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마을과 송전탑

 


  경상남도 밀양 시골마을을 가로지르는 송전탑을 못 놓도록 가로막은 시골 할아버지 세 사람한테 자그마치 ‘손해배상 10억’ 원을 물도록 해 달라는 고소장을 한국전력이 법원에 냈다고 한다. 한국전력은 시골에서 논밭을 부치는 할아버지한테 ‘하루 100만 원’씩 손해배상을 하라고 말했다는데, ‘법률에 따르’면, 한국전력이 송전탑을 지으려 할 때에는 ‘땅을 강제수용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시골마을 할아버지들은 당신 논밭을 지킬 뿐 아니라, 송전탑이 설 때에 생기는 무시무시한 전자파가 무서워 송전탑을 못 놓게 하려고 하는데, 할아버지 피를 말리고 죽음으로 내모는 법이요 한국전력이며 송전탑일 뿐 아니라, ‘도시에 모자라는 전기를 시골에 발전소를 지어 멀디먼 길을 송전탑을 세워 실어나르는 도시 문명사회 오늘날 얼굴’이라고 하겠다.


  밀양에 발전소가 있을까? 밀양에 발전소가 있다면 이 발전소는 전기를 어디로 보내려 하는가? 밀양 시골마을을 지나도록 한다는 송전탑은 왜 세워야 할까? 왜 도시에 발전소를 안 지어서 시골을 망가뜨리려 하나? 아니, 시골 논밭을 망가뜨릴 뿐 아니라,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멍에와 굴레를 뒤집어씌우는가? 흙을 일군 사람은 알 텐데, 논으로 삼거나 밭으로 삼을 만한 흙이 되도록 하려고, 흙일꾼은 열 해나 스무 해 땀을 흘린다. 때로는 더 긴 나날을 삽과 곡괭이와 괭이와 호미와 가래로 일구고 갈아서 기름진 땅으로 만든다. 논 한 뙈기나 밭 한 자락 공시지가는 무척 싸다 하겠으나, 이 값싼 땅이 논이나 밭이 되기까지 얼마나 살가운 숨결과 땀방울이 배었는지를 헤아릴 노릇이다. 돈으로 따질 수 없고, 돈으로 따지지 않는 사랑이 깃들었으니까.


  포스코 회사에서 전남 고흥 나로도에 지으려 하는 발전소를 떠올린다. 고흥군수는 발전소를 받아들이려 하는지 안 받아들이려 하는지, 하는 생각을 여덟 달이 지나도록 아직 안 밝힌다. 발전소를 지으면 발전소 둘레뿐 아니라, 송전탑이 설 마을도 망가지고, 발전소 굴뚝에서 나오는 매연이 흐르는 마을도 망가질 뿐더러, 발전소에서 내보내는 열폐수가 흐를 바닷마을도 망가진다.


  전남 고흥 나로섬은 안쪽 나로와 바깥 나로, 한자로 ‘내나로’와 ‘외나로’가 있는데, 안쪽 나로 한쪽에 있는 예쁜 시골, ‘소영마을’ 바닷가를 한참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송전탑이 이 마을을 가로지르면, 또는 이 마을 옆 삼암산을 지나면, 이 예쁜 바닷마을은 어떻게 망가져야 할까. 발전소 매연과 열폐수에다가 송전탑이랑 전자파까지, 더더구나 발전소를 들락거릴 끝없는 자동차들이 뿜을 매연이랑 시끄러운 소리는, 고요하고 예쁜 바닷마을을 얼마나 무너뜨릴까. (4345.7.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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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7-09 22:53   좋아요 0 | URL
사진이 참 아름답네요.
그러게요, 얼마나 망가져야 할까요. 아휴.

파란놀 2012-07-10 03:04   좋아요 0 | URL
사진이 아름답다기보다,
사진으로 담긴 마을이 아름답습니다...

너무 커져 버린 도시가 작아지면서
시골로 바뀌지 않는다면,
더 커지려는 도시를 먹여살려야 하니
시골이 더 망가져야 해요...

책읽는나무 2012-07-13 17:57   좋아요 0 | URL
이쪽 시골도 버스 타고 지나다보니 큰 송전탑이 우뚝 우뚝~
밀양도 이쪽과 가까워 그송전탑들이 밀양과 연결될 것인가?
생각이 드는군요.ㅠ

파란놀 2012-07-14 05:00   좋아요 1 | URL
밀양이 아니더라도
송전탑은
한국 곳곳에 지나치게 아주 많답니다...

