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관한 명상 - 전민조 사진집 눈빛사진가선 10
전민조 지음 / 눈빛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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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89



내 아름다운 손으로 빚는 사진

― 손에 관한 명상

 전민조 사진

 눈빛 펴냄, 2014.11.25.



  테드 랜드 님 그림에 빌 마틴 주니어 님과 존 아캠볼트 님이 글을 넣은 그림책 《손, 손, 내 손은》(열린어린이,2005)이 있습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을 보면 첫머리를 “손, 손, 내 손은 슝 던지고 꽉 잡아요.” 하고 엽니다. 이윽고, “발, 발, 내 발은 또박또박 걷고 우뚝 멈춰요.” 하고 이어지지요. 다음으로, “코, 코, 내 코는 흠흠 냄새 맡고 쌕쌕 숨쉬어요.” 하고 말하다가 “눈, 눈, 내 눈은 또랑또랑 쳐다보고 뚝뚝 눈물 흘려요.” 하고 말해요. 이렇게 손이며 발이며 코와 눈이며 하나씩 이야기하면서 다 다른 아이들이 나옵니다. 지구별에 있는 온갖 겨레 아이들이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옷차림과 생김새로 지내는 모습이 흘러요. 그림책을 조금 더 넘기면, “무릎, 무릎, 내 무릎은 콰당탕 엎어질 땐 따따금 아파요.” 하는 이야기와 “뺨, 뺨, 내 뺨은 쪽 뽀뽀해 주면 발그레 빨개져요.” 같은이야기가 흐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어린이와 어른 모두 콰당탕 엎어지면 무릎이 아픕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 누군가 뺨에 쪽 뽀뽀해 주면 발그레 빨개지면서 기쁜 사랑이 흐릅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 두 손을 써서 공을 던지거나 받을 뿐 아니라, 밥을 지어서 차리고 수저를 들어 밥을 먹어요. 어린이와 어른 모두 두 발을 써서 걷고 달리고 뛰고 구릅니다.



.. 서로 먼저 이해를 구하고 용서하면서 손을 먼저 내미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





  사진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사진(寫眞)’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나도록 찍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으로 풀이합니다. 영어사전에서 ‘photograph’를 찾아보면, “A photograph is a picture that is made using a camera.”로 풀이합니다. 한국말사전과 영어사전 모두 ‘기계를 다루어 기록하는 것’을 ‘사진’이라 말해요. 그러나, 우리는 사진을 이야기할 적에 ‘기계질’이나 ‘기록’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이 오직 기계질이나 기록뿐이라면 우리가 굳이 사진을 문화나 예술로 다룰 까닭이 없을 테고, 사진이 그저 기계질이나 기록뿐이라면 사진을 즐기거나 읽거나 나누거나 누릴 까닭이 없으리라 봅니다. 사진은 기계질이나 기록에서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기계를 빌어서 우리 마음을 나타내고 생각을 나눌 수 있기에, 사진을 문화나 예술로 다루면서 이야기를 한다고 봅니다.


  나는 사진을 볼 때마다, ‘내 아름다운 손으로 빚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내가 찍은 내 사진은 내 손으로 빚은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내 이웃이 찍은 사진은 내 이웃이 이녁 손으로 빚은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전문가가 찍든 전문가 아닌 사람이 찍든 모든 사진은 ‘아름다운 손으로 빚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사진을 가르치거나 배울 적에는 기계질이나 기록 값어치만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습니다. 학교나 강단에서 기계질이나 기록 값어치만 가르치거나 배운다면, 어느 모로 본다면 학교나 강단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계질’은 사진기를 장만할 때 상자에 함께 담긴 ‘사용 설명서’를 읽으면 얼마든지 익혀서 ‘사진기라는 기계를 다룰 수 있’고, ‘기록’은 사진 역사를 다룬 두툼한 책 한 권을 읽기만 하더라도 지식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이 사진이 되는 까닭은, 사진이 기계질이나 기록이 아닌 ‘손질’이요, ‘손질’이란, 내 마음을 기울이는 손길이며, 내 생각을 써서 움직이는 손놀림이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요리가가 호텔에서 지어서 차리는 밥이기에 아이들이 맛나게 먹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여느 살림집 여느 어버이가 된장국에 나물무침 하나만 밥상에 올려도 맛나게 먹습니다. 아이들은 ‘값진 밥’이나 ‘비싼 밥’을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이 어린 밥’을 바랍니다. 사랑이 어린 손으로 지은 밥을 먹을 때에 아이들이 즐겁습니다. 사랑이 담긴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길 때에 아이들이 기쁩니다.


