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옮기는 일본 만화책


 일본사람은 한국사람보다 영어를 즐겨쓴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일본사람은 웬만한 낱말을 으레 영어로 적어 버릇한다고까지 합니다. 일본말을 배우는 이는 따로 ‘일본 외래어 사전’을 곁에 두지 않으면 일본말을 익히지 못한다고 합니다.

 집에서 네 살 아이하고 일본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보노라면, 어린 네로가 파트라슈와 함께 끌고 다니면서 거두어 도시로 가져가는 것은 ‘우유’ 아닌 ‘미루크(milk)’라고 이야기합니다.

 일본사람이 그린 만화책을 읽을 때에도 엇비슷합니다. 일본 만화책을 한글로 옮긴 이들은 일본사람이 쓰는 영어를 고스란히 옮겨 적기 일쑤입니다. 《네가 없는 낙원》(학산문화사,2006) 11권 106쪽에 “내 휴대폰으로 메일 주세요.”라는 대목이 나오고, 107쪽에는 “머리 위에서는 지금 지상의 눈보라로 인한 3D 아트 전개 중. 타이틀은, 으음.”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손전화’까지 바라기는 힘들다지만, ‘휴대전화’라 적을 수 있었을 테고, ‘쪽지’나 ‘쪽글’까지 바라기 힘들더라도 ‘문자’라 적을 수 있어요. 그나저나 “3D 아트 전개 중”은 어떻게 살펴야 할까요. 어쩌면, 번역하는 분마저 이런 말은 도무지 어쩔 수 없었구나 싶기도 합니다. “놀라운 예술이 펼쳐진다”라든지 “꿈 같은 예술이 펼쳐짐”이라든지, 차근차근 실마리를 풀면 좋겠습니다. 122쪽에는 “한 장밖에 티켓을 구하지 못했어.”라는 대목하고 “이 메모 순서대로 병원으로 가.”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꽤 흔히 쓰는 낱말이라지만, ‘티켓(ticket)’은 우리 말이 아니에요. 영어예요. 들온말이니 아니니를 따질 수 없는 바깥말인 영어입니다. ‘메모(memo)’야 워낙 자주 많이 쓰니 바깥말이라 느끼는 사람이 적다 할 텐데, 한국말은 ‘쪽글’이나 ‘쪽지’입니다.

 《치무아 포트》(대원씨아이,2011)라는 만화책 69쪽에서는 “나라는 샘플을 원하고 있지.”라는 대목을 봅니다. 한자말 ‘견본’이나 한국말 ‘보기’를 쓰지 않습니다. 123쪽에서는 “서비스로 드리지요!”라는 대목을 봅니다. “덤으로 드리지요!”나 “더 드리지요!”나 “그냥 드리지요!”라 적지 않아요.

 《봄으로 가는 버스》(대원씨아이,2007) 4권에 나오는 “선생님! 나이스 슛이에요!”는 일본사람만 흔히 쓰는 영어라 할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도 이제는 이런 영어를 아무렇지 않게 아주 보드랍게 써요. 농구를 하건 축구를 하건 “나이스 슛”이라고만 해요. “멋진 슛”이나 “멋져”라 하지 않습니다.

 《조폭 선생님》(대원씨아이,2011) 완결편 185쪽에서 보는 “어쩌고 하는 작업멘트를 날리다 그만”에서는 ‘작업멘트’라는 대목이 돋보입니다. “어쩌고 하며 작업을 거는 말을 날리다 그만”처럼 적지 않을 뿐더러, “작업을 거는 말”을 ‘작업말’이라 이야기하는 일이 없어요. 으레 영어로 ‘멘트(ment)’라 해야 어울린다고 여깁니다. 더 들여다보면 ‘作業’이라는 낱말부터 알맞지 않게 쓴 셈인데, ‘꼬드기다’나 ‘꾀다’라 적어야 하는데, 이렇게 엉뚱한 낱말을 쓰면서 영어 또한 얄궂게 들러붙는구나 싶어요. 180쪽에서 보는 “내 휴대폰 벨소리인데?”에서는 어느덧 한국말로 뿌리를 내렸다고 할 만한 ‘벨소리’가 보입니다. “휴대전화 소리”나 “손전화 울림소리”나 “손전화 노랫소리”처럼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경계의 린네》(학산문화사,2011) 5권 114쪽에 나오는 “아니, 오버야.” 같은 말 또한 어느새 영어로 느끼지 않는 한국말처럼 받아들입니다. “아니, 지나쳤어.”나 “아니, 김치국 마시지 마.”나 “아니, 헛물 켜지 마.”처럼 주고받던 말씨는 이제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는 듯합니다.

