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요새 ‘놉’이란 말을 아는 분은 드물리라. 어린이나 젊은이라면 모를 테고, 책을 꽤 읽었으면 얼핏 스쳤을 수 있으나, 잊히는 낱말 가운데 하나이다. 요샛말로 한다면 ‘품팔이·날품팔이’쯤이요, 지난날 지난삶을 돌아본다면 ‘가난하고 땅이 없이 하루하루 품을 팔아야 겨우 입에 풀을 바를 수 있는 살림인 사람’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낱말책을 여미는 일을 하니 ‘놉’이라는 낱말은 알았되 딱히 쓸 일은 없었는데, 2011년에 전남 고흥 시골집에 깃들고 나서 ‘놉’이란 말을 마을 할배한테서 새삼스레 들었다. 마을 할배가 어릴 적하고 젊을 적에는 땅도 집도 없어서 이 집 저 집 빌붙으면서 ‘놉’을 오래도록 팔다가, “이제 이렇게 마을 귀퉁이에라도 집을 지어서 사오.” 하고 푸념이 섞였으나 숨을 다 돌린 듯이 말씀을 하시더라. 그렇다. 시골마을을 보면 귀퉁이나 기스락에는 언제나 가난집이게 마련이다. 시골에는 ‘이장’이 있고 ‘부녀회장’이 있다. ‘놉내기(놉을 팔거나 머슴으로 일한 사람)’ 가운데 ‘이장·부녀회장’으로 뽑혀서 일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예 없지는 않으나 아주 드물리라 본다. 시골 면장·읍장은 어떨까? 시골 군수는 어떨까? 시장이나 도지사 같은 사람은 어떨까? 까마득한 옛날일 수 있는, 1950∼60년대까지 놉내기로 살던 분들은 아직도 뒷전으로 밀린다. 그리고 놉내기를 따돌리면서 우쭐거리는 한줌 힘을 드날리던 분들이 고스란히 남은 시골마을은 차츰 늙어서 사라진다. 얼른 사라질 노릇이다. 이런 시골이라면 사라져야 마땅하다. 2023.4.5.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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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

책숲하루 2023.4.5. 앓다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국어사전 짓는 서재도서관)

: 우리말 배움터 + 책살림터 + 숲놀이터



  엊그제 ‘자리’ 말밑찾기(어원분석)를 마무리지었습니다. 이제 《새로 쓰는 삶말 꾸러미 사전》을 펴냄터로 보낼 수 있습니다. 두 가지를 보태면 됩니다. 하나는 ㄱㄴㄷ로 벌인 찾아보기요, 둘은 ‘곁책 꾸러미(참고도서 목록)’입니다. 어제그제에 오늘도 우리 책숲에서 곁책 꾸러미를 모으는데, 적잖이 품이 듭니다. 그동안 사서 읽기만 했을 뿐, 느낌글을 쓴다든지 벼리(목록)를 갈무리해 놓지 않기 일쑤였던 터라, 책을 하나하나 끄집어서 책자취(간기)를 옮겨적습니다. 이럭저럭 1400자락을 옮겨적었으나 갈 길이 멉니다.


  어제 하루는 몸앓이를 실컷 했습니다. 아침부터 갑자기 어지럽더니 몸살이 올라왔고, 몸살을 부여안고서 읍내 우체국을 다녀왔습니다. 몸살인 채 자전거를 달리기는 어렵거든요. 시골버스에서 노래꽃(동시)을 둘 쓰고, 우체국 앞에서 하나 씁니다. 대구에서 마을책집을 꾸리는 이웃님이 아기를 낳아 돌보십니다. 그분 집안 세 사람한테 하나씩 건네려는 노래꽃을 썼어요. 몸살을 씻어내고서 노래꽃을 쓰고 부쳐도 되지만, 어제는 굳이 ‘앓는 몸인 채 마음을 가다듬어 글결을 살리자’ 싶었어요. 몸살일 적에는 으레 드러누워 끙끙거리면 하루이틀쯤 땀을 쪽 빼고서 말짱하게 일어나는데, 몸살인 날은 셈틀을 켜서 글쓰기는 못 하지만, 붓을 쥐어 종이에 쓸 수 있더군요.


