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또 만나자 과학은 내친구 13
히로노 다카코 그림, 사토우치 아이 글, 고광미 옮김 / 한림출판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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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로 배울 때에는 알 수 없어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89] 히로노 다카코·사토우치 아이, 《비 오는 날 또 만나자》(한림출판사,2001)


 아이가 달립니다. 네 살 아이가 언덕길을 달립니다. 두 살일 적에는 언덕길을 걸어 오르지 못해 안아 달라 하거나 업어 달라 했고, 세 살적에는 힘겨이 걸어서 오르던 언덕길입니다. 네 살 아이로 살아가며 언덕길을 기운차게 달음바질로 올라갑니다. 아이는 언덕길 하나쯤 달음박질로 올라도 지치지 않습니다. 거꾸로 달음박질을 하며 내려가더니 또 달음박질로 올라옵니다. 신나게 달리고 신나게 노래하며 신나게 발을 구릅니다.

 아이라면 달리기를 좋아한달 수 있습니다. 아이라면 누구나 마음껏 달리려 한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웬만해서는 신나게 마음껏 달리기를 하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나는 어릴 적에 으레 달렸습니다. 심부름을 받아도 손에 종이돈과 쇠돈을 꼭 쥐고 달리기를 했습니다. 나도 달리고 내 동무들도 달립니다. 사내도 달리고 가시내도 달립니다. 바지를 입어도 달리고 치마를 입어도 달립니다. 혼자서도 달리고 함께여도 달립니다. 둘이서 나란히 달리고 셋이서 활짝 웃으며 달립니다.

 1등이 되려고 달리지 않습니다. 그저 달리지 않고는 배기지 못합니다. 달려야 성이 풀립니다. 달릴 때에 마음이 부풀고, 달리면서 가슴이 뻥 뚫립니다.

 어린 날 우리 집에는 자가용이 없었습니다. 어린 날 내 동무 가운데 자가용 있는 집은 거의 없었습니다. 누구나 걷습니다. 누구나 버스를 얻어 탑니다.

 오늘날 우리 집에는 자가용이 없습니다.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 집에는 자가용을 모시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딱히 좋아하지 않고, 자가용이 굳이 있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으며, 자가용을 굴릴 돈이 없습니다.

 짐이 아주 많아도 어깨에 짊어지고 손가방으로 듭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아이를 가슴에 안고 다닙니다. 정 힘들면 택시를 부릅니다. 첫째 아이하고 읍내에 장마당 마실을 다닐 적에는 자전거를 몹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집에 자가용을 굴리는 아이들은 달음박질을 잘 안 합니다. 애써 달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달리기는 두 다리를 튼튼하게 다스리는 집안 아이들이 좋아하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 나무와 풀잎 그리고 땅에 내리는 빗방울 소리는 아주 조용합니다. 땅은 빗물을 한껏 들이마시고 있습니다. 나뭇잎도 풀도 비를 흠뻑 받아 반짝반짝 윤이 납니다 ..  (4쪽)


 숲속 나무를 바라봅니다. 한여름 푸른 잎사귀를 마음껏 뽐내는 나무들을 바라봅니다. 칠월에 이어 팔월에도 햇볕 구경을 거의 할 수 없는 이 끔찍한 나라에서 햇살을 포근히 담으며 푸른 기운을 나누어야 할 나무들이 햇님 얼굴을 구경조차 못하는 슬픈 모습을 온몸으로 느끼며 바라봅니다.

 해는 어디에 숨었을까요. 해는 왜 이렇게 두 달째 숨어야 할까요.

 모든 일에는 뜻이 있습니다. 뜻이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비가 올 만하니까 비가 옵니다. 둑이 무너질 만하니까 둑이 무너집니다. 가물 만하니까 가물고, 장마가 올 만하니까 장마가 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이제 이 나라는 빗줄기가 마구 퍼부을 만큼 되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숨쉴 바람이 깨끗해지지 않기 때문에 비가 날마다 끝없이 퍼붓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몇 차례씩 비가 퍼부어야 그나마 숨쉴 만한 바람이 흐르니까 비가 퍼부어야 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터진 만큼, 이 방사능까지 하루 빨리 씻어 주려고 이토록 비가 모질게 퍼붓는지 모릅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아니더라도 한국사람 누구나 자가용을 한두 대쯤 장만해서 날마다 아주 오래오래 모니까, 이 자가용마다 내뿜는 배기가스를 씻으려고 비가 끔찍하달 만큼 퍼붓는지 모릅니다. 햇살을 머금는 숲속 푸르디푸른 나무들만으로는 이제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지저분해지고 만 바람은 풀잎과 나뭇잎으로는 되살릴 수 없기 때문에, 지구별을 움직이는 자연힘은 모질디모진 막비를 베풀지 않느냐 하고 생각합니다.


