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


 알량한 말 바로잡기

 시설 施設


 교육 시설 → 배움판 / 배움틀

 오락 시설 → 놀이판 / 놀이틀

 위생 시설 → 깨끗뜨락 / 말끔자리

 새로 시설된 그네 → 새로 놓은 그네 / 새로 둔 그네

 하수도를 시설하기 위해 → 구정길을 갖추려고 / 구정길을 놓으려고


  ‘시설(施設)’은 “도구, 기계, 장치 따위를 베풀어 설비함. 또는 그런 설비 ≒ 설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갖추다·놓다·두다’나 ‘곳·데·께’로 손질하고, ‘판·판터·판자리·판마당·얼개·얼거리·틀·틀거리’로 손질합니다. ‘터·터전·자리·마당·뜨락·뜰’로 손질하고요. ‘그릇·발판·소·연장·연모’나 ‘밑감·밑거리·밑바탕·밑절미·밑꽃·밑짜임·밑틀·밑판’으로 손질해요. ‘바탕·바탕길·바탕꽃’이나 ‘살림·살림살이·살림붙이·살림틀·삶틀’로 손질할 수 있어요. ‘세간·세간붙이·세간살이’나 ‘쓸거리·쓸데·쓸모·쓸값·쓸것·쓸일·쓰잘데기·쓰잘머리’로 손질해도 어울려요. ‘여러 가지·여러 갈래·여러길·여러빛·여러빛깔’이나 ‘온살림·이것저것·이 일 저 일·이모저모’로 손질해도 되지요. ‘이음돌·이은돌·잇돌·지레·지렛대’나 ‘집·집채·집더미·집덩이·채’로 손질하고요. 이밖에 낱말책에 한자말 ‘시설(?雪)’을 “곶감 거죽에 돋은 하얀 가루 ≒ 시분·시상”으로 풀이하며 싣지만 털어냅니다. ㅍㄹㄴ



학교 시설 부족으로

→ 배움터가 모자라

→ 배움판이 작아서

《전쟁과 학교》(이치석, 삼인, 2005) 128쪽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한다든가, 냉방시설이 잘돼 있는 사무실에서 일한다거나 하는 등의 조건 말입니다

→ 부릉부릉 다닌다든가, 시원한 곳에서 일한다거나 하는 따위 말입니다

→ 부릉이로 오간다든가, 시원한 데에서 일한다거나 하는 밑동 말입니다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정호승, 비채, 2006) 202쪽


기초생활에 필요한 시설이 크게 부족하다

→ 밑살림이 크게 모자라다

→ 바탕살림이 거의 없다

《팔레스타인》(오드 시뇰/정재곤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8) 67쪽


시설을 관리하는 건 학교 측이야

→ 살림살이는 배움터가 돌봐

→ 살림 다루기는 배움터 몫이야

《다녀왔어 노래 5》(후지모토 유키/장혜영 옮김, 대원씨아이, 2013) 38쪽


행정이나 기업에서 모든 시설과 서비스를 준비하고 우리는 그 시설과 서비스를 그저 이용할 뿐이다

→ 나라나 일터에서 모든 자리와 밑감을 챙기고 우리는 이 자리와 밑거리를 그저 받아먹을 뿐이다

→ 나라나 일터에서 모든 자리와 바라지를 마련하고 우리는 이 자리와 바라지를 그저 쓸 뿐이다

《동네도서관이 세상을 바꾼다》(이소이 요시미쓰/홍성민 옮김, 펄북스, 2015) 129쪽


도시가 지속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여러 시설이나 장소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신성하고 경건한 침묵의 장소라고 했다

→ 서울이 이어가려면 갖추어야 할 여러 살림이나 자리 가운데 대수로운 하나는 거룩하고 고요한 곳이라고 했다

→ 서울이 이어가려면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나 자리 가운데 커다란 하나는 거룩하고 차분한 곳이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승효상, 돌베개, 2016) 105쪽


오락 시설, 병원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 놀이터, 돌봄터 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 놀이뜰, 돌봄집 들이 잇달아 생겨났다

