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닷 Photo닷 2014.8 - Vol.9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83



예쁘게 찍는 사진 한 장

― 사진잡지 《포토닷》 9호

 포토닷 펴냄, 2014.8.1.



  사진잡지 《포토닷》 9호를 읽습니다. 대구에 문을 연 ‘아트도서관’ 소식을 짤막하게 읽습니다. 몇 군데 신문에도 아트도서관 소식이 나왔는데, 한국에 사진과 얽힌 책을 느긋하게 볼 수 있는 데가 거의 없는 만큼, 이러한 소식은 짤막한 기사가 아닌 깊이 들여다보는 취재로 다루면 한결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호에서는 짤막하게 다루었지만, 다음 호에서는 아트도서관을 찬찬히 이야기하는 글과 사진을 다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잡지이기에 사진과 얽힌 여러 가지 소식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진상을 받은 이들 소식이 나오고, 사진전시회 이야기가 흐릅니다. 눈여겨볼 만한 작가들 이름과 작품을 보여줍니다. 아무래도 사진잡지이니 사진 이야기와 사진가 소식을 다룰 수 있어야겠지요. 그러면, 사진 이야기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사진가 소식은 무엇을 다루어야 ‘사진가 소식’이 될까요.


  “정경자(40)의 사진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느낌 있는 사진’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 꼭 집어서 말할 수 없는 말랑말랑한 감성 그리고 뭔지 모를 슬픔이 그녀의 사진 곳곳에 묻어 있다(김소윤/42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정경자 님 사진을 ‘느낌 있는 사진’이라 말하는데, 우리가 보는 모든 사진에는 ‘느낌이 있’습니다. 느낌이 없다면? 느낌을 못 받는다면? 이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진에는 빛이 있습니다. 빛을 느끼는 사진입니다. 그런데, 빛을 못 느끼는 사진이 있다면? 사진을 읽으면서 빛을 못 느낀다면? 이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사진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담는 사진이요, 이야기를 읽는 사진입니다. 사진에서 이야기를 느끼거나 읽을 수 없다면, 이때에도 사진이 아니라고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사진을 읽는 사람 가슴속에 느낌이나 빛이나 이야기가 없다면, 사진을 찍은 이가 아무리 느낌과 빛과 이야기를 담았더라도 제대로 드러나지 못할 수 있어요. 사진을 찍는 사람 못지않게 사진을 읽는 사람도 느낌과 빛과 이야기를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창작(찍기)과 비평(읽기)은 서로 나란히 느낌과 빛과 이야기로 어우러진 사랑입니다.


  “때로는 사진이 작가를 바라보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의 작품을 보며, 과연 ‘본다는 것’은 무엇일지 골똘해진다(최연하/58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진잡지이기에 언제나 ‘보기(바라보기)’를 생각합니다. 사진이란, ‘보고 느껴서 찍으며 이야기를 빚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 사진을 읽을 적에는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어떤 이야기로 빚으려고 사진을 찍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 사진을 읽을 때에는 저 사람이 어떤 꿈을 어떤 노래로 엮으려고 사진을 찍었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바라보고, 사진을 마주하면서 사람(찍은 사람과 찍힌 사람)을 마주합니다.


  “세피아 톤은 촛불에 그슬린 과테말라 성당의 벽면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마야인들이 나무껍질로 만든 종이가 시간이 지나면 세피아 톤과 비슷한 색상으로 변해 간다(루이스 곤잘레스 팔마/67쪽).”와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사진은 눈을 떠서 찍으며, 사진은 눈을 떠서 읽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진을 바라볼 적에 무지개빛, 까망하양, 이렇게 두 갈래를 살피는 한편, ‘다른 결’, 그러니까 ‘세피아 톤’이든 무엇이든 생각합니다.


  빛결에는 어떠한 숨결이 깃들까요. 세피아 톤을 마음에 담는 이녁은 어떠한 이녁 숨결을 사진 한 장에 살포시 담아서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까요. 사진을 찍을 때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지개빛을 쓰지는 않는가요. 사진을 찍으며 넓게 돌아보지 않고 까망하양을 쓰지는 않는가요.