.. 또 다른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이곳은 온통 올챙이 세상이랍니다. 부레옥잠이라는 수초가 꼭 배같이 불럭 떠 있는데, 그 잎에 개구리가 ‘폴짝폴짝’ 올라 앉습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조그만할까? “어머머, 이것 좀 봐. 꼬리가 나 있네.” ..  (12쪽)


 비가 들이붓고 난 다음에는 그럭저럭 맑디맑은 파란 빛깔 하늘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아무리 비가 들이붓고 난 다음이더라도 이듬날 맑디맑은 파란 빛깔 하늘을 좀처럼 올려다보지 못합니다. 일본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터지지 않았더라도 한국땅 자가용이 너무나 많을 뿐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멧줄기를 허물고 물줄기를 메우는 못난 막개발을 수없이 벌입니다. 여느 사람들은 그저 돈을 버는 일터에 목을 매답니다. 돈을 벌어야 살림을 꾸린다지만, 벌어들인 돈을 다 쓰지도 못하면서 돈을 더 벌고 부동산을 더 늘리는 사람이 몹시 많습니다. 다달이 버는 돈으로는 살림 꾸리기 벅찬 사람도 많습니다만, 하루에 버는 돈만으로도 어찌 다 쓸 길이 없는 사람 또한 참 많습니다. 축구선수 박지성 님이 하루에 버는 돈을 한 해에 걸쳐 다 쓰기는 쓸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아이를 낳아 살아가든 아이 없이 살아가든 홀로 살림을 일구며 살아가든, 사람들이 저마다 할 일은 돈벌이가 아닙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이럭저럭 먹고살자면 오늘날에는 돈푼을 어느 만큼 벌기는 벌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돈푼 벌기에만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내 삶을 사랑할 만한 일을 해야 합니다. 내 삶을 돌볼 만한 일거리를 느껴야 합니다. 내 마음을 가꾸면서 내 이웃을 괴롭히지 않을 일자리를 헤아려야 합니다.

 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삶이 보람찰 수 없습니다. 자가용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꾼이 되는 삶이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아이패드이든 무어이든, 이런 새로운 전자제품을 만드는 공장 노동자 삶이 얼마나 즐거울까요. 이런 전자제품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아이들한테 대단히 나쁘기에 아이들이 이런 전자제품을 아예 만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신문글이 대문짝만하게 실리기까지 합니다만, 아이들한테 전자파가 나쁘면 어른한테도 전자파가 나쁠 텐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이 나라 어른들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이며 삶이고 죽음인가를 깨달으려 하지 않습니다.


..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기다렸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꽥꽥 꽥꽥’ 다시 소리를 내며 개구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고 ‘꽤꽤 꽥 꽤꽤 꽥’ 또 다른 개구리가 울더니 차례로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마침내 대합창이 되었습니다 ..  (23쪽)


 히로노 다카코 님이 그림을 그리고, 사토우치 아이 님이 글을 쓴 그림책 《비 오는 날 또 만나자》(한림출판사,2001)를 읽습니다. 비가 오는 날 어린 가시내 하나가 빨간 빛깔 비옷을 입고 바알간 긴신을 신으며 집안 마당부터 집 둘레 논밭까지 마실을 나와 조그마한 이웃 목숨들하고 인사하는 이야기를 담은 어여쁜 그림책을 읽습니다.

 아이는 개구리를 보고 두꺼비를 보며 올챙이를 봅니다. 미꾸라지를 보고 작은 새를 보며 나비를 봅니다. 애벌레하고 만나며 빗방울 내려앉은 수국을 들여다봅니다.

 아이는 머리로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 곁에서 아이한테 머리에 외우라며 가르치는 어른은 없습니다. 아이는 마냥 즐거이 동무들을 만납니다. 아이는 하냥 기쁘게 이웃들을 사귑니다. 아이한테 잠자리가 동무입니다. 아이한테 풀벌레가 이웃입니다. 아이한테 작은 꽃망울이 동무이고, 아이한테 우람한 푸른나무가 이웃입니다.

