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말 바로잡기

 (1462) 원형


나머지 우리들은 원형 식탁을 깨끗하게 치운 다음, 그 위에 하얀 유리잔을 올리고, 카드놀이할 준비를 마쳤다

《주디 카라시크(글),폴 카라시크(그림)/권경희(옮김)-함께 살아가기》(양철북,2004) 66쪽


 원형 식탁

→ 둥근 밥상

→ 둥그런 밥상

 …



  모두 다섯 가지로 실린 한자말 ‘원형’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元型)와 둘째(元型)는 학문 하는 분이 즐겨씁니다. ‘옛 모습’이나 ‘첫 모습’이나 ‘밑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셋째(原型) 낱말은 말뜻과 말쓰임 그대로 ‘바탕’이나 ‘밑바탕’을 가리킵니다. 넷째 낱말은 조선 시대에 썼을까 싶은 말이나, 이제는 안 쓰이는 말입니다. 다섯째 낱말은 ‘둥근’ 모양을 가리킵니다.


  다섯 가지 낱말을 죽 살피면, ‘이런저런 모습이나 모양을 가리키’되, 한자로 옮기기만 할 뿐입니다. ‘이런저런 모습이나 모양’ 그대로 적거나 쓰지 않습니다.


 원형 무대 → 둥그런 무대 / 동그란 무대

 원형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 둥글게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형의 물레 → 동그란 물레


  한자말이건 한자말이 아니건, ‘원형’이라는 낱말이 우리가 넉넉히 쓸 만하다 싶으면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따로 가리키는 낱말이 있고 나타내는 낱말이 있으며 쓰는 낱말이 있는데, 그저 한자로 옮겨 놓았을 뿐인 낱말 ‘원형’이라 한다면, 이와 같은 낱말들을 쓸 까닭은 굳이 없다고 봅니다.


  ‘옛 모습, 바탕, 뿌리, 동그랗다’ 같은 낱말로 넉넉합니다. ‘첫 모습, 밑바탕, 밑뿌리, 둥글다’ 같은 낱말로 알뜰합니다. 4341.7.29.불/4347.8.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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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우리들은 둥근 밥상을 깨끗하게 치운 다음, 밥상에 하얀 유리잔을 올리고, 카드놀이 준비를 마쳤다


‘식탁(食卓)’은 ‘밥상’으로 고칩니다. “그 위에”는 “밥상에”로 손질합니다.



 원형(元型/原型) : 본능과 함께 유전적으로 갖추어지며 집단 무의식을 구성하는 보편적 상징

 원형(元型) : 발생 면에서의 유사성에 의하여 추상된 유형

 원형(原型)

  (1) 같거나 비슷한 여러 개가 만들어져 나온 본바탕

   - 이 건축물은 후대 건축물의 원형이 되었다

  (2) 옷감을 잘라 양복을 만들 때 그 밑그림의 바탕이 되는 본(本)

  (3) 여러 종류의 동식물 가운데 현존하는 생물의 근원으로 생각되는 모델

  (4) 문예에서, 본보기인 성격을 만들어 낼 때 의지하는 실재의 인물

 원형(?刑) :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받는 억울한 형벌

 원형(圓形) : 둥근 모양

   - 원형 무대 / 원형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철마 / 원형의 물레를 따라


..



 알량한 말 바로잡기

 (944) 녹음


계절의 여왕 5월은 다 지나고 어느덧 녹음의 계절 6월이 되었다 라는 라디오 소리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순-제3의 여성》(어문각,1983) 163쪽


 녹음의 계절 6월

→ 푸른 6월

→ 푸른 철 6월

→ 푸른 잎이 우거지는 6월

→ 푸른 빛이 가득한 6월

→ 풀빛이 고운 6월

 …



  한국말사전에는 세 가지 ‘녹음’이 나옵니다. 첫째는 한국말입니다. 물에 녹는다고 할 적에 ‘녹다’를 이름씨 꼴로 바꾼 ‘녹음’입니다. 그런데, ‘녹음 = 융해’로 풀이를 하는군요. ‘융해’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을 다시 뒤적이니, ‘융해(融解)’는 “녹아 풀어짐”을 뜻한대요. 아, 그렇구나. 그러면, 또 ‘녹다’는 무엇일까요? ‘녹음’을 ‘융해’로 풀이하고, ‘융해’는 ‘녹음(녹다)’으로 풀이하는 한국말사전입니다.


