각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언론에서 내놓는 자료나 정보에 기대지 않고, 우리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전형적인 것들은 우리 마음을 안심시킨다. 아무것도 비판하거나 고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152쪽)


함부로 특정 집단을 낙인 찍어 놓으면 나중엔 그들이 ‘정말로 우리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학대와 낙인은 결국 한 끗 차이다. (197쪽)



  예방주사를 놓고도 여러모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방주사가 있기에 돌림병이나 큰병을 미리 막을 수 있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러나 예방주사를 만들 적에 수은이나 포르말린이나 알루미늄 같은 성분이 쓰인다는 대목을 따져 볼 수 있습니다. 화장품이나 세제에서도 우리 몸에 나쁜 성분이 있다는 이야기가 불거지는데, 이뿐 아니라 예방주사 성분을 꼼꼼히 따지지 않고 ‘예방주사는 꼭 맞아야 한다’고 말하는 일이 얼마나 올바른가 하는 대목을 이야기해 볼 수 있어요.


  한때 ‘공장 두부’는 응고제나 소포제나 유화제 같은 것을 모두 쓰면서 ‘성분을 안 밝혔’지만 요즈음은 ‘공장 두부’도 응고제나 소포제나 유화제를 썼는가 안 썼는가를 반드시 밝힙니다. 두부면 그냥 다 두부가 아니지요. GMO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정부나 기업이나 언론이 밝히는 자료만 고스란히 믿으면서 살아야 한다면 ‘예방주사에 든 수은 성분’은 달라지지 않을 테고, ‘라면 msg’나 ‘두부 응고제·소포제·유화제’ 대목도 달라지지 않을 테지요.


  누군가 ‘저 말은 뭔가 안 믿음직한데?’ 하고 느끼면서 ‘새롭게 생각’을 하기에 비로소 달라지는 길이 열린다고 느껴요. 무턱대고 믿는 몸짓이 아닌 따지는 목소리가 될 때에 비로소 사회를 바꾸는구나 싶습니다.


  프랑스 교사가 쓴 《너희 정말, 아무 말이나 다 믿는구나!》를 읽다 보면,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어린이나 푸름이가 참말로 ‘매체에서 말하는 대로’ 믿거나 따르는 얼거리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학교에서 더 잘 가르치고 더 슬기롭게 가르칠 수 있어야겠다고 느낍니다. 학교가 입시지옥이 되지 말고, 학교가 아름다운 배움터가 될 수 있어야지 싶어요. 학교가 자격증을 따도록 돕는 곳이 되기보다는, 학교가 사랑스러운 꿈터요 이야기터가 될 수 있어야지 싶고요. 2016.9.11.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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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허만하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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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66



십 리 밖 나락 냄새를 맡는 한가을에

― 낙타는 십 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허만하 글

 최측의농간 펴냄, 2016.8.12. 12000원



  한낮에 돌담을 타고 올라가서 무화과를 땁니다. 큰아이가 아버지 뒤에 서서 소쿠리를 들고 기다립니다. 말벌이 웅웅거리면서 무화과 단물을 핥고 무화과 속살을 파먹습니다. 말벌 날갯짓 소리를 가만히 들으면서 통통한 무화과를 땁니다. 한손에 두 알씩 따서 큰아이한테 건네고, 소쿠리가 그득하게 차는구나 싶으면 그만 땁니다.


  새롭게 접어든 구월에 무화과를 따면서 즐겁습니다. 철마다 다른 열매를 땅에서 얻고, 달마다 새로운 열매와 남새를 흙에서 얻습니다. 큼큼 달달한 냄새를 맡으면서 즐거운 선물을 얻습니다.


  구월이 깊어지고 시월로 넘어설 즈음에는 온 들판을 채우는 나락 냄새가 고소해요. 이런 나락 냄새는 집에서도 맡습니다. 마을논에서도 나락 냄새가 퍼지고, 먼 들판에서도 바람에 실려 나락 냄새가 흩어집니다. 한가을에는 아마 십 리뿐 아니라 백 리까지도 샛노란 나락 냄새가 두루 퍼지리라 느낍니다.



