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3
오제 아키라 지음, 이기진 옮김 / 길찾기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따뜻이 품는 가슴
 [만화책 즐겨읽기 175] 오제 아키라, 《우리 마을 이야기 (3)》

 


  다섯 살 두 살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적에, 아이들하고 손을 잡자면 내 손가락 하나면 넉넉합니다. 아이들은 손바닥을 쫙 펼쳐 내 손가락 하나를 잡고도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다섯 살 두 살 아이들을 재울 적에, 아이들한테 내 손가락 하나씩 주며 재우면 넉넉합니다. 아이들은 손바닥을 쫙 펼쳐 내 손가락 하나를 쥐면서 새근새근 달게 잠들 수 있습니다.


  나는 아이를 낳아 기르기 앞서까지 내 손가락 하나가 얼마나 거룩한가를 제대로 깨닫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내 둘레 어느 누구도 내가 아이를 낳아 스스로 어버이가 될 적에 스스로 얼마나 거룩한 사랑을 누리는가를 일깨우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몸은 알고 내 마음은 생각했으리라 느낍니다. 왜냐하면 오늘 나는 내 아이 둘하고 살아가지만, 나는 아이들 어버이이기 앞서, 내 어버이한테 아이였어요. 내 어버이는 나와 형 둘을 아이로 삼아 살아갔어요. 내 어버이는 당신 손가락 하나씩 내밀어 형과 내가 붙잡도록 하면서 두 아이, 다섯 살과 두 살 두 아이를 데리고 저잣거리도 다니고 마실도 다니며 하루하루 새롭고 아름다운 나날이라고 느끼도록 이끌었으리라 느껴요.


-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을은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젊은이들을 따뜻하게 품었다. 아픔을 서로 나누고 정으로 맺어졌다. (38∼39쪽)
- “정부가 우리를 대등하게 보지 않는 것에는 우리들에게도 책임이 있어. 농업 보호의 미명 하에 정권은 농민들을 꼭두각시로 삼아 왔다. 농민들도 그걸 받아들이고 오랜 시간 의지해 왔던 거지.” “윗대가리들이 지들 마음대로 우리를 죽이고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여. 여태 우리가 알아서 기었잖여.” “여기까지다! 권력자들의 그런 생각을 부숴 버리는 건 우리가 정권에 의지하는 모습을 버리고 자립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그건 어쩌면 공항을 저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몰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투쟁하는 농민이다!” (85∼86쪽)


  자는 아이가 기저귀에 오줌을 흥건하게 눕니다. 얼마나 흥건하게 누었는지, 바지와 웃도리까지 옴팡 젖습니다. 오줌빨래가 한꺼번에 석 장 나옵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갈아입힙니다. 옷을 갈아입힐 때에 아이가 깰 일이 없습니다. 큰아이에 이어 작은아이까지 보살피는 다섯 해 나날이란, 아이들이 잠들며 쉬를 누거나 똥을 눌 적에 잠에서 깨지 않도록 하면서 나긋나긋 기저귀와 옷을 가는 손길이 되도록 이끕니다.


  자다가도 곧잘 눈을 뜨고 부시시 일어납니다. 자며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구르는 아이들은 이불을 걷어찹니다. 배가 다 나옵니다. 웃옷을 내려 배를 가리고, 걷어차거나 깔고 누운 이불을 잘 여밉니다.


  아이들이라 뒹굴면서 잘까요. 아이들이 무럭무럭 크면서 뒹굴기를 그칠까요. 열다섯이나 스물다섯쯤 되면 더는 안 뒹굴면서 잘까요.


  나는 언제부터 뒹굴지 않고 잠들 수 있었을까 돌아봅니다. 언제부터 한 자리에 얌전하게 누워 이리도 저리도 구르지 않고 잠들었을까 헤아립니다. 어른이 되거나 어버이로 살아갈 때에는 얌전한 잠자리로 거듭나는지 궁금합니다. 보살필 아이나 돌볼 이웃이 있으면 스스로 씩씩해지거나 튼튼해지는지 궁금합니다.


