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건사하는 책 (2018.4.18.)


― 전남 순천 〈형설서점〉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이곡1길 12

061.741.1069.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문득 글·그림·사진으로 옮깁니다. 처음에는 한 꼭지였다면 어느새 둘셋넷이 되고, 열을 지나 쉰을 거쳐 차곡차곡 쌓습니다. 어느 날 돌아보니 여태 건사한 이야기가 제법 두툼해서 하나씩 되새기면서 솎고 가리고 추려서 꾸러미를 하나 짓습니다. 이 꾸러미를 새롭게 여미니 책으로 태어납니다.


  책 하나란 ‘이 푸른별에서 살아온 사람이 건사한 이야기 꾸러미’입니다. 책집에 책 하나만 동그마니 놓을 수 있습니다. 책집에 숱한 책을 빼곡하게 갖출 수 있습니다. 요즈막에 ‘셀렉트숍’이란 이름을 쓰는 책집이 꽤 늘어나는데, 이 일본스러운 영어가 아니어도 모든 책집은 책집지기 눈썰미로 고른 책을 갖춥니다. ‘골라서 갖추지 않은 책집’이란 한 곳도 없습니다.


  다만 다르게 볼 대목은 있어요. 그냥저냥 팔림새에 맞추어 고를 수 있습니다. 팔림새보다는 읽음새를 헤아려 고를 수 있습니다. 잘 팔릴 만하다 싶어서 잔뜩 들일 수 있지만, 잘 읽힐 만하다 싶어서 알맞게 들일 수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책이니 누구라도 집어들리라 여겨 갖추는 책집이 있고, 아예 안 알려지다시피 한 책이지만 책집지기가 알아채고서 ‘어느 책나그네가 이 책을 기쁘게 알아보아 줄까?’ 하고 설레면서 갖추는 책집이 있습니다.


  봄빛 봄바람을 누리면서 순천마실을 합니다. 아이들이 따라나섭니다. 시외버스에서 노래노래 부르며 찾아갔고, 거님길을 뚜벅뚜벅 걷습니다. 큰아이는 성큼성큼 걷는다면, 작은아이는 폴짝폴짝 뜁니다. 〈형설서점〉에 닿습니다. 두 어린이는 저마다 스스로 마음에 닿는 책에 손을 뻗습니다. “어, 이 책 우리 집에도 있는데?” 하면서 낯익은 책부터 집어서 폅니다. 재미나지요. 어린이는 으레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끄집어서 읽어요. 아직 안 읽은 책보다는 ‘예전에 즐겁게 읽은 책’을 새롭게 읽을 뿐 아니라 ‘예전하고 다른 눈빛’으로 읽어내곤 합니다.


  어른도 비슷합니다. 새롭게 책집마실을 할 적에 “그래, 이 책 읽어 봤지.” 하면서 ‘스스로 읽은 책’부터 알아보곤 해요. 읽었기 때문에 눈에 바로 뜨인달 수 있어요.


  처음에는 이와 같지 싶어요. 처음에는 눈에 익은 대로 바라보고, 어느새 ‘처음 마주하는 책’에 눈이 가며, 손이 가고, 마음이 갑니다.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머나먼 길에 이르기까지 숱한 걸음을 옮기듯, 저 너머로 나아갈 새로운 살림길을 다스리도록 곁벗으로 삼을 책 하나를 고를 적에 찬찬히 온 숨결을 뻗습니다.


  아이들하고 읽으려고 《사람이 되고 싶었던 고양이》(로이드 알렉산더/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1999)를 고릅니다. ‘삼천포시립도서관 장서’ 자국이 남은 《전후 신춘문예 당선시집 下》(조태일·김흥규 엮음, 실천문학사, 1982)를 봅니다. 묵은 책이어서 공공도서관에서 버렸구나 싶어요. 《광양 방언 사전》(기세관, 한국문화사, 2015)이 보입니다. 지자체에서 그 고장 이야기하고 살림을 담아내는 책을 펴내는 일에 거의 이바지를 안 해요. 어느 고장이나 비슷합니다. 지역문화를 북돋우려 한다면, 오늘 이곳에서 일구는 밑살림을 아로새겨서 아이들한테 물려줄 ‘우리 고장 책하고 사전’에 밑돈을 넉넉히 들일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 《광양 방언 사전》의 자료는 대부분 10여 년 전에 이미 모은 것이다. 당시 나는 2∼3년 간격으로 이 책을 출판하기 위하여 광양시에 그 출판비 일부를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신청서를 두어 차례 낸 바 있으나 거듭 거절당하였다. 그 뒤 나는, 이 책의 편찬이 두고두고 역사·문화적 업적으로 남을 것임을 몰라주는 야속한 광양시 당국을 원망하기도 하면서 내 나름으로는 실의에 빠져 가슴아파하며 버텨온 지 10여 년이 흘렀다. (5쪽)


