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도 익혀야지

 (325) 청하다請 1


답답하고 고민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렴

《서갑숙-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중앙m&b,1999) 278쪽


 도움을 청하렴

→ 도움을 바라렴

→ 도움을 받으렴

→ 도와 달라고 하렴

 …



  외마디 한자말 ‘請하다’는 “남에게 부탁을 하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말사전에서 다른 한자말 ‘부탁(付託)’을 찾아보니, “어떤 일을 해 달라고 청하거나 맡김”을 뜻한다고 나와요. 한국말사전 말풀이대로 하자면, ‘청하다 = 부탁하다’요, ‘부탁하다 = 청하다’인 꼴입니다.


  한국사람은 한자를 쓴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임금과 신하와 지식인 같은 사람은 한자를 썼으나, 이 나라를 이룬 거의 모든 사람은 ‘한자말’ 아닌 ‘한국말’을 썼어요. ‘請’이든 ‘付託’이든 이 나라에 들어오지 않았을 적에 어떤 낱말로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을까 헤아려 봅니다.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다

→ 동무한테 도움을 바라다

→ 동무한테 도와 달라 하다

 주인에게 물 한 그릇을 청하다

→ 주인한테 물 한 그릇을 바라다

→ 주인한테 물 한 그릇 달라 하다


  외마디 한자말 ‘請하다’는 “사람을 따로 부르다”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로는 ‘부르다’라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집에 청해서”가 아닌 “집에 불러서”로 적어야 올발라요. 4337.8.12.나무/4347.10.14.불.ㅎㄲㅅㄱ



청(請) :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남에게 부탁을 함

청하다(請-)

 (1)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남에게 부탁하다

   -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다 / 주인에게 물 한 그릇을 청하다

 (2) 사람을 따로 부르거나 잔치 따위에 초대하다

   - 동네 사람들을 집에 청해서 음식을 대접하셨다

 (3) 잠이 들기를 바라다. 또는 잠이 들도록 노력하다

   - 잠을 청하다 / 낮잠이라도 청하고 있는 모양


..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395) 청하다請 2 : 잠을 청할 수 없다


하지만 저는 ‘기이욘’ 하는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아 쉽사리 잠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구로야나기 데츠코/김경원 옮김-토토의 눈물》(작가정신,2002) 27쪽


 잠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 잠이 들 수 없었습니다

→ 잠잘 수 없었습니다

→ 잘 수 없었습니다

→ 자지 못했습니다

→ 못 잤습니다

 …



  잠을 자기도 하지만 잠이 들기도 합니다. 잠에 빠지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잠을 ‘청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자는지 돌아봅니다. 자는 모습을 헤아리고, 자는 몸짓을 살펴서, 알맞고 즐겁게 여러모로 우리 모습을 그립니다. 4339.2.1.물/4347.10.14.불.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그렇지만 저는 ‘기이욘’ 하는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해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은 ‘그렇지만’이나 ‘그러나’로 다듬고, “맴도는 것 같아”는 “맴도는 듯해”로 다듬습니다.


..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576) 청하다請 3


잠을 청했으나 벌레가 마구 달려들어 견딜 수가 없다

《체 게바라/안중식 옮김-체의 마지막 일기》(지식여행,2005) 50쪽


 잠을 청했으나

→ 잠을 자려고 했으나

→ 자려고 누웠으나

→ 자려고 했으나

 …



  밥은 먹고, 물은 마시고, 옷은 입고, 신발은 신으며, 모자는 쓰고, 힘들어서 쉬고, 연락은 하고, 잠은 잡니다. 그렇지만 요즈음 들어 이처럼 때와 곳에 맞게 잘 나누어 쓰던 말투가 사라지고, 온갖 외마디 한자말이 춤을 춥니다. 


