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바위보를 좋아하는 아이
마쓰오카 교코 글, 오코소 레이코 그림, 김숙 옮김 / 북뱅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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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린이책 2021.6.1.

맑은책시렁 244


《가위바위보를 좋아하는 아이》

 마쓰오카 교코 글

 오코소 레이코 그림

 김숙 옮김

 북뱅크

 2013.8.15.



  《가위바위보를 좋아하는 아이》(마쓰오카 교코·오코소 레이코/김숙 옮김, 북뱅크, 2013) 같은 책이 아니어도 적잖은 아이들이 가위바위보를 알고 나면 그야말로 가위바위보에 푹 빠지곤 합니다. 이기고 지는 갈랫길에 서면서 짜릿짜릿한데, 스스로 이기는 쪽에만 서려는 마음으로 기울기도 하고, 이기고 지는 자리가 덧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이기고 지는 자리가 부질없는 줄 느끼는 아이는 이내 가위바위보가 시들해서 다른 놀이를 하자고 말하지요. 모름지기 놀이란 이기거나 지지 않아요. 누구나 어울리기에 놀이요, 언제나 어우러지기에 놀이입니다. 가위바위보가 놀이로 머물려면 이기든 지든 대수롭지 않아야 합니다. 이기니까 좋고 지니까 나쁘다면 이미 놀이에서 벗어났어요. 이때에는 싸움입니다.


  싸워서 이기고, 이겼으니 윗자리라고 여기는 마음은 놀이하고도 동떨어지지만, 삶이며 살림이며 사랑하고도 멀어요. 싸워서 이겼으니 노닥거리고 싶어요. 싸워서 이겼으니 내 말대로 둘레에서 따라야 한다고 여겨요. 혼자 발칵거리고 혼자 투정이며 혼자 잘납니다.


  놀이를 놀이로 여기지 못하고 싸움으로 빠질 적에는 한 아이뿐 아니라 둘레 아이 모두 재미없습니다. 아니, 둘레 아이보다 이 아이부터 가장 재미없지요. 외톨이가 되지 않아요. 신나는 놀이하고 등지면서 언제나 웃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거이 빛나는 하루를 스스로 걷어차는 셈입니다.


  자리를 매겨야 하지 않습니다. 첫째부터 꼴찌까지 갈라야 하지 않습니다. 위에 놓거나 밑에 놓지 말아야 합니다. 어깨동무로 가는 길이 삶이며 살림이자 사랑이고, 모든 놀이를 이루는 바탕입니다. 손을 잡지 않는데 어떻게 놀이가 되나요? 손을 안 잡는데 무슨 사랑이 되나요? 함께하지 않으니 소꿉도 살림도 아니지요.


  다만 《가위바위보를 좋아하는 아이》는 어머니 혼자 집안일을 하고 아버지는 집안일을 안 하는 모습으로 그립니다. 일본에서 퍽 예전에 나온 책이라 이렇게 그렸다고도 하겠지만, 곰곰이 보면 아이는 이런 두 어버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라요. 어린이책에 얼핏 나오는 모습이라 하더라도, 두 어버이가 함께 살림하고 일하고 쉬고 노는 길이라면 가위바위보가 놀이로 흐르면서 싸움으로는 안 번질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집에서 함께 살림하는 아버지(사내)가 늘어난다고 하지만, 누가 더 많이 하거나 오래 해야 하는 일이 아닌, 즐겁게 어깨동무하는 길이 되어야 비로소 생각도 삶도 거듭날 만합니다.


ㅅㄴㄹ


누구를 만나도 가위바위보. 뭔가를 정할 때도 가위바위보. 아침부터 밤까지 가위바위보만 합니다. (3쪽)


여자아이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부랴부랴 접시에 있는 핫케이크에 대고 “너는 아빠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칼과 포크를 집어들고는 “너희들은 나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칼과 포크로 식탁을 콩콩 두드리면서 “가위바위보!” 하고 말했습니다. (22쪽)


아빠가 말했습니다. “가위바위보에서 이겼든 졌든 네가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거야. 알겠니? 나 참, 언제쯤에나 네가 그걸 알겠니.” (24쪽)