  아픈 몸으로 글을 쓴 숱한 이웃이며 어른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저는 비록 하루만 앓으면서 글을 쓸 뿐이지만, 이 하루를 고이 품자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뼈마디와 살점이 녹아들고 타들듯 끓어오르는 몸을 낱낱이 느껴 보는데, 집으로 돌아와서 자리에 누워 두나절 즈음(5∼6시간) 앓다가 “아, 애벌레가 나비로 몸을 바꾸려고 스스로 고치에 틀어앉아 녹고서 새로 태어날 적에 이렇겠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어릴 적부터 자주 앓고 툭하면 앓고 심심하면 앓는 몸을 건사하며 살아옵니다. 으레 앓으면서 살아왔기에 ‘앓음’이 나쁜 일이 아니요, 그렇다고 좋은 일이 아니지만, 무슨 뜻일까 하고 내내 곱씹었습니다. 자주 앓거나 늘 앓는 사람이란, 언제나 ‘허물벗기·날개돋이’를 하는 나날이로구나 싶습니다. 앓지 않아 본 사람은 살림을 꾸리기 어렵고, 앓지 않은 사람은 글을 쓰기 어렵구나 싶어요. 앓아 보기에 살림을 여미는 손길을 스스로 배우고, 앓고 또 앓기에 글빛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익힐 만합니다.


  작고 작지만 뜻깊게 어린이책과 삶책을 꾸준히 선보이는 ‘지양사’에서 《빙하기》라는 그림책을 곧 낸다고 합니다. 책도르리(북펀딩)를 하는군요. 기꺼이 한 손을 거듭니다. 저는 일곱째 도르리벗이 됩니다. 새로 태어날 책도, 새로 책을 여미는 펴냄터에서 그동안 선보인 책도, 새록새록 손길과 눈길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https://tumblbug.com/jiyangsa_ice_age_book


  작은 펴냄터에서는 ‘서평단 5∼10사람’쯤 모으고, 이럭저럭 큰 펴냄터에서는 ‘서평단 20∼30사람’쯤 모으고, 큰 펴냄터에서는 ‘서평단 100∼500사람’쯤 모읍니다. 서평단이란 이름으로 책을 알리는 일이 나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돌아볼 노릇 아닐까요? 큰 펴냄터에서 ‘서평단 100∼500사람’쯤 거느리면서 알리는 책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더구나 큰 펴냄터는 서평단이 아니어도 ‘큰책집 일꾼’하고 ‘마을책집 지기’한테 책을 보내 줍니다. 그들은 그만큼 책을 돌리거나 뿌려도 돈이 많고 돈을 잘 벌기 때문입니다. 큰 펴냄터에서 내는 책이라고 해서 나쁠 책은 없을 터이나, 이렇게 돌리거나 뿌리는 책을 구태여 읽어야 할는지 생각하는 마음인 이웃님이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책을 책으로 바라보면서 나누려는 마음이 있다면, ‘책읽기 운동’을 안 일으켜도 됩니다. 책장사는 하나도 안 나쁘되, 책장사로 기울어버린 여러 큰 펴냄터 책만 읽고 나누는 책모임을 자꾸 펴거나 연다면, 누구보다 우리 스스로 생각씨앗이 사그라들고 마음밭이 쪼그라들지 않을까요? 서평단 없이 책을 알리고, 언론홍보 없이 책을 나누고, 덤(굿즈) 없이 책을 팔고, 이름값 없이 쓰고 엮고 펴는 길에 서는 책이 무척 많습니다. 미처 제대로 안 알려진 책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어떤 책을 읽으면서 어떤 마음을 가꾸어 이 별과 보금자리와 마을과 나라를 어떻게 바꾸려는가를 헤아려 봐요. 작은 책 하나를 고르는 손길로도 이 별과 나라를 바꿀 수 있습니다.



