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꽃 책읽기

 


  첫째 아이와 읍내 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가 마을회관 안쪽을 넘겨 보다가 “와, 여기 꽃 피었어요.” 하면서 마을회관 마당으로 들어간다. 나는 아이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지 않는데, 아이는 참 잘도 두리번거리며 알아본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래저래 두리번거리다가 무언가 보기도 하고, 내 옆지기도, 또 둘째 아이도, 저마다 다 다른 눈높이에서 저마다 다 다른 무언가를 두리번거리며 서로 알려주고 서로 좋아한다.


  겨우내 마른 잎 모두 떨구어 앙상하더니, 봄부터 새 잎을 틔우고, 이제 알록달록 어여쁜 꽃봉오리까지 피운다. “와, 예쁘네요.” 하고 말하는 아이는 손가락으로 꽃잎을 살며시 만진다. 아이 키높이 즈음으로 피어난 꽃들은 더할 나위 없이 곱다. 마을회관 마당에 어느 분이 이 수국을 이렇게 심으셨을까. 머잖아 울타리 너머 들판은 한결 짙푸를 테고, 푸른 물결 넘실거릴 무렵 수국꽃은 더 환하며 곱게 흐드러지겠지. “나는 왜 꽃을 좋아할까요?” 응? 네가 꽃처럼 예쁘게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천천히 피어나니까 꽃을 좋아하겠지, 아이야. (4345.6.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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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2-06-16 10:01   좋아요 0 | URL
딱 그책이 생각나네요.
<비오는 날 또 만나자>그책요.
사름벼리 장화 신고,빨간 후드 옷 입은 모습이
딱 그책 주인공이에요.^^

파란놀 2012-06-16 11:4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아이들이 빨간 옷과 장화 신고
비 뿌리는 날 꽃잎 빗물 구경이 재미있나 봐요.

하늘바람 2012-06-17 10:59   좋아요 0 | URL
아이 사진 하나하나가 다 동화 한장면이네요
이뻐요

파란놀 2012-06-17 19:57   좋아요 0 | URL
아이가 바로 동화와 같은 삶이니까요~
 


 산들보라 파리채 놀이

 


  산들보라 어린이는 왜 파리채 놀이가 재미있을까. 누나도 산들보라만 한 나이였을 때에 파리채 놀이를 참말 즐겼다. 파리를 잡는 앞쪽 그물도 거리끼지 않고 만지작거리면서 논다. 아이들한테는 파리채가 참으로 재미난 놀잇감일까. 산들보라는 파리채를 지팡이처럼 기대어 일어서다가는 한손으로 들고 휘휘 저으며 걷는다. 제 어머니 아버지가 이 파리채로 파리를 잡듯 휘휘 흔들며 걷다가 폴싹 넘어진다. (4345.6.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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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6-15 19:59   좋아요 0 | URL
이제 곧 파리도 잡겠습니다 ^^

파란놀 2012-06-16 03:14   좋아요 0 | URL
아기 뒷걸음으로 잡히는 녀석이 틀림없이 있어요 ^^;;;;
 


 뜨개하는 어머니 곁에서

 


  달포 즈음 되었나 싶은데, 아이들 어머니가 깔개 하나 큼지막하게 뜨개질을 한다. 우리가 우리 깜냥껏 요모조모 꾸리는 서재도서관에서 ‘바닥에 털푸덕 앉아 책을 펼치고 읽기 좋을 만큼’ 널찍하게 깔개 하나 뜨개질을 한다. 마무리가 되려면 얼마쯤 걸릴까. 알 수 없다. 이달에 마칠 수 있을는지, 이듬달에 마칠는지 모른다. 실은 모자라지 않을는지, 더 마련해야 할는지 알 길이 없다.


  뜨개하는 사람하고 함께 살아가며 생각하면 누구나 알는지 궁금한데, 이만 한 깔개를 손으로 뜨개해서 쓰는 품이나 값이나 돈을 따지자면, 참말 다른 사람이 뜬 물건을 돈을 치러 살 때에 ‘더 적은 돈’이 든다 할는지 모른다. 우리가 이 깔개 하나를 뜨느라 들인 실값이나 바늘값이나 품값을 헤아리자면, 이 깔개 하나를 돈으로 어떻게 셈할 만한지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을 기울여 본다. 아시아 중서부에서는 가시내가 시집을 갈 때에 양탄자를 비롯해 수많은 뜨개옷과 뜨개꾸러미를 갖고 간다 한다. 가시내는 어릴 적부터 온갖 옷가지를 뜨개한단다. 어느 양탄자는 하나를 뜨느라 몇 해씩 품을 들인다고도 한다. 돈값으로 치면, 한국사람이 이런 양탄자 하나 사는 데에 들일 돈은 얼마 안 된다 여길 수 있다. 그런데 양탄자이든 깔개이든 옷이든, 뜨개하는 사람 모든 넋과 기운과 사랑과 숨결이 깃들기 마련이다. 이런 뜨개꾸러미를 ‘숫자로 셈하는 돈’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쓴 글을 누가 ‘돈 얼마를 치러 사겠다’ 할 때에 값을 부르지 못한다. 내가 찍은 사진을 누군가 ‘돈 얼마를 치러 사겠다’ 할 때에도 값을 부르지 못한다. 나로서는 내 모든 넋과 기운과 사랑과 숨결을 담아 쓰는 글이요 찍는 사진인데, 이 같은 글과 사진에 어떤 숫자를 매길 수 있을까. 이 숫자는 마땅할까. 저 숫자는 알맞을까.


