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읽는다



  겉으로만 본다면 ‘아름다움’과 ‘그럴듯함’은 거의 똑같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빛을 고스란히 흉내내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름다움과 그럴듯함은 따로 있지 않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그럴듯한지 헤아려 봅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눈을 감고 바라보는 하늘빛이 아름다울까요. 눈을 감고 마주하는 꽃빛이 아름다울까요. 눈을 감고 들여다보는 얼굴빛이 아름다울까요. 눈을 감은 나한테는 어떠한 빛이 보일까요.


  귀를 닫고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귀를 닫고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귀를 닫고 물 흐르는 소리와 아이들 놀이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무엇이 아름다울까요. 귀를 닫은 나한테는 어떤 소리가 들릴까요.


  참다운 결이 스며서 드러난다면 아름다움일 테고, 참답지 않다면, 그러니까 거짓스럽다면 그럴듯함이 되겠지요. 그러면, 나는 언제 참과 거짓을 알아볼까요. 나는 어떻게 참과 거짓을 헤아릴까요.


  눈을 감은 사람한테는 높이가 없습니다. 눈을 감은 사람한테는 너비가 없습니다. 눈을 감은 사람한테는 깊이가 없습니다. 귀를 닫은 사람과 코를 막은 사람한테도 높이와 너비와 깊이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우리들은 아름다움과 그럴듯함을 어떻게 가리거나 살필 만할까요.

  겉보기로는 모두 책입니다. 겉보기로는 모두 이야기입니다. 겉보기로는 모두 생각꾸러미요, 슬기로운 열매이고, 재미난 노래입니다.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속에는 무엇을 담을까요.


  ‘빛’으로 둘러친 책과 ‘사랑’으로 여민 책을 알아보는 넋은 어떤 사람한테 있을까 궁금합니다. ‘소리’를 입힌 책과 ‘꿈’으로 가꾼 책을 알아차리는 넋은 어떤 사람한테서 샘솟을까 궁금합니다.


  책 하나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이룬 삶이 될 때까지, 어느 것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저 책 하나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꿈으로 가꾼 삶으로 나아갈 때까지, 어디에도 대수로운 것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덫에 걸리는 일은 나쁘지 않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운 덫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서 그예 맴돌기만 한대서 나쁘지 않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운 덫에 묶일 적에는 아름다운 빛이 밥을 주고 잠자리를 줄 테니, 언제까지나 그곳에 머물러도 굶을 일은 없습니다.


  손에 책을 한 권 쥡니다. 아름답지도 않고 안 아름답지도 않은 책을 한 권 쥡니다. 사랑으로 엮은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스럽구나 하고 느낍니다. 다만, 나 스스로 사랑을 바라고 생각하며 꿈꿀 때에 사랑을 알아채면서 즐겁게 누립니다. 나 스스로 사랑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사랑으로 엮은 책인 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둘레에 있는 숱한 책을 쓰다듬습니다. 멋있고 값있으며 놀라운 책을 쓰다듬습니다. 눈부신 책이 많으며, 대단한 책이 많습니다. 이 많은 책들은 도서관에 꽂힐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새책방을 그득 채울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무엇인가 읽고 싶은 사람들한테 넉넉히 도움이 되겠구나 싶습니다.


  돈이 얼마나 많아야 삶이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책이 얼마나 많아야 삶이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어떤 돈을 가져야 삶이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어떤 책을 읽어야 삶이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돈을 어떻게 쓸 때에 삶이 아름다울까 생각하다가, 읽은 책을 어떻게 삭힐 때에 삶이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늘 이곳에 머문 채 ‘새로운 아름다운 책’을 찾아 책더미를 헤맬 만합니다. 나는 늘 새롭게 눈을 뜨며 ‘사랑을 날마다 가꾸는 삶’으로 나아갈 만합니다. 어느 쪽이든 스스로 고르는 길입니다. 옳거나 그른 길은 없습니다. 빛을 보려 하기에 빛을 보고, 삶을 보려 하기에 삶을 보며, 사랑을 보려 하기에 사랑을 봅니다. 4347.8.2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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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책이 겹겹이 있습니다. 수많은 책이 겹겹이 쌓입니다. 내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책이 있고, 내 손길을 끄는 책이 있으며, 내 마음길이 다가가려는 책이 있습니다. 모든 책을 다 골라도 되지만, 모든 책을 다 고르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책을 다 읽는 일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책만 읽으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겹겹이 있는 책들 가운데 살피고 가리며 추립니다. 나한테 찾아와서 환하게 빛날 책을 생각하고 헤아리며 돌아봅니다.


