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개 책읽기


 서당개 세 해면 글을 왼다 했습니다. 서당 곁에서 글 외는 소리를 가만히 듣기를 세 해째 지내면 개조차 저도 모르게 서당글을 줄줄 왼다는 소리입니다. 이런 서당개 책읽기를 들며 곧잘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배운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서당개 책읽기는 책읽기가 아닙니다. 서당개 글외기는 배움 또한 되지 않아요. 뜻이나 느낌이나 생각이 없는 채 기계처럼 줄줄 욀 뿐입니다. 사랑이나 마음이나 꿈이 없는 채 똑같이 따라할 뿐입니다.

 서당개가 논밭개로 바뀐다면, 논밭개는 세 해 뒤에 호미질을 할 줄 알는지 궁금합니다. 논밭개가 바다개로 바뀌면, 바다개는 세 해 뒤에 낚시질이나 그물질을 할 줄 알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서당개 책읽기란 아주 무섭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서당 곁에서 지내는 개조차 세 해가 지나면 ‘좋은지 옳은지 바른지 착한지 참다운지 고운지’를 가리지 않고 글을 외기 때문입니다. 서당개가 외는 글이란 얼마나 좋거나 옳거나 바르거나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울까요.

 서당에서 제아무리 좋거나 옳거나 바르거나 착하거나 참답거나 곱다 하는 글을 읽힌다 하더라도 서당개는 좋은 삶을 배우지 못합니다. 옳은 넋이나 바른 매무새나 착한 얼이나 참다운 길이나 고운 몸가짐을 익히지 못해요. 서당 곁에서 세 해 지난 뒤에 글을 외는 개는 다른 곳에 가면 이내 다른 곳에서 흐르는 글에 익숙해집니다. 다른 곳에서 흐르는 글이 궂은지 뒤틀린지 모자란지 그릇된지 어긋난지 따지지 않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서당개처럼 키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서당개가 아닌 집개가 아닌 사람으로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부터 스스로 옳은 길을 걸으면서 옳은 길을 아이가 느끼며 함께 웃고 울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부터 좋은 일을 흐뭇하게 하면서 아이 또한 곁에서 좋은 일을 흐뭇하게 고 조막손으로 조물락조물락 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살아갈 뿐입니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나날에 앞으로 맞아들일 일이나 놀이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버이 되는 사람이나 어른 되는 사람이나, 또는 교사나 교수나 강사 같은 자리에 서서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서당개 책읽기를 시키면 안 됩니다.

 아이들은 곁에서 지켜보거나 구경한대서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제 몸에 걸맞게 일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저희 몸뚱이에 알맞게 일손을 나누어 맡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몸을 움직여 스스로 겪거나 치러야 배웁니다. 눈으로 지켜보거나 귀로 듣는대서 배울 턱이 없습니다.

 서당개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서당개는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서당개는 서당글에 길들여졌을 뿐입니다.

 서당개와 같이 길들여지는 오늘날 아이들을 바라보면 참으로 무서울 뿐 아니라 슬픕니다. 학원에 길들고 영어에 길들며 한자에 길들고 수많은 지식교육 그림책과 동화책에 길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더없이 무서우면서 슬픕니다. 왜 아이들하고 함께 삶을 나누지 못하는 어른이 되려고 하는가요. 왜 어버이와 교사 되는 이들은 당신 어버이와 교사 삶부터 참다이 사랑하면서 착하게 살아가는 길을 느끼지 못하는가요. (4344.6.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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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59] 오줌그릇

 오줌그릇을 씻는다. 옆지기가 쓰는 오줌그릇을 씻고, 첫째 아이가 쓰는 똥오줌그릇을 씻는다. 옆지기가 쓰는 오줌그릇은 오줌을 여럿 눈 다음에 비우고 나서 씻는다. 첫째 아이가 쓰는 똥오줌그릇은 오줌을 두 번쯤 눈 다음에 비우고 나서 씻는다. 똥을 누면 곧바로 비운다. 오줌그릇을 비우고 나서 물로 헹구고 수세미로 오줌 기운이나 똥 기운을 닦곤 한다. 비가 내리고 나서 냇물이 불었으면 냇가에 흐르는 물에 오줌그릇을 대고는 맨손으로 훌훌 휘저으며 닦는다. 집안 씻는방에서도 수세미를 안 쓰고 그냥 맨손으로 닦곤 한다. 오줌그릇 닦은 손으로 빨래를 하고, 빨래를 한 손으로 쌀을 씻으며, 쌀을 씻은 손으로 밥을 하고, 밥을 한 손으로 둘째 기저귀를 갈며, 둘째 기저귀를 간 손으로 걸레질을 하고, 걸레질을 한 손으로 젓가락을 쥐며, 젓가락을 쥐던 손으로 책을 겨우 집어든다. 모처럼 낱말책을 펼쳐 ‘요강’이라는 낱말을 살핀다. ‘요강’은 한자를 빌어 이래저래 적기도 한다지만 토박이말이란다. 토박이말이면 토박이말이지 왜 굳이 한자를 빌어서 적어야 할까. 밥을 밥으로 적으면 되지 애써 ‘食事’로 적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 오줌이 마려운 사람한테 “요의(尿意)가 있다”고 일컫는 병·의학 전문가들이 무섭다. (4344.6.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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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생각
― 사진과 삶