  그러고 보면, “수면(睡眠)을 취(取)하다”처럼 말하는 분들까지 제법 됩니다. 그러니까 꾸밈없이 쓰던 말이나 누구나 알기 쉽게 쓰던 말인 “잠을 자다”는 하루하루 쓰임새가 줄어드는 노릇입니다.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셔요. 우리는 아이들을 재우려고 눕힙니다. 아이들은 자리에 누워 잠을 자려고 합니다. 꾸밈없이 쉽게 말하고 즐겁게 생각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39.7.10.달/4347.10.14.불.ㅎㄲㅅㄱ


..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827) 청하다請 4


슬라이드 제작을 위한 자금이라면 나 개인적으로도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었기에, 꽤 알아주는 기록영화 감독인 쓰치모토 노리아키 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응노·박인경·도미야마/이원혜 옮김-이응노―서울·파리·도쿄》(삼성미술문화재단,1994) 9쪽


 도움을 청했다

→ 도움을 빌었다

→ 도와 달라고 했다

→ 손을 벌렸다

→ 손을 뻗었다

 …



  보기글에서는 “노리아키 씨가 도와주기를 바랐다”고 쓸 수 있습니다. 도움을 받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저마다 다를 테니, 어떻게 도움을 바랐는가 적을 수도 있어요. “노리아키 씨한테 여러 차례 편지를 써서 도와 달라고 했다”라든지, “노리아키 씨를 끈질기게 찾아서 고개숙여 도와 달라고 빌었다”라든지 말입니다.


  알맞게 가다듬는 말투와 깨끗하게 추스르는 낱말과 올바로 살피는 말법을 찬찬히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말투와 낱말과 말법을 잘 건사하면서 언제나 ‘내 삶을 내 말에 담기’까지 마음을 기울일 수 있으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까닭은 내 마음을 말이나 글에 담아 이웃이나 동무하고 즐겁게 생각을 꽃피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이웃이나 동무하고 즐겁게 생각을 꽃피우려면 어떤 말이나 글을 써야 할까요? 딱딱하거나 어려운 말을 써야 하지 않겠지요. 차갑거나 메마른 말을 쓸 일이란 없겠지요. 4340.2.19.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슬라이드를 만들 돈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었기에, 꽤 알아주는 기록영화 감독인 쓰치모토 노리아키 씨한테 도와 달라고 했다


“슬라이드 제작(製作)을 위(爲)한 자금(資金)”은 “슬라이드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돈”이나 “슬라이드를 만들 돈”으로 고치면 좋아요. “나 개인적으로도”는 “내가”로 고치면 됩니다.


..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333) 청하다請 5


즐거운 일을 떠올리면서 잠을 청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요

《안비루 야스코/송소영 옮김-누구나 할 수 있는 멋진 마법》(예림당,2012) 53쪽


 잠을 청하려고 해도

→ 잠을 부르려고 해도

→ 잠을 자려고 해도

→ 잠이 들려고 해도

→ 자려고 해도

 …



  잠을 자려고 애쓰지만 잠이 안 올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잠아! 나한테 와 다오!” 하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글월에서는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아도”처럼 손볼 수 있습니다. “잠이 들고 싶어 눈을 감지만”처럼 손보아도 잘 어울립니다. 4347.10.1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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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889) -의 상태 1


도로의 상태가 좋지 않아 자동차로 두 시간이나 걸렸다. 도로가 나쁘다기보다는 도로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포장 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

《이케자와 나쓰키/노재영 옮김-문명의 산책자》(산책자,2009) 227쪽


 도로의 상태가 좋지 않아

→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 길 상태가 좋지 않아

→ 길이 좋지 않아

 …



  놓인 모양이나 형편을 가리켜 한자말 ‘상태’로 적바림하곤 합니다. 이 같은 한자말은 그대로 둘 수 있고, 알맞게 털어낼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두어도 나쁘지 않다고 느끼면 얼마든지 그대로 두면서 내 말투를 가다듬습니다. 털어낼 때가 한결 낫다고 여긴다면 앞뒤 흐름을 찬찬히 헤아리면서 손질합니다. “건강 상태가 좋다” 같은 말마디는 그대로 둘 수 있는 한편, “몸이 좋다”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기차가 끊긴 상태여서” 또한 그대로 두거나, “기차가 끊겨서”나 “기차가 끊기고 말아서”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거의 탈진한 상태로”라 한다면 “거의 기운이 빠진 채로”나 “기운이 거의 빠진 채로”로 손질할 수 있어요.