 《아빠는 요리사》(학산문화사,2011) 112권 107쪽에는 “둘이서 크리스마스 & 해피 버스데이 파티를 여는 거 어때?”라는 대목이 보이고, 111쪽에는 “몽자들은 이웃의 홈파티에 간 모양이다.”라는 대목이 보입니다. 그나마 ‘생일파티’조차 아닌 ‘버스데이 파티’라 하고, 꾸밈말을 덧달아 “해피 버스데이 파티”라 말하는군요. 일본사람이 이렇게 영어로 글을 쓰거나 말을 하더라도, 한국 어린이와 푸름이와 어른이 보는 만화책에는 “둘이서 성탄맞이와 즐거운 생일잔치를 열면 어때?”처럼 적기란 어려웠을까 궁금합니다. ‘홈파티’라는 말도 그렇지요. 집에서 여는 잔치라면 ‘집잔치’일 텐데요.

 《신의 물방울》(학산문화사,2005) 1권 37쪽에는 “와인을 만들기에는 최고의 빈티지였어.”라는 말마디가 나옵니다만, ‘빈티지(vintage)’는 포도술을 가리킵니다. 어느 해 어느 곳에서 만든 좋은 포도술을 가리킨다고 하는 만큼 “와인을 만들기에는 최고의 빈티지였어”는 말이 될 수 없어요. “포도술을 빚기에는 가장 좋은 해였어.”처럼 고쳐써야 올바릅니다. 그나저나, ‘빈티지’라는 영어를 ‘구제(舊製)’라는 한자말과 같은 뜻으로 쓰면서 “오래되면서 무언가 멋이 있는 옷이나 물건”이라 여기곤 하는데, 이렇게 쓰는 일은 알맞지 않아요. 빈티지이든 구제이든, 한국말로는 ‘헌옷’입니다. 낡은 옷이거나 오래된 옷이에요. 헐거나 낡거나 오래되었으나 빛이 난대서 달리 영어로 나타내려 하는지 모르나, ‘헌책’이든 ‘헌집’이든 값이나 뜻을 찾는 사람은 나 스스로입니다. 물건은 물건 그대로 꾸밈없이 가리키면서 내 마음을 따스히 돌보아야지 싶어요. 41쪽에는 “신의 솜씨 같은 그의 디켄팅이 쇠사슬에 묶여 있던 떨떠름한 리쉬부르를 해방시켜 줬고”라는 말마디를 봅니다. ‘디켄팅(Decanting)’이라고만 해야 전문 낱말인 듯 생각하기에 그대로 영어로만 적는구나 싶은데, 한국말 ‘옮겨따르기’나 ‘옮겨담기’로 적으면 됩니다. 번역하는 일이란 ‘옮기기’나 ‘옮겨적기’입니다. 옮기어 따르는 동안 찌꺼기를 거르는 만큼, 이렇게 ‘옮겨따르기’라고만 하면서 얼마든지 포도술 거르기를 보여줄 수 있어요.

