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보라는 대문 뒤로 숨지


  자전거마실을 가려고 대문을 연다. 산들보라는 이때에 대문 뒤에 숨기를 즐긴다. 누나와 함께 대문을 붙잡은 다음, 자전거가 나간 뒤에 대문을 닫는다고 하는데, 대문을 여닫는 놀이에다가 숨기놀이를 즐기는 셈이라고 여기는구나 싶다. 그래, 맞아, 대문놀이가 되지. 네 몸짓은 언제나 모두 놀이가 되니까. 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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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55 위아래



  삶에는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사람한테는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별에도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지구에도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어디에도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알아보기 쉽’거나 ‘이야기를 나누기 좋’도록 위와 아래를 나누기도 하고, 왼쪽과 오른쪽을 가르기도 하며, 새·하늬·마·높(동·서·남·북)으로 살피기도 합니다.


  내가 바라보면 이곳은 왼쪽일 테지만, 나와 마주보는 사람한테 이곳은 오른쪽입니다. 내가 선 곳이 위라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보면 아래입니다. 내가 동쪽으로 간다고 하지만 저쪽에서는 서쪽입니다. 그러니, 모든 곳은 어느 곳도 아닌 셈입니다.


  말에도 위아래가 없습니다. 이 말을 쓰니까 높임말이 되지 않고, 저 말을 쓰기에 낮춤말이 되지 않아요. 위아래라고 하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좋고 나쁨’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높임말이라고 할 적에도 ‘틀에 맞추는 겉말’을 쓸 때에는 높이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여느 말이나 수수한 말이나 투박한 말을 쓰더라도 ‘마음으로 서로 높이려는 넋’일 때에 비로소 높임말입니다. 겉보기로는 높임말 시늉이나 흉내라 하더라도 ‘마음으로 서로 깎아내리거나 낮추려는 넋’이라면 낮춤말이에요.


  높임말도 위아래도 없다면, 사람 사이에서도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더 높은 사람이 따로 없고, 더 낮은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사람 사이에 경계나 신분이나 계급을 둔다면, ‘더 높다는 자리’에 서는 사람이야말로 더 낮다는 자리로 스스로 가면서 제 삶을 갉아먹는 셈입니다. 이웃사람을 ‘더 낮다는 자리’에 내리깔려고 한다면, 더 낮다는 자리에 내리깔리는 사람이야말로 더 높다는 자리로 저절로 올라서는 셈입니다.


  위와 아래가 없지만,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흐릅니다. 삶이란 흐름입니다. 다만,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흐름이 아닙니다. 삶을 이루는 일곱 조각을 돌고 도는 흐름이 아닙니다. 첫째 조각에서 둘째 조각으로 갔다가, 셋째와 넷째와 다섯째와 여섯째를 지나 일곱째 조각으로 간 뒤, 다시 첫째 조각으로 돌고 도는 흐름이 아니라, 그저 흐르고 새롭게 흐르는 삶입니다.


  흐름은 늘 한꺼번에 이루어집니다. 따로따로 나누어 일곱 갈래인 듯이 말하기는 하지만, 첫째에서 일곱째에 이르는 흐름은 한결입니다. 한결로 한꺼번에 흐릅니다. 첫째에서 둘째로 간다 싶으면 어느새 셋째에 있고, 셋째에서 넷째로 간다 싶으면 곧바로 다섯째입니다. 그래서 첫째에서 일곱째로 곧장 가고, 일곱째로 곧장 가면 어느새 첫째입니다. 마치 제자리걷기를 하는 듯하다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제자리걷기가 아닌 흐름이요, 흐름이면서 삶입니다. 어제와 오늘과 모레가 늘 한꺼번에 이루어지듯이, ‘삶흐름’도 늘 한꺼번에 함께 나란히 나타납니다.