모두들 시골 논밭을 망가뜨리며 세운 녀석들이에요...

http://www.gh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77

이 글을 한 번 읽어 보셔요...
 


 노래테이프 꽂기 (도서관일기 2012.7.7.)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노래테이프 두 상자를 끌러서 꽂는다. 노래시디 한 상자도 꽂았다. 마땅한 자리가 생각나지 않기에, 빈 책꽂이 자리에 꽂는다. 두 겹으로 꽂는다. 어쨌든 자리를 적게 차지하도록 두 겹으로 꽂는데, 빈 책꽂이 자리가 아직 널널할 때에는 한 겹으로만 꽂고, 앞에 비는 데에는 다른 자잘한 것을 놓아 꾸며도 좋겠구나 싶기도 하다. 나중에 틈이 나면 더 손보기로 한다. 노래테이프도 한 해 넘게 상자에 갇힌 채 있다가 풀렸는데, 물기를 얼마나 먹었을까 모르겠다. 나중에 늘어지거나 해서 못 들을까 걱정스럽다만, 노래테이프를 들을 수 없다면, 이제는 이 테이프는 유물처럼 덩그러니 놓아야겠지. 참 오랫동안 나한테 고운 노래를 들려주던 테이프이니까, 앞으로는 곱게 쉬어도 좋으리라.


  내 옛 물건 상자를 끌르다 보니, 내 국민학생 적과 중학생 적과 고등학생 적 공책도 나온다. 어느 공책은 스멀스멀 곰팡이가 피려 한다. 눅눅한 공책이든 안 눅눅한 공책이든 해바라기를 시킨다. 둘째 아이가 서재도서관 안밖을 돌아다니다가 쉬를 누는데, 마침 내 공책들 옆에서 눈다. 애써 눅눅한 기운을 말리려 하다가 오줌을 뒤집어쓸 뻔했다.


  책꽂이 자리를 잡고 책을 꽂을 때에는 ‘서재도서관을 치우고 꼴을 갖춘다’는 모습이 환히 드러나는데, 자질구레한 짐을 치우고 바닥을 닦으며 사진을 곳곳에 붙일 때에는 ‘무언가 움직인 티’가 잘 안 난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나날이 예쁘게 거듭난다고 느끼니까 이렇게 조금씩 손질하는 맛으로 살자. 큰아이는 사다리를 타고, 작은아이는 누나를 올려다본다. 둘 모두 널따란 서재도서관 골마루를 마음껏 달리거나 기거나 뛰면서 잘 논다. 사람들 살림집도, 사람들 마당도, 사람들 삶터도, 이렇게 아이들이 홀가분하게 뛰거나 기거나 달리며 놀 만한 곳이라면, 따로 책이나 신문이나 영화나 무엇이 없더라도 사랑과 꿈이 새록새록 피어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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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7-09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음악 테이프를 몇 년 전에 모두 정리해버렸어요. 비디오 테이프도 이번에 버릴거 같아요. 저렇게 꽂혀있는 테이프들을 보니, 아련하네요.

그런데 보라가 이제 잘 서는군요! 이뻐라...
(보라가 맞죠? 벼리가 따님이죠? 제가 40이 넘어간 이후로 기억력이 영..)

파란놀 2012-07-10 03:03   좋아요 0 | URL
둘 다 씩씩하게 잘 놀아요.
둘째도 한창 잘 걸어다니며 논답니다~

저는 노래테이프를 틈틈이 더 모으기도 해요~ ^^
 


 도서관 가는 길 (도서관일기 2012.7.6.)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첫째 아이하고 서재도서관으로 간다. 지난해 십일월부터 책꽂이 자리를 잡고, 모자란 책꽂이를 새로 들인 다음, 상자에 담기거나 끈에 묶인 책을 거의 다 풀었다. 책꽂이 놓고 책 꽂는 데에 여덟 달을 들인 듯하다. 이제는 자질구레한 짐이랑 내가 어릴 때부터 쓰던 물건을 갈무리한다. 이 일까지 마치면 제법 도서관 꼴을 낼 만하리라 본다. 2007년 4월에 인천에서 서재도서관을 처음 열던 때에는 한 달 만에 우지끈 뚝딱 하듯 책꽂이와 책을 갈무리하고는 퍽 엉성한 대로 문을 열고는 조금씩 치우고 갈무리해서 이태쯤 지나서야 이런저런 꼴을 갖추었다. 모양새가 나기까지는 아무래도 이태는 걸리리라 생각하면서, 앞으로 언제까지나 이 터에서 예쁘게 책삶을 이루도록 좋은 꿈을 꾸어야겠다고 본다.