  겹겹이 있는 책은 예쁘장합니다. 책등만 보일 수 있고, 책겉이 다 보일 수 있으며, 책등도 책겉도 안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잘 보이기에 그 책을 고르지는 않습니다. 다른 책 밑에 깔려서 잘 안 보이는 책이더라도, 나는 언제나 내 마음에 와닿을 책을 찬찬히 살핍니다.


  어느 책이 나한테 찾아올까요. 나는 어느 책을 맞아들일까요. 나한테 새로운 하루는 어떠한 삶일까요. 나는 어떠한 이야기를 날마다 새롭게 누리고 싶을까요. 겹겹이 쌓인 책 가운데 내 아름다운 나날을 들여 즐겁게 읽을 책 몇 권을 손에 쥡니다. 4347.8.2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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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멋진 도움이라면



  한국말사전을 새로 쓰는 일을 아버지를 두었기에, 아이들은 아버지하고 놀 겨를이 모자랄 때가 있다. 낱말풀이 하나를 새롭게 붙이고 보기글 쓰임새를 새롭게 달려고 할 적에 그야말로 온힘을 쏟아야 하니까, 한두 시간뿐 아니라 서너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여느 사람이 보기에는 ‘고작 낱말 하나 풀이하는 일’이지만, 낱말 하나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올바로 다루어 슬기롭게 풀이하는 일에 여러 날이 걸리기 일쑤이다. 어느 낱말은 몇 해에 걸쳐 비로소 낱말풀이를 마무리짓기도 하니까, 제대로 잘 갈고닦는 한국말사전을 빚는 일이란 어찌 보면 하염없다고까지 할 수 있다.


  오늘도 아버지는 낱말뜻을 살피면서 풀이말과 보기글을 붙이면서 참 기나긴 하루를 보낸다. 두 아이는 저희끼리 잘 논다. 낱말풀이와 보기글을 새로 지으면서 기운이 쪼옥 빠지니, 오늘은 밥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다. 기운이 너무 빠져서 한참 자리에 드러눕기까지 했다.


  기운을 차려서 함께 놀기를 기다려 주는 아이들이란 언제나 가장 멋진 도움이라고 느낀다. 늘 곁에서 노래를 부르고 웃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이들은 사랑으로 어버이를 돕고, 어버이는 꿈으로 아이들을 키운다. 4347.8.2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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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럽다와 서글프다가 어떻게 다르며

구슬프다는 또 어떻게 다른가를

오늘날 얼마나 잘 가려서 쓸 수 있을까요?

또 슬프다는 어떠한 느낌인지 얼마나 헤아릴까요?

한국말을 슬기롭게 생각하면서 쓰는 사람이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


서럽다·섧다·슬프다·구슬프다·서글프다

→ 마음이 아플 때에 ‘슬프다’고 합니다. ‘슬프다’고 할 적에는 마음이 아프면서 눈물이 날 듯한 느낌입니다. ‘서럽다’고 할 적에는 뜻하지 않게 생긴 일 때문에 울고 싶도록 마음이 아픈데, 나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가리킬 때에 씁니다. 이래서는 안 되지만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든지, 작은 힘으로는 손을 쓸 수 없다고 느낄 만큼 커다란 아픔, 갑자기 들이닥쳐서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아픔을 가리키는 자리에 ‘서럽다’를 써요. 뜻하지 않게 생긴 일을 나 스스로 어떻게든 바꾸거나 고치거나 바로잡을 수 있다고 느낄 적에는 ‘슬프다’를 씁니다. ‘구슬프다’는 노래나 울음이나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이 아플 때에 쓰는 낱말입니다. ‘서글프다’는 마음이 텅 빈 듯한 느낌, 그러니까 허전하다는 느낌이면서 마음이 아프다고 할 때에 씁니다. 안타깝거나 딱하다 싶은 일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안 좋을 때에도 ‘서글프다’를 씁니다. 이를테면, 들짐승이 길에서 자동차에 치여 죽는 모습을 본다든지, 사람들이 괴롭혀서 고달픈 짐승을 본다든지, 이럴 적에 ‘서글프다’를 씁니다.

