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경제신문에 싣는 '책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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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우리는 모두 이웃



  아침에 뒤꼍에서 감을 두 알 줍습니다. 나무에 달린 감을 딸 수도 있지만, 스스로 똑 떨어진 감을 주울 수도 있습니다. 흙바닥에 떨어진 감을 주으니, 한 알에는 개미가 열 마리 남짓 신나게 파먹고, 다른 한 알은 딱정벌레 두 마리가 바쁘게 파먹습니다. 어떻게 할까 하고 한동안 생각하다가 손으로 감알 살점을 떼어냅니다. 개미와 딱정벌레도 함께 먹을 감알이니까요.


  뒤꼍에서 난 커다란 호박을 한 덩이 잘라서 삶았습니다. 엊저녁에 남은 덩이에서 속을 파는데 꼬물꼬물 하얀 벌레가 여러 마리 보입니다. 이 벌레는 어떻게 호박덩이에 파고들었을까요. 호박 속을 조금 더 긁습니다. 다 긁은 속은 옆밭 귀퉁이로 던집니다. 호박벌레는 옆밭 귀퉁이 풀밭에서 남은 속을 더 먹다가 풀잎을 먹고 자랄까요. 아니면 흙으로 파고들어 조용히 겨울잠을 자려 할까요.


  만화를 그리는 이희재 님이 빚은 《낮은 풍경》(애니북스,2013)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낮은 풍경》은 만화책이라 할 수도 있고 그림책이라 할 수도 있으며 이야기책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나즈막한 곳에서 나즈막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이웃으로 만나서 그림 몇 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입니다.


  서울 광화문에 나들이를 가서 만난 수많은 이웃을 바라보던 이희재 님은 도란도란 어우러지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사람들은 모여서 떠들고 노래하고 토론의 순간을 즐겼다. 끼리끼리 노래 부르다 낯선 이들과도 거침없이 뒤섞였다. 한 자리에서 머물다 파도를 타듯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와 같은 말을 붙입니다. 그렇습니다. 너른 마당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입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모두 너른 마당에서 모입니다. 너른 마당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왁자지꼴 이야기잔치를 벌입니다. 막걸리 한 사발이 오가기도 하고, 밥 한 그릇이나 지짐이 하나 나누어 먹기도 합니다.


  너른 마당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놉니다. 너른 마당은 그야말로 너른 마당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이야기꽃이요 아이들은 놀이꽃입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는 어른들은 바닥에 펑퍼짐하게 주저앉습니다. 놀이꽃을 피우는 아이들은 온몸에 땀을 내면서 나무도 타고 흙바닥에 그림도 그립니다. 너른 마당이 있을 때에 삶에서 꽃이 피지 싶습니다. 삶꽃입니다.


  돈을 들여서 지을 공원이 아니라, 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는 흙바닥 너른 마당입니다. 자동차가 들어오지 않는 너른 마당입니다. 사람들이 두 다리로 오가는 너른 마당입니다. 들일을 쉬는 너른 마당이요, 도시에서 사람들이 숨을 돌리는 너른 마당입니다. 시원한 들바람을 쐬는 너른 마당이며, 도시에서 사람들이 자동차 배기가스와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날 만한 너른 마당입니다.


  이야기책 《낮은 풍경》을 읽으면 이야기가 조물조물 흐릅니다. 이희재 님은 서울에서 나즈막한 동네로 마실을 갑니다. 나즈막한 동네에서 나즈막한 집을 짓고 나즈막하게 살림을 꾸리는 이웃을 만납니다. 이러다가 또 그림을 그리고, “타향에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곳은 삶의 터전이었고 고향이었다. 2009년 이래, 재개발을 하네 마네 하며 지축이 흔들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말이 춤을 추었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갔고, 남은 이들은 철거와 보상의 저울추 사이에서 불안과 싸웠다.”와 같은 말을 붙입니다.


  삶터가 일터입니다. 삶터가 놀이터입니다. 어른들은 삶터에서 일을 하고 사랑을 속삭입니다. 아이들은 삶터에서 놀이를 하고 사랑을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습니다.


  돈을 벌어서 돈을 써야 할 삶이 아닙니다. 사랑을 지어서 이야기를 나눌 삶입니다. 돈만 많이 번대서 살림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경제개발이나 경제발전을 이루어야 우리 삶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즐겁게 어우러질 삶이 되어야 살림이 나아집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하루가 될 때에 비로소 삶이 나아집니다.


