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하루꽃 . 묻다



해가 환하게 나면 풀과 나무는 잎을 활짝 열어. 어제 해를 쬐었으니 오늘은 안 쬐어도 되지 않아. 어제 숨을 쉬었으니 오늘은 숨을 안 쉬어도 되겠니? 구름이 해를 가리면 풀과 나무는 가만히 잎을 오므리면서 ‘지난해(어제나 그제나 그끄제 햇볕)’를 되새겨. 해를 쬐며 얼마나 즐겁고 반가운지 돌아보지. 그리는 마음이기에 눈앞에서 이루는 날까지 꿈을 지켜본단다. 그리면서 새록새록 꿈을 곱씹는 동안, 스스로 속깊이 밝게 자라고 움틀 수 있어. 어느 풀이나 나무이든 해한테 토라지거나 성내지 않는단다. 해가 안 나면 안 날 뿐이고, 비가 오면 비가 올 뿐이고, 밤이 이슥하면 그저 잘 뿐이야. 사람들은 무엇을 보며 무슨 마음이고 무슨 말을 하니? 사람으로서 이미 ‘하늘빛’을 마음에 놓고서 몸에 담은 줄 느끼고 알아보는 하루일까? 사람으로서 언제나 ‘하늘꿈’으로 피어날 씨앗을 몸마음에 고루 새기는 줄 알아채는 삶일까? 사람으로서 누구나 다르면서 즐겁게 몸으로 배우고 마음으로 익혀서 넋으로 가꾸는 줄 살피는 길일까? 흙묻은 손에서는 흙냄새가 나. 모든 씨앗을 돌보는 흙빛을 손에 고루 담으니, 이 손으로 살림을 빚어서 사랑을 펴. 모든 풀나무가 아늑히 안기는 흙숨을 손에 두루 옮기니, 이 손으로 이야기를 일궈서 서로 도란도란 말씨를 주고받아. 흙묻지 않은 손에는 흙냄새가 안 밸 텐데, 흙냄새를 안 맡고서 밥을 먹어도 너 스스로 빛나거나 아름다울는지 돌아보렴. 흙투성이가 되라는 소리가 아니야. 모든 꽃은 흙에 뿌리내린 풀과 나무가 곱게 피우지? 사람이 사람빛을 밝게 피우려면, 발바닥으로 흙바닥을 디디면서, 손바닥으로 흙알갱이를 조물조물 매만질 노릇이란다. 흙묻고 물묻고 비묻고 잎묻기에 즐거운 손이야. 2026.4.18.흙.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열두 달 소꿉노래》,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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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알량한 말 바로잡기

 시동 尸童·侍童


 시동으로 일했다 → 심부름을 했다 / 심부름꾼이었다

 시동으로 삼 년간 보냈다 → 곁꾼으로 세 해를 보냈다


  ‘시동(尸童)’은 “예전에, 제사를 지낼 때 신위(神位) 대신으로 앉히던 어린아이”를 가리키고, ‘시동(侍童)’은 “귀인(貴人) 밑에서 심부름을 하는 아이 ≒ 시수”를 가리킨다는군요. 둘 모두 ‘심부름·잔심부름’이나 ‘심부름꾼·심부름이·심부름님’으로 고쳐씁니다. ‘곁들다·곁들이다·곁들이·곁들임’이나 ‘곁바라지·곁사람·곁일꾼’이나 ‘곁잡이·곁꾼·곁일지기·곁도움이’로 고쳐써도 됩니다. ‘아이’라고만 고쳐써도 되어요. ㅍㄹㄴ



저는 왕궁에서 시동으로 일하고 있어요

→ 저는 임금집에서 일하는 아이예요

→ 저는 임금채에서 곁들이로 있어요

→ 저는 큰집에서 심부름꾼으로 있어요

《불의 용의 나라 1》(이시이 아스카/이상은 옮김, 학산문화사, 2025)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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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천하다 賤