  우리 아이들이 부르는 예쁘장한 노래를 누군가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아이들 웃음을 누군가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온누리 어떠한 물건도 마음도 꿈도 사랑도 돈으로는 살 수 없으리라 느낀다. 돈으로는 오직 하나, 돈만 살 수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살아가며 아이가 된다.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랑 살아가며 어버이와 같은 목숨이 된다. 내가 쓰는 글은 온통 내 삶이요, 내가 즐기거나 누리는 사진은 언제나 내 삶이면서 내 목숨이다.


  비가 온다.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들썩인다. 풀잎이 팔랑거린다. 가느다란 빗줄기 사이로 나비가 춤을 춘다. 수국이 여름을 맞아 꽃잎을 활짝 벌린다. 들판에 갓 심은 모는 사름빛을 뽐내며 빗물을 맛나게 받아먹는다. 도시에서는 이 빗물이 갈 곳을 잃다가 하수구로 빠진다. 똑같은 빗물이라 하더라도 도시에서 내리기는 싫을 수 있겠지만, 도시에서 내리는 빗물은 아파트 꼭대기나 자동차 지붕이 아니라 골목동네 텃밭 한 자락 감나무 줄기에 떨어져 스르르 감나무 뿌리로 스며들다가는 바알간 감알 소담스레 익도록 거들고 싶으리라 느낀다. 오줌 아직 못 가리는 둘째가 어머니가 뜨개하는 커다란 깔개 귀퉁이에 살짝 쉬를 했다. 나는 모른 척하고 쉬를 치운다. 뜨개를 다 마무리지으면 신나게 빨아야지. (4345.6.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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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를 바라보는 아이들

 


  우리 집 처마 밑 새끼 제비 네 마리가 모두 날갯짓을 익혔다. 날마다 들여다보며 이 새끼들이 언제쯤 무럭무럭 자라 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날갯짓 익히기는 아주 금세 끝난다. 며칠 지나지 않아 모두 날갯짓을 한다. 먼저 새끼 제비 한 마리만 두 어미가 갈마들며 날갯짓을 곁에서 보여주면서 익히도록 하는데, 이렇게 새끼 제비 한 마리만 여러 날 날갯짓 놀이를 새벽에만 살짝 하더니, 다른 새끼 제비 세 마리 모두 둥지에서 벗어나 날갯짓을 처음으로 하던 날, 아침이 되자 모두들 날갯죽지에 힘이 붙고, 날갯죽지에 힘이 붙은 새끼 제비 네 마리는 어미 제비 두 마리하고 둥지를 떠난다. 아침에 떠난 제비는 해거름 무렵 돌아온다. 하루 내내 먼먼 어딘가를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고 날갯짓을 가다듬었겠지. 이제 제비들이 다시 안 돌아오나 싶었으나, 날갯짓을 하며 부산을 떨던 새끼들은 저희가 태어난 둥지로 돌아와 새근새근 잠들고, 이듬날 새벽에 다시 깨어나 먼먼 어딘가로 다시 떠난다. 그러고 다시 돌아와 또 옛 둥지에서 잠들고. 새끼 제비가 모두 날갯짓을 익히기 앞서, 하루 앞서, 어미 숫제비는 새끼들 웅크린 둥지 곁에 새 제비집을 한 채 손질했다. 이제 새끼들 덩치가 커지니 서로 나누어 자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새끼 제비 네 마리 날갯짓을 처음 익히며 우리 집 마당 전깃줄에 내려앉은 이른아침, 아이와 함께 마당으로 나와 올려다본다. 새끼 제비들은 끊임없이 노래를 하고, 노래를 한참 잇다가는 모두 폴폴폴 날아서 떠났다. (4345.6.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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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읽기
― ‘찰칵’ ‘철컥’ 하는 사진 소리

 


