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18 ‘엉뚱하’거나 ‘나답’거나



  누군가 어떤 일이나 말을 할 적에 ‘엉뚱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둘레에서 나를 바라보며 ‘엉뚱하다’고 말할 수 있고, 내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엉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엉뚱하다’는 어떤 뜻으로 쓰는 낱말일까요? 이 낱말은 모두 세 가지 뜻으로 씁니다. 첫째, “사회에서 흔히 바라보는 눈길이나 생각과 크게 다르다”입니다. 둘째, “말이나 몸짓이 제 주제에 맞지 않게 지나치다”입니다. 셋째, “사람·일·것이 오늘 이곳에서 어떤 사람·일·것하고 얽히지 않다”입니다. “엉뚱한 생각은 그만두렴(1)”이라든지 “엉뚱한 짓을 일삼는다(2)”라든지 “엉뚱한 사람이 다친다/엉뚱한 곳에 왔다(3)”처럼 씁니다. 그러니까, ‘엉뚱하다’고 할 적에는 ‘사회 흐름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나 ‘사회에서 세운 틀을 넘어선다’나 ‘사회에서 시키는 길을 가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리키는 낱말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나는 사회의식을 따라야 할까요? 나는 시사상식이나 고정관념을 내 머릿속에 새겨야 할까요? 나는 남들이 하는 대로 똑같이 해야 할까요? 나는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어서 예순 몇 살까지 달삯을 받으며 일하다가 그 나이부터 일을 쉬고는 연금을 받아야 할까요?

  한국 사회를 본다면, 대학교를 안 가는 몸짓만으로도 ‘엉뚱한’ 셈입니다. 고등학교를 그만두어도 엉뚱하다 할 테고, 초등학교조차 안 다닌다고 하면 아주 엉뚱하다 할 터입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나 학원을 아예 다닌 적이 없다면 그야말로 엉뚱하다 할 테지요. 가시내가 치마를 안 입고 바지를 입거나 머리를 짧게 치거나 민다든지, 사내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다든지, 머리카락을 노랗거나 빨갛게 물들인다든지, 옷차림이나 몸매나 얼굴에는 마음을 안 쓴다든지, 도시에서 안 살고 시골에 살려 한다든지, 이러구러 사회의식에서 가리키는 ‘엉뚱한’ 모습은 참으로 많습니다.

  ‘엉뚱하다’라는 낱말은 사회에서 사람을 길들이려고 쓰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사회의식을 거스르려는 사람’이나 ‘사회의식과 동떨어지려는 사람’을 붙잡거나 옭아매거나 가두려고 쓰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사회에서 흔히 바라보는 눈길이나 생각과 크게 다르다고 한다면, 이러한 눈길이나 생각은 어떠한 모습일까요? ‘내가 나다운 눈길이나 생각’입니다. 말이나 몸짓이 제 주제에 맞지 않게 지나친 모습이란 있을까요? 없습니다. 사람·일·것이 다른 어떤 사람·일·것하고 얽히지 않는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엉뚱하거나 뜬금없는 모습일까요? 이 또한 ‘내가 나다운 모습으로 가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의식과 얽히지 않는 모습이란 ‘홀가분한(자유로운)’ 모습이니까요.

  대학교에 가야 한다면 가면 됩니다. 대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면, 아니 대학교에 갈 까닭이 없이 내가 내 길을 손수 닦아서 즐겁게 간다면, 이 길은 언제나 ‘내 길’이요 ‘내 모습’이며 ‘내 삶’이자 ‘내 숨결’입니다. 나다운 삶이라면, 나로서는 고등학교이든 중학교이든 초등학교이든 굳이 안 다녀도 됩니다. 따로 무엇을 남한테서 더 배우고 싶으면 학원에 갈 수 있습니다. 따로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데 스스로 배울 수 있으면 학원에 갈 일이 없습니다.

  나는 남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남이 나더러 숨을 쉬라고 하니 숨을 쉴까요? 아닙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오늘 이곳에서 살고 싶기에 숨을 쉽니다. 오직 내 넋이 바라는 뜻에 따라서 숨을 쉽니다. 남이 나더러 밥을 먹거나 잠을 자라고 하니까 밥을 먹거나 잠을 자나요? 아닙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오늘 이곳에서 살면서 일하거나 놀고 싶으니 밥을 먹거나 잠을 자면서 새로운 기운을 얻으려고 합니다.

