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글쓰기 삶쓰기 ㉢ 삶짓기랑 삶쓰기


 말사랑벗님들한테만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이렇게 한 글자 두 글자 적바림하는 글은 글쓰기로 이루는 열매일 텐데, 저는 글쓰기란 삶쓰기라고 생각합니다. 내 삶을 쓰는 일이 곧 글쓰기라고 여겨요.

 두 아이와 짝꿍 한 사람을 건사하는 아저씨가 하는 일은 글쓰기랑 사진찍기라고 했어요. 저는 글쓰기를 할 때에 내 삶을 쓰고, 사진찍기를 할 때에 내 삶을 찍습니다. 그래서, ‘글쓰기 = 삶쓰기’가 되고, ‘사진찍기 = 삶찍기’가 돼요. 말끝을 살며시 바꾸어 보면, ‘글읽기 = 삶읽기’가 되며, ‘사진읽기 = 삶읽기’가 됩니다. 사진은 담는다고 하니까, ‘사진담기 = 삶담기’가 되기도 해요. 글짓기를 헤아린다면 ‘글짓기 = 삶짓기’가 될 테지요.

 삶은 억지로 지을 수 없어요. 그러나 삶은 아름다이 지을 수 있어요. 농사를 지을 때에 조금 더 많이 거두거나 일손을 덜 생각으로 풀약과 항생제를 칠 수 있습니다. 요즈막에는 농사짓기 아닌 농약짓기인 곳이 많아요. 이때에는 억지스러운 짓기가 되니 ‘옛날 글짓기’마냥 하나도 안 아름다운 모습이 되겠지요. 사람들이 뭍고기를 즐겨먹으면서 집짐승을 커다란 우리에 잔뜩 집어넣은 채 항생제랑 ‘짐승 주검에서 거둔 내장’을 섞은 사료를 주며 싼값으로 더 빨리 살을 찌우려 하다 보니 조류독감이니 구제역이니 하는 일이 생깁니다. 모두 억지스레 돈만 빨리 많이 자꾸 벌려 하면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입니다. 글 한 줄을 쓸 때에도 이 글 한 줄로 돈을 벌거나 이름을 드날리거나 동무들한테 사랑받으려 생각한다면, 몹시 부질없습니다. 글이 글다울 수 없어요. 글이 글다우려면 내 글에는 내 삶을 담으면서 내 동무랑 이웃하고 사랑스럽고 살갑게 어깨동무하는 매무새가 되어야 해요. 글재주로 억지로 지을 수 없는 글이고, 글솜씨를 어설피 뽐낼 수 없는 글이에요.

 말사랑벗이랑 저랑 서로서로 아름다운 벗이나 이웃이나 살붙이라고 여긴다면, 제가 농사꾼이고 말사랑벗이 제 아이라 할 때에, 저는 우리 살붙이가 먹을 곡식을 일구면서 풀약이나 항생제를 쓸 수 없어요. 내 아이가 먹을 곡식뿐 아니라 내 이웃과 동무가 먹을 곡식에도 풀약이나 항생제는 못 씁니다. 어떻게 쓰겠어요. 참다운 농사짓기가 되도록 마음을 쏟아야지요. 다 함께 어여쁠 삶짓기를 하고 싶은 마음결로 농사짓기를 하고, 이러한 마음결 고스란히 글짓기를 하고픕니다. 이 글짓기를 이어 사랑짓기나 마음짓기나 생각짓기로 가지를 뻗고파요.