 《미녀는 못 말려》(서울문화사,2004) 3권 85쪽에 “자아, 클린 스태프는 이쪽으로 모여 주십시오.” 하는 말이 나옵니다. ‘클린 스태프’라 해서 무언가 했더니 ‘청소 일꾼’, 곧 ‘청소부’를 가리킵니다. 말놀이라 할 수 있을 테지만, “청소하는 분”이나 “청소를 맡는 분”으로도 옮길 수 있고, ‘맑음이’나 ‘깔끔이’처럼 새말을 지을 수 있어요. 그런데 8쪽을 보면, “집에서 얘랑 디너하기로 했거든.” 하고 나옵니다. ‘저녁’이나 ‘저녁잔치’처럼 쓰지 않아요. 영어로 겉멋이나 겉치레를 부리는 아이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111쪽에는 “빅뉴스야, 빅뉴스!” 하고 나옵니다. “대단한 소식이야!”나 “놀라운 이야기야!”처럼 이야기하지 않아요. ‘빅’이든 ‘뉴스’이든 가볍게 써요.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대원씨아이,2011) 2권 6쪽에서는 “하루카의 걸프렌드 사호구나!” 하는 글월을 봅니다. 여자인 친구이니 ‘여자친구’이지만, 이렇게 영어로 가리키는 일을 더없이 마땅하다는 듯 여깁니다. 143쪽에는 “모처럼 즐거운 피크닉에 와서” 같은 글월을 볼 수 있어요. “즐거운 나들이”나 “즐거운 들놀이”나 “즐거운 봄나들이”라 적지 않습니다. 일본사람이 제아무리 영어로 온갖 삶과 이야기를 나타낸다 하더라도, 이런저런 만화책은 한국사람이 한국말로 즐기도록 해야 할 테지만, 한국말을 어떻게 가다듬으면서 알맞게 적바림해야 좋을까 하는 대목을 거의 돌아보지 못한다고 하겠어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이러하며 이듬날도 이와 마찬가지가 되리라 느낍니다. 사랑을 깊이 담아 주고받는 말이 되지 못합니다. 생각을 알뜰히 기울여 나누는 글이 되지 못합니다. 즐거이 놀이하듯이 어우러지는 이야기로 뻗지 못해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여기에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즐겨 읽는 만화책에서도,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예쁘게 맞아들이면서 곱게 아로새기기란 너무 힘듭니다. (4344.6.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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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마법의 신문 기자 동글이의 엽기 코믹 상상여행 2
야다마 시로 지음, 오세웅 옮김 / 노란우산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아이랑 살아가면 신문을 읽지 않는다
 [어린이책 읽는 삶 1] 야다마 시로,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노란우산,2010)



 집에서 아이 아버지는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이 어머니도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 집은 종이신문을 받아보지 않거든요. 따로 인터넷을 누비며 누리신문을 읽지도 않습니다.

 집에 따로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습니다. 집에 따로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으니 방송을 볼 일도 없습니다. 때때로 인터넷으로 영화를 보기는 하지만, 누리방송이나 동영상을 보는 일이 없습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나거나 터지는지를 거의 모릅니다.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나 일어나는지를 거의 모릅니다. 나라밖에서 누가 누구를 죽이거나 죽는지를 거의 모릅니다.

 한창 무언가를 많이 배워야 한다고 여기면서 살짝 대학교에 발을 담가 다섯 학기를 다니던 때를 떠올립니다. 다섯 학기를 다니고 그만둔 대학교에서 배움삯은 내 아버지가 돈을 빌어 마련해 주었고, 대학교 둘레에서 먹고지낼 잠자리는 신문사지국에 들어가 신문배달을 하면서 스스로 장만했습니다. 어쨌든 신문사지국은 밥과 잠을 얻는 곳이요, 일삯이 나오면 이 돈으로 책을 사읽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신문사지국에서 일하니 이곳에서 돌리는 몇 가지 신문은 거저로 읽을 뿐 아니라, 다른 지국하고 신문을 바꾸어 읽곤 합니다. 대학교 다섯 학기를 다니며 신문사지국에서 일하는 동안 날마다 열 가지 ‘중앙일간지’라 하는 ‘서울에서 나오는 큰 신문’을 읽었습니다.

