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훼손 글쓰기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리영희 님 책을 읽었다. 왜일까. 누가 알려주었을까.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리영희 님 책을 읽으라 하는 교사도 벗도 이웃도 없었는데, 나는 참 뜬금없이 리영희 님 책을 읽었다. 리영희 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기 때문일까? 어떻게 알 수 있어서 당신 책을 하나하나 알뜰히 장만하면서 읽을 수 있었을까?


  리영희 님 책을 읽으며 당신이 밝히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얘기하기도 해서 배우는데, 리영희 님은 당신 책을 이룬 글을 쓰려고, 글 한 줄마다 책 다섯 권씩 읽는다고 했다. 나는 리영희 님 책을 읽을 적에 이와 같은 ‘밝힘말’을 마주하며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참 수수하구나, 참 스스로 거리낌없고 홀가분하구나, 하고 느꼈다. 왜냐하면, 글을 한 줄 쓰려면 책 다섯 권 아닌 책 쉰 권을 읽어도 모자랄 뿐 아니라, 책 백 권쯤 읽고서야 비로소 글 한 줄 쓸 만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책을 그닥 읽지 못했다. 이때에는 아직 종이책 천 권을 못 읽었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글을 쓰는 일을 하자면, 글 한 줄에 책 백 권어치 넋과 땀과 숨이 배어야 비로소 글 한 줄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고 느꼈다. 내 마음속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리영희 님에 이어 송건호·이오덕·박경리·박현채·김지하·김수영·김남주·고정희·염무웅 같은 사람들 이름을 하나하나 익히고, 당신들 책을 하나하나 장만하여 읽으며 늘 곰곰이 생각을 기울였다. 모두 고등학교 1∼3학년 사이 일인데, 당신들 누구나 글 한 줄을 쓰고자 종이책 다섯 권뿐 아니라 쉰 권 훨씬 넘게 바지런히 읽고 새기며 돌아보는 삶을 갈고닦았구나 하고 느꼈다. 아마 이 때문일 텐데, 나는 고등학생이던 때에는 글을 쓸 엄두를 내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비로소 글 한두 줄 끄적일 수 있었고, 신문배달을 하고, 군대에서 안 죽고 살아남아 사회로 돌아오고, 다시 신문배달을 하고, 출판사에서 일하고, 국어사전을 만들고, 이오덕 님 남은 글을 갈무리하고,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을 열고, 아이를 낳고, 시골에서 살고, 흙을 만지면서, 바야흐로 내가 걸어가는 길이 ‘글쓰기’라고 시나브로 느낀다.


  내 생각 한 마디를 읊을 수 있으려면 ‘참고도서’를 몇 권쯤 밝혀야 할까. 어떤 이는 책 뒤에 참고도서라며 이런저런 책을 줄줄이 붙이곤 하는데, 나로서는 ‘부록으로 붙인 참고도서 목록’이 너무 허술하거나 허접하거나 허여멀겋다고 느끼곤 한다. 고작 이만 한 책을 읽고 살폈으면서 참고도서랍시고 붙여도 될까.


  나는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국어사전 기획실 자료로 이천 권 남짓 되는 책과 사전을 장만해서 갖추었다. 이동안 나 혼자 읽으며 돌아볼 책과 자료를 따로 삼천 권 남짓 갖추었다.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하기까지 사전붙이 천 가지 남짓, 한국말 자료 이천 가지 남짓 갖추어 읽고 아로새겼다. 그러니까 이래저래 더하면 팔천 권에 이르는 사전과 책을 살피며 갖춘 셈인데, 국어사전 이름에 걸맞는 국어사전을 엮자면, 적어도 이만 권쯤 자료를 갖추어야 그럭저럭 들출 만한 국어사전이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기껏 팔천 권을 읽고 갖추었다 한들 마땅한 국어사전을 빚을 수 없다는 소리가 된다. 적어도 이만 가지 ‘국어학 책과 자료와 사전’을 들추고 갖추어야 ‘초등학생 국어사전’을 엮을 수 있다는 뜻이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책을 더 잘 알까? 아니라고 느낀다. 책을 많이 갖추었으니 글을 더 잘 쓸까? 아니라고 느낀다. 한 권을 읽더라도 옳고 바르며 알맞고 슬기롭게 아로새길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쓴 사람이 어떤 넋이요 꿈이고 사랑인가를 제대로 짚을 수 있어야 한다. 밑바탕이 되지 않고서야 백 권이나 천 권이나 만 권을 읽는들 무엇이 달라질까.


