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01.5.31. 일하는 보람



  사람은 일을 안 하며 살 수 없다. 사람은 놀지 않고서도 살 수 없다. 일하고 놀면서 하루를 짓기에, 일과 놀이가 어우러지며 살기에, 비로소 사람이라는 이름이지 싶다. 그러나 적잖은 나날을 두고서 숱한 사람들은 일놀이를 누릴 틈을 빼앗기고 억눌린 채 고달팠다고 느낀다. 꼭두머리라는 허울이 들어서던 무렵부터 꼭두각시로 뒹굴어야 하는 사람이 생겼다. 처음에는 위아래나 왼오른으로 안 가르던 사람 사이일 텐데, 윗자리나 아랫자리로 가르는 굴레를 들씌우면서 빛을 잃고, 이쪽이냐 저쪽이냐 하고 다투면서 사랑을 잊는다. 왜 햇볕 한 줌을 쬘 수 없는 곳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나? 왜 뙤약볕에서 새카맣게 타면서 하루가 버거워야 하나?


  ‘놀이·놀다’하고 ‘노닥거리다’는 다르다. ‘일’을 하면서 맞물리는 ‘놀이’이지만, ‘일’이란 없이 탱자탱자 바보짓을 부리기에 ‘노닥거리다’이다. 일하는 사람이기에 놀이하는 사람으로 나란히 서고, 일을 안 하는 사람이기에 노닥거리는 짓에 사로잡힌다. 일할 줄 알기에 이야기가 피어나고, 놀 줄 알기에 노래를 부른다. 일할 줄 모르기에 어리석고, 노닥거리기만 할 뿐이니 돈·이름·힘으로 이웃사람을 쥐락펴락 괴롭힌다.


  한 해에 하루조차 안 쉬는 헌책집지기가 수두룩하다. “사장님, 그래도 설이나 한가위에는 쉬셔야 하지 않나요?” 하고 여쭈어 본다.


  〈아벨서점〉 아주머니는 “모처럼 설이나 한가위에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데, 이분들이 헛걸음을 하시면 제가 더 섭섭하지요.” 하고 이야기한다.


  〈신고서점〉 아저씨는 “나이를 많이 먹어가면서 힘들어서 요새는 한 해에 하루

나 이틀을 쉴 뿐이지, 여태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책방 문을 열었어요. 하루도 안 쉬면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분이 많은데, 저는 오히려 한 해에 하루를 쉬는 날을 두니까 더 힘들어요.” 하고 이야기한다.


  〈뿌리서점〉 아저씨는 “무슨 모임이라고 사람들이 불러서 어디 가서 노래 부르고 밥을 사먹는 데에 있으면 더 힘들고 거북하더라고. 집안 제사를 하러 멀리 가야 하더라도, 그곳에서 안 자고 얼른 책방으로 돌아와서 밤에 한두 시간이라도 열어야 마음이 놓여. 밤에 열고서 언제 자느냐고? 허허. 책보러 오는 손님들이 밤에도 오시는데 잠이 오기보다는 즐겁고 고맙지. 잠이야 새벽에 들어가서 자면 되고.” 하고 이야기한다.


  〈헌책백화점〉 아저씨는 “손님이 없으면 문을 닫아 놓고 마음껏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지. 꽹과리도 치고, 북도 치고. 요새는 외국어도 공부해. 혼자서 사전을 큰소리로 읽지.” 하고 이야기한다.


  일하고 놀이는 아주 다르지 않을 만하다. 기쁘게 맞이하기에 일이요, 즐겁게 누리기에 놀이라고 느낀다. 삶을 기쁘게 밝히기에 일이요, 살림을 신나게 펼치기에 놀이라고 느낀다. 논밭을 돌보고 들숲을 품으면서 바다를 헤아리던 모든 옛사람은 삶이라는 자리에서 늘 일하고 놀이가 하나로 흘렀으리라 본다.


