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먹자, 빠작
심조원 지음, 원혜영 그림 / 호박꽃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큰보름날 맞이하는 애 아빠 마음
 [그림책이 좋다 73] 심조원(글)+원혜영(그림), 《까먹자, 빠작》



- 책이름 : 까먹자, 빠작
- 글 : 심조원
- 그림 : 원혜영
- 펴낸곳 : 호박꽃 (2010.2.16.)
- 책값 : 8500원


 (1) 애 아빠가 맞이하는 큰보름


 저녁나절, 천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신포시장으로 마실을 나옵니다. 한 시간 남짓 드러누워 골골대던 몸을 일으켜 무언가 먹을거리를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섭니다. 때는 아홉 시를 훌쩍 넘겼습니다. 저잣거리 사람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들어갈 무렵입니다. 늦은 때에 저잣거리를 찾아온들 달리 무슨 먹을거리를 장만할 수 있으랴 싶지만, 한 번 슥 돌아보고자 합니다. 저잣거리 들머리에서 나물을 파는 아주머니가 바닥에 땅콩을 깔아 놓고 됫박으로 팔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낮나절에 이웃사람이 “부럼 나물 드셨어요?” 하고 안부인사를 하기에 “네? 그럴 겨를이 없어요.”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정월대보름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언제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니, 설날에는 그때가 설이라고 알기는 했으나 설을 쇠고 나서 큰보름이 찾아오는지를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저녁 느즈막한 때에 저잣거리 길바닥장사를 보고서야 ‘큰보름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땅콩 됫박 가져가세요. 사천 원인데 삼천 원에 많이 드릴게요.” 하는 말씀에 “네, 됫박 하나 주셔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에누리를 안 해 주셔도 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늦은 때까지 집에 안 들어가시고 남은 물건 펼쳐 놓은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밤부터 다시금 몹시 아파하는 옆지기는 한낮이 되도록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이른아침에 빨래를 하며 아이한테 물놀이를 시키고, 물놀이를 시킨 다음 씻기며, 씻긴 다음 밥을 해서 먹입니다. 옆지기는 한낮이 되어 겨우 일어났으나 관장을 두 번 하고 속을 비운 뒤에야 겨우 말문을 엽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쓰러질 판입니다. 아이한테 겨우 밥을 다 먹이고 오줌을 누인 뒤에는 그대로 벌렁 드러눕습니다. 그렇다고 오래 눕지 못하고 몇 분 만에 다시 일어납니다. 도서관이며 생협이며 들러야 한다는 옆지기 말을 들으며, 나도 일어나서 도서관에 가서 책을 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한테 옷을 입히고 걸음을 걸립니다. 차가 많이 오가는 길가를 걸을 때에는 품에 안습니다. 조금씩 키가 크고 뼈가 단단해지는 아이를 안고 걷다 보면 팔이 없는 듯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아이가 스스로 걸을 줄 아니까 아주 갓난쟁이였을 적하고 견줄 수 없이 수월해진 셈 아닌가 싶으면서도, 외려 한 살 두 살 먹어 갈수록 한결 고단하고 벅차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쩌면 지난날보다 오늘이 힘겹고, 오늘보다 앞날이 힘들지 모릅니다. 이듬달이나 이듬해를 맞이하며 지나온 나날을 돌아보면 오늘 하루란 그리 힘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첫 세이레를 하던 때에는 잠 한 숨 잘 수 없었고, 백일 때까지는 하루 두 시간쯤 잤는가 싶으며, 돌 때까지는 길게 자야 삼십 분인 나날이었습니다. 아이가 열넉 달쯤 될 무렵까지는 밤이면 시간마다 깨어 기저귀를 갈아야 했고, 빨래와 밥하기와 씻기기로 온 하루를 보내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그렇지만 젖떼기를 하는 요즈음처럼 고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느새 훌쩍 지나고 만 나날이기에 지난날은 그럭저럭 보냈고 바로 눈앞에 닥친 오늘 하루가 가장 힘겹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땅콩 한 됫박과 얼음과자 둘과 보리술 두 병과 먹는샘물 여섯 통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헤아립니다.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설이든 한가위이든 큰보름이든 삼짓날이든 동짓날이든 단오날이든 챙길 겨를이 없다고. 내 몸이 어떠한지 살필 틈이란 배부른 소리이고, 아이키우기를 하는 가운데 옆지기 보살피기를 알뜰히 하기에도 허리가 휜다고. 그러나 아이키우기와 옆지기 보살피기와 집살림 꾸리기 어느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다고. 나한테 명절이란 없고, 나한테 생일이란 없었으며, 나한테 무슨 기림날이란 없다고.

 젖을 안 준다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애 엄마가 겨우 달래고 토닥이며 재워 조용해진 새벽녘, 아이가 몇 시간쯤 칭얼거렸나 어림하니 세 시간쯤입니다. 우는 소리가 그치니 참으로 조용하구나 하고 새삼 느끼면서, 이렇게 흐르는 삶일 줄 모르고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지를 곱씹습니다. 틀림없이 이렇게 흐르는 삶일 줄 살피지 못했습니다. 아니, 살피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과 함께 궂은 일이 찾아올 테고, 반가운 일과 맞물려 얄궂은 일이 찾아오는 삶이니까요. 좋으면 좋은 대로 내 삶이고, 궂으면 궂은 대로 내 삶입니다. 더 낫거나 더 못한 삶이란 없습니다. 옆지기와 아이를 함께 낳고 기르는 길에서도 더 잘 키우거나 더 못 키우는 매무새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결대로 사는 동안 아이가 제 결을 잘 느끼고 찾으면서 클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손을 잡는 길벗이라고 느낍니다. 아이가 많이 어려 이닦기를 홀로 못하니 아빠가 칫솔을 들고 살살 닦아 주고 젓가락질도 맡아서 해 주지만, 이렇게 돌본다고 하여 아이가 어버이 뜻대로 살아가는 목숨이지는 않습니다. 우리한테 아이가 없었다고 잠을 더 달게 잤다거나 살림이 더 알찼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옆지기를 만나지 않고 홀로 살림을 꾸렸다고 더 넉넉하거나 즐겁게 제 삶을 꾸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주는 만큼 받는 삶이 아니요, 받은 만큼 주는 삶 또한 아니라고 느낍니다. 곱다시 흐르는 삶이요, 살며시 보듬는 삶이며, 나란히 붙잡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아플 때에는 아프고, 쉴 때에는 쉬며, 사랑할 때에는 사랑하고, 배고플 때에는 먹으며, 웃을 때에는 웃고, 울 때에는 우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날짜도 시간도 햇수도 나이도 또 뭣뭣도 제대로 가눌 새 없이 지나는 삶이니, 명절이고 생일이고 기림날이고 챙긴다든지 생각하지 못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편으로 곱씹으면 무엇 하나 챙기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벅차고 고단한 삶이기에 명절이든 생일이든 기림날이든 마련하면서 아주 살짝이라도 돌이켜보면서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들여다보도록 하자는 뜻일지 모르겠습니다. 어느덧 우리 세 식구가 함께 맞이하는 두 번째 큰보름이 되었습니다. 






