  생각해 보셔요. 4대강사업 같은 끔찍한 막공사를 저지르면서 쏟아부은 돈이 얼마이고, 4대강사업으로 지은 시멘트 건물을 지키려고 들여야 할 돈이 얼마인가요. 처음부터 이런 돈을 세금으로 거두지 않았으면 사람들 살림살이는 넉넉했겠지요. 이만 한 돈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마을과 보금자리를 가꾸도록 도와주었으면, 정부가 따로 하는 일이 없어도 사람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레 하루를 일구겠지요. 더욱이 남녘과 북녘은 군사비로 지나치게 많은 돈을 쏟아붓습니다. 남녘은 남녘대로 ‘평화 지키기’를 외치면서 값비싼 전투기와 탱크와 미사일과 전함을 사들입니다. 북녘은 북녘대로 ‘평화 지키기’를 외치면서 온갖 전쟁무기를 스스로 큰돈 들여서 만듭니다. 남녘과 북녘이 서로 참다운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무기를 차츰 줄이거나 없애면서 참으로 평화로운 길을 걸어야 마땅합니다. 전쟁무기를 자꾸 늘리면 그예 전쟁으로 갈 뿐입니다. 전쟁무기를 줄여야 평화로 갑니다. 전쟁무기를 자꾸 늘리면 북녘뿐 아니라 남녘도 그 많은 전쟁무기를 사들이고 지키느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써야 하니, 나라살림이 와르르 무너질밖에 없어요.


  그림쟁이, 또는 만화쟁이, 또는 이야기쟁이 이희재 님은 “나는 둑길에 앉아 점심을 먹는 것도 잊고 장터의 풍정에 홀려 사람들을 그렸다.” 하고 말합니다. 저잣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살갑고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답구나 싶기에 그만 배고픔까지 잊은 채 그림을 그립니다.


  이 마음이 곱습니다. 이웃을 살갑고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답게 바라보는 이 마음이 곱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아이들이 해맑고 웃으면서 노래하거나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 배고픈 줄 모릅니다. 아이들은 서로서로 까르르 웃고 노래하면서 어울려 놀 때에 배고픈 줄 모릅니다. 한참 노는 아이들을 불러서 ‘얘, 배고프지 않니?’ 하고 물어야 아이는 비로소 ‘어, 배고프네.’ 하고 말합니다.


  삶을 가꾸거나 살림을 펴는 길은 먼 데에 없습니다. 삶을 북돋우거나 살림을 일구는 길은 가까운 데에 있습니다. 돈을 더 벌어야 삶이나 삶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과 살림에 사랑이 깃들어야 하루가 즐겁습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듯이, 어른들이 기쁘게 이야기꽃을 피우듯이, 우리는 저마다 즐거운 아름다움을 사랑스럽게 찾아서 누릴 때에 새로운 삶과 살림을 가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웃입니다. 이웃끼리는 밥 한 그릇을 즐겁게 나눌 뿐, 밥값을 받지 않습니다. 이웃끼리는 즐겁게 선물을 나눌 뿐, 선물값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지구별 이웃인 줄 느끼며 살아간다면,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과학도 교육도 슬기롭게 가다듬는 길을 열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4347.10.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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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카메라 - 카메라 우체부 김정화의 해피 프로젝트, 2014년 대한출판문화협회 올해의 청소년 도서
김정화 지음 / 샨티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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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94



사진기 아닌 마음이 여행한다

― 여행하는 카메라

 김정화 글

 샨티 펴냄, 2014.9.25.



  사진기가 세 나라를 돕니다. 김정화 님은 디지털사진기를 여러 대 마련해서 맨 먼저 베트남에 찾아갑니다. 베트남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사진기를 건네어 스스로 제 삶을 사진으로 담도록 이끌고는, 이 사진기를 가지고 미얀마(또는 버마)로 넘어갑니다. 미얀마에서 비슷한 또래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사진기를 건네어 그 나라에서 그곳 아이들이 마주하는 이웃과 삶을 사진으로 담도록 이끕니다. 이런 뒤, 몽골로 넘어가서 몽골에서 살아가는 어린이와 푸름이가 누리는 삶과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도록 이끕니다.