 천한 가문 → 낮은 집안 / 하찮은 집 / 얕은 집안

 천해 빠진 시계 → 낡아빠진 바늘 / 흔해빠진 때바늘

 천해 보이는 얼굴 → 못나 보이는 얼굴 / 못생긴 얼굴

 행실이 천하다 → 몸짓이 추레하다 / 하는 짓이 더럽다

 온갖 천한 짓을 → 온갖 나쁜 짓을 / 온갖 미운 짓을


  ‘천하다(賤-)’는 “1. 지체, 지위 따위가 낮다 2. 너무 흔하여 귀하지 아니하다 3. 하는 짓이나 생긴 꼴이 고상한 맛이 없다”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낮다·나지막하다·나직하다·낮디낮다·낮고낮다’나 ‘낮잡다·낮추잡다·낮추다·낮춤질·내려다보다·내려보다’로 손봅니다. ‘나쁘다·나쁜빛·나쁜결·나쁜것·나쁜꽃’이나 ‘처지다·초라하다·추레하다·후줄근하다·후줄그레하다·호졸곤하다·후지다’로 손봐요. ‘크잖다·크치않다·크잘것없다·하찮다·하치않다·하잘것없다·흔하다·나뒹굴다·널리다’나 ‘하릴없다·한 치 앞도 못 보다·허름하다·허술하다·허수룩하다·허룩하다·헐다’로 손보고요. ‘낡다·낡삭다·낡으스름하다·낡아빠지다·낡은것·낡은길·낡은물·낡은틀’이나 ‘다랍다·더럽다·던적스럽다·더럼길·더럼짓·지저분하다·지지리’로 손볼 만합니다. ‘덜떨어지다·뒤처지다·떨떨하다·떨어지다·떨구다·떨어뜨리다·띨띨하다’나 ‘못나다·못난이·못난것·못난놈·못난치·못생기다·못쓰다’로 손보며, ‘밉다·밉살맞다·밉살스럽다·밉질·밉짓’으로 손봅니다. ‘사납다·사납빼기·사납이·사납꾼·사납질·사납짓’이나 ‘깎다·깎이다·깎아내다·깎아치다·깎아내리다·깎음질·깎음짓·깔보다’로 손볼 수 있어요. ‘마구·마구마구·마구잡이·마구하다·막하다’나 ‘꼴같잖다·꼴사납다·꼴없다·몰골사납다·몰골스럽다’로 손보고요. ‘눈꼴시다·눈꼴사납다·눈꼴틀리다’나 ‘볼꼴사납다·볼꼴없다·볼썽사납다·볼썽없다·볼품사납다·볼품없다’로 손봐도 되고, ‘얄궂다·얄딱구리하다·얄망궂다’로 손봅니다. ‘얕다·얕보다·얕잡다·얕잡아보다·뿌리얕다’나 ‘어지럽다·어지르다·어지럽히다’로 손보지요. ‘좁다·좁다랗다·좁쌀뱅이·좁쌀꾼·좁쌀바치’나 ‘뭉개다·깔아뭉개다·짓뭉개다’로 손볼 만하고, ‘곱·곱재기·꼽·꼽재기·새알곱재기·새알꼽재기·새발피’로 손봅니다. ‘생쥐·고망쥐·쥐·쥐새끼’나 ‘억누르다·억눌리다·억누름질’로 손보면 돼요. ‘얼룩·얼룩지다·어루러기·얼룩덜룩’이나 ‘졸때기·졸따구·좀스럽다·좀생이·꼼수’로도 손보고요. ‘짓누르다·짓눌리다·짓밟다·지르밟다·즈려밟다·짓이기다·짓찧다’나 ‘짜다·쩨쩨하다·쪼잔하다·쪽·쪼가리’로도 손봅니다. ㅍㄹㄴ



한국의 성(성씨)이 더욱 복잡한 이유는 천한 성 일곱 개 혹은 다섯 개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 배달나라 씨(이름)가 더욱 어지러운 까닭은 낮은 씨 일곱이나 다섯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 한겨레 씨(이름씨)가 더욱 넝쿨진 까닭은 못난 씨 일곱이나 다섯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교차로에서》(김달수·진순신·시바 료타로/이근우 옮김, 책과함께, 2004) 74쪽


천한 광대들이 갓 쓰고 도포 입은 건 자기들이 좋아서 한 일이 아니었다

→ 낮잡힌 광대는 스스로 좋아서 갓 쓰고 두루마기를 입지 않았다

→ 얕잡힌 광대는 스스로 좋아서 갓 쓰고 두루마기를 입지 않았다

《단원의 그림책》(최석조, 아트북스, 2008) 30쪽


쌀밥이 아닌 조 따위로 제사상을 차리는 ‘천한 것’들이 감히 흉내낼 수 없었다

→ 쌀밥이 아닌 조 따위로 모심밥을 차리는 ‘낮은 것’이 함부로 흉내낼 수 없다

→ 쌀밥이 아닌 조 따위로 비나리밥 차리는 ‘얕은 것’이 섣불리 흉내낼 수 없다

《가난한 이의 살림집》(노익상, 청어람미디어, 2010) 74쪽


서얼 등 천하게 취급되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 섞은피처럼 얕잡히는 사람들을 매우 너그럽고 따스하게 여기는 까닭은