 녹음이 우거지다

→ 숲이 우거지다

→ 나무가 우거지다

→ 숲그늘이 우거지다

→ 숲빛이 푸르게 우거지다

 녹음이 짙다

→ 아주 푸르다

→ 숲그늘이 짙다

→ 숲빛이 짙푸르다


  한자말 ‘錄音’은 ‘소리 담기’를 뜻합니다. 소리를 담는대서 한자를 빌어 ‘녹음’으로 적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소리를 담으니 ‘소리담기’를 붙여서 한 낱말로 쓸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아니, 한 낱말로 쓸 수 있어야 할 테지요.


  “여러 번 녹음을 하다”가 아니라 “여러 번 소리를 담다”입니다. “녹음이 잘되어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가 아니라 “소리를 잘 담아서 또렷하게 들렸다”입니다.


  푸르게 빛나는 숲빛을 마음으로 그립니다. 즐거우면서 살가이 담아서 나누는 소리를 마음으로 떠올립니다. 숲도 나무도 소리도 모두 아름다운 결입니다. 4338.6.26.해/4347.8.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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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5월은 다 지나고 어느덧 짙푸른 6월이 되었다 하고 나오는 라디오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계절(季節)의 여왕(女王)” 같은 말을 누가 언제부터 썼을까요. 사이에 ‘-의’를 넣어 “무엇의 무엇”처럼 쓰는 말투는 모두 일본 말투입니다. 한국 말투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한테 아주 익숙하다 싶은 “계절의 여왕”일는지 모르나, 우리는 한국사람답게 한국 말투로 새로운 빛을 담는 말마디를 지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여왕과 같은 철이란 무엇일까요? “아름다운 철”일 테지요. 그래서, 뒤따르는 “녹음의 계절”도 “푸른 철”이나 “짙푸른 철”로 다듬습니다. “되었다 라는 라디오 소리”는 “되었다고 하는 라디오 소리”나 “되었다 하고 나오는 라디오”로 손봅니다.



 녹음 = 융해

 녹음(綠陰) :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나 수풀. 또는 그 나무의 그늘

  - 녹음의 계절 / 녹음이 우거지다 / 녹음이 짙다

 녹음(錄音) : 테이프나 판 또는 영화 필름 따위에 소리를 기록함

  - 여러 번 녹음을 하다 / 녹음이 잘되어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44) 사복


이 회사의 파트너로는 모건-록펠러연합에 속한 포토맥전력의 사장과 내셔널저축트러스트은행의 사장 등 쟁쟁한 멤버들이 참여하고 있었으며, 후버 자신도 월가의 투기가로서 사복을 채우고 있었다

《히로세 다카시/이규원 옮김-제1권력 :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 왔는가》(프로메테우스 출판사,2010) 131쪽


 사복을 채우고

→ 제 뱃속을 채우고

→ 뱃속을 채우고

→ 밥그릇을 채우고

→ 제 밥그릇을 채우고

  …



  모두 아홉 가지가 있다는 한자말 ‘사복’인데, ‘私卜’이나 ‘私僕’이나 ‘思服’이나 ‘射覆’ 같은 한자말을 쓸 일은 아예 없으리라 느낍니다. ‘蛇福’은 “신라 진평왕 때의 이인(異人)”이라는데, 외국사람 이름을 한자로 적은 이런 낱말을 왜 한국말사전에 실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嗣服’ 같은 한자말도 먼 옛날 권력자나 양반이 아니면 쓸 일이 없던 낱말입니다. 이런 한자말은 한국말사전에서 덜어야 마땅합니다. 한국말사전은 한자사전이나 옥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말사전은 한국말을 담는 그릇입니다.


