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에 Historie 5
이와키 히토시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199

 


서로 죽이고 죽는 삶에서
― 히스토리에 5
 이와아키 히토시 글·그림,오경화 옮김
 서울문화사 펴냄,2009.5.25./4500원

 


  마당에서 뭔가 우당탕 넘어지며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에 잠을 깹니다. 마침 내 곁 작은아이도 잠에서 깨며 웁니다. 얼마나 깊은 밤인가 어림합니다. 작은아이 기저귀를 만집니다. 살짝 촉촉합니다. 쉬를 누었구나. 바지를 벗기고 기저귀를 풉니다. 새 바지를 입히고 새 기저귀를 댑니다. 기저귀가 안 젖었으면 쉬를 누일 만한데, 어제는 밤오줌을 잘 가렸으나 오늘은 기저귀에 그냥 누었습니다. 작은아이 스스로 기저귀에 쉬를 누며 밤잠을 깨면 으앙 하고 웁니다.


  여러 날 따스하더니 다시 추위가 찾아오는 듯합니다. 이제는 먼 옛말이라 하지만, 한겨레는 예부터 ‘사흘 춥고 나흘 따숩다’는 날씨를 누렸다고 합니다. 모진 겨울이라 하더라도 이레 가운데 사흘이 춥고 나흘이 따숩기에 긴긴 겨울을 날 수 있었다고 해요. 가만히 보면, 겨울이라서 늘 춥기만 하지 않아요. 여름이라서 늘 덥기만 하지 않아요. 후끈후끈 무덥기도 하지만, 시원시원 서늘하기도 합니다. 오들오들 춥기도 하지만, 포근포근 따사롭기도 해요.


  추위에는 잔뜩 옹크립니다. 추운 날이기에 서로 꼭 안고 지냅니다. 사람도 참새도 풀도 나무도 서로 가까이 살을 맞댑니다. 내 몸이 네 몸을 지키고, 네 몸으로 내 몸을 지킵니다. 추위가 한풀 꺾여 따스해지면 기지개를 켜며 돌아다닙니다. 따순 햇살 받으려고 봄꽃은 봉오리를 벌리고, 따순 햇볕 누리려고 사람들은 해바라기를 하거나 이불널기를 합니다. 나무는 가지를 한껏 벌리고, 풀은 잎사귀를 푸르게 빛냅니다.


- “히에로뉴모스, 난 칼데아에 돌아오면 테레시라 마님, 어머닐 만나 두 가지 사실을 전해 드리려고 했어. 하나는 내가 비록 노예로 팔려갔지만, 그 후에도 전혀 불행하지 않았단 것. 곧 자유를 되찾아 평화로운 삶을 영위했고, 가난하지만 즐겁게 보낸 세월이었지. 그리고 지금 내 두 발로 걸어 고향 칼데아에도 돌아왔다고. 또 하나는, 그 헤어지던 날 ‘이제까지 잘도 속였겠다’라며 소리쳤던 것. 그걸 사죄하고 싶었어.” (21∼22쪽)
- “여기엔 뭐하러 돌아온 거냐?” “‘뭐 하러’라니. 여긴 내 고향인데. 그래도 뭐 볼일은 거의 다 봤어. 이제 마케도니아인들 사일 뚫고 나가는 일만 남았지.” “보복하러 온 거 아냐?” “보복? 내가? 누구한테? 뭐 때문에?” (46∼47쪽)


  내가 살기에 네가 살아가는 누리입니다. 네가 살며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누리입니다. 내가 죽으면 네가 살기 좋은 누리가 아닙니다. 네가 죽을 때에 내 살림이 나아지는 누리가 아닙니다.