  사진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무지개빛이 감돌면, 까망하양으로 사진을 찍어도 언제나 무지개빛이 살포시 드러나면서, 이 사진을 읽는 이들도 무지개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까망하양과 같은 기운이 서리면, 무지개빛으로 사진을 찍어도 늘 까망하양 기운이 그윽히 나타나면서, 이 사진을 읽는 이들도 까망하양을 느끼곤 합니다.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문제점을 알아보자면 첫째는 사진촬영을 위해 앵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국유림의 나무를 무단으로 잘라낸 사진작가 장국현에 관한 것이다(곽윤섭/73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알아보니, 장국현이라는 분이 ‘금강송’을 사진으로 찍는다면서, 가장 큰 금강송(대왕송) 둘레에서 자라는 다른 금강송(신하송), 이를테면 220년을 묵은 금강송까지 베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금강송은 네 그루에 6000만 원, 그러니까 한 그루에 1500만 원이라는 값을 한다는데, 금강송을 열한 그루를 베어낸 장국현이라는 분한테 법원은 500만 원 벌금을 내라고 했다고 해요. 그리고, 장국현이라는 분은 취재기자한테 “이제 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고 말했으며, 이분은 금강송을 찍은 사진을 한 장에 400∼500만 원에 팔았다고 합니다.


  쓸쓸한 이야기입니다. 쓸쓸하면서 슬픕니다. 장국현이라는 분은 어떤 사진을 찍고 싶어서 이처럼 몹쓸 짓을 했을까 싶은데, 이녁이 신문사나 방송사와 만나서 하는 말을 들으면 스스로 ‘잘못했다’고 느끼지는 않는구나 싶습니다. 어쩌다 ‘들통이 나서 법원에 갔고 벌금을 내는구나’ 하고 느끼지 싶습니다.




  이녁이 사진을 찍는 솜씨가 대단하거나 훌륭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찍는 넋이나 몸가짐이나 마음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지 싶습니다. 재주가 있다고 해서 남을 해코지해도 되지 않고, 솜씨가 있다고 해서 엉터리 짓을 해도 되지 않습니다. 보기에 그럴듯한 그림을 빚는 일이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이야기를 짓는 사진을 선보일 때에 사진찍기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자주 말한다. 사생활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잘 다져져야 그것을 사진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것 같다(장유진/77쪽).”와 같은 이야기를 함께 생각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 이야기’를 잘 할 노릇입니다. 나 스스로 나를 바라볼 적에 옳고 바르며 아름답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이웃과 마을과 지구별을 바라볼 적에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눈빛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눈길(바라보기)을 다스릴 때에 비로소 사진으로 삶을 풀어내리라 느낍니다.


  가만히 보면, “보자기 뒤집고 쓰고 찍는 게 무슨 예술이냐며 사진을 천대하고 예술로 인정 않는 세력과 투쟁해 온 40년의 시간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정작 내 사진을 찍을 시간이 없었어요. 95세에 처음 개인전을 여는 작가는 세계에서 제가 아마 유일할 거예요(이명동/103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아직 한국에서는 사진이 예술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라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사진을 사진으로 바라보지 못하던 한국 사회에서 삶을 꾸리고 사진을 찍은 터라, 나무 한 그루를 찍으려고 다른 나무를 수없이 몰래 베는 일이 되풀이될는지 모릅니다. 삶을 가다듬지 않고 사진만 찍을 때에는 삶도 사진도 제 빛을 못 찾을는지 모릅니다.


  사진은 예쁘게 찍을 노릇입니다. 빛을 예쁘게 담을 뿐 아니라, 마음을 예쁘게 가누면서 찍을 노릇입니다. 사진으로 찍을 이웃을 예쁘게 마주할 뿐 아니라, 사진을 찍는 내 삶을 예쁘게 돌볼 노릇입니다.