→ 아우름처럼 억눌리는 사람들을 매우 너그럽고 따스하게 여기는데

《율곡 이이 평전》(한영우, 민음사, 2013) 281쪽


멍청한 놈들! 천한 이교도인

→ 멍청한 놈들! 못난 바깥놈

→ 멍청한 놈들! 하찮은 저쪽놈

《아르슬란 전기 3》(다나카 요시키·아라카와 히로무/김완 옮김, 학산문화사, 2015) 112쪽


역시 천한 놈은 하는 짓도 천하다니까

→ 참말 낮은 놈은 하는 짓도 낮다니까

→ 저봐, 얕은 놈은 하는 짓도 얕다니까

→ 그래, 하찮은 놈은 짓도 하찮다니까

《히노코 5》(츠다 마사미/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18) 14쪽


‘딴따라’라며 천하게 여겼지만

→ ‘딴따라’라며 낮게 여겼지만

→ ‘딴따라’라며 깔보았지만

→ ‘딴따라’라며 얕보았지만

《꼴뚜기는 왜 어물전 망신을 시켰을까?》(정인수·최선혜, 분홍고래, 2018) 125쪽


천한 구경거린 보고 싶지도 않아

→ 얕은 구경거린 보고 싶지도 않아

→ 덜떨어진 구경거린 안 보고 싶어

→ 추레한 구경거린 안 보고 싶어

《7인의 셰익스피어, 제1부 1》(사쿠이시 해롤드/장지연 옮김, 학산문화사, 2019) 25쪽


멋대로 사람을 귀하게 혹은 천하게 대하고

→ 멋대로 사람을 높게 또는 낮게 마주하고

→ 멋대로 사람을 곱게 또는 밉게 맞이하고

→ 멋대로 사람을 살뜰히 또는 마구 여기고

→ 멋대로 사람을 섬기거나 깎아내리고

→ 멋대로 사람을 올리거나 낮추고

《2230자》(김인국, 철수와영희, 2019) 17쪽


신분이 낮은 천것들한테 깔보여선 안 돼

→ 자리가 낮은 것들한테 깔보여선 안 돼

→ 낮은 것들한테 깔보여선 안 돼

《히스토리에 11》(이와아키 히토시/오경화 옮김, 서울문화사, 2019) 75쪽


이런 천한 잡놈들, 좀도둑놈들에게 겁먹어서야

→ 이런 못난놈들, 좀도둑을 두려워해서야

《레이리 3》(이와아키 히토시·무로이 다이스케/김봄 옮김, 소미미디어, 2019)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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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알량한 말 바로잡기

 흑견 黑犬


 울고 있는 흑견 → 우는 검은개

 시커먼 흑견을 보다 → 시커먼 개를 보다


  낱말책에 따로 없는 ‘흑견’입니다. 우리는 ‘검둥이·검은개·검정개’나 ‘검정·검다·검은빛·까만빛·깜빛’이라 하면 됩니다. ‘검정꽃·검은꽃·까만꽃·깜꽃·거무스름·거무튀튀’나 ‘까망·까맣다·까망이·까망꽃·까무잡잡하다·까무스름하다’라 해도 되어요. ‘새까맣다·새카맣다·시꺼멓다·시커멓다’라 해도 되고요. ㅍㄹㄴ



흐, 흑견(黑犬)?

→ 거, 검둥이?

→ 거, 검정개?

《불의 용의 나라 1》(이시이 아스카/이상은 옮김, 학산문화사, 2025)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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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11 오늘은 뭘 배울까

책벌레수다 : 야금야금 잎을 갉는 애벌레



  언제나 때에 맞게 만나고 헤어진다. 우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좋은이·나쁜이’가 아닌 “그저 그때에 만나서 어울리면서 함께 배우는 사이”라고 느낀다. 날마다 숱한 사람이 태어나고 사라지는데, 우리는 이 숱한 사람 사이에서 ‘나·너’라는 길을 마주하는 마음을 가만히 느끼고 받아들여서 하루를 짓는구나 싶다. 어쩜 저런 짓을 일삼느냐 싶은 사람이 있을 텐데, ‘저런 짓’을 느끼고 겪고 배워야 하기에 ‘저런 사람’을 스치거나 만난다. 저런 사람은 나쁘지 않다. “그러면 넌 저런 때에 어떤 사람으로 어떤 모습으로 서겠니?” 하고 묻고 들려주며 보여주는 길잡이라고 느낀다. 저런 짓을 일삼는 저런 사람을 나무라거나 탓하기도 할 수 있되, 우리 스스로 ‘저곳’에 설 적에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을 지을는지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서로 만나거나 스치거나 마주치는 셈이다.


