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말(인터넷말) 30] 퀵view, books, 무비&스테이지

 인터넷에 방을 마련하는 사람들은 다 다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달리 살아오며 다 달리 배운 말로 인터넷방을 꾸밉니다. 인터넷에 마련한 방을 일컬어 누리집이라 합니다. 인터넷으로 보는 신문은 인터넷신문, 곧 누리신문입니다. 이 누리집에 쓰는 말을 어떻게 가다듬으면 좋은가 하는 틀은 어김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이 틀에 맞추어야만 하지는 않고, 반드시 이 틀만 따라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마다 다 다르게 살아오며 받아들인 말마디로 꾸미는 누리집에서 쓰는 말은 사람들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매무새로 쓰는 말이라 할까요. ‘뉴스’라는 말은 아주 흔히 쓰니 그렇다 할 만하겠지요. 그러면 ‘books’는 어떨까요. ‘뉴스’는 한글로 적으면서 ‘books’는 알파벳으로 적어야 할 까닭이 있나요. 아니 ‘새소식’으로 쓰기 싫어 ‘뉴스’로 쓴다지만, ‘책’이라 하기 싫어 ‘books’라 해야 할까요. 그런데 ‘무비&스테이지’는 왜 한글로 적었나요. ‘books’를 알파벳으로 적는다면 ‘무비&스테이지’도 알파벳으로 적어야지요. 적어도 모두 한글로는 적든지, 한글로만 적을 뿐 아니라, 옳고 바른 우리 말로 적도록 마음을 쏟아야지요. 그러나 ‘퀵view’라든지 ‘이미지프레시안’ 같은 말마디를 들여다보면, 이 인터넷방, 곧 이 누리집을 꾸민 분들이 얼마나 우리 말과 글을 생각하지 않거나 살피지 않는지를 알 만합니다. 누리집(누리신문) 이름이 ‘프레시안’도 아닌 ‘PRESSian’이니까 어쩔 수 없는 셈인지 궁금합니다만, 아무리 영어를 좋아한달지라도, 사람들이 인터넷을 켜서 들어와서 글을 읽고 사진을 볼 때에 제대로 찾아 알맞게 보도록 이끌자면, 게시판 이름이나 차림판 이름을 어떻게 붙여야 알맞으며 좋은가를 조금이나마 짚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4344.2.1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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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찍기 책읽기 그림그리기


 사진기가 있으니 사진을 찍고, 책이 있으니 책을 읽으며, 종이가 있으니 그림을 그립니다. 사진을 좋아한다면 사진을 찍을 테고, 책을 좋아한다면 책을 읽을 테며,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림을 그릴 테지요.

 자전거가 있으면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전거를 탑니다. 공깃돌이 있거나 작은 돌이 있으면 공기놀이 좋아하는 사람은 공기놀이를 합니다. 새봄이 찾아와 온 들과 숲에 새잎 돋는 새풀이 나면 나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물을 캐거나 뜯으러 멧길을 오르내립니다. 봄에 나서 봄나물이고, 멧자락에서 나니까 멧나물입니다. 예부터 멧토끼요 멧돼지라 했지만, 이제는 ‘메’ 같은 낱말은 잘 안 쓰니 ‘산토끼-산돼지-산나물-산자락’이라 해야 할는지 모르지만, 멧골짜기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다른 데 사람들이 어떤 말을 쓰든, 이곳에서는 ‘메’를 앞에 붙이는 이름을 쓰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말도 저마다 좋아하는 말을 즐겁게 씁니다.

 사진기가 있어도 사진을 찍고, 사진기가 없어도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이란 종이에 뽑아서 벽에 거는 작품만 사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서 서른두 달을 함께 살아온 아이는 ‘망가져서 못 쓰는’ 사진기로도 신나게 사진을 찍습니다. 저도 어린 날 두 손 두 손가락을 네모낳게 만들어 사진놀이를 했습니다. 내 마음에 살포시 담으면 얼마든지 사진찍기가 됩니다.

 책이 있으니 책을 읽지만, 책이 없어도 책을 읽습니다. 책에 적힌 이야기는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새롭게 배우거나 깨닫거나 알아채거나 느끼거나 겪은 이야기입니다. 저마다 배우거나 깨닫거나 알아채거나 느끼거나 겪은 이야기를 ‘글로 담을’ 때에 책으로 묶습니다. 그러니까, 따로 글로 안 쓰고 입으로 말을 주고받을 때에는 이렇게 입말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책인 셈입니다. 종이에 이야기를 적으면 종이책이고, 동무나 이웃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사람책입니다.

 종이가 있을 때에 그림을 그린다지만, 종이가 없을 때에도 그림을 그립니다. 연필이나 볼펜을 쥐어 종이에 그림을 그려도 즐겁고, 나뭇가지나 손가락이나 돌멩이로 흙땅에 죽죽 금을 그으며 그림을 그려도 즐겁습니다. 손가락으로 하늘에 대고 빙빙 돌리며 그림을 그려도 즐겁습니다.