  나는 남이 보기에 ‘엉뚱한’ 짓을 하거나 ‘엉뚱한’ 말을 하거나 ‘엉뚱한’ 데에 끄달려서 ‘엉뚱한’ 훈련이나 공부를 할까요? 아닙니다. 나는 내 삶을 짓는 길을 기쁘게 걸어가면서 내 넋을 사랑스레 가꾸는 숨결이 되고자 웃고 노래하면서 훈련이나 공부를 합니다. 길에서 춤을 추든 노래를 하든 입맞춤을 하든, 나는 스스로 마음에 일으킨 기쁜 생각에 따라 움직이면서 하루를 삽니다. 사회의식은 이를 모두 ‘엉뚱하다’고, 때로는 ‘미쳤다’고 할 테지만, 나는 늘 ‘나답게’ 삽니다.

  남들은 나더러 ‘너 참 엉뚱하네!’ 하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한테 기쁘게 ‘나는 참 나답네!’ 하고 웃으며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식에 젖은 사람들은 ‘나다운 결’을 가꾸려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자꾸 ‘엉뚱하다’라는 낱말을 심으려 합니다. 나다운 생각을 바꾸어서 사회의식으로 돌리려고 하는 생각에서 이러한 낱말을 씁니다. 그래서 나는 사회의식한테 말하지요. 그래, 그런데 말이지요, 내가 나로서 이녁을 바라보자니, 이녁이야말로 엉뚱하네요, 하고 말합니다. 이녁이야말로 이녁다움을 찾거나 느끼거나 바라보거나 생각하려 하지 않으니까, 이녁이야말로 참으로 엉뚱하네요, 이녁도 부디 이녁다움을, 그러니까 ‘나다움’을 찾고 느껴서 바라보면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요, 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엉뚱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엉뚱합니다. 우리는 우리답습니다. 나는 엉뚱하지 않습니다. 네가 엉뚱할 뿐입니다. 나는 나답고, 너도 너답기에, 서로 ‘나다운’ 길로 함께 갑니다. 4348.2.13.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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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노래 58. 설날



설빔은 설에 입는 새옷

한가위빔은 한가위 새옷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를 귀여워 하시면서

언제나 기쁘게 고운 옷을 

선물해 주신다.

어머니 아버지는

우리 머리카락을 빗고

옷을 깨끗이 빨아 주시고

나와 동생은 또 새롭게

뛰어놀면서 웃고 노래하지.

다 같이 설날에 모여

신나는 이야기잔치.



2015.2.1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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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 되풀이하는 장난감 광고



  ‘텔레비전이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사흘째 머문다. 이래저래 잘 뛰어놀던 아이들한테 한두 차례 만화영화를 보여주려 하는데, 만화영화가 조금 흐르다가 으레 광고가 나오는데, 참으로 오랫동안 똑같은 광고가 수없이 되풀이된다. 아이들이 장난감이나 인형을 반드시 사야 하도록 머릿속에 어떤 그림을 팍팍 집어넣으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참 보다가 끊어진 만화영화를 더 보려면 광고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아이들한테 장난감을 사라고 부추기는 광고를 보면 ‘너, 이것 사 달라고 조르지 않으면 안 돼’ 하고 길들이는 이야기가 흐른다.


  예부터 장난감은 언제나 어버이가 손수 깎고 다듬어서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이 제법 자라면 굳이 어버이 손을 빌지 않아도, 아이들이 손수 깎고 다듬어서 스스로 즐겼다. 이제 장난감은 가게에 가서 꽤 많은 돈을 치러서 장만해야 하는 것이 된다. 오늘날 어버이가 장난감을 손수 깎고 다듬어서 선물하고 싶다 하더라도, 집 둘레에서 나무를 얻기란 아주 힘들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마땅한 나무를 어디에서 찾을까? 시골에서는 이럭저럭 나무를 얻는다 하더라도, 도시에서는 나무를 어디에서 볼 수 있는가?


  숲을 잃고 나무를 빼앗긴 오늘날 사람들은 삶을 손수 지어서 누리는 길을 아주 잃거나 잊는다. 숲과 나무를 곁에서 누리지 못하는 오늘날 사람들은 오로지 돈만 많이 벌어야 하는 얼거리에 스스로 갇힌다. 텔레비전을 꺼도 가게마다 온갖 장난감이 아이들을 꼬드긴다. 4348.2.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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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문학을 짓는 사람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생각할 때에 비로소 문학이 태어납니다. 삶을 깊이 들여다보거나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문학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앞서, 노래와 춤이 늘 우리한테 있습니다. 날마다 기쁘게 노래하고 춤추면서 삶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고, 노래와 춤을 바탕으로 삶을 깊게 들여다보거나 생각합니다.


  노래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은 삶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노래 없는 일이란 즐거움이 없는 일이요, 톱니바퀴처럼 얽매인 나날입니다. 춤추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은 삶을 넓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춤 없는 일이란 재미가 없는 일이요, 남한테 종이 되어 짓눌리는 나날입니다.