 비가 오는 날이니 비가 오는 날에 살가이 사귀며 함께 노는 동무를 만납니다. 비가 오는 냘인 만큼 함께 비를 맞으며 이 비를 기쁘게 누릴 이웃하고 어깨동무합니다. 《비 오는 날 또 만나요》를 읽을 아이들은 이 그림책에 나오는 목숨붙이 이름을 잘 몰라도 됩니다. 그예 모두 곱고 고마우며 고즈넉한 삶인 줄 느낄 수 있으면 됩니다. (4344.8.21.해.ㅎㄲㅅㄱ)


― 비 오는 날 또 만나자 (히로노 다카코 그림,사토우치 아이 글,고광미 옮김,한림출판사 펴냄,2001.8.30./80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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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모르는 책읽기 (책 읽어 주는 남자 the reader)


 여관 텔레비전을 켜도 왜 이리 볼 만한 영화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아 바보야, 쿡 채널인가 뭔가로 들어가면 거저로 보는 영화가 있잖아, 하고 떠올립니다. 영화만 나오는 방송이라 해서 언제 어떤 좋은 영화가 흐를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언제라도 찾아보며 볼 수 있는 영화를 보았어야 합니다.

 거저로 볼 수 있는 영화가 무엇 있나 살펴봅니다. 〈책 읽어 주는 남자(the reader)〉라는 작품이 눈에 뜨입니다. 내가 책과 함께 살아가다 보니 이 영화가 눈에 뜨이는지 모릅니다. 영화를 돌립니다. 영화이름 그대로 책을 읽어 주는 사내가 나옵니다. 이 사내는 학생입니다. 이 학생은 당신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한테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지만 아직 사람과 삶이 무엇인지는 한참 모릅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나누는 사랑에 차츰 젖어들지만, 이 사랑이 사람한테 어떻게 스미고 이 사랑으로 어떠한 삶을 일굴 수 있는가를 깨달으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그나저나 가장 큰 일이 있으니, 이 학생이 사랑하는 이가 글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 학생은 당신이 사랑하는 이한테 책을 읽어 줍니다. 책을 읽어 주고 사랑을 꽃피우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미처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동안 이 학생이 사랑하는 이한테 가장 큰 일이 너무 아픈 어려움으로 찾아옵니다. 이 학생이 사랑하는 이는 글을 몰라 글을 아무것도 읽지 못하는데, 밥집에서도 차림표를 읽지 못하는데, 이 사람이 일하는 일터에서 이 사람이 일을 알뜰히 잘 한다면서 ‘현장직에서 사무직으로 바꾸어 주는 승진’을 시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아무것 아닌지 모릅니다. 이 사람한테는 곧 훨씬 커다란 아픔이 찾아듭니다. 글을 몰라 일자리 찾기 수월하지 않은 이 사람으로서는 몸으로 움직이는 일만 할 뿐이요, 흔한 말로 ‘단순노무직’만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그예 ‘단순노무직’이라고 여긴 ‘감시원’ 일을 합니다. 감시원이라는 일을 누가 시키고 왜 시키는가는 따지지 않습니다. 아니, 따질 수 없어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면 되는 일자리이거든요. 이 사람은 ‘일자리’로서 ‘감시원’이 되는 길을 걷습니다. 다만, 이 사람은 하나도 몰랐습니다만, ‘감시원 일자리’는 ‘독일이 전쟁을 일으킨 뒤 유태인을 가두었던 수용소 감시원 일자리’였습니다.

 이 사람은 감옥에서 늙습니다. 감옥에서 조용히 흰머리가 늘며 할머니가 됩니다. 아주 흰바구니가 된 때에 처음으로 글을 익힙니다. 한 낱말씩 아주 더디게 글을 익힙니다.

 이 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한 사내는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사내는 법학과 대학생이 됩니다. 사내가 법학과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 전범재판이 열리고, 사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전범재판에 붙들려 나옵니다. 사내는 그예 멀거니 떨어져서 바라보는 구경꾼으로 지나갑니다. 왜냐하면, 대학생이 된 뒤에도 아직 참사랑을 모르고, 참사랑을 깨닫지 않으며, 참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거든요. 사내는 ‘마음열기’를 하지 않을 때에는 사랑이 될 수 없는 줄 모릅니다. 이러한 삶을 둘레에서 옳게 일깨우지 못하기도 했다 핑계를 돌릴 수 있을 텐데, 더 깊이 파고들면, 사내를 둘러싼 숱한 사람들도 참사랑을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참사랑으로 꽃피우는 참삶으로 나 스스로 참사람이 되는 길을 밝히지 않아요.

