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에 싸인 ‘겉속 바뀐’ 만화책

 


  만화책 《치하야후루》 셋째 권을 주문했다. 새책은 비닐에 곱게 싸였다. 즐겁게 뜯어서 읽는다. 그런데 어째 그림결이며 줄거리가 영 딴판이다. 무언가 하고 겉종이를 벗기고 보니, 겉종이는 《치하야후루》이지만 알맹이는 《미드나이트 카페》 둘째 권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배본사에서 잘못했을까. 한꺼번에 나온 여러 가지 만화책을 만들다가 이런 잘못이 생겼을까. 책을 어찌 바꾸어야 하느냐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다른 생각. 아, 이런 잘못은 출판사에 전화해 주어야 하는구나. 왜냐하면, 나 말고 다른 누군가 이렇게 엉뚱한 책을 받아볼 수 있을 테니까. 책을 보내온 곳으로도 ‘잘못된 책’인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여쭈고, 출판사로도 전화해야겠다. (4345.4.25.물.ㅎㄲㅅㄱ)

 

 

.. 아아... 며칠을 기다려야 3권을 읽을 수 있을까 ㅠ.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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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5 1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5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라딘고객센터 2012-05-02 12:08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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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5-03 06:06   좋아요 0 | URL
어찌 보면 '재미난' 경험이었기에
이런 글도 하나 쓸 수 있었구나 싶어요.
고맙습니다~ ^^
 
불새 10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지구는 얼마나 좋은 별일까
 [만화책 즐겨읽기 141] 데즈카 오사무, 《불새 (10)》

 


  봄을 맞이한 나무마다 새잎을 틔웁니다. 나무마다 틔우는 새잎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새잎을 석 장 똑 뗍니다. 한 닢은 옆지기한테 건네고, 한 닢은 아이한테 건네며, 한 닢은 내 입에 넣습니다. 여린 나뭇잎을 잘근잘근 씹씁니다. 여린 나뭇잎에서 퍼지는 내음과 결을 느낍니다.


  풀을 먹는 짐승들은 풀을 뜯을 때마다 어떤 내음을 맡을까 어림해 봅니다. 기린이 나뭇잎을 뜯을 때에, 물뚱뚱이나 코끼리가 풀잎을 뜯을 때에, 토끼나 사슴이 풀을 뜯을 때에, 이들 풀뜯이짐승은 풀내음과 풀맛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코끼리는 논이나 밭을 일구지 않습니다. 그저 풀을 뜯어먹으며 제 몸을 건사합니다. 토끼는 푸성귀를 따로 심지 않습니다. 그예 풀을 뜯어먹으며 한겨울도 나고 한여름도 누립니다. 풀뜯이짐승은 풀밭에 약을 치지 않습니다. 풀뜯이짐승은 풀숲에 거름을 내지 않습니다. 풀을 먹고 풀똥을 눕니다. 나뭇잎을 먹고 나뭇잎오줌을 눕니다.


- “지구는 이미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다른 종류의 인간은 받아들일 여지가 없을지도 몰라. 게다가, 지구인들은 자신들과 다른 종족을 굉장히 박해하니까.” “아무리 힘든 생활이라도 우리 슬론인이 경험한 고통에 비한다면 참을 수 있을 거예요.” (7쪽)
- “지구가 우주의 그 어떤 별보다 아름답고 멋진 별이라는 것은, 이미 몇 백 년 전의 얘기지. 지금의 지구는 점점 나빠지고 있어. 이미 손쓰기 늦었어. 몇 백여 년 전, 그래, 1900년대를 끝으로 인간들은 입으로는 지구를 소중히 여기자고 했지만, 결국 말뿐이었어. 언젠가 지구도 멸망할 것이다. (96쪽)
- “모르겠어, 모르겠어. 왜 치히로 같은 것(로봇)은 20억 개나 만들면서 지구로 돌아오는 인간들은 막는 거지? 왜 마음이 없는 치히로가 친절을 베풀고, 마음을 가진 인간들은 우리를 죽이려 할까? 지구에 대해서는 정말 이해가 안 가.” (156쪽)

 

 


  오늘날 도시 물질문명 사회에서는 풀을 먹기가 몹시 힘듭니다. 풀 한 포기 돋지 않도록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꽁꽁 둘렀으니까요. 그러나, 예나 이제나 풀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풀을 먹는 사람은 풀내음과 풀빛과 풀결을 고스란히 느낍니다. 풀마다 서린 느낌을 받아먹습니다. 풀마다 고이 받은 햇살을 느낍니다. 풀마다 뿌리내린 흙에 깃든 기운을 받아먹습니다.