  씨앗을 심을 적에도, 풀을 벨 적에도, 밥을 지을 적에도, 옷을 기울 적에도, 놀이를 할 적에도, 동무와 길을 나설 적에도, 잠을 잘 적에도, 젖을 물릴 적에도, 가을걷이를 할 적에도, 콩을 털 적에도, 방아를 찧거나 베틀을 밟을 적에도, 우리는 늘 노래와 춤을 함께 누렸습니다. 노래와 춤이 있기에 웃음과 이야기가 있고, 웃음과 이야기가 있기에 노래와 춤이 있습니다. 둘은 서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둘은 외따로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웃지 않고 일만 해서 돈만 벌려는 사람이 부쩍 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노래와 춤이 없이 교과서 지식만 머릿속에 집어넣어 시험점수를 높이려고 하는 학교교육만 도사립니다. 즐거워서 하는 일이 아니라 ‘감정노동’이라고 하듯이, 억지로 짓는 웃음으로 억척스럽거나 악쓰면서 돈을 벌어야 겨우 살림을 잇는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이런 모습을 그대로 담는 문학이 나와요. 웃음도 노래도 없는 문학이 태어나고, 이야기도 춤도 없는 문학이 자꾸 나옵니다. 어른문학뿐 아니라 어린이문학도 이와 같습니다.


  ‘해와 달’ 이야기이든, ‘할미꽃’ 이야기이든, ‘풀개구리’ 이야기이든, 이런 이야기에는 눈물만 서리지 않습니다. 아픔과 슬픔을 삭여서 새로운 웃음과 이야기로 피우려고 북돋우는 사랑이 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원수와 권정생 문학이 아픔과 슬픔을 웃음과 이야기로 삭여서 들려주는 어린이문학이요, 서양에서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나 셀마 라게릴뢰프 문학이 아픔과 슬픔을 웃음꽃과 이야기꽃으로 다시 길어올리는 어린이문학입니다.


  삶을 깊이 들여다보거나 헤아리면서 짓는 문학은 우리한테 나 스스로와 이웃을 더욱 곰곰이 살피도록 이끕니다. 어른문학이나 어린이문학을 짓는 사람은 바로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생각하는 사람이요, 사랑과 꿈으로 삶을 짓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론이나 지식이나 권력이나 학문이나 예술이나 종교나 과학으로는 문학을 짓지 못할 뿐 아니라, 삶도 못 짓습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과 꿈으로 문학을 지을 뿐 아니라, 삶을 짓고, 생각과 숨결을 짓습니다. 4348.2.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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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85) 눈밝은이


  눈이 밝은 사람이 있습니다. 눈이 밝아서 무엇을 바라보든 제대로 헤아리면서 깊이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이 맑은 사람이 있습니다. 눈이 맑아서 무엇을 마주하든 따스하고 너른 사랑으로 어루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귀가 밝은 사람이 있습니다. 귀가 밝아서 무엇을 듣든 제대로 곱씹으면서 깊이 되새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귀가 맑은 사람이 있습니다. 귀가 맑아서 언제 어디에서라도 누구하고나 따사롭고 넉넉한 사랑으로 어깨동무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과 귀가 밝은 사람이 있듯이, 입에 밝은 사람이 있습니다. 입이 밝다면 어떠한 모습일까요? 입이 밝은 사람은 둘레에 있는 사람들이 머리를 번쩍 뜨거나 깨도록 이끌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라고 할 만할까요? 입이 맑은 사람이 있으면, 이녁은 누구하고나 따뜻하고 너그러운 숨결로 이야기꽃을 피운다고 할 만할까요?


 눈맑다 . 귀맑다 . 입맑다

 눈밝다 . 귀밝다 . 입밝다


  한겨레는 예부터 ‘귀밝이술’을 마십니다. 나이가 들어도 귀가 어둡지 않도록 돕는 술이라고 합니다. ‘귀밝이’를 생각한다면 ‘귀어둠’도 함께 생각할 테지요. 그래서, 나이가 든 탓에 ‘귀어둠’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을 테고, 나이가 들지 않아도 ‘귀어둠’이 되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스스로 귀를 닫으면 귀어둠이 되고, 스스로 귀를 열면 ‘귀밝이(귀밝음)’이 됩니다.


  눈이 맑은 사람은 ‘눈맑은이’입니다. 귀가 맑은 사람은 ‘귀맑은이’입니다. 이러한 낱말은 한국말사전에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아름다운 사람을 가리킬 새로운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다.


  ‘눈맑은이·눈밝은이’가 곁에 있으면 아주 든든합니다. ‘귀맑은이·귀밝은이’가 이웃에 있으면 무척 즐겁습니다. ‘입맑은이·입밝은이’가 내 동무라면 대단히 기뻐요. 한편, 나 스스로 눈이 맑고 귀가 밝으며 입이 사랑스럽도록 다스릴 수 있습니다. 4348.2.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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