 백성들을 침탈하여 자기의 사복을 채웠으니

→ 백성들을 괴롭혀 제 밥그릇을 채웠으니

→ 사람들을 들볶아 제 뱃속을 채웠으니

→ 사람들을 짓밟아 제 주머니를 채웠으니


  “제복이 아닌 옷”을 두고 ‘私服’이라고 한답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런데, 이 한자말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에 스며들었습니다. 한겨레는 먼먼 옛날이건 오늘날이건 ‘제복·사복’이 따로 없습니다. 그저 ‘옷’일 뿐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받아들인 서양 문화’에 맞추어 일본 제국주의자가 한국에 군국주의를 심으려 할 적에 ‘제복(군복)’과 ‘사복’을 나누었습니다. 이 아픈 생채기가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가시지 않았기에 이런 한자말을 아직 털어내지 못했습니다.


  ‘사복’이란 어떤 옷일까요? 우리가 늘 입는 옷이 ‘사복’일 테지요. 그러면, 옷이란 옷인데, 왜 옷을 ‘옷’이라 않고 ‘私服’이라 해야 할까요? 굳이 두 갈래로 옷을 갈라야 한다면 가를 수도 있습니다.


  바깥밥과 집밥을 가르듯이, ‘바깥옷’과 ‘집옷’이라 하면 돼요. 바깥에서 일하면서 입는 옷이라면, 예부터 ‘일옷’이라는 낱말을 쓰기도 했어요. ‘제복’이라면 ‘일옷’인 셈이요, ‘사복’이라면 ‘집옷’인 셈입니다. 4347.8.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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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 단짝으로는 모건-록펠러연합인 포토맥전력 사장과 내셔널저축트러스트은행 사장 같은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었으며, 후버 스스로도 월가에서 투기가로서 제 뱃속을 채웠다


“이 회사의 파트너(partner)로는”은 “이 회사 단짝으로는”으로 손보고, “연합에 속(屬)한”은 “연합에 딸린”이나 “연합인”으로 손보며, “포토맥전력의 사장”은 “포토맥전력 사장”으로 손봅니다. ‘등(等)’은 ‘같은’으로 손질하고, “쟁쟁(錚錚)한 멤버(member)들이 참여(參與)하고 있었으며”는 “대단한 사람들이 있었으며”나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었으며”로 손질하며, “후버 자신(自身)도”는 “후버 스스로도”로 손질합니다. “채우고 있었다”는 “채웠다”로 다듬습니다.



 사복(司僕) : [역사] = 사복시

 사복(私卜) : 개인의 짐

 사복(私服)

  (1) 관복이나 제복이 아닌 사사로이 입는 옷

   - 사복 경찰 / 사복 차림 / 사복 근무

  (2) = 사복형사

   - 세 명의 사복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사복(私腹) :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이나 욕심

   - 백성들을 침탈하여 자기의 사복을 채웠으니

 사복(私僕) : 예전에, 세도가가 사사로이 부리던 일꾼

 사복(思服) : 늘 생각하여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둠

 사복(射覆) : 그릇 속에 숨겨 둔 것이 무엇인지 알아맞힘

 사복(蛇福) : [문학] 신라 진평왕 때의 이인(異人)

 사복(嗣服) : 예전에, 선대의 위업을 계승하거나 왕위를 물려받던 일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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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소리 1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361



새하얀 소리는 해맑은 삶노래

― 순백의 소리 1

 라가와 마리모 글·그림

 이상은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2.12.25.



  비가 오는 날에는 빗소리가 흐릅니다. 눈이 오는 날에는 눈소리가 흩날립니다. 흔히들 빗소리는 들어도 눈소리는 못 듣는다고 하지만, 눈이 오는 날에도 소리가 흐릅니다. 갑자기 고요한 기운이 돌면서 소복소복 톡톡 하는 소리가 납니다. 자동차가 끊임없이 드나들고 온갖 기계가 끝없이 움직이는 도시에서는 눈소리를 듣기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러나 눈이 펑펑 내려 자동차를 멈추게 하고 기계도 멈춘다면, 바야흐로 눈소리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겨울에 눈이랑 즐겁게 노는 아이들은 아직 눈이 쌓이지 않았을 적에도 눈소리를 듣고는 눈을 번쩍 뜨면서 창밖을 내다봅니다.