  생각을 조금 더 기울이면 누구나 알뜰살뜰 가다듬을 길을 찾아냅니다. 마음을 하나하나 쏟거나 바치면 언제라도 싱그럽게 다독일 길을 뚫습니다. 생각을 기울이지 않으니 찾지 못하는 길입니다. 마음을 바치거나 쏟지 않으니 다독이지 못하는 길입니다.


 도로가 나쁘다기보다는 (o)

 도로의 상태가 좋지 않아 (x)


  이 보기글을 들여다보면, 두 군데에서 “도로의 상태”로 적바림하고, 한 군데에서는 “도로가 나쁘다”로 적바림합니다. 그러니까, 세 군데 모두 “도로가 좋다”나 “도로가 나쁘다”로 적바림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번 더 마음을 들였다면 “길이 좋다”나 “길이 나쁘다”로 적바림할 수 있었겠지요.


 도로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 길을 손질하려고

→ 길을 판판하게 하려고

→ 길을 다니기 좋도록 하려고

 …


  사람이 다니는 길은 처음에는 다집니다. 다음으로는 닦습니다. 그러고 나서 손질합니다. 다니기 한결 낫도록 판판하게 다스립니다.


  이 흐름을 하나하나 살필 수 있다면, 우리 삶자락을 나타내는 말마디를 한결 알차게 여밀 수 있습니다. 이 고리를 곰곰이 뜯어볼 수 있으면, 우리 삶결을 드러내는 글줄을 더욱 튼튼하게 엮을 수 있습니다. 내 말 한 마디는 내 넋 한 구석입니다. 내 글 한 줄은 내 얼 한 조각입니다. 4343.1.7.나무/4347.10.14.불.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길이 좋지 않아 자동차로 두 시간이나 걸렸다. 길이 나쁘다기보다는 길을 손질하려고 아스팔트를 깔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


‘도로(道路)’는 ‘길’로 다듬고, “개선(改善)하기 위(爲)해”는 “고쳐 놓으려고”나 “손질하려고”로 다듬습니다. “포장(鋪裝) 공사(工事)를 하고 있기”는 “아스팔트를 깔기”나 “시멘트를 깔기”로 손질해 줍니다.



상태(狀態) : 사물ㆍ현상이 놓여 있는 모양이나 형편

   - 건강 상태가 좋다 / 기차가 끊긴 상태여서 / 거의 탈진한 상태로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173) -의 상태 2


그럼 다른 허브들의 상태는 어떨까

《안비루 야스코/송소영 옮김-누구나 할 수 있는 멋진 마법》(예림당,2012) 75쪽


 허브들의 상태는 어떨까

→ 허브들은 어떨까

→ 허브들은 어떻게 있을까

 …



  어떻게 있는지 궁금하기에 “상태는 어떨까” 하고 묻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상태는 어떨까”처럼 적으면서 묻기보다는 “어떻게 있을까”처럼 적을 때에 한결 또렷합니다. 꾸밈없이 적으면 되고, 느낌대로 적으면 됩니다. 다른 허브들은 괜찮은지 궁금하다면 “다른 허브들은 괜찮을까”처럼 적으면 돼요. 다른 허브들은 잘 있는지 궁금하다면 “다른 허브들은 잘 있을까”처럼 적으면 되지요.


  이밖에 “다른 허브들은 잘 자랄까”라든지 “다른 허브들은 씩씩할까”라든지 “다른 허브들은 튼튼할까”라든지 “다른 허브들은 안 시들었을까”처럼 적어 볼 수 있습니다. 4347.10.1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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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삶
양정자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80



함께 꾸리는 삶

― 내가 읽은 삶

 양정자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4.6.10.