이런 식으로 여자아이는 늘 가위바위보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늘 자기에게 유리한 쪽이 이겼습니다. (25쪽)


“네가 이기면 그 사람들이 네 엄마아빠가 되는 거고, 내가 이기면 그 사람들이 내 엄마아빠가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안됐지만 너는 여기서 나가 줘야겠어.” 여자아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엄마와 아빠를 가위바위보로 정하다니,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제 맘대로 후닥닥 정하고는 말했습니다. (33쪽)


#なぞなぞのすきな女の子 

#じゃんけんのすきな女の子

#松岡享子 #大社玲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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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말


베껴쓰다 : 저녁에 갑작스레 전화를 받는다. 지난 2019년에 나온 어느 ‘어린이 동시꾸러미’에 실린 어느 어린이 글이 어느 출판사에서 낸 책에 실린 글(어른이 쓴 동시)을 고스란히 베낀 줄 뒤늦게 알려져 말썽이 되었기에 ‘그 아이가 썼다는 글’을 지워야 한단다. “그렇군요. 그런데 아이는 그렇게 베껴쓸 수도 있는데, 부디 그 아이하고 그 아이를 맡았던 샘물님(교사)하고 새롭게 배우는 길이 되면 좋겠네요.” 하고 이야기했다. 나는 ‘베껴쓰기(필사)’를 안 좋아할 뿐 아니라 아예 안 한다. 베껴쓰기로는 하나도 못 배우니까. 하려면 ‘배워쓰기’를 해야 할 뿐이다. 배우려고 쓸 뿐, 베끼려고 쓰면 스스로 바보가 된다. 아이야, 알렴. 네가 쓸 수 있는 글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고작 다른 사람 글을 베껴서 네 이름을 붙이니? 다른 사람이 쓴 글이 아름답구나 싶으면, 그 아름다운 숨결을 배워서 네 나름대로 새롭게 쓰기를 바라. “맞춤길이나 띄어쓰기는 다 틀려도 좋아. 그저 네 숨결을 노래하면 돼. 우리는 잘나려고 글을 쓰지 않아. 우리는 핑계를 대거나 투덜거리려고 글을 쓰지 않아. 우리는 돈을 벌려고 글을 쓰지 않아. 우리는 이름을 팔려고 글을 쓰지 않아. 우리는 오직 스스로 사랑하면서 이 사랑이 즐겁게 흘러넘쳐서 온누리가 푸르게 우거지는 숲으로 나아가는 길에 한손을 거들려고 글을 써. 우리는 스스로 숲이 되고, 하늘이 되고, 바다가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 빗물이 되고, 풀꽃나무가 되고, 새가 되고, 별빛이 되고, 눈송이가 되다가, 어느새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오를 꽃씨가 되려고 글을 쓰지.” 이런 이야기를 어느 어린이, 이제는 푸름이가 되었을 그 아이한테 들려주고 싶다. 2021.5.31.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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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2021.5.31.

숨은책 469


《列國資源動員の現勢》

 日本國際問題調査會

 日光書院

 1942.10.20.



  우리가 살아가는 이 푸른별(지구)은 땅밑살림(지하자원)이 모자라지 않다지요. 먹을거리는 푸짐하고요. 잘사는 몇몇 나라가 땅밑살림이며 먹을거리를 도차지한다고 합니다만, 우리나라도 매한가지요, 무엇보다 잘살건 못살건 싸움연모에 끔찍하도록 땅밑살림에 먹을거리를 쏟아붓느라 온살림이 후들거립니다. 왜 싸움배(군함)를 만들고 싸움날개(전투기)를 만들어야 할까요? 왜 싸울아비(군인)를 길러서 싸워야 할까요? 싸우는 데에 들인 엄청난 살림을 어깨동무와 이웃사랑에 썼다면 이 별은 이름 그대로 ‘푸른별’로 뻗어요. 지난날에 바보짓을 했어도 이제부터 참사람으로 살면 되어요. 죽이고 죽는 싸움연모는 멈추고 이웃하고 동무를 보살피는 길로 가면 됩니다. 《列國資源動員の現勢》는 일본이 이웃나라를 마구 짓밟던 무렵 나옵니다. ‘여러 나라(열국)’가 땅밑살림을 얼마나 거두어서 쓰는가를 차곡차곡 담습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싸움질을 안 한다면 땅밑살림을 조금만 캐도 되고, 고되게 일해야 하지 않고, 바람하고 물은 깨끗하며 넉넉할 테고, 누구나 홀가분히 어느 나라이든 마실을 다닐 테고, 아프거나 앓는 사람이 사라질 테고, 늘 함박웃음에 이야기꽃에 노래잔치에 글꾸러미가 넘실대리라 봅니다. 싸움질을 끝내면 숱한 발전소를 쉬고, 핵무기 근심도 없고, 서울쏠림도 그치면서 아름별이 될 테고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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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2021.5.31.