  아이는 집에 있어도, 서재도서관에 가도, 마실을 다녀도 좋다. 어버이가 즐거이 놀아 주면 어디에서라도 좋다. 어버이가 즐거이 놀아 주지 못할 때에는 어디에서라도 안 좋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나날이란, 아이가 한 사람답게 살아갈 길을 스스로 찾도록 곁에서 이끌거나 가르치거나 보여주는 일이라고 느낀다. 차근차근 좋은 생각을 품으면서 잘 살아 보자. 들길과 숲길 사이를 천천히 헤치면서 책누리에서도 예쁘게 놀 수 있게끔, 또 나부터 들길과 숲길과 책누리에서 예쁘게 노는 어른으로 살아갈 만하게끔, 마음을 곱게 잘 여미자.


  한여름이 되어 서재도서관 가는 길은 풀밭 길이 된다. 낫으로 풀을 치고 싶어도, 이 일까지 할 겨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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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말도 익혀야지
 (937) 있다 10 : 싸움을 하고 있는 중

 

가서 보니 순길이 부모님이 며칠째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수연-산동네 공부방》(책으로여는세상,2009) 101쪽

 

  한국말에는 없는 ‘과거분사’가 나날이 쓰임새를 넓힙니다. 한국말에 없는 ‘현재진행형’은 자꾸자꾸 깊이 파고듭니다. 오늘날 거의 모두라 할 만한 한국사람은 과거분사나 현재진행형 아닌 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줄 모릅니다. 스스로 한국말 빛깔이나 무늬나 결을 옳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옳게 가르치는 책이나 교과서나 어른이나 스승이 없다고 하지만, 누가 가르치기에 앞서 스스로 옳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때에 비로소 길이 열립니다. 생각하지 않을 때에 길은 하나도 안 열립니다. 생각할 때에 천천히 말문을 틉니다. 생각하지 않을 때에 말문은 하나도 안 트입니다.

 

 며칠째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x)
 며칠째 싸움을 하고 있었다 (x)
 며칠째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x)
 며칠째 싸우고 계신다 (x)
 며칠째 싸움을 하신다 (o)
 며칠째 싸우신다 (o)

 

  “하고 있는 中이었다”처럼 적는 현재진행형 꼴로도 얼마든지 내 뜻과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투를 펼쳐도 으레 알아듣습니다. 다만, 한국말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말이 아니요 한국말 무늬나 결이나 빛깔하고는 동떨어지지만, 사람들은 이 같은 말을 잘 알아듣습니다.


  이를테면, “그 선생님은 잘 가리켜요.” 하고 잘못 말하더라도 사람들은 ‘잘 가르친다’고 말하는 줄 알아듣습니다. “못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라든지 “그럴 것 같아요.”처럼 ‘것’을 아무렇게나 집어넣어도 사람들은 잘 알아들어요. “얼굴이 붉게 상기됐어요.”라든지 “혼자 독차지한다.”라든지 “아침조회”처럼 엉터리 겹말 또한 사람들은 잘 알아들어요.


  다만, 사람들은 이런 말 저런 말투를 들으면서 어디가 어떻게 왜 잘못되거나 어긋났는지 못 깨닫거나 모르곤 합니다. 못 깨닫거나 모르면서 그냥 쓰기도 하고, 잘 깨닫거나 알면서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곤 합니다.


  “하고 있는 中이었다”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로 한자만 한글로 바꾼다 한들 올바르지 않습니다. ‘중’을 덜어 “하고 있었다”로 적든 “하는 중이었다”로 적든 올바르지 않아요. 올바르게 적자면 “한다”입니다. 보기글에서는 “싸움을 한다”나 “싸움을 하신다”로 적을 때에 올바릅니다. 더 단출하게 추슬러 “며칠째 싸우신다”로 적을 수 있어요. 뜻을 살려 “며칠째 싸움이 이어진다”라 적을 만하고, “며칠째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라 적어도 돼요.