 공을 잘 차서 영국이나 스페인이나 독일에까지 날아가 돈도 잘 벌고 이름도 크게 얻는 선수들 이야기는 참 멋있구나 싶습니다. 말사랑벗 가운데에는 공차기를 좋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신나게 나누기도 할 텐데, 이런 이야기를 글로 담아도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못지않게 아무개만큼 돈을 못 벌고 이름 하나 알려지지 않았으나, 바로 내 이야기를 조곤조곤 글로 담아 보아도 재미있어요. 동네에서 공차기 한 이야기를 쓰면 재미있고, 동네에서 공차기를 하며 헉헉거리다가 0:10으로 졌다는 얘기를 쓰면 즐겁습니다. 내가 아는 내 삶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갈무리해서 글로 써 봅니다. 내가 아는 형이나 오빠나 동생 이야기를 갈무리하며 글로 담아 봅니다. 우리 어머니하고 아버지 이야기를, 우리 할머니하고 할아버지 이야기를 갈무리하면서 글로 엮어 보아도 좋아요. 나를 비롯하여 내 둘레 살가운 사람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모두들 어떤 삶을 어떤 매무새와 꿈과 손길로 일구는가를 곰곰이 들여다보며 글로 담아 보셔요. 좋은 책이란 내 책이고, 내 책이란 내 삶이에요. 내 삶이 내 책이 되고, 내 책이 좋은 책이 돼요.

 자전거를 타고 온누리를 한 바퀴 돌거나 아르헨티나 끝자락부터 캐나다 끝자락까지 달린다면 매우 멋지다 할 만하겠지요. 체 게바라라는 사람은 오토바이를 타고 중남미를 달렸다고 했어요. 말사랑벗 가운데에는 일찍부터 오토바이 타기를 좋아할 동무가 있을는지 모르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이웃나라 일본을 훗가이도부터 류큐 섬까지 달려 볼 수 있습니다. 인천 앞바다부터 간성 앞바다까지 바닷가를 따라 죽 달려 볼 수 있어요. 자전거를 타고 강화섬부터 구비구비 돌아 제주섬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자전거 유럽마실도 즐거울 테지만, 자전거 국내마실도 즐거워요. 시골길을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마실도 즐겁고, 골목길을 느긋이 다니는 자전거마실도 즐겁답니다. 저는 충청북도 충주시 끝자락 멧골마을에서 살아가면서 서울로 책 사러 다닐 때에 자전거에 수레를 달아 끌고 다니곤 했어요. 요즈음처럼 짝꿍이랑 아이가 있던 때는 아니고, 혼자서 살 때 일이에요. 150킬로미터 길을 한 주에 한 차례씩 한 해 동안 자전거를 타고 오가면서 책을 사서 읽었답니다. 이렇게 다니는 동안 길에서 쉬엄쉬엄 다리를 풀어 줄 때에 수첩에 느낌을 몇 글자씩 끄적였고, 이렇게 끄적인 이야기를 그러모아 《자전거와 함께 살기》라는 책을 내놓기도 했어요. 남다르거나 대단한 이야기는 하나도 아니랍니다. 그저, 주마다 늘 오가는 자전거길에서 날마다 다르게 느낀 이야기를 그때그때 적바림하면서 저절로 책 하나가 태어났어요.

 말사랑벗이라면, 날마다 학교를 오가면서 날마다 마주하는 사람과 날씨와 길 들을 이야기 하나로 조금씩 꾸리면서, 이 이야기가 한 해치이든 두 해치이든 세 해치나 네 해치이든 모일 때에 시나브로 책 하나가 될 수 있어요. 마땅한 노릇인데, 이때에 억지로 꾸며서 쓰는 글이라면 책이 되지 않아요. 수수하거나 투박한 내 삶을 그대로 글 하나로 담을 때에 책이 된답니다.