  세 나라를 돈 사진기에 깃든 이야기가 흐르는 《여행하는 카메라》(샨티,2014)를 읽습니다. 김정화 님은 ‘사진기 여행’을 하면서 겪은 일과 느낀 생각을 차근차근 적습니다. “카메라를 손에 쥐자 베트남 아이들이 제일 먼저, 제일 많이 찍은 사진은 다양한 각도의 ‘자아도취적’ 셀카였다(23쪽).” 하고 이야기하는데, 아이들은 ‘내 모습’이 여러모로 궁금했구나 싶습니다. 또는, ‘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서 보여주고 싶은가 봅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제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만으로도 이야기를 건넵니다. 이런 각도에서 찍고 저런 각도에서 찍든 그렇지요. 나라와 겨레마다 생김새가 다른 사람입니다. 생김새뿐 아니라 옷차림이 다릅니다. 옷차림뿐 아니라 머리카락 모양이 다릅니다. 이런 사진이 ‘자아도취적’ 사진이든 아니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웃나라 동무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보다 ‘내 모습’이라는 뜻이로구나 싶어요.


  왜 그렇잖습니까. 편지로 사귀는 벗은 으레 ‘네 사진을 보내 주렴’ 하고 바랍니다. 얼굴 사진조차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모습으로 찍은 사진을 바랍니다. 같은 사람 사진이지만 새롭게 찍어서 보내면 새삼스레 반갑습니다. 베트남 아이들이 ‘내 모습’을 수없이 찍었다면, 참으로 아이다운 마음이지 싶어요.


  그러니까, 사진을 찍을 때에는 사진을 생각하면 됩니다. 김정화 님은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이냐 하는 질문에는 정답이라는 게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찍는 사람의 느낌이 전달되는 사진, 이야기가 상상되는 그런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한다(34쪽).” 하고 말하는데, 베트남 아이들이 ‘내 모습’을 잔뜩 찍었어도, 이러한 사진에는 이러한 사진대로 이야기가 깃들기에, 이러한 사진을 받는 이웃 미얀마(또는 버마) 아이들은 이웃나라 동무들 살림살이와 하루를 읽을 수 있습니다.


  《여행하는 카메라》에 나오는 아이들 사진은 “자세히 보니 아이들이 직접 찍은 사진들에서는 피사체의 표정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웠다(40쪽).”고 합니다. 아무렴, 그렇겠지요. 아이들은 어디에서 누구를 사진으로 찍었을까요? 아이들은 늘 함께 지내는 한집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고, 이웃집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가까이하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더없이 자연스럽고 사랑스레 찍을밖에 없습니다.


  제아무리 빼어난 사진가들이 베트남이나 미얀마(또는 버마)나 몽골로 찾아가서 다큐사진을 찍더라도 아이들 사진처럼 찍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빼어난 사진가는 ‘이웃이나 동무나 한집 사람’을 찍는 사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내 집 사람들이나 내 이웃이나 동무를 사진으로 찍는다면 아주 자연스러우면서 사랑스럽겠지요. 누구나 스스로 가장 가깝고 살가운 이웃을 사진으로 찍으면 아주 훌륭하도록 아름답기 마련입니다.


  사진찍기는 ‘마음찍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음올 찍는 일이 사진찍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진찍기는 ‘이야기찍기’요 ‘노래찍기’가 되기도 할 테지요. 내가 이웃과 함께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찍고, 내가 오늘 하루 새롭게 부르는 노래를 찍습니다.


  김정화 님은 세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지만, 아직 세 나라 삶을 읽지 못합니다. “미얀마 사람들에게 나눔은 일상이었다. 그래서 카메라도 나눠 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그런 말을 하니 혼란이 왔던 것이다(68쪽).”와 같은 일을 겪습니다. 그러나, 세 나라 삶을 아직 덜 읽었기에 잘못은 아닙니다. 아직 덜 읽었으니 세 나라 아이들은 저희 삶을 찬찬히 알려주거나 보여줍니다. 세 나라 삶을 읽는 몫은 오로지 김정화 님한테 있습니다. 미리 헤아리든, 그 나라에 가서 찬찬히 오래 머물면서 온몸으로 받아들이든, 스스로 익히고 살필 노릇입니다.


  세 나라 삶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껴안는다면 한결 깊고 넓게 바라봅니다. 한국에서도 그래요. 밀양 송전탑 사람들을 이웃으로 마주하면서 밀양에서 석 달을 살거나 세 해를 살아 보셔요. 사흘만 머물거나 세 시간만 지내다가 떠나 보셔요. 석 달과 세 해와 사흘과 세 시간은 사뭇 다르겠지요. 얼마나 머물면서 함께 하거나 지켜보느냐에 따라 내가 보고 느끼면서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만큼 내가 찍을 수 있는 사진이 달라질 테고, 그만큼 내가 읽어서 깨달을 이야기가 달라질 테지요.