 (2) 큰보름이 아니어도 즐거운 책읽기


 땅콩이다,
 까먹자.
 빠작!
 부스럭부스럭 비벼서
 오독오독 씹어 먹자.
 아, 고소해.


 큰보름을 맞이하면 어떻게 부럼을 먹는지 보여주는 그림책 《까먹자, 빠작》을 봅니다. 방바닥에 깔아 놓고는 아이가 집어서 보도록 하고, 아이를 아빠가 무릎에 앉히고 읽어 주다가는, 아이 옆에 앉은 엄마가 그림을 하나하나 짚어 주며 읽어 줍니다. 어린이 그림책은 글이 짧고 그림 장수가 적어 금세 한 번 읽고 또 읽는다지만, 참말 하루에도 여러 차례 되읽고 다시 보곤 합니다. 아이는 장난이나 재미 삼으며 책을 하나하나 다 끄집어 내어 방바닥에 펼쳐 놓고 넘길는지 모르는데, 어른 눈길로는 책읽기가 아닐 수 있어도 아이한테는 어김없는 책읽기입니다. 서로 바라보는 자리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며, 새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잣이다,
 까먹자.
 탁!
 갉작갉작 갉아서
 오물오물 냠냠.
 아, 향긋해.


 그림책 《까먹자, 빠작》(2010년 2월 16일)에 앞서 《옹기종기 냠냠》(2010년 1월 15일)이 나왔으며, 이에 앞서 《투둑 떨어진다》(2009년 10월 16일)가 나왔습니다. 퍽 어린 아이가 보는 그림책인 만큼 두툼한 종이로 되어 있는데, 두께가 있어 방바닥에 세워 놓아도 보기가 꽤 좋습니다. 이냥저냥 허술한 그림책이라면 이 그림책을 방바닥에 세워 놓지 않습니다. 그림이 퍽 고와 책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이 손을 많이 타면서 책이 좀 찢어지거나 구겨져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며, 이 책으로서는 싫지 않은 일이라고 느낍니다. 어른들이 보는 책은 숱하게 넘긴 손자국이 아주 곱게 책등 한켠에 묻기 마련이고, 아이들이 보는 책은 숱하게 쥐어든 손때가 꼬깃꼬깃 책 곳곳에 깃들어 낡고 닳기 마련입니다.

 어린이책을 만들며 살던 지난날에는 그저 ‘좋다고 하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었지, 이 좋다고 하는 책을 어떻게 즐기는가까지는 제대로 몰랐습니다. 아마, 아이를 안 낳고 어린이책 출판사에 그대로 남아 편집장 자리까지 눌러앉았으면 ‘좋다고 하는 책 만들기’에만 머물고 ‘좋다고 하는 책 즐기기’를 깨닫거나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봅니다. 내 짬을 더 낼 수 있으니, 더 많은 책을 보고 더 많은 글을 쓰고 더 많은 말을 뇌까리기만 하며 살았겠지요.

 저로서는 옆지기를 만나고 아이를 함께 키우는 동안 새로운 책읽기와 새로운 책삶을 날마다 새삼스레 깨우치고 있습니다. 예전에, ‘좋다고 하는 책’을 아이가 100번 넘게 읽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어머니한테서 들으며 홀로 속으로는 ‘그 책 말고도 좋은 책이 많은데 그 책만 100번을 읽었구나’ 하고 생각한 적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 어린이책은 꽤 좋은 책이었으며, 저 또한 100번 넘게 보기도 한 책입니다. 그런데 제가 읽을 때에는 혼자서 눈으로 읽기만 하지, 소리를 내어 여럿이 함께 읽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이 앞에서 글을 하나하나 또박또박 읽으며, 때로는 책에 적힌 글을 요모조모 바꾸어 가며 읽으며, 때로는 그림만 짚고 슬쩍슬쩍 넘어 가며 함께 보면서, ‘아이가 같은 책을 100번 읽었다’고 할 때에는 사뭇 다른 느낌이요 배움임을 헤아립니다. 애 아빠로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같은 책을 수없이 다시 읽고 또 읽을 때면, 새로 들출 때마다 다른 느낌이요 새 느낌입니다. 어제는 열아홉 달하고 열흘이 된 아이한테 읽힌 책이라면 오늘은 열아홉 달하고 열하루가 된 아이한테 읽히는 책입니다. 오늘 하루로만 보아도 아침 다르고 낮 다르며 저녁 다릅니다. 그리고, 아이가 혼자서 책을 넘기다가 손길과 눈길을 멈추고 오래도록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림이 있으면 ‘응? 뭔 그림인데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지?’ 하면서 함께 들여다봅니다. 아빠나 엄마가 “뭘 보는데?” 하고 물으면, 아이는 “눈!”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림 무언가를 짚습니다. 아이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 골목강아지 또는 골목고양이 그림이 있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멍멍!” 하면 아이는 가녀린 목소리로 “머머!”를 되풀이합니다.


