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동이 트는 새벽에



  요즈막에 우리 집 작은아이가 새벽 다섯 시부터 잠에서 깹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노는 아이라서 이처럼 시골스럽게 새벽 일찍 일어나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겨울에는 새벽 여섯 시나 아침 일곱 시에도 일어났고, 때로는 아침 여덟 시 즈음에 일어나기도 한 다섯 살 작은아이인데, 나날이 동이 일찍 트니, 이러한 결에 맞추어 아주 일찍 잠을 깨는구나 싶습니다.


  일찌감치 잠이 깨는 아이를 다시 재우지 못합니다. 다섯 살 아이한테 ‘너무 일찍 일어났구나. 쑥쑥 크고 튼튼하게 자라려면 잠을 더 자야지’ 하고 이야기를 한들, 이 아이는 이 말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아니, 곰곰이 따지면, 시골스러운 아이는 동이 트는 새벽에 일찌감치 일어나서 놀고, 낮에 한두 시간 즈음 실컷 낮잠을 누린 뒤, 저녁밥을 먹고 별빛과 함께 잠들면 될 만하구나 싶습니다. 새벽 일찍 깨는 만큼 저녁 일찍 잠들 테니까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님이 쓴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라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아이들은 누구나 ‘오늘’을 삽니다. 아이들은 먼 ‘앞날’을 바라보면서 자란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이 앞날(모레)로 나아가려면 바로 이곳에서 오늘 즐겁게 뛰놀고 기쁘게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오늘 맛난 밥을 먹고 개구지게 뒹굴면서 하하호호 노래잔치와 웃음꽃을 누려야 합니다.


  “1000년에 걸쳐 아이들은 마을 어른들 곁에 앉아 인생을 배웠다. 노인들의 말을 듣다가도 어디론가 뛰어가 흥미로운 걸 찾아 놀곤 했다(43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빙그레 웃음짓습니다. 이 말은 거의 옳지만, 한 군데에서 안 옳습니다. 어느 대목이 안 옳은가 하면, 아이들은 ‘1000년에 걸쳐’ 마을 어른들 곁에서 삶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1000년이 아니라 10만 해나 100만 해, 아니 맨 처음부터 늘 마을 어른들 곁에서 삶을 배웠어요. 고작 1000년이라는 틀로 묶을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아이를 지켜봅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한테도 이 사람을 낳은 어버이가 있습니다. 아주 마땅히 둘레에 옹기종기 마을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구별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서 ‘작은 집안(핵가족)’을 이룬 지 얼마 안 됩니다. 지구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작은 집안’을 이룰 즈음부터 마을이 무너졌다고 할 만합니다. 도시가 커지는 곳마다 ‘작은 집안’이 되면서 ‘마을 이야기’가 사라집니다. ‘작은 집안’이 되면서 예술가와 작가와 전문가와 교사 같은 사람들이 따로 생깁니다. ‘큰 집안’이었고 ‘오순도순 복작거리는 마을’이 있을 적에는 따로 예술가나 작가나 전문가나 교사가 없었어도, 모든 어른이 다 함께 예술가였고 작가였으며 전문가인데다가 교사였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모든 어버이는 예술가이면서 교사요, 작가이면서 전문가입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더라도 아이들은 언제나 집에서 먹고 자면서 놉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만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늘 배웁니다. 학교에서는 교사라고 하는 어른 곁에서 배우고, 집에서는 어버이라고 하는 어른 곁에서 배우지요. 마을에서는 마을 이웃이라고 하는 어른 둘레에서 배워요.


  교사자격증이 있는 사람도 교사이지만, 여느 어른도 누구나 교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이녁 삶을 아이들한테 보여주면서 낱낱이 가르치는 셈입니다. 그러니,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지 않는 어른들 누구나 아이 앞에서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될’ 노릇이요, ‘아무 짓이나 섣불리 해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하루를 짓고 누리는 착하고 참다운 사람으로 설 노릇이에요.