 열 가지 큰 신문에다가 스포츠신문과 경제신문과 영어신문을 날마다 찬찬히 읽는 동안 시나브로 느낍니다. 열 가지 신문을 읽든 스무 가지 신문을 읽든, 신문에 실리는 이야기는 똑같습니다. 모두들 똑같은 일과 사람을 다루며, 똑같은 곳에서 취재를 해서 글을 씁니다. 이름은 중앙일간지이지만, 정작 왜 ‘한복판(중앙)’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앙일간지를 채우는 이야기는 95퍼센트 ‘서울에서 일어나는 서울 이야기’였거든요.

 열 가지 신문을 날마다 읽으면서, 열 가지 신문마다 글투가 다르고 사진결이 다르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을 놓고 조금씩 다른 글투와 사진결로 기사를 채운대서 무엇이 달라질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열 사람이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면서도 다 다르게 느끼거나 생각하잖아요. 구름을 바라보든 비를 느끼든, 열 사람은 열 가지 느낌입니다. 열 가지 신문이라면 열 가지 글투가 될밖에 없습니다. 굳이 ‘다른 글투를 느끼자’며 여러 신문을 볼 까닭이 없어요. 이 신문이 못 짚는 이야기를 저 신문이 짚는다든지, 저 신문이 안 다루는 이야기를 고 신문이 다루어야 바야흐로 여러 가지 신문을 보는 보람이 있습니다.


.. 한참 생각한 끝에 ‘벽신문’을 만들기로 했다. 벽신문은 커다란 종이에 기사를 적어서 어딘가에 붙이기만 하면 된다. 뉴스거리는 여기저기에 많기 때문에 기사를 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제 1호 신문을 만들었다 ..  (5쪽)


 신문이나 방송하고는 금을 그으면서 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이 책 또한 그닥 많이 읽지 못합니다. 오늘날 여느 사람하고 견주면 많이 읽는 셈일 테지만, 옆지기를 만나 함께 살아가며 책읽기가 줄고, 아이 하나를 낳으며 책읽기는 훨씬 줄며, 아이 둘이 되니 책읽기는 더더욱 줍니다.

 집일을 도맡지만, 집일을 제대로 도맡는다 말하지 못합니다. 옆지기가 잔소리를 제대로 안 해서 그렇지, 옆지기가 ‘집일이 이게 무어냐?’ 하고 따지면 하나부터 열까지 할 말이 없습니다. 날마다 할 집일을 날마다 옳게 건사하지 못하니, 집일을 도맡느라 하루 열 시간을 넉넉히 쓰더라도 집꼴이 그닥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책을 읽는다든지 신문을 들춘다든지 방송을 뒤적일 겨를이 없어요. 생각해 보면, 집일로 바쁘니 이것저것 챙길 수 없습니다.

 이레째 퍼붓던 비가 하루 그친 다음 다시 비가 퍼붓는가 싶더니, 밤에만 조금 흩뿌리고 날이 살며시 갭니다. 언제 다시 퍼부을는지는 모르지만, 구름이 살며시 걷히면서 햇살이 드리웁니다. 멧자락에서는 멧새 소리가 예쁘게 들리고, 웃마을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당에 나가면 도랑에서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빗소리에 잠겨 숨죽이던 소리들이 모조리 깨어납니다.

 갓난쟁이를 안고 마을길을 걷거나 멧길을 거닐 때에 물소리가 콰르르 조르르 들리면, 이 소리를 듣고 갓난쟁이가 참 잘 잡니다.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눕히면 응애 하면서 곧바로 깹니다. 물소리는 크든 작든 아이를 곱게 재웁니다. 이와 달리, 자동차 소리는 크든 작든 아이를 놀래킵니다. 아이 곁에서 하루 스물네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가 무엇하고 살가이 사귀도록 해야 좋을까를 몸으로 느낍니다. 아이하고 살아갈 어른으로서 내 하루를 어떻게 다스려야 아름다울까를 마음으로 깊이 되새깁니다.