  “앵글도 좋고, 노출도 정황했다고 편집장이 타고난 사진가라고 말해 줘 얼마나 우쭐했었는지. 운이 좋았겠지만 말이다. 노을이 질 때 다시 찍으면 좋겠다고 해서 아침 첫차를 타고 다시 내려가 하루 종일 건물을 노려보고 있다가 노을이 질 무렵 소중한 한 컷을 담아서 올라왔다. 그 사진이 그 달의 잡지에 실렸다.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 프리랜스 사진가로 다시 ‘건축과 환경’의 사진을 찍으면서 잡지를 통해 내 사진의 색을 만들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김용관/114, 116쪽).”와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읽습니다. 김용관 님은 풋내기인 이녁한테 ‘좋은 말’만 들려줄 뿐 아니라, 풋내기가 찍은 사진을 잡지에 덜컥덜컥 실으면서 기운을 북돋운 선배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김용관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어 보면, 김용관 님 둘레에서 ‘이 사람이 어떤 일에든 바지런하면서 알뜰하더라’ 하고 느낀 뒤에 사진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사진을 배운 적이 없으나, 사람됨이 바르고 예쁘겠구나 싶어, 덥석 사진기를 맡긴 셈이라고 할까요. 사진을 찍는 솜씨나 재주는 앞으로 차근차근 키우면 되니, 무엇보다 ‘사진을 마주하는 넋’이 튼튼히 서도록 둘레에서 이끌었다고 할까요.


  아무래도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전쟁의 전란에서 개발독재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깊은 질곡, 어두운 이면에 왜 정작 사진을 찍은 사진가는 부재한가(진동선/122쪽)?” 하고 외칠 수밖에 없으리라 느낍니다. 온갖 아픔과 수렁과 굴레와 쳇바퀴가 그득그득 이어진 한국 사회입니다. 올곧게 한길을 걸어간 사진가를 찾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진가뿐 아닙니다.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쓴 사람 가운데, 대학교수를 하거나 초·중·고등학교 교사를 맡은 사람 가운데, 공무원이 되거나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 가운데, 어두운 나날을 슬기로운 빛을 밝히면서 걸어간 사람을 얼마쯤 손으로 꼽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아이들한테 거친 말을 하지 않으며, 아이들을 대학입시 노예로 몰아세우지 않은 여느 교사는 그야말로 드뭅니다. 그러나, 지난날에는 지난날대로 너무 벅차고 힘들었으니, 올곧게 한길을 걷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어요. 안타깝지만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 참모습입니다. 옛모습은 털고, 이제부터 새로운 넋이 되어 한길을 올곧게 걸어가면 됩니다. 옛사람이 얽매였던 수렁이나 굴레는 살며시 내려놓고, 오늘을 가꾸는 우리들이 새로운 빛을 가꾸면 됩니다.




  “화각과 화질과 해상도가 더 나은 사진을 얻으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진을 찍는 우리들은 왜 ‘더 나은 사진을 얻으려’고 해야 할까요. 우리들이 찍을 사진은 ‘더 나은 사진’이어야 할까요. 그래서 ‘세계 사진 역사’에도 이름을 걸쳐야 ‘사랑받는 사진가’가 될는지요. ‘매그넘 회원’이 되거나 ‘외국에서 전시회를 열’거나 ‘외국 사진잡지에 소개되’거나 ‘사진 한 장에 제법 비싸다 싶은 값을 받고 팔아’야, 어깨에 힘을 줄 만한 사진가가 될 만할는지요 …… ‘인기 사진가’라 손꼽을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그야말로 ‘인기 사진가’입니다. 다만, ‘인기’를 얻는 사진가일 뿐입니다. 인기를 얻는다고 해서 이분들 사진이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사랑스럽거나 따사롭거나 착하거나 참답지는 않습니다 …… 마음이 있는 사람은 사진기를 처음 쥔 날에도 사진빛을 느낍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사진기를 쉰 해 넘게 쥐었어도 사진빛을 느끼지 못합니다 …… 작가 대접을 받아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잘 찍고 못 찍고를 떠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최종규/151∼153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오늘 우리들이 이곳에서 아름다운 넋이 되어 삶을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가가 되려는 사진이 아니라, 작품으로 비싸게 팔려는 사진이 아니라, 내 마음을 살찌우고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웃는 사진을 찍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나저나, 사진잡지 《포토닷》 9호 첫머리에 실린 “아이들을 꼭 귀엽게 촬영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다 귀여운 것도 아니다. 부모에게조차 자신의 아이는 항상 귀엽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아이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아이들은 귀엽기만 하다는 ‘편견’에 반기를 든다. 그래서 그 사랑스럽고도 얄밉기도 한 아이들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담아 부모와 어른들은 ‘미운 7살’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고, 또 아이들은 그 표현에 부합하는 몫을 충실히 해내면서 성장해 간다(이철승/32쪽).”와 같은 이야기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합니다. 이야기가 어쩐지 얄궂습니다. 아이들을 꼭 귀엽게 찍을 까닭이 없다는데, 아이들을 귀엽게 안 찍을 까닭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귀여움’이란 바라보는 사람이 느끼는 마음입니다. 바라보는 사람이 귀엽게 느꼈으면 귀엽게 찍으면 됩니다. 바라보는 사람이 안 귀엽다고 느꼈으면 안 귀여운 그대로 찍으면 됩니다.