 내가 좋다고 느끼면 내 삶은 좋은 삶이에요. 내가 나쁘다고 여기면 내 삶은 나쁜 삶이에요. 내가 즐겁다고 느끼면 내 삶은 즐거운 삶이고, 내가 슬프다고 느끼면 내 삶은 슬픈 삶이에요. 가난하다고 나쁜 삶이 아니고, 엄마 아빠한테 돈이 많다고 좋은 삶이 아니에요. 걸어서 학교를 다닌다고 슬픈 삶일 수 없고, 자가용으로 느긋하게 학교를 오갈 수 있어 기쁜 삶이 되지 않아요. 시험을 치러 1등이건 10등이건 꼴등이건 나 스스로 내 학교살이를 좋아하면 넉넉합니다. 키가 크건 작건, 몸매가 이러하건 저러하건, 나는 내 마음과 꿈을 아름다이 보듬으면 사랑스럽습니다. 착한 마음을 살가이 담은 편지가 애틋합니다. 글씨만 또박또박 예쁘장하게 썼대서 살갑게 주고받을 편지가 되지 않아요. 똑똑하다지만 마음이 차갑다면 사이좋은 동무가 되기 어려워요. 좀 어리숙해도 마음이 따스하다면 어깨동무하는 동무가 돼요. 글이란 내 사랑을 착하고 따숩게 담는 즐거운 삶 한 자락입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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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의 그림책 - 오늘의 눈으로 읽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최석조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김홍도 그림법’을 몰라도 즐겁다
 [책읽기 삶읽기 31] 최석조, 《단원의 그림책》


 제주섬 아래쪽에 조그마한 섬 마라도가 있습니다. 이 마라도로 찾아와 사진을 찍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마라도를 사진감으로 삼아 내놓는 사진책이 더러 나오기도 하는데, 돋보인다 하는 사진책으로는 배병우 님이 담은 《마라도》(안그라픽스,1985)하고 김영갑 님이 담은 《마라도》(눈빛,1995)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담은 《마라도》는 사뭇 달라, 어느 한 가지만 본 사람이라면 마라도라는 섬을 어느 한 가지 빛깔로 한결 짙게 바라보거나 생각할 만합니다. 두 사람은 사뭇 다른 ‘사진 기법’으로 사진을 찍었다 할 만한데, 곰곰이 헤아린다면 ‘사뭇 다른 사진 기법’이라기보다는 ‘사뭇 다른 삶’으로 마라도하고 만나거나 사귀면서 마라도에서 지냈다고 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이 사진은 이러한 기법으로 이러한 느낌이 우러나도록 찍었다느니, 저 사진은 저러한 솜씨로 저러한 느낌이 드러나도록 담았느니 하는 말은 부질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릅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같은 ‘사진 기법’을 쓸 수 없습니다. 유행이나 사진 흐름에 따라 어느 기법이 더 사랑받기도 하지만, 유행으로 퍼지거나 사진 흐름으로 자리잡는 까닭이란, 이러한 기법이 더 쓸 만하거나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행으로 퍼지든 사진 기법으로 자리잡든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제법 있기 마련이에요.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내 삶에 걸맞게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릴 테니까요.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며 찍을 사진이 아니요, 다른 사람한테 잘 보이려 그릴 그림이 아닙니다. 나부터 나 스스로 흐뭇할 이야기를 담는 사진이며 그림입니다. 기법이든 수법이든 하나도 소담스럽지 않습니다. 소담스레 바라보거나 보배로이 여길 대목은 내가 즐거이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을 즐겼느냐입니다.


.. 김홍도가 〈무동〉의 저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눈길은, 결국 ‘설움의 공유’에서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 음악 향유자의 대부분은 신분이 높았을 터였다. 듣는 쪽에 맞추어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천한 광대들이 갓 쓰고 도포 입은 건 자기들이 좋아서 한 일이 아니었다 ..  (30쪽)


 여느 제도권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갖가지 기법과 수법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실기로 가르치는 기법과 수법보다 이론으로 가르치는 기법과 수법이기 일쑤입니다. 더욱이, 이론으로 가르치는 기법과 수법조차 시험문제 틀에서 맴돕니다.