  아이들이 입는 옷은 작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작은 옷을 입을 뿐, 어른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어른 가운데에는 몸집이 큰 사람이 있고 몸집이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몸집이 크대서 큰 사람이 아니고, 몸집이 작대서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


  몸집이 조그마한 아이들을 씻깁니다. 작은 옷을 벗긴 뒤 작은 몸을 슥슥삭삭 문지르면서 씻깁니다. 아직 아이들은 몸도 손도 발도 조그맣기에, 스스로 제 몸을 씻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몸집이 큰 어른이 아이들을 씻깁니다.


  기운이 센 사람은 기운이 여린 사람보다 짐을 잘 나릅니다. 기운이 세니 짐을 잘 나르거나 더 나르겠지요. 기운이 여린 사람은 짐을 덜 나를 테며, 때로는 아무 짐을 못 나를 수 있어요. 그렇지만 두 사람은 똑같이 배가 고픕니다. 센 사람이나 여린 사람이나 배고프기는 서로 마찬가지요, 밥을 똑같이 먹어야 합니다. 기운이 센 사람이라서 두 그릇을 먹거나 기운이 여린 사람이라서 반 그릇만 먹어도 되지 않습니다.



.. 할머니 품처럼 따뜻하고 광활했던 들판. 어두웠던 마음을 알 수 없는 환희로 가득 채워주었던 드높은 하늘, 뭉게구름, 반짝이던 나뭇잎들, 시뻘건 황토밭들, 그 붉은 흙 위에 어른어른 눈부셨던 빛 아지랑이들 ..  (초록빛 들판)



  아이들이 놉니다. 뛰고 달리면서 놀기도 하고, 뒹굴면서 놀기도 합니다. 까르르 노래하면서 놀기도 하고, 장난감을 잔뜩 어지르면서 놀기도 합니다. 놀다가 꽈당 넘어지기도 하고 쿵 부딪히기도 합니다. 놀다가 물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물을 튀기기도 합니다.


  노는 아이들은 저마다 놀고 싶은 대로 놉니다. 한 시간을 놀기도 하고, 두 시간을 놀기도 하며, 서너 시간이나 대여섯 시간을 잇달아 놀기도 합니다. 하루 내내 놀기도 하고, 잠을 잊은 채 놀다가 어느새 곯아떨어지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얼마만큼 놀아야 즐거울까요. 아마, 놀고 싶은 대로 놀아서 아쉬움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놀아야 즐겁겠지요. 참말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쏟아서 더는 놀 기운이 없어야 비로소 아이들은 놀이를 그칩니다.



.. 점심도 굶고 열심히 그 애를 따라다니는 나를 엄마는 걱정하셨지만, 놀이에 열중했던 우리는 배고픈 줄도 몰랐네. 무언가를 우리는 끊임없이 찾아 먹었으니까. 띠뿌리, 메싹뿌리, 진달래, 찔레순, 아카시아꽃, 버찌, 삘기, 까마중, 산딸기, 머루, 다래, 으름, 알밤, 산고욤, 홍시, 까치밥 ..  (준식이)



  함께 꾸리는 삶입니다. 두 어버이가 함께 꾸리는 삶입니다. 함께 걷는 길입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걷는 길입니다. 함께 사랑하는 하루입니다.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아끼는 하루입니다.


  여름에는 해가 떨어지면 비로소 시원하고, 가을에는 해가 떨어지면 서늘하며, 겨울에는 해가 떨어지면 춥습니다. 봄에는 해가 떨어지면 어떤 기운이 될까요. 아무래도 봄이 되어야 이 기운을 알 테지요.


