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보라는 졸려서 새근새근



  작은아이는 졸음을 꿋꿋하게 참으면서 놀기도 하지만, 졸음을 더 견디지 못하고 곯아떨어지기도 한다. 졸음을 견디며 놀 적에도 이쁘장하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곯아떨어지는데, 혼자서 조용히 자리에 드러누워 이불을 폭 뒤집어쓰는 모습을 보면, 어쩜 이리 대견할까 싶어서 살살 이마를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본다. 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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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91] 농약 안 쓰는 까닭

― 풀과 나무와 개구리와 새



  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으레 “약 좀 치면 시원하게 다 죽겠는데.” 같은 말을 들려줍니다. 참말, 농약을 쓰면 풀은 모조리 시원하게 죽겠지요. 그러나, 우리 집에는 농약이 없습니다. 모기나 파리나 바퀴벌레를 잡는다는 벌레잡이약도 없습니다. 모기향도 피우지 않습니다.


  이 땅에 돋는 풀 가운데 사람이 쓰지 못할 풀이란 없습니다. 거의 모든 풀은 밥이 되어 줍니다. 날푸성귀로 먹을 수 있고, 날푸성귀가 아니어도 풀물을 짜서 마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풀이 있기에 비가 아무리 몰아쳐도 흙이 덜 씻깁니다. 나무 둘레에 풀 한 포기가 없으면, 뿌리 둘레에 있는 흙이 비에 휩쓸려서 흔들거리기 마련입니다. 풀이 보기 싫다면 낫으로 치면 될 노릇이지, 뿌리째 뽑아야 하지 않고, 농약으로 죽여야 하지 않습니다. 풀 잘 먹는 염소를 집에서 키운다면 더더구나 농약을 못 쓰겠지요.


  시골에서 살며 풀이 돋고 죽는 흐름을 살펴보면, 아주 거친 땅, 이른바 ‘붉은닥세리’ 같은 땅에는 망초와 쇠비름나물이 신나게 퍼집니다. 한 달이 안 되어 어른 키만큼 솟아납니다. 줄기는 얼마나 억센지 낫으로 끊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풀을 잡느라 농약을 쓰면 이듬해에 더 모질게 돋기 마련이에요. 이와 달리, 이 풀을 그대로 지켜보노라면, 이듬해에는 망초와 쇠비름나물이 거의 안 돋습니다. 이 풀은 흙을 살리는 거름이 되어 새로운 풀이 돋습니다. 망초와 쇠비름나물은 딱딱하게 굳은 땅속으로 뿌리를 힘차게 파고듭니다. ‘붉은닥세리’라고 하는 망가진 땅에 이 풀이 뿌리를 내리면, 땅속에 차츰 틈이 생겨서 바람이 드나들 길이 생기고, 땅이 천천히 숨을 쉬면서 살아나려고 합니다. 이리하여, 망초와 쇠비름나물이 퍼진 땅은 한두 해 뒤에 다른 풀한테 밀려요. ‘제법 살아나서 조금 기름진 땅’에서 돋는 다른 풀이 자라지요.


  빈터에 자라는 풀이 보기 싫다면 발로 밟으면 됩니다. 풀은 서너 차례 밟으면 고개가 꺽여서 더 오르지 못합니다. 사람이 밟고 다시 밟으면 제아무리 잘 돋던 풀이라 하더라도 뿌리로만 땅속에서 뻗으면서 위쪽에서는 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해가 흐르면 땅은 차츰 ‘풀이 죽어서 생기는 거름’으로 더 기름진 모습으로 거듭나고, ‘더 기름진 땅에서 잘 돋는 풀’로 확 바뀝니다.