  서로 어깨동무하는 누리입니다. 들짐승도 들풀도 들사람도 서로 돕고 얼크러지며 살아가는 누리입니다. 들짐승은 저희만 살겠다고 숲을 짓밟지 않습니다. 들풀은 저희만 살겠다며 숲을 저희 씨로 뒤덮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만큼은 저희끼리, 사람끼리만 살겠다며 숲을 짓밟습니다. 숲을 무너뜨리고 숲을 망가뜨리며 숲을 부수고야 맙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서로 이웃이 되기보다는 저 홀로 살아남으려는 뜻으로 이웃마을을 넘보곤 합니다. 내 마을에는 내 보금자리 곁으로 고속도로 지나가도록 하는 도시는 없지만, 시골마을 한복판으로 고속도로를 가로질러요. 시골 숲자락과 멧자락 한복판에 고속도로를 놓는다며 구멍을 숭숭 뚫어요. 발전소를 도시 변두리나 시골 한복판에 지은 다음, 도시와 읍내로 전기를 보내려고 우람한 송전탑을 논이며 밭이며 살림집 옆이며 잔뜩 세워요.


  사람은 들짐승 삶터를 망가뜨립니다. 사람은 푸나무 삶터를 무너뜨립니다. 사람은 이웃사람 삶터를 부숩니다.


  문득 돌아보면, 사람은 스스로 사람인 줄 잊었구나 싶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얼마나 아름다운 숨결인 줄 모르는구나 싶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빛낼 넋이 어떠한가를 못 깨닫는구나 싶습니다.


  밥을 먹는 사람이요, 물을 마시는 사람이며, 바람을 들이켜는 사람입니다. 밥·물·바람이 없으면 어느 사람이고 목숨을 잃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 스스로 밥이 더러워지도록 흙을 더럽힙니다. 물이 더러워지도록 온 땅에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퍼붓습니다. 바람이 더러워지도록 자동차를 끝없이 만들어 굴리고, 공장을 수없이 짓습니다.


- “하나만 물어 봐도 될까?” “뭔데?” “카론은 장래의 꿈이 뭐야?” “무슨 소리야? 노예한테 뭔 장래의 꿈? 나 참 어이없어서.” (31쪽)
- “그럼 된 거야. 히에로뉴모스, 무리할 것 없어. 사람들은 저마다 석연치 않은 뭔가를 몇 개씩 끌어안고 살고 있지. 그게 정상이야. 마음에 상처가 있어도 즐겁게 살 수 있어.” (94쪽)


  오늘날 지구별은 서로 죽이고 스스로 죽는 삶터로구나 싶어요.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서로 죽이면서 스스로 죽는 쳇바퀴와 같구나 싶어요. 그러나, 이 슬픈 굴레를 깨달으려 하는 사람이 매우 적어요. 쳇바퀴이니까 쳇바퀴에 올라타야 살아남을 수 있는 줄 잘못 알아요. 쳇바퀴이니까 쳇바퀴에서 벗어나야 살아남을 텐데, 외려 서로서로 쳇바퀴에 올라타려고 아웅다웅 다퉈요. 쳇바퀴에서조차 서로 돕지 않아요. 쳇바퀴에서 밀려나면 죽는 줄 생각해요.


  값비싼 아파트를 건사한대서 살아남지 않습니다. 값비싼 자가용을 간수한대서 살아남지 않습니다. 대학졸업장이나 여러 자격증이나 토플점수 뽐낸대서 살아남지 않습니다.


  삶은 삶입니다. ‘살아가기’이지 ‘살아남기’가 아닙니다. 이웃하고 등지거나 동무하고 고개 돌린 채 홀로 살아남으려 한다면, 스스로 죽고 맙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면서 동무하고 손을 맞잡을 때에 비로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은 삶일 뿐, ‘겨룸(경쟁)’이 아닙니다. 삶은 삶이지, ‘다툼(전쟁)’이 아닙니다. 겨뤄서 등수를 매긴들 무슨 뜻이 있나요. 다투거나 싸워서 누군가 이긴들 무슨 보람이 있나요.


  등수를 매긴다면, 등수 높은 사람이 등수 낮은 사람을 돌보라는 뜻입니다. 다투거나 싸운다면,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을 보살피라는 뜻입니다.


