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도 1번 걷기여행 - 주머닌 가볍고 꿈은 무거운 철부지 두 남자의 에세이포토
신미식.이민 글 사진 / 뜰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20

 


내 마음 돌아보는 사진마실
― 대한민국 국도1번 걷기여행
  신미식·이민 글·사진
  뜰 펴냄,2010.8.18./15000원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바다가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바다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바닷물을 늘 만지면서 살아갑니다. 바다가 아이들 보금자리입니다. 숲속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숲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숲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나무와 풀을 늘 만지면서 살아갑니다. 숲이 아이들 보금자리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거의 모두 도시에서 태어나 자랍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도시가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도시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도시 물질문명을 늘 만지면서 살아갑니다. 오늘날 아이들로서는 도시가 아이들 보금자리입니다. 도시가 아이들 삶자리요, 배움자리이고, 사랑자리이거나 꿈자리가 되겠지요.


  바닷가 아이들은 바다를 숨쉬면서 바다를 가슴 깊이 받아들여 바다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숲속 아이들은 숲을 숨쉬면서 숲을 가슴 깊이 맞아들여 숲 이야기를 노래로 부릅니다. 도시 아이들은 도시를 숨쉬면서 도시를 가슴 깊이 아로새기며 도시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겠지요.

  도시 아이들은 어떤 도시를 어떤 빛깔과 무늬와 냄새로 아로새길까요. 도시 아이들은 어떤 도시 어떤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을까요. 도시가 들려주는 소리에 익숙한 아이들이 시골로 가서 들과 메와 내와 숲을 바라본다면 무엇을 바라보거나 느끼거나 살피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요.


  신미식·이민 두 분이 쓰고 찍은 《대한민국 국도1번 걷기여행》(뜰,2010)을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신미식·이민 두 분은 어느 마을 어느 보금자리에서 태어나 어떤 꿈과 사랑을 꽃피우면서 살아왔을까요. 두 분은 이 나라 국도1번을 거닐면서 어떤 꿈과 사랑을 즐기거나 누리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었을까요. “40년을 넘게 살면서(사실은 50에 가깝다)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던 밥이 있기나 했던가? 기억에 없다. 모든 밥상은 늘 당연한 것이었다. 오늘은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33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이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으니, 이제부터 ‘밥 한 그릇 즐겁게 먹으면서, 사진 한 장 즐겁게 찍는’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살아가는 즐거움’을 언제나 돌아보고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는 즐거움’이 어디에 밑뿌리를 두는가를 슬기롭게 깨달을 수 있으려나요.


  아이들은 값비싼 놀잇감이 있어야 재미나게 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값진 놀잇감이 여럿 있거나 잔뜩 있어냐 신나게 놀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는 돌멩이 하나가 대단한 놀잇감입니다. 아이들로서는 모래밭이나 흙땅이 너른 놀이터입니다. 돌멩이를 만지작거리고 나뭇가지를 쥐면서 스스로 놀이를 빚습니다. 모래밭에서 뒹굴거나 흙땅에 돌멩이로 금을 죽죽 그리면서 저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빚습니다. 즐겁게 놀기 때문에 굳이 놀잇감이 없어도 됩니다. 즐겁게 노는 만큼 어떤 규칙이나 원칙이나 틀이나 제도나 정책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림을 이렇게 그리라는 법이 없고, 글을 저렇게 쓰라는 법이 없어요. 곧, 사진을 어찌저찌 찍어야 하는 법은 없어요. 스스로 가장 즐거울 때에 가장 즐겁게 찍는 사진이요, 스스로 가장 즐거이 누리는 삶일 적에 가장 즐겁게 읽는 사진이에요.

  어떤 장비가 있기에 어떤 사진을 찍지 않아요. 마음속으로 어떤 모습을 살가이 그리면서 어떤 삶을 일구느냐에 따라 ‘어떤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갈려요. 어떤 사진스승을 만나야 하지 않아요. 스스로 어떤 마음이 되어 어떤 눈길을 어떤 사랑이 되어 살아가느냐에 따라, 내 사진을 스스로 이루고픈 대로 이룰 수 있어요.