  도시로 내다팔아야 하는 ‘상품’으로 남새를 길러서 거두어야 할 때에도 두둑마다 풀을 ‘밟아’ 주기만 하면 됩니다. ‘밟아서 바닥에 깔리’도록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다른 풀이 더 자랄 수 없고, 풀뿌리가 땅속에 있으면 큰비가 몰아쳐도 흙은 덜 깎이고, 풀이 겨우내 말라 죽으면서 새로운 흙으로 바뀌니, 밭자락에서 흙이 사라질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땅이 되면, 이 땅에는 풀벌레가 노래하고, 개구리가 겨울잠을 자며, 온갖 새가 찾아들고 벌과 나비도 알맞게 춤추는 예쁜 ‘집숲’이 되어요. 4348.4.23.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고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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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57. ‘말짓기’는 ‘삶짓기’

― 새로운 말을 짓지 못한다면



  우리가 쓰는 말을 제대로 살펴야 하는 까닭은, ‘말짓기’는 언제나 ‘삶짓기’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제대로 살리는 사람은 언제나 넋을 제대로 살리고, 넋을 제대로 살리는 사람은 언제나 삶을 제대로 살립니다. 이 대목을 읽어야, 말과 얽힌 수수께끼를 풉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으로서 토박이말만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쓰는 말을 내가 스스로 제대로 바라보면서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땡큐’라는 영어를 쓸 적에 무엇을 생각할까요? ‘내가 바로 이곳에서 영어를 쓰는구나’ 하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내가 고맙다는 뜻을 나타내려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할까요? 거의 모든 사람은 ‘고맙다’는 뜻을 나타내려고 ‘땡큐’라는 영어를 씁니다. 이런 영어를 쓰면서 영어라고 느끼는 사람은 대단히 드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한자말을 쓰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한자말을 쓰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고, 그저 ‘고맙다’는 뜻을 나타내려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씁니다.


  한국사람이 ‘고맙다’라는 말을 가려서 쓸 줄 알아야 한국사람답습니다. 그러나, 영어나 한자말이나 일본말이나 중국말이나 네덜란드말이나 버마말 들을 빌어서 ‘고맙다’를 나타낼 수 있어요. 얼마든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에 담는 넋’을 헤아리려는 몸짓이라면, 얼마든지 이렇게 해도 즐겁습니다.


  그런데, 글을 쓸 적에는 다릅니다. 글로 쓸 적에는 ‘다른 사람이 못 알아보는 글’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산’이라고 하면 되는데 ‘산(山)’처럼 적는다든지, ‘시’라고 하면 되는데 ‘시(詩)’처럼 적는 사람이 있습니다. ‘숭상하다’나 ‘고대’를 쓰고 싶다면 그냥 이대로 쓰면 되는데, 굳이 ‘숭상崇尙’이나 ‘고대古代’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에서도 이와 같아요. ‘봄seeing’이나 ‘컷(cut)’이나 ‘감성(heart)’이나 ‘선택할(셀렉트select)’처럼 적으면 여러모로 어지럽습니다. 따로 영어를 안 붙이고 글을 썼다면 그대로 지나갔을 테지만, 이렇게 한자나 영어를 붙이니 외려 헷갈리면서 글흐름이 가로막힙니다.


  한자나 영어를 뒤에 밝히면서 글을 쓰는 일은 ‘내가 한자나 영어를 쓴다는 생각’이 짙습니다. 그러니, 이웃하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말아요. ‘내가 나누려는 뜻’을 이웃한테 밝히려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짓기는 언제나 삶짓기입니다. 먼 옛날에 누군가 ‘풀’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지어서 쓴 사람은 이녁 삶을 지은 셈입니다. ‘하늘’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짓고, ‘별’과 ‘해’와 ‘땅’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지은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말을 지으며 생각을 새로 짓고, 말과 생각을 함께 지으면서 삶을 새롭게 지어요.


  오늘날 사회에서 현대교육을 받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새말을 안 짓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말’만 받아들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내 생각을 담을 새로운 말’을 떠올리거나 그리지 못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쓰는 ‘낱말 숫자’는 대단히 적습니다. 사전은 무척 두툼하지만, 사전에 실린 낱말 가운데 1/100이나 1/1000조차 제대로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전과 말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사전 한 권’에 실린 한국말은 먼 옛날부터 이 땅에서 살던 사람들 누구나 흔히 쓰던 말입니다. 사전에 실린 한자말과 영어를 뺀 모든 한국말은 먼 옛날부터 아이와 어른 모두 다 알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모든 말을 거의 다 잊습니다. 이러면서 받아들인 ‘새로운 말’은 한자말과 영어입니다.