  김정화 님이 엮은 책은 《여행하는 카메라》입니다. 사진기 하나를 여러 나라로 실어 나르면서 여러 나라 아이들이 새롭게 만나도록 다리를 놓는 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을 곰곰이 읽어 보면, 여러 나라 삶과 사람과 이야기를 아직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이웃을 새롭게 읽거나 제대로 마주하는 ‘이웃 만남’이 되리라 느낍니다. 이를테면 “믿기지가 않아서 정말 몽골 아이들은 네 나이에 빨래도 직접 하느냐고 물었더니 함에르덴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도리어 의아해 한다(128쪽).” 하고 읊는 대목이 있는데, 오늘날 몽골 아이들이나 베트남 아이들뿐 아니라, 얼마 앞서까지 한국 아이들도 열 살 언저리에 집일을 나누어 맡았습니다. 열 살 어린이도 풀을 뜯어서 소를 먹였고, 열 살 어린이도 빨래와 걸레질을 할 줄 알았습니다. 일본에서도 《오싱》이라는 작품이 아니어도 고작 일곱 살 어린이가 밥짓기를 할 줄 알았으며, 집일을 꽤 맡았으며, 동생도 돌보았습니다.


  열 살 어린이는 학교에 가서 학교 공부만 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왜 학교 공부만 해야 하겠습니까. 아이들은 삶을 누려야 합니다. 학교에서 배울 것은 배우되, 집과 마을에서는 집살림과 마을살림을 함께 해야지요. 이것이 삶이니까요.


  김정화 님은 ‘여행하는 카메라’라는 일을 꾀하면서 《여행하는 카메라》라는 책도 내놓습니다만, 처음 품은 뜻은 “2차 때에 내가 하려는 사적인 실험 중의 하나가 사진 치료이다. 이런 질문들은 투사적 사진 치료의 기법이다(236쪽).” 하고 밝힙니다. 무엇을 치료하려고 ‘사진 치료’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사진으로도 얼마든지 마음을 달래거나 다독일 수 있습니다. 그림으로도 글로도 말로도 노래로도 춤으로도 밥 한 그릇으로도 우리는 언제나 마음을 달래거나 다독일 수 있어요.


  ‘투사적 사진 치료’처럼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그저 사진기 하나로 ‘사진놀이’를 할 뿐입니다. 애써 ‘치료’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놀고 스스로 일하면서 삶을 가꿉니다. 삶을 가꾸면 ‘치료’는 저절로 어느새 이룹니다. 따로 ‘치료’를 생각할 일이란 없다고 느껴요. 그저 ‘놀이’로 누리고, ‘삶’으로 맞이하면 됩니다.


  베트남과 미얀마(또는 버마)와 몽골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김정화’라고 하는 사람을 이웃이나 동무로 여겨서 받아들입니다. ‘김정화’라고 하는 사람이 저희를 돕는다든지 무엇인가 선물로 주려고 찾아오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홀가분하게 놀러오기를 바랍니다. 그저 이웃과 동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과 동무가 되자면, 돈이나 이름이나 힘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나 자동차가 있어야 이웃이나 동무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어 사귀면 이웃이나 동무가 됩니다.


  아이들은 사진놀이를 만나면서 재미있게 놀고, 재미있게 놀면서 천천히 삶을 새롭게 눈뜹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사진놀이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소꿉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웃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행하는 사진기’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여행하는 고무줄’이 되어도 됩니다. 나라마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모양새가 살짝 다르지만 꽤 비슷합니다. 한국에서 날아온 고무줄을 베트남 아이들이 놀고, 미얀마(또는 버마) 아이들이 놀다가, 몽골 아이들이 놀 수 있게 이어도 재미있습니다. 여러 나라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나서 느낀 이야기를 글로 쓰도록 이끌 수 있어요.


  ‘여행하는 고무줄’나 ‘여행하는 소꿉’을 꾀한다면, 굳이 사람이 징검돌이 되어 나르지 않아도 됩니다. 편지봉투에 고무줄이나 소꿉을 넣어서 보내도 돼요. 돌고 돌고 또 돌면서 함께 나누는 삶을 생각하고, 지구별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사랑을 돌아봅니다.