  아직 다섯 살이랑 두 살 아이인 터라 이 아이들은 저희 옷가지를 저희가 손수 빨래하지는 못하리라 느낍니다. 앞으로 몇 살쯤 되면 아이들이 스스로 저희 옷가지를 곱게 건사하고 곱게 빨며 곱게 다룰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옷이나 밥이나 보금자리를 건사하는 날은 곧 찾아오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신나게 놀면서 무럭무럭 자라고, 모레는 재미나게 뒹굴며 차근차근 자라며, 글피는 실컷 뛰고 날면서 튼튼하게 자라겠지요.


- “난생 처음 기동대한테 맞았어. 정말 이상해. 그때, 두려움이나 아픔보다는 나, 어떤 생각에 몰두했다.” “생각?” “이 녀석들 진심으로 나를 벌레 잡아 죽이듯 하려는구나, 라고. 마을을 짓밟고 밭을 짓밟을 뿐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짓밟는 것이구나.” (40쪽)
- 그것은 갑작스럽고 일방적이었다. 방어가 목적인 듀랄루민 방패가 흉기로 둔갑했다. 기동대원의 장갑에는 손을 보호하기 위한 철판이 대어져 있어, 주먹으로 때리면 단 한 방에도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61쪽)
- “화가 난다면 싸우면 되잖아요. 밭을 망가뜨리거나 하지 말고 직접 당사자와 시시비비를 가려야죠. 우리는 우리의 논밭을 망가뜨리려는 사람들과 싸우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 우리가 논밭을 망가뜨리면 어쩌자는 거예요. 우리의 적은 조건파가 아니에요! 우리 농사꾼을 조건파와 반대파로 분열시킨 놈들이야말로 우리의 적이라구요!” “논밭을 망친 건 아니여. 수박을 몇 개 깬 것뿐이네.” “수박 농사가 얼마나 힘든 건지, 가네하라 씨도 잘 아시잖아요. 농사꾼이라면 그런 짓, 절대 못할 거라고, 믿은 건 저뿐인가요.” (207∼208쪽)


  아이들은 저마다 제 목숨을 타고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제 꿈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나도 내 목숨을 타고 태어났고, 나도 내 꿈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내 어버이도 당신 목숨을 타고 태어났으며, 내 어버이도 당신 꿈을 누리며 살아가요. 누구나 맑은 눈빛과 밝은 사랑을 품에 안고 태어나요. 누구나 고운 꿈과 환한 이야기 누리며 살아가요.


  그렇지만 그리 맑지 않은 삶을 누리는 사람이 퍽 많습니다. 썩 밝지 못한 눈빛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닥 곱지 않은 마음씨로 말을 섞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아무래도 환하지 못한 몸짓으로 하루를 맞이하는 사람이 여러모로 많습니다.


  무엇을 바라보기에 눈빛이 게슴츠레할까요. 무엇을 생각하기에 마음이 메마를까요. 무엇을 누리기에 삶이 고단할까요. 무엇을 꾀하기에 사랑이 피어나지 않을까요.


  스스로 사랑을 심을 때에 사랑이 태어납니다. 스스로 꿈을 심어야 꿈이 자랍니다. 스스로 믿음을 나누어야 믿음이 커집니다. 스스로 이야기를 빚어야 이야기가 퍼집니다.


  남이 해 줄 수 있는 사랑은 없습니다. 남이 이루어 주는 꿈은 없습니다. 남이 도맡아서 믿어 줄 수 없습니다. 남이 누리는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먹는 밥이듯 내가 심어 가꾸며 돌보는 사랑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해와 달과 별이듯 내가 손수 뿌려서 거두는 꿈입니다. 내가 두 다리로 걷는 길이듯 내가 즐겁게 마주하는 삶에서 착한 믿음이 샘솟습니다. 내가 아이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듯 나 스스로 내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좋은 이야기를 빚습니다.