 꼭 어떻게 해야만 사진찍기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어찌저찌 해야만 책읽기이지 않습니다. 어김없이 요리조리 해야만 그림그리기이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내 나름대로 받아들여 즐길 때에 사진찍기도 되고 책읽기도 되며 그림그리기도 됩니다.

 글을 쓰는 동화작가나 소설가라든지,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라든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든지, 이런 이름이 붙어야만 대단하지 않습니다. ‘작가’나 ‘화가’라고 한자로 지은 이름을 붙여야만 이러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글을 쓰니까 ‘글쟁이’나 ‘글꾼’이나 ‘글사람’이라 하면 되고, 그림을 그리기에 ‘그림쟁이’나 ‘그림꾼’이나 ‘그림사람’이라 하면 됩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을 ‘농사꾼’이라 하니까 모두들 ‘-꾼’으로 맞출 수 있고, 그저 즐긴다는 뜻으로 ‘즐김이’ 같은 이름을 달아 ‘글 즐김이’나 ‘그림 즐김이’처럼 이름을 붙여도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나타나거나 남다르게 보이거나 겉보기로 꽤 그럴듯해야 사진이거나 책이거나 그림이거나 글이라고 알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진이나 그림을 보거나 책이나 글을 읽거나, 내가 즐겁게 보거나 읽어야 나한테 좋은 사진이거나 그림이거나 책이거나 글입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알뜰히 즐기면서 알차게 받아들이고 아름다이 보듬으면 좋을 여러 가지입니다.

 밥 한 그릇 고맙게 받아서 먹습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며 고맙게 눈을 감습니다. 틈틈이 낯과 손발을 씻거나 물을 마시면서 물이 고맙습니다. 파란하늘 하얀구름 올려다보며 바람이 반갑습니다. 내 삶을 이루는 고마운 여러 가지가 내가 즐기는 사진이 되고 책이 되며 그림이 됩니다. (4344.2.1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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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우리 말 77] 자원봉사camp

 ‘camp’는 ‘캠프’ 아닌 ‘camp’여야만 할까 궁금하다. 한글로 적는다고 그다지 반갑지 않으나, 알맞게 우리 말로 풀어내려 생각하지 않고 아예 영어이자 알파벳으로 적어야만 하는 까닭이 궁금하다. (4344.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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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30.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놀다가 곯아떨어진 아이. 

 

수첩에 꼬물꼬물 그렸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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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학수업 - 장백총서 1
막심 고리키 / 장백 / 1989년 4월
평점 :
절판


숨막히는 서울과 숨막는 도시
― 막심 고리끼, 《나의 문학수업》


- 첵이름 : 나의 문학수업
- 글 : 막심 고리끼
- 옮긴이 : 김휴
- 펴낸곳 : 장백 (1989.4.1.)


 참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서 살거나 서울 둘레에서 삽니다. 아마 우리 나라 사람 가운데 1/2은 서울이나 서울 둘레에서 살아가지 싶어요. 서울은 자꾸 커질밖에 없고, 자꾸 커지더라도 바글바글 웅성거리는 사람들로 비좁아 서로가 서로를 더 따스하거나 넉넉히 바라보거나 감싸안기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가야 하며, 살아숨쉬어야 하니까요.

 옛말에 열 사람이 밥 한 숟가락씩 덜어 밥 한 그릇을 마련한다고 했습니다. 열한 사람이 있을 때에 한 사람을 열 사람과 같이 먹여살릴 만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서울이라는 곳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몰렸습니다. 열 사람이 아닌 다섯 사람이 한 숟갈을 나눈다기보다 두 사람이 한 숟가락씩 나눕니다. 열 사람이 열 숟가락을 나누면, 이 열 숟가락으로 다른 한 사람도 버틸 만할 뿐 아니라 살아갈 수 있고, 다른 열 사람도 버틸 만할 뿐 아니라 살아갈 만합니다. 그러나 다섯 사람한테서 한 숟갈을 얻으면? 다섯 숟갈 밥을 먹는 사람도 살아갈 만할까요? 한 숟갈만 나누어 준 다섯 사람이야 먹고살 만하겠지요. 딱 둘이 있는데, 한 사람한테서 한 숟가락만 얻는다면? 한 숟가락 먹는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한 숟가락만 나누어 준 한 사람이야 먹고사는 걱정이 없겠지요.

 서울에서 살아가거나 서울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꾸자쑤 새로운 도심으로 다시 몰립니다. 서울로 몰린 다음에 ‘또다른 새 서울’을 만들어 더 몰립니다. 더 겨루고 더 싸우며 더 복닥입니다. 서울로 가면 어떻든 일자리도 있고 먹고살 구멍이 있겠거니 여기던 사람들은 ‘그냥 서울’이 아닌 ‘새로 만드는 또다른 서울’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무너져 내립니다. 땅 팔고 소 팔며 집 팔아 서울로 온 사람들이 무엇을 팔아 ‘새로 만드는 또다른 비싼 서울’에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일찍부터 돈과 힘과 이름으로 새 서울을 이룩한 사람들이 뭣하러 가난뱅이 다른 동네 사람을 끼워 주겠습니까.