  나는 2004년부터 내 이름을 붙인 책을 내놓는다. 내가 내놓은 책에 고맙게 느낌글을 달아 주는 분들이 있다. 어떤 분은 별 열 만점에 열을 주기도 하고, 어떤 분은 예닐곱을 주기도 한다. 별을 얼마나 주든 하나도 대수롭지 않다. 대수로운 대목이란, 내 책을 읽은 분들이 ‘글을 쓴 내 넋과 꿈과 사랑’을 얼마나 제대로 살피고 삭히며 스스로 누리는가이다. 이렇게 돌아볼 때에, 2004년부터 2012년에 이르기까지 내 책을 읽고 느낌글을 쓴 분 가운데 참다이 삭힌 분은 아직 없다고 느낀다.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내가 글을 써서 책을 내놓았는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이렇게 못 헤아리기로는 내 책을 엮어 내놓은 출판사 일꾼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비유’도 ‘유추’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비유도 유추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내가 겪은 이야기, 내가 한 이야기, 내가 느낀 이야기, 내가 본 이야기만 글로 쓸 수 있다. 나는 속리산을 자전거를 타고 넘었기에 속리산을 자전거로 넘으며 느낀 이야기를 글로 쓴다. 속리산을 자전거로 넘었기에 지리산이나 금강산을 자전거로 넘을 때에 어떠할 만한가를 알 수 없다. 속리산과 지리산은 다르다. 속리산과 금강산은 다르고, 속리산이랑 서울 남산 또는 경주 남산하고도 다르다. 나는 바퀴 20인치 작은자전거로 평균속도 42킬리미터로 달린 적 있다. 충북 충주에서 서울까지 평균속도 32킬리미터로 네 시간 오십 분을 한 번도 안 쉬고 달린 적 있으며, 거꾸로 서울에서 충북 충주까지 아홉 시간 반을 두 번 쉬고 달린 적 있다. 서울에서 충북 충주까지 달리며 아홉 시간 반이 걸린 까닭은 자전거수레에 책을 육십 킬로그램쯤 싣고 등에 멘 가방에 이십오 킬로그램, 자전거 짐받이에 십이 킬로그램 책을 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겪은 일을 고스란히 책으로 쓴다. 또한, 아이들 기저귀를 언제나 손으로 빨래하며 살아가니, 이러한 이야기를 글로 쓴다. 내가 빨래한 기저귀가 몇 만 장인지 모르겠다. 내 손으로 만진 아이들 똥이 몇 톤에 이르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글을 썼다 해서 ‘다른 집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하는 이야기를 섣불리 짚거나 다룰 수 없다. 자전거수레에 짐을 잔뜩 싣고 달려 보았으니, 이를 바탕으로 ‘다른 유추나 비유’를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런데 내 글이나 내 책을 읽은 사람 가운데 ‘내가 안 한 일’과 ‘내가 안 겪은 일’과 ‘내가 안 느낀 일’과 ‘내가 안 생각한 일’일 뿐 아니라 ‘내가 글로 안 쓴 일’을 섣불리 비유와 유추를 들어 글로 새롭게 쓸 뿐 아니라, 아예 책으로까지 내놓는 사람이 있다.


  이분들은 글 한 줄을 쓰고자 책을 몇 권쯤 읽었을까. 글 한 줄 쓰는 꿈과 사랑과 믿음이란 무엇일까.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오른다. 나는 이오덕 님 남은 글을 갈무리하면서 당신이 쓴 글 모두를 ‘통독 스무 차례’ 넘게 했다. 꼭 세 해만에 이렇게 했다. 그런데 어느 대학교 교수로 있는 분이 이오덕 어린이문학을 비평하는 글을 쓰면서 딱 두 권만 읽고 비평글을 썼다. 그분을 만난 자리에서 어떻게 딱 두 권만 읽고 ‘한 사람 삶과 넋을 비평할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그분은 ‘바빠서’ 다른 책은 더 못 읽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두 권 읽었으니 그분이 쓸 비평글로 담을 이야기로는 넉넉히 알 만하다’고 했다.