.. 어떤 사람의 창피스러운 이야기를 신문에 쓰면 안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아예 신문을 만들 수 없는 건 아닐까? … 나는 가짜 신문 제 1호를 붙였다. ‘이제 두고보라지. 모두들 깜짝 놀랄 거야!’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그런데 어째 이상하다. 가짜 신문이라고 분명히 써 놨는데도 사람들은 진짜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 “아예 냉장고를 넣어 두면 편리할 텐데…….”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배 안에 먹거리를 넣어 가지고 다닌다는 게…….” 아무리 장난 삼아 하는 이야기라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뿐이었다  ..  (19, 24, 45쪽)


 어린이책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노란우산,2010)를 읽습니다. 앙증맞은 그림에 앙증맞은 글이 어우러진 어여쁜 이야기책입니다. 일본에서는 1985년에 나왔고, 한국에서는 2010년에 옮겨집니다. 나는 이 책을 헌책방에서 일찌감치 일본책으로 보았습니다. 그림이 퍽 귀여웁다고 느꼈고, ‘잘 그렸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줄거리는 어떠할는지 모르나, 일본 어린이책을 꽤 많이 옮기는 우리 흐름을 돌아본다면, 퍽 예전부터 옮길 만하지 않겠느냐 싶었으나, 이제서야 한국말로 나옵니다.

 이 이야기책을 쓴 야다마 시로 님은 책끝에 “‘진짜’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먼저 소문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좋아요(81쪽).” 하는 말을 붙입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알자면, 몸소 알아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 밑줄을 그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 또한 내가 몸소 알아보지 않고서야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직한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믿기도 하지만, 내가 받아들여 즐길 이야기라면, 내 몸으로 겪어야 내 입으로 말할 수 있고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어요.

 몸소 아기를 안아야 아기 느낌을 압니다. 아기를 달래고 아이한테 노래를 불러 주어야 아이하고 어우러지는 나날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손수 밥을 차리고 손수 밥을 치우며, 손수 빨래를 하고 손수 빨래를 걷어 개야, 비로소 집일이 어떠한가를 깨닫습니다. 걸레를 손수 빨고, 빗자루를 손수 들어야, 집을 돌보는 나날을 알아차립니다.

 입에 넣고 냠냠짭짭 씹어야 밥맛을 압니다. 눈으로 보아서는 밥맛을 모릅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알자면 ‘신문을 읽기’만 해서는 모를 뿐 아니라 ‘내 눈으로 지켜본다’고 해서 알 수 있지 않아요. 더 깊이 스며들어야 해요. ‘삶으로 받아들이도록 몸으로 부대낄’ 때에 천천히 알 수 있습니다.


.. ‘내가 만든 재미있고 멋진 신문을 붙여 주면 이 알림판도 좋아하겠지?’ ..  (6쪽)


 두 아이하고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두 아이 어버이로서 아이하고 보내는 오늘 하루가 즐겁기에, ‘아이를 키우는 보람과 재미와 힘겨움과 고단함’을 날마다 새롭게 적바림하는 신문이 없다면, 굳이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더라도, 나 스스로 내 아이하고 살아가며 날마다 새롭게 느끼는 이야기가 더욱 생생하며 어여쁩니다.

 아침에 깬 첫째 아이가 새소리를 듣는 멧자락 작은 집이 좋습니다. 첫째 아이가 깨며 종알종알 떠드는 소리에 깬 둘째 아이가 끄응끄응 하면서 옹알옹알 꽁꽁거리며 눈알을 굴리는 조그마한 보금자리가 좋습니다. 오늘은 비가 없이 아주 후덥지근할 듯합니다. 아침부터 집안 온도가 27도. 이제 쌀을 씻어 불린 다음 둘째 갓난쟁이를 씻기고 집안을 첫째랑 함께 치워야겠습니다. 첫째 아이는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에 나오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돼지’ 그림을 보며 무척 좋아합니다. 네 살 아이는 앞으로 네 살쯤 더 나이를 먹어 글자를 깨치면, 스스로 이 책을 넘기면서 신나게 읽겠지요. (4344.6.28.물.ㅎㄲㅅㄱ)