 학교에서 시나 다른 문학을 배울 때에 은유법이니 활유법이니 비유법이니 하는 기법과 수법 이야기만 골이 아프도록 배웠습니다. 글을 읽으며 이 글을 쓴 사람 마음과 삶과 느낌이 어떠했구나 하고 느끼도록 배우지 못했습니다. 글을 즐기는 매무새란 한 번도 배울 수 없었고, 배우도록 이끌어 준 분 또한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글 즐기기’나 ‘그림 즐기기’나 ‘사진 즐기기’는 따로 학교에서 배울 수 없고, 어느 스승이라 해서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노래 즐기기’라든지 ‘춤 즐기기’라든지 ‘영화 즐기기’라든지 매한가지입니다.

 영화평론 하는 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운다고 내가 즐거이 볼 영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림을 풀이해서 알리는 큐레이터 같은 이들이 입에 침이 닳도록 첫손꼽는다 해서 내가 눈을 빛내며 우러를 작품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내 가슴에 사무치도록 스며드는 영화를 보고 그림을 볼 뿐입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차분히 스며들다가는 용솟음치는 사진과 글을 마주할 뿐입니다.

 대형사진기나 중형사진기나 파노라마사진기를 썼다 해서 더 돋보일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슬라이드필름이나 흑백필름을 썼대서 더 눈여겨볼 사진이 되지 않아요. 천만 원짜리 사진기로 담은 작품이 더 빼어날는지요. 만 원짜리 1회용 사진기로 담은 사진은 작품이란 소리를 붙일 수조차 없을는지요.

 값싼 붓으로 그리면 못난 그림이 되나요. 비싼 붓과 종이를 쓰면 잘난 그림이 되나요. 스승이 이름난 분이면 이름난 그림쟁이로 되나요. 스승 없이 혼자 그림을 배워 나갔으면 어설픈 그림쟁이가 되려나요.


.. 모든 작품에서 숭늉처럼 구수한 여유가 끓는다 ..  (135쪽)


 최석조 님이 쓴 《단원의 그림책》을 읽습니다. 단원 김홍도 님이 일군 그림을 찬찬히 살피면서, 그림마다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가를 곰곰이 풀이하여 들려주는 책입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그림 풀이책(해설서)’은 어렵거나 딱딱한 말투에다가 갖은 외국말을 섞어 그들먹거렸다면, 《단원의 그림책》은 오늘날 여느 사람들 여느 말씨로 살가우면서 홀가분하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림을 굳이 어려운 말로 딱딱하게 읽을 까닭이 없으며, 그림이란 누구나 제 눈썰미와 깜냥껏 마음 가득히 즐기면 좋다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단원 김홍도 님이 무슨무슨 기법이나 수법을 썼다는 대목을 훤히 꿰뚠다 해서 단원 김홍도 그림을 더 잘 헤아렸거나 즐겼다 할 수 없습니다. 선운사 지붕이나 대문이 어떠한 모습 어떠한 값어치 어떠한 시대유물임을 안다 해서 선운사 마실을 한결 즐거이 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골목길을 거닐면서 이 골목길 ‘정취’가 ‘몇 십년대 풍물’이라 읊으며 사진을 찍어야 골목마실이 한껏 빛난다 할 수 없습니다. 소나무를 바라보며 소나무 넋이 어쩌고 저쩌고 하고 떠들어야 소나무가 아름답다 여길 수 있지 않습니다.

 살아온 목숨을 꾸밈없이 껴안을 줄 아는 내 고운 목숨이면 넉넉합니다.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벗이며 이웃이라 느낄 줄 아는 따순 가슴이면 넉넉합니다. 서로서로 사랑스러운 숨결로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애틋하게 어우러지는 삶임을 깨닫는 너른 품이면 넉넉합니다.


.. ‘먹는’ 그림에서 아이들은 꼭 엄마 옆에 붙어 있다 ..  (162쪽)


 단원 김홍도 님 그림이든 혜원 신윤복 님 그림이든, 또 박수근 님이나 이중섭 님 그림이나 매한가지입니다. 당신들 그림이 어느 시대 어느 기법으로 빚은 작품이라는 풀이말은 덧없습니다. 당신들 그림이란 당신들 어떠한 삶이 소롯이 묻어난 이야기임을 읽을 수 있으면 됩니다. 당신들 그림에 당신들 삶을 어떻게 담아 우리들이 오늘날 어떠한 넋과 얼로 껴안으면서 흐뭇한가 하고 즐길 수 있으면 됩니다.