사막을 가는 낙타는 십 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이것은 작년 폐암으로 이 세상을 하직한 한 병리학자의 말이다.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 아름다운 말이다. (19쪽)


돌아오면서 시란 이름 없는 일상 속에서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가 사라지는 삶의 번득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7쪽)



  병리학 박사이면서 시인이기도 한 허만하(1932년에 태어남) 님이 쓴 산문책 《낙타는 십 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최측의농간,2016)를 읽습니다. 이 산문책은 2000년에 한 번 나온 적이 있으나 널리 읽히지 못한 채 조용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최측의농간 출판사는 이 살가우면서 애틋한 산문책이 새롭게 읽힐 수 있기를 바라면서 새롭게 펴냈다고 합니다. 지난날에는 사랑스러운 손길을 널리 받지 못했어도 이제부터는 사랑스러운 손길을 널리 받을 수 있기를 꿈꾸면서 기쁘게 펴냈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날개를 단 천사가 하늘을 나는 쪽이 당연하다. 그러나 어깨에 날개를 달아야만 날 수 있다는 빽빽한 이야기는 정확하기는 하나 자연스럽지는 않다. (139쪽)


정년퇴직은 나에게 나의 시간을 찾아 주었다. 미친 듯이 책을 읽어야지. (194쪽)



  사막에서 낙타가 맡는 물 냄새를 헤아려 봅니다. 온통 모래만 보일 법한 사막이지만, 그 사막에서 낙타는 온몸을 곤두세워서 물 냄새를 좇으려 하겠지요. 숲에서는 숲짐승이 저마다 먹이를 찾으려고 무척 먼 데 떨어진 냄새를 좇으려 할 테고요. 새끼를 낳은 짐승이라면 제 새끼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새끼 냄새를 맡으리라 생각해요.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이 아무리 먼 데 있어도 어버이는 아이들 마음을 읽지 싶어요. 아이들도 저희 어버이가 아무리 먼 데를 다녀오더라도 어버이 마음을 읽지 싶고요.


  떨어진 자리는 그저 떨어질 자리일 뿐일 테니까요.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면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사랑하는 숨결이 같아요. 가까이에 있기에 더 사랑스럽지 않고, 멀리 있기에 덜 사랑스럽지 않아요.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으로 아끼거나 보살필 수 있기에 비로소 사랑이지 싶습니다.


  낙타가 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바탕도 물 한 모금을 온몸으로 바라는 애틋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그리고 아이가 어버이를 그리는 숨결도 서로 살가이 어우러지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 싶어요. 그리고 이러한 사랑처럼 ‘조용히 사라진 책 한 권’을 새롭게 옷을 입혀 되살리려고 하는 책마을 일꾼 손길이 있어서 《낙타는 십 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구나 싶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시인이 탄생한 것은 인간이 최초로 개념을 발견한 그 순간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개념을 발견한 그때가 곧 말이 꿈을 읽기 시작한 그 순간이고, 또 그 순간부터 말은 꿈과 개념이 하나였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숙명의 에너지를 지니게 된 것이라고. (232쪽)


그가 찾아 헤매었던 것은 살며 숨쉬며 있어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시라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해 본다. (250쪽)



  병리학 박사이자 시인인 허만하 님은 ‘산문’을 쓰면서 ‘시’를 노래하려 합니다. 사람들 삶을 밝히는 시 한 줄을 산문 한 줄로 찬찬히 되새기면서 말넋을 헤아리려 합니다. 먼발치에 있는 듯하지만 늘 가까이에 있고, 가까이에 있구나 싶더니 저 먼 데에서 어렴풋하게 번지는 가느다란 물 냄새 같은 시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옹알옹알 말을 새로 익히는 아기는 배냇짓으로 시를 그립니다. 두 다리로 서고, 두 발로 걸으며, 두 팔로 춤추고 뛰노는 아이들은 온몸으로 시를 씁니다. 머리통이 굵고 조잘조잘 떠들 줄 알며 글을 익혀서 혼자 책까지 읽어내는 어린이는 맑은 눈빛과 환한 웃음으로 시를 들려줍니다.


