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94) 풀솜할매


아궁이 앞에서 불때던 풀솜할매가 / 찬장에 숨겼다 꺼내 마시곤 / 나무광 뒤로 된시름 던지듯

《김수우-붉은 사하라》(애지,2005) 52쪽



  우리는 흔히 ‘외할머니·외할아버지’와 ‘친할머니·친할아버지’ 같은 말을 씁니다. 그런데 ‘外’와 ‘親’이라는 앞머리는 한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말을 제법 오래 썼으나, 이 말은 한자가 이 땅에 들어오고 나서 퍼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한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앞서 우리는 어떤 말을 썼을까요? 이 대목을 알기는 쉽지 않지만, 지난날에는 따로 ‘외·친’으로 가르지 않고 그냥 ‘할머니·할아버지’라고만 썼을 수 있습니다. 여느 시골에서는 두고두고 집과 살림을 고스란히 물려받으면서 살았을 테니 굳이 ‘외·친’으로 가를 일이 없었다고도 할 만합니다. 어머니 쪽 할머니와 아버지 쪽 할머니를 따로 갈라야 했다면, 이를 가리키는 오래된 이름도 틀림없이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그런데, ‘외할머니’를 가리키는 이름이 하나 따로 있습니다. 바로 ‘풀솜할머니’입니다. 고장에 따라서 ‘풀솜할매’나 ‘풀솜할미’처럼 쓰기도 합니다. ‘풀솜’은 “실을 켤 수 없는 허드레 고치를 삶아서 늘여 만든 솜”이라고 합니다. “빛깔이 하얗고 반짝거리며 가볍고 따뜻하다”고 해요. 한국말사전을 보면 ‘풀솜할머니’가 올림말로 나옵니다. 뜻풀이는 “‘외할머니’를 살가이 이르는 말. 외손자를 사랑하는 따뜻하고 두터운 마음을 나타내려는 뜻으로 쓴다”로 나옵니다.


  ‘풀솜할머니(풀솜할매, 풀솜할미)’라는 낱말은 누에고치가 이 땅에 들어오고 나서 생겼으리라 생각합니다. ‘풀솜’을 빗대어서 쓰는 낱말이니까요. 이렇게 따지면 ‘풀솜할머니’라는 낱말이 처음 생겨서 쓰인 지 무척 오래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풀솜할머니

 풀솜할아버지


  ‘풀솜할머니’라는 낱말은 있으되 ‘풀솜할아버지’라는 낱말은 없는 듯합니다.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이 아예 없는지 아니면 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외할머니처럼 따뜻하고 두터운 마음으로 아이를 보살피려는 외할아버지도 틀림없이 있어요. 그러나, ‘풀솜할아버지’라는 낱말은 따로 안 쓴다면, 아무래도 할아버지는 할머니보다 아이를 덜 따뜻하거나 덜 살가이 아낀다고 여길 만하구나 싶어요. 가없는 사랑과 믿음으로 아이를 살가이 아끼는 따뜻한 품이 바로 ‘풀솜’과 같은 숨결이요, 이러한 숨결을 ‘풀솜할머니’라는 낱말에 담았구나 싶어요.


  여기에서 한 가지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비록 이제껏 ‘풀솜할아버지’라는 낱말이 거의 안 쓰였다고 할 테지만, ‘어머니를 낳은 할아버지’도 따뜻하고 살가우며 도타운 품이 되어 ‘풀솜할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외할머니 아닌 친할머니도 따뜻하고 살가우며 도타운 품이 되어 새로운 이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4348.3.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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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예방 군내방송’ 책읽기



  두 달쯤 되는구나 싶은데, 고흥군에서는 아침 낮 저녁에 한 차례씩 ‘군내방송’을 한다. 군내방송이란 무엇인가 하면, 군청에서 면사무소로 녹음파일을 보내 주어, 이 파일을 면사무소에서 마을마다 큰소리로 틀어대는 방송이다. 시골은 넓고 사람이 적으니 곳곳에 스피커를 붙여서 마을방송을 하는데, 이 마을방송은 면사무소 한쪽에서도 할 수 있다.