  요즈음 도시 물질문명 사회에서는 고기를 먹기가 매우 쉽습니다. 스스로 돼지나 소나 닭을 치지 않더라도 돈 몇 푼 치르면 쉽고 값싸게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어떤 고기를 먹든 이 고기가 된 짐승이 ‘그동안 무얼 먹으며 살점을 키웠는지’를 아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저 고기를 먹고 먹일 뿐입니다. 고기짐승이 살점을 더 키우도록 항생제와 촉진제를 주사로 놓거나 사료에 뿌립니다. 고기짐승은 사료를 먹습니다. 사료는 화학처리를 한 화학조합물입니다. 곧, 고기를 먹는 사람이란, 사료를 먹는 사람이요, 항생제와 촉진제를 먹는 사람이며, 화학조합물을 먹는 사람이란 소리입니다.


  곰곰이 살피면, 고기를 먹는 사람들 스스로 고기맛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합니다. 좁아터진 우리에 가두어 사료와 항생제만 먹여 살점을 키운 고기를 먹을 때하고, 너른 들판에서 마음껏 뛰놀며 풀을 뜯던 짐승을 잡아 마련한 고기를 먹을 때하고, 맛과 결과 느낌이 얼마나 다른가를 잘 알아채는 사람이 있고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맛을 아는 사람은 제맛과 참맛을 찾습니다. 제맛과 참맛을 찾을 때에는 제삶과 참삶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맛과 참맛을 모르거나 찾지 않을 때에는 제삶과 참삶하고 자꾸자꾸 멀어집니다.

 

 


- “당신은 아이도 낳지 않고 죽을 건가요? 왜요?” “언제 죽을 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난 어린아이고.” “역시 이 사람은 이상해. 아이도 안 낳고 죽을 건가 봐. 어딘지 좀 이상해.” “뭐가 이상해?” “그럼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사는 거죠? 자손을 잇기 위해서잖아요?” “그런 거 몰라!” “우리들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살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바로 죽게 되죠. 그러기 위해서 태어난 거니가.” (8쪽)
- “드디어, 드디어 길고긴 여행 끝에 지구에 도착했는데 하루밖에 살 수 없다니, 너무해요! 그런 잔인한 일이, 너무 가엾어요, 로미.” “괜찮아, 코무. 나는 죽기 전에 이 지구에 오는 것이 꿈이었지. 오랜 꿈이었다. 여기서 만약 인생이 끝난다 해도 나로서는 충분히 만족스런 일생이었어. 코무, 그보다 네가 걱정이다. 너는 나를 지구로 오게 해 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내 인생은 이제 끝이야. 너만은 부디 에덴으로 돌아갔으면 좋겠구나.” (133쪽)


  깊은 밤, 아이를 무릎에 누여 재우면서 생각합니다. 밝은 낮, 아이를 품에 안고 들마실을 하면서 생각합니다. 산초나무 새잎을 똑 따서 먹으면 화악 하고 산초나무 내음이 올라옵니다. 탱자나무 새잎을 똑 따서 씹으면 아하 탱자열매 맛이 이렇구나 하는 느낌이 풍깁니다. 감나무 새잎을 똑 따서 씹으면 머잖아 감알이 달게 익겠네 하고 떠오릅니다.


  지구별에 사람 숫자가 지나치게 늘었다 하는데, 지구별 사람들은 밥을 굶을 만한지 누구나 넉넉히 밥을 먹을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몇 가지 통계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지구별에서 거두는 곡식이나 기르는 짐승으로 모든 사람이 배불리 밥을 먹을 만하다고 하는데, 정작 지구별 사람들 누구나 가난에서 벗어나 배불리 삶을 나눈다고는 못 느낍니다. 밥쓰레기가 너무 많아요. 제대로 안 먹고 버리는 밥이 참 많아요. 남녘나라 밥쓰레기만 하더라도 몇 조원에 이른다 하지만, 이런 숫자를 떠나 무얼 어떻게 먹어야 내 몸이 즐거운가를 헤아리지 않아요.


  가만히 따지면, 나부터 내 몸이 좋아할 만한 밥을 알뜰히 헤아리지 못합니다. 내가 먹는 밥이 내가 꾸리는 삶인 줄 옳게 가누지 못합니다. 물 한 모금 싱그러이 마실 때에 내 피톨이 싱그러워요. 푸성귀 한 주먹 푸르게 먹을 때에 내 살결이 푸릅니다. 쌀밥 보리밥을 먹으며 쌀과 보리가 흙땅에서 여름과 겨울을 난 느낌으로 뼈마디를 살찌웁니다.