  이철승 님은 “모든 아이들이 다 귀여운 것도 아니다” 하고 말하는데, 모든 아이들이 왜 다 안 귀여울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귀엽지 않다면, 아이들 탓일까요? 아이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이들이 안 귀여울까요? 아이들을 착하고 참답게 사랑하지 않을 적에 아이들이 안 귀여운 모습으로 ‘끔찍한’ 모습이 되지 않나요?


  아이들을 어머니 아버지가 살뜰히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종일반으로 집어넣고, 집에서 아이들과 놀아 주지 않다가, 초등학교뿐 아니라 온갖 학원에 몰아넣고서는, 어느덧 대학입시 노예가 되도록 닦달하는 오늘날 우리 어른들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이 나라 아이들은 ‘미운 일곱 살’ 소리를 듣습니다.


  왜 아이들이 미운 일곱 살이 되어야 할까요. 아이들이 미운 일곱 살이 되도록 닦달하거나 몰아붙인 우리 어른들 모습을 제대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학원에 얽매이고 텔레비전에 길들며 문제집과 교과서 숙제에 짓눌리는 아이들은 일곱 살이 아닌 열네 살에도 ‘죽은 얼굴’입니다. 그렇지만, 즐겁게 뛰놀고 마음껏 노래하는 아이들은 일곱 살이건 열네 살이건 ‘살아서 숨쉬는 얼굴’입니다.




  《포토닷》 9호에 최연하 님이 “작가의 작품을 보며, 과연 ‘본다는 것’은 무엇일지 골똘해진다” 하고 들려준 이야기처럼, 우리는 우리 사회를 제대로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 모습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내 모습을 제대로 보고 이웃 모습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어른을 제대로 보고 아이들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사람을 재거나 따지면 그릇된 길로 갈 뿐입니다. 아이들을 아이들 결대로 바라보고, 아이들 숨소리와 눈빛을 사랑스럽게 북돋우는 길로 함께 걸어가지 않는다면, 거의 모든 여느 사진가는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미운 일곱 살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 느낍니다.


  장국현이라는 분은 나무를 함부로 베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만, 제주섬 오름에서 사진을 찍던 김영갑 님은 라면스프 하나를 며칠 동안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면서 오름과 하나가 되고 비바람하고 한몸이 되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온갖 장비를 이끌고 찾아가야 놀랍거나 멋진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장비는 사진기 하나만 있어도 됩니다. 사진에 담으려고 하는 이웃하고 한마음이 되고 한몸으로 움직일 때에 아름다운 빛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예쁜 넋일 때에 예쁜 빛이 우리 앞에 환하게 솟아납니다. 4347.8.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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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을 바라보는 마음



  아이들을 씻기거나 내 몸을 씻을 때에도 내 발을 들여다보는 일이 없습니다. 빨래를 하거나 집안을 쓸고닦을 적에도 내 발을 살펴보는 일이 없습니다. 자전거를 달릴 적에도 내 발을 내려다보는 일은 없는데, 이러다가, 아이들과 골짝마실을 가서, 골짝물에 두 발을 담그며 비로소 내 발을 바라봅니다.


  한참 물놀이를 하면서 쪼글쪼글한 발을 바라봅니다. 고무신을 꿰느라 발끝만 하얗게 안 타고 발등부터 종아리와 허벅지 모두 까무잡잡하게 탄 살갗을 바라봅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가파른 언덕을 올라와 골짜기로 찾아온 내 발을 바라봅니다.