  사진기 아닌 마음이 여행을 합니다. 사진기를 빌어 마음을 한결 넓게 열 수 있기도 하지만, 사진기 아닌 나무젓가락으로도, 고무줄로도, 돌멩이 하나로도, 소꿉으로도, 나무조각으로도, 그림 한 점이나 연필 한 자루로도 마음을 여는 나들이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행하는 사진기’에 한결같이 따순 사랑이 감돌기를 바랍니다. 4347.10.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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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74] NAVER와 한글박물관



  예수님 나신 날이 다가오면 도시 곳곳에 알록달록 나무를 세웁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우면 절집 둘레에 알록달록 등불을 겁니다. 예수님 나신 날을 기리는 나무와 부처님 오신 날을 섬기는 등불은 꽤 오래 그 자리를 지킵니다. 그런데, 한글날을 맞이해서 한글을 기린다고 하는 이들은 시월 구일 하루만 반짝거리다가 사그라듭니다. 이를테면 한 해 내내 영어사랑으로 치닫던 누리그물인 ‘NAVER’나 ‘DAUM’ 같은 곳은 시월 구일 하루만 ‘네이버’와 ‘다음’처럼 무늬만 한글로 바꿉니다. 시월 시일이 되면 도로 ‘NAVER’나 ‘DAUM’으로 돌아가요. 마치 해마다 하루만 반짝 놀다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깊이 나아가거나 널리 헤아리지 않아요. 해마다 새롭게 거듭나거나 자라는 모습이 없어요. 해마다 판박이 같은 시늉을 하면서 한글사랑을 자랑합니다. 나라에서도 엇비슷합니다. 2014년에 한글박물관이라는 커다란 집을 지어서 문을 열기는 합니다만, 다른 한쪽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집어넣겠다고 또 설레발을 칩니다. 한국말을 알뜰히 가다듬는 일조차 안 하면서, 막상 한글마저 짓밟는 셈입니다. 이럴 바에는 뭣 하러 한글박물관을 큰돈 들여 지을까요. 나라에서 스스로 한글이든 한국말이든 제대로 가꾸거나 아름답게 지키려는 생각이 없다면. 4347.10.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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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없애야 말 된다

 (1553) 교과서적 1


교과서적이고 엄격한 고향의 세계와, 퇴폐적이고 방종한 대학의 세계 사이에서 나는 고뇌했다

《곽아람-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아트북스,2009) 187쪽


 교과서적이고 엄격한 고향의 세계

→ 교과서 같고 엄격한 고향 세계

→ 틀에 박히고 깐깐한 고향

→ 판에 박히고 갑갑한 고향

 …



  한국말사전에 나오는 ‘교과서적’은 두 가지 쓰임새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모범이 되는”이요, 둘째는 “판에 박힌”입니다. 한 낱말을 놓고 엇갈리는 두 가지 쓰임새입니다. 그나저나, 우리들이 ‘교과서적’이라고 하는 말투를 꼭 써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같은 말투가 없다면 우리 생각을 나타낼 길이 없고, 이 같은 말투가 아니라면 내 느낌을 나눌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도 “교과서 같은”이나 “교과서다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 남을”이나 “교과서를 보는 듯한”이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다루는”이나 “교과서에 갇힌”이나 “교과서 울타리에 갇힌”이나 “교과서를 다루는 듯한”이나 “교과서에 얽매인”이라 이야기해도 잘 어울립니다. 자리에 따라서는 “교과서에나 나오는”이나 “교과서처럼”이나 “교과서에 읊듯이”라 할 수 있겠지요. ‘-的’ 굴레에서 벗어나면, 때와 곳에 맞게 다 다른 말투를 살릴 만합니다. 아니, ‘-的’ 수렁에서 헤어나야, 다 다른 말투를 다 다르면서 아름답게 북돋울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的’이라고 하는 말끝을 아무 자리에나 함부로 붙이면서 우리 깜냥껏 이야기를 나누는 틀을 잃습니다. 한국사람은 ‘-的’과 같은 말투에 얽매이면서 슬기를 빛내며 넋을 키우는 길을 스스로 버립니다. “교과서에 갇힌” 꼴이라 할까요. “낡은 교과서를 붙잡는” 꼴이라 할까요. “좋은 교과서를 만들지 못하는” 꼴이라 할까요. “새로운 교과서를 엮지 않는” 꼴이라 할까요.


 시민운동의 교과서적 사례로 남을 것이다

→ 시민운동에서 좋은 보기로 남으리라 본다

→ 시민운동에서 훌륭한 보기로 남으리라

 교과서적인 삶은 우리 시대에 없는 것이 아닐까

→ 교과서 같은 삶은 우리 시대에 없지 않을까

→ 반듯한 삶은 우리 둘레에 없지 않을까

→ 아름다운 삶은 우리 터전에 없지 않을까


  스스로 훌륭한 길을 걷고자 하지 않으니, 스스로 훌륭한 보기를 이루지 못합니다. 시민운동도 스스로 훌륭한 길을 걷는다면 “시민운동이 이룬 훌륭한 보기”를 이루겠지요. 남 앞에 내보이려는 생각이 아닌 나 스스로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생각이라 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아름다운 삶은 우리 둘레에 넉넉히 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다 다른 아름다움을 빛내면서 말하고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찾는 말이고, 스스로 찾는 삶입니다. 스스로 가꾸는 말이고, 스스로 가꾸는 삶입니다. 스스로 빛내는 말이며, 스스로 빛내는 삶입니다. 스스로 일구는 말이며 스스로 일구는 사랑입니다.