서럽다

: 뜻하지 않게 생긴 안타깝거나 힘든 일 때문에 울고 싶도록 마음이 아프다

 - 전쟁 때문에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 새해를 맞이하지만 고향 나라에 가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서러워 보인다

 - 이웃을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사회에서 쓸쓸하며 서러운 사람들이 생긴다

 -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어머니는 서럽게 우셨어요

섧다

= 서럽다

 - 오늘까지만 섧게 울고, 이튿날부터 다시 일어설 테야

 - 알에서 깨자마자 농약 때문에 몽땅 죽고 만 올챙이들은 몹시 섧겠지

슬프다

1. 답답한 일·뒤집어쓴 일을 겪거나 불쌍한 일을 보니, 마음이 아프면서 눈물이 날 듯하다

 - 힘들게 지내는 사람들이 겪은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잠이 안 오더라

 - 손가락을 다치는 바람에 바느질을 못하니 슬프구나

 - 꾸중을 듣고 슬픈 나머지 눈물을 똑똑 흘린다

2. 어떤 일이 바람직하지 않아 안타깝거나 마음이 아프다

 - 숲을 함부로 망가뜨리는 어른들 때문에 슬퍼요

 - 평화를 바라지 않고 전쟁무기를 자꾸 만드는 어른들을 보면 슬퍼요

 - 지구별이 무너지는데에도 핵발전소를 멈추지 않으니 슬퍼요

구슬프다

: 노래·울음·소리가 쓸쓸하면서 마음을 아프게 하다

 - 오늘 밤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어쩐지 구슬프구나

 - 어머니가 할머니를 그리며 피리를 부는 소리는 참 구슬픕니다

 - 오늘 따라 힘든 일이 많은 탓인지 달빛에 어리는 개구리 소리조차 구슬프다

서글프다

1. 마음이 텅 빈 듯하면서 아프다

 - 오갈 데 없는 나그네는 서글프다면서, 어머니는 꼭 밥 한 그릇 차려 주신다

 - 우리가 한가위에 찾아와서 한참 놀다가 돌아가면 할머니는 왠지 서글프시대요

2. 어떤 일이 안타깝고 딱해서 마음이 안 좋다

 - 멧골에서 불을 피우다가 숲을 태우는 일이 생기면 몹시 서글퍼요

 - 자동차에 치여 죽은 들짐승을 볼 때면 늘 서글프다


(최종규 . 2014 - 새로 쓰는 우리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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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 5 - 불꽃이 되어
최호철 그림, 박태옥 글,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 돌베개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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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62



평화시장에서 바라던 평화

― 태일이 5

 박태옥 글

 최호철 그림

 돌베개 펴냄, 2009.2.23.



  1970년에 노동자 한 사람이 몸에 불을 붙여서 스스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스물두 살 앳된 젊은이가 불길에 휩싸여 죽기 앞서 훨씬 앳된 노동자가 수없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역사책에는 이들 이름이나 숫자가 적혔을까요. 통계청 자료에는 이들 이름이나 숫자가 남았을까요.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이들 이름이나 숫자를 다룬 적이 있을까요.


  1970년대에 사회부 기자를 하던 어느 기자는 1970년에 ‘터진’ 일을 취재하면서 ‘특종’을 노린 이야기를 이녁이 쓴 책에서 밝힌 적이 있습니다. 이이는 그무렵에 ‘전태일 분신자살 후속보도 특종’을 내려고 온갖 짓을 일삼습니다. 신문사 부장이라는 사람은 ‘죽은 노동자가 남긴 일기장’을 찾아서 가져오라며 큰소리를 쳤다 하고, 사회부 기자는 병원과 전태일 식구가 살던 집 언저리를 빙글빙글 돌다가 드디어 찾아내고는 몰래 빼돌려서 신문사로 가져와서 특종으로 신문에 실었다고 합니다. 그 뒤, 전태일 일기장을 이소선 님한테 돌려주었을까요? 아무렴, 돌려주었으니, 만화책 《태일이》도 나오고, 이에 앞서 여러 가지 책도 나왔겠지요(그러나 전태일 님이 남긴 일기를 몰래 빼돌린 조선일보 기자는 일기장을 곱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일기장은 노동청으로 넘어갔고, 이소선 님이 노동청하고 싸운 끝에 겨우 돌려받았지만, 열 장 남짓 찢긴 채 돌려받았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1977년에 나온 《사회부 기자》(이상현 글,문리사 펴냄)라는 책에 38∼81쪽에 걸쳐 나옵니다. 전태일 님 일기를 빼돌린 기자는 조선일보 기자였고, 이를 기사로 내어 크게 터뜨립니다. 그런데,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이상현 님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그에게 일기 같은 게 있을 것인가 말이다(41쪽).” 하고 생각합니다. 이이는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씁니다. 아무래도 1970년대라는 흐름이라면, ‘배운 이’가 ‘못 배운 이’를 깔보는 마음이 아주 마땅하다는듯이 퍼졌을 테며, ‘신문기자라는 권력자’와 ‘노동자라는 기계 부속품’ 사이는 하늘과 땅처럼 벌어졌을 테니, 이런 말이 나올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참으로 배짱이 두둑한(?) 조선일보 기자라고 할까요.