 다만, 《단원의 그림책》도 ‘김홍도 님 삶’보다는 ‘김홍도 님이 선보인 그림 기법’에 조금 더 눈길을 맞춥니다. ‘김홍도 님 그림 기법’ 이야기를 여느 사람들 말씨로 재미나게 풀어내는 일도 좋다 할 수 있으나, 이렇게 풀어낸다 하더라도 딱딱하거나 메마른 말투로 풀어낸 ‘그림 풀이책’하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읽고 나누어야지, 손재주를 기리거나 우러를 수 없어요. 자동차를 몰더라도 자동차를 모는 사람 매무새를 읽어야지, 자동차 기종이 무어요 ‘모퉁이 돌기(코너링)’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하느냐를 다룰 까닭이 없습니다. 단원 김홍도 님이 지난날 ‘어떤 붓으로 그림을 그렸느냐’라든지 ‘어느 종이에 그림을 그렸느냐’를 샅샅히 살피거나 훑는다고 단원 김홍도 그림을 더 잘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림을 그린 사람 삶과 그림에 그려진 사람 삶을 살가이 껴안으면서, 내가 꾸리는 삶을 톺아보고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가 복닥이는 삶을 그러안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4.1.11.불.ㅎㄲㅅㄱ)


― 단원의 그림책 (최석조 글,아트북스 펴냄,2008.5.13./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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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3. 

집 물이 얼어 웃집까지 가서 빨래하고 물을 길어오는 아빠한테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하는 아이. 아빠는 아이 마음을 얼마나 잘 헤아려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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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1-11 23:13   좋아요 0 | URL
ㅎㅎ 따님이 정말 귀여워 보이네요.근데 사시는 곳은 도회지보다 더 추운가요? 아이가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나오는것을 보니 그런것 같아서요.

파란놀 2011-01-12 06:34   좋아요 0 | URL
산골이니 조금 더 춥기도 하지만, 이불 뒤집어쓰고 놀기를 좋아한답니다~
 


 냇물과 글쓰기


 공장 종이기저귀가 아이한테 얼마나 나쁜 줄을 알기 때문에, 공장에서 만드는 종이기저귀를 아이한테 대지 못합니다. 공장 가루젖이 아이한테 얼마나 모진 줄을 아는 까닭에, 공장에서 만드는 가루젖을 아이한테 먹이지 못합니다. 공장에서는 더 많은 물건을 팔아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 하는데,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섣불리 쓰기 어렵습니다. 사람들 눈길을 더 사로잡으려 하는 신문이든 방송이든 책이든, 더 큰 힘과 더 많은 돈을 바라는 줄 번히 안다면, 이러한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낮오줌은 가리지만 아직 밤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아이한테는 기저귀를 대야 합니다. 밤오줌을 걱정하며 천기저귀를 댑니다. 아이한테 천기저귀를 대는 아빠는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아이가 오줌을 누어 칭얼거린다든지, 아이가 오줌을 누어 기저귀가 젖은 줄을 모르며 곯아떨어졌다든지, 기저귀를 갈아야 하니까 틈틈이 잠에서 깨야 합니다. 아이가 밤새 용하게 오줌을 안 누었더라도 문득문득 눈을 떠서 아이 천기저귀를 만져 봅니다.

 종이기저귀는 아이 몸에 나쁩니다. 종이기저귀는 우리 삶터에도 나쁩니다. 종이기저귀를 만들고, 종이기저귀를 가게에 들이려고 짐차에 실어 나르며, 종이기저귀를 판다며 가게에서 불을 밝히는데다가, 종이기저귀를 쓴 사람들이 쓰레기봉투에 담아 내놓고, 종이기저귀 담긴 쓰레기뭉치를 쓰레기터에 갖다 버려 파묻거나 태울 때, 우리 터전은 더없이 더러워집니다.