  술을 마시면 술 기운이 온몸에 돌 테지요. 담배를 태우면 담배 기운이 온몸을 감쌀 테지요. 포도를 먹으면 포도 기운이 온몸을 감돌 테고, 고추장을 먹으면 고추장 기운이 온몸을 휘감을 테지요.


  과자는 과자 기운을 냅니다. 표고버섯은 표고버섯 기운을 냅니다. 라면은 라면 기운을 내고, 빵은 빵 기운을 내요. 감자를 먹으면 감자 방귀를 뀝니다. 초콜릿을 먹으면 초콜릿 방귀를 뀝니다. 기름방울 흐르는 세겹살을 먹으면 기름기 짙은 똥을 눕니다. 밭에서 거둔 푸성귀를 먹으면 푸른 빛깔과 내음 나는 똥을 눠요.

 

 

 


- “우리도 보내 보면 어떨까요? 여보세요. 당신은 누구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대답이 없어. 혹시 마음으로 통신할 힘이 없는 상대일지도 몰라요.” (10쪽)
- “우리들을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냐? 밖을 봐. 이 바위는 차원을 넘고 있다고! 네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야. 이대로 가다간 은하계를 넘어가 버린다.” (47쪽)


  지구는 얼마나 좋은 별일까요.


  아무래도,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좋은 삶을 아끼는 좋은 사람이라면, 지구는 참 좋은 별이겠지요.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좋은 삶을 잊은 채 좋은 꿈을 북돋우지 않으면 지구는 참 나쁜 별이겠지요.


  내 삶을 나 스스로 좋게 일굴 때에 내 보금자리가 좋고, 내 마을이 좋으며, 내 누리가 좋습니다. 저절로 지구가 좋은 별이 돼요. 내 삶을 나 스스로 아무렇게나 팽개치면 내 보금자리 또한 팽개치기 마련이요, 내 마을과 내 누리 모두 팽개치고 말아요. 시나브로 지구가 나쁜 별이 돼요.


  전쟁영화를 즐겨 보면서 지구별에 전쟁 기운을 퍼뜨립니다. 전쟁영화를 자꾸 찍으면서 지구별에 전쟁 얘기를 퍼뜨립니다. 정치꾼들 당파싸움을 신문·방송에 자꾸 실으면서 사람들한테 정치꾼들 당파싸움 얘기를 물들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신문·방송 정치꾼들 당파싸움 얘기로 수다를 떨거나 이런 생각에 젖어듭니다.


  영화가 참사랑과 참삶과 참꿈을 이야기한다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참사랑과 참삶과 참꿈을 즐거이 얘기할 테지요. 초·중·고등학교에서 교사부터 흙을 일구며 아이들하고 나란히 흙을 일구는 겨를을 마련한다면,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스스로 흙을 일구어 먹을거리 얻는 삶을 생각하고 익숙하게 삼겠지요. 사람들 스스로 읽는 책이 사랑스럽고 믿음직하며 아름다운 줄거리 가득하다면, 사람들 스스로 사랑스럽고 믿음직하며 아름다운 생각을 꽃피우는 좋은 나날이 이루어지겠지요.


  지구는 얼마나 좋은 별일까요.

 

 


- “위원회에 너희 둘의 시체를 가져가지 않으면 안 돼. 원망하진 마라!” “마키무라 씨! 로미의 목숨은 이제 1시간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래요, 태양이 가라앉아 어두워지면 로미는 죽어요. 지금 둘이서 얘기를 나누며, 마지막 1시간을, 가장 멋진 추억으로 만들자고 하던 중이었는데.” “지구인들은 미쳤다.” “그래요! 지구는 너무나 무서워요. 인간인 주제에 인간미가 없는 세계라는 걸 알았죠! 내 고향이 훨씬 더 나아요. 훨씬 더 멋지다고요!” “그래, 지금 지구에 존재하는 것은 인간미가 아니라 시스템과 법률쁀이지. 미안하다.” (175쪽)
- “이 별이 어떻게 될지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당신의 결심을 듣고 싶어요.” “저는 이 나라 국민 앞에서 확실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고도 모두 눈을 뜨지 않는다면,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208쪽)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불새》(학산문화사,2002) 열째 권을 읽으며 자꾸자꾸 스스로 되묻습니다. 지구는 얼마나 좋은 별일까요.