  ‘보다’는 ‘바라보다·쳐다보다·들여다보다·살펴보다·넘겨보다·내다보다·마주보다·올려다보다·내려다보다·굽어보다’로 이어지고 ‘헤아려 보다(헤아려서 보다)’라든지 ‘생각해 보다(생각해서 보다)’처럼 깊거나 넓게 쓰임새를 넓힙니다. 이를 ‘관찰(觀察)’이라는 한자말로 꼭 나타내야 하는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르다’는 ‘가리다·추리다·뽑다·솎다·집다·짚다·빼다’와 한동아리이면서 저마다 뜻과 느낌이 다릅니다. 이를 ‘선택(選擇)’이라는 한자말이나 ‘select’나 ‘choice’라는 영어로 꼭 나타내야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떨어지니까 ‘떨어지다’라 할 뿐인데, 왜 ‘추락(墜落)’이라는 한자말을 한국말에 끌어들여야 할까요? 밤이니까 ‘밤’이라 할 뿐인데, 왜 ‘나이트(night)’라는 영어를 한국말에 끌어들여야 할까요?


  ‘떨어지다’와 ‘추락’을 함께 쓸 수 있고, ‘밤’과 ‘나이트’를 나란히 쓸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자유’와 ‘권리’라고도 할 만합니다. 자유와 권리를 마음껏 누리면서 온갖 외국말을 섞어서 써도 괜찮습니다. 그러면, 온갖 외국말을 한국말과 섞어서 쓰면서 ‘나한테 기쁘거나 반갑거나 즐겁거나 아름다운 일’은 무엇이 될는지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어느 한 가지를 가리키는 말을 여러 외국말로 가리킬 수 있다면, 이때에 나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 만한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숲’을 ‘森林’이나 ‘wood·forest’로 말할 수 있으면 ‘내 말’이 한결 넉넉할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숲을 ‘숲’이라 말할 수 있을 때에 ‘숲놀이·숲내음·숲집·숲바람·숲넋’이나 ‘사람숲·말숲·생각숲·이야기숲·책숲’처럼 새로운 말과 넋과 삶을 하나씩 짓습니다. 우리가 쓸 말은 ‘토박이말’이 아닌 ‘삶에서 바탕이 되는 말’이어야 합니다. 바탕을 읽고 느끼면서 생각을 뻗어야 합니다. 물이 흐르듯 말이 흐를 노릇이기에, 새롭게 나아가며 넓어지는 말과 넋과 삶이 되도록 할 노릇입니다. 샘물이 내가 되고, 내가 가람이 되며, 가람이 바다가 되도록 할 노릇입니다. 샘물에 설탕이나 소금을 섞는들 샘물이 넓어지지 않는 줄 알아차려야 합니다.


  삶을 노래하려면 ‘노래가 될 말’을 슬기롭게 살펴야 하고, 삶을 사랑하려면 ‘사랑할 말’을 제대로 살펴야 합니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 땅에 사람이 처음 살던 때부터, 어버이와 어른은 아이한테 ‘아이가 스스로 삶을 새롭게 짓는 바탕이 될 말’을 물려주었습니다. ‘토박이말’이 아닌 ‘삶말’을 물려주어서, 이 삶말을 바탕으로 아이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손수 일구도록 이끌었습니다. 말과 넋을 아이가 스스로 지어서 삶을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짓도록 가르쳤습니다. 4348.3.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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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글 읽기

2015.4.18. 작은아이―나도 다 썼어



  산들보라도 글돌이가 되기로 한다. 다만, 글돌이한테는 ‘글씨를 따라 그리라’고만 말한다. 왜 그러느냐 하면, 글돌이가 그림돌이가 못 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산들보라는 아귀힘이 여리다. 연필도 힘껏 못 쥔다. 글씨를 따라서 그리는 놀이를 하면서 아귀힘을 기르면, 곧 그림도 신나게 그리겠지. 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글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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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림놀이] 숲말 아이 (2015.3.20.)



  내가 쓰는 모든 글이 숲을 노래하는 글이 되기를 꿈꾸고, 내가 하는 모든 말이 숲을 사랑하는 말이 되기를 바라면서, ‘숲말’ 아이를 그린다. 빨간머리를 휘날리면서 바람이랑 꿈풍선을 타고 날아다니는 ‘숲말 아이’. 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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