→ 놀이집, 돌봄마당 들이 숱하게 생겨났다

《기지 국가》(데이비드 바인/유강은 옮김, 갈마바람, 2017) 83쪽


사육 시설에 가두고 키우기 적합한 동물이 아니다

→ 가두어 키울 만한 짐승이 아니다

→ 가두어 키울 만하지 않다

《물 속을 나는 새》(이원영, 사이언스북스, 2018) 34쪽


마치 누군가를 교정 시설로 보내는 것이 정의 구현이라도 되는 양 응당 그 사람도

→ 마치 누구를 가두어야 올바르기도 한 듯 마땅히 그 사람도

→ 마치 누구를 차꼬로 보내야 마땅하다는 듯 다들 그 사람도

《불태워라》(릴리 댄시거 엮음/송섬별 옮김, 돌베개, 2020) 292쪽


단감은 저장시설이 좋아 요즘은 한겨울에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 단감은 둠터가 좋아 요즘은 한겨울에도 흔하게 맛볼 수 있다

→ 단감은 갈망집이 좋아 요즘은 한겨울에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마음 풍경》(김정묘, 상상+모색, 2021) 139쪽


이번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는 단지 내 시설이 아주 좋습니다

→ 이즈막 새로 지은 잿집은 한마을 살림이 아주 좋습니다

《10대와 통하는 건축과 인권 이야기》(서윤영, 철수와영희, 2022) 131쪽


오래된 도서관 시설을 리모델링하거나 도서관을 새로 건립하고 있다

→ 오래된 책숲을 고치거나 새로 짓는다

→ 오래된 책숲을 손보거나 새로 세운다

《다 함께 행복한 공공도서관》(신남희, 한티재, 202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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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
하야시 노리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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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6.2.21.

인문책시렁 420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

 하야시 노리코

 정수윤 옮김

 정은문고

 2020.8.10.



  우리는 마녘과 높녘으로 갈려서 “두나라 한겨레”입니다. 둘로 갈려서 따로 살아가는 나날이 해마다 늘수록 둘 사이는 더 멀게 마련입니다. 마녘 나라지기나 높녘 나라지기가 이따금 만나고, 마높녘 벼슬아치끼리 만나기도 하지만, 마높녘 수수한 사람은 아예 만날 길이 없습니다. 높녘사람이 높녘에서 달아나 마녘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함부로 못 만나도록 담벼락을 높이 치기까지 합니다.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는 높녘사람 살림살이나 살림길을 아주 살짝 엿볼 수 있어 고마운 책입니다. 게다가 이 땅에서 삶터를 빼앗긴 탓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겨우 먹고살던 한겨레가 어떻게 높녘으로 들어갔는지 살필 수 있어요. 이때 티없는 마음으로 짝꿍을 따라서 높녘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바깥마실을 갈 수 없이 매인 몸으로 늙어가는 여러 일본 할머니 삶자락까지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지난날 임금은 어느 쪽을 평안도라든지 함경도라 이름을 붙이고, 어느 쪽을 경상도라든지 전라도라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나 어느 고을 어느 마을에서 나고자라는 사람이든 그저 ‘사람’입니다. ‘나라’나 ‘고을’이나 ‘마을’로 묶기 앞서 오롯이 ‘사람’입니다. 그저 다르게 태어나서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인데, 나라는 ‘나라지키기’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사내를 싸울아비로 끌고 갔으며, 나중에는 ‘나라넘기기’를 하면서 가시버시를 몽땅 불바다에 팽개쳤습니다.


  일본이 총칼로 쳐들어왔기에 긴긴 나날을 시달리고 괴롭고 죽어야 했습니다만, 이에 앞서 조선이라는 웃사내틀(가부장권력)이 무시무시하던 나라에서도 밑바닥이라는 데에 있는 흙사람(농사꾼)은 낛에 시달리고 싸울아비로 끌려가서 죽고 벼슬힘으로 찍어누르며 종으로 부리는 나리 탓에 괴로웠습니다. ‘군사독재·일제강점기·조선봉건사회’ 어디에서나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힘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발자취를 찬찬히 짚을 때라야 “일본으로 건너간 한겨레”하고 “높녘으로 건너간 일본겨레”가 얽힌 실타래를 읽을 만해요. 건너가고 건너온 사람은 하나같이 ‘밑바닥사람’입니다.