  지난 두 달 동안 고흥군이 하는 군내방송은 ‘산불예방’이다. 마을 어르신더러 논밭에 불을 지피지 말고, 아이들이 불장난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라고 방송을 한다. 감시를 해서 ‘적발’을 하면, 불을 피운 사람은 100만 원∼1000만 원까지 벌금을 물어야 한단다. 산에 불을 내면 감옥에도 갈 수 있단다.


  군내방송은 ‘계도’도 ‘홍보’도 아니고 ‘협박’이다. 그런데, 이런 군내방송을 지난 두 달 동안 날마다 세 차례씩 억지로 들어야 했다. 이렇게 하면 불을 안 지필까? 군내방송이 흐르는 때에도 논둑이나 밭둑을 태울 분은 스스로 알아서 다 태운다. 안 그러면 어쩌겠는가. 게다가 논밭둑을 태우는 삶은 아주 옛날부터 이어졌다. 이를 하지 말라고 한들 안 할 수 있을까. 이런 군내방송을 할 겨를과 품이 있다면, 시골마을이 넓어도 면소재지 일꾼이 마을마다 돌면서 ‘날짜를 맞춰서 불 지피기를 지켜보’면서, 잘 지펴서 태울 수 있도록 하는 쪽이 훨씬 나으리라 느낀다.


  그나저나, 군청에서 산불예방 군내방송을 하면서도 정작 멧자락을 함부로 깎아 관광도로를 내기 일쑤요, 골짜기에 시멘트를 마구 퍼부어 4대강 지류사업 따위를 일삼는다. 마을 어르신을 윽박지르는 군내방송은 그만두고, 군청이 저지르는 엉터리 개발사업을 그쳐야 ‘푸른 숲’을 가꾸거나 지킬 수 있지 않을까. 4348.3.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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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38 ‘차갑다’와 ‘뜨겁다’



  차가우면 그대로 얼어붙습니다. 뜨거우면 녹아서 날아오릅니다. 차가우니까 땅바닥에 들러붙습니다. 뜨거우니까 어느덧 몸뚱이가 사라지면서 아지랑이가 됩니다. 차가우니까 딱딱한 얼음이 됩니다. 뜨거워서 아지랑이가 된 숨결은 하늘 높이 날아오릅니다. 얼음은 그대로 머뭅니다. 어디로도 안 갑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아지랑이는 이내 구름이 됩니다. 구름이 된 아지랑이는 빗물이 됩니다. 빗물이 된 구름은 하늘을 가르며 땅으로 내려옵니다. 하늘을 가를 적에 바람을 타고 온누리 골골샅샅으로 퍼진 빗물은 냇물도 되고 샘물도 되며 우물물도 되고 바닷물도 됩니다. 골짝물도 되고 시냇물도 되며 가람물도 되지요. 온갖 물로 새로 태어납니다. 온갖 물로 몸을 바꿉니다. 온갖 물로 거듭나는 숨결이 되어요.


  차가워서 얼어붙는 몸은 늘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대로 있기에 ‘고인 숨결’은 아닙니다. 늘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차가워서 얼어붙어도, 이 몸은 바로 내 몸입니다. 차가움을 가득 안은 몸입니다. 차가움을 가득 안아서 무거우니 어느 곳에도 못 가는데, 아직 아무 곳으로도 안 갔을 뿐, 마음속에 따사로운 꿈을 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차가운 몸은 따사로운 마음을 꿈으로 꿉니다. 따사로운 마음으로 태어나서 새롭게 피어나겠다는 꿈을 꾸면서 깊디깊이 잠을 잡니다. 이른바 겨울잠입니다.


  뜨거워서 녹는 몸은 언제나 바뀝니다. 언제나 바뀌니 언제나 흐릅니다. 언제나 하르니 언제나 새롭습니다. 뜨거운 기운은 어느 한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뜨거운 기운은 모든 곳을 흐릅니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이 되며,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뜨거운 기운은 언제나 모든 것에 스스로 깃들어 모든 것으로 살다가 새로운 모든 것이 됩니다. 뜨거운 것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이른바 꽃이고 열매입니다.