  이리하여 나는 책집마실을 ‘일놀이’로 여긴다.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엮는 밑책을 살피려고 날마다 하루를 마칠 무렵에 두세 곳 책집을 찾아가되, 시끌벅적한 서울을 잊으면서 마음 가득히 푸른숨결을 불어넣는 글결을 익히는 마실길이다. 책을 읽다가 찰칵 한 자락 찍는다. 다시 찰칵 한 자락 더 찍고서 책을 새로 읽는다. 어느새 등짐과 두 손을 가득 채울 만큼 책꾸러미를 장만한다. 집까지 책짐을 나르자면 땀을 뻘뻘 흘리는데, 집에 닿아서 씻고 책을 닦고 천천히 되읽으면서 풀벌레노래를 듣는다. 비록 삯집이어도, 조그마한 보금자리가 있는 종로구 평동 나무집(적산가옥) 둘레로 숲이 있다. 이 숲에서 들려오는 밤노래를 듣다가 책을 손에 쥔 채 스르륵 잠이 든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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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7. 온책온빛



  둘레에서는 흔히 “사람마다 빛깔이 다 다르다” 하고 말을 한다. 어렵게 꼬아서 ‘백인백색·백양백색·십인십색’이나 ‘개성적’이라고 이르기도 한다. 이런 말을 옆에서 조용히 들으며 혼자 곱씹어 본다. ‘사람마다 빛깔이 다 다르다고 말은 잘 하면서, 내가 차림옷(양복)이 아닌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으면 왜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혀를 끌끌 차지? 사람마다 빛깔이 다 다르다고 읊지만, 정작 그분들이 읽는 책은 다 같잖아? 신문에서 알려주지 않는 책은 살 엄두도 안 내고, 방송에서 알려주는 책은 우르르 몰리잖아?’


  한자말은 ‘백(百)’이지만, 우리말은 ‘온’이다. ‘백인백색·백양백색’을 ‘온빛’이나 ‘온사람’으로 풀어 본다. 아니, 우리 삶자락을 헤아려 ‘온빛·온길·온사람·온꽃·온풀’로 새롭게 여미어 본다.


  오롯하고 옹글게 온누리를 이루는 다 다른 빛깔이기에 온빛이요, ‘온책’을 읽는 온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눈치를 볼 일이 없이 속빛을 바라볼 줄 아는 온숨이요 온넋이며 온얼이다.


  우리가 저마다 온하루라면, 쳇바퀴도 굴레도 수렁도 톱니바퀴도 아닌, 사람답게 사랑을 하리라. 우리가 언제나 온하루를 잊거나 잃으면, 그저 쳇바퀴에 굴레에 수렁에 톱니바퀴이리라. 어느 한 가지 길만 으뜸일 수 없다. 다 다른 모든 길이 우리 앞에 환하고 밝다.


  온누리에 빛나는 책이 고작 한두 가지뿐이라면, 책은 그냥 한 자락만 읽어도 될 테지. 저마다 빛나는 다 다른 사람이기에, 이 삶에 곁에 둘 책은 한둘이 아닌 ‘온책(100가지)’일 뿐 아니라, ‘즈믄책(1000가지)’이고, ‘골책(10000가지)’이자, ‘잘책(1억 가지)’이리라.


  온누리 모든 책은 다 다르기에 아름답다. 비슷비슷한 줄거리라면 따분하다. 잘 팔리기만 한다면 덧없다. 높여야 할 책이 없고, 낮추거나 깔볼 책이 없다. 자랑하거나 우쭐대는 책은 창피하다. 글바치가 꾸준하게 새글과 새책을 선보이지 못 한다면 부끄럽다. 스스로 온님이라면, 날마다 새글을 기쁜 웃음꽃으로 여밀 테고, 스스로 온살림이라면 해마다 새책을 아름답게 나누는 사랑으로 엮을 테지.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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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9.25. 조선일보와 광수생각



 윗옷은 찾아봤어? 바지는? 속주머니는? 없어?

 그럼 양심은 어디 간거야?

 〈조선일보〉가 실은 ‘광수생각’ 2000.9.25.


  헌책집에 들러서 책을 보다가, 헌책집지기가 읽던 새뜸(신문)이 눈에 뜨이길래, 슥 넘긴다. ‘광수생각’이라는 그림을 들여다본다. 그린이는 “‘마누라’ 몰래 숨긴 20만 원”을 줄거리로 짠다. 그린이는 “끝내 20만 원을 찾지 못한 나머지 슬퍼서 눈물을 흘린다”고 하면서 맺는다.