  나는 얼마나 좋은 사람일까요.


  나는 얼마나 좋은 생각을 품을까요.


  나는 내 살붙이한테 얼마나 좋은 말을 들려줄까요.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얼마나 좋은 이야기꽃을 피울까요.


  나는 나부터 얼마나 좋다 싶은 책을 기쁘게 읽을까요.


  나는 우리 보금자리 텃밭이랑 뒷밭을 얼마나 신나게 일굴까요.


  나는 우리 마을 뭇 새들과 벌레와 푸나무를 얼마나 아낄까요.


- “위, 나 마음이 없어요.” “마음이 없다니! 왜?” “우리들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두뇌와 메카닉뿐이죠.” “? 마음이 없다니 가엾다.” “가엾다? 의미불명.” “저기 치히로, 이 근처에 깨끗한 물이 있고, 꽃이 피고, 나무가 있고, 생물이 사는 조용한 사람 없는 곳이 있을까? 로미가 가고 싶어해.” “이 근처는 생산 지대입니다. 나는 저 공장의 기술자죠. 저것은 도쿄. 거주 구역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조건의 땅은 없습니다.” “이쪽은?” “이 앞 약 200km는 사막 지대입니다!” “왜 이렇게 사막만 있지?” “위, 사막은 모두 우리들이 개발한 지역입니다.” (154∼155쪽)

 


  지구별 사람은 스스로 바라는 대로 살아갑니다. 지구별 사람 스스로 돈을 더 바란다면, 지구별 어느 나라이든 경제성장율과 국민소득 같은 숫자놀음에 더 사로잡힐밖에 없습니다. 지구별 사람 스스로 꿈을 더 키운다면, 지구별 어느 나라이든 착한 사랑과 참다운 이야기로 어깨동무하는 좋은 꽃내음 넘실넘실 흐르리라 봅니다.


  지구는 얼마나 좋은 별일까요. 나는 얼마나 좋은 사람일까요. 한국은 얼마나 좋은 터전일까요. 이 나라 도시와 시골은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일까요. 한국에서 새로 태어나는 책은 얼마나 빛나고, 한국사람이 한글로 빚는 글은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4345.4.25.물.ㅎㄲㅅㄱ)

 


― 불새 10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2.5.25./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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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탱자꽃 책읽기

 


  이오덕 님이 쓰신 시요 1960년대에 내놓은 시집이기도 한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다. 나는 이오덕 님 남은 글과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여러 해 하기도 했지만, 탱자나무로 이룬 울타리를 막상 제대로 들여다본 일이 없었다. 내 어버이들 시골집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지 모르나, 내 어린 날 이런 울타리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막상 《탱자나무 울타리》를 읽으면서도, 또 지난날 이오덕 님 글과 책을 갈무리하면서도 탱자나무도 탱자나무 울타리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인천에서 살며 골목마실을 하던 때, 주안2동 골목집 한 곳에서 탱자나무를 한 그루 보았다. 소담스레 열매가 달렸을 때에 비로소 알아보았다. 그러고는 고흥에 보금자리 마련하며 살아가는 동안 제대로 탱자나무를 보고 탱자꽃을 본다. 면내에 있는 중학교를 지나 초등학교로 가는 길목에 탱자나무 가지들이 얼키고 설킨 작은 울타리 비슷한 녀석이 있는데, 누군가 탱자나무 가지 사이에 빈 깡통을 여럿 찔러 넣었다.


  단단하고 굵직해 보이는 탱자나무 가시는 촘촘하다. 나뭇가지 사이에 박힌 빈 깡통을 빼낼 길이 없어 보인다. 팔을 뻗어 꺼내자면 팔뚝이 가시에 죽죽 긁혀 찢어지겠다 싶도록 아주 촘촘하다.


  4월 한복판 봄날, 탱자나무에 핀 하얗게 눈부신 꽃송이를 본다. 탱자나무를 가시와 열매로만 알다가, 이제 꽃으로 새삼스레 안다. 탱자꽃을 처음 보며 으아리꽃하고 살짝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으아리꽃을 먼저 보았으니 탱자꽃이 으아리꽃하고 살짝 닮았다고 생각할 뿐, 거꾸로 탱자꽃을 어릴 적부터 익히 보다가 어느 날 멧골짝에서 으아리꽃을 보았다면 으아리꽃이 탱자꽃을 살짝 닮았네 하고 생각할 테지.