  사랑이 어린 손으로 사진기라는 기계를 손에 쥘 적에 비로소 ‘사진’이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사랑이 어리지 않은 손으로 사진기라는 기계를 쥔다면, 자칫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좋은 뜻으로 사진기를 손에 쥐었어도, 사진에 찍힐 사람한테서 허락이나 동의를 받지 않고 찍는 사진이라면,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초상권 문제가 불거지지요. 저작권 문제도 이런 바탕에서 비롯해요. 어느 한 가지 모습은 꼭 한 사람만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누구나 어느 곳이든 가서 ‘어느 한 가지’ 모습을 비슷하게 찍을 수 있고 조금 바꾸어서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가지 모습을 왜 비슷하게 찍거나 조금 바꾸어서 찍을까요? 어떤 마음이 되어 이렇게 사진을 찍을까요? 굳이 이렇게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이나 애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애무하는 모습은 쳐다보는 모습만으로도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풍경이다 ..



  전민조 님이 선보이는 사진책 《손에 관한 명상》(눈빛,2014)을 읽습니다. 이 나라에서 저마다 다른 꿈을 가슴에 품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온갖 사람들 이야기를 ‘손’을 바라보면서 들려줍니다. 손길에서 이야기를 읽고, 손길에서 꿈을 읽습니다. 손길에서 사랑을 읽고, 손길에서 눈물과 웃음을 읽습니다. 손길에서 고단한 하루를 읽고, 손길에서 기쁜 웃음을 읽습니다. 손길 하나를 바라보아도 모든 이야기를 읽을 만합니다.


  손이 아닌 발을 바라보아도 모든 이야기를 읽을 만합니다. 손과 발뿐 아니라, 눈을 읽어도, 어깨를 읽어도, 엉덩이를 읽어도, 머리카락을 읽어도, 안경을 읽어도, 손에 쥔 책을 읽어도, 손에 든 호미를 읽어도, 발에 꿴 신을 읽어도, 발가락에 낀 때를 읽어도, 온몸에 묻은 먼지와 때를 읽어도, 얼굴에 짓는 웃음과 눈물을 읽어도, 뒷모습을 읽어도, 앞모습을 읽어도, 우리는 늘 언제 어디에서나 수많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야기를 읽기에 사진이 됩니다. 이야기를 나누려 하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사진을 찾아 읽습니다. 이야기를 짓기에 사진을 찍는 사람이 되고, 이야기를 지어서 기쁘게 이웃과 나누려 하기에 ‘사진가’라는 이름을 아름답게 얻습니다.



.. 아름다운 손도 사랑이 식으면 폭력을 휘두르는 공포의 손으로 변하는 경우도 많다 ..





  사진을 찍는 사람은 무엇을 헤아려야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초점이나 셔터빠르기나 조리개값이나 빛값을 헤아려야 즐거울까요. 사진기에 눈을 박아 내 곁에 있는 이웃과 동무를 바라볼 적에, 사진가 마음에 ‘이웃을 아끼는 숨결’과 ‘동무를 사랑하는 넋’이 없다면, 사진기라는 기계를 손에 쥔 사람은 어떤 작품을 빚을까요.


  사진이 창작이 되려면, ‘남이 안 찍은 모습’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이 창작이 되려면, ‘남이 찍은 모습과 똑같지 않도록 살짝 바꾼 틀과 장면 연출’로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이 창작이 되려면, 사진에 ‘사진기를 손에 쥔 내 이야기’를 담고, ‘사진기를 바라보는 이웃과 동무가 살아온 이야기’를 싣되, 두 사람은 따사로운 사랑과 너그러운 믿음으로 어우러져야 합니다.


  공모전을 마음에 두고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전시회를 마음에 두고 사진을 만드는 사람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작품집을 내거나 문화재단 지원금을 마음에 두고 사진을 조합하는 사람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사진이 사진이 되도록 사진을 찍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진에 사랑을 담도록 마음을 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방통행으로 강요하는 사랑’이 아니라, 사진에 찍히는 사람이 너그러이 받아들이면서 서로 이웃과 동무가 될 수 있도록 따사로운 사진을 찍을 줄 아는 참다운 사랑을 먼저 가슴에 심은 뒤 사진기라는 기계를 들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민조 님이 선보이는 사진책 《손에 관한 명상》은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사진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찍을 모습은 대단한 작품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나(사진가)와 네(사진에 찍히는 이웃)가 모두 아름다운 사람인 줄 알면 됩니다. 나는 ‘사진가’이고, 너는 ‘모델’이나 ‘피사체’가 아닙니다. 사진에 찍히는 사람은 바로 ‘내 얼굴’입니다. 모델을 찍거나 피사체를 다루는 사진이 아니라, 구도와 장면을 연출하는 사진이 아니라, 주제를 일방통행으로 강요하는 사진이 아니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사진이 될 때에 비로소 ‘사진’입니다.