  내가 쓴 글이나 책을 읽고 비평이든 서평이든 느낌글이든 무어든 해 주는 분들이 ‘리영희 님처럼 책을 읽고 글을 써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리영희 님은 가장 밑바탕이 될 만큼만 책을 읽으니까. 글 한 줄을 쓰려면 적어도 다섯 권 책을 읽어야지 네 권이나 한 권 읽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니까. 그렇지만, ‘고작 한 권밖에 안 되는 내 책’을 읽어 주는 분들은 왜 ‘고작 한 권에 깃든 이야기’조차 슬기롭고 해맑게 삭히지 못할까. 무엇이 그리도 ‘바빠서’ 글흐름과 글결과 글무늬를 맛나게 받아먹지 못할까.


  명예훼손이란 무엇인가. 내가 누구 이름을 더럽히는 짓이 명예훼손일까. 아니다. 명예훼손이란 바로 스스로 제 이름을 더럽히는 짓이다. 글을 쓰건 책을 내건, 이녁 스스로 참답고 착하며 아름답게 책읽기를 하지 못한 채 엉성하거나 서투르게 글을 쓰면, ‘그이가 내 이름을 더럽히’는 꼴이 아니라 ‘그이 스스로 그이 깜냥과 넋이 얼마나 얕은가를 드러내며 그이 이름을 더럽히’는 꼴이 된다.


  처음에는 참 얼토당토않구나 싶은 글을 써서 ‘내 책을 엉뚱하게 풀이한 사람과 이런 사람 책을 펴낸 출판사’를 고흥지방법원에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고 출판금지가처분소송을 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든 생각이란, 이들은 ‘최종규 내 이름을 더럽힌’ 꼴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 이름을 스스로 더럽힌’ 꼴이더라. 글 한 줄 옳게 읽지 못하고 책 한 권 바르게 삭히지 못한 사람은 당신 스스로를 바보로 망가뜨리는 셈이다. 곧, 내 이름은 하나도 더러워지지 않았다. 내 글을 잘못 읽고 엉뚱한 이야기를 글로 쓴 사람이 더러워진다. 내 책을 뚱딴지처럼 읽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책으로 낸 사람이 더러워진다.


  우스개 아닌 우스개라고 할까, 내가 쓴 《사진책과 함께 살기》라는 책에서 부산 자갈치시장 사람들을 사진으로 바지런히 담는 최민식 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나는 이 책 이 글에서 ‘최민식 님 사진이 썩 아름다운 길을 걷지 못한다’ 하는 느낌으로 슬그머니 나무라면서 아무쪼록 앞으로는 최민식 님 스스로 잘 알고 예쁘게 사랑하는 좋은 사진길로 거듭날 수 있기를 비는 마음을 적었다. 그런데 열이면 열, 아니 서른 사람 가운데 스물아홉 사람은 내가 최민식 님 사진을 아주 칭찬한다고 잘못 읽었다. 서른 가운데 한 사람쯤 왜 그와 같은 글을 썼는가를 잘 읽어 주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 글과 책을 엉터리로 받아들이거나 잘못 맞아들이는 모습을 슬프게 생각할 까닭이 없는지 모른다. 쉽게 써도 쉽게 읽지 못하는데 어떡하겠는가. 사람들이 스스로 이녁 이름을 밝히는 길을 걷지 못하고, 스스로 이녁 이름을 더럽히는 길을 걷겠다는데 어떡하겠는가.


  대통령선거가 또 닥치면서, 누가 누가를 헐뜯었느니 마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구나 싶은데, 아무개가 다른 한 사람을 헐뜯는 말을 했다면, 정작 ‘헐뜯긴’ 사람은 남을 해코지하려는 그이가 된다.


  내 이름을 살리는 사람도, 내 이름을 갉아먹는 사람도, 내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도, 내 이름을 망가뜨리는 사람도, 오직 나 한 사람뿐이다. (4345.9.1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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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다큐영화가 있는 줄 이제서야 깨닫는다.

하기는, 모르는 다큐영화가 얼마나 많겠는가.

 

파란여우 님이 쓴 <독과 도>에서,

내가 마치 '케빈 카터'라는 사진작가가

'도덕성이 나쁜 사람'인 듯 말했다고 적어 놓았는데,

이와 같은 글은 내 명예훼손이다.

 

나는 케빈 카터 이야기를 아직 '사진평론'으로

쓴 적이 없을 뿐더러,

내가 케빈 카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나 스스로 밝힌 적 아직 없는데,

함부로 속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과 도>라는 책에는

'최종규라는 사람은 케빈 카터 도덕성을 비난한다'는 투로 글을 썼고,

이렇게 찍힌 책이 팔린다.