 이 사람이 글을 익힌 까닭은 사랑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돈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이름을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힘을 움켜쥐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씨앗을 냅니다.

 살을 섞는 일은 살섞기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놀이라 할 수도 있을 텐데, 사랑하는 ‘놀이’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을 열어 사랑을 하지 않고서야, 숱한 다른 여자(또는 남자)하고 살을 섞건 뭐를 하건 사랑이 꽃필 수 없습니다. 사랑이 꽃피지 않는데 열매를 맺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씨앗을 내지 못해요. 언제까지나 외로우면서 갑갑하게 돈벌이만 하거나 이름얻기만 하거나 권력바라기로 지낼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아끼려는 사람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공직자가 될 꿈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을 돌보려는 사람은 회사원이나 노동자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바라보며 사랑을 바라는 사람은 내 사랑을 살찌울 살림을 일구려 합니다. 나와 내 살붙이 밥과 옷과 집을 아름다이 마련하는 살림을 따사로우면서 넉넉하게 일구려 합니다.

 베엠베란 자가용을 몬대서 뜻을 이루었다 할 수 없습니다. 아파트 몇 채를 살 만한 돈을 모았대서 꿈을 이루었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가용이 아니니까요. 사랑은 돈도 재산도 부동산도 아니니까요. 7급 공무원이나 3급 공무원이 되면 사랑을 이룬 셈일까요? 연봉 1억이나 3억이면 사랑을 꽃피운 셈일까요?

 사랑이 없는 사람은 더 많은 돈벌이가 되는 길에서 허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이름내기에 더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책을 읽어 주던 사내는 ‘책’이라고 하는 ‘허울’을 읽었습니다. 책이라고 하는 마음밭에서 자라나는 사랑을 읽지 못했습니다. 사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흰바구니 할머니가 되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던 날, 감옥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사내가 선물한 책을 굳은살 가득한 맨발로 밟고 올라서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에야 비로소 이제껏 ‘사랑을 등지’거나 ‘사랑 앞에서 고개를 돌린’ 채 바보스런 허울을 좇으며 삶을 갉아먹은 줄 조금 느낍니다. 이리하여, 이제서야 당신 딸아이한테 당신이 ‘마음을 열지’ 못했고, 당신이 헤어진 옛 옆지기한테도 ‘마음을 안 열’며 바보스레 삶을 내동댕이친 줄을 살짝 느낍니다.

 사랑이지 않은 삶은 덧없습니다. 사랑이지 않은 책은 부질없습니다. 사랑으로 살아낼 하루입니다. 사랑으로 읽어낼 책이며 이야기입니다. (4344.8.1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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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내 가슴에 있어요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착하게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도시에서 살아내며 착하게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든 맑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시골에서 지내더라도 사랑을 품지 못합니다. 언제라도 착하게 꿈을 꾸지 않는다면 멧자락 너른 품에 안긴 채 살아내더라도 사랑을 깨닫지 않습니다.

 풀벌레 우는 소리 아닌 아스팔트를 까거나 시멘트를 부수는 온갖 기계 소리로 아침을 여는 도시 여관에서 잠을 깨면서 생각합니다. 작은 새부터 커다란 새까지 바지런히 새벽을 맞이하며 먹이를 찾는 멧골집 조그마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자동차 시끄러이 내달리는 도시 한복판에 깃든 여관에서 하루를 열면서 생각합니다.

 이렇게 바깥마실을 하면서 새 보금자리를 찾으려 애쓰는 아버지가 힘들까요. 시골집에서 두 아이를 보듬으며 집살림을 돌보는 어머니가 힘들까요.

