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19.12.13.


《일하지 않는 두 사람 6》

 요시다 사토루 글·그림/문기업 옮김, 대원씨아이, 2019.11.30.



다섯걸음이 나온 뒤 세 해 넘게 여섯걸음이 나오지 않던 《일하지 않는 두 사람》. 드디어 나왔구나. 살림돈을 푼푼이 모은 끝에 드디어 장만해서, 큰아이가 ‘쌓기밥 차림종이’를 그리는 동안 읽는다. 앞선 다섯걸음을 떠올리니, 여섯걸음은 그림결이 많이 바뀌었다. 어라, 너무 바뀌었는걸?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이끄는 틀도 제법 달라졌다. 아, 어쩐지 다섯걸음째까지 좋았고, 여섯걸음은 좀 군더더기가 많지 싶다. 여섯걸음부터 새로 나오는 예전 벗은 반가우나, 오빠 쪽 동무 여자친구는 그리 반갑지 않다. “일하지 않는 두 사람”은 맞되 “즐겁게 살려는 두 사람”인 만큼, 이 대목에 더 마음을 기울이고, 그림결도 섣불리 건드리지 말고, 굳이 새로운 사람을 더 끌어들이려 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본다. 무엇보다도 “돈을 버는 일”이어야 살아가는 보람이 아니라는 대목을 수수하면서 부드럽게 짚으려는 얼거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차분하기를 빈다. 그렇다면 일곱걸음이 한국말로 나오면 장만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살짝 망설이리라. 좋았을 때만 떠올리고 싶달까. 큰아이는 어느덧 차림종이를 다 그렸다. 손수 지어서 먹는 밥을 손수 차림종이로 옮겨내어 그리니 멋지네. 다음달 도서관 얘기종이에 같이 담아서 보낼까 싶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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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19.12.10.


《니코니코 일기 2》

 오자와 마리 글·그림/장혜영 옮김, 대원씨아이, 2002.9.30.



열두 살 어린이한테 어떤 만화책을 새로 알려주면 좋을까 하고 헤아리다가 《니코니코 일기》를 오랜만에 집는다. 여느 학교를 다니면서 여느 영화나 연속극을 본 열두 살이라면 이 만화책도 좋을 만하겠는데, 살짝 아슬아슬하다 싶은 대목도 보인다. 그린님이 워낙 착한 만화를 빚는 분이기는 한데, 착한 만화를 그리려다가 곧잘 ‘생채기나 멍울을 어떻게 달래거나 씻는가’를 보여주려고 곁들이는 ‘생채기나 멍울’이라는 대목이 조금 걸린다. 곰곰이 본다면 이런 곁그림조차 없이 어떻게 줄거리를 엮겠느냐 말할 만하겠지. 열다섯 살 즈음이라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할 텐데 싶으면서도, 열두 살이라고 얕게 보지는 말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다시 펴는 《니코니코 일기》는 더없이 아름답다. 이 만화가 한국말로 나온 지 열 몇 해가 흐르는데, 아직 이만큼 탄탄하면서 곱게 담아내는 한국만화를 찾기가 어렵다. 이제는 ‘난 아프거든!’ 하는 데에서 맴도는 한국만화는 봐주기 어렵다. ‘난 사랑해!’ 하고 노래하는 길목으로 한 칸씩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가시밭길도 꽃밭길로 바라보면 좋겠다. 생각해 보라. 얼핏 보면 가시이지만, 이 가시가 돋은 푸나무일수록 꽃이 훨씬 향긋하고 곱다. 찔레, 딸기, 장미, 탱자, 유자.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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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57. 가르다