- ‘그때 장사광주리를 이고 떠나는 만원버스를 타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주머니를 보았어. 결국 놓쳤지만! 그 모습을 보고 다들 웃는데 난 웃을 수가 없었어. 삶에 정직하고 충실한 사람이 생존경쟁에 나서는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웃을 수 있겠어? 어머니가 떠올랐지.’ (17쪽)





  박태옥 님이 글을 엮고 최호철 님이 그림을 빚은 《태일이》(돌베개,2009) 다섯째 권을 천천히 읽으며 생각합니다. 만화책이 아닌 영화에서도, 또 전태일 평전에서도, 이소선 님이 들려주는 이녁 아이 이야기에서도, 전태일 님은 늘 한 가지를 바랐습니다. ‘평화시장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랐어요. 널리 알려졌다시피, 전태일 님은 ‘대학생 동무 한 사람’만이라도 있기를 바라기도 했어요. 혼자서 근로기준법을 살펴서 배우자니 너무 힘들었고, 막히는 대목에서 물어 볼 사람이 없었습니다. 1960∼70년대라고 해서 대학생이 없었겠느냐 싶지만, 평화시장 노동자한테 동무가 되어 준 대학생은 그야말로 없었지 싶어요.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떤 대학생 동무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가난하거나 여린 사람들 곁에 대학생이 동무가 되어 있을까요? 늙은 할매와 할배만 가득한 시골마을에 젊은 대학생이 동무가 되어 함께 땀을 흘리거나 흙밥을 먹을까요?


  요새는 ‘농촌봉사활동’조차 거의 안 보이지 싶습니다. 우리 식구가 전남 고흥에서 네 해째 지내는데, 이동안 ‘서울에서건 전라도에서건 대학생이 농활을 온 모습’을 아직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고흥에서 나고 자란 뒤 서울로 대학생이 되어 떠난 젊은이 가운데, 봄가을이나 여름겨울에 시골로 돌아와서 일손을 거드는 젊은이는 얼마나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된 뒤에, 아이를 낳은 뒤에, 시골로 돌아와서 들일을 함께하는 젊은이는 얼마나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 ‘함께 일하지만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인 거야. 인간이라기보다는 일만 하는 기계 같은 존재 아닌가? 기계, 기계에는 영혼이 없어. 그러면 우린 뭐지? 영혼이 없는 인간? 인간의 탈을 쓴 기계? 그러다 고장이라도 나면 아주 쉽게 내다 버리겠지. 고장 난 기계처럼 말이야.’ (23쪽)

- “태일 군이 약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뭐라 하지 않겠지만 너무 세상을 비판적이고 삐딱하게 보는 것 같네.” “삐딱한 게 아니라 전 세상이 적어도 법대로, 상식대로 굴러가길 원할 뿐입니다. 근로기준법을 모든 공장에서 지키는 것처럼 말이죠.” … “세상은 때론 어쩔 수 없이 큰일을 위해 작은 것은 희생될 때가 있다네.” “희생이요? 작은 것들이요? 자신이 원하는 희생이야 그럴 수도 있지만 강요된 희생이 싫을 땐 어쩝니까? 전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제겐 신앙은 평화시장 어린 여공들의 행복입니다.” (68∼69쪽)






  늦여름에 비가 내립니다. 늦여름에 여러 날 비가 그치지 않습니다. 일찌감치 이삭이 패어 고개를 숙인 나락이 있지만, 아직 꽃대가 오르지 않은 나락이 많고, 이제 막 꽃대가 올라 이삭이 패려는 나락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요즈음은 비가 와서는 안 되는 날씨라고 할 수 있어요. 해가 쨍쨍 내리쬐어 나락이 고소하게 영글도록 보듬어야 하는 날씨입니다.