― 나는야 마법의 신문기자 (야다마 시로 글·그림,오세웅 옮김,노란우산 펴냄,2010.4.30./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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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선엽


 백선엽이라는 분이 간도특설대에 몸담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에서는 참모총장을 했다고 한다. 나는 1970년대에 태어났으니,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스스로 겪지 못해 모른다. 오직 책에 적힌 이야기로만 들을 뿐이다.

 1970년대에 태어나서 1980∼90년대를 인천에서 살아낸 사람으로서 백선엽이라는 분을 떠올린다면, 인천 제물포역 뒤쪽 도화동에 널찍하게 자리한 ‘선인재단’이다. 선인재단은 백선엽 씨와 백인엽 씨 이름을 따서 붙인 곳으로,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우글우글 모였다.

 선인재단은 사립학교인데, 이 사립학교는 열 해 즈음이던가, 인천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 싸우고 싸운 끝에 백선엽 씨와 백인엽 씨한테서 재단을 빼앗아 시립으로 바꾸었다. 왜냐하면, 선인재단이라는 이름으로 학교가 선 뒤로 끝없는 부정부패와 비리와 폭력으로 얼룩졌으니까.

 제물포역 둘레에 갈 때면 우람하게 버틴 선인재단이 드리우는 먹구름 때문에 서슬퍼런 기운에 싫었다. 버스가 선인재단 둘레를 거쳐 갈 때에는 이쪽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몇 만을 웃돌 학생들이 선인재단 수많은 학교에 우글거리도록 하는 일이 참말로 교육이 될는지 알쏭달쏭했다. 뺑뺑이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야 할 때에, 부디 선인재단에 깃든 학교에 안 걸리도록 비손을 했다. 여중과 여고는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남중과 남고는 선인재단 쪽 학교로 가면 교사와 선배가 어마어마하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소리를 일찍부터 들었으니까.

 학교에서 교사는 왜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교과서를 펼칠까. 학교에서 선배들은 왜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쉽게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걸어다닐까. 학교에서 또래 동무들은 왜 서로 무리를 지어 패싸움을 벌이거나 돌림뱅이 짓을 벌이려 할까. 학교라는 곳에서 조용하면서 착하게 배우고 어깨동무할 수는 없을까.

 한국전쟁에서 훈장을 받을 만큼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면, 아무래도 ‘전쟁 영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으리라. 그런데, 전쟁 영웅이란 무엇이지? 사람을 더 많이 죽인 사람이 영웅 아닌가? 적군이라는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더 쉽게 죽여야 영웅 아닌가?

 군대에서 장교로 있는 사람은 명령을 내리고 지시를 한다. 군화발로 걷어차며 어서 총알받이로 달려가라고 뒤에서 내몬다. 적군을 수없이 쓰러뜨리려고 아군이라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이 쓰러져야 했을까. 적군을 죽이는 숫자만큼 아군이라는 사람도 죽어야 하지 않았을까. 두 나라 총알받이 군인, 곧 여느 사람들은 왜 싸움터로 나와서 낯도 이름도 모르는 서로를 나쁜 놈이라 여기면서 죽이고 죽어야 할까.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서 흙을 일구며 착하게 살아가면 될 이웃이 아닌가.

 내 어릴 적 인천에서 지내던 나날을 곰곰이 떠올린다. 교사는 몇 해에 한 번씩 학교를 바꾼다. 나는 고맙게도 선인재단 쪽 학교에 안 걸리며 여섯 해를 보냈으나, 내가 다니던 학교에도 아주 마땅히 선인재단에서 일하던 교사가 들어오기 마련이다. 선인재단에서 일하던 교사가 들어온다고 하면 우리들 사이에서 수근수근 이야기가 퍼진다. “야, 선인재단 내기는 되게 무섭다며?” “선인재단에서는 엄청나게 줘팬다는데, 거기에서 온 선생은 어떨까?” “그 선생이 우리 학년을 안 맡으면 좋겠는데.”