  두 사람은 “작고 깡마른 까까머리 경상도 아저씨가 휴일 아침, 유창한 경상도 말씨로 낯선 이에게 담배 한 개비를 청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가장 전라도 같은 도시인 목포의 아침 풍경인 것을(26쪽).” 하고 느끼며 국도1번 나들이를 합니다. “예상치 않은 곳에서 발견한 옛것에 대한 흔적에 흠뻑 취한 우리의 걸음은 더디다. 잘 다듬어진 국도1번과 콘크리트 블록으로 담장을 세운 마을은 우리의 시선과 발길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우리가 찾고자 했던 고향, 시골, 시골스러운 것은 큰길에서 벗어난 곳에 있다(93쪽).” 하고 느끼며 국도1번을 걷다가는 국도1번에서 벗어나 걷습니다. 곧, 국도1번 나들이라 하더라도 국도1번만 걸어야 할 까닭이 없어요. 티벳을 걷는 나들이라 하더라도 네팔부터 티벳으로 걸어갈 수 있고, 티벳부터 몽골까지 걸을 수 있습니다.

  사진으로 ‘푸름이(청소년)’를 찍는다고 생각해 보셔요. 딱 오늘 이 자리에서 푸름이인 아이만 찍어야 하지 않아요. 어제까지 어린이였다가 모레부터 푸름이가 될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요. 어제까지 푸름이였고 오늘부터는 여느 어른이 된 사람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요.

  틀이란 없습니다. 스스로 즐기거나 누리면서 ‘바라보는 눈길’이 있습니다. 내 눈길에 따라 내 마음을 살포시 담는 글이요, 내 눈길에 따라 내 마음을 가만히 담는 사진입니다.


  “우리가 생각한 최초의 근대식 도로, 또는 근대사의 애환이 서린 향수 가득한 길, 낭만적인 고향 등 이런 것들은 대부분 국도1번과 조금씩은 벗어나 있다는 것. 그래서 무작정 국도1번을 따라 걸을 것이 아니라 국도1번의 언저리를 걸어야 당초 우리가 목적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94쪽).”과 같은 대목을 읽고, “이 마을 저 동네의 고삿과 담장을 기웃거리고 간혹 마을사람들 눈치 봐 가며 까치밥으로 남겨 둔 홍시도 슬쩍해 빨아먹고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에 눈도장도 찍고 논두렁 밭두렁에 발자국을 찍는다(235쪽).”와 같은 대목을 읽습니다. 마실길에 나선 사람은 이제껏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을까요. 오늘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앞으로는 어떤 마음으로 추스르며 살아가고 싶을까요.

  사진마실을 하든 그림마실을 하든 글마실을 하든, 마실길에 나선 이는 ‘다른 사람 삶’을 기웃기웃 구경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 삶을 마주하면서 ‘내 삶이 여태껏 어떻게 흘렀는가’를 깨닫습니다. 나와 다른 곳에서 나와 다른 삶을 일구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내 삶을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느낍니다.


  멋스러운 길을 찾아보려는 마실길이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멋스럽게 바라보면서 내 보금자리를 어떠한 멋으로 보듬는가를 알아보려고 떠나는 마실길입니다. 마땅한 노릇이에요. 멋스러운 길이라 한다면 내가 늘 살아가는 마을길이어야 해요. 어쩌다 한 번, 또는 내 삶을 통틀어 꼭 한 번 찾아갈 만한 멋스러운 길이라면 ‘멋스러운’ 터가 되지 못해요. 내가 살아가고 싶을 뿐 아니라, 참말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데가 멋스러운 터입니다. 곧, 내가 살아가며 기쁘게 북돋우는 사진이 ‘내 사진’입니다. 내 온 사랑을 담는 사진일 때에 ‘내 사진’입니다. 내가 하루하루 찬찬히 이루면서 빛내는 꿈을 싣는 사진일 때에 ‘내 사진’이에요.


  국도1번은 왜 국도1번일까요. 국도1번이라는 숫자에는 어떤 뜻이 깃들까요. 국도2번이나 3번은, 4번이나 5번은, 11번이나 45번은, 111번이나 368번은, 1111번이나 2345번은 저마다 어떤 뜻이 깃들까요.


  국도1번이 아니더라도 지방도로 2745번 길을 찬찬히 거닐며 마을살이를 곱다시 돌아볼 수 있으면 됩니다. 이름이 붙지 않는 조그마한 골목길을 차근차근 거닐며 동네살이를 예쁘게 돌이켜볼 수 있으면 됩니다. 내 살림집에서 부엌과 마루를 오가며 누리는 하루를 곰곰이 되새길 수 있으면 됩니다.