 사람들이 종이기저귀를 더 쓸수록 냇물은 냇물다움을 잃습니다. 사람들이 종이기저귀를 손사래치거나 종이기저귀가 사라지도록 애쓸 때에 비로소 냇물 빛깔은 조금이나마 살아납니다. 천기저귀 하나 쓴다 해서 냇물이 흐르도록 하지는 못합니다. 천기저귀 하나를 쓰는 매무새를 기를 때부터 바야흐로 냇물이 흐르도록 하는 삶결을 찾거나 느낍니다. (4344.1.1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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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나누는 기쁨 ㉦ 사진문화와 사진예술
 ― 좋은 삶에서 길어올리는 사진꽃



 사람들은 사진을 잘 찍고 싶어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얼굴이 예뻐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떠한 일이든 빨리빨리 해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학교를 나와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영어를 솜씨있게 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 결대로 살아갈 수 있으면 됩니다. 제 목숨을 보배롭게 여기면서 즐거이 살아가면 넉넉합니다. 저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면서 저마다 사랑하는 마을에서 저마다 사랑하는 보금자리를 알뜰살뜰 일굴 수 있으면 좋습니다. 누구나 웃음과 눈물이 어우러진 삶자락을 누리면서 어깨동무를 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이 나라에는 사진문화가 없습니다. 사진문화란 사진만 헤아리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진만 헤아리더라도 이 나라에는 사진 또한 없습니다. 더욱이 문화라 할 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삶이 있기에 문화라는 이름을 붙이고, 삶이 있을 때에 문화가 비로소 태어납니다.

 전통문화란 여느 자리에서 수수한 사람들이 오순도순 꾸린 삶입니다. 김치이든 된장이든 시래기이든 콩국수이든, 잘나거나 대단한 사람들이 잘난 재주나 대단한 재주로 자랑하던 모습이 아닙니다. 밥이건 집이건 옷이건 노래이건 춤이건, 하늘에서 똑 떨어지거나, 사람들 살림살이나 마을에서 동떨어진 채 퍼지는 문화나 예술이란 없습니다. 그저 여느 삶이고 그예 수수한 사람이 어디에서나 나눈 전통문화입니다.

 짚신, 소쿠리, 삽짝, 온돌, 이엉, 질그릇, 멧돌이란 전통문화이면서 생활문화라고도 하지만, 이런저런 이름이란 부질없이 ‘삶’ 한 가지입니다. 삶이었고 삶이며 삶으로 이어가기에 ‘전통’입니다. 따로 ‘전통’이라는 앞머리를 붙일 까닭이 없이 삶이요, 삶이기에 학자들은 전통이라든지 문화라든지 예술이라든지 이름을 거듭 붙입니다. 도자기를 굽든 그림을 그리든 장구를 치든 굿을 하든 무어를 하든 인간문화재나 예술이나 문화이기 앞서 노상 삶입니다. 언제나 삶인 가운데 더욱 알뜰히 즐긴 이야기입니다.

 사진문화가 있다 한다면 사진이 삶으로 녹아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진예술이 있다 한다면 사진이 삶으로 꽃피운다는 소리입니다.

 나랑 너랑 우리,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수수한 터전에서 조촐하게 어우러지면서 즐기는 삶인 사진일 때에 사진문화이면서 사진예술입니다. 이른바 ‘순수문화’나 ‘순수예술’이란 없습니다. ‘순수삶’부터 없기 때문입니다.

 ‘순수식사’란 없습니다. ‘순수육아’라든지 ‘순수살림’이라든지 ‘순수직장인’ 또한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해서 되는 삶이란 없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해서 되는 삶이란 기계와 같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해도 되는 삶이란 사람이 사람다이 꾸리는 삶이 아닙니다.