  어버이는 밥 한 그릇을 차리는 손길로 시를 보여줍니다. 어버이는 옷 한 벌을 짓거나 손질하거나 빨래하는 손길로 시를 보여줍니다. 어버이는 집살림을 건사하고 집일을 보듬는 손길로 시를 보여줍니다. 호미를 쥐어 밭을 일구는 손길도 시쓰기입니다. 괭이를 쥐어 땅을 갈아엎는 손길도 시쓰기입니다. 마늘을 뽑고 씨감자를 묻으며 고구마싹을 놓는 손길도 시쓰기입니다. 깨를 털고 콩을 훑는 손길도 모두 시쓰기예요.



솔바람 소리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모래 쓸림 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구에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의 바다를 생각했다. 시의 탄생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그것이 번득이는 일순의 계시인지 풀잎에 맺히는 이슬 같은 증류작용의 결과인지는 알 길 없으나, 시는 말을 재료로 하는 끊임없는 새로운 현실 만들기다. (341∼342쪽)



  십 리 밖 나락 냄새를 맡는 한가을에 《낙타는 십 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를 읽으면서 시를 생각합니다. 삶을 밝히는 말 한 마디로 짓는 시 한 줄은 우리 가슴을 어떻게 촉촉히 적시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시는 때때로 이슬이 되고 구름이 되며 바람이 됩니다. 시는 때로는 해님이 되고 달님이 되며 별님이 됩니다. 시는 곧잘 꽃이 되고 나무가 되며 풀이 됩니다. 그리고 시는 이 모두가 되어 우리 곁에서 아름다운 말 한 마디로 피어납니다.


  시인이기에 시를 노래합니다. 시인이 아니어도 시를 사랑합니다. 시인이기에 시 한 줄을 씁니다. 시인이 아니어도 시 한 줄을 읽습니다. 시인이기에 시집 한 권을 곁에 둡니다. 시인이 아니어도 온마음으로 말넋을 가꾸어 시처럼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가을바람이 싱그럽습니다. 2016.9.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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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 - 잊혀지는 신앙과 사라진 신들의 역사 지도에서 사라진 시리즈
도현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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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67



오래된 나무를 섬기던 리투아니아 사람들

―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

 도현신 글

 서해문집 펴냄, 2016.8.13. 13900원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는 수메르나 바빌론에서 이루어진 종교, 또 미르라교나 조로아스터교, 만주족이나 오나족이 품은 종교, 여기에 핀란드나 몽골 옛 믿음을 두루 살피는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서해문집,2016)입니다. 이 책은 ‘지도에서 사라진’이라는 대목에서 여러 종교를 살핍니다. 오늘날 같은 ‘나라’를 이룬 사회 얼거리에서 설 자리를 잃거나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아 버린 ‘오랜 믿음’이 무엇인가를 다룹니다.



(수메르 신화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을 대신해 힘든 노동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19쪽)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라 하더라도 지도에서만 사라졌을 뿐, 이러한 종교가 무엇을 바탕으로 생겨났고 어떠한 생각을 담으며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 스몄는가 하는 대목은 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수메르 옛이야기뿐 아니라 여러 ‘오랜 믿음’에서 흔히 나오기를 ‘신이 사람을 지은 까닭’은 ‘종(노예)으로 부려서 일을 시키려는 뜻’이었다고 해요.


  사람이 무슨 ‘종’인가 하고 되물을 만할 텐데, 어느 모로 보면 오늘날 우리 모습도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신을 섬기는 종’과 같았다면, 오늘날에는 ‘돈(자본주의)을 섬기는 종’과 같거든요. 돈 때문에 신분이나 계급이 갈리고, 돈 때문에 고단하거나 힘겨운 살림이어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으로 예배당을 어마어마하게 올리고, 돈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짓도 곳곳에서 일어나요.



물리적 힘이 아니라 음악을 사용해 고비를 넘기는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마치 마법 같다. 실제로 고대인들은 신의 경지에 이른 최고의 음악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동물과 식물을 매료시키며 날씨마저 조종한다고 믿었다. (33쪽)



  오르페우스 이야기가 아니어도 ‘노래’는 우리 마음을 따스하게 달래거나 포근히 감싸 준다고 느낍니다. 풀이나 나무한테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면 참말로 풀이나 나무도 잘 자란다고 과학 연구로도 나와요. 시끄러운 소리를 늘 들어야 하는 풀이나 나무는 잘 자라지 못할 뿐 아니라 일찍 시들어 죽기까지 한다지요. 그러니 아주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지어서 부르거나 들려주는 노래는 ‘사람 마음을 움직일’ 뿐 아니라 ‘신까지 움직일’ 만하리라 봅니다.