  나는 어느 길에 서나요. 우리 아이는 어느 길에 서나요. 내 옆지기와 이웃과 동무는 저마다 어느 길에 서나요. 이 길에서 우리들은 어떤 꿈을 먹으며 하루를 누리는가요. 이 길에서 나는 어떤 사랑을 꽃피우면서 사진 하나에 웃음 한 조각 싣는가요.


  사람들은 누구나 날마다 ‘내 마음 돌아보는 사진마실’을 누립니다. 스스로 늘 느끼는 사람이 있고, 스스로 언제나 못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잣거리에 파 한 묶음 사러 다녀오는 길도 마실입니다. 아이 손을 잡고 어린이집을 오가는 길도 마실입니다. 바람을 쐬러 마당에 내려서서 하늘바라기를 하며 기지개를 켜는 길도 마실입니다. 밥을 차려 마루에 밥상을 내놓는 길도 마실입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잠자리에 드는 길도 마실입니다. 삶은 언제나 마실입니다. 웃음이 피어나고 눈물이 젖기도 하는 고운 마실입니다. 4345.11.2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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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배우는 책읽기

 


  가르치는 사람은 늘 배우는 사람입니다. 나는 국민학교 여섯 해와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다니는 동안, ‘나와 동무를 가르치는 자리’에 선 분들이 당신 스스로 얼마나 배우려 했는가를 살피면서 삶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당신 스스로 즐겁고 힘차게 배우는 분들을 볼 때면, 이분들한테서는 말투 하나 말씨 하나 살뜰히 돌아보면서 내 마음밥으로 삼습니다. 당신 스스로 배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언제나 판박이 같은 앎조각만 잔뜩 늘어놓는 분들을 볼 때면, 이분들한테서는 저러한 어른으로 지내는 삶이란 얼마나 따분하고 쓸쓸한가 하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려면, 먼저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누군가 읽을 글을 쓰려면, 먼저 스스로 즐거이 돌아볼 글(삶)을 읽어야 합니다. 곧, 글(삶)을 쓰려면 책(삶)을 얼마나 깊고 넓게 읽느냐에 따라 내 글매무새가 달라지는 줄 느껴야 합니다. 삶은 종이책에만 담기지 않습니다. 삶은 종이책에도, 나뭇가지에도, 풀잎에도, 나비 날갯짓에도, 아이들 웃음에도, 할머니 일노래에도, 파란하늘 흰구름에도, 달빛과 별빛에도, 목숨을 살리는 흙에도, 따사로운 볕에도 고이 담깁니다. 책(삶)을 읽으려는 사람은 내 둘레 모든 책(삶)에 서린 이야기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럴 때에, 글(삶)을 쓰면서 내 고운 이웃과 동무한테 아름다운 글(삶)을 들려줄 수 있어요.


  종이책조차 제대로 읽지 않으며 사람책이나 숲책을 읽지 않는다면 스스로 바보가 됩니다. 종이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종이책에 서린 삶을 헤아리지 못하면, 이야기샘을 길어올리지 못합니다. 4345.11.2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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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 물결 책읽기

 


  옆지기 동생 시집잔치에 맞추어 시골집을 떠나 순천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온 다음, 용산역에서 택시를 불러 일산으로 타고 들어온다. 저녁에 나서는 길이라 고속철도 한 가지밖에 달리 길이 없는데, 한밤에 서울에 닿는 고속철도는 사람들이 느긋하게 자거나 쉬도록 불을 꺼 주지 않는다. 훤히 밝은 기찻간에서 어른들은 어른 나름대로 눈을 감고 잔다지만, 아이들은 훤히 밝은 데에서 잘 생각이 없다. 여기저기 부산스레 뛰고 움직이면서 놀려 한다.


  용산역에서 내려 택시를 부르는데, 서울은 온통 아파트 물결에 자가용 물결이요 사람들 물결이다. 이 어마어마한 물결이 서울을 버티는 힘일 테지. 서울에서 살아가는 천만이라는 숫자와 서울을 드나드는 숱하게 많은 숫자는 이 나라를 쥐락펴락 하는 힘이 되겠지. 자유로라는 길을 타고 한참 달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가용 물결이 수그러든다. 자정이 가까운 밤조차 서울 찻길에는 자가용이 흘러넘친다. 천만 사람이 천만 자가용을 굴릴까. 서울에는 자가용이 얼마나 많이 굴러다닐까. 자가용 곁에 짐차나 버스는 또 얼마나 많이 굴러다닐까.