  한참 탱자꽃을 바라보며 헤아린다. 모과꽃은 참 작으면서도 커다란 열매를 맺는다면, 탱자꽃은 알맞춤하다 싶은 크기에 알맞춤하다 싶은 열매를 맺는다. 그러면, 귤꽃이나 유자꽃은 얼마쯤 되는 크기일까. 가만히 보니, 감꽃도 꽤 작은데 감알은 그리 작지 않다. 능금꽃이나 배꽃도 퍽 작지만 능금알이나 배알은 퍽 크다 할 만하다. 복숭아꽃도 제법 크다 싶은 열매를 맺는다.


  더 곱씹는다. 나뭇가지에 달리는 열매를 모두 따고 보면 몹시 묵직하다. 나뭇가지 하나 무게는 얼마 안 되는데, 가냘프다 싶은 나뭇가지에 묵직한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곤 한다. 더 돌이키면, 모질게 비바람이 불어도 웬만한 나무는 쓰러지거나 꺾이지 않는다.


  이들 나무가 없다면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 나무 없는 사람살이를 생각할 수 있을까. 책을 빚는 종이는 탱자나무로 만들지 않는다지만, 탱자나무 없이 사람살이를 꿈꿀 수 있을까. 사람들은 탱자나무를 잊거나 모르더라도, 탱자나무는 사람들을 생각하거나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 지구별을 지키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장미꽃 팬지꽃 국화꽃 튤립꽃에 넋이 나가더라도, 탱자꽃은 언제나 고요히 제 흙땅에 뿌리내리며 지구별을 돌보지 않았을까. (4345.4.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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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빛깔있는책들 - 한국의 자연 174
박기성 지음, 심병우 사진 / 대원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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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사랑스러운 삶터를 사진으로
 [찾아 읽는 사진책 90] 심병우·박기성, 《울릉도》(대원사,1995)

 


  우리 집 둘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기를 날마다 빌면서 생각합니다. 둘째 아이가 아버지 자전거수레에 탈 수 있으면 언제라도 네 식구 즐겁게 자전거마실을 다닐 수 있으리라고. 이제 둘째는 첫째와 함께 자전거수레에 앉습니다. 처음에는 퍽 못마땅해 했지만, 요사이는 자전거수레에 앉히면 몹시 좋아합니다. 꼭 첫째 때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첫째는 자전거수레에 처음 타던 날 대단히 무서워 했어요. 그러더니 이내 더 태워 달라 보챘고, 이제는 자전거수레에 타고 함께 마실 다니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옆지기 자전거 뒷바퀴에 자꾸 실바람이 생겨 튜브를 통째로 갈아야겠다고 느낍니다. 마침 따사로운 봄날씨인데 뒷바퀴 때문에 네 식구 나란히 자전거마실 다니기를 못합니다. 읍내에 나가 자전거집에 튜브를 알아보지만 시골 읍내에는 마땅한 튜브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큰도시로 가거나 인터넷으로 물건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기로 했으면, 이런저런 물건을 스스로 손질하거나 짓거나 다듬을 수 있도록 몸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다시금 깨닫습니다.