  “아이들이 보이는 문제 행동을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고 잠재적으로 위험성이 있는 약을 주는 것은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일한 길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140쪽).” 같은 이야기처럼, 오늘날 사회와 학교에서는 ‘주의력 결핍’이라든지 ‘선천성 장애’ 같은 이름을 아이들한테 함부로 붙입니다. 아이들이 왜 떠돌거나 아프거나 힘겨운가를 살펴서, 아이들이 웃음을 되찾고 기쁘게 놀 수 있는 터전으로 사회와 학교를 바로세우기보다는 자꾸 땜질 같은 처방만 합니다.


  제도나 정책이 없어서 아이들이 아프지 않습니다. 지원금이나 복지기금이 모자라서 아이들이 힘들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아프거나 힘들다면, 사랑을 못 받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는 마땅히 보육정책을 세워야 하겠습니다만, 아이들을 참답게 사랑하려는 슬기로운 숨결이 없이 정책만 바라본다면, 아이들은 외롭습니다.


  어떤 아이도 제 어버이가 저한테 값비싼 옷이나 밥이나 집을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도 제 어버이가 저한테 값진 장난감이나 놀잇감을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모든 아이는 저마다 제 어버이한테 오직 하나, ‘사랑’을 바랍니다. 모든 아이는 언제나 ‘사랑’을 받아서 ‘꿈’을 스스로 키워서 가꾸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효과적인 육아법을 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교육적인 통찰이나 이론, 사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이다(193쪽).”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육아법을 잘 안대서 아이를 잘 돌보지 않습니다. 교수법을 잘 안대서 아이를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랑이어야 아이를 돌봅니다. 사랑이어야 아이를 가르칩니다. 사랑이어야 밥을 맛있게 짓습니다. 사랑이어야 글을 아름답게 씁니다. 사랑이어야 장사를 기쁘게 합니다. 사랑이어야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마을살림을 멋지게 가꿉니다.


  천천히 날이 밝아 아침입니다. 밤새 벼락을 이끌고 퍼붓던 비가 그칩니다. 비와 바람과 벼락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쿵쿵 울릴 때마다 우리 집도 쩌렁쩌렁 흔들렸습니다. 마을 가까이 어딘가에 벼락이 떨어졌구나 싶습니다. 땅에 벼락이 떨어지면 가까운 곳도 땅이 흔들흔들 울리는구나 하고 새롭게 느낍니다. 마당에는 밤새 떨어진 나뭇잎이 수북합니다. 네 철 언제나 푸른 후박나무는 봄마다 가랑잎을 떨구면서 새 잎이 돋습니다. 날마다 쓸고 또 쓸어도 여름이 될 때까지 다시 쓸고 거듭 쓸어야 합니다. 사랑스럽게 자라는 아이들도 날마다 사랑을 받고 거듭 받으면서 이튿날에 또 새롭게 사랑을 기다리리라 느낍니다. 어버이는 날마다 사랑을 길어올리는 사람이요, 아이는 날마다 사랑을 찾는 사람이라고 할 만합니다.


  밝은 햇살이 차츰 퍼집니다. 따사로운 햇볕이 천천히 드리웁니다. 처마 밑에서 제비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침을 짓습니다. 아침을 함께 먹고 오늘 하루도 새로운 웃음으로 신나게 놀자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제 놀이’를 잊고 ‘오늘 놀이’를 야무지게 누립니다. 4348.4.29.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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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353) 중中 38


그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어. 그러던 중 표범은 나뭇가지 사이로 가느다랗게 비치는 별빛 속에서 무언가가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단다

《러디어드 키플링/박성준·문정환·김봉준·김재은 옮김-아빠가 읽어 주는 신기한 이야기》(레디셋고,2014) 52쪽


 그러던 중

→ 그러는 사이

→ 그러는 동안

→ 그러다가

 …



  때를 가리키는 자리에서는 ‘사이’나 ‘동안’ 같은 낱말을 씁니다. “네가 밥 먹는 사이에 다녀왔지”라든지 “네가 잠든 동안에 일을 마쳤어”처럼 말해요. 이런 자리에 ‘中’이라는 한자를 넣지 않습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그러다가’로 손보아도 잘 어울립니다. ‘이러다가’로 손볼 수도 있습니다.