  어떤 말을 하려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어떤 뜻을 나타내려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말투와 말마디가 얼마나 알맞거나 슬기롭거나 좋은가를 생각할 노릇입니다. (4345.7.9.달.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가서 보니 순길이 부모님이 며칠째 싸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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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미디어 - 손석춘 선생님이 들려주는 나를 찾는 미디어 여행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7
손석춘 지음, 김용민 그림 / 철수와영희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신문·방송·책은 왜 있어야 하나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0] 손석춘, 《10대와 통하는 미디어》

 


- 책이름 : 10대와 통하는 미디어
- 글 : 손석춘
- 그림 : 김용민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7.12.)
- 책값 : 12000원

 


  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집에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시골에서 살아가면서도 집에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습니다. 굳이 텔레비전을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라디오도 딱히 모시지 않습니다.


  더 생각하고 자꾸 생각하면, 인터넷도 그리 모실 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쓰는 글을 올리는 인터넷방이 있기는 하지만, 꼭 내 글을 인터넷방에 올려야 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남한테 읽히려고 쓰는 글이라고도 하나, 내가 쓰는 모든 내 글은 누구보다 나 스스로 되읽는 글이요, 내가 살아온 나날을 돌이키면서 내 넋을 북돋우는 글입니다. 남이 읽어 남이 새 넋을 일구거나 새 꿈을 키울 수 있겠으나, 남에 앞서 내 넋을 스스로 새롭게 일구고 내 꿈을 어여쁘며 맑게 북돋울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글을 쓰는 뜻이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내 생각을 가다듬고, 내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내 삶을 가다듬습니다. 내 삶을 가다듬으면서 내 사랑을 가다듬고, 내 사랑을 가다듬으면서 내 손길과 눈길을 나란히 가다듬어요.


  텔레비전이 있는 곳에서 때때로 함께 텔레비전을 들여다보기도 하는데, 텔레비전을 볼 때면, 이런 텔레비전이 왜 있어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문이 있는 곳에서 때때로 신문을 죽죽 들추곤 하는데, 신문을 들출 때면, 이런 신문이 왜 있어야 하는지 영 모르겠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마을 이야기가 방송이나 신문에 실리는 일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내 마을 이야기가 방송이나 신문에 실리더라도 겉훑기조차 못합니다. 찬찬히 다가와서 사랑스레 보듬는 이야기를 다루지 못해요. 살가이 어깨동무하면서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이야기를 다루지 않아요.


.. 인터넷 게임에 몰입하는 10대들을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나무라기만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중독 현상이 크게 늘어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전문가들은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반복된 생활, 게다가 치열한 입시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게임에 빠져들게 된다고 분석합니다 … 자, 그렇다면 사회적 조건이 그러하니 이제 게임에 중독되어도 좋은 걸까요? 내 탓이 아니라 사회 탓이라고 주장하며 즐기기만 해도 될까요 ..  (13, 14쪽)


  교과서가 아이들이 배울 만한 책인지 아닌지 알쏭달쏭합니다. 아니,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어떤 교과서를 손에 쥐어 어떤 이야기를 배우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오늘날 한국땅에서 교과서는 어떤 구실을 할까요. 오늘날 한국땅 아이들은 교과서만 죽 읽으면 ‘한 사람으로 오롯이 우뚝 서서 씩씩하고 튼튼하며 해맑게 살림을 일구어 살아가는 길’을 익힐 수 있습니까. 갖추어야 할 지식이 아닌 나누어야 할 사랑을 교과서로 익힐 수 있습니까. 그런데, 갖추어야 한다는 지식조차 한쪽으로 쏠린 지식이기 일쑤요, 대학입학 시험공부에 얽매인 지식조각일 뿐 아닙니까.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배운다는 국어 교과서가 참으로 한국말을 한국사람이 알맞거나 사랑스럽거나 즐겁게 쓰도록 이끄는지 알 길이 없어요. 역사 교과서가, 수학 교과서가, 과학 교과서가, 사회 교과서가, 얼마나 아이들 삶길과 눈길과 넋길을 헤아리거나 살피는가 모르겠어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교과서로 배우면 배울수록 더 바보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초등학생을 지나 중학생이 될수록, 중학생을 지나 고등학생이 될수록, 고등학생을 지나 대학생이 될수록, 대학생을 지나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될수록, 이 나라 사람들은 더더욱 바보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삶도 사랑도 사람도 배우지 않는 학교인데다가, 삶도 사랑도 사람도 아끼도록 이끌지 않는 일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돈을 더 잘 벌 만한 직업(장래희망)만 붙잡도록 하는 학교요, 돈을 더 잘 벌 만한 일만 하도록 이끄는 일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 잘 알겠지만 인터넷 게임에는 칼이나, 총, 흉기로 게임 속 다른 캐릭터를 때리고 찌르거나 죽이는 일이 되풀이됩니다. 많이 죽일수록 좋지요.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가를 … 잘 생각해 보세요. 아빠와 엄마가 직장에 나가며 일하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그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아빠와 엄마가 해고된다면 어떻겠어요? 그뿐이 아니지요. 한국 사회에서 커 가는 10대 청소년들 또한 20대에 들어선 어느 순간에는 취업을 해야지요. 취업을 해서 일터로 나가는데 그곳에서 사장이 마음대로 해고하거나 직원인 노동자를 멋대로 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24∼25, 72쪽)