  《손에 관한 명상》 첫머리를 열면서 마지막을 닫는 사진은 아기와 어른이 서로 맞잡은 손입니다. 아기와 어버이일 수 있고, 아기와 아버지일 수 있으며, 아기와 할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한쪽이 어떤 어른이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다만, 두 사람은 ‘사진을 찍으려고’ 손을 맞잡지 않습니다. 아기한테 손을 내민 어른도, 어른 손에 제 작은 손을 맡긴 아기도, ‘사진 작품이 될 뜻’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오직 둘 사이에 사랑이 따스하게 흐르기에 손을 맞잡거나 맡깁니다.


  즐겁게 빚은 사진은 우리가 서로 나누는 즐거운 삶이 무엇인가 하는 실마리를 풀어 줍니다. 꾐수를 부려 빚은 사진은 우리 사이에 엉성한 울타리를 쌓고 마는 안타까운 실타래를 보여줍니다. 사진은 모든 실마리를 풀고, 사진은 온갖 실타래로 엉킵니다. 어느 길이 즐거울까요. 어느 길이 고단할까요. 우리는 서로 즐겁게 어우러지면서 살고 싶을까요, 아니면 우리는 서로 미워하거나 다투면서 고단하고 싶을까요. 사진기를 손에 쥔 손은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4347.12.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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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새로 태어나서 자란다. 아이는 무럭무럭 커서 고운 짝을 만나 아이를 낳는다. 새로 태어난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면서 새로운 어른이 되고, 새로운 고운 짝을 만나 다시금 새롭게 아이를 낳는다. 오래도록 이어지는 ‘아이낳기’와 ‘아이돌보기’는 오직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사랑이 있기에 아이를 낳고, 사랑이 있어서 아이를 돌본다. 아이는 늘 사랑을 먹고, 아이는 언제나 사랑을 바라며, 아이는 노상 사랑을 나눈다. 만화책 《은여우》 둘째 권을 읽는다. 만화책 《은여우》 둘째 권에는 어릴 적부터 사랑을 제대로 못 받으면서 마음에 울타리를 쌓은 아이가 나오고, 이 아이가 새로 깃드는 집에는 어릴 적부터 두고두고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마음에 아무런 울타리가 없는 아이가 있다. 두 아이는 서로 어떻게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사랑을 못 받은 아이는 다른 아이가 보여주는 사랑을 어떻게 느낄까. 사랑을 늘 받으며 자란 아이는 이제껏 사랑을 못 받은 아이한테 어떻게 사랑을 알려줄 수 있을까. 아이다운 눈빛과 손길과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는 실타래를 《은여우》 둘째 권에서 조곤조곤 읽는다. 4347.12.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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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여우 2
오치아이 사요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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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끝내기와 ‘옳게’ 끝내기



  아직 밝힐 수 없는 어떤 일을 푸느라 지난 금요일 저녁부터 몸살을 앓는다. 밥 한 술도 물 한 모금도 못 마신다.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주면서 나도 한 술을 떴다가 배앓이를 하고, 목이 타는 듯해서 물 한 모금을 마시면 또 배앓이를 한다. 무엇을 먹든 안 먹든 두세 시간마다 물똥을 눈다. 아무것도 안 먹어도 물똥이 제법 나온다.


  나흘째 몸살을 앓으면서 곰곰이 생각한다. 이번에 찾아온 일을 ‘빨리’ 끝내야 하는가 ‘옳게’ 끝내야 하는가.


  몸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면, ‘빨리’ 끝내고 싶다. 이 일을 빨리 끝낸다면 몸은 쉬 나아지리라 본다. 그러나, ‘옳게’ 끝내지 못할 테니, 뒤탈을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한다. 더는 몸이나 마음을 안 써도 될 테지만, 앞으로 몸이나 마음이 좋을 수 있을는지 알 길이 없다.