 내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벌써 사흘씩이나 집이 아닌 도심지 여관에서 잠을 자야 하는 일을 이야기하며 미안하다 말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분이 넌지시 말을 건넵니다. 최종규 씨가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죽일 놈이네, 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나는 다르거든요. 나는 삼백예순닷새를 늘 옆지기랑 아이랑 복닥이며 살아가는 사람이거든요. 이렇게 하루만 바깥으로 나돌아도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리울 뿐 아니라 마음이 아파요. 그렇다고 삼백예순닷새 바깥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사람들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에요. 삶이 다르잖아요. 누가 낫고 누가 나쁘다는 소리가 될 수 없어요. 나는 내가 사랑하면서 꾸리는 삶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바깥마실을 하며 더없이 힘들고 고된 하루가 괴로우면서 미안해요. 좋은 숲 품에 안기어 좋은 눈길과 손길로 좋은 이야기를 일구지 못하는 하루가 참말 슬프면서 아파요.

 물소리를 듣고 싶어요.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리며 사그작사그작 조용히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햇볕을 마음껏 쬐고 싶어요.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둘째 기저귀를 마당 빨랫줄에 널고 싶어요. 내 손은 술잔이 아니라 빨래비누나 빗자루를 들고 싶어요. 둘째한테 젖을 물리는 옆지기 젖가슴을 내 투박한 꾸덕살 손바닥으로 살며시 문지르고 싶어요. 옆지기 등바닥에 조용히 웅크리고 누워 살내음을 맡고 시골집을 둘러싼 풀내음을 받아들이고 싶어요.

 시외버스를 두 번 타고 시골집으로 돌아갈 길이 아주 까마득해요. 네 시간 가까이 어떻게 버티어야 할까 슬퍼요. 선뜻 여관에서 나서지 못해요. 그러나 나는 내 고운 보금자리로 돌아가야지요. 고운 새 보금자리를 찾을 때까지, 우리 살붙이한테 고마운 물과 바람과 햇살과 풀을 베푸는 멧자락 작은 집으로 돌아가야지요.

 벽종이에 아로새겨진 꽃 그림도 예뻐요. 다만, 나는 달리 생각해요. 흙에 뿌리내린 작은 꽃이 아주 예쁘다고 생각해요. 나도 작은 꽃처럼 흙을 밟고 흙에서 노래하고 싶어요. 새벽마다 지렁이들이 가늘게 노래를 한다고 들었어요. 지렁이들이 노래하는 줄 이제껏 몰랐지만, 늘 새벽이면 깨었으니까, 나는 잘 몰랐더라도 언제나 지렁이들 노래를 들으며 살았겠지요. 지렁이가 노래하는 줄 몰랐어도 좋아요. 안다고 해서 더 좋지는 않아요. 지렁이들이 들려주는 노래는 내가 알든 모르든 노상 내 온몸으로 스며들었어요. 매미도 여치도 방아깨비도 사마귀도 거미도 나비도 잠자리도 애틋한 동무예요. 바람을 가르며 푸들푸들 날갯짓하는 잠자리를 살가이 바라보고 싶어요. 머리에 핀을 잔뜩 꽂고는 이쁘게 웃는 어여쁜 딸아이를 기쁘게 품에 안고 빙글빙글 춤을 추고 싶어요. 책은 내 가슴에 있어요. (4344.8.1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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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으로 할 수 없어요


 돈이 있으면 아파트를 사고 자가용을 사고 텔레비전을 살 수 있어요. 그렇지만,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어요. 돈이 있으면 몸을 섞는 놀이를 즐길 수 있어요. 그렇지만, 돈을 아무리 퍼부어도 사랑을 살 수 없어요. 돈이 있으면 맛나다는 밥을 끝없이 사다 먹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돈으로는 사랑을 담은 밥을 사서 먹을 수 없어요.

 나는 돈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나, 돈이 없으면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겠지요. 자전거를 장만할 때에도 돈이 들고, 책을 마련할 때에도 돈이 들어요. 그런데, 돈이 있대서 자전거를 열 대나 스무 대를 장만한들 이 자전거를 어떻게 타겠어요. 돈이 넉넉해서 온누리 모든 책을 다 마련할 수 있대서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요.