  ‘中’은 외국말입니다. 영어로 치면 ‘in’처럼 썼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사전을 보면 ‘in’을 풀이하면서 “-하다가(-하는 중에)”처럼 쓰기도 합니다. 제대로 풀이하자면 “-하다가(-하는 사이에, -하는 동안에)”처럼 고쳐야겠지요.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쓸 노릇입니다. 4348.4.29.물.ㅎ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그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어. 그러다가 무늬범은 나뭇가지 사이로 가느다랗게 비치는 별빛을 받으며 무언가가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었단다


‘표범(豹-)’은 그대로 두어도 되고 ‘무늬범’으로 손보아도 됩니다. “별빛 속에서”는 “별빛을 받으며”로 손질하고, “듣게 되었단다”는 “들었단다”로 손질합니다.


..



 우리 말을 죽이는 외마디 한자말

 (1369) 중中 39


방학도 아닌데 한밤중에 찾아와 정원에서 잠이 든 게 세상에 늘 있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할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카롤린 필립스/유혜자 옮김-황허에 떨어진 꽃잎》(뜨인돌,2008) 82쪽


 한밤중에 찾아와

→ 한밤에 찾아와



  한국말은 ‘中’을 붙이지 않는 ‘한밤’입니다.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한밤’을 “= 한밤중”으로 풀이하고, ‘한밤중(-中)’을 “깊은 밤”으로 풀이하는군요. 이 같은 말풀이는 엉터리인데, 이를 엉터리로 깨닫는 사람이 드문 듯합니다. ‘한밤’은 “한 + 밤”이고, ‘한’은 크거나 깊거나 너른 모습을 나타냅니다. ‘한밤’이라고 하면 바로 “깊은 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中’을 붙이면 군더더기이지요. 겹말이라고도 하겠습니다.


 한낮중 (x)

 한낮 (o)


  한국말은 언제나 나란히 있습니다. ‘밤’과 ‘낮’이 나란히 있고 ‘아침’과 ‘저녁’이 나란히 있습니다. ‘너’와 ‘나’가 나란히 있으며, ‘있다’와 ‘없다’가 나란히 있지요. 그래서, ‘한밤’이라는 낱말이 있으면 ‘한낮’이라는 낱말이 있어요. 이 대목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아무도 ‘한낮중’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습니다. ‘한낮’이라고만 씁니다. 가장 큰 낮이라고 해서 ‘한낮’이고, 숫자로 치면 열두 시 언저리를 가리키지요. ‘한밤’도 이와 같습니다. 이러한 얼거리를 헤아리면서 ‘한낮·한밤’을 알맞고 올바로 쓰면 됩니다. 4348.4.29.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방학도 아닌데 한밤에 찾아와 앞뜰에서 잠이 드는데 어디에서나 늘 있는 일이라도 되는 듯이 할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정원(庭園)’은 ‘마당’이나 ‘앞뜰’로 다듬고, “잠이 든 게”는 “잠이 드는데”나 “잠이 들었는데”나 “잠든 일이”로 다듬으며, ‘세상(世上)에’는 ‘어디에서나’로 다듬습니다. “되는 것처럼”은 “되는 듯이”로 손봅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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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5-04-29 09:25   좋아요 0 | URL
잠이 든 게도 고쳐야하는군요~ 오늘도 배우고 갑니다 ㅎㅎ `중`도 안 쓰도록 해야겠어요 ㅎㅎ

파란놀 2015-04-29 12:26   좋아요 0 | URL
`게(것)`를 아무 곳에나 쓰는 일은 알맞지 않아요. 그런데 이 보기글에서처럼 `게(것)`을 말끝에 붙이는 말투는... 아주 널리 퍼졌어요... @.@
 

