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꽃


숲에서 짓는 글살림

47. 셈꽃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배움책(교과서)을 보면 ‘算數’처럼 한자로 적습니다. 우리는 이 이름을 꽤 오래 썼고, 요새는 ‘수학(數學)’으로 쓰지요. 총칼수렁(일제강점기)이 끝난 뒤에 지긋지긋한 일본말 굴레에서 벗어난 만큼, 배움책을 새로 엮을 적에 끔찍한 일본 한자말을 걷어내자는 물결이 일었습니다. 이즈음 ‘셈본’이란 이름으로 교과서가 나왔어요. 이러다가 남북이 갈려서 싸움수렁이 불거졌고, 남녘에 군사독재가 서슬이 퍼렇게 으르렁대면서 ‘셈본’이란 이름은 짓눌려 사라져야 했고, ‘수학·산수’ 두 가지 이름만 나돌았습니다.


  ‘셈’이란 무엇일까요? ‘세다’는 어떤 결을 나타낼까요? 적잖은 분은 ‘셈’은 얕거나 낮은 낱말이요, ‘수학’이나 ‘계산’ 같은 일본 한자말을 써야 제대로 배우거나 가르칠 만하다고 여깁니다. 참말로 그럴까요? 우리는 ‘셈’이라는 낱말을 아직 모르거나 찬찬히 생각한 적이 없지는 않을까요?


셈(셈하다·셈나다) ← 계산, 산(算), 산수(算數), 산술, 심산, 짐작, 가정(假定), 발상, 심리, 측량, 계량, 결과, 정산, 추산, 연산(演算), 추정, 작정, 예산, 예상, 예견, 예측, 예기, 요량, 판정, 판단, 판별, 분별, 타산, 이해타산, 채산, 통계(統計), 격(格), 경우, 숫자, 수치(數値), 형편, 생활 형편, 수(數), 조(條), 시추에이션, -책(策), 법(法), 방법, 내막, 수법, 존재, 필요, 견적, 형국, 국면, 형세, 전술, 전략, 작전, 책략, 방책, 방도, ……


  ‘셈’이란 낱말을 쓰는 자리를 곰곰이 생각하니 끝이 없이 나옵니다. ‘셈’은 어떻게 이런 여러 자리에 쓸 수 있는 낱말일까요?

 

 셈 = 세다 = 헤다 = 헤아리다 = 생각

 

  ‘세다’에 ‘-ㅁ’을 붙여 이름씨 꼴로 바꾸기에 ‘셈’입니다. ‘세다’는 ‘꼽다’하고 맞물리는 뜻이 바탕인데, 무엇을 꼽는다고 할 적에는 ‘알아보다’를 나타내요. 알아본다고 할 적에는 “알려고 본다”는 뜻입니다. “알려고 보다”에서 ‘보다’는 ‘생각’을 뜻하기도 해요. ‘세다 = 생각’으로 잇닿는 얼개인데, 이 사이에 ‘헤다·헤아리다’가 있지요.


  “헤아릴 길이 없도록 가득한 별”처럼,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처럼, “조금씩 헤아리면 누구나 알 만하지”처럼 쓰는 ‘헤아리다’이고, ‘세다’는 이러한 말결로 오래도록 우리 뜻이며 속내를 드러내는 자리에 쓰던 낱말입니다.

 

셈값 ← 수치(數値)

셈길 ← 계산법, 공식(公式), 연산(演算), 수학, 산수(算數)

 

  산수이든 수학이든, 이 배움길은 숫자로만 따지지 않습니다. ‘따지’되 ‘생각’이라는 마음쓰기가 바탕이지요. 그러니 ‘셈본’이란 이름으로 교과서 이름을 붙일 만했고, ‘컴퓨터’라는 살림을 ‘셈틀’로 풀어내자는 목소리가 나올 만했습니다. 하나하나 꼽는 결이자, 깊고 넓게 헤아리는 결을 품은 낱말이 ‘셈’이거든요.