  힘은 힘이 센 사람이 힘이 여린 사람을 보듬으라는 힘입니다. 슬기란 슬기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품에 따사롭게 안으라는 슬기입니다. 돈은 돈이 있는 사람이 돈이 없는 사람하고 나누라는 돈입니다. 집은 집이 있는 사람이 집이 없는 사람하고 나란히 지내라는 집입니다.


  함께 하는 삶이고, 함께 누리는 삶입니다. 함께 즐기는 삶이고, 함께 빛내는 삶입니다. 서로 사랑하기에 스스로 사랑할 수 있어요. 서로 죽이려 할 때에는 스스로 죽고 말지만, 서로 아끼려 하기에 스스로 아끼면서 환하게 웃어요. 서로 따순 손길 내밀며 어깨동무하기에, 서로 맑은 눈빛으로 만나 두레를 이룹니다.


- “성벽 바깥 세계는 다양한 변화가 넘쳐나 재미있어. 하지만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있지. 넌 괜히 무리해서 성벽 밖으로 나갈 필요 없다고 생각해. 잘 있어, 형.” (103쪽)


  이와아키 히토시 님 만화책 《히스토리에》(서울문화사,2009) 다섯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천 해쯤, 또는 이천 해쯤, 어쩌면 삼천 해나 사천 해쯤 앞서까지도 적잖은 권력자는 삶 아닌 죽음을 생각했구나 싶습니다. 삶을 함께 누리자고 생각하지 않고, 죽음으로 이녁이 권력을 누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구나 싶어요.


  돈을 생각한다면, 지식을 생각한다면, 학력이나 무슨무슨 이름값을 생각한다면, 그저 스스로 무너질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생각하고, 꿈을 생각하며, 믿음을 생각할 때에는, 그예 스스로 싱그러이 빛나면서 산뜻하게 거듭날 수 있어요.


  나 스스로 죽을 까닭 없듯이, 내 이웃이나 동무 또한 죽을 까닭 없습니다. 내가 아는 이웃이건 내가 모르는 이웃이건, 서로 아끼며 돌볼 때에 즐겁습니다. 내 곁 사람들이건 나하고 한참 먼 데 있는 사람들이건, 서로 사랑하며 보살필 때에 기쁩니다.


  한국이든 모잠비크이든, 네덜란드이든 에콰도르이든, 캐나다이든 라오스이든, 저마다 고운 삶 누리면서 고운 빛 나눌 때에 이 지구별이 환하게 빛나요.


- “아군 1만 명의 군사들 중 3천이 죽었다고 치자? 그럼 난, 왠지 그 3천 중에 용감무쌍한 네 목이 들어 있을 것 같거든? 반면, 에우메네스 군 1만 명 중 9천을 친다 해도, 그 안에 녀석의 목은 없을 거다.” (126쪽)


  만화책 《히스토리에》는 죽이고 죽는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줄거리로는 ‘죽이고 죽는 사람들’이 잔뜩 나온다 할 테지만,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도 어느 누구도, 죽음 아닌 삶을 누리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려 합니다.


  생각하면 돼요. 죽음 아닌 삶을 생각하면 돼요. 미움 아닌 웃음을 생각하면 돼요. 돈·이름·힘 아닌 꿈·사랑·빛을 생각하면 돼요. 어깨동무를 하면 되고, 품앗이를 하면 돼요. 두레를 하면 되고, 울력을 하면 돼요. 스스로 보금자리를 예쁘게 일구고, 아이들과 까르르 웃음꽃 노래꽃 이야기꽃 흐드러지게 피우면 돼요. 4345.12.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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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에 나왔다고 하는데, 2012년 12월에 왜 품절일까 궁금하다. 벌써 다 팔리고 더 안 찍을까. 아니면 뭔 문제가 있을까. 이와아키 히토시 님 작품이 한국에 몇 권 번역되지 않았는데, 부디 이 책이 다시 나오기를 빌고, 다른 책들이 사랑스레 번역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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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7] 아이읽기
― 아이와 할 수 있는 숱한 일놀이