 밤이다,
 까먹자.
 아닥!
 아드득아드득 깨물어서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자.
 아, 달콤해.


 토끼가 밤을 ‘아닥’ 하고 깨먹는 그림을 보면서 ‘토끼가 밤을 먹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는, ‘토끼가 무얼 먹는지 낱낱이 들여다본 적은 없지 않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산에서 풀과 잎을 뜯어먹는 토끼라 한다면 나무열매인 밤이나 도토리도 먹을 터이고, 나무껍질이나 나무뿌리 또한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겨울에는 흰눈처럼 하얗게 털빛이 바뀌는 멧토끼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정작 오늘날 우리 터전에서 흰털멧토끼를 보기란 어렵습니다. 우리 나라 토박이 멧토끼는 겨울에도 잿빛 털이 바뀌지 않는다는데, 잿빛이든 흰빛이든 토끼가 토끼답게 산과 들을 깡총깡총 뛰어다니며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먹이가 넉넉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큰보름을 맞이하여 먹는 부럼 나물을 보면, 우리가 손수 거두거나 기르거나 캐서 마련하는 부럼 나물이 아니라, 저잣거리나 마트에서 돈을 치르고 장만하여 먹는 부럼 나물입니다. 더군다나, 도시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님, 달님!” 하며 찾고 싶어도 달보다 환한 불빛이 너무 많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달만 환하게 잘 보이는 곳을 찾아나서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구름 없이 맑은 밤이면 어디에서고 올려다보며 두 손 모아 비손하는 달이 아니라, 애써 도심지를 벗어나야 올려다볼 수 있는 달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뒤져야 만나는 달일 테고요. 스스로 누리고 즐기면서 스스럼없이 깨닫고 살갗으로 받아들이는 큰보름 삶자락이라기보다, 달력에 아로새겨진 행사거리 큰보름이라고 할까요.


 달님 달님
 이빨 튼튼하게
 해 주세요.
 달님 달님 부스럼 안 나게
 해 주세요.
 모두 모두
 달님 보고 빌자.



 오늘 저녁, 구름이 걷히고 달님이 환하게 얼굴을 드러내면, 아이를 데리고 아픈 옆지기와 함께 달맞이를 할 만한 언덕받이를 찾아가고 싶습니다. 또는, 우리 집 앞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님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아니, 굳이 먼 데를 찾아가기보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골목동네 한복판에서 조용히 달님을 올려다보며 비손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픈 사람은 아픔 때문에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새 기운을 북돋아 주소서 하고. 자라는 사람은 자라는 하루하루를 늘 싱그럽고 씩씩하게 받아들여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고 아끼는 착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하고.

 새근새근 잠든 아이가 오늘은 언제 다시 깨어나 함께 놀자고 방방 뛸까를 헤아리며, 아이맡에 그림책 세 가지를 살며시 세워 놓습니다. 먼저 큰보름 이야기 그림책 《까먹자, 빠작》을 세워 놓습니다. 다음으로 가을날 떨어지는 열매 이야기 그림책 《투둑 떨어진다》를 세워 놓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모락모락 나는 먹을거리 이야기 그림책 《옹기종기 냠냠》을 세워 놓습니다. 이제 애 아빠도 다시 잠자리에 누워 등허리를 펴야겠습니다. 기나긴 새벽이었습니다. (4343.2.2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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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돼지 생명의 숲에서 길을 묻다 1
조슬린 포르셰 & 크리스틴 트리봉도 지음, 배영란 옮김 / 숲속여우비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41 ― 갇힌 삶, 갇힌 사람, 갇힌 밥
 : 조슬린 포르셰,크리스틴 트리봉도, 《우리 안에 돼지》



- 책이름 : 우리 안에 돼지
- 글 : 조슬린 포르셰,크리스틴 트리봉도
- 옮긴이 : 배영란
- 펴낸곳 : 숲속여우비 (2010.2.5.)
- 책값 : 7000원


 (1) 밥, 고기, 책, 삶


 스물한 달째를 맞이하는 우리 집 아이는 밥을 참 안 먹습니다. 왜 이렇게 밥을 안 먹을까 하고 곰곰이 헤아려 보면, 아이 젖떼기를 억지로 하지 않아서일 수 있고, 아이가 밥을 그닥 안 좋아할 수 있습니다. 젖을 먹으면 밥을 도무지 안 먹으려 합니다. 엄마가 젖을 안 주고 한참 굶겨야 비로소 밥을 날름날름 먹습니다. 아이 스스로 밥 있는 데로 쪼르르 달려가 손으로 조금씩 떠먹곤 하고요.

 아이는 저 스스로 몹시 배고플 때에는 밥이나 다른 먹을거리를 거의 가리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그리 배고프지 않으면 이도저도 받아먹을 생각이 없이 고개를 홱 돌리거나 아예 밥상 쪽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뒷걸음이나 옆걸음으로 슬금슬금 물러나서 옆이나 뒤를 보며 실쭉샐쭉 웃습니다. 이러면서 물만 잔뜩 마십니다. 날 때부터 이런 몸이었는지, 엄마와 아빠한테서 이런 모습을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집은 하루에 두 끼니만 먹기는 하지만 그렇게 물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데.