 

셈대 ← 계산대

셈돈 ← 예산

셈말 ← 숫자

셈속 ← 계산속, 계산, 타산, 이해타산, 수법

셈씨 ← 수사(數詞)


  모든 말은 널리 쓰기에 결이 깊어갑니다. 어느 말이건 안 쓴다면 결이 얕아지다가 스러집니다. ‘세는 길’을 더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세는 마음’을 더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말밑을 차근차근 짚으면서 새롭게 쓸 만한 길을 알아보면 어떨까요? 즐겁게 쓰면서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할 말씨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셈틀 ← 컴퓨터, 피시

셈틀말 ← 컴퓨터 용어

셈틀집 ← 컴퓨터 대리점, 컴퓨터 판매점, 피시방

셈틀칸 ← 피시방(PC방)

 

  나이가 든 분은 좀처럼 말을 새롭게 익혀서 가다듬으려고는 안 한다고 느낍니다. 이와 달리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모든 말을 새롭게 받아들여서 즐겁게 쓴다고 느낍니다. 아이들한테 처음으로 어떤 낱말로 이것이며 저것을 가리키느냐에 따라 아이들이 맞아들이면서 생각하는 힘이나 너비나 바탕이나 숨결은 확 달라요.


  아이한테 “저기 보렴, 파란띠제비나비가 후박나무를 휘휘 돌면서 나는구나.” 하고 말할 적에는 아이한테 ‘파란-’이며 ‘-띠’를 붙여서 쓰는 말씨를 물려주는 셈입니다. 아이한테 ‘호접몽’을 말하면 아이는 얼마나 알아들을까요? ‘호·접·몽’이라는 중국 말씨를 얼마나 살려서 쓸 만할까요? 아이한테 ‘나비꿈’을 말할 적에는 다르겠지요. 말을 뒤집어 ‘꿈나비’라 해도 될 테고요.


셈판 ← 원인, 이유, 형편, 생활 형편, 처지, 견적

셈평 ← 이해타산, 타산, 형편, 생활 형편, 처지, 견적

 

  벌이랑 나비를 아울러 ‘벌나비’라 합니다. 말이랑 소를 아울러 ‘마소’라 합니다. 밤이랑 낮을 묶어 ‘밤낮’이라 하고, 아침이랑 저녁을 함께 살피며 ‘아침저녁’이라 하지요. 봄하고 여름을 이어 ‘봄여름’이라 하며, 가을하고 겨울을 맞물려서 ‘가을겨울(갈겨울)’이라 합니다.


  말은 삶에서 피어납니다.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기에 말을 꾸밈없이 합니다. 삶을 고스란히 맞아들여서 차근차근 생각을 지피기에 어린이도 어른도 바로바로 알아듣고서 그때그때 생각을 더 펼치는 길로 나아갑니다.

 

셈꽃 ← 수학


  예전에는 ‘-갈’이란 말씨를 붙여 배움길을 나타냈습니다. 《한글갈》 같은 책이 있어요. ‘-갈’을 붙여도 좋은데, ‘-꽃’을 붙이면 어떨까요? 문학이란, 말로 일군 꽃다운 길이에요. 그래서 ‘말꽃’이란 이름으로 문학을 나타내어도 어울립니다. 셈을 짚거나 다루는 배움길이라면 ‘셈갈’이라 할 만하면서도, ‘셈꽃’처럼 한결 꽃다이 바라보아도 좋으리라 봅니다.


  얼마 앞서 《다시 수학이 필요한 순간》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필요한 순간” 같은 말씨를 요새 나이든 분은 그냥그냥 쓰겠지요. 더구나 이런 말씨는 어린이책이나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어렵잖이 찾아봅니다.


  그러나 저는 숨을 가누면서 더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이 말씨를 새롭게 추스르는 길을 헤아리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수학을 생각할 때”나 “수학을 할 때”라 말할 만하지 않을까요? 말결을 곰곰이 보듬으면서 “수학을 곁에 둘 때”나 “수학을 즐길 때”라 해도 될 테고요.