  이 발로 이 땅을 버티고 서서 큰아이를 안고 돌아다녔어요. 이 발로 이 땅을 디디고 서서 작은아이를 안고 걸었어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한테 이 발을 물려주었고, 나는 이 발을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테지요. 우리는 서로 어떤 길을 걸어갈까요. 우리는 저마다 어떤 삶을 밝히면서 어떤 꿈을 가꿀까요.


  골짝물이 부서지면서 거품을 냅니다. 골짝물이 콰르르 쾅쾅 쏟아지면서 귀가 멍합니다. 골짝물이 내 발가락을 어루만집니다. 골짝물이 내 발등과 발바닥을 살살 간질입니다. 물거품이 하얗구나 하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4347.8.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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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아이 183. 2014.7.26.ㅁ 책을 읽는 빛



  책을 읽는 빛이란 무엇일까 하고 한참 생각해 본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책을 읽는 빛을 늘 마주하면서 놀라는데,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녁 아이가 어릴 적에 책을 손에 쥐어 읽는 빛을 어느 만큼 만나셨을까. 우리 어머니는 곧잘 보셨겠으나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느끼거나 만나셨을까.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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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잎싹 2014-08-03 23:30   좋아요 0 | URL
포스팅 제목이 무슨 도서관 분류기호처럼 보이네요.ㅎㅎ
책을 읽는 빛이란 말이 참 고와요~~

국어사전 만드시는 분의 서재에 댓글을 다니까 조심이 많이 됩니다.
혹시 틀린 글자가 없을까 하고요. 혹 틀리면 그 때 그 때 지적해주세요.
늦은 밤 평안하세요~~

파란놀 2014-08-04 07:36   좋아요 0 | URL
사진 분류랍니다.
아이들 사진을
'한 갈래'로만 찍을 수 없구나 싶어서,
주제(이야기)에 따라 하나하나 나누거든요.

나중에 아이들한테 고스란히 물려줄 선물이라서
아버지로서는 좀 멋없게 분류 번호를 붙여요 ^^;;

틀린 글자는 얼마든지 괜찮답니다.
그리고,
글을 어떻게 쓰든
우리 마음을 즐겁고 아름답게 담을 때에
살아서 숨쉬는 예쁜 글이 되어요 ^^
 


 알량한 말 바로잡기

 (1616) 사료


이들 중 ‘마루카미 고을’을 지나는 길이 가장 허술하므로, 조속한 방어책이 필요하다고 사료됩니다

《이와아키 히토시/서현아 옮김-칠석의 나라 1》(학산문화사,2014) 7쪽


 방어책이 필요하다고 사료됩니다

→ 방어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방어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 방어책을 갖추어야 합니다

 …



  한자말 ‘사료(思料)’는 “깊이 생각하여 헤아림”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깊이 생각함”이나 “깊이 헤아림”으로 고쳐써야 올바른 셈입니다. 생각을 깊이 할 적에는 “깊이 생각한다”처럼 말하면 돼요.


  이밖에 ‘史料’나 ‘使料’나 ‘飼料’ 같은 한자말이 한국말사전에 나오는데, 이 한자말들은 ‘역사 자료’나 ‘삯’이나 ‘먹이’로 고쳐써야 알맞습니다. 한국말사전에 이런저런 한자말을 꽤 싣지만, 쓰임새를 살피면 막상 그리 쓸 만하지 않습니다. 아니, 한국말로 알맞고 올바르면서 아름답게 쓰면 넉넉합니다. 저마다 생각을 깊이 가다듬어 맑으면서 밝은 말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7.8.3.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이들 가운데 ‘마루카미 고을’을 지나는 길이 가장 허술하므로, 하루 빨리 방어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들 중(中)”은 “이들 가운데”로 다듬고, “조속(早速)한 방어책(防禦策)이 필요(必要)하다고”는 “하루 빨리 방어책을 마련해야 한다고”나 “막을 길을 하루 빨리 찾아야 한다고”로 다듬어 봅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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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언어 정책과 자국어 보호 정책의 만남
피터 로드니 외 지음 / 피어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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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0



쉽게 안 쓰면 말이 아니다

― 쉬운 언어 정책과 자국어 보호 정책의 만남

 피터 로드니·에바 올롭손·베네딕트 마디니에

 이건범·이상규·김슬옹·김혜정·이현주·김영명

 피어나 펴냄, 2013.12.16.