  아파트 높은 벽이랑, 아파트 번들거리는 불빛이랑, 수많은 자가용 불빛은 깊은 밤 까만 하늘빛을 뿌옇게 바꾸어 놓는다. 이들은 낮에도 파란 하늘빛을 뿌옇게 바꾸어 놓는다. 밤을 밤처럼 누릴 수 없기에 낮을 낮처럼 누릴 수 없다. 자가용을 모는 이는 다른 자가용을 바라볼 뿐, 하늘이나 한강이나 나무를 바라보지 않는다. 버스나 택시에 탄 사람 또한 다른 자가용에 눈길을 보낼 수 있을 뿐, 하늘이건 한강이건 나무이건 눈길을 보내기 어렵다. 땅밑을 오가는 전철을 타는 사람은 무엇을 보아야 할까. 온통 광고판으로 덕지덕지 어지러운 모습을 보아야 할까.


  숲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늘 숲을 보면서 숲내음을 맡고 숲사랑을 누리며 숲꿈을 꾼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늘 서울살이에 익숙하면서 어떤 내음을 맡고 어떤 사랑을 누리며 어떤 꿈을 꿀 수 있을까. 시골에도 서울에도 고운 내음이 감돌기를 빈다. 시골에도 서울에도 맑은 사랑이 싹트기를 빈다. 시골에도 서울에도 환한 꿈이 피어나기를 빈다. 4345.11.2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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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0원

 


  옆지기 여동생이 12월 1일에 혼례잔치를 한다. 전남 고흥에서 경기 일산까지 머나먼 길을 가야 하기에 오늘 새벽에 길을 나서려 했는데, 옆지기랑 아이들 모두 어젯밤 해롱거리며 골골대기에, 오늘 새벽 기차표를 물린다. 시골집에서는 새벽부터 길을 나서고, 순천 기차역에서는 아홉 시 반 즈음 타는 기차인데, 인터넷으로 표를 물리니 400원씩 떼어 돌려준다. 생각해 보면, 인터넷이 있으니 시골집에서도 기차표를 미리 끊는다. 인터넷이 있기에 시골집에서도 기차표를 물린다. 인터넷이 없다면 기차역까지 가서 미리 끊어야 할 뿐 아니라, 차편이 있을까 없을까 모르는 채 기차역까지 가야 한다.


  고흥에서 보면, 날줄이 위쪽인 보성이나 장흥만 하더라도 눈발이 날린다고 할 만한 날씨라지만, 고흥은 눈은커녕 햇볕만 따사롭다. 포근한 바람이 불고 따순 구름이 흐른다. 해남 끝자락이나 강진 끝자락은 어떨까. 그곳도 고흥처럼 포근한 바람과 따순 구름 흐르는 맑은 날을 누리려나.


  기차표를 물리며 짐꾸리기도 안 한다. 짐꾸리기를 안 하며 살짝 멍한 채 새벽을 맞이하다가, 누런쌀을 씻어서 불리고 미역을 끊어서 불린다. 아침에 미역국을 끓이면서 밥을 새로 짓는다. 이듬날은 어찌 될까. 이듬날에 길을 나설 수 있을까. 아니면 모레에 길을 나서야 할까. 아니면 마음으로만 인사를 띄우고 우리 식구는 시골집에 조용히 머물까.


  마을에는 우리 집 아이들 노랫소리만 고즈넉히 울려퍼진다. 4345.11.2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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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어떻게 쓰는가
[말사랑·글꽃·삶빛 36] 한국말·이중언어·세 갈래 말

 


  한국사람은 한국글, 곧 ‘한글’로 글을 씁니다. 한국사람이 쓰는 글은 모두 한글이라 할 만한데, 요즈음은 한글 아닌 알파벳으로 글을 쓰는 분이 퍽 많습니다. 이를테면 ‘아름다움’이라 말하지 않고 ‘뷰티’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아예 ‘beauty’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있어요. ‘빨강’이나 ‘붉음’이라 말하지 않고 ‘레드’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아예 ‘red’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있고요.