  그런데 뜨거운 기운은 어느 날 문득 ‘다른 새로움’을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짓고, 모든 것이 되며, 모든 것을 하고, 모든 것을 보는 삶에서, 다른 새로움을 한 가지 생각합니다. 언제나 ‘모든 것(온 것)’으로 사는 뜨거운 기운은 ‘뜨거운 기운이 아닌 새로운 것’을 생각해서, ‘삶’이 아닌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뜨거운 기운이 나아가는 곳은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뜨거운 기운은 삶을 누리면서 모든 것을 짓고 사랑을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이렇게 하면서 문득 한 가지를 새롭게 그리니 바로 ‘죽음’이자 ‘잠(겨울잠)’이요 ‘꿈’입니다. 이제 ‘모두 다 지었’으니까, ‘잠들어서 꿈을 꾸’려고 하지요. 마당에서 놀던 아이가 집으로 돌아와서 밭으로 간다고 할까요. 씨앗이 밭에서 자라 싱그럽게 자란 풀이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다시 겨울을 맞이하면서 흙(밭)으로 돌아간다고 할까요.


  ‘차가운 기운’은 ‘뜨거운 기운’이 바뀐 몸입니다. ‘차가운 기운’과 ‘뜨거운 기운’은 한몸이요 같은 넋입니다. ‘차가운 기운’과 ‘뜨거운 기운’은 한마음이면서 같은 숨결입니다.


  몸이 차갑게 식습니다. 죽음입니다. 죽은 몸은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흙을 깨웁니다. 죽은 몸에서 나온 넋은 새로운 몸을 찾아서 꿈을 꿉니다. 새로운 몸을 찾는 넋은 꿈을 꾸려고 ‘밤낮누리’로 갑니다. 밤낮누리에 깃들어 꿈을 꾸는 넋은 천천히 온별(온 우주)을 살피면서 새롭게 나아갈 길을 찾습니다.


  넋은 새 길을 찾으면 새 곳으로 가서 새 몸을 입습니다. 넋이 새 몸을 입으면, 새로운 몸은 다시 뜨거운 기운이 돕니다. 아기가 태어나지요. 4348.2.28.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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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는 오줌싸개 내 아이가 읽는 책 5
다나카 키요 글 그림, 이예린 옮김 / 제삼기획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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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91



도깨비를 보았구나

― 연지는 오줌싸개

 다나카 키요 글·그림

 이예린 옮김

 제삼기획 펴냄, 2002.7.15.



  나는 어릴 적부터 무엇을 보았습니다. ‘무엇’이 무엇인가 하면, 참말 무엇입니다. 귀신도 아니고 도깨비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무엇’입니다. 그런데, 이 무엇은 밤과 낮 언제나 보입니다. 잠을 자려고 해도 보이고, 멀쩡히 돌아다녀도 보입니다. 길을 걸을 적에도 보일 뿐 아니라, 책을 읽을 적에도 보입니다.


  어릴 적에 ‘무엇’을 볼 적마다 흠칫흠칫 놀랐고, 무섭거나 두렵기도 했습니다. 어른들은 그저 ‘귀신’이라고 놀리는 말을 했지만, 귀신이라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내가 본 무엇이 귀신이었으면 나를 해코지하거나 괴롭혔을 테니까요. 내가 본 무엇은 늘 내 둘레에서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 타박타박 연지가 길을 걷고 있었어요. 저기 커다란 버드나무 건너, 연지네 집이 보여요. 하얀 이불이 팔락팔락 흔들리고 있네요. 연지가 지난밤 오줌을 쌌던 이불이지요 ..  (3쪽)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봅니다. 다만, 아이에서 어른으로 몸이 바뀌면서 ‘무엇’을 잊는 사람이 많습니다. 티없는 눈으로 바라볼 적에는 ‘무엇’이 그저 무엇일 뿐입니다. 무섭거나 두려울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도깨비와 귀신 같은 말을 하고, 때로는 괴물이나 유령이라는 말을 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내 둘레에서 늘 알아차릴 수 있던 그 ‘무엇’은 언제나 내 둘레에서 나를 지켜보면서 나를 지켜 주었구나 싶습니다. 내가 샛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보고, 내가 스스로 씩씩하게 삶을 짓는 길로 나아가도록 도왔구나 싶어요.