 

부디, 파란여우 님을 비롯해,

케빈 카터 사진작가를 제대로 모르고 올바로 읽지 않은 이들은

이 영화 <뱅뱅클럽>을 보기 바란다.

부디 스스로 공부를 하고 나서 '말을 하기'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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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뱅클럽
스티븐 실버 감독, 라이언 필립 외 출연 / 에스와이코마드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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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9-12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책 <우리 마을 이야기>를 보면, 산리즈카 마을에 총과 몽둥이와 방패를 들고 쳐들어오는 전투경찰과 사복경찰 들은 농사꾼을 아주 가볍게 두들겨패다가는 거의 죽이기까지 하는 이야기가 흐른다. 남을 때리는 사람은 맞는 사람이 어떠한가를 살피지 않는다. 명예훼손이란 다 그렇다.

"명예훼손 글쓰기"라는 글을 [글쓰기 삶쓰기] 게시판에 올렸으니, 읽어 보시기 바란다.
 

묶음표 한자말 169 : 도촬(盜撮)


핸드폰 사진의 좋은 점은 문자를 보내는 척하면서 도촬盜撮이 가능하다는 것
《안수연-케이타이 도쿄》(대숲바람,2007) 15쪽

 


  “핸드폰(hand phone) 사진의 좋은 점(點)”은 “휴대전화 사진이 좋은 대목”으로 손볼 수 있는데, ‘휴대전화(携帶電話)’라는 낱말도 ‘손전화’로 손볼 수 있어요. ‘문자(文字)’는 ‘쪽글’로 손질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핸드폰’이나 ‘문자’ 같은 낱말은 아주 널리 쓰입니다. 이 낱말을 애써 손질하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분은 아주 적어요. “가능(可能)하다는 것”은 “할 수 있다는 것”이나 “할 수 있다는 대목”으로 다듬어 줍니다.


  ‘도촬(盜撮)’이라는 한자말은 국어사전에 안 실립니다. 그러나 이 낱말은 제법 쓰입니다. ‘도둑 촬영’을 줄인 한자말일 텐데, 도둑처럼 사진을 찍는다는 소리요, 도둑처럼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는, 찍히는 사람이 모르게 찍는다는 뜻이에요. 한 마디로 간추리면, 몰래 찍는다는 얘기입니다.

 

 도촬盜撮이 가능하다
→ 도둑찍기를 할 수 있다
→ 몰래찍기를 할 수 있다
→ 몰래 찍을 수 있다
→ 슬며시 찍을 수 있다
 …

 

  한자를 쓰는 나라에서는 ‘盜撮’ 같은 낱말을 빚습니다. 한글을 쓰는 나라에서는 어떤 낱말을 빚으면 좋을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몰래 찍는 일을 가리키는 ‘도촬’인 만큼 ‘몰래찍기’라는 새 낱말을 빚을 수 있습니다.


  ‘몰래찍기’라는 낱말을 생각한다면, ‘몰래-’를 앞가지로 삼아, ‘몰래놀기·몰래사랑·몰래하기·몰래선물·몰래편지’ 같은 여러 가지 낱말을 빚을 수 있어요. 삶에 따라 새 낱말이 태어나고, 삶을 누리는 모습에 따라 새 낱말을 빚습니다.


  그리고, “슬며시 찍다”라 풀거나 “슬그머니 찍다”라 풀어도 돼요. “살며시 찍다”나 “살그머니 찍다”라 풀어도 좋아요. “살짝 찍다”라든지 “슬쩍 찍다”라 해도 되고요. (4345.9.11.불.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손전화 사진이 좋은 대목은 쪽글을 보내는 척하면서 몰래 찍을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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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9-11 21:53   좋아요 0 | URL
손전화라고 쓰시는 분은 본적 있는데 '쪽글'은 지금 처음 봅니다. 좋으네요. 기억했다가 저도 그렇게 써야겠어요.
지금 막 보내주신 책 받았답니다. 고맙습니다. 잘 읽고 볼께요. 남편에게 사진 보여주며 얘가 사름벼리고 얘가 산들보라고...하면서 알려주었더니 다 공부하는 사진이라고 하네요? ㅋㅋ 그러고보니 이번 책에는 그렇더라고요.
색이름을 빛이름으로 아주 예쁘게 바꿔놓으셨더군요. 귤빛, 감빛...