  2026해 무렵에 높녘을 헤아리면, 높녘은 우두머리 자리를 모처럼 아들 아닌 딸한테 물려줄 듯싶습니다만, 우두머리 자리를 몇몇이 거머쥘 뿐, 높녘이라는 터전을 이루는 사람은 어떻게 지내는지 하나도 알 길이 없어요. 높녘사람은 왜 러시아 끝자락으로 끌려가서 불받이(전쟁소모품)로 죽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높녘사람은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갈까요? 집안이나 핏줄로 갈라서 벼슬을 꿰차거나 돈을 움켜쥐는 높녘을 두레(공산주의·사회주의)라 할 수는 없습니다. 다 다른 목소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지만, 어느 목소리는 안 된다고 못박으면서 이야기(대화·토론)가 없이 끊기만 하는 마녘도 아름길(민주주의)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라를 세우려니 금을 긋고 우두머리를 올립니다. 나라를 지키려니 총칼을 잔뜩 갖추면서 애먼 사내를 싸울아비로 붙듭니다. 나라를 드높이려니 가시내를 억누르면서 가두리에 욱여넣습니다. 이제는 ‘나라’나 ‘고을’이나 ‘마을’이라는 헛된 굴레를 걷어내고서 오롯이 ‘사람’으로 마주하며 서로 ‘이웃’과 ‘동무’로 지내는 길을 찾을 때입니다. 이웃이어야 이야기를 하면서 길을 찾습니다. 동무여야 돕고 돌보면서 살림을 짓습니다. 이웃과 동무가 아니기에 힘·돈·이름값에 얽매이면서 끝없이 싸우고 금긋고 괴롭히는 불바다에 스스로 갇히고 가둡니다.


ㅍㄹㄴ


“할머니 무덤 앞에서 ‘어머니, 죄송합니다. 제가 가져온 유일한 선물은 저의 건강한 몸뿐입니다. 말도 없이 일본을 떠난 저를 부디 용서하세요’ 이렇게 말했지?” 키미코 씨가 상냥하게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33쪽)


“하지만 마침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고난의 행군이 시작돼서 배급이 절반으로 줄고 주식이 쌀에서 옥수수로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길가 풀을 뜯어먹거나 산에 가서 도토리든 뭐든 먹을 수 있는 건 다 가져왔어요. 어느 날은 벼를 베고 논에 남은 줄기 아랫부분을 가루로 만들어 물에 끓여먹기도 하고, 어느 날은 거기에 옥수숫가루를 섞어 면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가 제일 힘들었어요.” (65쪽)


“남편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잘 알아요. 막 사귈 무렵엔 일본말을 너무 잘해서 조선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만큼 열심히 일본어 공부를 한 거겠지요. 어느 때는 파칭코 가게에서 일하고 어느 때는 운전사로 일하는 등 직업도 자주 바뀌었습니다. 조선사람들은 일본에서 살기가 정말로 힘들었어요.” (101쪽)


10분쯤 지나 남편과 어떻게 만났는지 물으려 했을 때였다. “저기, 무슨 목적으로 절 찾아오셨나요?” … 나는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제껏 이 나라에 살았고 지금도 살아 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고 일본어로 대답했다. 미츠코 씨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가만히 듣다가 10초가량 생각한 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131쪽)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사실을 지금 처음 들은 모양이었다. 미츠코 씨는 얼마나 일본을 그리워했을까. (166쪽)


내 손을 꼭 쥐고는 그대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자동차 시동이 걸렸는데도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215쪽)


“그럼 슬슬 갈까요.” 현지 담당자 말에 차에 탄 그녀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여기 있는 일본인 아내 셋은 20대, 30대 때 니카타를 떠난 뒤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254쪽)


#朝鮮に渡った日本人妻 #60年の記憶 #林典子


+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하야시 노리코/정수윤 옮김, 정은문고, 2020)