이 글을 얼마나 ‘알아차리면서’ 읽을까



  글을 쓸 적에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내가 쓰는 이 글을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할 듯하구나’ 하는 생각. 둘째, 내가 쓰는 이 글을 사람들이 ‘잘 알아차리면서 기쁘게 웃겠구나’ 하는 생각. 어떻게 생각하든 언제나 이러한 생각대로 흐른다. 쉬운 말을 골라서 쓰는 글이기에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않고, 어려운 말을 섞어서 쓰는 글이기에 사람들이 못 알아듣지 않는다. 글을 쓰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서 ‘알아차릴 만한’ 글과 ‘못 알아차릴 만한’ 글이 갈린다.


  그런데, 글을 쓴 사람이 ‘아무래도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겠구나’ 하고 생각하더라도, 글을 읽으려는 사람이 ‘나는 모든 글을 다 알아차릴 수 있는 눈을 뜨겠어’ 하고 생각한다면, 글을 쓴 사람 뜻과는 달리 ‘잘 알아듣지 못할 만하다 싶은 글’이 없이 ‘환하게 알아차리는 글’만 흐를 수 있다. 수수께끼라면 수수께끼일 테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이다. 4348.4.28.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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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54 ‘따스하다’와 ‘포근하다’



  지구별에서 뭇목숨이 저마다 지내기에 알맞구나 싶은 기운일 때에 ‘따뜻하다’라는 낱말을 씁니다. ‘따뜻하다’는 한 해 내내 쓰는 낱말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쓰는 낱말입니다. 이와 달리 ‘포근하다’는 아무 때나 쓰지 않는 낱말입니다. ‘포근하다’는 겨울에만 쓰는 낱말입니다. 추위가 온누리를 꽁꽁 얼어붙게 하는 때에, 이 추위를 잊을 수 있도록 찾아오는 ‘지내기에 알맞구나 싶은 기운’이 ‘포근하다’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언제나 사랑으로 가득한 기운이라 한다면, 이 사람은 ‘따뜻하다’고 할 만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 여느 때에는 그리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못할 만한데, 뜻밖이라고 할 만한 자리나 아슬아슬하거나 힘들거나 고되거나 아무튼 우리한테 춥고 어려운 어느 때에 문득 사랑으로 다가오는 기운이 되어 준다면, 이 사람은 ‘포근하다’고 할 만합니다. 또는, 모진 추위와 괴로움 따위로 덜덜 떨거나 어려울 때에 모든 추위와 괴로움이 우리한테 오지 않도록 너른 품으로 안아 줄 때에 ‘포근하다’고 합니다.


  한결같이 흐르는 사랑이기에 ‘따뜻합’니다. 추울 때에 흐르는 사랑이기에 ‘포근합’니다. 따뜻한 사랑에는 구비진 곳이 없습니다. 따뜻한 사랑은 곧게 흐르는 숨결입니다. 포근한 사랑에는 구비진 곳이 있습니다. 포근한 사랑은 ‘오르락내리락 물결치는 우리 삶’에서 힘든 고빗사위마다 찾아오는 고마운 숨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이 ‘알맞고 너그러우면서 차분한 기운’인 사랑은, 좋고 나쁨이 없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이 사랑은, 늘 두 갈래로 느끼거나 마주합니다. 하나는 한결같은 따뜻함입니다. 하나는 힘들거나 지칠 때에 새롭게 기운을 북돋우는 포근함, 곧 ‘물결치는 포근함’입니다.


  한결같은 따뜻함은 한결같이 새롭습니다. 물결치는(추운 날) 포근함은 뜻밖이면서 기쁘도록 새롭습니다. 한결같은 따뜻함은 즐거운 노래입니다. 늘 즐거우니 늘 노래이되, 차분하게 잇는 사랑입니다. 물결치는 포근함은 기쁜 노래입니다. 그동안 춥고 힘들었지만, 이 추위와 힘듦을 한꺼번에 털어내는 포근함은 기쁘게 터져나오는 노래가 됩니다.