  가을에 익는 나락은 갓 벤 뒤에는 겨까지 함께 먹어도 고소합니다. 아니, 갓 벤 나락은 알맹이와 겨가 모두 맛납니다. 따사로운 볕을 듬뿍 받아들인 냄새와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을나락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껍데기를 벗기지 않은 벼알일 때에는 이듬해에 볍씨로 씁니다. 사람들은 벼알을 먹을 적에 겨를 빻아서 벗깁니다. 겨를 벗긴 벼알을 심어서 싹을 틔우기는 어렵습니다. 벼알이 싹을 트려면 껍데기인 겨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씨앗은 껍데기가 있어야 땅에 뿌리를 내립니다. 모든 씨앗은 겉씨와 속씨로 이루어진다고 할 만합니다. 둘은 늘 함께 한몸을 이룹니다.



.. 청소시간, 교무실에서, 나는, 너무나 잘난 척하는 부유하고 집안 좋은 아이들이 청소는 전혀 하지 않고, 비단결 같은 희고 통통한 두 손가락 끝으로 무슨 징그러운 벌레나 잡듯이 마지못해 더러운 걸레 한 귀퉁이를 집어 흔드는 것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네 ..  (사춘기 - 청개구리)



  양정자 님이 빚은 시집 《내가 읽은 삶》(실천문학사,2004)을 읽습니다. 시집 《내가 읽은 삶》은 산문시를 담은 책이라 할 만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산문시라기보다 이야기라 할 만합니다. 할머니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할머니가 이녁 삶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스스로한테 스스로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 아버지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집 살림이 어떻게 되어 가는 줄도 모르고, 쥐꼬리만한 월급날 사오시는, 좁은 방을 가득 채웠던 책들. 사상계, 니체와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각종 철학책과 역사책들, 늘 바쁘고 피곤했던 아버지보다 내가 먼저 읽었던 책들 ..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2 - 아버지의 꿈)



  ‘노래’가 있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지어서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이런 노래를 두고 ‘민요’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지난날에는 누구나 그저 노래를 스스로 지어서 불렀습니다.


  지난날에 사람들이 스스로 지어서 부른 노래는 그예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꾸리는 삶을 스스로 가락을 입혀서 불렀습니다. 절구를 빻다가, 장작을 패다가, 나무를 하다가, 바느질을 하다가, 물레를 잣다가, 베틀을 밟다가, 바구니를 엮다가, 짚신을 삼다가, 콩을 삶다가, 메주를 띄우다가, 아이들을 재우다가, 갓난쟁이한테 젖을 물리다가, 참말 언제 어디에서나 조곤조곤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날마다 이야기잔치이면서 노래잔치였습니다.


  이야기는 늘 삶에서 태어납니다. 하루하루 꾸리는 삶을 고스란히 노래로 부릅니다. 날마다 일구는 삶을 낱낱이 노래로 부릅니다.


  즐거움이 노래가 됩니다. 서운함이 노래가 됩니다. 웃음과 눈물이 모두 노래가 됩니다. 꿈과 사랑이 노래가 됩니다. 미움과 아픔과 생채기가 노래가 됩니다. 무엇이든 노래가 되고, 무엇이든 즐거운 이야기로 뿌리를 내립니다.



.. 어려울 때 이렇게 서로 돕는 것이 사람 사는 이치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것이 삶을 사는 방식이었네. 그 훌륭한 방식을 대놓고 비난할 수는 없었지만, 내게는 너무나 싫었던 그 방식이 어린 나의 끔찍한 고민이었네 ..  (집 5 - 충남 합숙소)



  노래하는 아이 곁에는 노래하는 어른이 있습니다. 우는 아이 곁에는 우는 어른이 있습니다. 놀이하는 아이 곁에는 놀이와 일을 함께 누리는 어른이 있습니다.