  한국말이 없기에 영어를 쓰지 않습니다. 한국말보다 영어가 익숙하다고 느끼기에 영어를 씁니다. 한국말보다 영어를 쓸 때에 돋보인다고 여겨 영어를 씁니다. 그래서, 영어가 오늘날처럼 널리 쓰이기 앞서 예전 사람들은 한자를 즐겨쓰곤 했어요. 왜냐하면, 예전에는 한자를 드러내어 적고, 한자말을 더 많이 쓰면 남보다 돋보인다고 여겼으며, 남보다 잘나거나 똑똑해 보인다고 여겼거든요. 그러니까, 예전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한국말이 있어도 ‘우아’라 말하곤 했으며, 글을 쓸 적에는 ‘優雅’처럼 적기도 했어요. ‘빨강’이나 ‘붉음’ 아닌 ‘적색’을 말하면서 ‘赤色’처럼 적기도 하고요.


  이 같은 말흐름을 살핀다면, 한국사람은 여느 자리에서조차 세 갈래 말을 쓴다고 할 만합니다. 첫째, 한국말. 둘째, 한자말(또는 중국말이나 일본말). 셋째, 영어(또는 미국말).


  그런데 세 갈래 말을 쓰는 한국사람 모습을 살피면, 한자말을 즐겨쓰는 사람은 한자말을 도드라지게 쓰지, 영어를 도드라지게 쓰지는 않아요. 더러 영어를 섞기는 하지만, 한국말보다 한자말을 높이 사서 이야기합니다. 영어를 즐겨쓰는 사람은 영어를 도드라지게 쓰지, 한자말을 도드라지게 쓰지는 않아요. 곧잘 한자말을 섞기는 하더라도, 한국말보다 영어를 높이 사며 이야기해요.


  간추려 말하자면, 한국사람은 세 갈래 말을 쓰는 슬픈 겨레인데, 한 사람씩 따로 놓고 보자면 ‘두 갈래 말(이중언어)’로 살아가며 생각과 마음과 앎조각을 밝힌다고 하겠어요.


  체코사람 카렐 차페크 님이 쓰고 한국사람 홍유선 님이 옮긴 《원예가의 열두 달》(맑은소리,2002)이라는 책을 읽다가 102쪽에서 “그러나 그 시간에도 태양열은 점점 더 뜨거워진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이 글월에서 ‘그 시간’과 ‘태양열’과 ‘점점 더’를 헤아려 보겠습니다.


  먼저, ‘시간(時間)’은 “(1)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를 뜻한다는 한자말입니다. 뜻풀이를 더 살피면 “(2) = 시각 (3) 어떤 행동을 할 틈 (4) 어떤 일을 하기로 정하여진 동안 (5) 때의 흐름”처럼 나와요. 곧, ‘시간’은 ‘시각’이라는 한자말하고 이어지면서, ‘틈’과 ‘동안’과 ‘때’라는 한국말하고 이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곰곰이 짚어 보고 싶습니다. 한자말 ‘시간’이 한겨레 말삶에 언제부터 스며들었을까요. 1800년대에 시골에서 흙을 일구던 옛사람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1400년대에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옛사람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200년대에 들판을 달리며 뛰놀던 옛 아이들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시간표’라느니 “시간이 몇 시쯤 되었나요” 하는 자리에서는 ‘시간’이라는 한자말을 어찌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내가 1800년대나 1400년대나 200년대를 살아가는 한겨레였다고 생각하면, 그무렵 나는 ‘때’나 ‘틈’이나 ‘겨를’이나 ‘사이’나 ‘동안’이나 ‘참’ 같은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었겠구나 싶어요.


  다음으로, ‘태양열(太陽熱)’은 “태양에서 나와 지구에 도달하는 열”이라고 합니다. 문득 궁금해서 ‘햇볕’ 말풀이를 찾아보니 “해가 내리쬐는 뜨거운 기운”이라고 합니다. 한자말 ‘태양열’을 풀이할 적에는 ‘도달(到達)’과 ‘열(熱)’이라는 한자말을 빌어서 쓰고, 한국말 ‘햇볕’을 풀이할 적에는 ‘내리쬐는’과 ‘뜨거운 기운’이라는 한국말을 빌어서 쓰는군요.