그런 가운데 시작된 것이

→ 그러면서 하던

→ 그러면서 처음 한

5쪽


교수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 길잡이가 미더워했다

→ 길잡이는 미쁘게 보았다

17쪽


고령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 나이든 분과 눈이 마주쳤다

21쪽


조선의 전통의상인 한복을 입었다

→ 한겨레옷을 입었다

→ 배달옷을 입었다

→ 한옷을 입었다

26쪽


바다에서 모아온 유목流木과

→ 바다에서 모아온 뜬나무와

→ 바다에서 모아온 뜬널과

45쪽


가족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안락하게 왕생했다

→ 집에서 끝을 지켜보며 다사롭게 날아올랐다

→ 집안에서 마지막을 지켜보며 느긋이 잘가셨다

73쪽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 누가 입을 열었다

→ 누가 말했다

83쪽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순치보거脣齒輔車라 불렀다고 한다

→ 한겨레와 일본은 단짝이라고 했다

→ 한겨레와 일본은 너나들이라고 했다

→ 한겨레와 일본은 가깝다고 했다

→ 한겨레와 일본은 살갑다고 했다

95쪽


이야기를 나누던 날 아침의 일이다

→ 이야기를 하던 아침이다

→ 이야기하던 아침 일이다

118쪽


내가 일안리프 카메라 두 대를 토트백에서 꺼내는 모습이나

→ 내가 한눈박이 둘을 트임가방에서 꺼내는 모습이나

→ 내가 홑눈찰칵이 둘을 트임짐에서 꺼내는 모습이나

130쪽


재일조선인 중에는 밀주를 제조해 생계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 집술을 담가서 살림을 이어가는 일본한겨레가 많았다

→ 몰래 술을 빚어 먹고사는 일본한겨레가 많았다

171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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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1 책벌레란

책벌레수다 : 입시지옥이 베푼 읽눈



  나는 낱말책을 쓴다. 여태 쓴 여러 책에 드문드문 밝히기는 했는데, 낱말책을 쓰자고 처음 마음먹은 때는 1992해이다. 우리 낱말책(국어사전)을 첫벌로 다 읽으면서 “뭐 이렇게 엉터리인 책이 국어사전이지?” 하고 느꼈고, 두벌로 다시 읽으면서 “이 따위가 국어사전이라면 차라리 내가 쓰겠어!” 하면서 책상을 두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그때 나는 ‘민중서림 이희승판 엣셋스 국어사전’을 읽었는데, 일본말과 일본영어와 일본상표를 이렇게 잔뜩 실어 놓고서 ‘올림말을 확 늘렸다’고 뻔뻔하게 자랑하는 얼거리가 어처구니없었다. 이런 엉터리이니 “마치 우리말이 적고 한자말이 많은 줄 잘못 여기”는 사람마저 많다. 이러다가 1999해였나, 국립국어원에서 낸 《표준국어대사전》은 중국 땅이름을 엄청나게 올림말로 삼았고, 중국뿐 아니라 푸른별 웬만한 나라 땅이름에 사람이름까지 마구잡이로 올림말로 삼았으며, 이제 어느 누구도 안 쓰는 뜬금없는 옛 한문에 나오는 ‘죽은 한자말’도 마구마구 올림말로 삼더라. 왜 우리말을 안 싣고서 딴나라 딴이름을 국어사전에 실어야 할까? 조선 무렵 나리나 벼슬아치 이름을 왜 국어사전에 실어야 하지?


“그러고 보니, 나 유카타를 입은 것도, 다함께 불꽃놀이 보러 간 것도, 다 처음이었어. 고마워.” 《태양의 집 5》 20∼21쪽


  아무튼 1988해에 어린배움터를 마치고서 푸른배움터로 들어가는데, 1990해에 난데없이 배움늪(입시지옥)이 확 바뀐다. 나라에서는 그저 깜짝잔치로 바꾸었고, 1993해부터 ‘학력고사’를 안 하고 ‘대학수학능력평가시험’으로 바꾸면서, 첫 해에는 9달과 11달에 두 벌 치러서 나은 값으로 배움늪을 치르라는 틀을 내놓았다. 더구나 1993해 여름까지 모든 큰배움터에서 ‘본고사’를 치른다고 하다가 막바지에 이르러 ‘본고사’를 안 치르기로 한 곳이 잔뜩 나왔는데, 내가 들어가려는 큰배움터는 다 본고사를 치르기로 했고, ‘면접’까지 치렀다.