 그제 저녁 세 식구가 오랜만에 전철을 타고 부평으로 나들이를 갔습니다. 두 아이를 기르며 육아휴직을 하는 분 댁에 놀러갔습니다. 이분은 올 삼월에 학교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다시 한답니다. 이러면서 이분 옆지기가 육아휴직을 받아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로 했다는군요. 그런데 늘 바깥일이 많아 집에 늦게 들어와 버릇하는 아저씨가 하루 내내 집에서 아이하고 씨름하고 복닥이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얼마나 견디실는지 걱정입니다. 여자라고 아이키우기를 잘하도록 타고나지 않았고, 남자라고 아이키우기는 여자한테 떠맡기며 돈만 잘 벌어오면 되는 노릇이 아닐 터인데, 육아휴직을 받는다고 하루아침에 사뭇 달라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아파하고 힘들어하면서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눈여겨볼 수 있다면, 아이키우기란 밖에서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벌 때와 견줄 수 없이 보람이 있고 아름다우며 거룩한 줄을 살갗으로 느끼시리라 믿습니다. 세상 모든 목숨은 몸을 살찌우는 밥으로 숨을 잇는 한편, 마음을 북돋우는 사랑으로 넋을 가꾸기 때문입니다.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늘 가까이 어울리며 껴안거나 보듬는 따순 손길이 있어야 씩씩하고 튼튼하게 큽니다. 어른이 된 몸이라면 더 자라지 않으나, 더 자라지는 않더라도 살결과 몸뚱이가 싱그러우려면 좋은 먹을거리뿐 아니라 좋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어제 저녁 서울에서 우리 집으로 나들이를 오신 분이 있습니다. 손님맞이를 하려고 집에서 걸어 오 분쯤 되는 곳에 있는 가톨릭생협에 찾아가서 불고기 한 근과 남새만두 한 봉지를 장만합니다. 고기 장만은 무척 오랜만입니다. 지난해 여름쯤 한 번 장만해 집에서 해먹은 뒤 거의 열 달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식구는 가톨릭생협에서 푸성귀하고 곡식하고 두부하고 국수만 사먹지, 다른 먹을거리는 사먹지 않습니다. 동네 저잣거리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고기가 당기는 일은 드물고, 굳이 고기를 먹을 생각을 안 합니다. 나물 반찬에 누런쌀로 지은 밥을 파는 곳이 있으면 더없이 좋겠으나, 이러한 밥집을 찾기란 퍽 힘듭니다. 혼자 살 때에도 고기 반찬은 아주 가끔 해먹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술자리에서 고기 안주가 너무 자주 차려지니, 여느 밥자리에서는 고기 없는 밥상을 바라지 않느냐 싶습니다. 밖에서 사람을 만나 어울리다 보면 으레 ‘고기집 가자’는 소리가 나오며, 길가 밥집들은 하나같이 고기집투성이입니다.

 얼은 고기를 물에 담가 녹인 다음 당근과 양파와 고구마를 썰어 스탠냄비에 물 조금 붓고 익힙니다. 살짝 익을 무렵 다 녹은 고기를 넣고 소금과 설탕을 골고루 뿌린 뒤 버섯을 뜯어서 얹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마련해 주신 불고기는 양파에 당근 조금 넣고 국물을 조금 많이 내어 밥을 비비거나 말아 먹을 수 있게끔 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하는 불고기 또한 국물로 밥을 비비거나 말 수 있는데, 지난날과 대어 보면 양파며 당근이며 다른 남새를 꽤 많이 넣습니다. 풀밭에 고기 한 점 있는 투로. 이렇게 불고기를 마련해 먹으면서도 고기 한 점에 반드시 밥을 한 숟가락 퍼서 함께 먹습니다. 사람들과 고기집에서 어울려야 할 때에는 노상 밥 한 그릇을 먼저 시키어 밥과 함께 먹거나 집에서 싸 들고 온 밥을 꺼내어 같이 먹습니다. 고기만 먹으면 욕지기가 나오고 이빨이 아프기 일쑤입니다. 고기를 먹은 뒤에는 으레 속이 더부룩합니다. 그런데, 이런 제 배속은 고기 탓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고기보다 풀과 곡식이 제 몸에 한결 어울린다고 여길 수 있는 한편, 풀과 곡식이라 하여도 농약과 비료로 키운 풀과 곡식이 아닌 거름과 땀으로 일군 풀과 곡식일 때가 몸에 잘 받고 즐겁습니다. 시골 농사꾼이 손수 기르던 닭과 염소를 먹어 본 적이 있는데, 이러한 닭고기와 염소고기는 매우 부드러우면서 입맛을 돋우고 몸에 잘 받았습니다. 공장에서 사료와 항생제로 한꺼번에 잔뜩 키워서 내보내는 닭고기는 양념을 아무리 맛깔나게 하더라도 제 입에는 맛있지 않으며 여러 날 속이 메쓰껍습니다.

 아이한테 능금을 사서 먹일 때이든 다른 과일을 장만해서 먹일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여느 저잣거리에서는 좀더 값싸고 굵직한 과일이 있으나, 이와 견주어 조금 더 비싸고 못생긴 과일을 생협에서 사다 먹입니다. 작고 못생겼다 할지라도 비료와 농약 아닌 거름과 땀으로 일군 과일이 몸에 즐겁게 받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도시에서 살아가며 내 몸을 살찌우는 먹을거리를 장만하려 할 때에는 나한테 먹을거리를 대어 주는 사람들이 제 보람을 누릴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책방마실을 하며 책을 장만할 때에 출판사에서 매긴 책값을 고스란히 치르며 장만하고자 하는 마음이니, 먹을거리를 장만할 때에도 알맞게 값을 치러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더 값싸게 파는 책방을 뒤적거리기보다 내 넋을 살찌우는 책장을 넘기고 껴안는 데에 품을 들이고 싶습니다. 더 에누리를 해 주는 인터넷을 알아내기보다 내 얼을 북돋우는 책을 살피는 데에 시간을 바치고 싶습니다.

 손님하고 마주앉은 자리에서 옆지기가 이야기합니다. 요즈음 좋은 커피를 갈거나 내려받아 마시는 사람이 많은데, 커피알만 좋은 녀석으로 갖추고 물은 제대로 걸러서 마시지 못한다고. 제아무리 유기농 커피라 할지라도 수도물에 타서 먹을 때하고 ‘맑은 물’에 타서 먹을 때는 맛이 크게 다르다고.

