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책방 앞을 지나가다가



  단골책방 앞을 지나가다가 아무래도 인사를 하고 가야겠다 싶어 작은아이를 안고 들어간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던 길이기에 책 한 권 살필 수 없다. 나 혼자 더러 서울마실을 하며 책방에 들르기는 했으나 아이까지 데리고 서울마실을 하는 일은 흔하지 않으니, 아이 얼굴을 보여 드린다.


  네 살 작은아이는 제 아버지가 스물한 해를 단골로 드나든 책방 아주머니 얼굴을 마음속에 담을 수 있을까.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며 다시 책방마실을 하면 그때에 마음속에 책방 아주머니 얼굴을 새길 수 있을까.


  책방 한 곳을 스무 해 남짓 단골로 드나들 수 있는 삶이란 어떤 즐거움이요 재미이자 보람일까 하고 헤아려 본다. 앞으로 이곳은 서른 해 단골이 될 테고, 머잖아 마흔 해 단골이 될 수 있겠지. 4347.4.1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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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약병 책읽기



  네 식구 함께 바깥마실 나오던 금요일 아침에 마을 어귀 도랑에서 뒹구는 농약병을 본다. 마을 할배들 아침부터 마늘밭에 농약 뿌리려고 부산하다. 우리 마을과 이웃 여러 마을은 ‘친환경농업단지’ 이름표가 붙으나, 나락논에만 ‘친환경농약’을 쓸 뿐, 마늘밭에는 ‘친환경 아닌 그냥 농약’을 쓴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네 해째 살며 지켜보니, 그냥 농약이든 친환경이라는 농약이든, 이 농약이 훑고 지나가면 벌과 나비와 개구리가 모조리 죽는다. 제비도 죽고 참새와 딱새와 박새도 죽는다.


  농약병이 논도랑에서 뒹구니 논도랑에 미꾸라지나 가재나 다슬기나 붕어가 살지 못한다. 농약병이 논도랑에서 굴러다니니 개똥벌레를 만나기 아주 힘들다. 새마을운동을 벌인 박씨 대통령이 온 시골마을에 슬레트지붕을 얹은 일을 놓고 무엇이 잘못이요 얼마나 끔찍한 일이 시골흙에 생겼는지 깨닫는 사람을 만나기 매우 어렵다. 논둑과 밭둑을 시멘트로 메울 뿐 아니라 시멘트도랑을 자꾸 만드는 일이 앞으로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을 불러들일는지 내다보려는 사람은 아예 만날 수조차 없다.


  농약병을 논도랑에 아무렇지 않게 버리니, 이 마을에서 살아가는 할매도 할배도 나란히 수도물을 마시고 싶어 하는구나. 4347.4.1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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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꽃



곁님도 나도 아이들도
씨앗 받아
뿌린 적 없으나
해마다
올망졸망 멋진 잎
넓적넓적 베풀며
길다랗게 꽃대 올리고는
노란 꽃잔치 베푸는
갓.


갓꽃은 얼마나 오래
이 땅 이 터에서
밥이 되고 노래가 되며
숨이 되고 사랑이 되었나.


벌나비 함께 춤춘다.



4347.4.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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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과 꽃마리꽃



  조그마한 꽃마리꽃을 바라본다.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꽃마리꽃을 바라보고, 우리 도서관에서 피어나는 꽃마리꽃을 바라본다. 길을 가다가도 꽃마리꽃이 피었는지 가만히 들여다본다. 걸음을 멈춘다. 조용히 쪼그려앉는다.


  꽃마리꽃인지 꽃다지꽃인지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걸어가다가도 알아볼 만하다. 걸어가면서 바라볼 적에는 네가 여기 피었구나 하고 알아본다.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앉으면 꽃마리꽃이 자라는 흙내음을 맡으면서, 아하 네가 이곳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깨닫는다.


  꽃송이가 벌어진 꽃마리꽃 한 줄기를 꺾는다. 아이들 밥그릇에 얹는다. 꽃송이가 고운 꽃마리꽃 두 줄기를 꺾는다. 내 밥그릇에 얹고 곁님 밥그릇에 함께 놓는다. 다 같이 봄내음을 맡으면서 봄빛을 먹는다. 꽃마리꽃은 꽃내음으로 나한테 스며들고, 꽃마리꽃 한 줄기는 밥과 함께 몸으로 스며들어 푸른 기운으로 되살아난다. 4347.4.1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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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132) 상질의 1 : 상질의 감자


그의 막내아들 잭이 최선을 다해 경작하고 있었지만 상질의 감자가 생산되는 곳은 한 평도 없었다
《조지프 코캐너/구자옥 옮김-잡초의 재발견》(우물이 있은 집,2013) 122쪽


 상질의 감자
→ 좋은 감자
→ 훌륭한 감자
 …


  한국말로 ‘좋다’와 ‘나쁘다’라 말합니다. 질이나 품질이 좋으면 ‘좋다’이고, 질이나 품질이 나쁘면 ‘나쁘다’입니다. 굳이 ‘상질’이나 ‘하질’ 같은 한자말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꾸밈없이 쓰면 넉넉한데, 한자를 빌어 ‘상질·하질’을 쓰니 토씨 ‘-의’를 붙이고 맙니다.


  좋은 감자, 더 좋은 감자, 덜 좋은 감자, 그럭저럭 좋은 감자, 꽤 좋은 감자, 안 좋은 감자, 먹을 만한 감자, 훌륭한 감자, 굵은 감자, 맛있는 감자와 같이 여러모로 쓸 수 있습니다. 4347.4.13.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막내아들 잭이 힘껏 땅을 일구었지만 좋은 감자가 나오는 곳은 한 평도 없었다


“그의 막내아들 잭”은 “그 사람 막내아들 잭”이나 “그이 막내아들 잭”으로 손볼 수 있으나, 이 자리에서는 “막내아들 잭”으로만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최선(最善)을 다해”는 “온힘을 다해”나 “힘껏”이나 “땀흘려”로 다듬고, “경작(耕作)하고 있었지만”은 “땅을 일구었지만”이나 “땅을 갈았지만”으로 다듬습니다. ‘생산(生産)되는’은 ‘나오는’으로 손질합니다.


‘상질(上質)’은 “품질이 썩 좋은 것”을 뜻합니다. “질 좋은”이나 “품질 좋은”으로 손질하면 되는데, 단출하게 “좋은”으로 쓰면 됩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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