 


  아이들은 즐겁게 웃으며 놉니다. 뛰놀다 넘어진대서 아이들이 우는 일은 없습니다. 아프다고 울지는 않거든요. 넘어진 아이를 바라보며 근심과 걱정에 휩싸인 어른들이 ‘어머나!’라든지 ‘어떡해!’ 하며 낯빛이 달라지니까, ‘아하, 울어야 하는구나!’ 하고 느끼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이가 넘어지거나 말거나, 피가 나거나 말거나,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면서 “그래, 넘어졌네. 괜찮아. 무릎한테 괜찮다고 말하렴.” 하고 이야기하면 아이는 안 웁니다. “아프겠네. 아프겠구나. 그래, 아픈 데는 곧 나아. 자, 손가락아 얼른 나으렴.” 이렇게 말하면 아이도 따라서 말하면서 어느새 손가락 아픈 줄 잊습니다. 그러고는 아픈 손가락이 어느새 나아요.


  날마다 하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집일을 하고 글쓰기를 하느라 자칫 잊거나 힘들다며 ‘아이랑 글씨 쓰기’하고 ‘아이랑 그림 그리기’를 넘어가곤 합니다. ‘아이랑 숲마실 하기’도 곧잘 넘어가곤 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저희끼리 놀이를 생각해 내고, 저희 나름대로 다투거나 사이좋게 얼크러지면서 놀이를 즐깁니다. 하루 내내 아이들을 바라보고, 아이들을 보살피며, 아이들과 부대낍니다. 아이랑 함께 글씨를 써 보거나 그림을 그려 보면, 이 아이가 날마다 새로운 손길과 눈썰미로 새 모습을 빚는구나 하고 느낄 만합니다. 아마, 학교 교사라면 ‘여러 아이들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낄 테지요. 이 보람이 있기에 고된 공무원 노릇을 견딜 만한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퍼뜩 생각합니다. 교사가 학교에서 느끼는 보람이란, 따지고 보면 모든 어버이가 여느 보금자리에서 늘 누려야 하던 모습 아닌가 하고.


  오늘날 거의 모든 어버이는 아이들을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넣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아이들을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넣을 때에 여러모로 도움돈을 줍니다. 2012년 12월에 새 대통령 뽑히고 2013년이 되면 서울을 비롯한 크고작은 도시마다 ‘어린이 보육시설’이 부쩍 늘어나리라 봅니다. 맞벌이 집안을 헤아리는 보육시설이 늘고, ‘전일제’로 아이를 맡는다는 곳도 늘어난다고 해요. 이른바 ‘보건 복지’와 ‘교육 문화’라는 이름으로 ‘어린이 보육시설’이 늘어나는데요, 나는 이 대목이 여러모로 못마땅합니다. 제대로 된 보건 복지요 교육 문화라 한다면, 어버이들이 ‘돈을 벌러 회사에 나가거나 가게를 지키는 품’을 줄이도록 해 주어야 옳기 때문입니다. 맞벌이 집안이라 아이들을 ‘전일제’로 늦게까지 보육 시설에 두는 일이 즐거울까요. 아이를 둔 어버이라면 회사에서 ‘일을 더 적게 해도 되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올바르지 않을까요. 보육 시설을 늘려야 할 노릇이 아니라, ‘회사 정규직을 더 늘려’서, ‘아이 둔 어버이가 다른 일꾼보다 조금 더 일을 마친 다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이렇게 해서 ‘아이 어버이가 적게 맡은 일 몫’만큼 다른 사람이 ‘일을 나누어 하도록’ 할 때에 일자리가 저절로 느는 한편, 굳이 어떤 돈을 더 들여 시설을 만들지 않아도 한결 적은 돈과 품으로 ‘복지’와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회사나 가게에서 일을 조금 더 적게 할 수 있는 어버이는, 더 일찍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하고 어울릴 수 있어요.