 그러고 보면 맑고 시원한 물은 두 손으로 떠서 맹물로 마셔도 참 맛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늘 시원하고 맑은 물은 다른 아무것을 안 타더라도 온몸에 새숨을 불어넣어 줍니다.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를 넘기면 물 이야기가 사이사이 나옵니다. 제아무리 밥을 맛있게 지어서 초밥으로 빚는다 하여도 ‘밥을 짓는 물’이 어떤 물인가에 따라 밥맛이 다르다고. 한 걸음 나아가 ‘처음 농사를 짓던 곳에 흐르는 물이 나락에 어떻게 스며들었는가’에 따라 깊은 밥맛이 다르다고. 마땅한 노릇이지만, 맑은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를 잡아 저밀 때하고 지저분해진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를 잡아 저밀 때에는 맛이 다릅니다. 맛뿐 아니라 우리 몸에 스며드는 숨 또한 다를 테지요.

 어쩔 수 없다지만 우리 삶터는 물다운 물을 언제 어디에서나 시원하고 맑게 마실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쩔 길 없다지만 우리 터전은 밥다운 밥을 언제 어디에서나 즐겁고 배불리 먹을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 탓만이 아닙니다. 국가보안법 탓만이 아닙니다. 새마을운동 탓만이 아닙니다. 고속철도와 뉴타운과 아파트 탓만이 아닙니다. 독재정권 탓만이 아니며, 무엇보다 이명박 대통령 탓만이 아닙니다.


 (2) 작은 책에 담은 큰 이야기


 《우리 안에 돼지》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책을 읽습니다. 1인출판사 ‘숲속여우비’에서 나온 세 번째 책입니다. 숲속여우비 출판사는 지난해에 《엄마가 사랑해》하고 《라니아가 떠나던 날》 두 권을 펴냈고, 올해에 《우리 안에 돼지》를 펴냈습니다. 《엄마가 사랑해》는 나라밖으로 입양된 한국 어린이 삶을 담은 책이요, 《라니아가 떠나던 날》은 노동착취로 푸른 삶을 잃는 어린이 발자취를 담은 책이며, 《우리 안에 돼지》는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으며 사람 먹을거리 또한 엉터리가 되는 슬픔을 담은 책입니다. 세 가지 책 모두 어린이 눈높이에 걸맞아, 아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읽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세상을 속깊이 들여다보도록 이끌어 주는 줄거리요, 어른들이 우리 세상을 차분히 돌아보도록 돕는 짜임새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삶터에서 어린이는 어린이다움을 건사하면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이 나라 기득권 사람들은 초등학교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며 다시 들썩이거든요. 한자 하나만으로 아이들 삶이 팍팍하지는 않습니다. 숱한 짐덩이를 아이들 어깨에 얹은 어른들은 한자라는 또다른 짐덩이를 아이들 어깨에 얹으려 하니 더더욱 팍팍해집니다.

 정작 아이들한테 베풀거나 나눌 손길이란 지식조각이 아닌 사랑이지만, 이 나라 기득권 사람들은 아이들한테 사랑 한 줌 쥐어 주려 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마다 억대가 넘는 돈을 들여 영어교실을 짓고 영어강사를 부르고 영어교재를 만들어 팔며 장사속 키우는 일로도 모자라 또다른 장사속을 불러들이려 합니다. 배움다운 배움하고 동떨어지는 학교입니다. 배움다운 배움을 생각하지 않는 교사이고 부모입니다.

 더 많은 교과서가 아닌 더 열린 운동장이어야 합니다. 더 많은 시험이 아닌 더 싱그러운 학교 둘레 자연이어야 합니다. 더 많은 지식조각이 아닌 더 열린 가슴이어야 합니다. 더 높거나 이름난 학교가 아닌 더 따순 손길이어야 합니다.

 시늉이 아닌 참다운 얼거리로 ‘비장애 어린이와 장애 어린이가 함께 배우는 터전’을 어린이집일 때부터 마련하여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두루 이어지는 틀을 짜야 합니다. 지식산업과 예체능산업만 키우는 교육 시설과 제도가 아닌, 저마다 착한 마음을 다스리며 아름다운 넋으로 어우러지는 세상을 이루는 튼튼한 한 사람으로 이끄는 한마당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 비좁은 우리에 갇혀 있는 암퇘지들의 사진이 그렇게 예쁘게 나올 것 같진 않네요. 하지만 우리 돼지들도 쥘리앙네 염소들처럼 그렇게 바깥에서 키운다면, 틀림없이 염소들 못지않게 예쁜 모습으로 사진이 찍힐 거예요(21쪽).”라는 대목을 여러 차례 곱씹어 봅니다. 돼지우리에서 냄새가 나서 싫다고 하는 사람이 많으나, 돼지우리에서 냄새가 나도록 하는 이란 바로 우리들입니다. 더 값싸고 더 많은 고기를 바라는 우리들이 돼지들 스스로 싫어하는 냄새 나는 돼지우리를 만들고 맙니다. 더 값싸고 더 많은 고기를 바라는 우리들인 까닭에 스물하루를 거쳐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가 무럭무럭 자라 중병아리가 되었다가 어른 닭이 되도록 하지 못하게 가로막은 다음, 너덧새만에 부화기에서 알을 깨도록 하고 갖은 항생제와 사료를 먹여 고작 한 달이 안 되는 때에 ‘어른 닭으로 만들어’서 닭고기로 팔아치우도록 만듭니다.

 병아리에서 닭이 되는 삶고리가 아닌, 한 달이 안 되는 나날에 고기닭이 되어 버리는 공장입니다. 풀밭을 뒹굴며 땅을 파고 놀면서 통통하고 예쁘장하게 자라는 돼지로 보내는 삶자락이 아닌, 좁은 시멘트바닥에 가두어 하루빨리 살을 디룩디룩 찌워 얼른 팔아치우는 돈셈을 하도록 내모는 공장입니다. 곱고 튼튼하고 착하고 씩씩하게 자랄 수 있는 어린이가 아닌, 어릴 때부터 더 빨리 더 많은 지식을 쌓아 더 애늙은이가 되어 버리게 한 다음, 더 이른 나이에 더 연봉 많은 큰회사에 사무직으로 일해야 하는 성과급 기계가 되도록 내모는 한국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모든 풀과 고기에 우리와 같은 목숨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이웃과 동무가 나와 같이 고운 목숨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살피지 않습니다. 나날이 더 갈라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입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한국 노동자와 이주노동자입니다. 계급이 있는 우리 사회이며, 신분이 뿌리깊은 우리 나라입니다. 너무 바쁘고, 참으로 바쁘며, 더없이 바쁜 우리 겨레입니다. 고요한 아침나라라는 말은 벌써 옛말일 뿐 아니라, 이러한 말을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시끄러이 밤을 새는 나라인 한국이요, 서로서로 더 빨리 많이 크게 누리려고만 하는 한국입니다. 나눔을 잊거나 잃고, 어깨동무를 모르거나 모르쇠이며, 두레를 버리거나 내치는 삶입니다.