  어릴 적부터 이쪽저쪽을 가르는 일은 내키지 않았습니다. 모두 하나가 되면서 어울리면 좋을 텐데요. 그렇지만 놀이를 하든 시험을 치르든 운동경기를 하든 언제나 ‘쪽가르기(편가르기)’를 해야 했습니다. 이때마다 머리를 싸맸어요. 언제나 같이 놀던 동무하고 다른 쪽으로 갈리면 어떡하지? 이때에는 남남처럼 굴어야 하나? 때때로 놀이동무하고 다른 쪽이 되어 맞붙어야 했고, 이때 놀이동무가 무척 세차거나 매몰차게 구는 모습에 힘들었습니다. 고작 국민학교 체육시간 편가르기 경기일 뿐이라지만, 어느새 사이가 틀어졌어요. 그 뒤로는 놀이 아닌 체육시간이나 운동경기가 매우 거북했고, 끼거나 하기 싫었습니다. 차츰차츰 자라며 ‘판가름’이란 말을 만났습니다. ‘가르다’하고 다르면서 비슷한 ‘가리다’란 낱말을 곱씹었어요. “똥오줌을 가리다”라든지 “옳고그름을 가리다”처럼 ‘가리다’를 쓰더군요. ‘갈래’나 ‘갈림길’ 같은 낱말을 혀에 얹고, 조금씩 생각을 뻗어 ‘가지·갖가지’나 ‘가다’ 같은 더 깊은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르든 가리든 좋거나 나쁜 길이 아닌, 우리가 무엇이든 몸으로 겪으면서 새롭게 헤아려서 알아내는 길이로구나 싶었어요. 가시밭길이든 꽃길이든 즐겁게 가자는 마음으로 ‘가르다’를 생각하면서 맞이하기로 합니다. 물살을 가르면서 나아갑니다. 하늘을 가르면서 날아갑니다. 앞을 잘 보려고 머리카락을 가르면서 눈을 반짝여요. 꿋꿋하게 가로질러요. 가로하고 세로가 만나면서 우리 자리가 새롭게 빛나요. ㅅㄴㄹ



가르다


가만히 있어도 알기에

그대로 있으며 좋기에

하나로 있어서 보기에

가르지 않고서 있구나


새롭게 알아갈까 싶기에

춤추며 놀러갈까 싶기에

다르게 보러갈까 싶기에

슬며시 가르면서 어울려


너랑 나랑 가르면서

재미나게 어울마당

너희하고 우리를 나누면서

더욱 넓게 푸르게 어울림판


어떤 느낌인지 판가름한다

어떤 결인지 가려내지

물살도 바람도 가르며 달려

가르마에 햇빛이 반짝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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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말


그림책에 쓰는 글 : 그림책은 누구나 읽는 책이다.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그림이며 글을 가다듬을 줄 알아야 한다. 많이 배운 사람만 알아볼 수 있다든지, 어린이가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말은 걸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쉬운 말’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쉬운 말’이 누구한테 어떻게 쉬운 말인가를 찬찬히 알아야 할 테지. 세 살 아이한테 ‘쉬운 말’이란 무엇일까? 다섯 살 아이한테 ‘쉬운 말’이란 무엇일까? 그림책이나 동화책에는 무턱대고 ‘쉬운 말’을 쓰지 않는다. 첫째로는, 줄거리를 살필 수 있도록 ‘눈높이에 맞춘 말’을 쓴다. 둘째로는, 줄거리에 담은 이야기를 헤아릴 수 있도록 ‘눈높이에 맞추면서, 이 말을 바탕으로 생각을 새롭게 지피도록 잇는 다리 구실을 하는 말’을 곁들여서 쓴다. 두 갈래 말을 그림책에 써야 하는 셈일 테지. 보기를 들어 보면 이렇다. “개미가 짐을 지고 가네.” 같은 글줄이 나올 수 있는데, 아이는 ‘짐’을 모를 수 있다. “‘짐’이 뭐야?” 하고 물으면 “응 ‘지는’ 것을 ‘짐’이라고 해요. 그래서 “짐을 지고”라 하지.”라 보탤 만하다. 이다음으로 “개미는 짐이 많아 지게에 지고서 가요.” 하는 글줄이 나올 수 있으니, 아이가 다시 “‘지게’가 뭐야?” 하고 물을 테고 “응, ‘지는’ 것을 담으려고 하는 것을 ‘지게’라고 해. 우리가 뭘 집을 적에 ‘집게’를 쓰지? 집을 적에는 ‘집게’, 짊어질 적에는 ‘지게’를 쓰지.”처럼 들려줄 만하다. 그러니까 그림책이나 동화책에 흐르는 말은 삶이며 살림이며 사람이며 숲이며 사랑을 읽는 바탕이 되는 말이 하나이면서, 바로 이 바탕말에 살을 입혀서 찬찬히 너비나 깊이를 더하는 말이 둘인 셈이다. 다릿목처럼 잇는 말을 쓸 노릇이라고 할까. 보기를 더 들어 본다. 어른한테는 익숙할 한자말 ‘항상’일 테지만, 그림책이나 동화책에서는 이 한자말이 아닌 ‘늘·언제나’를 비롯해서 ‘한결같이·줄곧’ 들을 쓸 적에 말빛을 슬기롭게 일깨울 만하다. 왜 그럴까?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말을 하나둘 입으로 터뜨리고 눈으로 보여주고 줄거리란 살을 붙여서 이야기로 들려줄 적에 아이는 마음으로 이모저모 생각이란 씨앗을 스스로 심을 수 있다. 단답형 시험문제처럼 외워야 하는 낱말이 아닌, 이 낱말을 듣고 헤아리면 다른 낱말을 어림할 수 있고, 그 다른 낱말에서 새로운 낱말을 생각하고 깨닫도록 하는 낱말이 바로 슬기요 노래가 된다. 한자말 ‘음악’이나 영어 ‘뮤직’은 어떨까? 이런 말도 나중에, 아마 열대여섯 살쯤 지나서 쓸 수 있으리라. 그러나 어린이는 ‘노래’ 하나를 바탕으로 삶을 더 깊고 넓게 읽도록 하는 길을 둘레 어른이 상냥히 이끌어야지 싶다. 즐겁게 노래하고, 새랑 풀벌레가 노래한다. 놀이를 하며 노래를 한다. 같이 노래를 하고, 혼자 노래를 한다. 일하며 노래하고, 마실하며 노래한다. 하루를 노래하고, 별빛을 노래한다. 어린이노래라는 ‘동요’란 ‘단출히 지은 이야기인 동시’에 가락을 입힌 숨결이니, 이 모두가 어떤 노래란 숨인지 두고두고 다스리고 누릴 적에, 이다음으로 온갖 말을 건사할 만하다. 한국은 아직 ‘그림책 글’을 제대로 바라보거나 다루거나 돌보거나 손보는 눈길이 없다고 느낀다. 어린이 눈높이를 안 살피는 그림책 글월이기도 하고, 어린이 살림결을 안 읽는 그림책 옮김말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그림책에서뿐 아니라 어른문학이나 인문책이나 여느 교과서도 사회 곳곳에서 쓰는 모든 말도 ‘삶을 바탕으로 새롭게 생각을 지피는 말’을 써야 아름다울 텐데. 2019.12.12.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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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말