 사진은 사진기를 써서 이룬 열매를 일컫습니다. 그렇지만, 사진기를 써서 이룬 열매를 모두 사진이라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틀림없이 사진이라 할 테지만, 속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사진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밥을 하면 다 밥이 되겠지만, 밥을 하다가 그만 간장인 줄 알고 염산을 부었다든지, 된장인 줄 알고 흙을 넣으면 어떻게 될는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밥이라 할 테지만, 이러한 밥은 아무도 먹지 못합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얻을 때마다 방사능이 나옵니다. 이 방사능을 막으려고 원자력발전소는 시멘트를 아주 두껍게 바릅니다. 그러나 시멘트벽을 아무리 두껍게 한들 모든 방사능을 막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원자력발전소는 큰도시에서 무척 떨어진 곳에 마련합니다. 이른바 두메나 시골에 마련합니다. 방사능은 아주 조금만 새더라도 사람과 들판과 물 모두를 죽일 수 있습니다. 방사능에 젖으면 아기를 낳을 때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죽거나 팔다리가 없을 수 있습니다. 흔히 가볍게 쓰는 전기라 하지만, 전기는 흔히 가볍게 쓸 만하지 않습니다. 너무 아슬아슬하게 다루면서 쓰기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두메나 시골은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도 괜찮은 곳일까 궁금합니다. 두메사람이나 시골사람은 방사능덩어리를 곁에서 떠안으면서 살아야 할 목숨인지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쓰는 전기를 왜 도시에서 안 만들고 두메나 시골에 발전소를 짓고, 길디긴 전깃줄을 드리워 도시로 가져가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이들은 말 그대로 사진기를 손에 쥐고 사진을 찍습니다. 다만, 사진을 찍으면서 놀이를 즐기려 한다면, 이들은 ‘사진을 찍는다’기보다 ‘놀이를 한다’고 해야 옳습니다. 모델이 되는 사람들이 사진쟁이 앞에서 ‘사진기를 들고 놀’ 때에도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놀이’라 하거나 ‘모델’이라 하겠지요.

 멋스러이 보이는 사진을 노리는 분들이 퍽 많습니다. 사람들이 멋스러이 바라보기를 바랄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도 멋스러이 느끼고픈 사진을 노린다 할 만합니다. 이분들 또한 겉으로 보기에는 ‘사진찍기’를 한다 여길 텐데, 속으로 본다면 ‘멋부리기’를 하는 셈입니다. 멋부리기는 멋부리기이지 사진찍기는 아니에요. 사진찍기는 멋부리기가 아니라 사진찍기입니다.

 사진을 찍어 그러모은 다음 사진잔치를 마련하는 분이 많습니다. 저도 사진잔치를 스무 차례 가까이 했습니다. 사진잔치를 마련할 때에는 그동안 내가 걸어온 사진길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앞으로 걸어갈 사진길을 새롭게 살펴보려는 뜻입니다. 땀흘려 찍은 사진을 이웃한테 선보이면서 내 이웃이 내 사진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맑아지거나 흐뭇해지기를 바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 이웃이 내 사진을 바라보며 좋아해 주거나 사랑해 주기를 빌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사진으로 내 삶을 좋아하거나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내가 내 밥그릇을 비우면서 끼니를 때울 때에 내 몸을 북돋우고 내 삶을 이을 마음이지, 내가 내 밥그릇을 비우면서 내 이웃이 배가 부르리라 여길 수 없어요. 내 사진잔치는 오로지 내 사진길을 밝히거나 채우는 잔치마당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잔치를 마련하면서 ‘내가 맞아들여 나를 북돋우는’ 뜻이 아니라 ‘남한테 내보여 남한테 평가(값매김)를 받으려’ 하는 이가 꽤 많습니다. 전시관마다 수많은 사진잔치를 꾸준히 잇고, 신문과 잡지와 방송마다 새로운 사진잔치를 알립니다. 사진잔치는 왜 알리고 어떻게 알리며 누구하고 나누는 자리일까요.