  쉽게 쓰는 말이 말입니다. 쉽게 안 쓰는 말은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쉽게 안 쓰는 말도 그냥 말이라 할 수 없는 까닭이 있을까요?


  쉽게 안 쓰는 말은 폭력이나 권력입니다. 쉽게 안 쓰는 말은 이웃이나 동무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말을 어렵게 쓸 일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어렵게 비비 꼬아서 못 알아듣도록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랑을 담는 노래를 내 이웃이 곧바로 느끼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부르지, 아무도 못 알아듣도록 사랑노래를 부를 일이 없습니다.


  동무를 해코지하거나 따돌리려 하기에 어렵게 말을 합니다. 지식으로 권력을 쌓기에 어렵게 말을 합니다. 한편, 어렵게 쓰는 말은 폭력일 뿐입니다. 한자를 부려서 쓰든 영어를 섞어서 쓰든, 한자나 영어를 모르는 사람한테 한자나 영어를 함부로 쓰는 말은 그저 폭력입니다. 왜냐하면, 한자나 영어를 모르는 사람한테 이런 말을 자꾸 쓰는 일은 사랑이 아니니까요.



.. 한국의 근대 지식인들은 일본을 거쳐 번역된 서양의 근대 학문을 받아들였으므로 일상생활 용어와 전문용어는 전통적인 한자어 낱말과도 달랐다. 일본식 한자어 낱말이 지식과 정보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 이 한자어 낱말이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어려운 말이었기에 지식인층과 일반 국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아직까지 기세를 떨치고 있다 ..  (8∼9쪽)



  아직 한국 사회에서 공문서가 무척 어렵습니다. 정치꾼은 언제나 ‘서민’을 읊지만, ‘서민’이란 낱말부터 흐리멍덩합니다. ‘서민인 사람’이 ‘서민’이라는 한자말을 알까요? ‘서민이 아닌 사람’이 ‘서민’이라는 한자말을 쓰면서 자꾸자꾸 더 울타리를 높게 쌓지 않는가요?


  동사무소나 면사무소에 가서 등본을 하나 뗄 적에 써야 하는 문서를 보아도, 무척 딱딱하고 까다롭습니다. 출생신고서나 혼인신고서 서식은 아직도 많이 어렵습니다. ‘차상위계층인 사람’이 ‘차상위계층’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기초생활수급자인 사람’이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이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만할까요? 기초연금이든 복지기금이든 신청할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어서 쉽게 서류를 낼 수 있도록 쉬운 글로 서식이 있는지 무척 궁금해요.


  공무원들은 ‘비수급 빈곤층’이라는 말을 쓰고, 지식인은 ‘하우스 푸어’라는 말을 쓰는데, 이런 말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면서 쓰는 말인지 궁금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얼마나 헤아리기에 이런 말을 지을까요. ‘집 없는 이웃’을 얼마나 생각하기에 이런 말을 지을까요. ‘시각 장애인’이나 ‘청각 장애인’ 같은 낱말은 어떤 지식인이나 공무원이 어떤 마음으로 지었을는지 무척 궁금하기도 해요. 왜 이렇게밖에 말을 쓸 줄 모를는지 참으로 궁금한 노릇입니다.



.. 1970년대 영국에서는 공공정보를 전달받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져 갔다 … 이들 기관이 보내는 정보는 무척 중요했으나 읽어도 무슨 뜻인지 불분명하기 일쑤였다 … 국민에게 전해져야 하는 정보 대부분은 애매한 말과 전문용어 범벅이었고 관료적 표현 천지였다 많은 사람이 이런 상황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가 단념하고 말았다. 정부와 대기업에게 국민과 소통하는 방법을 바꾸라고 설득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끼고서 물러섰던 것이다 … 법률 문서는 수백 년 동안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낡은 문체를 하나도 손대지 않고 유지해 왔다 … 법률가에게 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특정 법률용어를 고집하는가라고 캐물으면 법정에서 ‘무수히 사용되었고 검증되었다’는 변명을 듣게 된다. 달리 말해, 판사는 너무나 오랫동안 특정 법률용어에 특정 의미가 담겼다고 믿어 왔기에 거기서 벗어나는 용어는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17, 18, 19, 37, 46쪽)