.. 도깨비가 아니라 도깨비 인형이었어요. “이런 도깨비라면 하나도 무섭지 않아!” 연지는 애써 씩씩한 척 말해 보았어요. 그러고는 거기에 앉아, 한참 동안 그 인형을 살펴보았지요. 인형의 얼굴이 무척 귀여웠어요 ..  (4쪽)





  다나카 키요 님이 빚은 그림책 《연지는 오줌싸개》(제삼기획,2002)를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연지’라는 아이는 도깨비를 봅니다. 낮이고 밤이고 도깨비를 봅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도깨비를 무섭게 여깁니다. 이리하여, 도깨비는 연지하고 놀려고 밤마다 연지한테 찾아와서 ‘으앙!’ 하고 입을 쩍 벌리면서 놀래킵니다. 연지라는 아이를 놀래키는 재미로 밤마다 찾아오거든요.


  연지는 그만 도깨비한테 깜짝 놀라서 밤마다 오줌싸개가 됩니다. 이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다른 도깨비가 연지한테 ‘인형’ 모습으로 찾아갑니다. 인형 모습으로 연지한테 찾아간 도깨비는 연지한테 새로운 생각을 심어 줍니다. ‘자, 보렴, 도깨비라고 다 무섭지는 않지? 도깨비도 귀엽지?’


  연지한테 인형 모습으로 찾아간 도깨비는 이날 밤, 연지가 화장실에 혼자 갈 적에 함께 가 줍니다. 그리고, 연지를 놀래키는 개구쟁이 도깨비를 한방에 눕힙니다. 이제 그만 놀리렴, 이제 연지가 씩씩하게 놀 수 있도록 해 주렴, 이런 이야기를 개구쟁이 도깨비한테 넌지시 알려줍니다.



.. 예전에 할머니가 집에 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연지가 오줌 싼 이불을 보고 할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연지는 도깨비가 무서워 화장실에 못 가는 거구나?” 연지는 깜짝 놀랐어요. 할머니가 어떻게 아셨을까 궁금하기도 했지요. “도깨비를 무서워하면 안 돼. 도깨비는 겁쟁이 집에만 찾아가거든.” ..  (7쪽)




  우리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한테 제대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도깨비’나 ‘수많은 무엇’을 본다는 이야기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무엇’은 두렵거나 무섭지 않은 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무엇’한테 똑똑히 말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어야 합니다. 나를 놀래키지 말고, 나랑 놀고 싶다면 상냥하게 다가오렴, 하고 말해야 한다고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혼자서 씩씩하게 내 길을 걸어갈 테니, 너도 그만 네 길로 떠나렴, 하고 말해야 한다고 알려주어야 합니다.



.. 겨우겨우 화장실 문 앞까지 갔을 때, 이상한 일이 생각났어요. 항상 닫아 두는 화장실 문이 아침이면 다시 열려 있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엄마가 열어 두는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도롱아?” 연지는 그렇게 말하고, 불을 켜려고 손을 뻗었어요. 자기도 모르게 손이 바들바들 떨렸어요 ..  (21쪽)



  그림책에 나오는 연지는 착한 아이입니다. 착한 아이인 연지이기에 도깨비를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맑으니 도깨비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착한 마음에 사랑스러운 숨결이 깃들 수 있도록 둘레 어른이 조금 더 따스하게 품어 주기를 빌어요. 이 맑은 넋에 고운 꿈이 자랄 수 있도록 둘레 어른이 한결 더 너그러이 안아 주기를 빌어요.


  그러니까, 연지는 오줌싸개가 아닙니다. 연지는 그냥 ‘아이’입니다. 아이가 스스로 서도록 어른은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스스로 씩씩하게 웃고 춤추면서 노래하도록 어른은 곁에서 상냥하게 지켜보면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4348.3.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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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사하라 애지시선 3
김수우 지음 / 애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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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82



시와 모래밭

― 붉은 사하라

 김수우 글

 애지 펴냄, 2005.9.12.



  바람이 아무리 차갑게 불어도 바닷가 모래밭은 따뜻합니다. 찬바람에 몸을 웅크리기만 하면 춥지만, 모래밭에 두 손을 묻고 모래놀이를 하면 두 손은 따뜻할 뿐 아니라, 어느새 땀이 나기도 합니다.


