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란 서울
어효선 지음, 한영수 사진 / 대원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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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쟁이 한영수 님 책은 <내가 자란 서울> 한 가지만 남았는데, 이마저도 절판입니다. 하는 수 없이 이 책에 이 사진책 느낌글을 걸치지만, 사람들이 이분 사진을 맛보거나 누릴 수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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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살지 않는 우리 자연
 [찾아 읽는 사진책 111] 한영수, 《우리 강산》(열화당,1986)

 


  구월 살짝 넘긴 이른가을에 벌써 벼베기를 마친 논이 있습니다. 아마 가장 먼저 모내기를 한 논이겠지요. 환한 가을햇살 가득 넘치던 어제 하루, 마을마다 할머니 할아버지 들은 길가에 콩포기를 죽 늘어놓고는 경운기로 밟거나 큰돌 얹은 수레를 밀거나 나무방망이를 두들기며 콩을 터느라 부산했습니다. 오늘 새벽부터 밤까지 빗줄기가 이어집니다. 쉬지 않고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문득, 어제 하루 할머니 할아버지 누구나 그토록 부산하게 움직인 까닭을 알 만합니다. 이렇게 오늘 비가 찾아들 줄 몸과 마음으로 느끼신 듯합니다.


  저녁에 빗줄기가 조금 잦아들며 개는가 싶기에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는 설렁설렁 자전거마실을 다녀옵니다. 이웃마을 옆마을 천천히 돌며 가을바람을 쐽니다. 마을마다 길가에 털다 못 턴 콩포기가 꽤 많습니다. 마을 분들은 마저 털어야 할 콩포기를 커다란 비닐로 둘둘 말아 놓았습니다. 오늘날 흙일꾼은 이렇게 비닐이 꼭 있어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밭에 심을 때에도, 비가 찾아들어 얼른 걷거나 건사할 때에도, 비닐집을 칠 때에도, 온갖 곳에 비닐을 씁니다.


  2005년 무렵이지 싶은데, 중국 연길시 둘레를 다녀온 적 있습니다. 시내에서 벗어나 시골을 자동차로 달리는데, 길가와 먼 멧자락마다 가득한 밭뙈기 드문드문 ‘비닐로 덮은 자리’가 보입니다. 중국 흙일꾼도 흙일 아닌 비닐일을 하는구나, 중국도 이렇게 비닐일로 바뀌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 널따란 중국에서 밭뙈기마다 온통 비닐로 덮어씌운다면 지구별 사람들은 비닐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 얼마나 많이 써야 할까요. 중국 흙일꾼이 한 해 동안 쓴 비닐을 태울 때에는 얼마나 많은 매연과 공해가 생길까요.


  밭에 비닐을 씌우고 감자를 거둔 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밭에 비닐을 씌우고 고추를 심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감자도 고추도 한국에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라 하더라도, 밭자락에 비닐을 널따랗게 덮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미국도 프랑스도 독일도 네덜란드도 영국도 덴마크도 폴란드도 그리스도, 흙일꾼은 흙을 만지며 삶을 일구었지, 비닐을 만지며 삶을 일구지 않았어요.


  흙일 아닌 비닐일로 달라지는 오늘날 한국에서는, 시골마다 ‘나뭇가지에 비닐이 꽃처럼 걸려 바스락바스락 춤추는 모습’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골마다 넘치는 비닐은 비바람에 날려 높다란 나뭇가지에 매달리곤 합니다. 어찌저찌 걷지 못합니다. 높은 나뭇가지에 걸린 연을 못 꺼내듯, 높은 나뭇가지에 걸린 비닐은 깃발처럼 휘날립니다.

 

 

 

 

 


  1933년에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고, 1999년에 숨을 거둔 한영수 님이 빚은 사진책 《우리 江山》(열화당,1986)을 읽습니다. 사진책 《우리 강산》은 책이름 그대로 한겨레 냇물과 멧자락을 보여줍니다. 한겨레가 먼먼 옛날부터 깃들이며 숨결을 이은 냇물과 멧자락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찬찬히 보여줍니다.