  인천에서 살며, 충북 음성에서 살며, 이제 전남 고흥에서 살며, 때때로 마을신문을 읽습니다. 인천에서는 인천 신문을, 음성에서는 음성 신문을, 고흥에서는 고흥 신문을 때때로 읽는데요, 인천에서 나오는 인천 신문에는 가끔 ‘운동 기사’가 실리기는 하지만, 음성이나 고흥에서 나오는 마을신문에는 운동 기사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축구이니 야구이니 골프이니 하는 운동 기사가 없어요. 그런데, 세 곳에서 나오는 신문에는 주식시세표가 안 실려요. 음성과 고흥에서 나오는 자그마한 신문에는 방송편성표가 안 실려요. 음성과 고흥에서는 날마다 나오는 신문이 없는 만큼 날씨 소식도 안 실려요.


  서울에서 나오는 신문은 날마다 나옵니다. 날마다 나오는 신문에는 온갖 운동 기사가 실리고, 주식시세표가 큼지막하게 실리며, 부동산 정보가 실리는 한편, 방송편성표나 날씨 소식이 실립니다. 이밖에 날마다 다루는 온갖 지식과 정보가 있어요. 아마 이런저런 것들을 날마다 들여다보라는 뜻일 수 있을 텐데, 서울에서 살아가며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일하지 않고서야, 굳이 이런저런 대목에 눈길을 두거나 마음을 기울일 일이 없구나 싶기도 합니다. 아니,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집에 텔레비전을 모신다 하더라도 신문 방송편성표까지 뒤적이며 챙겨서 볼 겨를이 없어요. 아니, 굳이 이렇게 저렇게 챙겨서 볼 만한 방송을 찾기는 어려워요. 아니, 애써 텔레비전을 켜서 이것저것 하염없이 볼 만하지 않아요.


  커다란 도시에서 살아가니까 텔레비전을 보고야 맙니다. 커다란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으려 하니까 신문을 읽고야 맙니다.


  누가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 한들 대수롭지 않습니다. 정치 이야기, 외교 이야기, 경제 이야기, 문화 이야기, 교육 이야기, 사회 이야기, 운동 이야기, …… 어느 하나 서울이나 커다란 도시에서만 대수롭습니다. 작은 마을이나 시골에서는 삶을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일구며 스스로 누립니다. 작은 마을이나 시골에서는 신문이나 방송에 기대어 삶을 읽지 않습니다. 스스로 짓는 삶은 스스로 읽습니다. 스스로 일구는 사람은 스스로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거나 노래로 부릅니다. 스스로 누리는 삶은 스스로 이야기하고 스스로 즐깁니다.


.. 신문이 처음 태어날 때 왕과 귀족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탄생을 축하해 주지 않았지요. 그들 쪽에 서서 잠시 생각해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닙니다. 중세 시대 내내 누구의 감시도 없이 정치를 해 왔는데 신문이 자신들의 언행을 일일이 보도하기 시작하니까 불편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신문 발행을 허가하거나 불허하는 권한을 자신들이 갖고 있다고 선언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신문에 실리는 내용까지 엄격하게 검열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의 언론통제를 모든 사람이 고분고분 받아들이리라고 판단했다면 착각이었지요 … 관훈클럽의 진단에 따르면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중산층에 속하기 때문에 중산층을 자연스럽게 대변함으로써 빈곤층이나 소수 계층의 의견과 이익은 배제됩니다. 사실 지상파 방송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소득은 단순히 중산층 수준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이미 고소득층이거나 그에 가깝습니다. 빈곤층의 이야기를 담기는 더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지요 ..  (50∼51, 112쪽)


  시골마을 아이라 하더라도 도시에 있는 더 큰 학교로 가자면 신문을 읽거나 방송을 보아야 합니다. 시골사람 넋으로는 도시에서 살아남기 힘들 테니까요. 도시에서 배우자면 도시사람 넋하고 어깨동무해야 할 테니까요. 대통령이나 시장 이름을 모른다 하더라도 흙을 알고 나무를 알면 넉넉해요. 정치를 모르고 경제를 모르더라도 바람을 알고 구름을 알면 넉넉해요. 인터넷을 모르고 새책 소식을 모르더라도 멧새를 알고 들풀을 알면 넉넉해요.