  얼결에 집은 《작가는 왜 쓰는가》(제임스 A.미치너/이종인 옮김, 미세기, 1995)는 ‘순천공업고등학교 도서실 장서’ 자국이 있습니다. 오늘 따라 도서관 자국이 새삼스럽습니다. ‘전라남도의회 자료실’ 자국이 있는 책도 봅니다. 


나는 그들이 왜 “난 포크너처럼 쓰고 싶지는 않아”라고, 혹은 피츠제럴드, 울프, 사르트르, 카뮈처럼 쓰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을까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혹시 그 많은 작가들이 속으로는 헤밍웨이 흉내를 내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갔다. (150쪽)


“민주주의 국가가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채 전쟁에 끼어든다는 것은 위험천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늙은이들은 후방에 앉아서 전쟁세도 내지 않고 생명의 위협도 느끼지 않으면서 돈을 버는데 젊은이들은 사지에서 허덕인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는 것도 알았어요. 특히나 어떤 젊은이는 고향에서 편하게 있는데 어떤 젊은이는 재수없어 전투에 차출되는 것도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았어요.” (156쪽)


  이 나라에서 도서관은 책을 건사만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나라는 도서관이란 집을 뚝딱 올린 뒤에 ‘새로 받아들일 책을 건사할 새로운 집’은 좀처럼 더 안 짓거든요. 날마다 새책이 꾸준히 나오는데, 이 새로운 책을 건사할 넓은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도서관이란 이름을 붙여도 될까요?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세이머스 히니/최유경 옮김, 시학사, 1995)을 고르다가 생각합니다. 이 나라는 도서관이 좁고 작아서 어쩔 길 없이 책을 버려야 합니다. 버림책이 해마다 잔뜩 나오는데요, 버림책이 나오기에 뜻밖에 책이 더 돌고 돌는지 몰라요. 다만 종이쓰레기로 버리지 않는다면, 헌책집에 맡긴다면, 마을 한켠에서 새롭게 책터를 가꾸도록 내놓아 준다면, 도서관에서 버려야 하는 책이 새롭게 빛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책숲에 《우리글 바로쓰기》(이오덕, 한길사, 1989) 예전판이 없는 줄 뒤늦게 알았습니다. ‘오늘의 사상신서 121’로 나온 묵은 판이 마침 〈형설서점〉에 있어요. 고마운 노릇이라고 여기면서 집어듭니다. 서른 해쯤 지난 묵은 이야기를 새삼스레 되읽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일본글을 제대로 큰 잘못 없이 번역해 놓은 책을 거의 보지 못했다. 일본글을 우리 글로 올바르게 번역하는 일은 일본글의 뜻을 틀리지 않게 우리 말로 나타내고, 그리고 그렇게 옮겨 놓은 글이 우리 말로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번역 문장이 뜻도 틀리고, 우리 말은 아주 엉망인 경우가 많다. 지난날 36년 동안 온 나라 사람들이 일본말을 배우고 쓰다시피 했는데, 이건 어찌된 셈인가? 그 가장 큰 까닭은 일본의 말법과 우리 말법이 비슷해서 글을 따라 차례로 낱말만 우리 말로 바꿔 놓으면 뜻이 통한다고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한자말을 쓰기 때문에 그 한자말을 그대로 적어 놓으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잘못되었다. 아무리 말법이 비슷하다고 해도 일본말은 일본말이지 우리 말은 아니다. (85∼86쪽)