  도시에서 살던 나날을 문득 떠올립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도시를 벗어나 여러 날 자전거마실을 해야 할 때에는 자전거 손질하는 연장을 한 꾸러미 챙깁니다. 언제 어디에서 못을 밟아 바퀴나 튜브가 찢어질는지 몰라요. 언제 어디에서 브레이크슈가 다 닳거나 망가질는지 모르며, 체인이 끊어지거나, 건전지가 다 닳거나, 어떤 일이 생길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갑작스레 비를 만날 수 있고, 돌을 밟고 넘어져 뒹굴 수 있어요. 시골 두메나 멧길에서 자전거집을 들를 수 없을 뿐더러, 찬찬히 갖춘 연장을 만나기 어려운 줄 미리 헤아립니다.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제대로 즐기지 못합니다. 제대로 돌아보지 않으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여태껏 제대로 살피지 못하거나 돌아보지 않았다면, 오늘부터 제대로 살피거나 돌아볼 노릇입니다. 찬찬히 살피고 가만히 돌아봅니다. 찬찬히 아끼고 가만히 사랑합니다. 나는 내 가장 가까운 곳 사람들, 곧 살붙이부터 살피고 돌아볼 노릇입니다. 내 옆지기와 아이들부터 아끼고 사랑할 노릇입니다. 네 식구 살아가는 우리 시골마을을 아끼고 사랑할 노릇입니다. 머나먼 좋은 나라나 멀디먼 예쁜 나라를 바라기 앞서, 네 식구 오래오래 살아가고 싶어 뿌리내리는 시골마을 둘레를 즐겁게 나들이할 노릇이에요.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늘 내 삶터부터 사진으로 찍거나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릴 때에 가장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서울사람한테는 서울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인천사람한테는 인천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고흥사람한테는 고흥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서울사람한테 제주섬이 가장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제주섬이 가장 아름답다 여기는 서울사람이라면, 서울을 떠나 제주섬에서 살아야 합니다. 울릉섬을 가장 아름답다 여기는 부산사람이라면, 부산을 떠나 울릉섬에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 여기는 터전에서 삶자리를 꾸려야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 느낄 만한 나날을 누리거든요.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 여기지 못하는 곳에서는 스스로 썩 내키지 않는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망가뜨리거나 덧없이 보냅니다. 돈을 벌든, 사랑짝을 찾든, 학교를 다니든, 무엇을 하든, 스스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곧, 돈을 많이 벌고 싶으면 어떠한 일이든 돈을 많이 벌 만한 곳으로 가면 됩니다. 마음이 느긋하면서 기쁜 채 돈을 벌고 싶으면 돈크기를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좋은 일터를 찾으면 됩니다. 얼굴 예쁜 색시를 만나고 싶으면 사람들을 얼굴로만 따지면 됩니다. 마음 착한 동무를 사귀고 싶으면 사람들을 마음씨로 어깨동무하면 돼요.


  가장 바라는 꿈대로 가장 즐거운 삶을 누립니다. 가장 아끼는 모습대로 가장 빛나는 사진을 빚습니다.


  심병우 님 사진과 박기성 님 글이 어우러진 《울릉도》(대원사,1995)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발을 묶는 바다는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살진 오징어와 명태, 방어가 무궁무진하고 기른 것 아닌 천연 미역과 돌김은 인건비가 안 빠져 못 딴다(13쪽).”고 하는데, 두 분은 울릉섬을 몇 차례쯤 마실해 보았을까요. 울릉섬 마실을 하는 몇 차례에 걸쳐 며칠쯤 묵어 보았을까요. 얼마나 울릉섬에서 살고 나서 이와 같이 글을 쓰고, 이러한 책에 사진을 담을 수 있을까요.

 


  고작 열흘이나 기껏 두어 달쯤 살아내고서 어느 한 마을을 들려주거나 보여준다 하는 사진책이나 이야기책을 낸다면, 이런 책은 빈 껍데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흘이나 두어 달을 살아낸 사랑을 속속들이 일구어 아름다이 엮을 줄 안다면, 이런 책은 넉넉하고 따스한 알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말 누군가는 딱 한 번 스치듯 지나가며 담은 사진으로도 ‘사진여행’을 풀어놓습니다. 참말 누군가는 태어나서 자라거나 여러 해 살더라도 ‘사진여행’뿐 아니라 ‘사진삶’조차 풀어놓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 마음 때문입니다.


  《울릉도》를 읽습니다. “신천지인 까닭에 유물·유적이 거의 없지만 볼거리는 많다. 역사가 보잘것없는 미국사람들이 1872년에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이라는 것을 만들어 자랑거리로 삼았듯, (울릉도는) 곳곳에 천연기념물 지역을 두었다(19쪽).”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것(울릉 9경)을 모두 보려면 아무래도 섬을 한 바퀴는 돌아야 한다. 배나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그리고 성인봉을 오르고 나리분지에도 가 봐야 한다(24쪽).”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진쟁이 심병우 님이나 글쟁이 박기성 님은 울릉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손님입니다. 그렇다고 뻔질나게 드나드는 손님도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땀방울을 영글어 《울릉도》를 내놓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 사랑이 아리땁게 모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더 멋스럽다 싶은 사진을 찍을 테고, 누군가는 더 놀랍다 싶은 이야기를 글로 옮길 테지요. 그런데, 더 멋스럽다 싶은 사진이나 더 놀랍다 싶은 글이 꼭 있어야 되지는 않아요. 스스로 좋아하고 즐길 줄 아는 사진이나 글이면 돼요. 스스로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사진이나 글이면 넉넉해요.


  내 사랑스러운 삶터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덧붙여, 내 사랑스러운 꿈터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어여쁩니다. 그리고, 내 사랑스러운 이야기터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아리땁습니다.