  오늘날 한국사람은 무엇을 아는 사람일까요. 오늘날 한겨레는 스스로 무엇을 알려고 애쓸까요.
  신문·방송·책은 왜 있어야 하나 궁금합니다. 신문을 읽는 사람은 사랑이나 삶이나 사람(이웃과 동무와 살붙이)을 읽을 마음일까 궁금합니다. 방송을 보는 사람은, 또 책을 읽는 사람은 사랑이나 삶이나 사람을 느끼거나 헤아릴 마음일까 궁금합니다.


  내 곁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내가 숨을 거두어 내 몸뚱이가 흙으로 돌아갈 때에 내가 들고 갈 만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어린이로 살거나 푸름이로 살거나 젊은이로 살거나 늙은이로 살 때에 무엇을 손에 쥐면서 누려야 즐겁거나 기쁘거나 아름답거나 신날까요.


  내가 바라볼 것은 무엇인가요. 나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즐거운 삶을 누릴까요. 나는 무엇을 알아야 하고, 내 마음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찾아들어야 기쁠까요. 내 생각은 어떤 이야기로 가꾸면서 어떤 꿈을 꾸어야 곱게 빛날까요. 지구별 푸름이들은 무엇을 알아야 하고, 한국땅 푸름이들은 무엇을 느껴야 할까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른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알아야 하며 무엇을 느껴야 서로서로 좋을까요.


.. 텔레비전의 영향력은 연예인 숭배나 외모 지상주의 세태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 왜 방송사들은 문제가 많은 성적 장면들을 무분별하게 내보낼까? 그것이 시청률 경쟁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시청률을 그렇게 중시할까 … 광고를 내려는 사람들은 당연히 시청자들이 많은 프로그램에 광고하고 싶겠지요. 바로 그렇기에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자극적으로 성적 노출 장면을 내보내거나 폭력 장면들을 방송합니다 …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아름다움을 외적인 것으로만 판단하는 외모 지상주의가 곳곳의 광고들을 통해 한층 강화됩니다. 내적은 아름다움은 가치 없는 것으로 넘깁니다 ..  (95, 98, 99, 141쪽)


  손석춘 님이 쓴 《10대와 통하는 미디어》(철수와영희,2012)를 읽습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오늘날처럼 신문이고 방송이고 인터넷이고 눈부시게 펼쳐진 적이 없는데, 막상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이 어떠한 매체인가 하고 들려주는 책이 참 없구나 싶습니다. 중앙일간지나 지역일간지가 참 많은데, 신문뿐 아니라 잡지도 많고, 방송사도 많은데, 이 많은 매체 일꾼들 스스로 ‘내 이웃과 나눌 매체 이야기’를 차근차근 써서 차근차근 나누려 하지 않는구나 싶습니다.


  신문사 일꾼은 왜 신문 이야기를 속속들이 밝히면서 나누려 하지 않을까요. 방송사 일꾼은 왜 방송 이야기를 낱낱히 파헤치면서 나누려 하지 않을까요.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이나 인터넷으로 ‘초·중·고등학교 학습’을 시키자고는 하면서, 정작 신문 속내와 방송 속살과 책 알맹이와 인터넷 속셈을 깊이 살피거나 두루 돌아보는 이야기는 왜 밝히지 않을까요.


  지구별 푸름이들이 아무쪼록 ‘삶을 밝히는 글’을 헤아릴 수 있기를 빕니다. 한국땅 푸름이들이 부디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살필 수 있기를 빕니다. 그리고, 아이들 낳아 살아가는 어른들부터 ‘삶을 꽃피우는 꿈’을 깨달을 수 있기를 빕니다. (4345.7.9.달.ㅎㄲㅅㄱ)

 


95쪽 아래1 : 확인할 수 있은 것은 => 확인할 수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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