  한영수 님은 “지구상의 가장 위대한 드라마, 그것은 곧 산천수목의 변화가 아니겠느냐.” 하고 사진책 끝에 붙입니다. 임응식 님은 이 사진책을 기리며 “그(한영수)는 우리 나라 광고사진계의 개척자로서 광고사진의 중요성을 사회적으로 확립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서 사업적으로도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성공도 했다.”고 적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광고사진을 환하게 열며 뜻을 이룬 한영수 님이 이 땅 뒷사람한테 ‘이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여주고 싶어 이만 한 사진책을 일구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땅이 아름답다면 냇물과 멧자락만 보여주어서 되겠느냐?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이야말로 아름답지 않겠느냐?’ 하고 물을는지 모릅니다. 네, 그래요. 멋들어진 골짜기와 바위만 보여준대서는 ‘아름다운 삶’을 다 말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한영수 님은 《우리 강산》을 1986년에 선보였고, 이듬해인 1987년에는 《삶》(신태양사)을 선보여요. 《우리 강산》에는 오직 숲살림만 사진으로 드러낸다면, 《삶》에는 오직 사람살림만 사진으로 드러내요. 한영수 님은 한겨레 아름다운 꿈과 사랑을 ‘강산(자연)’과 ‘삶(사람)’으로 살포시 나누어서 이야기꽃을 피워요.


  커다란 판으로 시원스레 엮은 사진책 《우리 강산》을 가만히 되넘깁니다. 높은 멧자락도, 눈을 함박 뒤집어쓴 겨울나무도, 물방울 힘차게 튀기는 냇물도, 드넓은 하늘과 바다와 들도, 참으로 아름답구나 싶습니다. 어쩌면 너무 마땅한 소리일 텐데, 아름다운 한겨레 삶터를 사진책 200쪽이나 300쪽, 또는 500쪽이나 1000쪽에 담아서 보여줄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전라남도나 전라북도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사진으로 보여준다고 헤아려 보셔요. 구례군이나 임실군이나 고흥군이나 영암군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사진으로 보여준다고 헤아려 보셔요. 나는 전남 고흥에서 살아갑니다. 전남 고흥 한 곳만 따지더라도, 동강면이나 도화면이나 풍양면이나 봉래면 한 자락 아름다운 자연을 사진으로 보여준다면, 더 깊이 파고들어 도화면에서 지죽리나 신호리나 봉산리나 가화리나 발포리 한 자락 아름다운 자연을 사진으로 보여준다면, 사진책 몇 쪽이 있어야 할까요. 자그마한 군 면 리 한 곳에서조차 사진책 500쪽이나 1000쪽으로도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걸쳐 누릴 빛나는 아름다움’을 낱낱이 담기는 몹시 어려우리라 느껴요. 전남 고흥 도화면 신호리 동백마을 조그마한 시골자락에서조차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 이야기를 다루려 하더라도 사진책 1000쪽마저 빠듯하구나 싶어요.

 

 


  곧, 사진책 《우리 강산》은 아주 간추린 판입니다. 이 사진책을 밑거름 삼아 이곳저곳에서 ‘내가 누리는 아름다운 강산’을 사진과 사진책으로 선보일 노릇입니다. 사진쟁이 한영수 님 말마따나 ‘가장 거룩하고 놀라운 춤사위’가 펼쳐지는 삶자락이요 자연이며 숲이자 마을이에요.


  시골 흙일꾼 손길이 깃든 밭자락이나 논배미를 보셔요. 시골 흙일꾼이 기나긴 해를 대물림하면서 차근차근 쌓은 돌울타리나 비탈논을 보셔요. 스스로 뿌리내려 오백 해 천 해를 웃도는 나무들을 보셔요. 강원도 태백산이나 설악산에만, 또 울릉섬에만 오래된 숲이 있지는 않아요. 한국땅 골골샅샅 깊은 시골마을마다 크고작은 오래된 숲이 있어요. 너비가 백 미터는 되어야 아름다운 냇물이 아니에요. 너비가 일 미터라 하더라도 아름다운 냇물이 돼요.


  아름다움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숲에서 느끼지 않아요. 사람들 가슴속에서 꿈과 사랑이 피어날 때에 비로소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요. 봄을 맞이해 찾아드는 ‘봄까지꽃’ 작은 떨기 하나가 바로 아름다움이에요. 흙일꾼이 심건 말건 스스로 씨앗을 퍼뜨리는 유채꽃이나 부추풀이 바로 아름다움이에요. 나팔꽃 씨앗을 받아서 따로 심어야 나팔꽃이 피지 않아요. 접붙이기를 해야 감나무가 된다지만, 감나무 가지와 잎사귀와 꽃과 열매는 감나무 스스로 빚어요. 돌울타리를 따라 마삭줄이 줄기를 뻗어 꽃을 피워요. 돌울타리에는 수세미도 호박도 하늘타리도 포도도 참다래도 서로서로 줄기가 얼크러져요. 꽃 아닌 꽃을 피우는 무화과나무도 스스로 곳곳에 어린나무를 키워 내요. 우람한 느티나무 밑에서 조그마한 새끼 느티나무가 자라요.