우리의 생활이 편리해질수록 어디선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생활이 편리해져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건강이 나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의료비 지출이 늘고 건강기구를 사는 등 결국 돈도 시간도 오히려 소모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고 마는 거죠. 《궁극의 미니멀라이프》 48쪽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아이를 안고 업고 돌보며 늘 쪽종이를 펼쳐서 쪽글을 쓰며 지냈다. 남눈치를 볼 까닭이 없거든. 그림이든 글이든 무엇이든 매한가지라고 느낀다. 아이가 어버이를 지켜보면서 “우리 엄마아빠는 이렇게 사는구나?” 하고 느끼면 되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남눈치’가 아니라 ‘아이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살면 느긋하다.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는 붓을 쥐고서 글을 끄적이면 얼핏 힘들다고 여길는지 모르는데, 힘들 까닭이 없이 두 손으로 두 일을 마주하는 하루라서 즐겁게 마련이다. 어버이로서 이렇게 두 손으로 두 일을 하면, 아이는 문득 “나도 붓 좀 줘. 나도 쓸게.” 하고 바란다. 이때에 종이랑 붓을 선선히 내주고서 다른 종이랑 붓을 꺼내면, 아이는 차분하면서 조용히 글놀이나 그림놀이로 스며든다. 아이더러 “열린터(공공장소)에서는 조용히 있어야 해. 전철이나 기차에서는 안 뛰어.” 하고 나무라거나 다그치지 않아도 된다. 아이하고 누리거나 놀거나 즐길 살림거리를 챙겨서 다니면 된다.


독재자의 개선문은 먼지로 허물어져 버렸다네. 그 돌들로 아이들은 소꿉놀이용 작은 오두막을 지었네.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27쪽


  애벌레는 날마다 잎을 갉는다. 갉고 갉고 또 갉고 다시 갉고 새로 갉는다. 애벌레는 잎갉이로 온삶을 보내는 듯하지만, 눈코귀 없이 입 하나만으로 잎갉이를 하면서 허물벗기를 한다. 또 하고 자꾸 하고 새로 한다. 책벌레는 애벌레마냥 그저 읽고 다시 읽고 새로 읽는 동안 천천히 허물벗기를 하며 배우는 길이다. 언제 날개돋이를 할는지 몰라도, 참말로 날개돋이를 해낼는지 몰라도, 새삼스레 다시 일어나는 새벽에 잎을 갉으면서 풀똥을 누고, 또 잎을 갉아먹고서 풀똥을 눈다.


“이길 만하니까 이긴다. 그렇게 되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람을 베는 세월이 필요한 거야. 그 경지까지 이르면, 싸우기 전에 이미 이긴 거라면, 어라? 그때는, 싸우는 것 자체가 필요할까?” 《배가본드 21》 99쪽


  아기는 어버이 품에 안겨서 젖을 문다. 아기는 젖을 먹고서 똥을 누고, 또 젖을 먹고서 똥을 눈다. 내도록 업히고 안기며 젖먹이로 지내다가 문득 웃고, 트림을 하고, 눈을 깜빡이고, 귀를 쫑긋하고,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잼잼을 한다.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고, 이제 목을 가눌 줄 알면 어느새 다다다닥 달리듯 기어다닌다. 아기가 하루아침에 서거나 달리지 않듯, 아기가 하루아침에 말을 떼지 않듯, 책벌레는 애벌레를 닮고 아기를 닮은 터라, 늘 읽고 또 읽고 또또 읽고 또또또 읽는다. 지치지 않고서 읽는다. 아니, 지치도록 읽는데, 지쳐서 나가떨어져도 또다시 읽는다. 무엇을 배우려는 책읽기인지 몰라도 마냥 읽는다. 이러다가 고단해서 폭 곯아떨어지면 꿈길에서 헤매다가 마침내 고치를 틀 날을 맞이한다. 애벌레가 고치를 튼다면, 책벌레는 글을 쓴다. 애벌레가 고치를 틀어 꿈을 헤매다가 날개를 단 몸으로 피어나면서 밖으로 나오듯, 책벌레는 어느새 글벌레로 거듭나더니 책 한 자락을 내놓고서 활짝 어깨를 편다.