 사진은 삶입니다. 사진은 바로 내 삶입니다. 내가 찍는 사진은 내가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삶입니다.

 내 삶이 겉치레와 같이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거들먹거리거나 자랑하려는 매무새라 한다면 내 사진 또한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 그럴듯하게 보여주거나 멋스러이 보여주려는 매무새가 되고 맙니다.

 내 삶이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는 데에 맞추어졌다면, 내 사진 또한 돈을 벌 만한 사진찍기로 기울어집니다. 내 삶이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듯이 ‘역사에 남을 사진 한 장’을 꾀하는 데에 맞추어졌으면, 내 사진 또한 이름값을 높이거나 얻거나 누리는 데로 치우칩니다.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살며, 살아가는 대로 바라보고, 바라보는 대로 살다가, 사진기를 쥐어 사진 한 장 찍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하고 왜 어떻게 살림을 꾸리는 한 사람일까 곰곰이 헤아립니다. 나는 사랑을 바라는 사람인지 돈값을 꾀하는 사람인지를 가만히 되뇝니다. 나는 꿈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나는 착하게 살고픈 사람인지, 나는 어여쁜 살림살이를 아끼고픈 사람인지 찬찬히 곱씹습니다.

 멋부리는 삶은 그럴듯하겠지만, 따사로운 삶은 아름답습니다. 이름있는 삶은 빛나겠지만, 너그러운 삶은 참답습니다. 사진 한 장, 그림 한 점, 글 한 줄, 만화 한 쪽, 노래 한 가락, 춤 한 사위, 어느 곳에서나 예쁜 넋이 어리는 예쁜 삶이 고마우면서 반갑습니다. (4344.6.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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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58] 거스러기

 거스러기는 아주 작습니다. 거스러기는 딱히 생채기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자그마한 거스러기 하나가 나면 손을 쓸 때마다 따끔거립니다. 거스러기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겨 떼어내든 손톱깎이로 자르든 해야 합니다. 짐을 나르건 설거지를 하건 빨래를 하건 아이를 안건 아기 기저귀를 갈건 책을 읽건 거스러기가 자꾸 걸립니다. 몸이 튼튼할 때에는 거스러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몸이 여릴 때에는 거스러기가 시나브로 생깁니다. 몸이 힘들거나 고단한 날 무언가를 하다가 자꾸 걸리적거리기에 손가락을 들어 바라보면 거스러기가 생겼습니다. 엊저녁, 둘째 오줌기저귀를 갈고 나서 손톱깎이를 찾습니다. 거스러기를 똑똑 자릅니다. 오른손가락에는 하나도 없으나, 왼손가락에는 예닐곱 군데가 있습니다. 뭐에 살짝 긁히더라도 물이 닿으면 쓰라리거나 따끔합니다. 집밖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뭐에 살짝 긁힌 만큼이라면 아무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손끝에 거스러기가 생기더라도 호미질과 낫질과 괭이질을 할 때에는 마음쓰이지 않을 뿐더러 실장갑을 끼면 됩니다. 집안에서 밥을 하고 아이를 돌보며 빨래를 하다가는 설거지를 하는 틈틈이 걸레를 빨아 닦든지 치우든지 하는 살림꾼은 아주 자그마한 생채기나 거스러기 하나 때문에 힘들거나 아픕니다. 거스러기는 사투리라 하고, 서울말은 거스러미입니다. (4344.6.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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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6-05 22:37   좋아요 0 | URL
거스러기라 참 오랫만에 들어보는 단어네요^^
 



 들꽃을 꺾어서


 읍내 장마당 마실을 가는 길목, 두 시간에 한 대 오는 시골버스를 기다린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버스가 몇 분 늦는다. 아이는 “버스가 늦네.” 하고 말하다가는 버스타는곳 둘레 풀밭에서 들꽃을 꺾는다. 꺾은 들꽃을 한손에 모아 쥔다. 이윽고 시골버스가 들어온다. 읍내로 가는 십이 분쯤 되는 길을 지나고, 읍내에 닿아 우체국에 볼일 보러 가는 길에서 몇 분 더 흐른다. 아이가 손에 쥔 꽃은 그새 고개를 폭 숙인다. 더운 날씨에 금세 시들고 만다. “꽃이 벌써 시드는구나. 흙에 놓고 가자. 꽃한테 미안하다고 말하자.” 아이는 손에 쥐던 꽃무더기를 흙자리에 살며시 내려놓는다. (4344.6.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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