  삶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함께 있습니다. 즐거움과 기쁨은 한몸이면서 다른 몸입니다. 즐거움과 기쁨은 한마음이면서 새로운 마음입니다. 곧게 흐르는 사랑이면서 물결치는 사랑입니다. 하나로 나아가는 사랑이면서 새로운 하나를 낳는 사랑입니다. 너와 내가 이루는 사랑이요, 사내와 가시내가 만나는 사랑입니다. 너와 내가 우리로 거듭나는 사랑이요, 사내와 가시내가 아기를 낳아 새로 태어나는 사랑입니다. 따스한 즐거움과 포근한 기쁨이 아름답게 어우러져서 삶에 꽃이 한 송이 두 송이 핍니다. 웃음잔치와 노래마당이 되는 삶입니다. 꽃 한 송이는 웃음이 되고, 꽃 두 송이는 노래가 됩니다. 4348.3.9.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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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 - 우리가 꿈꾸던 마을이 펼쳐지고 있다, 2015년 세종도서 교양 부문 선정
박재동 글.그림 김이준수 글, 서울시 마을공동체 담당관 기획 / 샨티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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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9



한마을에서 이웃이 되는 길

―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

 박재동·김이준수 지음

 샨티 펴냄, 2015.4.6.



  ‘마을 살리기’ 바람이 찬찬히 온 나라에 붑니다. ‘마을’이라는 낱말은 시골에서 쓰는 말이고, 도시에서는 ‘동네’라는 낱말을 쓰지만, 요새는 도시에서도 ‘마을’이라는 낱말을 곧잘 씁니다.


  한국말사전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마을’이라는 낱말은 “살림집이 여럿 모여 이루어진 삶터”를 가리킵니다. ‘동네’는 ‘洞 + 네’입니다. ‘동네’는 ‘洞內’에서 말꼴이 바뀌었다고도 하지만, ‘형네’나 ‘할머니네’처럼 ‘-네’를 붙였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아무튼, 한겨레는 먼 옛날부터 ‘마을’이라는 낱말만 썼으나, 시골살이가 사라지는 곳, 이른바 ‘도시’가 생기면서 한자를 빌어 ‘동네’라는 낱말을 새로 지어서 썼다고 여깁니다. 오늘날에는 ‘뉴타운’ 같은 영어를 쉽게 쓰지만, 일제강점기 언저리와 해방 뒤에는 으레 한자로 새 낱말을 지어서 썼습니다.


  그러니까, 오래된 삶터에서는 수수하게 ‘마을’이라는 낱말을 쓰는 셈이요, 새로운 문명과 사회를 보여주려고 하는 도시에서는 ‘동네’라는 낱말을 써서 둘을 가르려고 하는 셈입니다.



.. 임유화 씨는 아파트가 한 칸 한 칸의 사적 재산물들이 모여 있는 단순한 집합체라기보다는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는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함께하는 것’의 즐거움을 맛본 사람들이 속속 판을 넓히기 시작하면서 성미산마을은 점점 더 흥미로운 곳이 되어 갔다 … ‘어울려서 요리하고 먹는’ 즐거움이 주방에서 시작해 마을로 이어진다 ..  (15, 29, 47쪽)



  ‘두레’를 엮으려는 움직임이 나라에서까지 일어납니다. 한자말로는 ‘협동조합’이라고 하는데, ‘협동조합’은 일본에서 지은 낱말입니다. 협동조합 운동도 일본에서 불거졌습니다. 나라에서 정책으로 협동조합 바람을 일으키기 앞서, 도시에서는 사람들 스스로 ‘생협(생활협동조합)’ 운동을 벌였습니다. ‘두레 생협’ 같은 이름을 쓰는 곳도 있었는데, 생협이든 협동조합이든 한국말로 가리키면 ‘두레’입니다.


  뜻을 모으고 힘을 모아서 여럿이 함께 큰일을 할 적에 ‘두레’를 합니다. 두레를 모임으로 엮지요. 그런데, ‘마을’이라는 이름도 시골살이에서 태어났고, ‘두레’라는 이름도 시골살이에서 나타났습니다. 도시에서는 흙일을 하지 않는데, 외려 도시에서 ‘마을 살리기’나 ‘마을 만들기’를 벌이고, ‘두레’라는 모임을 엮으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납니다.