  아이를 돌보거나 가르치는 몫은 바로 어버이가 맡아야 올바릅니다. 어버이가 회사일이나 가게일로 바쁘다고 하니까,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 보육 시설을 마련하기는 합니다만, 교사에 앞서 어버이예요. 어버이는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돌보는 몫에다가, 아이를 가르치고 사랑하고 아끼고 북돋우는 몫을 맡습니다. 왜냐하면, 어버이잖아요. 이리하여, 교사란 지식과 정보를 아이 나이(발달 높낮이)에 맞추어 가르치는 일꾼이 아닙니다. 교사란, 아이와 함께 살아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이자, 아이 삶을 곁에서 지키고 보살피는 어버이입니다. 어른이면서 어버이 구실을 할 교사이지, 지식과 정보를 건네는 일꾼 구실을 할 교사는 아니에요. 지식과 정보를 건네는 노릇은 ‘책’으로 넉넉해요. 그러나, 책이라 하더라도 지식과 정보를 쌓으려고 읽힐 때에는 빛이 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살찌우고 생각을 이끄는 구실을 할 때에 책은 책답게 빛이 나요.


  아이들은 날마다 자랍니다. 어른 또한 날마다 자랍니다.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어른도 몸과 마음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나는 첫째 아이를 2008년 8월 16일에 낳은 뒤, 하루 서너 시간 느긋하게 잠든 적이 없습니다. 첫째 아이가 세 살이 될 무렵까지 밤마다 한두 시간에 한 차례씩 깨어 기저귀를 갈고 밤오줌 누이는 한편, 칭얼대는 아이 다독이며 지냈어요. 첫째 아이가 세 살을 지나 네 살이 될 무렵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제 좀 밤잠을 자 볼까 싶던 삶’이 더 짧아졌어요. 두 아이를 나란히 보듬어야 하니까요. 아이가 하나일 적에는 아이가 낮에 곯아떨어질 때에 곁에 나란히 누워 숨을 돌릴 만했지만, 아이가 둘이다 보니, 두 아이가 나란히 곯아떨어져 낮잠 자는 일은 거의 없어요. 하나가 잘 놀다 곯아떨어진다 해도, 다른 아이는 기운차게 놀아요. 다른 아이가 졸린 낌새 가득해서 살살 달래며 재우면, 그동안 자던 아이가 깨어나 기운차게 뛰놀려고 해요.


  그런데, 이렇게 두 아이하고 복닥이는 하루를 보내고 보면, 나로서는 여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생각하지 못한 대목을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두 아이와 지내며 아이 어르거나 달래거나 보듬는 마음길과 손길을 새롭게 다스립니다. 어린이노래를 새삼스레 다시 부르고, 어린이책을 새삼스레 다시 읽습니다. 어린이 눈길이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되짚습니다. 내 옷가지와 옆지기 옷가지 손빨래에다가 두 아이 옷가지 손빨래를 하며 내 손가락이랑 손바닥이랑 손목이랑 팔뚝이랑 등허리 모두 한결 튼튼하게 거듭납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실을 다니니 내 허벅지와 어깨는 더 튼튼하게 거듭납니다. 두 아이 먹을 밥을 날마다 새롭게 차리자니, 내 밥솜씨는 부쩍 늘어납니다. 두 아이가 졸리면 안고 업고 보듬고 해야 하니, 내 팔힘이나 어깨힘도 남달리 씩씩해지곤 합니다. 어른은 어른 나름대로 자라요. 어른은 어른 깜냥껏 새로 태어나요.


  아이와 함께 해바라기나 별바라기나 꽃바라기를 합니다. 아이와 함께 숲길을 거닙니다. 아이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들길을 걷습니다. 아이 눈길을 생각합니다. 내 눈길은 무엇인가 하고 돌아봅니다.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숱한 일놀이를 느낍니다. 아이와 함께 다닐 만하지 않은 데라면, 어른인 나부터 다닐 만하지 않다고 깨닫습니다. 아이한테 보여줄 만하지 않은 만화나 영화라 할 때에도, 어른인 내가 얼마나 볼 만한 만화나 영화인가 하고 깨우칩니다.


