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에코백 : 어느 분이 그러더라, ‘에코백을 장만해서 제대로 쓰려면 삼백 판 넘게 들고 다니면서 써야 한다’고. 그런데 마땅한 일 아닌가? 삼백 판이 아니라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쓰려고, 또 이렇게 쓰면서 틈틈이 기우고 손질해서 아이한테 물려주려고 곁에 두는 천바구니 아닐까? 나는 책이며 옷이며 일감이며 물병이며 사진기이며 갖은 살림을 등짐이나 끌짐에 채워서 마실을 다닌다. 혼자 다닐 적에도 천바구니는 열 자루쯤 있어야 하는데, 아이들 이끌고 다닐라치면 스무 자루쯤 있어야 넉넉하다. 비닐자루를 하나도 안 쓰자면, 두 아이랑 곁님까지 넷이 마실을 다닐 적에 천바구니가 서른쯤 있어야 안 아쉽겠더라. 누구는 뭘 그리 많이 갖추려 하느냐고 묻지만, 말 그대로 비닐자루를 하나도 안 쓰자면 그리 갖추어야 한다. 크고 펑퍼짐한 천바구니, 옷만 담는 천바구니, 살짝 작거나 제법 작은 주머니 같은 천바구니, 이렇게 여러 가지로 두루 갖추어 그때그때 다르게 쓴다. 그리고 보름이나 한 달에 한 벌쯤 빨래를 해서 햇볕이랑 바람에 말린다. 2019.12.24.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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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숲노래 만화책


문학잡지 편집장이 된 여든 살 할머니

― 내가 사랑하는 2019년 올해책 《80세 마리코》



  2019년 1월 1일부터 2019년 12월 31일 사이에 나온 책을 모두 읽지는 못했습니다. 올해에 나온 책을 모두 장만할 돈이 아직 없기도 했지만, 눈에 안 뜨인 책이 있고, 미처 알아보지 못한 책이 있습니다. 그래도 다달이 백 자락 넘게 챙겨서 읽은 사람으로서 제 나름대로 2019년 올해책 한 가지를 꼽으려 합니다.

  지난 2018년 10월 31일에 첫걸음이 나오고, 2019년 1월 3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두걸음부터 열걸음까지 잇달아 나온 만화책 《80세 마리코》(오자와 유키/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입니다.


“있어요!! 조… 좋은 거!! 나, 나는요, 지금 이 순간을 몇 십 년이나 기다렸으니까…!!” (2권 42∼43쪽)


  만화책 《80세 마리코》는 아마 많이 안 팔렸을 수 있고, 이런 만화책이 있는 줄 모르는 분도 많을 테며, 이 만화책을 눈여겨본 기자나 비평가도 거의 없다시피 하지 싶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이 만화책을 알아차리든 못 알아차리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한 해 사이에 자그마치 아홉걸음이나 한국말로 나온 ‘여든 살 할머니가 갖은 가시밭길을 신나게 헤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줄거리’를 들려주는 이 만화책은, 바로 오늘날이기에 더 눈여겨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이든 분이 늘어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제 여든이란 나이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라고 하기보다 ‘아직 한창’이라 할 만한 때에 이르렀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 만화는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다가갈 적에 스스로 아름다이 피어나는 꽃인가를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난 꼭 소설을 쓸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써서 책을 낼 거예요. 당신이 있는 곳에 전해질 수 있도록. 당신이 그걸 읽어 줄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이어질 수 있을 거예요.” (3권 75∼76쪽)


  영화 〈뮬란〉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아버지는 이녁 딸이 못물을 들여다보면서 마음앓이를 할 적에 살며시 다가와서 ‘늦꽃’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먼저 피어난 꽃이든 나란히 흐드러진 꽃이든 다 곱다고, 그러나 가장 나중에 피어나는 꽃, ‘늦꽃’이 어느 꽃보다 한결 곱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들려주어요.


“작가는 잡지에 공헌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죠. 작가는 좀더 좋은 작품을 쓰고, 잡지는 그 자리를 제공한다, 전 늘 그런 곳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4권 119쪽)


  만화책 《80세 마리코》에 나오는 할머니 마리코 님은 여든 살 나이에 갖가지 일을 겪어요. 첫째, 소설을 써서 번 돈으로 지은 집에서 쫓겨납니다. 따지고 보면 쫓겨난다기보다 스스로 떠난 셈이지만, 아들이며 며느리이며 손자이며 손자 며느리이며, 마리코 할머니하고 생각이며 삶이 너무 다른 길인 줄 뒤늦게 느껴요. 비록 그 집이 마리코 할머니 온삶이며 피땀이 깃든 집이지만, ‘곧 죽으리라 여기는 눈길’을 느끼면서, 그 집을 스스로 내려놓기로 해요.