“그 말뜻은 같은 병의 환자라고 해도 한 명 한 명에게 가장 적절한 치료법이 있다는 말씀이잖아요. 저희 아버지께 가장 적절한 치료법은 빨리 퇴원시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아버지의 병의 뿌리는 아주 깊어요. 이번이 아버지의 맘속에 있는 아주 나쁜 병을 치료할 아주 좋은 기회예요.” 《Dr.코토 진료소 2》 158, 159쪽


  대단하거나 훌륭하다 싶은 책만 읽지 않는다. 대단하거나 훌륭하다 싶은 글만 쓰지 않는다. 그저 읽듯 그저 쓴다. 그저 살피듯 그저 익힌다. 둘레를 보면, 속이 없으니 겉을 꾸미려 들고, 겉을 꾸미려 드니까 쭉정이 같은 줄거리로도 글과 책을 쏟아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책벌레는 쭉정이책도 집어든다. 쭉정이책은 왜 쭉정이로 가득한 책인지 알아보려고 읽는다. 겉치레책도 챙긴다. 겉치레책은 왜 겉치레로 겉만 휘감는지 찾아보려고 읽는다. 허울뿐인 책을 읽다 보면, 허울이란 무엇이고 하늘이란 무엇인지 새삼스레 느낀다. 속없이 허울로만 채운 책을 느끼거나 알았기에, 책벌레가 쓰려는 글은 ‘하늘빛’처럼 파랗게 물들면서 속으로 여문 이야기를 꾸려야겠다고 배운다. 이러다가 드물게 아름책을 만나면, 삶이라는 길을 이렇게 여미기에 반짝이는구나 하고 배우지. 이곳에서도 배우고 저곳에서도 배운다. 이 책으로도 배우고 저 책으로도 배운다. 모든 책으로 배운다. 모든 책은 새책이다. 모든 책은 배움책이다. 모든 책은 오랜슬기를 담으면서 새빛을 흩뿌리는 씨앗이다.


내가 쓴 글은 나의 역사다. 내가 쓴 것이 나의 역사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글에는 그동안의 삶이 쓰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빈집과 공명》 76쪽


  영어 ‘디자인’을 우리말로는 여러 갈래로 옮긴다. ‘그리다’나 ‘꾸미다’나 ‘만지다’로 옮길 수 있는데, 겉으로만 만지면 ‘꾸미다’이고, 속으로 어루만지려고 하면 ‘그리다’를 거쳐서 ‘가꾸다’로 나아간다. 천천히 배우려고 하니 찬찬히 익히면서 온몸과 온마음에 담는다면, 서둘러 선보이거나 내세우려고 하니 그만 겉을 꾸미고 만져서 겉멋과 겉치레라는 허울로 기울고 만다. 책벌레는 겉도 속도 배운다. 우리 몸을 이루는 겉살인 ‘살갗’이 있기에 만지고 쥐고 잡고 다스리고 다룬다. 살갗이라는 ‘겉살’도 대수롭다. 다만 겉살만으로는 못 움직인다. 속살이 있어야 하고, 속살은 뼈와 뼈대가 든든하기에 움직인다. 겉속이 나란하면서 뼈가 굵을 노릇이요, 뼈와 살은 머리로 이끌고, 머리는 마음으로 북돋우고, 마음은 생각으로 짓고, 생각은 저마다 오롯이 빛나는 사랑이라는 숨결로 깨운다. 잎갉이를 하듯 책읽기를 하는 나날이란, 온마음과 온몸을 나란히 움직이는 온넋을 지피는 눈빛을 밝히는 길이지 싶다. 이리하여 또 읽고 자꾸자꾸 읽는다.


ㅍㄹㄴ


《궁극의 미니멀라이프》(아즈마 가나코/박승희 옮김, 즐거운상상, 2016.10.10.)

#アズマカナコ #電氣代500円 #贅澤な每日 (2013년)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타고르/이상영 옮김, 다보, 1990.11.5.)

#RabindranathTagore

《배가본드 21》(요시카와 에이지·이노우에 타카히코/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05.11.25.)

#バガボンド #Vagabond #吉川英治 #井上雄彦

《Dr.코토 진료소 2》(타카토시 야마다/문희 옮김, 대원씨아이, 2001.6.19.)

#Drコト診療所 #山田貴敏

《빈집과 공명》(신유보, 결, 2024.10.21.)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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