  어른이 웃으면서 아이한테 웃음을 물려줍니다. 아이가 웃으면서 어른한테 웃음을 일깨웁니다. 어른이 노래하면서 아이한테 노래를 들려줍니다. 아이가 노래하면서 어른한테 노래를 불러일으킵니다. 오늘 하루도 아름답게 이야기 한 타래가 노랫가락처럼 포근하게 흐릅니다. 4347.10.1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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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골분교운동회 (사진책도서관 2014.10.12.)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



  강재훈 님 사진책 《산골분교운동회》(가각본,2006)를 새로 장만했다. 도서관에 한 권 있지만, 한 권 더 두어도 괜찮으리라 생각한다. 이 사진책을 들여다볼 때면 늘 아쉽다. 《산골분교운동회》는 그야말로 아름답게 빛날 만한 사진책이 될 수 있었으나, 사진가 스스로 아름다운 숨결을 꺾고 말았다. 멧골자락 작은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준 너른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았다.


  사진을 왜 찍는가. 사진은 무슨 구실을 하는가. 사진책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사진은 사진일 뿐, ‘기록’이 아니다. 사진은 오늘 이곳을 찍을 뿐, ‘다시 찾아올 수 없는 아득한 옛날을 추억으로 적바림’하지 않는다. 사진책은 서로 도란도란 나눌 이야기꽃일 뿐, 작품집이나 선집이 아니다.


  멧골자락 작은 마을에서 벌이는 운동회에는 사람이 더 많아야 즐겁지 않다. 그저 운동회를 벌이기에 즐겁다. 멧골마을에서 젊은이와 어린이가 도시로 떠나기에 멧골학교가 썰렁하거나 슬프지 않다. 멧골사람은 예나 이제나 이녁 보금자리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삶을 가꾼다.


  사진책 《산골분교운동회》는 이 같은 대목을 짚지 못하고 말았다. 재미나 보이거나 도드라져 보이거나 남달라 보이는 모습을 잡으려고 하는 데에 얽매이고 말았다. 스러져 가거나 잊혀져 가거나 멀어져 가는 모습을 아련하게 붙잡으려고 하는 데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러면, 나는 이 사진책을 왜 다시 장만했는가? 우리 사진책도서관이 시골마을 작은 학교에 깃든 곳인 터라, ‘멧골자락 작은 학교’가 나오는 사진책이 애틋하기 때문이다. 오직 이 때문이다.


  두 아이가 도서관에서 책으로 논다. 두 아이는 도서관으로 오가는 길에 마을길이나 들길을 개구지게 달리면서 논다. 도서관에서는 책으로 놀고, 들길에서는 들바람으로 논다. 우리는 아이들과 어떻게 어디에서 놀 때에 즐거운가 돌아본다. 우리는 아이들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놀도록 이끌 때에 즐거울는지 헤아려 본다. ㅎㄲㅅㄱ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 보태 주셔요 *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0.5341.7125.) *

* 도서관 나들이 오시려면 먼저 전화하고 찾아와 주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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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사람이 아름답다면



  책 읽는 사람이 아름답다면, 왜 아름다울까 헤아려 본다. 책을 많이 읽기에 아름다울까? 책을 두루 읽거나 깊이 읽었기에 아름다울까? 언제나 책을 읽기에 아름다울까? 아이와 함께 책을 읽기에 아름다울까?


  책 읽는 사람이 아름답다면, 책을 읽는 몸짓이나 모습이나 매무새 때문은 아니라고 느낀다. 스스로 삶을 즐겁게 가꾸면서 책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에 아름다우리라 느낀다. 스스로 사랑을 곱게 여미면서 책을 손에 쥘 수 있으니 아름다우리라 느낀다. 스스로 꿈을 밝게 지으면서 책을 손에 쥘 수 있어서 아름다우리라 느낀다.


  삶을 가꾸면서 책을 길동무로 삼는다. 사랑을 여미면서 책을 마음벗으로 여긴다. 꿈을 지으면서 책을 이야기지기로 둔다. 삶을 누리면서 책이 있고, 사랑을 돌보면서 책이 있으며, 꿈을 키우면서 책이 있다. 4347.10.1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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