  로버트 프랭크 님이 미국땅을 자동차를 몰아 두루 돌며 담은 《미국사람들》이라는 사진책은, ‘자동차를 몰아 넓고 큰 미국땅을 두루 도는’ 느낌을 담습니다. 더 돋보이거나 더 멋스러운 모습이나 느낌을 담지 않습니다. 그저 ‘넓고 큰 미국땅 온갖 모습과 느낌’을 담습니다. 사진책 《울릉도》는 자동차나 버스나 헬리콥터나 배에 기대지 않고 두 다리로 즐기거나 누린 울릉섬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보여줍니다. 어느 쪽이 더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더 거룩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더 멋스럽지 않습니다. 그저 저마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른 눈길로 담습니다. 세계사진역사에 이름을 올린다 해서 더 돋보일 까닭이 없고, 한국사진역사에조차 이름을 못 올린다 해서 덜 떨어질 까닭이 없습니다.


  《울릉도》에 실린 “천부에서 한 시간 반쯤 걸려 올라선 고개는 세상 모를 딴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사방이 험상궂은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거짓말처럼 설원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여남은 채의 집들이 겨울잠을 자고 있다(85쪽).”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추운 겨울날 한 시간 반쯤 눈밭을 헤치며 멧자락을 누빈 이야기입니다. 삶을 담고 사랑을 들려주고 꿈을 보여줍니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이 아름답다고 느낄 사진을 빚습니다. (4345.4.25.물.ㅎㄲㅅㄱ)


― 울릉도 (심병우 사진,박기성 글,대원사 펴냄,1995.9.5./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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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없는 글쓰기 (익명 글쓰기)

 


  국어사전에서 ‘익명(匿名)’이라는 낱말을 찾아본다. “이름을 숨김”을 뜻한다 한다. 문득 생각한다. 한자말로 ‘익명’이라 적는 일이 나쁘다 느끼지 않으나, 새로운 한국말로 ‘이름숨김’이나 ‘숨긴이름’처럼 빚을 수 있으리라고. 또는 ‘이름감춤’이나 ‘감춘이름’처럼 새 낱말 빚을 수 있겠지.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예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한글’이라 하는 좋은 그릇이 있다 하더라도 이 그릇에 담을 어여쁜 낱말을 빚지 못한다. 한글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낱말이란 으레 한자말이거나 영어가 되기 일쑤이다. 요사이는 아예 한자로 적거나 알파벳으로 적을 뿐 아니라 히라가나나 가타가나로까지 적기도 한다.


  쉽게 헤아려 보고 싶다. ‘익명’이라 하는 한 번 감춘 낱말이 아닌, 말뜻 그대로 생각을 나타내는 ‘이름을 숨긴’이나 ‘이름을 감춘’이라는 쉽고 또렷한 한국말로 곰곰이 헤아려 보고 싶다.


  사람들은 제 이름을 숨기거나 감춘 채 글을 쓰기도 한다. 지난날에는 문학을 하는 이들이 제 이름을 숨기거나 감추었다. 스스로 알쏭달쏭하게 보이려 하는 뜻이 있었을는지 모르나, 이름을 숨기거나 감추면, 글쓴이가 ‘몇 살이요, 남자냐 여자냐, 학교는 어디를 얼마나 다녔나, 어느 마을에 사는가, 한국사람인가 외국사람인가, 재일조선인인가 연길사람인가, 어린이인가 푸름이인가, 밥벌이로 삼는 일거리는 무엇인가’ 같은 모든 그림자가 사라진다. 문학을 읽을 사람은 이 모든 껍데기나 허울을 생각하지 않고 글만 읽는다. 곧, 문학을 문학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며 제 이름을 숨기거나 감추며 문학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누군가는 이름을 숨기며 인터넷에 글을 쓸 때에 남을 해코지하거나 괴롭히거나 따돌리거나 들볶는다. 모진 말이나 거친 말을 일삼기도 한다.


  왜 남을 해코지해야 하나. 왜 모진 말을 일삼아야 하나.


  이름을 숨긴 채 글을 써도 된다. 이름을 밝히며 글을 써도 된다. 어떻게 하든 내 글이다. 이름을 숨겨서 다른 사람이 ‘누가 썼는가’ 알아보지 못한대서 내 글 아닌 다른 사람 글이 될까. 내 글 아닌 다른 사람 글처럼 보일까.