*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 짓는 일에 길동무 하기

http://blog.naver.com/hbooklove/220188525158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지기(최종규)가 쓴 책을 즐거이 장만해 주셔도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짓는 길을 아름답게 도울 수 있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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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인천 16] 방학숙제 ‘식물채집’

― 사랑 없이 더미만 안긴 그곳



  국민학생이던 때, 방학이면 늘 어마어마하게 쌓이는 방학숙제에 짓눌립니다. 방학 동안 우리가 해내야 하는 짐(숙제)은, 첫째 일기, 둘째 탐구생활, 셋째 과목에 따라 멧더미 같은 베껴쓰기, 넷째 만들기·독후감·여행감상문 쓰기 들이었습니다. 일기는 이레 가운데 나흘은 꼭 써야 했고, 탐구생활은 빼곡하게 채워야 했습니다. 탐구생활을 하자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방송을 반드시 들어야 했기에, 탐구생활 방송이 나오는 20분 남짓을 맞추자면, 밖에 나가서 논다든지 어머니 심부름을 한다든지 그즈음 뭔가를 해야 하면 못 풀고 지나칩니다. 과목 숙제는 여느 때에도 늘 있는 숙제이지만, 방학을 맞이하면 길잡이(담임 교사)는 과목마다 무슨무슨 숙제를 해야 한다고 잔뜩 적어서 아예 표를 만든 뒤 나눠 주는데, 방학하는 날 나누어 주는 숙제표를 받을 때마다 동무들은 괴로운 소리를 뱉어냅니다. 다른 숙제도 숙제이지만 과목 숙제를 하자면 날마다 몇 시간씩 숙제에만 매달려도 빠듯하거든요. 만들기 숙제는 으레 ‘과학 만들기’입니다. 저는 다른 숙제는 그리 내키지 않아도 종이와 빨대 따위를 오리고 자르고 붙여서 집을 만든다든지 석유 캐는 배를 만든다든지 하면서 조물딱조물딱 하기를 즐겼습니다. 독후감 숙제야 여느 나날에도 한 달에 몇 벌씩 하는 숙제입니다. 걱정거리라면 여행감상문인데, 어디 여행을 다녀올 수 없는 살림일 때에는 ‘가까운 동무’한테 찾아갔다가 온 이야기를 이렁저렁 살을 붙여서 씁니다. “이게 무슨 여행감상문이야?” 하고 길잡이가 꾸짖으면, “어디 멀리 나갔다가 와야지만 여행인가요. 어느 곳을 다녀오든 새롭게 느끼고 생각하면 여행이라고 하셨잖아요.” 하면서 대꾸했습니다. 다만, 이렇게 대꾸를 할 적마다 출석부로 신나게 얻어맞았습니다.


  국민학교 낮은학년을 마감하고 높은학년으로 접어드는 4학년이 되니 새로운 방학숙제가 하나 생깁니다. 바로 ‘곤충채집’이나 ‘식물채집’ 한 가지 하기. 여기에 ‘취미활동 결과’ 하나 내기.


  그리 길지 않은 방학 동안 우리들한테 숙제만 하라고 들볶는 학교라 할 만한데, 따지고 보면 여느 나날에도 언제나 짐더미를 안기던 학교였습니다. 학교라는 곳은 숙제와 성금과 체벌과 시험과 단속과 검사와 훈련과 강요가 넘치는 곳이었어요. 학교를 다니는 동안 무엇인가 알차고 즐겁게 ‘배운다’고 느낀 적은 하루조차 없었습니다. 무언가에 길들도록 우리를 내몰고, 그들(교사)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사납고 무시무시한 주먹과 몽둥이를 휘둘렀습니다.


  4학년이 되어 맞이하는 여름방학 날, 과목 숙제와 탐구생활 따위와 함께 더 얹은 숙제를 길잡이가 알려줍니다. 다른 동무들은 죽겠다는 소리를 지르며 “방학 때 하루도 놀지 말라는 얘기예요?” 하고 따집니다. 책상을 치고 걸상을 끌며 대꾸합니다. 길잡이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짐이 참 많다고 느끼지만, 동무들이 대꾸하는 꼴이 적이 짜증스러운 듯 “왜 이리 시끄러워? 방학 첫 날부터 맞아 봐야겠어?” 하며 굵직한 몽둥이로 교탁을 내리치며 조용히 시킵니다.


  새로운 방학숙제가 더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던 저는 조용히 있었습니다. 다른 짐이라면 모르지만 곤충채집이나 식물채집은 제가 늘 즐기는 일이고, 취미활동은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형하고 우표모으기를 해왔거든요. 과목 숙제가 너무 많아 늘 힘들지, 다른 덤짐(추가 숙제)은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숙제가 없어도 이런 일은 언제나 으레 하며 살았으니, 으레 하던 그대로 짐으로 엮기만 하면 됩니다.