  오늘날 이 나라 수많은 어버이들은 아이하고 더 오래 지내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하고 즐거이 더 오래 지내지 못하니까, 정작 ‘당신 아이’가 얼마나 넓고 깊으며 따사로운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이를 일찍부터 보육 시설에 집어넣기 때문에, 아이와 당신이 누릴 아름다운 삶을 잃거나 빼앗깁니다. 참다운 복지일 때에는 ‘어버이가 회사나 가게에 덜 얽매이고 돈벌이에 덜 붙들리도록’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다운 교육일 때에는 ‘어버이가 아이와 서로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즐거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육 시설은 없어도 돼요. 보육 시설은 아예 없어도 돼요.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는 아이 낳은 집안마다 ‘아이 살림돈’을 맞돈으로 도와주면 돼요. 보육 시설 없으면 걱정된다고요? 하나도 걱정스럽지 않아요. ‘아이 품앗이’를 짜면 되거든요. 이웃 여러 집하고 품앗이를 짜서, 아이를 따로 맡겨야 할 때에는 아이들끼리 ‘어느 이웃 한 집’에 모여 즐거이 뛰놀도록 하면 돼요. ‘공동육아’라고도 할 텐데, 시설이 아닌 보금자리(살림집)를 누려야 할 아이요 어른이에요. 시설에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한글을 더 일찍 가르치지 않아도 돼요. 아이는 마음껏 놀아야 아이예요. 아이와 살아가는 어버이는 아이하고 신나게 놀면서 스스로 몸을 쉬고 마음을 다스릴 때에 삶을 넉넉히 일굴 수 있어요.


  아이 눈빛을 맑게 읽어요. 아이 마음을 슬기롭게 읽어요. 아이 사랑을 따숩게 읽어요. 아이 꿈과 이야기를 기쁘게 읽어요. 4345.12.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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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그림 읽기
2012.12.16. 큰아이―모자 쓴 애


  밤이 깊으나 두 아이 모두 잘 낌새가 없다. 이래서는 안 될 노릇이지 하고 생각하며 그림종이를 꺼낸다. 두 아이한테 하나씩 주고 나도 하나를 맡아 그림을 그린다. 큰아이가 “아버지, 벼리하고 보라하고 어머니하고 그려 줘.” 하고 말한다. “벼리는 벼리가 그리고 싶은 모습을 그려. 아버지는 아버지 그리고 싶은 모습을 그릴게.” 그래도 나더러 제 모습을 그려 달라 하기에 누워서 슥슥 삭삭 그린다. 이렇게 아이 모습을 그리면서 “그럼 벼리도 아버지 모습을 그려 주렴.” 하고 말하니, 아버지 얼굴이라며 머리카락까지 까맣게 그려 준다. 그러고는 이제껏 그린 적 없는 사람 얼굴에 몸통 붙인 모양을 그린다. 뭘까. “무슨 그림이니?” “응, 모자 쓴 애야. 애.” 모자 쓴 애를 어디에서 봤을까. 틀림없이 어디에선가 보았으니 그렸겠지. 그러고는 모자 쓴 애 곁에 다른 ‘애 동무’를 잔뜩 그린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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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그림 읽기
2012.12.8. 큰아이―해


  아버지와 큰아이가 그림을 그린다. 아이는 우리 집에 고양이 많이 산다면서 고양이를 그린다. 큰아이 그림그리기를 얼핏 들여다본 어머니가 아이더러 “벼리야, 그럼 해도 그려 봐.” 하고 말한다. “해? 알았어.” 하는 아이는 고양이 옆에 ‘좀 커다랗게 보이는 고양이’를 그리고는 빛살이 퍼져 나간다는 모양을 죽죽 붙인다. “자, 봐 봐. 해야, 해.” 그래, 귀엽고 어여쁜 해로구나. 잘 그렸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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