  위아래가 없는 흐름인 줄 읽을 수 있다면,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 나이가 더 적은 사람하고 삶을 어떻게 가꿀 때에 아름다운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위아래가 아닌 흐름이 삶인 줄 바라볼 수 있다면, 나이가 더 어린 사람이 나이가 더 든 사람하고 사랑을 어떻게 나눌 때에 즐거운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한테 어떤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제 꿈을 바라보면서 제 길을 걷기에 제 사랑이 샘솟아 기쁘게 어깨동무를 합니다. 우리는 다 함께 노래하는 길로 흘러서 갑니다. 우리는 겉모습이 아닌 참모습을 바라보려 합니다. 우리는 겉치레가 아닌 속가꿈으로 삶을 지으려 합니다. 달력에 따라 찾아오는 하루가 아니라, 어제를 마무리하고 오늘을 새롭게 여는 하루입니다. 오늘을 새롭게 열면서 모레로 나아가고자 하루를 즐겁게 닫습니다. 열면서 곧바로 닫고, 닫으면서 곧바로 엽니다. 위이기에 곧바로 아래이고, 아래이기에 막바로 위입니다. 물결입니다. 물결치는 흐름입니다. 물결치는 흐름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물결은 위와 아래가 없이 위아래로 흐르는 결이듯이, 사랑은 바로 내 가슴에서 스스로 길어올립니다. 삶은 언제나 바로 오늘 이곳에 있습니다. 4348.3.9.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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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마니 대원 애니메이션 아트북 20
조앤 G. 로빈슨 지음, 선우 옮김,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 / 대원키즈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마니가 있던 자리 (추억의 마니)

思い出のマ-ニ-, When Marnie Was There, 2014



  ‘안나’라는 아이와 ‘마니’라는 아이가 나오는 만화영화를 본다. 두 아이는 여느 이름이 아니다. 영어로 붙인 이름이라고 할까. 가만히 보면, 안나도 마니도 눈알이 파랗다. 안나는 까만 기운이 도는 파랑이라면, 안나는 맑게 파랗다. 안나는 머리카락이 밤빛이나 흙빛이라면, 마니는 머리카락이 샛노랗다.


  둘은 어떤 사이일까. 둘은 어떤 삶을 지냈을까. 둘한테는 언제나 가시밭길인 삶일까. 둘은 기쁨도 즐거움도 없이 늘 괴롭거나 고단한 하루를 누려야 했을까.


  안나는 마니가 누리는 삶을 부럽게 여기고, 마니는 안나가 누리는 삶을 부럽게 여기기도 하지만, 이내 둘은 누가 누구를 부럽게 여길 까닭이 없이 스스로 삶을 새롭게 일구면 되는 줄 알아차린다. 서로서로 아끼고 기대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된다면, 어디에서나 언제나 스스로 가슴속으로 사랑을 지필 수 있는 줄 깨닫는다.


  여느 자리에서는 웃음도 보이지 않고 눈물도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지만, 오직 둘이 있는 동안에는 함께 웃고 함께 운다.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춘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 둘 사이에만 맺는 따사로운 믿음과 꿈과 이야기가 흐른다.


  마니가 있던 자리는 바로 안나가 있던 자리이다. 마니가 생각하는 꿈은 바로 안나가 생각하는 꿈이다. 마니가 바라는 사랑은 바로 안나가 바라는 사랑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날 수 있다. 두 사람은 활짝 열어젖힌 마음으로 기쁘게 만날 수 있다. 마음을 닫으면 못 만나지만, 마음을 열기에 만난다.


  안나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면 마니를 만났을까. 아마 못 만났겠지. 안나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마니를 만났을까. 아마 못 만났겠지. 안나가 웃음을 짓지 않았으면 마니를 만낫을까. 아마 못 만났겠지.


  안나는 할머니 숨결을 이어받은 새로운 사랑이다. 그리고, 마니도, 아마 먼 옛날에 마니를 낳은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 그러니까 마니한테 할머니가 되는 분한테서 사랑스러운 숨결을 이어받은 바람과 같은 넋이리라.