  나는 굳이 ㅈㅈㄷ을 챙겨서 읽지 않으나, 눈앞에서 누가 읽으면 ‘이분은 뭘 읽으려나?’ 하고 갸웃하면서 같이 들여다보곤 한다. 엊그제 2000년 9월 23일치 〈조선일보〉 ‘광수생각’에서는, 그린이가 “저는 언제쯤 인생의 깊이를 알게 될까요?” 하고 묻더라. 그린이는 “마을 어귀에서 자라는 나무는 어디로도 갈 수 없기에 예전에는 안되어 보였지만, 이제는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 수 있는 나무가 부럽다”고 줄거리를 짠다.


  글쟁이는 왜 ㅈㅈㄷ 같은 데에 꼭지를 얻어서 글을 실으려 할까? 그림쟁이는 뭣 하러 ㅈㅈㄷ 같은 곳에 자리를 받아서 그림을 띄우려 할까? 글삯도 그림삯도 가장 높이 준다는 〈조선일보〉이니까, 돈도 벌고 이름도 날리고 글힘·그림힘을 쥐락펴락하고 싶으니 이런 데에 글그림을 실을 수 있겠지.


  2000년은 ‘조선일보 80돌’이라고 하더라. 그들은 80돌이라는 발자국을 매우 자랑스럽게 외치는데, 코앞인 전두환·노태우 무렵에 무슨 짓을 했는지 뉘우치는 빛이 없고, 조금 앞서인 이승만·박정희 무렵에 어떤 짓을 했는지 돌아보는 빛이 없고, 꽤 앞서인 일제강점기에 어떤 허수아비 노릇을 했는지 되새기는 빛이 없다. 그러니까, 신문기자도 글쟁이도 그림쟁이도 한통속이다. 오늘을 볼 줄 모르니, 어제를 감추거나 덧씌울 뿐 아니라, 모레에도 거짓말과 눈속임으로 채우는 굴레에 스스로 갇힌다.


  삶길(삶이라는 깊이)을 알고 싶다면, 스스로 똑바로 들여다보면 된다. 살림길(삶을 짓는 길)을 배우고 싶다면, 허튼짓을 하면서 온나라를 뒤흔들고 망가뜨리는 무리에 슬그머니 올라타면서 돈·이름·힘을 얻어먹는 바보짓을 그만두거나 아예 처음부터 안 하면 된다.


  함께살기를 하는 짝꿍 몰래 돈을 숨기는 마음이란 얼마나 가엾은가. 사랑이 없으니 돈에 얽매인다. 풀꽃나무가 어떤 마음인지 마주하지 못하는 매무새는 얼마나 딱한가. 풀꽃나무가 들려주는 말에 마음을 열지 않으니까 나무를 쳐다보면서 ‘안되어’ 보인다고 말하다가 ‘부럽다’고까지 말하고야 만다.


  모든 새는 왼날개랑 오른날개를 함께 펄럭이면서 하늘빛을 머금는다. 모든 나비는 왼날개랑 오른날개를 나란히 팔랑이면서 꽃가루받이를 베푼다. 모든 사람은 왼오른손과 왼오른발을 같이 움직이면서 삶을 짓고 살림을 가꾸고 사랑을 편다. 그렇다면 보자. ㅈㅈㄷ은 ‘오른자리’에 선 적이 있는가? 아니다. ㅈㅈㄷ은 ‘오른자리’가 아닌 ‘돈자리·이름자리·힘자리’에만 서려 하면서 ‘우두머리 밑핥기’를 해댔을 뿐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오른글(우익·우파)’을 오른글답게 참답고 슬기롭게 여미는 글바치가 거의 안 보인다. 그리고 ‘왼글(좌익·좌파)’을 왼글답게 참하고 어질게 엮는 글바치도 도무지 안 보인다. 또한 ‘가운글(중도)’을 가운글답게 착하고 곱게 여는 글바치도 참으로 안 보인다. ‘왼가오(왼쪽·가운쪽·오른쪽)’가 다 안 보인다.