파란놀 2012-09-12 01:35   좋아요 0 | URL
'쪽지'라는 낱말은... 알고 보면 말이 안 되거든요 ^^;;;
'쪽종이'가 맞는 말인데,
'문자' 보내는 일을 '쪽지' 보낸다고 하면... 참 거시기해요...

아마 '메시지'를 '쪽지'로 어설피 번역한 꼴일 텐데,
옳게 말하면 '짧은 글'인 '쪽글'로 적어야 맞구나 싶어요...
 

묶음표 한자말 172 : 상불원천上不怨天 하불우인下不尤人


군자君者는 상불원천上不怨天이요 하불우인下不尤人이라, 위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 사람(남)을 탓하지 않는다 했거늘
《이현주-사랑 아닌 것이 없다》(샨티,2012) 14쪽

 

 

  한자말 ‘원망(怨望)’은 “못마땅하게 여기어 탓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함”을 뜻합니다. 곧, 한국말로 하자면 “원망하지 않고”는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고”나 “미워하지 않고”인 셈이에요. 어떤 분들은 한자말 ‘원망’과 한국말 ‘미움’이 뜻이나 느낌이 다르다 이야기하지만, 두 낱말은 서로 다르지 않아요. 뜻이 같고 쓰임이 같아요. “원망의 눈초리”란 “미워하는 눈초리”요, “원망에 찬 얼굴”이란 “미움 가득한 얼굴”이며, “원망을 사다”는 “미움을 사다”예요.


  보기글에 나오는 ‘군자君子’는 “행실이 점잖고 어질며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곧 ‘어진이’로 옮길 만해요. ‘어진’ 사람이 모두 점잖거나 덕이나 학식이 높다 할 수 없다 말할 수 있을 텐데, 한국말 ‘어진이’ 뜻을 붙이면서, 어진 사람 또는 점잖고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을 가리킨다고 하면 돼요. 한국말 쓰임새와 너비를 한국사람 스스로 넓힐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상불원천上不怨天이요 하불우인下不尤人이라 (x)
 위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 사람(남)을 탓하지 않는다 (o)

 

  보기글을 살펴봅니다. 보기글을 쓴 분은 먼저 중국글을 씁니다. 중국글을 쓰되, 중국글 앞에 한글로 소리값을 붙입니다. 이를테면, “생큐 베리 머치thank you very much”처럼 글을 쓴 셈이에요.


  누군가는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겠지요. 그런데, “참 고맙습니다”라 말하지 않고 “생큐 베리 머치thank you very much”처럼 쓸 때에는 무엇이 더 좋거나 낫거나 빛날까요. “생큐 베리 머치”라고 한글로 적는다 해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더 잘 알 수 있지는 않아요. 이 영어가 흔한 영어라 중학생뿐 아니라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만하다 하지만, “데어 워즈 시그니피컨트 리지스턴스 투 더 아이디어 오브 컬러 포토그래피there was significant resistance to the idea of color photography”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한다면 얼마나 잘 알아들을 만할까요. 아니, 이렇게 글을 쓰거나 말을 할 까닭이 있을까요. 한국말로 말하지 않고 영어로 말하면서 소리값으로 한글을 덧다는 일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글쓰기가 될까요.


  곧, 보기글을 쓴 분은 ‘중국글을 쓰면서 한글 소리값을 덧다는 일’을 할 노릇이 아닙니다. ‘중국글을 한국글로 알맞게 옮겨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애쓸 노릇이에요. “상불원천이요 하불우인이라”처럼 적어도 뜻을 헤아리기 어려워요. “上不怨天 下不尤人”처럼 적어도 뜻을 헤아리기 어렵겠지요. 굳이 이런 중국글을 쓰지 말고 “위로 하늘을 미워하지 않고 아래로 사람(남)을 탓하지 않는다”라고만 적으면 돼요. 생각을 나누는 길을 슬기롭게 찾기를 빌어요. (4345.9.11.불.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어진이는 위로 하늘을 못마땅히 여기지 않고 아래로 사람(남)을 탓하지 않는다 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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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의 생일 - 치히로 아트북 5, 0세부터 100세까지 함께 읽는 그림책
이와사키 치히로 글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흰눈 기다리는 어린이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94] 이와사키 치히로, 《눈 오는 날의 생일》(프로메테우스출판사,2003)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그대로 있던 퍽 어릴 적, 나는 내가 태어난 날을 참 좋아했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은 ‘대설’이란 절기로, 한 해 스물네 절기 가운데 스물셋째입니다. 옛날 옛적 사람들은 한겨레 글 아닌 중국사람 글로 적었으니까 ‘大雪’이라는 한자를 빌어 적었을 텐데, 한국말로 쉽게 고치면 ‘큰눈’이에요. ‘큰눈’에 태어났다니 얼마나 사랑받은 삶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다만, 나 태어난 날에 눈이 소담스레 내린 일은 아주 드물어요. 날씨가 차츰 따뜻해지기 때문일 수 있는데, 도시에서는 눈을 구경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성탄절에 눈을 바랐다면, 나는 내가 태어난 날에 눈을 바랐어요. 그래야 비로소 내 생일답다고 여겼달까요.