  비가 오는 날, 도시사람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늦여름에 내리는 비를 놓고, 도시사람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이삭이 팰 즈음에 내리는 비가 벼한테 얼마나 나쁠는지 헤아리는 도시사람은, 그러니까 ‘도시에서 살며 시골을 이웃으로 여기는 사람’은 얼마쯤 될까요.



- “돈이 있으면서도 줄 돈을 안 주는 심보는 또 뭐야? 부려 먹을 땐 언제고.” “밀린 돈 못 받고 그만두면 돈 떼이는 게 여기 전통인가 했는데 오늘 정말 통쾌하다.” … “역시 뭉치면 안 되는 일이 없어. 전태일 회장의 밀린 임금도 받아 내고!” “사장들도 그걸 무서워하는 거라고. 우리가 똑똑해지고 뭉치는 거.” (108쪽)

- ‘기침 소리는 언제나 내 가슴을 찌른다. 지금도 많은 여공들이 병들어 죽어 가고 있는데. 이런 현실을 세상에 알려야 바꿀 수 있을 텐데. 그게 내가 할 일이야. 세상에 평화시장의 현실을 알리고 고치는 일! 내가 해야 할 일!’ (163쪽)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니 느끼지 못합니다. 느끼지 못하니 어깨동무를 하지 못합니다. 어깨동무를 하지 못하니, 참다우면서 착하고 아름다운 길로 함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참다우면서 착하고 아름다운 길로 함께 나아가지 못하니, 이 땅에 사랑이나 평화가 깃들지 못합니다.


  슬기롭게 생각할 일입니다. 따사롭게 바라볼 일입니다. 즐겁게 노래할 일입니다. 서로 손을 맞잡으면서 함께 춤추고 노래할 신나는 삶터를 꿈꿀 일입니다.


  평화시장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 전태일 님은 평화시장만 잘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재단사로 일하면서 평화시장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랄 뿐 아니라, 막일을 하면서 막일판에서 몸을 쓰는 이웃들한테도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돈을 놓고 돈을 먹는 사람들한테도 돈에만 얽매여 스스로 이녁 삶을 놓치거나 모르쇠하는 슬픈 굴레에 갇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시장에서 봉제공장을 꾸리는 사장이 노동자 일삯을 떼먹거나 마구 부려먹는다면, 노동자만 고단하지 않아요. 사람을 마구 부리면서 괴롭히는 사람 스스로 마음이 낡습니다. 낡은 마음으로는 삶을 아름답게 가꾸지 못합니다. 낡은 마음으로는 이웃과 사랑을 나누지 못해요.



- 태일은 경쟁보다는 우애를, 가지는 것보다는 나누는 것을, 남들이 원하는 것보다 자신이 되고자 하는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우리 모두의 친구였다! (198쪽)





  1970년 11월 13일까지, 독재권력인 대통령을 비롯해서 경찰과 군대 모두 노동자 삶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신문사 기자와 방송국 피디도 노동자 삶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면, 글을 쓰는 사람이나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노동자 삶을 얼마나 돌아보았을까요. 예배당 목사와 신부는 노동자 삶을 얼마나 살폈을까요.


  1970년에서 마흔 해가 훌쩍 지나간 오늘날에는 대통령을 비롯해 이곳과 저곳에 있는 사람들이 노동자 삶을 얼마나 살필까요. 그리고,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들 삶을 얼마쯤 헤아릴까요. 덧붙여, 아이들이 입시지옥에서 골골거리는데, 이러한 틀을 깨부수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쯤 있을까요. 멈추지 않는 핵발전소와 물질문명을 멈추도록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전처럼, 그러니까 1970년처럼, 오늘 우리는 서로 외롭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다만, 외롭지는 않을 뿐입니다. 외롭지 않은 데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라요. 어깨동무를 하기를 바라요. 공장은 사장한테 남기고, 정치권력은 대통령한테 넘기고, 대학교는 교수들한테 남기고, 모든 발전소와 물질문명은 부자들한테 넘긴 뒤, 다 같이 도시를 떠날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 스스로 삶을 스스로 짓고,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마련할 때에, 비로소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고 느낍니다. 4347.8.2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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