  그런데 주머니에 몇 푼 없이 집을 떠나요. 빈털터리이다 싶은 몸으로 ‘내가 온삶을 바쳐 지은 집’에서 나온 여든 살 할머니는 피시방 비슷한 곳에 머물면서 길고양이를 건사합니다. 그리고 이즈음 문학잡지에서도 잘립니다.


“잡지에 활력을 준다고 했는데, 애초에 잘린 작가인 당신은 거기에 안 들어가는 거 아닌가요?” “어머. 내 이야기를 이해 못 했나요?” “이해했는데요?” “난 ‘군세이’가 추구하는 작풍과 벗어나버려서 잘렸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 자신의 잡지라면 괜찮을 거란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죠?” “‘군세이’가 만들고 싶은 것과 내가 만들고 싶은 건 다르니까요.” (5권 65∼66쪽)


  여든 살에 글쓸자리를 잃은 할머니 마음은 어떠할까요? 집이며 아이들도 마음에서 잃어야 했는데, 마지막까지 할머니 삶을 버티던 글쓸자리가 사라진 뒤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때에 갈 만한 길은 매우 좁기 마련입니다. 냇물이나 바다에 뛰어들어 몸을 버릴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뛰어내려 몸을 버릴 수 있습니다. 여든 살 마리코 할머니는 이렇게 괴롭고 힘들 적에 품에 건사한 길고양이를 떠올립니다. 이 길고양이 아이도 무척 괴롭고 힘든 가시밭길을 걸었을 텐데 끝까지 살아서 ‘나를 만나’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하지요.


“내게 어머니는 ‘작가 코자쿠라 쵸코’야. 그 소설의 힘으로 세상의 눈이 다시 코자쿠라 쵸코를 보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이건 쓰레기가 아냐.” (6권 154쪽)


“난 기뻐요. 60살이나 차이가 나는 당신이 같은 곳에서 초쿄 씨를 바라보고 있다니.” (7권 60쪽)


  여든 살에 이른 소설지기 할머니 앞에 놓인 길이 매우 좁다 보니, 오히려 이 할머니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더 씩씩하게 나아갈 수 있기도 합니다. 아직 아무도 가지 않았을 길이니 먼저 갈 수 있어요. 아직 누구도 그 길이 잘될는지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불꽃을 태울 만하다고 여겨요.


  우리 삶터를 돌아보면 좋겠어요. 오래된 마을이거나 골목이니까 싹 허물어서 아파트를 올리면 될까요? 그런데 오랜 마을이나 골목을 밀어내어 아파트를 올리더라도 스무 해나 서른 해가 지나면?


  또 하나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일본이든 유럽이든 중남미이든, 또 쿠바 같은 나라에 마실을 가면서 어느 길을 걷고 어느 곳에서 아름답다고 느끼나요? 새로 올려세운 높직한 첨단문명이 번쩍거리는 곳에서도 아름답다고 느낄 분이 있겠지만, 오랜 마을이나 골목이나 터전을 돌아보려고 여러 나라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무척 많습니다.


“작가는 언제나 집안에만 있는데, 언제 낡은 옷이 생기겠어. 24시간 기분 좋게 지내고 싶잖아. 언제든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싶다고.” (7권 146쪽)


“어떤 이야기를 가져와도 여기 사람들은 바뀌지 않아요. 오랜 시간 같은 풍경에 세뇌되어 의욕을 잃어버리고 주도권은 집주인에게 빼앗겼죠.” (8권 43쪽)


  만화책 《80세 마리코》는 모든 틀을 와장창 깨면서 나아가는 삶길을 그립니다. 설마 저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 길을 그립니다. 만화이니까 그릴 수 있는 얘기 아니냐고 묻는다면, 바로 만화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렇게 모든 낡은 틀을 깨부수고서, 모든 새로운 길을 여는, 게다가 여든 살 할머니부터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즐거운 꿈길을 그립니다.


‘사랑은 당연히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몇 년을 수십 년을 거듭 쌓아왔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거야.’ (9권 29∼30쪽)


‘내일 일은 모른다. 답이란 없다. 하지만 지금을 바꾼다면 다른 내일이 올지도 모르지.’ (9권 131쪽)


  미움, 시샘, 등돌림, 검은셈, 꿍꿍이, 괴롭힘, 눈속임, 따돌림 들이 춤추는 판에서 여든 살 할머니가 살아날 길은 참으로 팍팍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온갖 것이 춤추는 판이기에 더 기운을 낼 만하기도 해요. 이런 판을 싹 갈아엎어서 다같이 웃음판이 되고 노래판이 되는 길을 그릴 수 있습니다. ‘여태 이랬는걸?’ 하고서 고개를 돌리는 길이 아니라, ‘앞으로 남은 삶이 얼마인지 몰라도, 티끌 하나만큼도 아쉽지 않게 온힘을 사랑으로 쏟겠다’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있어요.