  눈이 없는 나 태어난 날 으레 생각합니다. ‘쳇, 눈도 없으면서 큰눈 절기란 다 뭐람.’ 그러나, 스물네 절기란 도시사람을 헤아리는 때가 아니에요. 스물네 절기는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을 헤아리는 때예요. 동지도 하지도, 경칩도 우수도, 모두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 삶을 돌아보는 때입니다.


  더 생각하면, 설날이나 한가위도 도시사람이 쇠라는 때는 아니에요. 시골사람이 시골에서 흙과 마주하며 누리는 때예요.


.. 하룻밤만 더 자면 내 생일. 엄마 내가 태어난 날 눈이 왔다는 게 정말이야? 난 이제부터 다섯 살 촛불 다섯 개 한 번 만에 끌 테야 ..  (2쪽)


  개구리가 운다는 절기가 찾아오면 ‘어디에서 개구리가 울까?’ 하고 생각합니다. 어릴 적 내가 살아가는 도시 어디에서 개구리가 깨어날는지, 아니 개구리가 겨울잠을 잘 만한 데가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흙땅을 파헤치거나 까뒤집어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바꾸는 마당에, 도시에서 개구리가 깃들 만한 데가 있는지 아리송합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될 적에도, 달력에서 절기 이름을 보면, 오늘은 어떤 날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그러나, 집에서든 동네에서든 또 학교에서든 다른 어디에서든, 절기를 따지거나 살피는 어른이나 동무는 없습니다. 참말 도시에서는 절기는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살아가요. 날씨를 알리는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흔히 절기를 말하지만, 말만 할 뿐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곰곰이 살피면, 겨울잠 잘 흙땅도 사라졌지만, 풀숲도 못물도 사라졌어요. 논도 밭도 없는 도시이니, 개구리뿐 아니라 풀벌레도 살아갈 터가 없어요. 사람 말고는 다른 이웃 짐승이나 동무 벌레가 없어요. 사람 스스로 이웃을 없애고 동무를 버려요. 이와 같은 흐름에서는 절기라든지 날씨라든지 굳이 따지지 않아요. 사람들은 ‘매출’을 따져요. ‘돈을 얼마나 버느냐’를 따져요.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돈벌이’가 어느 만큼인가를 헤아릴 뿐인 도시예요. 삶이 어떠하고 사람이 어떠하며 사랑이 어떠한가 하는 대목은 헤아리지 않는 도시예요.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면서도 늘 이 대목이 꺼림칙합니다. 국민학교에서 월말고사를 치르고, 중·고등학교에서 중간고사·기말고사를 치를 적에 늘 절기를 떠올립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구름을 살피며, 해를 생각합니다. 집에서 학교로 오는 길에 본 나무들은 어떻게 밥을 얻어 무럭무럭 자랄 수 있을까 따집니다.


  시험을 치르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젖으니, 아마 다른 동무보다 시험점수는 덜 나왔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생각에 젖을밖에 없습니다. 바깥바람을 생각하고 싶어요. 내 살결은 바깥바람이 조금씩 달라지는 줄 느끼거든요. 햇살을 떠올리고 싶어요. 내 살결은 햇살이 조금씩 바뀌는 흐름을 느끼거든요.


.. 안녕, 여기 선물 편지도 들어 있어 ..  (6쪽)

 

 


  가을을 맞이한 시골마을 햇살이 다릅니다. 여름하고 사뭇 다릅니다. 곰곰이 더 따지면 이른여름과 한여름과 늦여름에도 햇살은 저마다 달랐어요. 찬찬히 더 헤아리면 늦여름에도 첫째 주와 둘째 주와 셋째 주와 넷째 주 햇살이 서로서로 달랐어요. 첫째 주에도 첫째 날·둘재 날·셋째 날…… 햇살은 언제나 달랐어요.