 집 바깥에서 돈만 벌어들이면 되는 아버지 노릇이나 어머니 구실이 아닙니다. 집 안쪽에서 식구들끼리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도란도란 생각과 꿈을 나누어야 비로소 어버이 노릇이요 딸아들 구실입니다. 밥하는 사람 따로 밥먹는 사람 따로일 때에는 집살림이 엉터리입니다. 함께 밥을 차리고 함께 밥상을 치우며 함께 마루에 둘러앉아야 합니다. 한 집안 식구가 다 같이 돌보는 아이입니다. 한 집안 식구가 모두 사랑하며 보살필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입니다.

 사람은 부속품이나 톱니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은 늘 사람입니다. 공장에서 어느 한 가지 일만 해도 된다거나, 회사에서 무슨 한 자리만 지키면 된달지라도, 사람은 사람입니다. 말을 하고 귀로 들으며 몸을 움직이는 가운데 따사롭거나 너그러운 마음결을 고이 건사하는 살아숨쉬는 목숨인 사람입니다. 누군가한테 아버지나 어머니요, 누군가한테 딸이나 아들인 고운 한 사람입니다.

 오늘 이 나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곱거나 착하거나 참다운 사람답게 대접받지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쁜 한 사람으로 사랑받기보다는, 졸업장이나 자격증이나 명함으로 다루어집니다. 경제개발을 이루어야 하는 톱니바퀴로 여겨집니다. 사람이 부속품처럼 나뒹구는 이 나라에서는 사진이란 어쩔 수 없이 부속품 구실을 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홀가분하면서 아름다울 때에는 사진이란 한결같이 홀가분하면서 아름답습니다. 돈벌 생각만 하거나 돈벌 일만 하는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듯, 사진문화만 생각하거나 사진예술만 살필 때에는 문화도 예술도 못 될 뿐더러 사진부터 되지 않습니다. 사진찍기만 한대서 사진이 되지 않을 뿐더러 사진문화가 되지 못하고, 사진읽기(비평)만 한대서 사진이야기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진예술이 될 수 없습니다.

 집살림 꾸리는 돈은 돈대로 벌면서 집식구랑 살가이 어울리는 가운데 내 삶 그대로 사진을 하면 됩니다. 먹고살기 팍팍해서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는 젖혀 놓은 채 돈벌이만 한다면, ‘사진을 찍어서 돈벌이를 한다’고는 하더라도 ‘돈벌이를 할 뿐’이지 ‘사진을 찍는다’고 말할 수 없어요. 오늘날 신문·잡지사 사진기자가 수두룩하게 많기는 많으나, 돈벌이를 하는 사진기자만 있지 사진을 하는 사진기자는 몹시 드뭅니다. 스튜디오이든 사진관을 차린 이들 또한 돈벌이로 사진기를 매만지지, 삶을 헤아리며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매우 적어요.

 내 아이를 사랑하며 즐거이 돌보는 가운데 담는 사진 한 장이랑, 사진관에 찾아가서 예쁘장한 옷을 입히고 예쁘장하게 웃으라 하면서 찍는 사진 한 장이랑, 서로 견줄 수 없습니다. 서로 견줄 만한 값이 아닙니다. 무언가 뜻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델을 앞에 세워 놓고 사진기를 드는 사진 한 장이랑, 스스로 알차거나 다부지거나 씩씩하거나 즐거이 삶을 일구는 사람을 살가이 사귀면서 스스럼없이 사진기를 쥐는 사진 한 장이랑, 둘을 나란히 놓을 수 없습니다. 둘은 나란히 놓을 높낮이가 안 됩니다.