  바람이 한삶을 거쳐 이 다음 삶에서 새롭게 피어난다. 꽃이 한살이를 거쳐 이 다음 한살이에서 새롭게 자란다. 사람이 한사랑을 거쳐 이 다음 사랑에서 새롭게 무르익으면서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


  나는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 무엇을 물려받았을까. 우리 집 아이들은 내 어버이(아이들한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 무엇을 물려받을까. 나는 우리 집 아이들이 앞으로 낳을 새로운 아이들한테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 숨결이 될까. 푸르게 우거지는 숲과, 파랗게 빛나는 못물과 하늘, 여기에 두 아이 맑은 눈망울이 파랗게 눈부신 모습을 가만히 헤아린다.


  그나저나, 일본에서는 이 만화영화에 〈思い出のマ-ニ-〉라는 이름을 붙였고, 영어로는 〈When Marnie Was There〉라는 이름을 붙인다. 한국에서는 〈추억의 마니〉로 적는데, 〈마니가 있던 자리〉로 옮겨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마니를 생각할 때”나 “마니를 생각하며”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안나는 마니를 생각할 때에 마니를 만난다. 안나 스스로 마니를 생각하지 않으면 마니를 만나지 못한다. 한편, 영어로 옮긴 이름을 마음에 그리니 “마니가 그곳에 있던 때”라는 이름도 떠오른다. 한자말 ‘추억(追憶)’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을 뜻한다. 그나저나 ‘추억의 마니’라고 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추억 어린 마니’나 ‘추억에 남은 마니’처럼 고쳐써야 맞다. 말뜻을 살펴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다. 한국말로 제대로 옮겨야지. 일본말 ‘の’는 ‘-의’로 적는대서 번역이 되지 않는다. 4348.4.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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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아이 95. 2015.4.22. 푸른단풍잎이랑



  새로 돋은 단풍잎을 둘 뜯어서 손에 쥐는 꽃순이. 우리 도서관에 갈 적마다 커다란 나무 곁에 서서 “잘 있었니? 반가워!” 하고 인사하는데, 갓 돋은 보들보들한 잎사귀를 나무한테서 얻고는 기쁘게 자전거를 탄다. 새 나뭇잎한테도 자전거마실을 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요, 새 나뭇잎도 바람을 기쁘게 쐬면서 봄내음을 듬뿍 마시게 하고 싶은 마음이다. 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꽃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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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꽃마리 논둑



  이웃 논둑에 좀꽃마리가 한창 핀다. 좀꽃마리는 그야말로 작은 꽃이라서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렵다. 봄까지꽃보다 훨씬 작은 꽃이요, 별꽃보다도 작은 꽃이다. 못 알아채고 지나가기 쉬운 꽃이지만, 보드라운 잎과 꽃은 모두 고마운 나물이 된다. 땅바닥에 엎어져서 코를 큼큼거리면 향긋한 꽃내음이 물씬 퍼지기도 한다.


  작은 꽃은 우리더러 늘 땅바닥에 쪼그려앉거나 엎드리라고 한다. 작은 꽃은 우리더러 작은 꽃송이한테 눈높이를 맞추라고 이른다. 이리하여, 꽃을 보는 사람은 늘 땅바닥에 납작하게 붙는다. 땅내음을 맡으면서 꽃을 바라보고, 땅빛을 살피면서 꽃을 느낀다. 아이들도 꽃처럼 아이 눈높이에 맞추어 저희를 바라보라고 우리 어른을 부른다. 키가 큰 사람은 작은 사람한테 맞추어야 어깨동무를 할 수 있고, 힘이 센 사람은 여린 사람한테 맞추어야 어깨동무가 되며, 많이 아는 사람은 적게 아는 사람한테 맞추어야 어깨동무를 이룬다. 4348.4.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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