 예전부터 서울에서 살던 사람이나 새롭게 서울로 찾아든 사람이나 똑같이 팍팍합니다. 나누기보다 지키려고 메마르면서 팍팍하고, 나누기보다 얻으려고 쓸쓸하면서 팍팍합니다. 출판사나 헌책방이 서울에 많이 몰렸기에, 볼일을 보러 서울로 마실을 다녀와야 할 때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몰려든 서울에서 북적이거나 치이거나 밀리느라 숨이 막히며 괴롭습니다. 볼일은 보고 책방마실도 한다지만, 살내음과 꽃내음과 흙내음과 바람내음과 햇살내음을 맡거나 나눌 수 없는 터전에서는 가슴이 시리고 속이 아픕니다.


.. 나는 내가 한 사람의 좋은 일꾼이라는 데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자신의 일과 모든 노동을 사랑하기 대문이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도 나는 도처에 수없이 존재하는 인간 중의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 곳곳에서 성장하고 있는 아주 보편적인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노동자의 위치를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  (65∼66쪽)


 서울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서울에서 손꼽히는 몇몇 대학교에 내 아이를 보내고 싶어 안달을 할밖에 없습니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터라 서울에서 손꼽히는 몇몇 대학교에 내 아이를 보내자면 고등학교와 중학교부터 잘 골라서 넣으려고 애쓸밖에 없습니다. 초등학교부터 더 빠듯하게 굴려야 하고, 이 학원 저 학원 안 넣을 수 없습니다. 돈이 있건 없건 아이는 어린 나날부터 숱한 학원에 얽매여야 하고, 어버이는 아이를 학원에 보낼 돈을 벌어들여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대학교바라기를 하기에 아이들과 살가이 마주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생각을 주고받기 힘듭니다. 대학교바라기를 접고는 일자리 마련하여 돈벌기를 바랄 때에도 즐거이 찾아 즐거이 붙잡을 일거리보다는 오래도록 넉넉히 돈을 벌어들일 일자리를 살필밖에 없습니다. 즐거울 일을 즐겁게 살피며 즐거이 이야기꽃을 피우기보다는, 돈이 될 일자리 이야기를 나누면서 돈이 될 일자리를 얻자면 어떠한 돈구멍을 찾아야 하느냐는 이야기에 머물고 맙니다.


.. 사람들은 이들을 깔아뭉개는 일을 즐거워하지만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에는 무관심하며, 항상 냉혹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 레닌은 ‘바보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항상 필요한 것을 말해 왔다. 그에게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벌써 35년 전에 ‘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거부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그의 전 생애 속에서 부르조아 문화라 할지라도 가치가 있는 것은 조금도 부정하지 않았다. 부르조아 문화 속에 있는 가치있는 것이야말로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며, 모든 노동 부문과 문학 부문에 있어서 ‘훈련’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 바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 그룹 간의 알력과 불화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만약에 ‘인정된 재능’과 문학의 수호자들이 이기심과 자만심에 의해서 그 불화를 격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면, 또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민을 이 논쟁 속에 나누어 싣지 않는다면, 이 불화는 훨씬 더 교휸적인 유익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 각자 한 마리씩 자신의 집을 짓고 사는 거미처럼 생활하면서, 자신의 생활방식 이외에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즉 마음의 저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소시민들은, 생활에 대한 새로운 관계가 폭풍처럼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불만을 느끼고 있다 ..  (69, 71, 144쪽)


 도시를 버리고 시골로 가야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도시가 시골로 탈바꿈할 수 있을 테니까요. 서울을 떠나 작은도시나 시골로 가야 제대로 살아숨쉰다 할 수는 없습니다. 서울도 얼마든지 서로서로 사랑하며 살아숨쉴 터전으로 거듭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이 나라 도시가 시골다움을 사랑할 듯하지는 않습니다. 이 나라 서울이 시골스러움을 받아들일 듯하지는 않아요.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터전이 없고, 아이들이 자동차 걱정을 하지 않고 신나게 내달릴 골목이 없으며, 아이들이 돈벌이와 대학교와 아파트 근심을 하지 않으며 배울 만한 마당이 없는 도시요 서울입니다.

 어린이가 푸름이를 거쳐 어른이 되어서 할 일이란 ‘돈버는 일’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돈버는 기계’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이지, 기계가 아닙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여야지 시험점수 잘 따는 기계가 아닙니다.

 막심 고리끼 님은 《나의 문학수업》에서 사람다이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문학으로 무엇을 담아 누구하고 어디에서 어떤 이야기를 왜 나눌 때에 아름답거나 즐거운가 하고 밝힙니다. 문학이란 그예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4344.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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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2-10 16:40   좋아요 0 | URL
ㅎㅎ 참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서울이란 곳은 삶이 매우 팍팍한 곳이죠.그리고 공기 역시 답답하네요ㅡ.ㅜ

파란놀 2011-02-10 19:45   좋아요 0 | URL
답답하거나 갑갑하지 않을 때에 홀가분하면서 아름다울 수 있는데,
이러한 결과 삶을 자꾸 놓거나 잃구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