조로아스터교는 물과 흙과 불은 신성한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물에 빠뜨리거나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지 못하도록 했다. 시체로 인해 자연이 더럽혀진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58쪽)


기독교 선교사들은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제국도 기독교를 믿었으니 당신들도 기독교를 믿으면 로마와 친구가 되어 뛰어난 문명이 주는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119쪽)



  한겨레한테는 어떤 오랜 믿음이 있을까요? 한겨레한테도 마을마다 집집마다 오랜 믿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오랜 믿음은 조선 사회 유교를 지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몹시 짓밟힙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이 퍼지면서 아예 뿌리까지 뽑히고요. 서낭도 장승도 지킴이도 모두 자취를 감추어요. 조로아스터교는 물과 흙과 불은 거룩하다고 가르쳤다는데, 종교라는 이름이나 옷을 입지 않은 수많은 겨레 수많은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물도 흙도 불도 고이 아끼고 섬겼어요. 비를 섬기고 땅을 섬기며 하늘과 해를 섬겼어요. 종교라기보다는 ‘숲을 가꾸고 숲에서 살림을 지으며 숲에서 옷밥집을 얻는 동안’ 물이나 흙이나 불은 참말로 고이 아끼면서 섬길 수밖에 없지요.



리투아니아인들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처럼 신전을 만들지 않았다. 그 대신 깊은 숲속에 들어가 가장 크고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 한 그루를 골라서 신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성스러운 도구로 삼았다. (175쪽)


아즈텍 신앙의 사제들은 지금 인류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미 네 번이나 멸망했다가 다시 재생되었으며, 현재 다섯 번째 세상도 머지않아 멸망하고 여섯 번째 세상이 새로 들어선다고 믿었다. (186쪽)



  리투아니아사람은 ‘오래된 나무’를 거룩히 여겼다고 해요. 그러고 보면 한겨레도 옛날부터 오래된 나무를 거룩히 여겼습니다. 마을마다 ‘마을나무’가 있어요. 마을에는 ‘숲정이’라고 하는 자리를 알뜰히 돌보았습니다.


  아마 인도네시아에서도 베트남에서도 버마에서도 필리핀에서도 ‘오래된 나무’ 한 그루는 마을마다 집집마다 거룩한 숨결이 되어 살림을 지키거나 감싸 주는 구실을 했지 싶어요. 높은 봉우리도, 커다란 바위도, 우람한 골짜기와 폭포와 냇물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저마다 우리를 돌보거나 보듬는 숨결이라고 여겼지 싶어요.



옛 사람들은 사람의 말에 힘이 담겨 있다는 이른바 언령言靈 신앙을 믿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도 그렇다. (238쪽)


테마우켈은 기본적으로 하늘의 신이지만, 언제든지 땅 위와 지하세계로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는 인간들에게 자신이 내린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엄격하게 명령했다. (289쪽)



  도현신 님이 쓴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은 이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만 수많은 종교를 살피면서 ‘종교라는 이름’에 깃든 오랜 살림과 이야기를 짚어 봅니다. 종교라는 이름을 넘어서 오랜 옛날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삶을 가꾸고 살림을 지으면서 마음자리를 정갈히 다스리도록 이끌던 넋이란 무엇인가를 건드리려 합니다.


  다툼이나 싸움으로 일삼는 삶이 아닌, 스스로 즐겁게 누리려는 삶을 꿈꾸면서 조그맣게 믿음을 이루어요. 평화로우면서 사랑스러운 살림을 바라면서 이 바람을 하나둘 엮어 자그맣게 믿음이 태어나요.


  사제나 예배당이 없이 얼마든지 아름답게 어깨동무를 하고 이야기를 누리던 옛사람들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책이나 경전이 아니어도 서로서로 마음으로 아끼고 섬기던 사람들이 빚은 고운 이야기를 헤아려 봅니다. 문득 돌아보면 ‘지도에서 사라진’ 것은 ‘종교’일는지 모르나, 우리 마음속에는 언제나 아름다움과 꿈과 사랑이 새롭게 피어나면서 흐르리라 봅니다. 2016.8.27.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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