 나는 돈을 바라지 않아요. 나는 사랑을 바라요. 나는 자전거도, 책도 바라지 않아요. 나는 고운 사랑이랑 착한 사랑을 바라요. 더 낫다는 무언가를 꿈꾸지 않아요. 더 보드라우면서 더 따사로운 사랑이 좋아요. 맑게 살고 싶어요. 착하게 살고 싶어요. (4344.8.1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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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현장의 이모저모
김성재 지음 / 일지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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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과 함께 걸어가는 내 길
 [책읽기 삶읽기 23] 김성재,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


 내 길은 책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나는 이 길이 좋다고 느껴서 걸어가지 않습니다. 나는 이 길에서 책탑을 쌓으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책삶으로 무언가를 이룰 뜻이 없습니다. 그저 내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책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어머니가 첫째 아이 넉 돌맞이 생일을 떠올려 주었습니다. 첫째는 음성 할머니한테서 생일돈을 받았습니다. 다만, 생일돈은 내 은행계좌로 넣어 주십니다. 이 생일돈으로 옆지기는 실꾸리를 장만합니다. 고맙습니다. 옆지기는 새로 장만하는 실꾸리로 아이 옷을 뜰 수 있고, 음성 할머니나 일산 할머니한테 드릴 옷가지를 뜰 수 있겠지요. 나는 이 생일돈으로 책을 삽니다. 새 보금자리를 찾으러 춘천으로 오는 길에 서울을 들러 올들어 처음으로 헌책방마실을 했고, 헌책방에서 아이가 즐겁게 읽을 그림책을 잔뜩 삽니다. 음성 할머니가 주신 생일돈을 옆지기하고 나는 알뜰히 다 써서 아이한테 선물을 마련한 셈입니다.

 서울마실을 하는 김에 세 군데 출판사를 들러 인사를 합니다. 새 보금자리로 옮기면 서울마실은 더 뜸할 테니까, 이렇게 온 김에 들러서 인사를 하지 못하면, 내 글을 찬찬히 엮어 책으로 펴낸 아름다운 땀방울이 고마웠다는 마음을 나누지 못합니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하며 입으로 말꽃을 피우지 않더라도, 서로서로 고운 마음꽃이 피면서 책 하나가 어떤 사랑인가를 느끼리라 믿어요.


.. 양질의 책을 꽤 많이 낸다 하더라도 질이 낮은 책도 아울러 내고 있다면 그 출판사의 평가는 자연 낮아질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좋은 책을 냈다 하더라도 그 공급 과정에서 품위를 잃어 책의 존엄성을 스스로 짓밟는다면 결고 높이 평가받을 수 없는 것이다 … 수많은 편집자들이 새 맞춤법을 익히느라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지 모른다.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도 새 맞춤법을 완전히 익히지 못하고 혼동하는 편집자들도 간혹 보인다 ..  (16, 100쪽)


 출판사에 들를 때면 그동안 새로 낸 책을 선물받기도 하고, 출판사 책꽂이에 꽂힌 여러 가지 책을 둘러보기도 합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며 만난 아름다운 책을 내 가방에서 꺼내어 보여주거나 빌려주기도 합니다. 두 번 다시 장만하기 어려울 만한 책을 빌려줄 때면 언제쯤 돌려받을까 궁금하지만, 거의 돌려받은 적이 없지만, 그러니까 출판사 일꾼도 어디에선가 잃어버려 그만 사라지는 책이 되고 말지만, 이러하건 저러하건 내 손과 당신 손을 거친 책에 깃든 이야기와 느낌은 오래도록 이어가리라 생각합니다.

 선물받은 책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살며시 펼칩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내 눈을 거쳐 머리를 지나 가슴속으로 스밉니다. 착한 사람 착한 나날 착한 책이 나한테 스며듭니다. 종이에서 나는 책내음을 맡고, 종이에 깃든 이야기에서 피어나는 책내음을 맡습니다.


.. 구순이신 (정문기) 선생님은 우리 출판사에 들르시면 “참 우연히 만났지.” 하곤 하셨다. 한국의 위대한 노인들을 저자로 모신다는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  (45쪽)


 ‘일지사’라는 출판사를 일구는 김성재 님이 내놓은 책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일지사,1999)를 생각합니다. 일지사에서 내놓은 아름다운 책이 퍽 많은데, 이 가운데 《한국어도보》(1977,정문기 씀)는 아주 돋보입니다. 이러한 책을 펴낸 출판사가 놀랍고, 이러한 책을 생각하며 써낸 정문기 님도 놀랍습니다. 이러한 책을 내놓아 나눈 출판사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책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날 수많은 아름다운 책이 태어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좋은 넋이 좋은 마음씨가 되어 좋은 책으로 깃들고, 좋은 책은 좋은 책씨로 거듭나서 수많은 사람들 좋은 넋을 새로 보살피면서 새로운 좋은 책이 태어나도록 이끕니다.