  꽃샘바람이 불어 풀과 나무가 오들오들 떱니다. 그러나 풀과 나무는 꽃샘바람에 시들거나 얼어서 죽는 일이 없습니다. 한동안 오들오들 떨 뿐, 햇볕이 다시 내리쬐고 바람이 가라앉으면, 언제 오들오들 떨었느냐는 듯이 잎을 한껏 열어젖힙니다. 찬바람을 먹으면서 더욱 기운차고, 흙 품에 안겨서 더욱 싱그러우며, 이웃한 다른 풀과 올망졸망 어깨동무를 하면서 더욱 푸른 빛입니다.



.. 푸른 바다가 붉은 사하라가 될 때까지 / 사막은 얼마나 이빨 시린, 슬픔의 유전인자를 숨기고 있는 걸까 ..  (붉은 사하라)



  모래밭에는 어떤 그림이든 그릴 수 있습니다. 모래밭에 그리는 그림은 바닷물이 밀려들어 모두 지웁니다. 나뭇가지를 써서 아무리 깊게 파면서 그림을 그렸어도, 바닷물은 모든 ‘모래밭 그림’을 말끔히 지웁니다. 모래밭은 바닷물결이 닿은 뒤에는 예전처럼 반반하면서 차분한 빛으로 돌아갑니다.


  모래밭에 그린 그림은 종이에 그린 그림과 달리 오래도록 안 남습니다. 종이에 그린 그림은 퍽 오래도록 남습니다. 그런데, 모래밭에 그린 그림이어도 언제나 우리가 바라보고 우리 손을 거친 그림이기에, 우리 마음에는 고이 남아요. 우리는 모래밭뿐 아니라 마음밭에도 그림을 함께 그려요.


  한편, 종이에 그린 그림은 ‘종이가 된 나무’가 살아낼 수 있을 만한 나날 동안 남습니다. 나무가 종이로 모습을 바뀌었을 뿐이니, 우리는 나무한테 그림을 새긴다고 할 만합니다. 나무한테 새긴 그림을 읽고, 나무한테 새긴 글을 읽습니다.



.. 산골 옛집 부엌문짝 / 버려졌다 그 세월 길어 올린 손끝에서 / 앉은뱅이책상이 되었다 ..  (오래된 것들은 눈이 많다)



  김수우 님이 빚은 시집 《붉은 사하라》(애지,2005)를 읽습니다. 붉은 빛깔은 무엇이고, 사하라는 어떤 곳일까요. 우리 몸을 이루는 핏물이 붉은 빛일까요. 모든 목숨을 살찌우는 열매가 붉은 빛일까요. 아침에 뜨고 저녁에 기우는 해는 붉은 빛일까요. 사랑으로 타오르는 숨결은 붉은 빛일까요. 뜨겁게 솟구치는 기쁨이나 미움 같은 뭇느낌이 붉은 빛일까요.


  모래밭은 어떤 곳일까요. 발이 폭폭 빠지는 모래밭일까요, 발이 안 빠지고 자동차가 구를 수 있을 만한 모래밭일까요. 조개가 살고 새가 날아들 수 있는 모래밭일까요, 관광지로 바뀌어 쓰레기가 나뒹구는 모래밭일까요. 아니면, 군부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는 쇠가시그물을 길게 박아 놓는 모래밭일까요.



.. 500원 내고 붕어빵 두 마리 산 / 털실모자 할머니, 굼적굼적 / 수레에 쌓인 겨울딸기를 지나, 댓걸음 / 트럭에 실려온 충무 멍게를 지나, 몇 발짝 / 광고게시판을 지나 /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거기 ..  (산맥)



  삶을 사랑으로 짓는 사람은 하루하루 아름다운 꽃밭입니다. 삶을 사랑으로 짓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고단한 모래밭입니다. 삶을 사랑으로 짓다가 이 사랑이 무너지면, 꽃밭은 어느새 풀이 죽습니다. 삶을 사랑이 없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아 스스로 사랑을 길어올리는 길을 찾으면, 모래밭에도 풀이 돋고 꽃이 핍니다.