 《우리 안에 돼지》라는 작은 책은 우리 안에 갇힌 돼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책을 덮으면서 가만히 헤아려 보면, 정작 우리 안에 갇힌 짐승이란 돼지가 아닌 사람입니다. 스스로 우리에 갇히려 하는 사람이고, 서로서로 우리에 가두려 하는 사람입니다. 나 스스로 갇히고 내 이웃과 동무를 가두고 있습니다. 너른 들판이 아닌 쇠우리에 갇히고 가둡니다. 푸른 하늘이 아닌 시멘트우리에 갇히고 가둡니다. 깊고 맑은 바다가 아닌 돈우리에 갇히고 가둡니다.


 (3) 작은 책 작게 읽기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은 대목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되읽으면서 생각을 가누어 봅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으나 누구도 쉽게 알고자 하지 않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새삼 느낍니다. 누구라도 꼼꼼히 알고 느끼며 우리 삶을 바꿀 수 있으나 누구라도 우리 삶을 우리 손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슬픔이 담겨 있다고 거듭 느낍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책에 갇힌 지식이 아닌 몸에 배는 슬기로 가다듬는 사람이 하루에 한 사람씩 늘어날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이러한 줄거리를 책에 머무는 지식이 아닌 삶에 녹아드는 넋으로 되새기는 사람이 한 해에 한 사람이라도 새로 태어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4343.2.26.쇠.ㅎㄲㅅㄱ)


[14, 15, 30, 55쪽] 축사 안에는 먼지가 많습니다. 구석의 작은 창문으로 햇살이 미끄러져 들어올 때면 날아다니는 먼지가 다 보입니다 … 돼지의 몸은 창살 안에 갇혀 있으며, 십여 개의 칸막이로 줄지어 늘어선 공간에는 암퇘지 십여 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돼지들이 벌을 받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마치 감옥처럼 보였거든요 … 쥘리앙 말이 돼지가 움직이지 못해야 몸집이 빨리 불어나고, 그럴수록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거라고 하더군요 … 사실 돼지 축사 건물 전체가 자연과 차단된 구조랍니다. 마치 이 세상에 자연이 없는 것처럼, 공기도 식물도 해도 없는 상태에서 동물을 사육합니다. 그런 것들이 동물에게 해롭기라도 한 양 말이죠.

[16, 23쪽] 아저씨는 돼지들을 보고 나온 뒤에는 으레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돼지들 때문에 짜증을 내는 것이냐고 물으니 아저씨는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어요. “돼지는 그저 돼지일 뿐이야. 네 발 달린 햄이라고 생각하면 돼. 햄 좋아하니? 그럼 멀리 가서 찾을 것 없다.” … 축사 사무실에는 돼지들에 관한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는 컴퓨터가 한 대 있습니다. 컴퓨터에는 암퇘지들이 무엇을 먹는지, 언제 새끼를 가지는지, 어떻게 가지는지 따위의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 그런데 컴퓨터는 암퇘지들을 알지도 못하고, 구별하지도 못합니다. 컴퓨터는 다만 수치만을 알고 있을 뿐이죠.

[17, 33∼34, 36쪽] 돼지의 분만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은 ‘산파’가 아니라 ‘사육자’입니다 … 그날 이 돼지는 새끼를 낳을 때의 고통 때문에 온몸을 묶어 놓은 거였습니다. 아프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자칫 새끼들을 깔아뭉갤 수도 있거든요. 여기에서 중요한 건 암퇘지가 아니라 새끼들입니다. 사실 암퇘지는 죽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 암퇘지를 얼러 주고 다독여 줄 수도 있을 텐데, 그러기는커녕 입을 꽉 다물고는 마치 고장난 기계 다루듯 했습니다 … 두 사람은 어미 돼지의 몸에서 새끼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직접 만든 갈고리 같은 것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게 말을 잘 듣지 않자, 둘은 배를 갈래 새끼들을 빼낸 다음 암쾌지에게 주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돼지는 죽었습니다.

[31, 40∼41, 66쪽] 내가 볼 때 어른들은 너무 바쁘기 때문에 ‘깊은 생각’이란 걸 할 겨를이 없어요 … 어른들은 텔레비전 앞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가만히 있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요 … 요즘에는 간호사들도 돼지 축사의 분만용 우리 같은 ‘아기 공장’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을 빨리 처리해야 돈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 끝도 없이 달리기만 하는 건 노동자들이지만, 정작 돈을 많이 버는 건 대규모 축산 공장의 업자들과 상인들이에요.

[59, 61쪽] 칸막이 우리는 썩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여기에 들어오면 돼지를 좋아하게끔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돼지 탓이 아닙니다. 온통 암흑천지에다 먼지투성이고 악취가 풍기는 칸막이 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돼지들에게 무얼 바라겠어요 … 비좁은 우리 안에 갇혀 있는 돼지들은 너무 외로워 보였고 심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듯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돼지들과 잘 지낼 수 없는 걸까요?