  마음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면, ‘옳게’ 끝내고 싶다. 이 일이 언제 끝나더라도 ‘옳게’ 끝내면, 바로 이때부터 몸과 마음은 환하게 새로 열리겠구나 하고 느낀다. ‘옳게’ 끝내려 하면, 빨리 끝날 수 있고 늦게 끝날 수 있지만, 아무튼 틀림없이 ‘옳게’ 끝날 뿐 아니라 아무런 탈이 없을 테지.


  자리에 누워서 쉬자. 삼십 분쯤 쉬고 나서 아이들 데리고 마을 샘터에 가서 물이끼를 걷자. 그러고 나서 밥을 차려서 아이들끼리 먹으라 한 다음 다시 쉬고, 차근차근 지켜보자. 나와 우리 식구한테 찾아온 이 일이 ‘옳게’ 끝날 수 있도록 마음을 오롯이 기울이자. 내가 할 일은 몸을 쉬면서 마음을 기울이는 한 가지라고 느낀다. 4347.12.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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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6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4-12-16 06:37   좋아요 0 | URL
바라는 바는 오직 하나예요.

`잘못해서 죄송하다` 한 마디입니다.
그리고, 잘못해서 죄송한 줄 알면
하루 빨리 그것들을 치우고 없애야 할 테지요.

저희는 저희가 할 수 있는 힘을 다 했는데
그곳에서 더 아무것도 안 하고
엉뚱한 짓을 한다면...
그네들 몫이니 더 손을 쓸 마음이 없고
저희는 이제 저희 일에 더 마음을 쏟으려 해요.

고맙습니다.
모두 옳고 바르며 아름답게 끝맺으리라 믿어요 ^^
 

[시로 읽는 책 181] 웃음노래



  손 잡고 함께 놀 적에

  어깨동무하고 놀 때에

  곱게 터지는 웃음노래 



  웃음을 바라면서 하루를 열 적에는 웃을 일이 찾아옵니다. 웃음을 바라지 않고 하루를 맞이할 적에는 웃을 일도 웃음이 터질 일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도 얼마나 고되거나 짜증스러울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열 적에는 고되면서 짜증서러운 일이 찾아옵니다. 고되다거나 짜증스럽다는 생각이 없이 햇살을 맞이하고 햇볕을 쬐면 해님이 베푸는 기운을 고이 받습니다. 4347.12.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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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남은 자국



  책에 글 몇 줄 끄적이면, 이 자국은 책과 함께 고이 흐른다. 책을 장만한 뒤 도장을 찍으면, 이 자국은 책과 나란히 오래도록 흐른다. 책에 자국을 남긴 사람은 서른 해나 쉰 해쯤 뒤에는 이 땅에 없을 수 있다. 책에 도장을 찍은 도서관이나 학교나 시설은 마흔 해나 예순 해 뒤에는 이 땅에 없을 수 있다.


  책에 자국을 남긴 사람은 사라져도, 이이가 낳은 아이가 책을 물려받을 수 있다. 책에 도장을 찍은 곳이 없어져도, 다른 곳이 튼튼하게 서서 오래된 책을 이어받을 수 있다. 그리고, 오래된 책도 오래된 사람과 집처럼 조용히 스러지면서 자취를 감출 수 있을 테지.


  새로 책 한 권을 장만하면서 맨 처음으로 연필 자국이나 도장 자국을 남긴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이 책에서 길어올리면서 이녁 삶을 가꾸었을까. 스무 해나 마흔 해나 예순 해쯤 흘러 헌책방에서 묵은 책 하나 손에 쥐는 사람은 이때부터 어떤 이야기를 이 책에서 새롭게 느끼면서 이녁 삶을 가꿀까.


  내가 손에 쥐는 책에는 내 손자국과 연필자국이 남는다. 내가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움직인 자국이 책마다 고스란히 남는다. 헌책이라 한다면, 자국이 있는 책이라고 할까. 앞사람 자국을 더듬으면서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자국을 남기는 일이 책읽기라고 할까. 왜냐하면, 아무리 ‘빳빳한 새책’을 장만해서 맨 처음으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책은 ‘글쓴이가 먼저 자국을 남긴 이야기’이다. ‘깨끗한 헌책’이란 껍데기만 멀쩡한 책을 가리킨다. 우리가 읽는 책은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일 테니, 앞서 이 길을 걸어간 사람이 남긴 자국을 헤아리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새로운 자국을 보태거나 연다. 4347.12.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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