  남미 어느 나라에 있다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폭포가 되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자연이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높이가 십 미터는 넘어야 볼 만한 폭포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높이가 삼천 미터나 오천 미터는 되어야 거룩하거나 빼어난 멧봉우리일까 궁금해요. 사진책 《우리 강산》은 넌지시 이야기를 건네요. 우리 냇물과 멧자락은 참말 이름 그대로 ‘우리 냇물’이고 ‘우리 멧자락’이에요. 오늘날 한국사람은 송두리째 시골과 숲과 자연을 버리고는 도시로 몰려들지만, 오늘날 한국사람은 스스로 시골과 숲과 자연을 내팽개치고 도시에서 돈벌 자리만 찾지만, 아름다움을 말하거나 보여주는 자리에서는 누구라도 언제나 시골과 숲과 자연을 사진으로 찍어서 말하거나 보여주려 해요. 사진을 찍는 이나 그림을 그리는 이나 글을 쓰는 이나, 아름다움을 말하거나 보여주려 할 때에는 으레 시골로 가요.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 할 적에는 늘 숲을 찾아요.


  1933년부터 1999년까지 목숨을 누린 한영수 님은 두툼하고 커다란 사진책 《우리 강산》을 우리들한테 선물로 물려주었어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 뒷사람인 이 나라 아이들한테 무엇을 선물로 빚어 물려줄 만할까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누리거나 마주하거나 껴안거나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이며, 우리들은 무엇을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리며 글로 담으며 살아가는가요. (4345.9.9.해.ㅎㄲㅅㄱ)

 


― 우리 江山 (한영수 사진,열화당 펴냄,1986.4.1./판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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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ㅂㅇ 님 서재에 올라온 글을 읽다가 문득 느껴, 이 같은 글을 적어 봅니다. 광고전화란 참... 그시기 저시기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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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기 울리지 않는 빗소리

 


  문득 깨닫는다. 시골에서 살아간 지 어느덧 이태째 되는데, 시골에서 살아가는 날이 길어질수록 ‘광고전화’가 뜸하다. 도시에서 살 적을 돌이키면, 하루에도 몇 차례 광고전화를 받아야 했다. 손전화 기계 바꾸라는 광고전화부터, 땅을 사라느니, 보험을 들라느니, 새 신용카드를 받으라느니, 그야말로 온통 광고투성이 나날이었다고 느낀다.


  처음 시골로 삶터를 옮긴 뒤에는 심야보일러 들이라는 전화가 뻔질나게 왔다. 그 다음에는 위성방송 달라는 전화가 곧잘 왔는데, 한 달 두 달 지나고 또 지나면서 이 같은 광고전화가 부쩍 줄어든다. 이제는 한 달에 한 차례쯤 광고전화가 올까 말까 한다. 내 전화번호를 빼돌려서 서로 나누는 광고회사들이 느끼기에도 ‘도시사람’ 아닌 ‘시골사람’은 무언가 조잘조잘 떠들며 물건을 팔기에는 어려우리라 보았을까.


  《에미는 괜찮다》라는 책을 읽으면, 이 책에 나오는 할머니는 밭일을 하거나 논일을 하다가 ‘집에서 전화기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누구한테서 오는 전화라고 곧장 알아챈다고 말씀한다. 나도 이렇게 느낀다. 내 전화기가 울릴 때면, 어디에서 무슨 일 때문에 전화를 거는구나 하고 먼저 느낀다. 쪽글이 왔다며 손전화 기계가 울릴 적에도 어떤 쪽글일는지 어림할 수 있다.


  모든 삶은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 한다고 느낀다. 광고전화를 걸며 영업을 해야 하는 분들 또한, 당신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회사일’이요 ‘식구들 먹여살리는 밥벌이’인 탓에, 시골 사는 나한테까지 광고전화를 걸며 목이 쉬도록 말을 해야 할 텐데, 제아무리 고되며 싫은 일을 하더라도 당신들 마음이 목소리에 깃든다. 곧, 이 마음이 내 전화기로 스미면서 누가 왜 전화를 하는가를 환히 알아챌 수 있다.