  말은 언제나 내 삶에 따라 흐릅니다. 내 삶이 포근하거나 따사롭다면 내 말은 포근하거나 따사롭습니다. 내 삶이 고단하거나 힘들다면 내 말은 고단하거나 힘듭니다. 나 스스로 삶을 넓고 깊게 바라본다면 내 말은 넓고 깊을 테지요. 내 삶이 쳇바퀴 돌듯이 얽매인 굴레라 한다면 내 말도 쳇바퀴 돌듯이 얽매인 굴레입니다.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서를 살피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쓰는 낱말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1990년대로 접어들기 앞서까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쓰는 낱말은 되도록 ‘쉽고 바르며 아름답게’ 손보려고 했다고 느낍니다. 다만, 이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많이 모자라거나 아쉬웠지만, 적어도 초등학교 교과서만큼은 이 나라 아이들이 쉬우면서 바르고 아름답게 한국말을 익히도록 이끌려고 했어요.


  이제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서는 아이들한테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거나 보여주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한자 지식을 외우도록 내몰 즈음부터 한국말은 그야말로 뒤죽박죽 엉터리로 지나칩니다. 한국말이 어떤 말인지 보여주지 못하고, 한국 말법과 말투와 말씨와 말결이 어떠한가를 슬기롭게 밝히지 않습니다. 대학입시지옥인 중·고등학교와 발을 맞추려는 초등학교 교육입니다. 쉬운 말도 바른 말도 아름다운 말도 아닌, 오직 시험문제와 얽힌 지식으로 가득한 얼거리에 갇히는 교과서요 학교이며 교육이고 문화입니다.



.. 스웨덴 정부가 언어학자와 협력하여 이 캠페인을 이끌었다. 이 캠페인이 추구한 분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는 당시에 한창 진행 중이던 민주화 과정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 자국어의 포기는 비영어권 국가들의 교육의 질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할 뿐 아니라 별도의 매개 수단이 없이는 과학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의 지식 접근을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다 ..  (125, 185쪽)



  《쉬운 언어 정책과 자국어 보호 정책의 만남》(피어나,2013)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한글문화연대에서 무척 힘을 써서 뜻있는 모임자리를 한국에서 마련했고, 영국와 스웨덴과 프랑스에서 뜻있는 이들이 찾아와서 뜻있는 이야기를 이녁 나라 말로 들려주었습니다.


  나라에서 말을 쉽게 쓰려고 할 때에 비로소 민주와 평화와 복지가 살아난다는 대목을 읽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말을 쉽게 쓰도록 북돋우고 애쓰면서 어깨동무를 할 때에 비로소 평등과 사랑과 두레가 이루어진다는 대목을 엿봅니다.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나라에서 어려운 말을 쓰면 어찌 될까요? 나라에서 일제강점기 찌꺼기 한자말을 자꾸 쓰면 어찌 될까요? 공공기관과 여느 회사와 학교에서 올바르지 않고 알맞지 않으며 아름답지 않은데다가 슬기롭지도 않은 말을 자꾸 쓰면 어찌 될까요?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은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생각을 담아낼 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을 슬기롭게 가꾸지 못하는 사람은 삶을 슬기롭게 가꾸지 못합니다. 말과 넋과 삶이 서로 맞물리지 못하면서 엇갈리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엮지 못합니다.


  그러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요. 예전에 국립국어원 원장으로 있던 이상규 님은 스스로 국립국어원을 나무라는 말을 합니다.