  말짜임이 비슷하더라도 한국하고 일본 두 나라는 말이 달라요. 때로는 똑같이 생겼구나 싶은 한자말이 있더라도 한국하고 일본 두 나라에서 그 한자말을 쓰는 자리가 달라요. 무엇보다도 한국에서는 한자말이 들어오기 앞서 사람들이 널리 쓰던 삶말이 있습니다. 일본도 이 대목에서는 매한가지입니다. 두 나라 모두 ‘한자말이 없던 무렵 오래오래 마을에서 사랑으로 삶을 슬기롭게 가꾸면서 지어내어 쓴 수수하고 상냥한 텃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길을 헤아리지 않는 번역이라면 모조리 엉터리가 될 텐데, 엉터리 아닌 번역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니, 번역에 앞서 ‘한국사람이 한국말로 쓴 글’이 한국글다운지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쓰는 미국말(영어)하고,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쓰는 미국말(영어)은 다릅니다. 왜 다를까요? 서로 삶이 다르고, 삶을 바라보는 넋이 다르거든요.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사람은 ‘이 땅에서 나고 자라면서 스스로 마음이랑 몸을 가다듬는 넋’부터 슬기롭고 사랑스러우면서 즐겁게 가다듬지 못했다는 뜻이겠지요. 건사할 마음이 무엇인지를 잊기에, 건사할 생각이 무엇인가를 놓치기에, 아직 한국은 한국말이라고 하는 숨길을 틔우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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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0.6.1.


《키테레츠대백과 3》

 후지코 F. 후지오/오경화 옮김, 미우, 2018.6.30.



작은아이 손길을 받아 ‘책숲 얘기종이’를 글월자루에 담아서 척척 여민다. 읍내를 다녀오려 하는데 버스가 안 들어온다. 가늘게 한숨. 낮에는 시골마을에서 읍내로 가는 손님이 없다시피 하다면서 버스가 안 오기 일쑤인데, 오늘도 그날이네. 이웃마을로 걸어간다. 좋아, 좋아, 우리한테는 씩씩하게 두 다리가 있거든. 이 두 다리로 들길을 가로질러 주지. 새달을 맞이해 새롭게 하루를 돌아보고, 새걸음으로 나아갈 배움살림을 그린다. 올해 4월부터 큰아이하고 ‘둘이 함께 날마다 풀꽃나무 이야기 쓰기’를 하는데, 작은아이하고는 ‘둘이 함께 날마다 다섯 줄 쓰기’를 하자고 생각한다. 《키테레츠대백과》는 모두 세걸음이다. 한국말로 옮겨 주어 고맙지만 책값이 비싸다. 일본책이 외려 싸다. 덜 팔리거나 안 팔린다고 여겨 비싸게 매겼을까. 곁님 잔소리를, ‘누가 한국말로 옮겨 주면 고마운 노릇이지만, 남이 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바깥말을 배워서 바깥책으로 장만해서 읽으라’고 하는 말을 떠올린다. 척 보아도 한국말로 안 나올 듯한 아름다운 만화책이며 그림책은 이제 영어책이나 일본책으로 장만하자. ‘키테레츠’가 마지막에 의젓하게 외치듯, ‘스스로 배워 스스로 힘을 내어’ 하면 될 뿐이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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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0.6.3.


《어느새, 바람》

 남윤잎 글·그림, 웅진주니어, 2020.3.20.