  헌책집 귀퉁이에 널브러진 새뜸을 들추다가 내려놓는다. 아니, 오늘 이 헌책집에서 장만한 책을 끈으로 묶을 적에 받침종이로 삼는다. 서울 독립문 헌책집 〈골목책방〉 지기는 이녁이 조금 앞서까지 읽던 이 신문종이를 받침으로 삼아서 척척 묶어 준다. ‘참마음(양심)’을 스스로 일찌감치 잊다가 잃은 채 〈조선일보〉에 ‘눈가림 그림’을 신나게 싣는 ‘광수생각’도 여러모로 쓰임새가 있다. 이렇게 책꾸러미 받침이 되어 준다. 이따가 집으로 돌아가면, 국수나 한 그릇 삶아서 국수를 삶은 작은솥을 받칠 적에 쏠쏠히 쓸 만하다.


  앞으로 스무 해가 지난 2020년에 이르면 ‘조선일보 100돌’일 텐데, 이들은 100돌(온돌)쯤 맞이할 무렵에는 “우리 잘못과 바보짓을 무릎 꿇고 빕니다!” 하면서 눈물을 흘릴까? 아니면 ‘숨긴돈(비상금·비자금)’을 잃어버려서 아까운 나머지 눈물을 흘리는 ‘광수생각’마냥 “너희는 왜 나(조선일보)한테만 화살을 쏘니? 예전에 친일부역과 독재부역을 나(조선일보) 혼자 했니? 친일부역과 독재부역을 한 다른 놈들한테는 화살을 안 쏴?” 하고 푸념을 할까? 뉘우칠 줄 모르는 곳에 글자리나 그림자리를 얻어서 어영부영 ‘좋은말’ 시늉을 하는 이들은 아무래도 스스로 뭐가 부끄럽거나 창피한 줄 모르리라. 앞으로 스무 해가 흘러 2020년을 맞이해도 부끄럼이나 창피가 아닌 ‘자랑’으로 여길는지 모른다. “난 조선일보에 만화를 연재한 사람이라구!” 하고 콧방귀를 뀔 듯싶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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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손바닥만큼 우리말 노래 15


아이들하고 호두에 땅콩을 함께 먹다가 문득 ‘견과’라는 낱말을 돌아본다. 언제부터 이 한자말을 썼을까? 아이들이 대여섯 살이던 무렵에는 ‘견과’라는 소리를 내기도 버거워 했는데, 그때에는 ‘땅콩·호두·잣’이라고만 뭉뚱그리고서 넘어갔다고 느낀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낱말책도 뒤적인다. 우리 낱말책에 ‘굳은열매’라는 올림말이 있지만, 거의 죽은말이다. 아무도 이 낱말을 안 쓴다. 그러면 그냥 ‘견과’를 써야 할까? 아니면 앞으로 태어나서 자라날 뒷사람을 헤아려 오늘부터 새말을 엮을 수 있을까? 무슨 호박씨 하나로 골머리를 앓느냐고 핀잔하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지만, 해바라기씨를 즐겁게 까먹고 싶으니 마음을 기울이고 머리를 쓰고 생각을 여미어 본다.



단단알

우리 낱말책을 펴면 ‘굳은열매’가 올림말로 있다. 그러나 이 낱말을 아는 사람을 여태 못 봤다. 다들 그냥 으레 ‘견과·견과류’만 쓸 뿐이다. ‘견과 = 堅 + 果’이니, ‘단단 + 열매’라는 뜻이다. ‘굳은열매’는 잘 지었되, 제대로 알리거나 살리지 못 했다고 느낀다. ‘견고’ 같은 한자말은 ‘굳은’도 뜻하지만, 이보다는 ‘단단·든든·딱딱·탄탄’ 쪽에 가깝지 싶다. 그러니 ‘단단열매’로 돌아볼 만한데, 밤나무나 참나무나 호두나무는 ‘밤알·호두알’이라 하듯 ‘열매’보다는 ‘알’이라는 낱말로 가리키곤 한다. 그러니 ‘단단알’처럼 새말을 지어서 쓰자고 할 적에 어울리다고 느낀다. 또는 ‘굳알’처럼 ‘-은-’은 덜고서 단출하게 쓸 수 있다.