  필름에 앉히는 사진기를 쓰는 분들은 ‘찰칵’이나 ‘철컥’ 하는 사진 소리를 듣습니다. 디지털에 앉히는 사진기를 쓰는 분들도 이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요즈음 디지털사진기는 ‘찰칵’이나 ‘철컥’ 하는 사진 소리가 안 나기도 합니다. 아마 앞으로는 이 소리가 없는 사진기만 나올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예전 만화를 보면, 사진을 찍는다는 대목에서 으레 ‘찰칵’이라 적었습니다. 참말 사진을 찍을 때에 기계가 움직이며 빛이랑 그림자를 필름에 앉힐 때에 이러한 소리가 났으니까요. 요즈음 만화를 보면, 사진을 찍는다는 대목에서 거의 ‘아무 소리’가 없습니다. 으레 디지털로 찍으니까요. 더구나 손전화 기계는 사진을 찍으며 어떠한 소리도 안 납니다. 일부러 ‘필름사진기 쓸 때 나는 소리’를 흉내내곤 하지만, 디지털사진기나 손전화 기계는 ‘소리 없는’ 사진기라 할 만합니다.


  다만, 디지털사진기라 하더라도 렌즈를 갈아끼우는 기계는 소리가 납니다. 왜냐하면, 사진기 몸통에 따라 끼우는 렌즈를 쓸 때에는 빛과 그림자가 들어와 내 눈에 보이도록 하는 거울과 판이 있거든요. 막을 열었다 닫고 거울과 판을 톡톡 치면서 여러 가지 소리가 납니다. 또한, 손잡이를 돌려 필름을 감을 때에 여러 가지 소리가 납니다. 다 찍은 필름을 되감을 때에도 여러 가지 소리가 납니다.


  사진은, 눈으로 바라본 모습을 내 마음으로 삭힌 이야기로 빚는 삶입니다. 사진은 눈으로 보고 눈으로 찍으며 다시 눈으로 보며 눈으로 새깁니다. 사진은 소리를 찍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진은 냄새를 찍지 않는다고 합니다. 얼핏 생각하자면, 이와 같은 말은 한편으로는 맞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이러한 말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소리가 떠오르고 냄새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한테건 사진을 보는 사람한테건 소리와 냄새가 깊이 아로새겨집니다.


  이를테면, 내가 내 눈으로 바라보고 내 머리에 담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어요. 내가 눈으로 바라볼 때에는 온갖 빛깔과 무늬를 비롯해 온갖 소리와 냄새가 한데 얼크러집니다. 내가 귀를 닫더라도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할 때에는 이런 소리가 나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저 자리에서 저런 밥을 끓일 때에는 저런 냄새가 나겠구나 하고 느껴요. 사진 한 장에도 풀내음이 배어요. 그림 한 장에도 풀내음이 깃들어요. 글 한 줄에도 풀내음이 감돌아요. 사진 한 장에도 새소리가 들려요. 그림 한 장에도 개구리소리가 울려요. 글 한 줄에도 벌레소리가 노래해요.


  이 글을 쓰는 2012년 6월 15일에 곰곰이 생각합니다. 2022년이 되고 2042년이 되면 온누리 삶터는 매우 크게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또는 하나도 안 달라질는지 모르며, 또는 아주 뒤바뀔 수 있어요. 어떻게 될는지는 모르나 생각할 수 있어요. 1822년 사람들이 1922년 사람들 삶을 알 수 없으나 생각할 수 있었듯, 1912년에 사진을 하던 사람들이 2012년에 어떤 사진누리가 펼쳐질까 알 수 없으나 생각할 수 있었듯, 나는 2012년 사람으로서 2112년 사진누리는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 백 해인데, 백 해까지 바라보지 않고 고작 열 해나 스무 해 뒤만 바라보더라도, ‘사진 기계 문화’는 더할 나위 없이 바뀌거나 새롭게 거듭나리라 느껴요. 앞으로도 필름사진 찍는 분이 어김없이 있을 테지만, 앞으로는 사진을 말할 때에 디지털사진만 생각하리라 느껴요. 그러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빨래를 한다 하면 기계로 하는 빨래만 생각해요. 기계빨래를 ‘기계빨래’라 말하지 않고 그냥 ‘빨래’라고만 말해요. 손으로 빨래하는 삶은 따로 ‘손빨래’라 말해야 알아들어요. 이제 사진을 찍는다 하면 누구나 ‘디지털사진’이라 여겨요. 스스로 ‘필름사진’이라 덧붙이지 않으면 이제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어요.