가운뎃칸 여닫이를 젖힌다. 바야흐로 한여름. 아니, 첫여름. 이불도 시나브로 홑겹. 큰아이가 열린 여닫이로 뒤꼍을 바라보면서 “그림같아.” 한 마디. 우리 집 여닫이로 바라보는 바깥모습을 그림으로 느끼는 네가 더없이 그림같은걸. 겨울이 저물 즈음에는 앙상한 나무에 새잎이 돋는 바람이 분다면, 봄이 저물 무렵에는 옅푸른 사이사이 하얗고 노랗고 바알간 꽃잔치가 짙푸르게 빛나는 바람이 불고, 여름이 저물 때에는 새파란 하늘에 노랗고 빨갛게 익는 열매가 주렁주렁 환한 바람이 분다. 철마다 새로운 바람이란 언제나 싱그러운 살림길을 비추지 싶다. 《어느새, 바람》은 큰고장(또는 서울)에서 마주하는 산뜻한 바람결을 담아낸다. 아무리 매캐하거나 빽빽한 큰고장(또는 서울)이어도 봄철로 접어들 즈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면 온몸에 파아랗게 새바람을 들이마실 수 있는 길을 짚는다고 할 만하다. 틀림없이 큰고장(또는 서울)에도 철바람이며 봄바람이 불고, 여름바람에 가을바람이 찾아든다. 이 바람이 없다면 큰고장(또는 서울)은 메말라 버리겠지. 그런데 조금 눈을 낮추면 어떨까. 돌틈, 길바닥, 빈터에 새랑 풀벌레랑 바람이랑 비가 슬며시 옮겨심어 모락모락 돋는 들풀이며 나무를 흙바닥에 앉아서 본다면 어떠했을까.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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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0.6.2.


《당신이 나의 고양이를 만났기를》

 우치다 햣켄 글/김재원 옮김, 봄날의책, 2020.4.20.



새벽이 찾아오면 개구리 노래잔치가 수그러들고, 멧새랑 참새 노랫소리가 번진다. 큰고장을 떠나 시골자락에 깃든 열한 해를 이렇게 맞이하는데, 지난겨울부터 한 가지가 더 있다. 우리 집에 눌러앉은 길고양이가 새벽나절에 밖마루나 섬돌에 옹크리고 앉아서 집안을 쳐다보다가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얼굴이 보이거나 발소리가 들리면 니야니야 노래를 한다. 《당신이 나의 고양이를 만났기를》을 읽었다. 한달음에 다 읽었는데, 아스라한 예전 일본 조그마한 마을 한켠 이야기를 다룬 터라 몇 가지 허울이 보인다. ‘밥을 차리거나 집안일을 하지 않고서 글만 쓰는 사내’라는 숨결이 흐르고, ‘고양이라고 하는 이웃 숨결하고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려는 생각을 아예 안 한다’는 대목도 짙다. 이미 떠난님한테 꼬치꼬치 묻거나 따질 수는 없다지만, ‘글쓰는 사람’ 사이에서는 이 대목이 엇비슷하지 싶다. 사내 글꾼이건 가시내 글꾼이건, ‘작가’란 이름을 내걸면 어느새 손수 짓는 살림이나 집안일이나 아이돌봄하고 자꾸 멀어지기만 한다고 느낀다. 글은 머리 아닌 삶에서 나오는데, 손수 삶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무슨 글을 쓸까? 한 손에 붓을 쥐고 싶다면 다른 손에는 걸레·호미·부엌칼을 쥐자. 작은아이하고 앵두알을 신나게 훑어서 재웠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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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배움꽃

숲집놀이터 242. 사랑꾸지람



아이를 사랑으로 꾸짖을 수 있을까? 도무지 말이 안 된다고 여긴다. 꾸짖는 말이 어떻게 사랑이 될까? 사랑이라면 꾸짖지 않겠지. 사랑이라면 이야기를 하겠지. 사랑이라면 달래고 다독이겠지. 사랑이라면 어루만지고 얼싸안다가 눈물을 짓겠지. 사랑이라면 노래하고 춤추는 손길로 가볍게 토닥이겠지. 어버이는 아이를 꾸중하거나 꾸짖을 수 없다고 여긴다. 어른 사이가 되기에 비로소 꾸짖거나 꾸중할 만하지 싶다. 동무를 꾸짖는달까요. 이웃을 꾸중한달까. 그러나 이때에도 결이 다르다. 동무나 이웃을 어떻게 꾸짖거나 꾸중할까? 우리가 참다운 사랑으로 살아가면서 동무나 이웃을 정 꾸짖거나 꾸중해야 한다면, ‘사랑꾸지람’이어야지 싶다. 꾸지람을 생각하지 말고, 사랑을 앞에 놓아야지 싶다. 이러다가 꾸지람을 녹여없애고 사랑말로, 사랑얘기로, 사랑노래로 거듭나야지 싶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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