“언니를 울트라 캡숑 사랑한다고 쓰여 있어.” “사랑한다고만 쓰여 있잖아.” “마음 착한 사람한테만 보이는 거야.” “뭐라는 거야.” “히로 오빠도 나를 본받도록 해. 그럼 히나랑도 친해질 수 있을걸.” 《태양의 집 7》 112쪽


  어찌저찌하다 보니, 1991∼1993해 세 해 동안 국어사전·영어사전·영영사전·독일어사전·옥편 다섯 가지 낱말책을 날마다 바리바리 들고 다녔다. 내가 나고자란 인천에 있는 배움터는 짐칸(사물함)이란 없었고, 이른바 ‘고등학교’에 시늉처럼 있던 짐칸에 뭘 두면 으레 도둑맞았다. 내가 쓰는 배움책(교과서·참고서)을 훔치는 또래가 잦았다. ‘내신 15등급’으로 촘촘히 가르던 그때에 나는 ‘1등급’까지 들지 못 했으나 ‘1.5등급’ 즈음으로 아슬아슬하게 들어갈 동 말 동했다. 내가 쓰는 배움책은 글적이(필기)가 좋다며 빌리는 또래가 많았는데, 짐칸에 둘라치면 어김없이 이튿날 사라지더라. 그래서 세 해 내내 다섯 가지 낱말책에 모든 배움책을 큰짐으로 그냥 들고 다녔다. 이때 내 책가방은 무게를 달면 30kg이 넘었다. 낱말책과 배움책뿐 아니라 ‘그냥책’도 날마다 대여섯 가지를 챙겨서 다녔다. 쉬는틈이나 낮밥틈하고 혼배움(자율학습)이면 으레 ‘그냥책’을 펼쳐서 읽었다. 집과 배움터 사이를 오가는 2시간 즈음에도 으레 그냥책이나 성문영어나 수학정석을 읽으면서 살았다.


‘모두 다 보물이야.’ 《태양의 집 11》 101쪽


  아무래도 책벌레 밑싹은 푸른배움터 여섯 해에 차근차근 다졌지 싶다. 첫 세 해(중학생)에는 06:00∼22:00를 배움터에 붙들리면서 ‘읽눈’과 ‘짐꾼살이’를 다졌고, 나중 세 해(고등학생)에는 05:30∼23:00를 배움터에 붙들리면서 ‘온갖읽기’와 ‘낱말찾기’에 ‘짐꾼살이’를 뿌리내리는데, 1992∼1993해 이태에는 이레마다 이틀씩 저녁에 자율학습·보충수업을 빼먹으면서 인천 배다리책거리에 있는 헌책집으로 책집마실을 다녔다. 17:00에 긴긴 하루(정규수업)가 끝나는데, 이레마다 이틀씩 몰래 담을 넘었고, 인천 용현동에 있는 배움터부터 달음박질을 했다. 용현동부터 금창동까지 시내버스가 다니기는 했으되 버스틈이 길고, 길삯이 아쉽더라. 마을버스하고 시내버스를 타자면 200원 즈음 드는데, 200원이면 낡은 손바닥책 한 자락을 살 돈이다. 배움터에서 내내 앉아야 하니 엉덩이가 짓무를 듯해서 달리고 싶기도 했다. 건널목에서 기다릴 때를 빼고는 아예 안 쉬면서 25∼30분을 달리면 책거리에 닿았다. 땀을 오지게 쏟더라도 책집에 깃들어 책을 쥐면서 책바다에 뛰어들면 이내 식게 마련이다.