[79, 81∼83쪽] 암퇘지들은 움직이고 싶어 하고, 다른 동물들과 함께 있어 싶어 합니다 … 암퇘지들은 미리 수퇘지에게서 채취한 정액으로 수정을 할 뿐, 수퇘지와 직접 교미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훨씬 더 빠르기 때문이죠 … “임신을 못하면 암퇘지로서는 끝인 거야. 실수란 용납이 안 돼. 먹이를 축내면서도 새끼를 못 낳는다면 그건 문제지 … 젊은 암퇘지가 한 번쯤 임신을 못할 수는 있어. 그런 건 괜찮단다. 그런데 늙은 암퇘지가 임신을 못한다면 그건 바로 도살장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손해가 얼마인지 아니? 온통 난리가 나는 거야. 우리에겐 판에 박힌 일이란다. 암퇘지는 새끼를 낳아야 해. 새끼를 낳지 못하는 암퇘지는 정상이 아니야.”

[89쪽] 나는 돼지들이 우리가 변화하기를, 우리가 조금 더 친절해지기를, 우리가 돌덩이같이 딱딱한 사람이 아니라 ‘가소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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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13 : 책 하나에 담는 땀

 전라남도 장흥에서 살고 있는 마동욱 님이 십만 원에 이르는 사진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사진책 이름은 《정남진의 빛과 그림자》(호영)입니다. 당신 고향마을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가를 보여주고 싶어서 수십만 장 찍은 사진을 고르고 추려 내놓은 두툼한 선물입니다. 온몸으로 부대끼고 두 눈으로 살펴보며 마음으로 삭여낸 삶자락이 깊고 넓다 보니 수십만 장이라는 사진을 찍고도 모자라, 앞으로도 새롭게 수십만 장에 이르는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으리라 봅니다. 저는 수십만 장까지는 아니지만, 제 고향동네인 인천 골목길을 해마다 만 장 남짓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이 만 장이 넘어가면, 요 한 해치 사진 만 장을 갈무리하는 데에만 여러 날이 걸립니다. 아니, 한 번씩 죽 돌아보고 추리는 데에만 보름은 걸리고, 애써 추린 사진을 갈래에 따라 나눈다든지 하자면 한 달이 훌쩍 넘어가며, 갈래에 따라 나눈 사진 가운데 어느 녀석을 얼마만한 크기로 다루어 엮느냐를 살피자면 또 한참 걸립니다. 사진 하나로 담을 때부터 오래오래 품을 들이기 마련인데, 작품으로 빚었다 할지라도 낱낱이 있는 사진을 ‘이야기 있는 꾸러미’로 묶자니, 사진기를 들고 골목마실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더 오랜 품을 들여야 하곤 합니다. 그러고 보면,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 나 스스로 미처 즐기거나 누리지 못하는 열매가 더없이 많을 수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동무와 이웃한테 보여주거나 나누는 열매 또한 아주 작을 수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열매를 일구고자 애써야 하는 사람이지만, 힘껏 거두어들인 열매 또한 바지런히 맛보면서 나누어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아주 흔히 하는 말인데, ‘나누며 따뜻한 사랑은 그리 크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내 주머니에서 아주 조금만 덜어도 이 작은 돈푼으로 무척 넉넉히 나누는 사랑이 된다고 합니다. 나로서는 아주 조금이라 할지라도, 열 사람 숟가락이 모이면 밥 한 그릇이 되니까요. 한 사람 숟가락으로 열 사람을 먹여살리는 밥그릇이 아니라, 열 사람 숟가락으로 한 사람을 먹여살리는 밥그릇이 되면 즐겁습니다. 내가 내 이웃하고 무언가를 나눈다고 할 때에는 ‘내가 대단한 부자라서 나누는’ 셈이 아니니까요. 내가 그지없이 가난하기 때문에 나눌 수 있으니까요. 내가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기 때문에 나보다 벅차거나 버거운 이웃을 알아봅니다. 내가 힘들고 고단한 탓에 나보다 힘들고 고단한 동무를 알아챕니다. 내 마음밭이 얕거나 어수룩하다고 느끼기에 즐거이 새로운 책을 장만하여 새롭게 곰삭이며 읽습니다. 내 배움이 짧거나 모자라다고 느끼기에 기쁘게 책방마실을 하며, 만 권이든 십만 권이든 아직 머나먼 책읽기일 뿐임을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지난 2004년에 우리 말로 나온 《환경 가계부》를 아주 흐뭇하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느새 판이 끊어졌습니다. 둘레에 선물하고 싶어도 사 줄 수 없습니다. 헌책방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옆지기는 이 책을 살며시 넘겨 보더니 묻습니다. “일본사람이 쓴 책이에요?” “응? 왜?” “이런 책은 꼭 일본책이더라구요.” 뒤통수가 뜨끔합니다. 그러고 보니 《즐거운 불편》도 일본책, 《백성 백작》도 일본책입니다. (4343.2.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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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12 : 만화책에 담는 삶과 슬기

 웬만한 일본 만화책은 으레 서른 권쯤은 이어 그립니다. 일본 만화 가운데 스무 권 넘게 이어그리지 않으면 ‘긴 만화’라 할 수 없습니다. 만화를 길게 그려야 제대로 된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만화를 그리든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우리들은 우리가 붙잡은 이야기 하나를 놓고 우리 온삶을 다 바쳐 백 권이든 이백 권이든 쏟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붙잡아서 펼쳐 보이려고 하는 이야기’에는 깊고 넓으며 웃고 울리는 숱한 삶자락이 담겨 있을 테니까요. 이 삶자락을 한 올 두 올 풀어내노라면 어느새 100권이 되고 어느 결에 200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박경리 님 《토지》나 조정래 님 《한강》 같은 작품이 ‘긴 소설’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냥 ‘소설’이라고 느낍니다. 《아빠는 요리사》 같은 만화는 벌써 백 권을 넘기고 있는데 끝날 낌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 나라안에 알려지고 읽힐 때에는 ‘불법 폭력 불건전’이라는 딱지를 온통 달아야 했던 《드래곤볼》은 벌써 여러 해 앞서부터 ‘정식 번역’이 될 뿐 아니라 만화 즐김이들 사이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며 추천을 받기까지 합니다. 지난날 이 만화를 나쁘게 이야기하고 아이들한테서 빼앗았을 뿐 아니라 불태우기까지 한 분들은 오늘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고작(?) 세 권으로 끝난 일본 만화 《토우마》(서울문화사,2009)를 읽었습니다. 3권째를 보면서 ‘벌써 끝나는가? 이렇게 일찍 끝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우마》라고 하는 만화에서 붙잡은 이야기로는 열 권이나 스무 권뿐 아니라 서른 권이나 마흔 권도 넉넉히 이어갈 수 있으리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권으로 마무리되는 만화책 《토우마》 맨 마지막 말을 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네? 감사장요? 수사에 협력해 줘서 표창한다고요. 저어, 어느 오오카미 토우마 씨에게 전화 거신 건가요? 우리 사무실의 오오카미 토우마는 자연을 사랑하는, 표창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그런 가이드입니다(182쪽).”