- ‘조금만 더 버티면 봄이었는데.’ (5쪽)

- “지금, 내 안은 텅 비었거든. 그래서 뭔가를 얻을라고 찾아 헤매는 듯한 느낌이데이.” (23쪽)

- “츠가루. 츠가루샤미센.” “아아, 요시다 형제나 아가츠마 같은? 하긴, 요즘 유행이니까.” “유행? 정식으로 하는 사람은 유행 같은 거 상관 안 한데이/” (33쪽)




  모기가 날며 애앵애앵 날갯소리를 냅니다. 파리가 날 적에도 날갯소리를 냅니다. 벌도 날갯소리를 내요. 그러면, 나비는 어떠할까요. 나비가 날면서 내는 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겠어요? 잠자리나 개똥벌레는 어떠할까요. 이들 날벌레가 하늘을 가르는 소리를 헤아릴 수 있겠어요?


  요즈음에는 전문직업으로 노래를 하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어떤 이는 ‘절대음감’이라고도 합니다. 평론을 하든 심사를 하든, ‘가수가 되고 싶은’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주 자그마한 소리까지도 알아채거나 살피는 듯합니다.


  그러면, 이들 평론가나 심사자는 ‘가수가 되고 싶은 사람이 내지르는 소리’라든지 ‘가수인 사람이 내지르는 소리’뿐 아니라, 바람이 풀잎과 나뭇잎을 간질이는 소리라든지, 풀벌레가 풀잎에 내려앉는 소리라든지,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는 소리라든지, 매미가 허물을 벗는 소리라든지, 나비가 꿀과 꽃가루를 빨아먹는 소리를 얼마나 알아차리거나 헤아릴 수 있을까요.



- “때리는 것도 모자라서, 악기까지 상하게 할 셈이야?” (16쪽)

- “유나 씨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데.” (44쪽)

- “타케토. 너는 정말 밴댕이 소갈딱지구나? 너는 음악을 할 자격이 없어!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 사진은 뭐냐? 어떻게 악기를 다루는 팔을 짓밟을 수 있어?” (82∼83쪽)





  시골에서 할매나 할배는 ‘호미질 하는 소리’나 ‘낫질 하는 소리’만 듣고도, 호미나 낫을 쥔 사람이 어떤 마음이요 몸인가를 느낍니다. 지겨워 하는 빛인지 즐거워 하는 빛인지 곧바로 알아채거나 느낍니다. 공책에 연필로 글을 쓰는 사각사각 소리를 들으면서, 지겨운 숙제를 하는지 즐겁게 글빛을 가꾸는지, 이런 소리로 마음빛을 헤아릴 수 있는 어른이나 어버이가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며 내는 소리를 듣고는 어떤 삶빛이 흐르는가를 읽을 수 있어요. 처마를 따라 똑똑 또는 줄줄 흐르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날씨가 어떠한가를 읽을 수 있어요. 하늘 따라 흐르는 구름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귀여겨듣는다면 하루 날씨뿐 아니라 며칠 동안 어떤 날씨가 될는지 읽을 수 있어요.


  동이 트면서 해가 저 멧등성이 너머로 올라올 적에도 소리를 듣습니다. 빛과 볕만 느끼지 않아요. 소리가 함께 있습니다. 바닷물이나 냇물이 찰랑거릴 때 물결소리만 있지 않아요. 물내음과 물빛이 함께 있습니다.