 교과서적 원칙보다는 상황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는

→ 판에 박힌 잣대보다는 때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는

→ 고리타분한 잣대보다는 그때그때 알맞게 맞추는

 고정 관념이나 교과서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 굳은 생각이나 딱딱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 얽매인 생각이나 세상모르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 해묵거나 틀에 박힌 생각에 사로잡히면


  생각이나 마음이나 넋이나 얼이 딱딱하게 굳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말이며 글이며 따분하게 굳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생각이 고리타분하니 말이 고리타분합니다. 삶이 케케묵으니 말이 케케묵습니다.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생각없는 삶이라 한다면 언제나 답답하고 갑갑한 삶이면서 답답하고 갑갑한 생각이자 말입니다. 어디에서 어떠한 일을 하면서 산달지라도 생각있는 삶일 때에는 열린 삶이면서 열린 말입니다. 깊은 삶이면서 깊은 말입니다. 넉넉한 삶이면서 넉넉한 말입니다.


  고운 매무새로 살아가는 사람한테서 고운 생각과 말이 샘솟지 않는 모습이란 본 적이 없습니다. 얄궂은 몸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한테서 얄궂은 생각과 말이 배어나오는 모습이란 못 본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아름답고자 한다면, 스스로 하는 일을 비롯하여 스스로 품는 생각과 꾸리는 삶과 펼치는 말 모두 아름다운 길로 접어들기 마련입니다. 어느 한 가지만 아름다울 수 없으며, 어느 한 가지만 아름답다면 거짓이나 겉치레이거나 겉핥기이거나 겉꾸밈입니다. 아름다운 밥과 옷과 집입니다. 아름다운 사랑과 믿음과 나눔입니다. 아름다운 이름과 힘과 돈입니다. 아름다운 손과 머리와 가슴입니다. 나란히 흐릅니다. 다 같이 움직입니다. 어깨동무하는 이음고리입니다. 4343.1.9.흙/4347.10.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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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에 박히고 깐깐한 고향과, 어지럽고 제멋대로인 대학 사이에서 나는 괴로웠다


“엄하고 철저하다”를 뜻하는 한자말 ‘엄격(嚴格)하다’인데, ‘엄하다’는 “철저하고 바르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말풀이가 서로 겹칩니다. ‘철저(徹底)하다’는 “빈틈이나 모자람이 없다”를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니까 ‘엄격한’이란 “빈틈없이 바른”을 가리키는 셈인데, 한국말로 하자면 ‘깐깐하다’나 ‘꼼꼼없다’쯤 됩니다. “고향의 세계”는 “고향 세계”나 ‘고향’으로 다듬습니다. “퇴폐적(頹廢的)이고 방종(放縱)한”은 “지저분하고 어수선한”이나 “어지럽고 제멋대로인”으로 손보고, “대학의 세계”는 “대학 세계”나 ‘대학’으로 손봅니다. ‘고뇌(苦惱)했다’는 ‘괴로워했다’로 손질합니다. 한자말 ‘고뇌’를 한국말사전에서 찾아보면 “괴로워하고 번뇌함”으로 풀이하는데, ‘번뇌’는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워함”으로 풀이합니다. 이 또한 겹치기 말풀이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고뇌’이든 ‘번뇌’이든 ‘괴로움’이란 소리요, ‘고달픔’이나 ‘힘겨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교과서적(敎科書的)

1. 해당 분야에서 모범이 되는

   - 시민운동의 교과서적 사례로 남을 것이다 /

     교과서적인 삶은 우리 시대에 없는 것이 아닐까

2. 판에 박혀서 현실적이지 않은

   - 교과서적 원칙보다는 상황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는 /

     고정 관념이나 교과서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


 '-적' 없애야 말 된다

 (1693) 교과서적 2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언제나 교과서적인 언행을 하며 애늙은이처럼 군다

《김정화-여행하는 카메라》(샨티,2014) 28쪽


 교과서적인 언행을 하며

→ 교과서 같은 말을 하며

→ 교과서처럼 말을 하며

→ 답답하게 말을 하며

→ 갑갑하게 말을 하며

 …



  풋풋한 아이들이 교과서에나 나옴직한 말을 한다면 애늙은이 같아 보입니다. 싱그러운 아이들이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말을 한다면 살짝 질립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들이 교과서처럼 딱딱하게 굳은 말을 한다면 고개를 살레살레 젓고야 말겠지요.