  곤충채집도 함께 할까 하다가, 벌레를 아무렇게나 잡아서 죽여 모으는 일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더군요. 언제나 나비에 잠자리에 딱정벌레에 개미에 거미에 사슴벌레에 베짱이에 사마귀에 방아깨비에 잘 잡으면서 놀았지만, 곤충채집장에 가느다란 못으로 쿡 찔러서 죽여서 담는 곤충채집을 며칠 해보다가 “잠자리를 잡고 손가락에 끼우고 놀다가 놔주는 일하고 채집은 너무 다르구나. 차마 이 아이들을 못으로 찔러 죽이지 못 하겠어.” 하고 생각했습니다.


  마을을 다니며 낯선 풀을 모조리 뽑아 모으는 일을 하자고 생각합니다. 벌레 한 마리도 살아숨쉬는 목숨이라면 풀 한 포기도 살아숨쉬는 목숨입니다. 다만, 어릴 적에는 이 대목까지 생각하지는 못 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본다면, 곤충채집은 풀벌레를 못으로 찔러죽이는 짓을 시키는 셈이요, 식물채집은 풀꽃을 뿌리까지 캐내어 말려죽이는 짓을 시키는 셈이에요.


  어린 앵두나무를 캐다가, 곧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텐데 싶은 들딸기를 캐다가, 씨앗을 맺어 퍼뜨리려던 제비꽃을 캐다가, 아직 자그마한 해바라기를 캐다가, 속으로 자꾸 뜨끔했습니다. 어릴 적에 식물채집을 하면서 “내가 자꾸 잘못을 하는구나. 바보 같은 나를 봐주렴.” 하고 속삭였어요. 얼핏 풀꽃나무가 제 마음으로 스며들어 “넌 풍뎅이를 못으로 찔러죽일 적에는 뜨끔하거나 못할 짓이라고 여기면서, 나를 뿌리째 캐내어 무거운 책더미에 짓누르고 말려서 죽이는 짓은 안 뜨끔하거나 안 못할 짓이라고 여기니?” 하고 따지는 듯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따지는 마음소리를 내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떡하니. 식물채집 숙제를 안 내면, 또 그놈(담임 교사)이 우리를 먼지 나게 두들겨패는걸? 또 맞기 싫어.” “네가 그놈한테 볼기를 얻어맞는다고 네 목숨이 사라져? 한동안 따끔하고 붓겠지만 네 목숨이 사라져? 아니잖아? 그런데 네가 우리를 뿌리를 안 남기고 모조리 뽑아내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어. 뿌리를 남겨 주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이야.” “그렇지만 식물채집을 할 적에는 뿌리까지 캐라고 했어.” “이그, 너는 그놈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구나? 너한테 말을 건 내가 잘못이네.” “아, 아니야. 네 말이 맞아. 내가 어리석어.”


  여름방학 동안에는 꽃삽이나 호미랑 비닐자루랑 책을 챙겨서 다녔습니다. 풀꽃을 캐면 흙을 털고 잎을 반듯하게 펴서 책 사이에 끼웠습니다. 처음 이 짐을 하라고 시키는 말을 듣던 1985년(4학년) 여름날에는 모처럼 ‘할 만한 짐’이라고 여겼으나, 풀꽃을 모으면 모을수록 속으로 켕겼습니다.


  그래도 4학년과 5학년과 6학년 세 해를 보내는 동안, 동무들하고 놀다가 틈틈이 풀을 뽑아서 그러모읍니다. 뿌리까지 알뜰히 캐야 하는데, 밖에서 뛰놀 적에는 호미 같은 연장은 미처 못 챙기기 마련이니, 놀다가 풀을 캘 적에는 손으로 땅을 파서 풀포기를 한 뿌리 두 뿌리 모읍니다. 