  꽃다움 셈길을 곁에 두고 싶습니다. 나비처럼 부드럽고 상냥하게 날갯짓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즐기고 싶습니다. 어렵거나 딱딱한 말을 안 쓴다기보다, 어린이 곁에서 무릎맞춤을 하고 눈맞춤을 하며 마음맞춤을 하는 신바람나는 말씨를 쓰도록 생각을 펴고 싶습니다. 더 좋은 말이 아니라, 더 생각을 가꾸면서 더 슬기롭게 철드는 어른으로 나아가는 길에 동무할 만한 말을 자꾸자꾸 헤아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이 꽃이 된다면, 꽃으로 피어난다면, 꽃내음처럼 맑다면, 꽃빛처럼 싱그럽다면, 우리 글쓰기는 글꽃으로 거듭나겠지요. 생각꽃이요, 마음꽃이며, 슬기꽃이고, 사랑꽃에, 살림꽃이자, 노래꽃인, 하루꽃이며, 길꽃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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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403


《보리피리》

 한하운 글

 인간사

 1955.5.30.



  인천에서 태어나 살아가면서 한하운 님이 인천에 터를 잡고서 이녁처럼 몸이 아픈 이를 돌보는 길을 걸은 줄 몰랐습니다. 중·고등학교 국어 갈래에서 ‘보리피리’란 시를 가르치긴 했어도 정작 이녁이 어떤 삶이요 어떤 길이며 어떤 꿈으로 하루를 지냈는가를 밝혀 주지 않더군요. 2011년에 삶터를 고흥으로 옮기니 ‘소록도’가 그곳에 있지 않느냐고 《당신들의 천국》이 고흥 한켠을 그렸다는 말을 곧잘 듣습니다. 그러나 고흥에서도 이 대목을 놓고서 딱히 이야기를 들은 일이 없습니다. 고흥군 행정은 천경자 님 그림을 ‘비가 새는 헛간’에 처박아 놓았다가 천경자 님 따님한테 돌려주었는걸요. 《보리피리》란 얇은 시집을 퍽 예전에 헌책집에서 장만했습니다. 새하얀 종이에 반듯반듯한 짜임새로 나오는 요즈음 판도 있습니다만, 어쩐지 해묵고 얇고 빛바랜 시집에 마음이 끌려 목돈을 들여 건사해 놓았어요. 한 줄을 쓰려고 흘렸을 땀을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를 담으려고 쏟았을 눈물을 떠올렸습니다. 비로소 한 꼭지를 마무르면서 피어났을 무지개를 그렸습니다. 문화는 돈으로 세우지 못합니다. 우람한 문화회관이나 예술회관이 서야 우리 살림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누구나 곱게 풀피리를 부를 수 있는 터전이 되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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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408


《골목안 풍경 전집》

 김기찬 사진

 눈빛

 2011.8.27.



  적잖은 책은 한두 해조차 눈길을 못 받고서 조용히 스러지곤 합니다. 책 한 자락이 열 해를 살아내며 사랑받는다면 꽤 넉넉하겠지요. 새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며 거듭 태어났으나, 바야흐로 더는 어렵구나 싶어서 자취를 감춘다면 이러한 책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애썼어. 언젠가 네가 새삼스레 빛을 볼 날이 있으리라 생각해. 이제 고이 쉬렴.” 하고 속삭이고 싶습니다. 《골목안 풍경 전집》이 두툼하게 나오던 2011년에 반가우면서 아쉬웠습니다. 김기찬 님이 사랑스레 골목길을 거닐면서 담아낸 포근한 눈길을 여민 대목은 반가우면서도, 사진결이 썩 안 좋았습니다. 책으로 찍으면서 빛결을 찬찬히 추스르지 못했습니다. 592쪽에 이르는 책인데 넘김새가 안 좋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사진책을 펴낼 만한 눈높이가 아직 먼 셈일까요. 반도체를 만들고 손전화나 군사무기를 만들 줄 안다지만, 막상 사진책 하나를 사진결대로 종이에 옮기는 솜씨는 이렇게 허술할까요. 골목마을을 휙휙 밀어내어 아파트를 올린 삽질을 헤아린다면, 살림자리를 사랑으로 가꾸도록 이끄는 배움판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셈(숫자·성장율·지지율)에 목을 매달아요. 셈을 하더라도 셈꽃이 되면 좋겠으나, 생각꽃이나 생각날개하고 너무 멉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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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386


《새마을문고 5집 꽃구름 피는 언덕》

 윤주영 엮음

 문화공보부

 1973.7.25.