  텃밭에서만 꽃이 피지 않습니다. 모래밭에 아무런 목숨이 못 깃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문명과 문화와 경제 따위를 내세워 ‘기름진 밭’이나 ‘아름다운 들과 숲’을 파헤쳐서 고속도로로 바꾼다든지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를 들인다든지 골프장이나 관광단지를 덮어씌우기 일쑤입니다. 짙푸른 숲이 하루아침에 망가집니다. 드넓은 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문명이 빚는 건물은 재개발을 끝없이 되풀이하면서 높이 치솟으려고 애씁니다.


  사랑이 없이 짓는 문명은 어디로 갈는지요. 꿈이 없이 나아가려는 문명은 무엇이 될는지요. 삶이 없이 복닥거리는 문명은 누구한테 아름다울는지요. 정치는 정치꾼이 붙잡고, 경제는 경제꾼이 떠들며, 문화와 예술은 문화꾼과 예술꾼이 왁자지껄합니다. 다들 날마다 밥을 먹으면서도, 밥 한 그릇이 나오는 밭자락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다들 언제나 바람을 마시면서도, 바람 한 줄기가 흐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습니다. 다들 으레 물을 들이켜면서도, 물 한 방울이 돋는 숲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 삭은 나뭇단 뒤에서 나온 / 두 가마니는 족히 넘을 판피린병 / 아궁이 앞에서 불때던 풀솜할매가 / 찬장에 숨겼다 꺼내 마시곤 / 나무광 뒤로 된시름 던지듯 / 던지고, 던지고, 던지고 했을 거다 ..  (옛집을 허물다)



  시집 《붉은 사하라》를 읽습니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뜨거운 볕이 아닌, 마음에서 샘솟는 따뜻한 숨을 헤아리면서 읽습니다. 풀솜할매는 언제부터 풀솜할매가 되었을까 헤아리면서 시 한 줄을 읽습니다. 풀솜할배도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시 두 줄을 읽습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낳은 할머니입니다. 할머니가 어머니를 낳고, 어머니가 나를 낳으며, 나는 새롭게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될 테고, 내 아이가 아이를 낳으면 나는 새롭게 할머니가 됩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왜 외할머니일까요. 우리는 언제부터 ‘親’이나 ‘外’라는 한자를 빌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나누었을까요. 한자라는 중국글을 쓴 임금과 권력자와 지식인이 아닌 시골사람도 ‘친·외’라는 한자를 빌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을까요. 조선이나 고려나 고구려나 신라나 백제나 가야나 옛조선이나, 이런 ‘나라이름’이 아닌, 500년대나 기원전 500년대에 시골에서 흙을 지어 살던 사람들도 ‘친·외’라는 한자를 빌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마주했을까요.



.. 다발머리 여자애가 고무줄을 논다 / 날품팔이 면장갑이 뽀얗게 마른다 / 풍경의 틈, / 으로 불어오는 눈짓, 눈짓들 ..  (콩밭에 놀다)



  모래밭에 그린 그림은 꼭 하루를 흐릅니다. 마음밭에 그린 그림은 꼭 내 삶만큼 흐릅니다. 모래알은 어느 만큼 살았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모래알을 손바닥에 얹습니다. 나는 이제껏 어느 만큼 이 땅에서 살았을까 하고 돌아보면서 눈을 감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 새긴 이야기를 어느 만큼 떠올릴 수 있을까요. 나는 내 삶에 그린 그림을 늘 잊고 다시 잊고 또 잊으면서 바보스러운 몸짓을 되풀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삶에 새긴 그림을 가만히 되새기고 떠올리면서 이제부터 바보스러운 몸짓은 씻어내고 사랑스러운 몸짓과 손짓으로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삶을 마음자락에 곱다시 그려서 언제까지나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사랑이 태어납니다. 내 삶을 마음자락에 그리지 못하거나, 애써 그렸어도 모래밭 그림처럼 곧 사라져서 잊히도록 한다면, 나는 아무런 사랑을 짓지 못합니다. 하루가 저물면서 새로운 하루가 찾아옵니다. 4348.3.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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