  음성에 사는 내 어버이나 일산에 사는 옆지기 어버이가 전화를 걸 적에도 곧장 알아챈다. 두 어버이가 당신 아이들을 그리고 당신 손자들을 그리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사외보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우리 시골집 살림을 북돋우려고 일거리를 안겨 주니까 조마조마 두근두근 마음을 건넨다. 내 책을 내놓아 준 출판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내 책이 어느 만큼 사랑받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니, 이 또한 조마조마 두근두근 마음을 보낸다.


  내가 누군가한테 전화를 걸 적에도 내 마음이 살포시 실릴 테지. 내 전화를 받는 누군가는 어떤 느낌일까. 내가 거는 전화가 따르릉 울릴 적에 이녁은 어떤 마음이 될까. 내 사랑이 전화기라는 기계를 징검다리 삼아 따사롭게 흐를까. 전화기 울리지 않는 이른가을 한낮, 아침부터 듣는 빗소리가 온 집안을 감돈다. (4345.9.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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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손으로 글쓰는 어린이

 


  엎드려 놀다가 동생이 팔을 밟고 올라왔다며 오른손이 다쳐 아프다는 큰아이는 오른손 팔뚝에 붕대를 감는다. 오른손을 아예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하루가 지난 뒤 오른손을 멀쩡히 움직인다. 다쳤다기보다 놀라는 바람에 오른손을 안 움직이려 했지 싶다. 아무튼, 오른손을 못 쓰니 글씨쓰기 놀이도 못하리라 여기기에, 그러면 왼손으로 쓰면 돼, 하고 말하면서 아버지부터 왼손으로 글씨를 써서 보여준다. 아이는 아버지가 하는 양을 바라보며 왼손으로 천천히 또박또박 글씨를 쓰며 논다. (4345.9.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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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들보라 글쓰고 싶어

 


  글씨를 쓰며 노는 누나 곁에서 볼펜 한 자루 쥐며 저도 글씨를 쓰겠다 하는 산들보라. 그래, 너도 쓰고프면 쓰렴. 다만, 누나가 쓰는 빈책 말고 네 자그마한 빈책에다 쓰렴. (4345.9.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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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나르는 전차
리즐 스티히 그림, 제임스 크뤼스 글, 유혜자 옮김 / 베틀북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숲에서 마음껏 노는 아이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91] 리즐 스티히·제임스 크뤼스, 《행복을 나르는 전차》(베틀북,2002)

 


  숲에서는 날마다 마음껏 놀고 언제까지나 싱그러이 살아갈 수 있다고 느껴요. 숲에서 노는 아이들은 물리지 않아요. 숲에서 아이들하고 지내는 어버이는 질리지 않아요. 숲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숲에서 밭을 일구어요. 숲마실을 하고 숲내음을 맡으며, 숲열매를 얻고 숲기운을 누려요.


  깊숙한 숲이든 얕은 숲이든, 숲에 머물 때에는 숲이 베푸는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숲에서 들려주는 노래를 듣고, 숲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숲에서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자면 어느 삶터라 하든 숲을 일구어야지 싶어요. 숲이 없는 데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이 메마르거나 생각이 자라지 않으리라 느껴요.


.. 전차는 날마다 똑같은 길로만 다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어떤 전차도 다니지 않는 길로 들어섰어요 ..  (3쪽)


  ‘놀이공원’이라 이름 붙은 데이든, ‘PC방’이라는 데이든, 아이들이 마음을 놓고 몇 날 며칠 몇 달 몇 해 온삶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놀이공원에서 하루를 묵거나 이틀을 묵거나 이레를 묵으면서 놀 만할까요. 인터넷게임을 하는 피시방에서 여러 날 묵으면서 놀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따로 지은 시설에서는 하루 내내 놀기에도 힘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엑스포 같은 데이든 박물관 같은 데이든 놀이공원 같은 데이든, 한 달이나 한 주는커녕 하루조차 마음껏 뛰놀 만하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몸이 받치기 힘들기도 하지만 돈도 아주 많이 들겠지요. 놀이공원에서는 밥을 따로 사다 먹어야 할 텐데, 아이와 어버이 몸을 헤아릴 만한 밥을 마련해서 먹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틀에 갇힙니다. 울타리에 사로잡힙니다. 톱니바퀴에 얽매입니다.


  그러나 놀이공원으로 놀러 가는 아이와 어버이가 무척 많아요. 피시방으로 놀러 다니는 아이들이 매우 많아요. 컵라면도 먹고 빵도 먹으며 과자도 먹어요. 닭고기도 먹고 세겹살도 먹으며 떡볶이도 먹어요.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딱히 걱정하지 않아요. 놀이기구를 타야 비로소 노는 줄 여겨요. 놀잇감을 손에 쥐어야 비로소 놀 만하다고 여겨요.