  새마을운동이 휩쓸며 시골은 농약·비료·농기계로 농협이 돈을 벌고 땅심이 죽는 길을 걸었고, 큰고장은 골목마을을 밀어내고서 아파트하고 찻길로 뒤덮는 물결이 되었습니다. 학교하고 사회는 온통 ‘나라에 몸바치기’를 외치면서 웅변대회에 스포츠를 키웠고, 어린이는 반공 독후감을 쓰도록 어른은 새마을 수기를 쓰도록 몰아세웠습니다. 《새마을문고 5집 꽃구름 피는 언덕》은 사람들 눈코귀입에다가 손발까지 틀어막은 군사독재가 참글 아닌 거짓글을 꾸미도록 내민 자취를 보여줍니다. 군사독재를 ‘민족의 번영과 평화적 통일’이란 이름으로 덮어씌운 ‘입(나팔수)’ 노릇을 하던 분은 〈조선일보〉 편집국장도 장관도 국회의원도 하다가 살그머니 ‘사진 작가’란 이름으로 옮깁니다. 사진은 누구라도 찍을 수 있습니다. 글은 누구라도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온나라에 굴레·멍에·사슬을 오래도록 씌운 허물을 털지 않고서 겉치레로 찍는 사진이거나 쓰는 글에 참빛이 서릴 수 있을까요? ㅅㄴㄹ


“문화공보부는 작년에 이어 또다시 ‘새마을 문고집’을 내게 되었읍니다 … 더구나 민족의 번영과 평화적 통일을 앞당겨 이룩하기 위한 ‘10월 유신’의 역사적 과업이 추진되고 있는 이때, 이러한 문예 작품들은 우리들에게 슬기와 용기를 일깨워 주는 산 교재가 되리라고 믿는 바입니다.” (머리말/문화공보부 장관 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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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397


《유나바머》

 유나바버·테어도르 존 카진스키 글

 조병준 옮김

 박영률출판사

 1996.7.7.



  군대에서 만난 운전병은 늘 수수께끼였습니다. 운전병은 중대도 대대도 연대도 사단도 아닌 몸이더군요. 그때그때 어디로든 옮겨간다더군요. 강원 양구 멧골짝에서는 걸어서든 차로든 워낙 멀기에 운전병하고 함께 움직일 적에는 이이 수다를 신나게 듣습니다. 다른 데로 쉽게 빠질 수 있다는 이이는 ‘이 아름답고 조용한 멧골길을 모는 일’은 군대 아니면 못하겠지 싶어 그냥 있을 뿐이라며, 저 하늘빛·멧빛 좀 보라고 하더군요. ‘짚차병’이며 웬만한 운전병은 뒷돈을 내야 들어가는 자리라던데, “여봐, 최 상병, 생각해 봐. 너네 중대에서 돈 좀 있거나 사회에서 잘난 애들 본 적 있어?” “없네요.” “있는 애들은 사령부나 군단에 가고, 덜 있는 애들은 사단에 있고 그래.” “아저씨는요?” “난 여기가 공기 좋고 경치 좋아서 눌러앉을 뿐이야. 밖에서 일도 좀 쳤고.” “어쩌다 운전병을 했어요?” “사실 난 면허도 없는데, 힘 좀 썼지. 운전이야 들어와서 배워도 되잖아.” ‘부식’이 나오면 행보관·중대장은 이녁 차에 자루째 쌀이며 건빵이며 챙겼고, 사단장·군단장은 ‘곰취·멧나물 사역’을 시켰습니다. 군대에서 나온 뒤 《유나바머》를 만났습니다. 문드러지지 않은 데가 없는 군대야말로 폭탄으로 터뜨려야지 싶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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