 책을 좋아한다는 분들 가운데 일본 만화를 즐겨 보는 분이 생각 밖으로 퍽 적습니다. 책을 사랑한다는 분들 가운데 만화책을 좋아한다고 밝히는 분이 참으로 드뭅니다. 책을 이야기하는 분들 가운데 만화책 평론을 깊이있게 다루는 분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책을 좋아한다면서 책을 좋아하는 테두리가 더없이 좁다고 하겠습니다. 책을 사랑한다면서 책을 껴안는 품이 너무 어설프다고 하겠습니다. 책을 이야기한다면서 책을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 차갑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린 날부터 만화를 만화답게 받아들이도록 배운 적이 없습니다. 집에서고 학교에서고 ‘만화는 책이 아니다’ 하고 배워야 합니다. 어버이들 가운데 누가 ‘어른이 된 다음’에도 만화를 즐겨 읽으면서 좋고 곱고 멋진 만화를 가슴에 새기는가요. 교사라는 자리에 선 어른 가운데 아이들한테 읽힐 좋고 곱고 멋진 만화를 당신들 돈을 털어 사 읽고 곰삭이는 이는 얼마나 되는가요. 《오타쿠의 따님》이라는 만화를 보며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읽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다들 ‘저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할 듯합니다. (4343.1.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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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11 : 책 하나를 이야기하려면

 십이 킬로그램 안팎을 오락가락 하는 열아홉 달 아기를 한 팔로 안고 걸어다니면 팔뚝이 끊어질 듯합니다. 처음 십 분이나 이십 분은 그럭저럭 걷습니다. 삼십 분이나 한 시간이 넘어서면 고달픕니다. 아직 혼자서는 어른처럼 오래 걸을 수 없기 때문에 팔에 안든 등에 업든 합니다. 아기수레 없이 오로지 안거나 업으며 들일 산일 집일을 맡아 하던 지난날 어머님들 몸뚱이는 무쇠로 만들어졌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하루를 접고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온몸이 쑤시고 저리고 결렸겠지요. 그러나 옛 어머님들 삶을 알알이 담은 이야기나 문학이나 영화나 방송을 만나기란 더없이 어렵습니다. 흙냄새뿐 아니라 땀냄새 묻어나는 작품이란 드물고, 살냄새를 비롯해 비누냄새 배어나는 작품 또한 드물며, 밥냄새를 아우르며 똥냄새 녹아 있는 작품은 퍽 드뭅니다. 이른아침부터 열아홉 달 아기 똥과 오줌을 치우면서, 지난 열아홉 달 동안 제 손과 몸에 아기 똥오줌 내음이 짙게 배었구나 하고 느낍니다.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 읽다가 접어두었던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지난달에 겨우 끝마쳤습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나라밖 문학이라 할지라도 번역이 뒤틀려 있으면, 이 나라에서는 이냥저냥 읽을거리조차 되기 힘들겠구나 싶습니다. 〈알베르 카뮈 전집〉을 읽으면서도 이다지 이름높은 분 번역조차 왜 이렇게 얄딱구리한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고, 한문이 함께 달린 《골목길 나의 집》을 읽으면서는 ‘바로 밑에 한문이 달려 있는데 이렇게 우리 말 번역을 엉망진창으로 해도 되는가? 안 부끄럽나?’ 하는 생각을 지울 길 없었습니다. 먹고살기 바빠 ‘창작한 사람이 수십 해에 걸쳐 이룬 알맹이’를 ‘고작 몇 달이나 한두 해만에 끝마치고 책으로 내야 하는’ 우리 터전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나라 안팎 좋은 작품을 흐리멍텅하게 깎아내려도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고 난 다음 어줍잖은 글솜씨로 느낌글을 적바림할 때마다 ‘나로서는 반갑고 고마운 책이라 느끼든, 나한테는 아쉽고 모자란 책이라 느끼든, 이 책 하나를 다루는 글을 쓰려 할 때에는 창작하는 사람이 이 책 하나에 들인 땀 못지않게, 때로는 이분들이 흘린 땀보다 더 땀을 흘리면서 느낌글을 적바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 더 땀을 흘렸다 할지라도 제대로 못 읽거나 엉터리로 잘못 읽는 대목은 틀림없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제 서울마실을 하는 전철길에서 《환경가계부》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다 읽었습니다. 두 가지 책 모두 술술 읽혔습니다. 그런데 《환경가계부》에는 곳곳에 밑줄을 그으며 별을 그리기까지 했으나,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는 별을 하나도 그리지 못했고 밑줄은 몇 군데 긋지 못했습니다. 술술 잘 읽힌다고 해서 그리 좋은 책이 되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이는 저한테 똑같이 해야 하는 말입니다. 제가 하는 일이 아무리 옳고 바르다 할지라도 가장 좋거나 아름다운 일이 못 될 수 있는 만큼, 더 바지런히 갈고닦아야 하며 더 고개숙여 귀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환경가계부》에는 “아버지들은 환경가계부는 부인이나 아이들의 몫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주길 바랍니다(194쪽).”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우리 어른들, 더욱이 남자 어른들은 참사랑이 무엇인지 참말로 너무 모르며 살고 있습니다. (4343.1.2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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