  뽑아서 집으로 가져온 풀포기는 뿌리와 잎에 묻은 흙을 잘 털어낸 다음 신문 사이에 누르고 두꺼운 책들, 이를테면 전화번호부를 위에 올리고 눌러 놓습니다. 적어도 이레쯤 눌러 놓아 납작쿵이 됩니다. 셀로판테이프(비치는 테이프)를 가늘게 잘라서 두꺼운 그림종이 하얀 쪽에 붙입니다. 뿌리가 길면 뿌리는 잘라서 옆에 붙입니다. 뽑거나 캔 풀마다 이름이 무엇인가는 거의 어머니가 알려줍니다. 방학을 하기 앞서 제 ‘식물채집장’은 일찌감치 서른 쪽이든 쉰 쪽이든 꽉꽉 찹니다. 방학 동안 제 식물채집장을 꾸미려고 하는 일이란, 겉에 글씨를 종이로 파서 예쁘게 붙이기라고 할 만합니다. 여느 때에 이미 식물채집을 다 해놓았기에, 여름방학에는 껍데기를 얼마나 더 예쁘고 돋보이도록 할까에 마음을 썼습니다. 어쩌면 너무 마땅할는지 모르는데, 제 식물채집장은 방학이 되기 앞서 다 마쳐 놓았기에, 다른 동무하고 견주어 훨씬 높은 점수를 받을밖에 없고, 5학년 때 식물채집장은 학교를 통틀어 가장 잘한 방학숙제라며 ‘최우수’를 받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식물채집이든 곤충채집이든 방학이라는 짧은 동안에 하라고 시킬 짐이어서는 안 될 노릇이지 싶습니다. 풀이든 벌레이든 사람들이 함부로 갈무리해서는 안 되기도 하지만, 이를 짐으로 여기도록 하면서 애먼 목숨을 죽이도록 길들여서는 안 돼요. 참다이 숲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풀을 들여다보고 벌레를 살펴보는 마음을 길러 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채집장’이 아닌 ‘그림묶음’을 내도록 하는 길이 옳다고 느낍니다. 풀벌레나 풀꽃을 ‘잡아죽여 모으’는 채집장이 아니라, 풀벌레나 풀꽃을 지켜보고서 그림으로 담는 ‘그림묶음’을 하도록 북돋울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방학에 반짝 힘겹게 시키는 짐더미가 아닌, 여느 때에 이처럼 스스로 둘레를 살피고 그림을 그리도록 이끌어야 할 테지요. 따로 ‘방학숙제’란 이름으로 시켜서 짜맞추는 굴레가 아닌, ‘언제나 즐겁게 누리고 해온 아이만 내도록’ 해야 할 테고요. 이제는 배움터에서 어린이를 사납게 두들겨패거나 막말을 일삼는 길잡이가 사라졌을 테지만, 참말로 이러한 ‘채집이나 모으기나 만들기’를 안 했다고 해서 두들겨패거나 점수를 깎아서는 안 됩니다. 지난날 아이들을 흠씬 두들겨팬 그들은 그들이 일삼은 주먹질(학교폭력)을 조금이라도 뉘우칠까요?


  우리는 짐더미가 아닌 사랑으로 커 나갈 저마다 곱고 어여쁜 어린이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눈길을 익히고 고운 손길을 다스리며 착한 마음길을 북돋울 어린이입니다. 어린이가 신나게 뛰놀면서 마음을 가꿀 적에 아름답게 철드는 어른으로 설 수 있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2010년에 써둔 글이다.

조금 손질했다.

그무렵에 인천을 떠나기 앞서

몇 꼭지를 썼는데

틈나는 대로 마저 더 쓰자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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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하루꽃 . 범나비 2023.3.31.쇠.