 선인재단이 사립재벌에서 시립으로 바뀐 지 어느덧 열 해 즈음 되는 듯하지만, 나는 아직도 선인재단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또 선인재단 이름 넉 자를 이루는 백선엽 씨 이름을 들을 때마다, 시커먼 소름이 돋는다. 부디, 백선엽 씨가 스스로 영웅이라는 이름표를 내려놓고, 백선엽 씨가 거느리는 널따란 산과 들에서 조용하면서 호젓하게 흙을 일구면서 무랑 당근이랑 배추랑 오이랑 가지랑 고추랑 감자랑 고구마를 길러서 예쁘게 살아가시기를 빈다. (4344.6.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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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61] 막대기빵

 아이를 태운 자전거를 몰아 읍내 장마당으로 가는 길에 옆지기한테서 전화가 걸려옵니다. 옆지기는 사올 수 있으면 ‘막대기빵’도 사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장마당에 나오는 김이니, 사올 수 있으면이 아니라 이곳저곳 뒤져서 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네, 막대기빵이요?” 하고 묻습니다. 옆지기는 “막대기빵. 바게트빵.” 하고 덧붙입니다. “아, 바게트빵.” 손전화를 끊고 앞가방 주머니에 넣으며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니, 옆지기는 곧잘 ‘막대기빵’이라 이야기했습니다. 막대기처럼 생겼기에 막대기빵이라 할 수 있겠구나 싶은데, 집에 와서 더 얘기를 들으니, 프랑스사람이 구워서 먹는 ‘바게트빵(baguette  pain)’에서 바게트는 ‘막대기’를 뜻한다더군요. 그러니, 프랑스사람으로서는 삶말로 ‘막대기빵’이라 이름붙인 셈이고, 한국에 있는 빵집 이름을 돌아보자면 ‘파리 막대기’예요. 다음 장날에 다시금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읍내에 나가 막대기빵을 둘 사옵니다. 아이 손을 잡고 빵집에 들어서며 막대기빵을 한손에 하나씩 집고는 썰어 달라 이야기합니다. 아이가 말끄러미 올려다보며 “이게 뭐야?” 하고 묻습니다. “응, 막대기처럼 생긴 이 녀석은 막대기빵이야.” “응, 막대기빵. 막대기빵 맛있어?” “응, 맛있어.” (4344.6.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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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79] 마당, 게시판, 센터, 코너

 어느덧 ‘열린마당’ 같은 이름이 퍽 널리 쓰입니다. 이와 함께 ‘열린게시판’ 같은 이름도 쓰이는데, 그냥 영어로 ‘오픈캐스트’를 쓰기도 합니다. 영어 쓰기 좋아하는 버릇은 동사무소를 ‘동주민센터’처럼 바꾸고, 파출소를 ‘치안센터’로 바꾸는 데에서 엿보는데, 닭집을 일컬어 ‘치킨센터’라 하는 데도 있습니다. 이리하여 부정부패처럼 지저분한 일을 밝히자 하는 자리를 가리키는 이름을 ‘클린신고센터’처럼 붙입니다. ‘열린신고마당’이라든지 ‘맑은신고마당’처럼 이름을 붙이지 못해요. 한편, ‘센터’ 못지않게 ‘코너’라는 영어를 곳곳에 씁니다. 방송에서도 무슨 코너 요 코너라 할 뿐입니다. ‘생활공감정책코너’란 무엇을 가리킬까요. 이곳은 ‘게시판’이라 해도 될 텐데요. 게시판을 가르는 큰 이름이 ‘열린마당’이니까 ‘생활공감정책마당’이라 해도 됩니다. (4344.6.2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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