이십몇 년 어치의 신경질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신경질을 내 본 적이, 나의 무겁고 둥근 몸, 그런 몸을 가지고 신경질을 내면 모두 꼴사납다 여겼으므로 … “야 이 ×야, 할머니가 사 준 바람막이란 말이야! 아, 진짜 나도 좀 살자!”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 64쪽


  그때 왜 읽었을까. 그때는 모든 곳에서 늘 주먹질과 매질이 춤사위였고, 배움터 골마루에는 으레 보름마다 치르는 갖가지 셈겨룸(중간·기말·월말고사 + 모의고사)을 값으로 매겨서 담벼락에 줄줄이 붙이는데, 으레 30∼50자리까지만 이름을 올렸지 싶다. ‘첫 수능세대’는 쥐(모르모트)였기에 그무렵 모든 입시학원에서 거저로 모의고사를 베풀었다. 그야말로 내도록 셈겨룸이 안 끊이는 죽음수렁이었다. 셈겨룸이 안 끊인다고 할 적에는 배움터 길잡이가 값(성적)에 따라서 몽둥이질을 끝없이 베풀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구나 고르게 맞았다. 지난 셈겨룸에서 100이었어도 다음 셈겨룸에서 95라면 5만큼 맞는다. 참으로 고르게 가르치는 배움터에서 ‘고르다’가 무엇인지 스스로 길을 찾고 싶어서 배다리책거리로 달려가서 “학교에서 안 읽히고 안 가르치고 안 말하는 책”을 차곡차곡 챙기면서 읽고 또 읽었다.


왜 쓰는지는 나도 잘 모릅니다. 답을 안다면 아마 쓸 필요가 없겠죠. 하지만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쓰는 겁니다. 《출판사에서 내 책 내는 법》(정상태, 유유, 2018) 23쪽


  흔들리는 버스에서 멀쩡히 책읽기와 글쓰기를 하는 버릇은 1991해부터 들였다. 1991해 7달까지는 걸어서 40분쯤이면 닿는 곳에서 살았고, 그 뒤로는 시내버스로 40분 남짓 달려야 닿는 곳에서 살았다. 인천 연수동에서 이제 막 잿더미(대규모 아파트단지)를 마구마구 올려세우느라 하염없이 울퉁불퉁하고 꼬불꼬불한 길을 새벽 첫버스와 밤 끝버스를 가까스로 타면서 다녔다. 어두침침한 시내버스에서 멀미를 안 하려고 책을 읽고 낱말책을 외우고 수학정석을 풀고 성문영어 푸른책을 한 쪽씩 뜯으면서 읊었다. 1991∼1993해에 비탈길에서 흔들거리다가 굴러떨어질 듯한 시내버스를 30kg짜리 책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 한 손으로는 책을 읽으며 타던 얼척없는 앳된 책벌레 한 마리가 태어난 셈이다.


ㅍㄹㄴ


《태양의 집 5》(타아모/이지혜 옮김, 대원씨아이, 2014.6.15.)

《태양의 집 7》(타아모/이지혜 옮김, 대원씨아이, 2014.8.15.)

《태양의 집 11》(타아모/이지혜 옮김, 대원씨아이, 2015.9.15.)

#たいようのいえ #Taamo #タアモ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정세랑, 창비, 2019.6.21.)

《출판사에서 내 책 내는 법》(정상태, 유유, 2018.4.24.)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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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노래꽃 . 쉬는



주안에서 갈아탄 전철을

석천사거리에서 내린다

거님길에 눈이 아직 있다


어제 장만한 책더미를 안고서

가천누리로 걸어간다


책더미가 무거워 등에서 땀나고

입으로는 김이 나온다

구월중학교 앞에서 짐을 내려서

숨을 가만히 쉰다


다시 기운을 낸다

오늘 만날 이웃님한테 간다


2026.1.27.불.


ㅍㄹ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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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노래꽃 . 내가 읽은 책



늦가을에서 첫겨울로 넘어서려는 날

아침에는 구름을 읽고

낮에는 파란하늘을 읽고

이윽고 작은책집으로 마실하면서

책시렁을 읽으면서

문득문득 빗소리를 읽는데

이 마을에 어떤 새가 있는지

귀를 기울여 본다


나는 내 마음부터 읽으면서

네 눈망울을 읽으려고 한다

언제나 오늘 이곳에서


2024.11.16.흙.


ㅍㄹ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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