- ‘내는 말이제, 봄이 좋다. 하지만도, 겨울이 싫은 건 아니데이. 츠가루의 겨울은 얼어붙을 만큼 춥지만, 해님이 나와서 조금씩 눈을 녹이면, 소리가 변하제. 여름도 가을도 똑같은 기라. 계절마다 소리가 변하니까네. 그 소리를 언제든지 낼 수 있으면 행복한 기라.’ (88∼90쪽)

- “내는 내가 좋아서 켜는 것 외에는 관심 없다!” (149쪽)





  라가와 마리모 님 만화책 《순백의 소리》(학산문화사,2012) 첫째 권을 읽으면서 눈과 귀와 살갗이 모두 즐겁습니다. ‘새하얀 소리’란 무엇일는지 가만히 헤아리면서 즐겁습니다. ‘해맑은 소리’란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짚으면서 즐겁습니다.


  오래된 악기 하나를 켤 줄 알기에 남다른 소리가 흐르지는 않습니다. 서양 악기를 켜든 한국 악기를 켜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마음을 담아 켜는 악기일 때에 비로소 대수롭고 아름다우면서 즐겁습니다.



-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돌아보게 만드는 기다. ‘소리’를 줄이면 안 된데이.” (160쪽)

- “연주의 우열은 뭘로 정해지노? 아무리 곡에 감정을 실어도, 서투른 건 서투른 기다.” ‘‘할배’의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할배’의 소리가 없어졌다는 건, 길러 준 부모와 스승을 동시에 잃었다는 뜻이다. 우리 형제는 똑같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180∼181쪽)





  악기를 타면서 ‘소리를 줄일’ 까닭이 없습니다. 밥을 지으면서 ‘밥맛을 줄일’ 까닭이 없습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사랑하면서 ‘사랑을 줄일’ 까닭이 없습니다. 삶은 늘 그대로 나아갑니다. 스스로 아름다운 빛이 되어 누리는 삶이기에 나 스스로 아름다우면서 즐겁고, 내 둘레 이웃과 동무한테도 아름다우면서 즐거운 노래를 들려줍니다.


  가수가 되어야 노래를 하지 않아요. 요리사가 되어야 밥을 짓지 않아요. 재단사가 되어야 옷을 짓지 않아요. 작가가 되어야 글을 쓰지 않아요. 사진가가 되어야 사진을 찍지 않아요. 언제나 스스로 삶으로 짓고 가꾸는 노래입니다.



- “연주의 우열 말이다. 내는 기준 같은 거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수많은 샤미센이 울려도 형의 소리를 알 수 있데이.” (184쪽)



  한국에서 꼭 가야금을 타거나 거문고를 뜯는 이야기를 다루는 만화책이 나와야 하지는 않습니다. 대금이나 소금이나 풀피리를 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화책이 꼭 한국에서 나와야 하지 않습니다. 다만, 빛을 노래하고 들으면서 삶을 가꾸는 따사롭고 착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태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만화책 《순백의 소리》는 아주 아리땁습니다. 4347.8.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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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아이 187. 2014.7.28. 바람이랑 둘이 책



  누나 바람이에 드러누워 두 아이가 만화책 하나를 들여다본다. 누나 바람에 둘이 함께 누워 만화책 하나를 킬킬거리면서 들여다본다. 모름지기 삶이란 놀이요, 책은 아름답게 놀던 삶으로 빚는 사랑스러운 이야기이다. 그러니, 두 아이가 마룻바닥에 바람이를 놓고는 즐겁게 책놀이를 하는 삶이란 참으로 예쁜 빛이 흐르는 노래라 할 만할 테지.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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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랑 놀자 56] 꽃숲



  꽃이 많이 핀 곳을 ‘꽃밭’이라 하고, 풀이 많이 돋은 곳을 ‘풀밭’이라 하며, 나무가 많이 자란 곳을 ‘나무밭’이라 합니다. 나무가 우거진 곳은 ‘나무숲’이라 하고, 풀이 우거진 곳은 ‘풀숲’이라 합니다. 그러면, 꽃이 우거진 곳은 무엇이라고 할 만할까요. 한국말사전을 찬찬히 살피다가 ‘꽃밭·풀밭·나무밭’이라는 낱말은 고루 있지만, ‘풀숲·나무숲’만 있고 ‘꽃숲’이라는 낱말은 없는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왜 ‘꽃숲’은 한국말사전에 없을까요? 우리 집은 책이 많아 ‘책숲’입니다. 크고작은 모든 책방도 ‘책숲’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품고 살아 ‘이야기숲’입니다. 글을 써서 빚는 아름다운 터는 ‘글숲’이 되고, ‘노래숲’이나 ‘사랑숲’을 이루는 이웃이 있습니다. 숲이 되도록 아름다이 일구는 삶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빛이 되어 환하게 웃음꽃밭이나 웃음꽃숲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4347.8.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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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69] 풀과 농약과 아이들