 사람들 아름다운 삶이 책으로 스며들고, 책 하나가 천천히 퍼지면서 사람들 아름다운 삶을 북돋웁니다.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라는 책은 아름다운 삶을 스미고픈 꿈으로 책밭을 일군 한 사람 땀방울을 담습니다. 책 하나를 천천히 퍼뜨려 사람들 아름다운 삶을 북돋우려 했던 한 사람 눈물방울을 담습니다.

 책이라서 대단하거나 책이기에 훌륭하지 않습니다. 책이어야 하거나 책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날이기에 책이 태어나고, 책이 태어나면서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날을 적바림합니다.


.. 학술 출판사는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넓은 의미의 학술서인 해설서나 대학교재에 치중하거나, 다른 부문의 출판물에 의한 이익으로 충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벌어 놓은 돈을 까먹거나, 이잣돈으로 지탱하거나 하고 있는 것이다 … 서적의 소매가격을 서점에서 자유로이 결정한다면 무분별한 가격할인의 추악한 싸움이 벌어져 유통 질서가 문란해지고, 그로 말미암아 서점과 출판사의 도산이 속출할 것이며, 자본력이 튼튼하거나 저질 출판물을 내는 출판사만 살아남을 것이다 … 높은 질의 저작물은 저술해 봤자 서점에 꽂히지도 않을 것이며, 출판을 맡아 줄 출판사도 없을 것이니, 저작자들의 저술 의욕이 상실될 것이다 ..  (72, 122∼123쪽)


 책과 함께 살아가는 내 하루를 돌이킵니다. 책을 읽고 책을 쓰는 내 삶을 돌아봅니다. 책을 매만지면서 살붙이들 보드라운 얼굴을 쓰다듬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고운 이웃 고운 삶을 어깨동무합니다. 책을 쓰면서 좋은 벗님 아프거나 슬픈 어깨를 다독이고 내 눈물을 씻으며 내 웃음을 터뜨립니다.

 값싸게 사들여서 좋은 책이란 없습니다. 헌책방은 책을 값싸게 사고파는 곳이 아닙니다. 도서관은 책을 거저로 빌려 읽는 데가 아닙니다. 내가 땀흘려 일하여 일군 돈을 세금으로 냈기에 도서관이 태어납니다. 수많은 책이 더 너른 곳에서 더 너른 새 임자를 만나도록 징검다리가 되는 헌책방입니다.

 마땅한 값을 치르며 책을 사서 읽습니다. 책을 사서 읽기에 내 삶을 더 착하게 살찌우고 싶습니다. 옳게 값을 치르며 책을 장만하여 갖춥니다. 집에 울타리를 쌓으려고 하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과 함께 예쁘게 살아가며 우리 아이들이 예쁜 꿈을 사랑할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 좋은 학자들을 늘 대하게 되고, 한국학의 수준과 동향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  (270쪽)


 김성재 님은 참 기쁘게 글을 써서 당신 이야기를 적바림한 책 하나를 내놓습니다. 자랑할 일을 글로 쓰지 않습니다. 떠벌이거나 손가락질할 일을 글로 쓰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삶을 책으로 엮어 내놓듯, 좋아하는 책을 어떻게 아끼며 돌보았는가 하는 하루하루 이야기를 천천히 적바림해서 선물합니다.

 책마을은 사람마을이고, 사람마을은 이야기가 있는 터전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터전인 사람마을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날마다 새로운 손길로 내 살붙이를 어루만지며, 내 이웃하고 즐겁게 손을 잡습니다.

 길디긴 빗줄기가 살짝 그쳤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파랗디파란 하늘이 되면서 햇살이 따사로이 내리쬡니다. 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자전거를 몰아 우리 식구들 새 보금자리가 어디에 어떻게 예쁘게 있는가를 살펴야겠습니다. 아버지는 춘천 멧자락을 돌아다닐 테고, 어머니는 음성 멧자락을 바라보며 둘째 기저귀를 신나게 널겠지요. 마음책이 삶책이 되고, 삶책이 사랑책으로 거듭납니다. (4344.8.18.나무.ㅎㄲㅅㄱ)


―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 (김성재 글,일지사 펴냄,1999.9.15./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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