.. 누군가는 이웃랄랄라가 어떻게 마을공동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웃랄랄라는 분명 마을공동체다. 스스로 하나의 마을이 되었다 … 이런 과정에서 은실이네만의 철학도 생겼다. 조금 벌더라도 일을 많이 하지는 말자 … 마을에서는 곧잘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대도시들은 이런 기회를 차단하고 있다 … 곽수경 씨는 자신이 오랜 시간을 통해 깨달은 것을 마을의 청소년들도 언젠가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  (59, 68, 78, 204쪽)



  박재동·김이준수 님이 빚은 이야기책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샨티,2015)을 읽습니다. 서울에서 ‘마을 살리기’를 알차면서 예쁘게 잘 하는 스무 군데 마을을 찾아다닌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서울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예쁜 마을이 스무 군데뿐이겠습니까만, 이 스무 군데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마을이 자라기를 비는 마음일 테고, 다른 모든 예쁜 마을이 튼튼하게 뿌리내리기를 꿈꾸는 마음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책을 찬찬히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도 듭니다. 왜 마을 살리기를 할까요? 마을 살리기를 굳이 해야 할까요?


  아무래도 마을 살리기를 한다고 한다면, 마을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마을 살리기를 굳이 해야 하는 까닭이라면, 마을이 죄다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앞뒤가 어긋난다고 해야 할까요, 씁쓸하다고 해야 할까요, 1970년대로 접어든 뒤부터 나라에서 ‘새마을 운동’을 일으켰고, 이 운동은 아직도 깃발이 나부낍니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마을마다 새마을 운동 깃발을 내걸어야 합니다. 시골 군청에서도 이 깃발을 내걸고, 도시에서도 이 깃발을 내걸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새마을 운동 바람이 일고 난 뒤부터 ‘마을이 죽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시골에 있던 수많은 마을을 깡그리 짓밟았습니다. 게다가 도시에 있던 달동네도 하나둘 짓이겼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살갑고 고요하게 숨쉬던 마을살이를 몽땅 내쫓으려고 하던 새마을 운동입니다. 새마을 운동을 벌이면서, 풀집과 흙집을 허물었습니다. 제비집도 까치집도 허물었습니다. 마을 고샅길을 시멘트로 덮었고, 논둑도 시멘트로 덮으며, 논도랑도 시멘트로 덮었지요. 비료와 농약과 비닐을 쓰도록 부추긴 새마을 운동입니다. 새마을 주택을 짓게 시키고, 새마을 모자를 쓰게 시키며, 새마을 수련원을 세워서 ‘나라에 충성하는 애국 시민’을 키우려고 닦달했습니다.



.. 마을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시간이 걸릴망정 되지 않은 일은 없다 … 〈도봉 N〉은 마을에서 벌어진 사소한 일도 놓치지 않고 신문에 담아냈다. 아이들이 쓴 시가 실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아이들은 신문이 언제 나오느냐고 보채곤 했다. 내 이야기, 우리 이야기가 실리는 신문, 마을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었다 … 미디어는 즐겁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아낼 때 빛이 난다. 내 주변에 귀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즐겁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와보숑은 보여준다 ..  (114, 129, 151쪽)