  교과서 같은 말이란 갑갑한 말입니다. 교과서처럼 하는 말이란 답답한 말입니다. 틀에 박히고 판에 박히니 재미없는 말입니다. 따분한 말이요 멋없는 말입니다. 아름답지 못한 말이고 슬프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를 학교에 넣어 교과서로 가르치는군요. 4347.10.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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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언제나 갑갑하게 말을 하며 애늙은이처럼 군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는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로 손봅니다. ‘언행(言行)’은 “말과 몸짓”을 함께 가리키는 한자말인데, 보기글 끝에 “애늙은이처럼 군다”와 같이 나오니, “언행을 하며”는 “말을 하며”로 손질합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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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310) 녹색의 1


알파벳 다음에는 녹색의 둥그런 구리 광석 조각, 터키석, 작은 금덩어리를 꿰었습니다

《러드야드 키플링/정회성 옮김-먼 옛날 와가이 강가에서 생긴 일》(서강출판사,2008) 89쪽


 녹색의 둥그런 구리 광석 조각

→ 푸르고 둥그런 구리조각

→ 푸른빛이 도는 둥그런 구리조각

→ 풀빛이 감도는 둥그런 구리조각

 …



  정부에서는 지난 2003년에 ‘녹색’은 일본 빛이름이니, 이 낱말은 써서는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이러면서 ‘초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빛이름은 ‘풀빛’이니, ‘녹색’이나 ‘초록’이나  둘 모두 털어내어야 할 터입니다. 정부에서는 ‘초록’은 못 털고 ‘녹색’ 하나만 털었습니다. 그래도 이만큼 털어낸 모습은 반갑다고 해야 하겠지요. 한 걸음도 아닌 반 걸음이지만, 이 반 걸음이나마 차근차근 걸어갈 수 있으면 됩니다.


 짙은 녹색 → 짙은 풀빛 . 짙푸른 빛

 녹색 물감으로 → 풀빛 물감으로 . 푸른 물감으로

 녹색이 곱다 → 풀빛이 곱다 . 푸른 빛이 곱다


  정부에서 빛이름 표준을 고친 뒤 여러 해가 지나도록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올림말은 안 바뀌었습니다. 열 해 가까이 지나서야 비로소 ‘녹색’이라는 일본 한자말을 ‘초록’이라는 중국 한자말로 고쳐서 쓰라고 밝힙니다. 그러면, 여느 사람들은 어떠한가요? 우리들은 빛이름을 가리키면서 한국말로 옳고 바르게 가리킬 줄 아는가요?


 푸른 혁명 . 풀빛 혁명 (o)

 녹색 혁명 . 초록 혁명 (x)


  이 나라 삶터를 알뜰히 돌보거나 아름다이 가꾸고자 힘쓰는 분들도 ‘녹색’에서 벗어나 ‘푸른’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녹색 정치’가 아닌 ‘푸른 정치’입니다. ‘풀 綠 + 빛 色’으로 된 한자말 ‘녹색’을 쓰는 일에는 거리끼지 않으면서, ‘풀빛 정치’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나 우리 이웃한테나 살갑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건넬 수 없는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풀을 바라보면서 풀빛이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4341.4.15.불/4347.10.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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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 다음에는 푸르고 둥그런 구리조각, 터키돌, 작은 금덩어리를 꿰었습니다


“구리 광석(鑛石) 조각”은 “구리조각”이라고 적어도 됩니다. ‘터키석(Turkey石)’은 ‘터키돌’로 손봅니다.


녹색(綠色) : 파란색과 노란색의 중간 색

   - 짙은 녹색 / 녹색 물감으로 나뭇잎을 색칠하였다 

     나무 모양이 아름답고 잎에 윤이 흘러 녹색이 유난히 곱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525) 녹색의 2


그 바로 아래 펼쳐지는 녹색의 밭. 뒷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꾀꼬리, 개똥지바퀴, 매미의 울음소리

《고히야마 하쿠/양억관 옮김-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한얼미디어,2006) 170쪽


 녹색의 밭

→ 푸른 밭

→ 푸르디푸른 밭

→ 짙푸른 밭

 …



  골프라는 운동을 즐기는 분들은 ‘녹색’이라는 말도 안 쓰고 ‘그린(green)’이라는 영어만 씁니다. 마치 ‘그린’이라는 서양말이 대단한 “골프 전문 낱말”이라도 되는 듯 잘못 알면서 이런 말을 씁니다.