숨은책 480


《小說の硏究》

 川端康成 글

 第一書房

 1942.4.15.



  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를 몰랐고 딱히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분 책은 서울 노량진에 있는 ‘아름다운 헌책집’인 〈책방 진호〉에 자주 드나들면서 책집지기님한테서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야기를 곧잘 들으면서 비로소 읽었어요. “그 사람 참 대단하지.” “그렇게 대단한가요?” “암, 대단하지. 일본은 사라져도 이 사람 글은 남을 텐데.” “그렇다면 읽어야겠군요.” 어느 날 어느 헌책집에서 《小說の硏究》라는 낡은 책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낯익은 글쓴이입니다만, 이 책을 집어 책자취를 살피다가 1942년에 나온 줄 알고는 ‘쳇, 너희(일본)는 싸움을 일으켰으니 이런 책도 쓰는군?’ 하는 혼잣말이 튀어나옵니다. 이윽고 생각을 돌렸어요. ‘음, 너희(일본)는 싸움 한복판 불구덩이에서도 앞길을 생각하며 책을 썼니?’ 싸울아비(군인)나 벼슬꾼(정치인·공무원)은 글(소설)을 얼마나 읽을까요? 노래(시)는 읽을까요? 이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서 글을 읽어 주고 노래를 들려줄까요? 나라가 삽질을 하고 열린글(공문서)이 어렵거나 딱딱한 말씨라면 어른 몫을 할 사람들이 살림도 사랑도 글도 노래도 멀리한다는 뜻이지 싶어요. 참말로 나라(정부)는 무너져도 글꽃(문학)은 살겠구나 싶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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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1.5.27.


《소로의 일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윤규상 옮김, 갈라파고스, 2020.7.30.



셈틀맡에서 일할 적에는 이 일만 그린다. 셈틀을 끄고 풀밭에 서면 풀밭만 담는다. 이제 글꾸러미를 펼치고 붓을 쥐면 노래꽃만 떠올린다. 누구한테 가는 노래일까. 님한테 갈 테지. 어느 님한테 갈까. 사랑스러운 이웃님이며 동무님한테 갈 테지. 그 이웃이나 동무가 반길까. 몰라. 잊거나 안 반길 수 있어. 왜냐하면 노래꽃이 노래인 줄 읽으려면 우리가 누구나 스스로 꽃노래인 줄 받아들이면 되는데, 스스로 꽃으로 피어날 노래라는 대목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아픈 넋’이라는 생각에 갇히려는 사람이 많거든.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구름이며 별을 바라보다가 바람하고 놀면서 쓰고 나면 어느새 바람대로 별빛대로 내 손을 떠난다. 《소로의 일기》를 읽다가 자꾸 덮는다. 옮김말이 너무 ‘소로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소로란 사람이 쓴 글을 옮기는 분이 소로처럼 숲이나 두멧골에 조용히 깃들면서 옮기기란 어려울는지 몰라도, 마음으로는 숲사람이 되어서 옮겨야 할 텐데. 한숨짓는 소리를 들은 곁님이 “그러니까 내가 영어책을 읽으려고 영어를 배우잖아.” 하고 한마디. 숲을 읽으려면 스스로 숲이 되어야 하고, 소로를 옮기려면 스스로 소로가 되어야 한다. 글을 쓰려면 스스로 글이 되고, 책을 읽으려면 스스로 책이 되면 다 된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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