“옛날 책이 재미있니?” “옛날 아니야. 책을 읽으면 거기에 갈 수 있어. 그러니까 지금이야. 아빠 책장은 모르는 지금이 가득 있어.” “아빠가 갔던 곳에 너도 가는 거구나.” ‘책은 속도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장소에서 천천히 시간을 뛰어넘는 거야.’ (10권 74∼75쪽)


  여든 살 소설지기 할머니는 이제 열 살쯤 되었나 싶은 아이가 이녁 소설을 재미있다면서 읽는 모습을 보고는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일흔 해를 가로지른 어린 동무를 만나서일 수도 있지만, ‘책이 품은 힘’이 무엇인가를 여든 살에 이르러 처음으로 헤아렸기 때문이라 할 만해요.


  어제하고 오늘을 잇는 책이 됩니다. 오늘 이곳에서 앞으로 나아갈 새빛을 밝힐 수 있는 책입니다. 아직 겪지 못한, 또는 무척 오래된 일이라 이 몸으로 갈 수 없는, 그런 모든 삶이며 살림이며 사랑을 ‘책 하나를 손에 쥐어’서 만날 수 있다는 마음을 어린 동무한테서 배웁니다.


“있습니다. 미래는 저도 신도 선생님도 모르는 거죠. 그러니까 ‘있다’고 믿는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10권 103쪽)


  빈손에 빈몸이니 그저 부딪힙니다. 터무니없는 꿈이라 여겨도 나아갑니다. 넘어지니 일어섭니다. 쓰러지니 한참 누워서 기운을 차려 봅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무엇을 하면서 여든 살을 꽃나이로 삼고 꽃길로 가꿀 수 있겠는가를 생각합니다. 자꾸자꾸 생각합니다. 끝이 아닌 첫길을 생각하고, 혼자 가는 길이 아닌,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빛날 길을 생각합니다. 2019년을 지나 2020년에 더 나올 만화책 《80세 마리코》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새롭게 흐를까요?


  올해책이자 아름책인 이 만화를 여러 이웃이 사랑하면서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요, 아름책입니다. 아름다운 책이어서 아름책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짓도록 넌지시 알려주는 징검다리가 되기에 아름책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리는 숲노래(최종규).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2019년까지 쓴 책으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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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시읽기

노래책시렁 115


《우리들 소원》

 최명자

 풀빛

 1985.3.15.



  시를 잘못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저 시가 좋아서 읽는 분도, 시를 써서 시집을 묶고 싶은 분도, 시를 그야말로 잘못 압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삶을 ‘우리 스스로 겪고 마주한 대로 단출히 적으’면 고스란히 시입니다. 집안일도 아이돌보기도 안 했다고 하면, 설거지를 처음으로 거든 일을 시로 쓸 수 있고, 걸레를 처음 손수 빨아서 마루를 훔친 일도 시로 쓸 수 있습니다. 늘 도맡는 집안일이라면, 집안일을 놓고 하나하나 갈라서 “집에서 일하다”란 시집을 너끈히 묶어낼 만합니다. 이제는 사라진 버스 차장이란 일을 1980년대 첫머리에 하던 분은 그때에 《우리들 소원》이라는 시집을 내놓았습니다. 이러고서 수수한 ‘애 엄마’가 되었다고 얼핏 들었습니다. 이분이 ‘애 엄마’로 보낸 나날을 고스란히 옮긴다면 참으로 놀랄 만한 새로운 시가 태어날 텐데 하고 어림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 돌보는 모든 수수한 어머니 아버지가 아이한테서 받고, 아이한테 물려주는 사랑을 맑은 눈빛으로 그대로 담아도 엄청난 시가 태어나겠지요. 멋지게 쓰려고 꾸미지 마셔요. 멋지게 꾸미면 시가 아니라 거짓말입니다. 곱게 쓰려고 애쓰지 마셔요. 낱말만 곱게 가리면 시가 아니라 허울투성이입니다. 시는 오롯이 우리 삶을 노래하는 글입니다. ㅅㄴㄹ



은미는 시를 썼다 / 자도 자도 자꾸만 졸립다고 / 난 은미 시를 읽다가 / 자꾸자꾸 울었다 // 16세에 안내원 생활 시작해 벌써 2년 / 같은 또래 여학생 실었을 때 굴욕스럽고 / 되지 못한 손님 만나 욕도 많이 먹고 / 하루 17∼18시간 중노동에 시달린 몸은 /그저 소원이 실컷 잠자는 것이다 (우리들 소원/70∼71쪽)


한참 먹다 보니 다리 하나가 없다 / 닭다리는 분명 둘인데 / 하나 어디 갔을까? / 병신닭을 뜯다 보니 은근히 화가 난다. // 헤헤거리고 간사하게 웃어대던 / 통닭집 주인이 안면을 싹 바꾸고 / 아래위를 훑어보며 / 아, 빠뜨릴 수도 있는 거지 / 뭘 그리 따지냐는 식이다. (통닭/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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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제12회 '천상병 시상' 수상작 창비시선 310
송경동 지음 / 창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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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시읽기

노래책시렁 114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창비

 2009.12.30.