.. 첫째, 《표준국어대사전》은 매우 조급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기존에 나온 많은 사전들의 올림말과 뜻풀이를 수작업으로 조합한 사전이다. 따라서 기존의 개인이나 출판사에서 만든 사전 대부분이 일본 사전을 대거로 베껴 온 것이 그대로 《표준국어대사전》으로 이어진 악순환을 극복하지 못했다. 특히 전문용어는 일본의 《광사원》을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베껴 온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다. 혹평을 하자면 ‘표절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 (348쪽)



  이러한 이야기는 이상규 님이 국립국어원에서 원장을 맡기 앞서 여러 사람들이 꾸준히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국립국어원(국립국어연구원)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나도 안 받아들였습니다. 게다가 아직도 꽤 많은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나온 적잖은 ‘국어사전(한국말사전이 아닌 ‘국어’사전)’이 ‘일본사전’을 베낀 줄 모를 뿐 아니라, 일본사전을 베낀 탓에 ‘한국사람이 안 쓰는 한자말이 잔뜩 실려’서 ‘마치 한국말은 얼마 없고 한자말이 많은’ 줄 여기기까지 합니다.


  일본에서 조금 공부를 했다거나 일본책을 조금 살폈다면 알리라 생각합니다. ‘콘사이스’라는 이름을 붙인 사전은 일본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에는 ‘콘사이스’ 사전이 있어요. 한국말 가운데 한자말이 2/3라느니 몇 퍼센트라느니 하는 통계는 모두 거짓이요 엉터리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사전을 베끼거나 훔쳐서 ‘국어’사전을 만들었으니 한자말이 엄청나게 많이 실릴 수밖에 없었거든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현대 사회로 접어든 뒤 한국사람은 아직 한국말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나 ‘배운’ 적조차 없습니다. 학교에서 ‘국어 교육’은 하지만 ‘한국말을 가르치거나 배우’지는 않습니다. 입시 과목 가운데 하나로 ‘국어’만 다룰 뿐입니다. 거의 모든 한국사람은 한국말이 아닌 ‘국어’를 시험 과목으로 외운 채 이야기(의사소통)를 나누고 글을 쓰고 말을 합니다. 이리하여 온갖 일본 말투와 일본 한자말과 번역 말투와 영어가 어지럽게 뒤섞입니다. 이렇게 어지럽게 뒤섞인 어설픈 말이 어지러운 줄 모르고 어설픈 줄 깨닫지 않으면서, 그냥저냥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냥저냥 문학을 하고 그냥저냥 기사를 쓰고 책을 내며 그냥저냥 학문을 하고 과학을 합니다.



.. 이들이 낸 소원의 핵심 내용은 공문서 작성에서 한글을 전용토록 한 국어기본법이 한자 문화를 누릴 수 있는 행복 추구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교과용 도서에 한자를 싣지 못하게 함으로써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학습권과 부모의 자녀교육권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원 청구인들 가운데 시장에서 배추를 팔고 어물전에 생선을 파는 이웃 사람이나 시골 농촌에서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분들의 이름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들 이름 깨나 알려진 인사들이다. 소송 제기를 한 분들은 모두 자기의 눈높이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분들이 아닐까? 아직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 초·중·고 학교 아이들이 영어, 수학 등 과도한 학습 분량에 시달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자 교육을 부활함으로써 부과될 학습량은 얼마나 늘어날까? 학생들을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지난 조선조 선비들은 평행을 한문 공부를 해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한문 원전을 조금이라도 읽어 본 분이라면 한자 몇 자 가르친다고 세상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알 수 있는데 말이다 ..  (323쪽)



  이 나라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자라면서 어떤 사람이 될 때에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나라 아이들이 앞으로 입시지옥에 사로잡혀서 시름시름 앓다가 취업전쟁에 휘둘리면서 거듭 시름시름 앓아야 하겠습니까. 이 나라 아이들이 스스로 아름다운 꿈을 사랑스럽게 품으면서 환하게 웃고 노래할 수 있는 터를 이루어야 하겠습니까.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말을 쉽게 써야 합니다. 어른인 나 스스로를 사랑한다면 말을 날마다 새롭게 익히면서 삶을 새롭게 사랑하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어려운 말로는 모든 일이 그저 어려울 뿐이고 가로막힙니다. 쉬운 말로는 모든 일이 술술 풀리듯이 쉬우면서 활짝 열립니다. 마음을 열고 말을 살찌우면 됩니다. 가슴을 열어젖히면서 말꽃이 피어나게 북돋우면 됩니다. 4347.8.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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