흰나비를 보았니? 어쩜 눈송이처럼 새하얄까? 노랑나비를 보았니? 어쩜 노을처럼 열매처럼 샛노랄까? 범나비를 보았니? 어쩜 알록달록 범무늬를 담고서 기운차고 의젓하게 날아다닐까? 봄이 한껏 무르익어 벌도 나비도 풀벌레도 거미도 깨어나는구나. 모두 제철을 읽고 느끼고 알아서 저마다 제 몸빛을 밝히네. 너는 네 몸빛을 어떻게 읽거나 느껴서 아니? 거울을 보니? 누가 들려주는 말을 듣니? 너는 네 마음빛을 어떻게 보거나 살피거나 깨닫니? 몸뚱이는 볼 수 있는데 마음속은 못 보니? 네가 마음속을 못 본다고 여기면, 네가 읊는 ‘말’은 뭘까? 모든 ‘말’은 ‘마음’을 그대로 옮긴단다. 기쁘건 슬프건 새롭건 낡건 놀랍건 수수하건 크건 작건, 모든 마음은 언제나 말로 태어나. 마음이란 뭘까? 마음은 네가 누리는 삶을 맞아들이면서 흐르고 움직이고 바뀌지. 네 삶이란, 네가 짓거나 가꾸는 살림에 따라서 흐르고 움직이고 바뀌어. 네 살림살이는 네가 스스로 일으키거나 지피거나 나누는 사랑에 따라서 흐르고 움직이고 바뀌어. 누구나 넋이 있어. 넋을 잊거나 놓으면 ‘빈 살가죽 몸뚱이에 뼈다귀’만 덜거덕거리겠지. 넋을 아로새기기에 스스로 빛난단다. 넋을 이루는 빛은 씨앗이 싹트고 깨어나고 뿌리내릴 적에 퍼져. 씨앗은 네가 스스로 꿈을 그릴 적에 얻어. 이 씨앗은 네가 고요하고 곱게 그윽히 잠든 밤에 ‘나로서 낳는 나로 나아가는 날에 날아오르듯 나타나면서 낫는 낟알’이라고 여길 만해. ‘나’를 느끼고 보고 생각하기에 ‘너’를 느끼고 보고 생각하면서 ‘나·너’를 아우르는 ‘우리’이자 ‘하늘’을 ‘하나’로 알아차리면서 ‘너머’로 나아가는 ‘님’으로 서지. 다시 범나비를 보렴. 이 봄을 봐. 봄에 봄빛인 범나비를 볼 때에, 너(나)는 너(나)를 보고 사랑할 수 있어.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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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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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하루꽃 . 허락 2023.4.1.흙.



모레에 무슨 일이 있을는지 모른다고도 하지만, 모를 수가 없지. 왜 그런 줄 알아? 오늘을 살아가는 네가 그리는 모습이 늘 네 앞날로 나타나거든. 너는 너한테 무엇이 있는지 안다면, 너 스스로 빛나는 길을 가게 마련이야. 네가 너 스스로 마음씨를 바라볼 줄 모르니, 너는 날마다 네 마음을 갉고 깎아서 네 목숨을 스스로 갉으면서 깎지. 너한테 힘이 있니? 네가 네 힘을 쓴다면, 넌 하루하루 죽으러 간다는 뜻이야. 너한테 이름이 있니? 네가 네 이름을 앞세운다면, 넌 언제나 사랑을 잊는다는 뜻이야. 너한테 돈이 있니? 네가 네 돈을 뿌린다면, 넌 스스로 눈을 감는 바보가 된다는 뜻이지. 스스로 사람이라면 홀가분하게 날개를 달면서 바람을 마시지. 네가 스스로 사람빛을 잊기에 자꾸 무리를 지으면서 ‘너(나) 스스로’를 잊다가 잃는 수렁으로 잠겨든단다. 팔다리가 있기에 움직이지 않아. ‘인형·허수아비·로봇’한테도 팔다리가 있단다. 머리가 있기에 생각하지 않아. 생각하려면 마음에 꿈이라는 씨앗을 심어서 스스로 사랑이라는 하루를 지으려 한다면 ‘머리라는 모습’을 매달지 않아도 생각을 한단다. 해파리한테는 어디가 머리이니? 풀·나무·돌·모레·물방울·이슬한테는 어디가 머리이니? 바람이나 하늘이나 바다나 땅은 어디가 머리일까? 겉모습이나 몸뚱이를 바라보는 일은 안 나빠. 그저 ‘겉몸’을 자꾸 보느라 ‘속빛’을 자꾸 잊다가 잃을 뿐이야. 사람은 ‘새’하고 다른 머리·팔다리야. 풀벌레는 나무하고 다른 머리·팔다리이지. 다 다른 목숨은 다 다르게 움직이고 말을 하고 마음을 가꾼단다. 넌 네 마음을 보니? ‘허락’이 없이 스스로 마음을 보살피니?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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