  어느 인터넷 어느 게시판에 이름을 숨겨도 누구나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다는 소리란, 모든 마음을 활짝 열고 즐겁게 생각을 나누자는 이야기라고 느낀다. ‘익명’이라는 그늘에 스스로 갇히면서 슬프며 억지스러운 논리라는 틀에 사로잡히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름을 숨기며 글을 쓸 적에는 사람들 참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들 뒷모습이 드러난다. 이뿐 아니다. 뭇사람 앞에서 제 이름을 숨긴 채 뭇칼질 같은 글을 함부로 쓰는 일이란, 누군가를 비아냥거리거나 헐뜯거나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다. 바로 ‘이름 숨긴 채 글을 쓰는 나’를 비아냥거리거나 헐뜯거나 깎아내리는 일이 된다.


  예부터 ‘때린 사람은 잠 못 이룬다’고 했다. 왜냐하면, 때린 사람은 ‘때린 느낌’이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지기 때문이다. 때린 느낌이 때린 사람한테서 지워질 수 없다. 이름을 숨긴 채 뭇칼질 하듯 글을 쓰면, 이 글은 ‘이름 숨긴 채 글을 쓰는 내’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 지워지지 않는다. 곧, 이름을 숨기든 이름을 드러내든, 나 스스로 쓰는 모든 글은 내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지면서 ‘내 생각’과 ‘내 삶’이 된다.


  입에 발린 고운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이는 참말 ‘입에 발린 고운 듯 보이는 삶’에서 허덕인다. 속알맹이까지 알차도록 어여삐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이는 참말 ‘속알맹이까지 알차도록 어여삐 삶’을 일군다. 막말을 일삼는 사람이라면, 막삶을 보내고 만다. 거친 말이란 거친 삶이다.


  사랑을 꽃피우는 삶을 바란다면, 내 이름을 숨기거나 드러내거나 내 사랑을 흐드러지게 꽃피우도록 글을 쓸 노릇이다. 이 땅에 평화와 평등과 자유와 민주가 자리잡기를 바란다면, 나부터 스스로 언제나 평화로운 넋과 평등한 꿈과 자유로운 사랑과 민주다운 얼을 빛내는 글을 쓸 일이다.


  평화롭지 않은 말이라면 평화롭지 않은 넋이며 평화롭지 못한 삶이다. 자유롭지 못한 글이라면 자유롭지 않은 마음이며 자유롭지 못한 삶이다.


  이름을 숨기며 쓰는 글은 ‘딴 사람이 안 본다’고 여기며 용두질을 하는 모습과 같다. 딴 사람이 보든 안 보든, 풀숲이나 길바닥에 쓰레기가 떨어졌으면 아무렇지 않게 주워 치우거나 쓰레기통으로 옮길 노릇이다. 누가 ‘당신은 참 착한 일을 했소’ 하는 말을 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말고, 나 스스로 마땅히 할 몫을 하면 된다. 스스로 착하게 살고 스스로 참답게 생각하며 스스로 아름답게 꿈꾸면 된다.


  이름은 한낱 허울이기만 하지 않다. 이름은 사람 몸뚱이처럼 대수롭다. 다만, 이름과 몸뚱이가 아무리 대수롭다 하더라도 알맹이와 마음에 앞설 수 없다. 이름으로 누리는 삶이 아니라 알맹이로 누리는 삶이요, 겉치레로 꾸미는 삶이 아니라 온마음 기쁘게 누리는 삶일 테니까.


  이름을 사람들 앞에서 숨긴들, 누구보다 나 스스로 내 글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들이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글을 안다. 나는 내 글을 알기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짓을 고스란히 바라본다. 내가 내 짓이 미운 줄 느끼며 바라본다면 나는 나 스스로를 갉아먹거나 깎아내리는 꼴이다. 한자말로 일컫자면, ‘자위’란 ‘자해’일 뿐이다. ‘자위’하듯 ‘익명’으로 글을 쓰는 일은 스스로를 ‘자해’하는 글이 될 뿐이다. 스스로를 사랑하며 글을 쓰면, 언제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삶이 된다. 스스로를 사랑하며 글을 쓰면, 이름을 숨기건 밝히건 늘 내 마음 따사롭게 돌보며 어여삐 빛난다고 느낀다. (4345.4.25.물.ㅎㄲㅅㄱ)

 

 

***

 

알라딘서재 논쟁에서 더없이 부질없구나 싶은 '익명 글'로 스스로 갉아먹으려는 분이 곧잘 보여, 이 같은 글을 한 자락 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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