  어떻게 놀아야 즐거울까를 스스로 생각하지 못해요.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놀이요,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일이에요. 남이 만든 놀잇감과 놀이시설을 찾아야 비로소 놀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남이 마련한 일자리를 붙잡아야 비로소 일할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어떻게 놀 때에 신날까를 스스로 살피지 못하도록 사회와 나라가 가로막아요. 제도권 사회와 제도권 교육으로 사람들 생각힘을 가로막아요. 모두들 톱니바퀴 가운데 하나가 되어 굴러가도록 내몰아요. 사람들 저마다 빛낼 꿈과 사랑 아닌 다 똑같은 틀과 울타리에 스스로 갇히도록 등을 떠밀어요.


.. 그 날 따라 전차는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나도 푸른 나무가 있는 들판으로 나가고 싶어!’ ..  (5쪽)

 

 


  리즐 스티히 님 그림과 제임스 크뤼스 님 글이 어우러진 그림책 《행복을 나르는 전차》(베틀북,2002)를 읽으며 곰곰이 돌아봅니다. 독일에서 1965년에 처음 나온 그림책 《행복을 나르는 전차》에 나오는 ‘전차’는 도시에서 더는 달리고 싶지 않아 도시를 떠나요. 회사나 학교에 가느라 바쁜 도시사람을 멀리 팽개치고 숲으로 들어서요. 숲을 달리며 숲짐승이나 들짐승을 태워요. 전차는 나무와 풀과 꽃 사이를 달리며 즐거워요. 여러 짐승을 태우며 즐거워요. 짐승들은 전차에 타고는 노래를 불러요. 바람도 노래를 부르고, 해님도 노래를 불러요. 풀도 꽃도 나무도 모두 노래를 함께 불러요.


  도시 한복판을 날마다 똑같이 달려야 하던 전차는 스스로 노래를 부르지 못했어요. 전차에 타는 사람들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어요. 모두 시계만 들여다봐요. 시계를 안 들여다볼 때에는 꾸벅꾸벅 졸아요. 전차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면서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노래도 햇살도 바람도 숲도 없는 매캐한 도시에서 언제나 쳇바퀴처럼 빙빙 돌자니 스스로 지겹고 따분하며 슬퍼요.


.. 푸른 초원으로 들어선 전차는 쉬지 않고 달렸어요. 마침내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찬 숲이 나타났어요 ..  (15쪽)


  1960년대 한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1965년 언저리에 《행복을 나르는 전차》 같은 그림책이 한국말로 옮겨졌다면 얼마나 많은 한국사람이 이 그림책을 아끼거나 사랑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2002년에 처음 옮겨지던 때에는, 또 판이 끊어져 새책방 책시렁에서는 사라지고 헌책방 책꽂이에서 찾아야 하는 이 그림책을 읽을 오늘날 한국사람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며 사랑할 만할까 궁금합니다.


.. 그 뒤로 전차는 다시 시내만 다녀요.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강아지와 당나귀, 고양이와 수탉을 그리워한답니다 ..  (25쪽)


  이제 독일사람은 조금은 즐거운 삶을 찾았을까요? 그림책 《행복을 나르는 전차》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아로새기면서 ‘쳇바퀴 삶’이나 ‘울타리에 갇힌 일’이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놀이’에서 스스로 벗어날 줄 알까요? 예나 이제나 독일사람은 스스로 바보스레 숲을 잊거나 모르거나 등진 채 살아갈까요? 아름다운 꿈이나 사랑은 잊으면서 살아갈까요? 어른과 아이 모두 가장 깊은 사랑과 가장 너른 꿈과 가장 따사로운 믿음으로 어깨동무할 때에 가장 즐거운 줄 깨달을까요?


  아이들은 숲에서 가장 마음껏 뛰놀 수 있어요. 어른들은 숲에서 가장 실컷 일할 수 있어요. 숲은 따사로운 어머니 품입니다. 숲은 너그러운 아버지 어깨입니다. 숲은 보드라운 할머니 치마폭입니다. 숲은 슬기로운 할아버지 주름살입니다. 숲은 해맑은 아이들 노랫소리입니다. (4345.9.9.해.ㅎㄲㅅㄱ)

 


― 행복을 나르는 전차 (리즐 스티히 그림,제임스 크뤼스 글,유혜자 옮김,베틀북 펴냄,2002.9.10./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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