학문말 : 학문말을 새로 하려면, 그 학문을 하는 사람이 해야겠지. 그런데 때로는 그 학문을 안 하는 사람이 뜻밖에 매우 고마운 귀띔을 밝혀 주기도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하고 물을는지 모르나, 학문을 하는 사람하고 학문을 안 하는 사람은 ‘보는 눈·보는 곳’이 달라서,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너무 마땅해서 굳이 더 파고들지 않는 데를 학문을 안 하는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주 깊숙히 파고들며 살다가 문득 귀띔을 한다.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까다롭거나 어렵다고 여기는 곳이라 해도 학문을 안 하는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터라(까다로운지 안 까다로운지를 생각할 수도 없는 터라) 불쑥 매우 쉽게 풀잇길을 내놓기도 한다. 이를 스스럼없이 바라보면서 받아들인다면 학문말뿐 아니라 학문은 매우 발돋움하겠지. 어느 곳에서나 매한가지이다. ‘수학’판이든 ‘과학’판이든 ‘요식업’판이든 ‘목공’판이든 ‘운전업’판이든, 다들 전문용어만 쓰려 한다. 책마을에서도 똑같으니, 책마을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스며든 일본 한자말이나 일본말이나 일본 영어가 아니면 인쇄도 제본도 할 수 없다고 여기기도 한다. 학교를 보라. 우리는 왜 ‘교장·교감·교사’ 같은 일본말을 그냥 쓸까? 이 이름을 참말 그대로 써야 할까? 왜 학교는 ‘원족·소풍·수학여행·체험학습·현장학습’ 같은 이름만 쓸까? 왜 한국말은 학교에 깃들지 못할까? 철학이나 종교나 문학은 어떠한가? 정치나 경제나 무역은 어떠한가? 사진이나 그림이나 조각은 어떠한가? ‘어느 학문을 깊이 판 사람만 그 학문하고 얽힌 말을 새로짓거나 손질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학문말은 그냥그냥 내버려두라는 뜻일는지 모른다. 삶자리 어디에서나 저마다 울타리를 쌓고서 ‘여기는 내 전문이야, 넘보지 마!’ 하면서 끼리끼리 놀면서 자격증하고 졸업장을 내세워서 남남으로 갈리려는 몸짓이지 않을까. 과학자는 아기를 낳으면 아기한테 무슨 말을 써야 사랑스러울까? 축구선수나 농구선수는? 요리사는? 택시일꾼은? 의사는? 판사는? 철학자는? 공무원은? 교사는? 그리고 ‘아기를 사랑하는 어머니나 아버지’는? 전문용어가 전문용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울타리에 갇힌 채 헤매는 까닭은 오직 하나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랑을 나누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1994.7.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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