  어느 사람한테든 같은 날이란 없어요. 어느 날 문득 ‘참 그렇네.’ 하고 깨닫고서는 학교에서 시험을 치른다며 점수를 따지는 일이 얼마나 안 대수로운가를 느낍니다. 교사들은 시험문제를 머리 낑낑대며 만듭니다. 교사들이 만든 시험문제를 우리들이 풉니다. 교사들은 우리를 ‘한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고 ‘시험문제를 치러 얻은 점수’로 바라봅니다. 여느 때에는 ‘출석부 번호’로 우리를 바라보지만, 시험만 치르면 이내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집니다. 시험점수가 높을 때에는 ‘높은 점수’로 바라봅니다. 시험점수가 낮을 때에는 ‘낮은 점수’로 바라봅니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교사 일을 맡는 어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지 몰라요. 교사라는 자리는 오늘날 이 나라에서 ‘다 다른 아이들을 다 다른 눈썰미로 사랑하며 다 다른 꿈이 자라도록 다 다른 사랑을 따사롭게 나누는’ 자리답게 좋은 구실을 하지 못하거든요. 초·중·고등학교 모두 입시시험하고 얽힌 이야기만 나눠요. 한국말(국어)을 가르치는 자리에서든, 셈(수학)을 따지는 자리에서든, 삶(역사)을 돌아보는 자리에서든, 이웃나라(영어나 제2외국어)를 헤아리는 자리에서든, 착한 꿈(도덕)을 살피는 자리에서든, 학교에서는 그저 ‘시험에 나오는가 아닌가’와 ‘시험에 나왔을 때에 점수를 딸 만한가 아닌가’라는 쳇바퀴에서 맴돕니다.


.. 별님 별님 엄마한테는 내일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말했지만 정말은 딱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내일 생일날에 새하얀 눈을 꼬옥 내려주세요 내가 태어난 날처럼요 ..  (21쪽)


  글을 쓰는 까닭이라면 내 삶을 사랑하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무한테 글월을 띄우는 까닭이라면 내 삶을 아끼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태어난 겨울날 큰눈 절기를 좋아하던 까닭이라면,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온마음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즐겁기 때문입니다. 이 눈과 함께 지구별 목숨으로 태어나 풀과 꽃과 나무를 누리고,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랑 하루하루 예쁘게 살림을 빚는다는 이야기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 눈 오는 생일 아침, 빨간 모자랑 빨간 장갑을 엄마한테서 받았지요 ..  (24쪽)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책 《눈 오는 날의 생일》(프로메테우스출판사,2003)을 읽습니다. 다섯 살을 꽉 채운 아이는 싱그럽게 웃으며 놉니다. 동무 생일에 놀러가고, 내 생일에 동무를 부릅니다. 그런데 그만, 넋을 놓다가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가만가만 보면 아이들이니 흔히 저지를 만한 잘못이에요. 아이들로서는 잘못인 줄 모르는 채 잘못을 저질러요. 그냥 살아가는 나날이에요. 그저 마음껏 뛰고 걷고 날고 달리고 구르면서 씩씩하게 자라요.


  언제나 좋은 마음이 되어 이마에 땀을 송송 맺습니다. 늘 밝은 넋이 되어 등판에 땀이 줄줄 흐릅니다. 아이들은 뜀뛰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달리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구르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배가 한참 고플 때까지 놉니다. 잠에 곯아떨어질 때까지 놉니다. 기운껏 놀아요. 힘껏 살아요. 흰눈 기다리는 어린이는 하얀 마음입니다. 맑은 빗물 기다리는 어린이는 맑은 마음입니다. 고운 햇살 기다리는 어린이는 고운 마음입니다. 그리고, 어른도 언제나 어린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산들바람이 불며 가을날 풀벌레 노랫소리를 이곳저곳 곱다시 실어 나릅니다. 너른 들판을 따라, 시원스런 냇물을 따라, 푸른 멧자락 숲을 따라, 가을노래는 이 땅 곳곳으로 천천히 울려퍼집니다. (4345.9.11.불.ㅎㄲㅅㄱ)

 


― 눈 오는 날의 생일 (이와사키 치히로 글·그림,임은정 옮김,프로메테우스출판사 펴냄,2003.12.15./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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