  나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하기에 언제나 ‘햇볕’과 ‘햇살’과 ‘햇빛’과 같은 낱말을 씁니다. ‘해’와 ‘해님’과 ‘햇무늬’와 ‘햇결’과 ‘해구름’ 같은 낱말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마지막으로, ‘점점(漸漸)’은 “조금씩 더하거나 덜하여지는 모양”을 가리키는 일본 한자말입니다. 말풀이에 나오듯 ‘조금씩’으로 바로잡을 낱말인데, 다른 한국말로는 ‘차츰’과 ‘자꾸’와 ‘꾸준히’와 ‘지며리’ 들이 있어요. 그러나,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옳고 바르며 알맞고 아름다이 쓰는 매무새를 스스로 잃는 한국사람은 자꾸 ‘점점’이나 ‘점차(漸次)’나 ‘차차(次次)’ 같은 한자말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다른 사람이 ‘차츰·자꾸·꾸준히’ 같은 낱말로 이야기를 하면 잘 알아듣기는 하되, 스스로 이러한 한국말을 쓸 줄 몰라요. ‘햇볕·햇살·햇빛’이라는 말을 누군가 쓸 때에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막상 스스로 이러한 낱말로 이야기를 엮지 못해요.


  두 말을 쓰는 한국사람이지만, ‘알아듣기만 두 말’일 뿐 ‘쓸 때에는 한 말을 쓰는’ 한국사람인 셈입니다. ‘알아듣기로는 세 말’인데 ‘쓸 때에는 한 말을 쓰는’ 한국사람인 꼴입니다.


  한국말은 ‘마음’이지만, 한자말을 쓰는 분들이 ‘정신(精神)’이라는 낱말을 널리 쓰면서, 한국말 ‘마음’은 쓰임새가 줄거나 뜻 테두리가 오므라듭니다. 이런 말흐름에서 ‘마인드(mind)’라는 영어가 스며들고, 요즈음에는 ‘멘탈(mental)’이라는 영어가 새롭게 스며듭니다. 이리하여, 요즈음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마음’이라는 낱말조차 들을 일이 매우 드물어, 누군가 ‘마음’이라는 낱말을 쓰면 그럭저럭 알아듣는다고는 하지만, 정작 스스로 어느 자리에 어떻게 ‘마음’이라는 낱말을 넣어 제 이야기를 펼쳐야 할는지를 몰라요. “심적(心的)으로 괴롭다”고 말하면서 “마음이 괴롭다”고 말하지 못하며, 두 말이 사뭇 다르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멘탈 붕괴”라고 말하기는 하되, “마음 붕괴”나 “마음이 무너짐”이나 “마음이 뒤죽박죽”처럼 말할 줄 모르며, 이들 말이 서로 다르다고 여기고 맙니다. “마음을 하나로 다스리”려고 애쓰면서 입으로는 “정신통일(精神統一)”이라고 읊어요.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요. 글을 어떻게 쓸 때에 아름다울까요. 내가 쓰는 내 글은 내 넋과 내 삶을 어떤 ‘내 말’로 담을 수 있을까요. 내 말이 곱게 빛나도록 나 스스로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거나 생각을 쏟는가요.


  한쪽에서는 ‘잔치(생일잔치,마을잔치)’를 하고, 한쪽에서는 ‘연회宴會(피로연披露宴,회갑엽回甲宴)’를 하며, 다른 한쪽에서는 ‘파티party(생일파티,커플파티)’를 합니다. 한겨레라 하지만 말은 두 말 세 말, 어쩌면 네 말 다섯 말 자꾸 쪼개집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갈래 말을 합니다. 이쪽은 ‘모둠’이나 ‘모임’이지만, 저쪽은 ‘조(組)’나 ‘부서(部署)’이고, 그쪽은 ‘파트(part)’나 ‘팀(team)’입니다.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살아가자면 몇 가지 말을 할 줄 알아야 할까요. 한국에서 한국말을 주고받으려면 우리는 ‘똑같은 한 가지’를 놓고 얼마나 다른 여러 나라 말을 익히거나 머릿속에 지식으로 집어넣어야 할까요.


  껍데기는 ‘한글’이라지만, ‘한국글’이라 할 만한 글은 차츰 사라집니다. 귀로 듣기로는 ‘한말(한겨레 말)’이라지만, ‘한국말’이라 할 만한 말은 꾸준히 잊혀집니다. 말은 어떻게 해야 하고,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요. 4345.11.2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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