 사진문화나 사진예술을 살피려 한다면, ‘좋은 사진문화’나 ‘아리따운 사진예술’이 꽃피우는 나라나 겨레가 어떠한 모습인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을 즐기는 한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에 따라, 이 사진쟁이 한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마을)에서 어떠한 보금자리를 일구며 삶을 즐기는가에 따라, 사진은 문화도 되고 예술도 됩니다. 좋은 삶에서 좋은 사진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진’만 따로 있지 않습니다. ‘좋은 문화’나 ‘좋은 예술’만 덩그러니 태어나거나 샘솟지 않습니다. 어느 한 가지 틀만 좋을 수 없습니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해야 좋은 삶이 아닙니다. 좋음이란 다 다름입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꽃을 피워 다 다른 열매를 맺고 다 다른 맛을 즐길 때에 좋음입니다. 호박꽃은 호박을 맺고 오이꽃은 오이를 맺으며 수세미꽃은 수세미를 맺습니다. 호박은 호박이어서 좋고 오이는 오이여서 좋으며 수세미는 수세미여서 좋습니다.

 잘 찍는 사진 한 장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잘 찍는 길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잘 찍자며 가르치거나 배울 학사과정이나 강의란 없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즐거우면서 좋은 사진을 당신 삶으로, 내 삶으로, 우리 삶으로 받아안으며 펼칩니다.

 잘 찍어 선보이는 사진이 없듯, 잘 찍어야 할 사진이 없습니다. 저는 제 아이랑 짝꿍을 굳이 잘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제 아이는 제 아이답게 찍으면 되고, 제 짝꿍은 제 짝꿍대로 찍으면 됩니다. 제가 살아가는 대로 제 아이를 바라보며 제 아이 삶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제가 일구는 살림살이대로 제 짝꿍을 마주하며 제 짝꿍 한삶을 사진으로 옮깁니다.

 내 됨됨이에 따라 내 삶이 달라지고, 달라지는 내 삶에 따라 사진 또한 달라집니다. 내가 먼저 고운 됨됨이가 되어 아름답게 살아가는 가운데 사진을 해야, 눈물을 흘릴 만큼 좋은 사진을 얻습니다. 나 스스로 착한 마음가짐으로 아리땁게 살아가는 가운데 사진을 즐겨야, 웃음꽃 흐드러질 만큼 기쁜 사진을 얻습니다.

 사진을 하는 내가 아니라, 참답고 착하며 곱게 살아가는 사람인 나로서 사진을 맞아들일 노릇입니다. 사진문화를 말하는 내가 아니요, 사진문화를 북돋우는 내가 아니라, 살붙이랑 이웃이랑 동무랑 따숩게 껴안을 줄 아는 예쁜 사람인 나로서 사진을 곰삭일 노릇입니다.

 저는 아이를 키우고 옆지기를 사랑하며 멧골자락 조그마한 집에서 시골 도서관을 꾸리며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습니다. 제가 하는 사진이라면 제 삶에 따라 하는 사진입니다. 제가 좋아하거나 바라보는 사진이라면 제 삶자리에서 바라보며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내가 대통령이라면’이나 ‘나한테 돈 10억이 들어온다면’처럼 덧없는 꿈을 꿀 일이란 없습니다. 나로서는 ‘딸아이 아빠로서’ 오늘 하루를 생각하고, ‘집살림 일구는 남편으로서’ 오늘 하루를 헤아리며, ‘시골마을 사람으로서’ 오늘 하루를 되뇝니다. ‘작가’라든지 ‘비평가’로 살필 사진이 아닙니다. 한 사람으로서 돌아보고, 사랑스러운 한 사람으로서 되돌아보며, 사랑받는 한 사람으로서 뒤돌아보는 삶인 가운데 사진입니다.

 이 나라에 내 삶을 내 삶대로 착하고 참다우며 곱게 즐기는 사람들이 조금 더 늘거나 조금 더 자리를 잡거나 조금 더 신나게 사진잔치를 마련하거나 사진책을 내놓을 때에, 아주 보드랍고 따사로이 사진문화가 꽃을 피고 사진예술이 무럭무럭 봄바람 꽃내음을 실어나릅니다. (4344.1.1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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