  ‘녹색’운동을 하고, ‘녹색’혁명을 말하며, ‘녹색’당을 꾸리고, ‘녹색’연합으로 일하는 사람들 또한, ‘녹색’이라고 말해야 비로소 “숲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매무새”를 담아낸다는 듯 잘못 헤아립니다. 그렇지만, 한국말은 ‘푸름’과 ‘풀빛’입니다.


 풀빛모임 . 푸른모임 . 숲모임 . 숲사랑모임 ← 녹색연합

 풀빛당 . 숲사랑당 ← 녹색당

 숲사랑 정책 ← 녹색 정책


  풀이기에 풀빛입니다. 풀이기에 풀을 보는 아이들은 “이야, 푸르다!” 하고 외칩니다. 잎사귀가 우거진 나무로 가득한 숲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우와, 푸르구나!” 하고 소리칩니다. 푸른 들판이기에 ‘푸른들’이고, 여름날 들판은 푸른 빛깔 물결이기에 ‘푸른물결’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땅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무슨 빛깔을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요. 4341.8.20.물/4347.10.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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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로 아래 펼쳐지는 푸른 밭. 뒷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꾀꼬리, 개똥지바퀴, 매미 울음소리


“매미의 울음소리”는 “매미 울음소리”로 고쳐 줍니다. 또는 앞말 흐름을 헤아리면서 “매미 들이 우짖는 소리”로 고쳐 봅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172) 녹색의 3


여기 아이들은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라는 진한 녹색의 나무들과 언제든지 손만 뻗으면 따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지천에 널려 있는 자연 속에서 성장한다

《김정화-여행하는 카메라》(샨티,2014) 28쪽


 진한 녹색의 나무들

→ 짙고 푸른 나무들

→ 짙푸른 나무들

→ 짙푸르게 우거진 나무들

 …



  나무가 우거진 곳을 바라보는 요즈음 도시사람은 으레 ‘자연’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도시에는 ‘자연’이라 할 것도 곳도 모습도 없으니 이런 낱말을 쓸 만하리라 봅니다. 그러면, 나무가 우거진 ‘자연’은 어떤 곳일까요? 나무가 우거졌으니 나뭇잎 빛깔이 가득하겠지요. 나뭇잎 빛깔은 푸릅니다. 나무가 우거졌으니 숲입니다. 그러니까, 도시사람이 바라보면서 말하는 ‘자연’이란 ‘숲’이요 ‘풀빛(푸름)’입니다.


  한국말은 ‘짙다’이고, 한자말은 ‘진(津)하다’입니다. 한국말은 ‘묽다’나 ‘옅다’이고, 한자말은 ‘연(軟)하다’입니다. 한자말로 말하는 이라면 ‘진녹색’이나 ‘연녹색’ 같은 빛이름을 쓸 텐데, 한국말로 말하는 이라면 ‘짙푸름’이나 ‘옅푸름’ 같은 빛이름을 씁니다.


  이른봄에는 옅푸른 나무요 숲입니다. 늦봄이나 이른여름부터 짙푸른 나무요 숲입니다. 그러면 이른가을이나 늦가을에 노르스름하거나 누르스름하게 바뀌는 잎빛을 바라보면서 ‘옅노랗다’나 ‘짙노랗다’ 같은 낱말을 써 볼 만합니다. 한국말은 빛깔과 소리와 냄새를 모두 알뜰히 담을 수 있으니, 새로운 빛이름을 즐겁게 지을 만해요. 4347.10.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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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아이들은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라는 짙푸른 나무들과 언제든지 손만 뻗으면 따 먹을 수 있는 열매가 둘레에 널린 숲에서 자란다


‘과일(果實)’은 ‘열매’로 다듬습니다. 이 낱말은 안 다듬어도 된다 여길 수 있으나 ‘열매 果 + 열매 實’이라는 얼거리를 살핀다면, 한국말로 ‘열매’라고만 적어도 넉넉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먼 옛날부터 한국말로 ‘열매’라 가리키던 낱말을 한자를 중국에서 받아들인 양반이나 지식인이 ‘果實’이라 글에 적은 셈입니다. “지천(至賤)에 널려 있는”은 “흔하게 널린”이나 “둘레에 널린”이나 “그득그득 널린”으로 손질하고, “자연(自然) 속에서”는 “자연에서”나 “숲에서”로 손질하며, ‘성장(成長)한다’는 ‘자란다’나 ‘큰다’로 손질합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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