단단알 (단단하다 + ㄴ + 알) : 껍데기와 깍정이가 단단한 알. 껍데기와 깍정이로 단단히 감싼 알. 밤·호두·도토리·개암·잣에 땅콩·은행에 호박씨·해바라기씨이 있다. (= 단단열매·굳은알·굳은열매·굳알·굳열매. ← 견과堅果, 견과류堅果類)



난해달날

태어난 해랑 달이랑 날을 한자말로는 ‘생년월일’이라 하고 ‘생 + 년월일’인 얼개이다. 이 얼개를 조금 뜯으면, 우리말로 쉽게 “태어난 해달날”이라 할 만하고, 줄여서 ‘난해달달’이라 할 수 있다. ‘난날·난해’처럼 더 짧게 끊어도 된다.


난해달날 (나다 + ㄴ + 해 + 달 + 날) : 태어난 해·달·날. 몸을 입은 모습으로 이곳으로 나오거나 온 해·달·날. (= 난해난날·난날·난때·난무렵·난해. ← 생년월일)

난해달날때 : 태어난 해·달·날·때. 몸을 입은 모습으로 이곳으로 나오거나 온 해·달·날·때. (← 생년월일시)



마흔돌이

나이를 셀 적에 우리말로는 ‘살’이라 한다. 한자말로는 ‘세(歲)’라 하는데, 이 한자말은 높임말로 여기기도 하는데, 참 얄궂다. 왜 우리말로 나이를 세면 낮춤말이고, 한자말로 나이를 세면 높임말인가? 우리는 나이를 셀 적에 굳이 ‘살’을 안 붙이곤 한다. 스무 살이면 ‘스물’이라고, 여든 살이면 ‘여든’이라 한다. 이리하여 ‘마흔돌이’나 ‘마흔순이’처럼 가리킬 만하고, ‘마흔줄·쉰줄’ 같은 말씨는 꽤 널리 쓴다.


마흔돌이 : 마흔 살인 돌이. 마흔∼마흔아홉 살 사이인 사내. (← 40대 남성)

마흔순이 : 마흔 살인 순이. 마흔∼마흔아홉 살 사이인 가시내. (← 40대 여성)

마흔줄 : 마흔∼마흔아홉 살 사이인 나이. (← 40대)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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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의 드래곤 4 - S코믹스, 완결 S코믹스
미요시후루마치 지음, 윤선미 옮김, 시마다 리리 원작 / ㈜소미미디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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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그림꽃 / 숲노래 만화책 . 만화비평 2024.9.10.

책으로 삶읽기 923


《부엌의 드래곤 4》

 시마다 리리 글

 미요시 후루마치 그림

 윤선미 옮김

 소미미디어

 2023.12.20.



《부엌의 드래곤 4》(시마다 리리·미요시 후루마치/윤선미 옮김, 소미미디어, 2023)을 읽었다. 넉걸음으로 마쳐서 아쉽다. 닷걸음이나 엿걸음이나 일곱걸음까지 그릴 만한데, 좀 일찍 마쳤다고 느낀다. 그러나 군더더기를 안 붙이면서 똑똑히 줄거리를 살려서 매듭지었다고도 느낀다. 적잖은 그림꽃은 줄거리 아닌 군더더기에 휩쓸리거나 얽매이면서 자꾸자꾸 늘어뜨리기 일쑤이다. 이를테면 《20세기 소년》이나 《명탐정 코난》은 부질없이 질질 늘어뜨리는 책팔이에 사로잡혔다고 본다. 붓을 쥐고서 돈을 버는 길이 나쁘지 않으나, 돈바라기만 한다면 딱하다. 일자리를 찾아서 돈을 버는 삶이 나쁘지 않으나, 높자리를 차지하면서 자꾸자꾸 돈만 붙들려고 하면 안쓰럽다. 《부엌의 드래곤》은 넉걸음으로 단출히 추스르는 줄거리로 ‘붓과 빛과 길과 숲’ 네 가지를 ‘사람 사이’에서 저마다 어떻게 풀어갈는지 넌지시 물어보면서, 그림님 나름대로 풀어낸다. 우리는 어떤 붓인가? ‘붓’이란, 글쓰기나 그림그리기나 사진찍기를 빗대는 말이기도 하고, 지식과 학문과 졸업장과 자격증을 빗대는 말이기도 하다. ‘빛’이란 숨결과 마음과 사랑을 빗대는 말이고, ‘길’이란 삶과 살림과 오늘을 빗대는 말이고, ‘숲’이란 사람과 마을과 푸른별을 빗대는 말이다.