  전남 고흥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구가 어쩌다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마실을 나가 보면,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도 중·고등학교 푸름이들은 이른바 ‘반짝반짝하는 새 손전화 기계’를 씁니다. 어른도 이와 같아요. 새로운 손전화 기계 이름은 앞으로 수없이 바뀌고 또 바뀌리라 느끼는데, 인터넷도 하고 노래도 듣고 작곡도 할 수 있으며, 악기를 타고 켜는 소리까지 똑같이 나면서 사진뿐 아니라 영화마저 찍을 수 있을 만한 오늘날 손전화 기계는 그야말로 ‘아무 소리’도 없이 모든 일을 척척 해냅니다. 하루하루 지나고 더 지나면, 앞으로는 ‘아무 소리’뿐 아니라 ‘아무 무게’를 느끼지 못할 만한 손전화 기계나 사진 기계가 나올 만하다고 느껴요.


  이는 쉽게 알 수 있겠지요. 1912년이나 1888년에 사진을 하던 이들은 얼마나 무거운 기계를 썼습니까. 1952년 사진 기계도 그리 가볍지 않았어요. 2052년까지 아니더라도 2032년만 되더라도 ‘아무 무게’를 못 느끼도록 작고 가벼운 사진 기계가 나올 수 있어요. 나는 1982년 국민학교 1학년이던 때에 ‘안경 사진기’를 생각한 적 있어요. 겉보기로는 그냥 안경이지만, 내가 눈을 깜빡이면 사진이 찍히도록 하는 기계를 그무렵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안경 사진기’는 그야말로 ‘아무 무게’도 없이 내 눈길을 더 넓히는 연장이면서 사진까지 찍고, 동영상이든 영화이든 마음껏 찍을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서도 필름이나 메모리카드 같은 녀석이 없어도 돼요. ‘안경 사진기’에서 쓰는 저장장치는 모래알갱이보다 훨씬 작을 뿐더러 ‘원격 조정’으로 집에 있는 내 셈틀로 곧장 옮겨지니까요.


  천천히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2010년대 사진은 ‘소리 없는’ 사진인데, 앞으로 2040년이나 2080년쯤 되면 어떤 사진이 될까 생각을 합니다. 사진을 말하는, 곧 ‘사진 비평’이나 ‘사진 평론’은 오늘날뿐 아니라 앞날에 어떤 노릇 어떤 몫 어떤 이야기 어떤 사랑 어떤 꿈을 들려줄 만할까 생각을 합니다.


  작품 하나를 말하고, 흐름 하나를 짚으며, 사상이니 철학이니 무엇이니 하고 밝힌다거나 이런저런 은유라느니 비유라느니 하고 들추는 비평이나 평론은 오늘날이나 앞날이나 얼마나 값할 만한가 생각을 합니다.


  나는 내 목숨이 얼마나 오래도록 살가우며 따사로이 이어질는지 모릅니다. 다만, 내가 쉰 살을 살건 백 살을 살건,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살아가리라 느껴요. 내가 쉰 살이 될 즈음, 그러니까 2012년부터 헤아리면 열두 해 남은 2024년이요, 내가 백 살이 될 즈음, 그러니까 2012년부터 꼽자면 2075년이 될 즈음, 이때까지도 누군가 필름을 만들어 주면 나는 틀림없이 필름사진을 찍습니다. 이때까지도 ‘A/S’라고 있어, 내 낡은 캐논450D 기계가 또 망가졌을 때에 부속을 바꾸어 고쳐 주는 곳이 있다면, 나는 어김없이 낡은 디지털기계로 디지털사진을 찍습니다. 왜 ‘낡은’ 기계로 사진을 찍느냐 하면, 필름사진 뒤를 이은 디지털사진에서는 ‘필름사진 기계에 깃들던 눈썰미(화각)’를 살려 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디지털사진 기계에 깃들 눈썰미(화각) 또한 새 앞날 디지털사진 기계에서는 살려 주지 못하리라 느껴요.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진기로 여러 사람이 사진을 찍어도 똑같은 사진이 나오지 않아요. 같은 자리에서 필름사진기와 디지털사진기로 사진을 찍을 때에 똑같은 사진이 나오지 않아요. 저마다 눈썰미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몸도 마음도 삶도 다르기 때문이에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면서 내 삶을 담으려고 사진을 찍기에, 케케묵었다 하는 필름사진기 한 대와 꽤나 낡고 닳아 또다시 해롱거리는 디지털사진기 한 대를 씁니다. 아이들 노랫소리를 좋아하고, 제비들 노랫소리를 좋아하기에, 나는 먼먼 옛날부터 아이들과 제비들이 어떤 결과 무늬로 노래했을까를 헤아리면서 내 오래된 사진기를 만지작거립니다. (4345.6.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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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5 1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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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5 1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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