  어른도 배운 대로 말하고, 아이도 배운 대로 말합니다. 어른도 배운 대로 움직이고, 아이도 배운 대로 움직여요. 참하거나 착한 말씨나 몸짓이라면, 참하거나 착한 삶을 배웠단 뜻입니다. 건방지거나 몹쓸 말씨나 몸짓이라면, 건방지거나 몹쓸 삶을 배웠겠지요. 어떤 아이는 동무를 괴롭힙니다. 이 아이는 집에서 어버이나 마을 여러 어른한테서 시달리거나 들볶였겠구나 싶습니다. 또는 어른이 그렇게 구는 짓을 지켜보았을 테고요. 배우지 않고서는 그런 짓을 못 해요. 글 한 줄에 담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스란히 삶을 드러내는 하루라면, 시 한 자락도 스스럼없고 꾸밈없습니다. 이와 달리 허울이나 겉치레에 빠지거나 휩쓸린다면, 싯말을 꾸미거나 만들어 내려고 애씁니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을 펴면서 첫머리에 나오는 시가 꽤 힘차면서 단단해서 놀랍니다. 시집 첫머리 몇 꼭지를 지나고부터는 어쩐지 시에서 힘이 빠지고 두루뭉술해서 놀랍니다. 어떻게 이렇게 확 달라질 수 있나 싶어 시집을 다시 펼쳐 보지만, 사람을 두 가지로 놀래키는 셈이더군요. 끝으로 갈수록 아무 힘이 없고, 깃발꾼처럼 흐느적거립니다. 우리 삶터를 바꾸는 몸짓은 꼭 있어야겠습니다만, ‘전문운동’이 되면 시도 전문가 놀음이 되고 맙니다. ㅅㄴㄹ



일년치 통화기록 정도로 / 내 머리를 재단해보겠다고 / 몇년치 이메일 기록 정도로 / 나를 평가해보겠다고 / 너무하다고 했다 // 내 과거를 캐려면 / 최소한 저 사막 모래산맥에 새겨진 호모싸피엔스의 / 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와야지 / 저 바닷가 퇴적층 몇천 미터는 체증해놓고 얘기해야지 / 저 새들의 울음 / 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 얘기해야지 / 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야지, / 이게 뭐냐고 (혜화경찰서에서/11쪽)


아홉살 아이가 / 폐가 할 때 폐자가 한자로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 닫을 폐, 집 가 해서 / 닫힌 집, 즉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고 하자 / 아이가, 아하 대추리에 많은 집들이라고 한다 / 그래그래 하다가 씁쓸해진다 (황새울 가는 길/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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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파티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75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지음, 이경임 옮김 / 시공주니어 / 200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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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그림책시렁 182


《정글 파티》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이경임 옮김

 시공주니어

 2006.8.20.



  고흥 시골버스에서 내리며 손전화를 흘린 적 있습니다. 바로 알아채고 버스일꾼을 찾아갔으나, 제가 흘린 손전화가 안 보인다고만 대꾸했습니다. 공중전화가 없어 단골 문방구에 가서 전화를 했더니 ‘통화중’ 신호만 뜨더군요. 엊그제 고흥으로 들어오는 시외버스에서 체크카드 지갑을 흘렸습니다. 체크카드 지갑에는 제 이름쪽을 같이 꽂았으나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오늘 고흥읍에 가서 우체국 체크카드를 다시 받고 시골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읍내 한복판에 “서울대학교 합격 축하” 걸개천이 둘 나란히 나부끼더군요. 아, 고흥이란 이런 고장이었지 하고 새삼스레 느꼈어요. 《정글 파티》에서는 비단뱀 하나만 빼고는 모두 즐거이 어우러집니다. 비단뱀만 혼자 잔치를 즐기지 못하고, 다른 모든 짐승이 어깨동무하면서 신바람나는 잔치판을 누립니다. 잔치판을 벌일 적에는 미워하지도 괴롭히지도 않습니다. 서로 이웃이요 동무가 됩니다. 비단뱀은 이웃하고 동무 없이 지내는 삶이 재미있을까요? 어쩌면 혼자 사납게 구는 길이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고흥군수는 ‘군사드론 시험장 건설’을 밀어붙입니다. 군청일꾼도 군수 곁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책상물림 벼슬아치 노릇을 잇습니다. 그들이 벌이는 돈잔치는 얼마나 갈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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