ㅅㄴㄹ


‘장학금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림만 그릴 수 있으면 충분했다. 그게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였으니까. 이 나라에 와서도 그랬어.’ (30쪽)


‘하지만 그건 내가 외국인이라서 누린 것이었을 뿐. 이 나라 사람들은 줄곧 자유롭지 못했구나.’ (31쪽)


“잊지 마라. 우리는 전부 ‘이어져’ 있어. 그건 어디에 있어도 변하지 않는단다.” (89쪽)


“저기, 마녀님이 개혁을 성공시켜 주신 건가요? 마법으로?” “아니, 난 아주 조금 나뭇가지를 흔들었을 뿐. 익은 열매가 저절로 열리다 떨어진 거야.” (107쪽)


#台所のドラゴン #縞田理理 #みよしふるまち


+


슬슬 버섯 수확의 계절이네

→ 슬슬 버섯철이네

→ 슬슬 버섯 따는 철이네

3쪽


드라크 동맹이네

→ 드라크 두레네

→ 드라크 띠앗이네

10쪽


아홉 개의 생지를 엮어서 만들어

→ 아홉 가지 반죽으로 엮어

→ 반죽 아홉으로 엮어

14쪽


자기들의 세금을 쓴다고 생각해서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닐까

→ 저희 나랏돈을 쓴다고 여겨서 마음에 안 들지 않을까

→ 저희 낛을 쓴다고 여겨서 마음에 안 들지 않을까

27쪽


처음 노노랑 겨울을 날 보존식을 만들었던 날 있잖아

→ 처음 노노랑 겨울을 날 든든밥을 하던 날 있잖아

→ 처음 노노랑 겨울을 날 건사밥을 차린 날 있잖아

63


엄청난 소리로 으르렁대는 게 충견 같았어

→ 엄청난 소리로 으르렁대서 곁개 같았어

→ 엄청난 소리로 으르렁대니 지킴이 같았어

63


드라크가 성체가 되는 일은 드물단다

→ 드라크가 크는 일은 드물단다

→ 드라크가 자라는 일은 드물단다

84


도마뱀 군이 깨어날 때까지 장생할 수 있게 해주세요

→ 도마뱀이가 깨어날 때까지 오래살기를 바라요

→ 도마뱀 씨가 깨어날 때까지 튼튼하기를 바라요

87


당신에게 3일 이내로 퇴거할 것을 요구합니다

→ 그대는 사흘 사이에 나가기를 바랍니다

→ 너는 사흘까지 떠나야 합니다

94


초자연의 생물이라면 사대원소를 다를 필요가 있겠죠? 4대원소란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한 세상의 기본요소, 공기·물·불·흙을 말합니다

→ 너머누리 숨붙이라면 네고리를 다뤄야겠죠? 네고리란 옛 그리스사람이 생각한 온누리 바탕, 바람·물·불·흙입니다

→ 그곳 목숨붙이라면 네곬을 다뤄야겠죠? 네곬이란 옛 그리스사람이 생각한 온누리 바탕, 바람·물·불·흙입니다

→ 빛나는 숨결이라면 네길을 다뤄야겠죠? 네길이란 옛 그리스사람이 생각한 온누리 바탕, 바람·물·불·흙입니다

→ 하늘빛 목숨이라면 네바탕을 다뤄야겠죠? 네바탕이란 옛 그리스사람이 생각한 온누리 바탕, 바람·물·불·흙입니다

→ 별나라 숨빛이라면 네밑동을 다뤄야겠죠? 네밑동이란 옛 그리스사람이 생각한 온누리 바탕, 바람·물·불·흙입니다

120


숲을 지키는 수호자. 존재만으로도 이 땅이 진정이 되니까

→ 숲을 지키는 님. 있기만 해도 이 땅이 차분하니까

→ 숲을 지키는 분. 함께 있어도 이 땅이 가라앉으니까

149쪽


너에게 있어 그런 일들이 겸사겸사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 너는 그런 일이 덩달아일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 너는 그런 일이 딸려 왔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149쪽


전에도 말했지만 오늘 2시부터 단수야

→ 앞서도 말했지만 오늘 2시부터 끊겨

→ 미리 말했지만 오늘 2시부터 안 나와

157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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