  마을은 나라에서 세우지 못합니다. 마을은 사람들 스스로 세웁니다. 사람들이 손수 흙을 가꾸고 나무를 심으며 들을 돌볼 적에 비로소 살림집 한 곳이 태어나고, 이웃집이 생기고 늘면서 바야흐로 마을을 이룹니다. 커다란 장비를 써서 아파트를 수백 채씩 때려박아서 수천이나 수만에 이르는 사람이 좁은 곳에 다닥다닥 붙어서 살도록 해야 ‘마을’이 되지 않습니다. 예부터 ‘마을’이라고 하는 곳은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는 삶터’입니다. ‘아이들이 물려받아서 즐겁게 살다가, 새롭게 아이를 낳아서 오래오래 물려줄 만한 삶터’가 바로 마을입니다.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에 나오는 ‘마을 살리기’를 찬찬히 보면, ‘골목집’으로 이루어진 마을은 드뭅니다. 으레 아파트로 이루어진 마을입니다. 아파트라고 해서 마을이 안 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파트는 언제나 재개발을 합니다. 아파트 재개발을 하면, 이곳에 ‘예전 아파트 주민’이 다시 돌아와서 살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아파트 재개발을 하면 예전 아파트를 허물면서 나오는 온갖 시멘트 쓰레기와 플라스틱 쓰레기가 갈 곳이 없어요. 이런 쓰레기를 어디에 버릴까요? 갯벌에 파묻고 매립을 할까요? 바다에 던질까요? 가난한 이웃나라에 아파트 쓰레기를 내다팔까요?


  마을 한 곳은 한두 해나 열스물 해 사이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마을 한 곳은 아무리 짧아도 이백 해는 흘러야 태어납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된 뒤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기를 꾸준히 되풀이한 뒤에라야 비로소 마을이 뿌리를 내립니다.



.. 아이들을 대하는 아빠들의 태도에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아내의 몫으로만 여기던 육아를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와 함께 바깥으로만 돌던 아빠들이 자연스레 마을의 일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 마을무지개의 미덕은 이주 여성을 한 마을에 사는 이웃으로 바라본다는 것, 경제 활동을 함께하면서 마을공동체도 일구어 간다는 점일 것이다 ..  (184, 234쪽)



  서울은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땅은 무척 좁은데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텃밭을 누리기 몹시 어렵습니다. 마당 있는 집에서 지내는 서울사람은 손으로 꼽을 만큼 드뭅니다. 고급아파트나 호화빌라에 살더라도 마당을 누리는 사람은 드물지요. 마음껏 악기를 켜거나 노래를 부를 만한 살림집에 깃든 서울사람은 그야말로 드뭅니다.


  서울에서 꾀하는 ‘마을 만들기’는 이렇게 나무 한 그루 못 심고 텃밭 한 조각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제 더는 이 갑갑한 곳에서 숨이 막혀 못살겠다!’고 하면서 외치는 목소리라고 느낍니다. 층간소음 때문에 골머리를 앓지 말고,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고 웃고 떠들고 수다를 떨면서 밥잔치도 열고 술잔치도 벌이면서, 온갖 잔치를 함께 누리자고 하는 신나는 놀이마당을 꿈꾸면서 ‘마을 만들기’를 꾀하지 싶습니다.


  마을은 언제나 놀이마당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언제나 노니까요. 마을은 언제나 일터입니다. 왜냐하면, 어른들은 언제나 일하니까요. 다만, 놀이와 일은 서로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 일거리를 거들면서 기쁘게 놉니다. 어른들은 언제나 아이들이 홀가분하게 놀도록 온갖 놀잇감을 손수 만들어서 건네며 함께 놉니다. 놀이노래를 가르치고, 놀이를 물려줍니다. 너른 마당과 들과 숲에서 아이들이 걱정없이 뛰놀도록 삶터를 가꿉니다.


  서울에서 꾀한다는 ‘마을 만들기’는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기를 바라는 꿈이어야지 싶습니다. 서울사람이 짓는다는 ‘마을’은 바로 어른과 아이가 함께 웃고 노래하는 잔치마당을 바라는 꿈으로 나아가야지 싶습니다.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에서도 앙증맞은 마을이 태어나기를 빕니다. 강아랫마을과 강웃마을 모두 사랑스러운 마을이 새로 자랄 수 있기를 빕니다. 이리하여, 나중에는 서울과 시골이라는 울타리가 없이, 모두 한동아리로 어깨동무할 수 있는 멋진 ‘한마을 이웃’이 될 수 있기를 빌어요. 4348.4.28.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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