― 왜 시골에 아이들이 없을까



  풀을 싫어하는 시골이 되면 아이들이 사라집니다. 아이들이 사라지는 시골이 되면 농약이 찾아옵니다. 아이들을 시골로 다시 데려오려면 풀을 사랑해야 합니다. 농약을 멀리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비로소 아이들이 시골에서 살아갈 수 있어요.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느 시골을 가든 아이들이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느 시골을 가든 늙은 할매와 할배만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느 시골을 가든 온통 농약바람입니다. 어느 시골에서나 끔찍하게 비닐을 쓰고 태우며 파묻습니다. 참말 오늘날에는 어느 시골이든 풀을 끔찍하게 싫어해요. 이런 곳에서는 아이들이 느긋하게 자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앞날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줍니다. 언제나 온통 농약투성이로 지내면서 비닐로 온 밭뙈기를 덮다가 끝없이 태우는 시골에는 어떤 앞날이 있을까요. 이런 시골에 아이들이 얼마쯤 남는다 하더라도, 무슨 빛을 가슴에 품을 수 있을까요.


  도시에서 지내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유기농’을 먹이려고 애씁니다. 유기농이란 무엇일까요? 일본 한자말 ‘有機農’은 똥오줌을 거름으로 삼아 흙을 일구는 일을 가리킵니다. ‘유기농’을 하려면 농약을 쓰면 안 되고, 비닐을 쓰면 안 됩니다. 여기에 항생제나 비료를 모두 안 쓸 때에 ‘유기농’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시골이 농약과 비닐과 비료와 항생제 범벅입니다. 오늘날 여느 시골에서 거두는 곡식이나 열매는, 오늘날 여느 도시에서 여느 어버이가 ‘먹이고 싶지 않은 곡식이나 열매’입니다.


  아이들이 도시에만 몰립니다. 그러나 도시에 몰리는 아이들은 놀지 못합니다. 놀 곳이 없고 놀 틈이 없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도시에 가두기만 할 뿐,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면서 씩씩하게 자라도록 북돋우지 않습니다. 풀이 자라지 못하는 도시는 빈터가 없고 쉼터가 없으며 놀이터도 일터도 마땅하지 않습니다.


  풀이 자라는 곳에서 모든 목숨이 싱그럽게 살아갑니다. 풀이 자라야 풀벌레와 개구리가 깃듭니다. 풀이 자라야 나무가 튼튼히 섭니다. 풀이 자라야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포근합니다. 풀이 자라야 풀잎을 꺾어 풀피리를 불고, 풀꽃을 따서 풀꽃반지를 낍니다.


  풀이 없는 곳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풀이 없는 데에서 아이들은 어떤 마음이 될까요. 아이들이 맑고 밝게 자라면서 착하고 아름답게 사랑하기를 바란다면, 시골은 풀을 아끼면서 돌볼 줄 아는 터로 거듭나야 합니다. 아이들이 시골에서 까르르 웃고 노래하기를 바란다면, 앞으로 시골에서는 농약을 걷어치워야 합니다. 4347.8.1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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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08-16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척박한 땅에 제일 먼저 풀씨가 날아와 자리를 잡아야 생명 있는 것들이 깃들어 살아가니까 풀이 잘 자라는 시골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충분히 공감되네요!

파란놀 2014-08-15 05:50   좋아요 0 | URL
아스팔트를 깔아 자동차가 다닐 길이 아닌,
풀이 돋으며 아이들이 뛰놀 터가 되도록
우리 나라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