- “지난 2년 동안 당신들은 이해를 구하기만 하고, 땅을 빼앗기고 쫓겨날 판국에 있는 농민을 이해하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어!” (66쪽)
- ‘우리 마을에 공항이 들어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6년 동안 늘 자상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대해 주었던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결국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선생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길 뿐이었다. 문제의 본질에서 애써 눈을 돌린 채, 그저 동정을 보낼 뿐이었다.’ (75쪽)
- ‘우리가 정말로 가르쳐 줬으면 했던 것, 정말로 배우고 싶었던 것,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 문제를 다뤄 주는 것을 끈질기게 피하기만 했던 그 학교에, 나는 그날, 작별을 고했다.’ (78쪽)


  대통령이 좋아야 나라살림이 좋아지지는 않아요. 내 보금자리가 좋아야 내 집과 내 마을과 내 나라가 좋아져요. 국회의원이나 군수나 법관이나 검사나 경찰이 좋아야 이 나라 삶터가 좋아지지는 않아요. 내 보금자리가 좋을 때에 내 아이들이 좋고, 내 이웃과 동무가 좋으며, 이 나라 삶터 어디나 좋을 수 있어요.


  고속도로가 놓인들 나라가 발돋움하지 않아요. 공항이 새로 생기거나 발전소가 여럿 늘어나기에 나라가 발돋움하지 않아요. 공장이 있어야 일자리가 늘지 않아요.


  사람들이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서 숲을 가꿀 때에 나라가 발돋움하는구나 싶어요. 사람들이 저마다 제 마을에서 숲을 누릴 때에 나라가 아름다워지는구나 싶어요. 사람들이 저마다 제 삶터에서 숲을 아낄 때에 나라가 빛나는구나 싶어요.


  고속도로는 누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길을 이어야 하는가요. 공항은 누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도록 도울까요. 발전소는 누가 어디에서 왜 쓰는 전기를 만드는가요. 공장은 누가 어디에서 왜 쓰는 물건을 만드는가요.


  아이들이 갖고 노는 놀잇감을 공장에서 플라스틱을 찍으며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다. 솔방울과 나뭇가지로 놀잇감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칠판을 붙이고 분필로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습니다. 돌멩이를 손에 쥐고 흙땅에 그림을 그리며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진기가 있어야 예술이 되지 않습니다. 촬영 장비를 갖추어야 다큐멘터리를 찍지 않습니다. 어떤 예술이든 가슴을 움직일 때에 예술입니다. 삶을 빛내고 사랑을 꽃피울 때에 바야흐로 문화요 교육이며 복지이고 경제에 정치가 됩니다. 사람들이 전화기를 서로 들고 주고받는 이야기란, 처음부터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주고받던 이야기예요. 종이 한 장에 찬찬히 글월을 적바림하며 이야기를 나눠요. 가을날 가랑잎을 가만히 손에 쥐며 홀가분히 떠올리며 나누던 이야기입니다.


- “아무리 많은 보상금을 지불한다 해도, 그 사람이 그 땅에서 만들어 온 인생 자체를 바꿔 버리는 일이니까. 조건파는 보상금으로 입을 막고, 반대파는 기동대를 보내 탄압하고, 우리가 계속 이런 오만한 수법으로 건설 계획을 진행시키다가는 언젠가 파탄이 나지 않을까.” (123쪽)
- “말뿐이잖아. 사과해 놓고 공항 만들 거면서.” “……. 공항은 어딘가에는 만들어야 합니다. 저희에게 변명의 여지가 있다면, 공항 건설은 일본의 발전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공항 만드는 거야 좋은 일이지. 자네가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하고. 그래서 첨에는 조금 신경이 쓰였어. 다짜고짜 반대를 외치는 게 말여. 그러니까 그게 내 생각만 하는 것 같아서.” “아버지!” “근디 생각해 보니 말여, 그러면 우리 농사꾼이 하는 일은 대체 뭔가, 싶더구먼. 자네는 ‘농사는 나라의 근간’이라는 그럴듯한 구절을 아는가? 아이들 교과서에 써 있다네. 난 이 구절을 알고서는 괜시리 뿌듯해지더란 말이여. 농지는 농사꾼의 것이되 농사꾼의 것이 아니여. 많은 사람들을 배고픔으로부터 지켜 주는 생명의 원천이여. 그야 나도 농작물을 팔아서 먹고살고는 있지만. 근디 공항은 엄청난 돈을 벌지 않는가?” “예.” “난 자네들 덕분에 농사꾼이란 것에 긍지를 갖게 됐어. 내 일이 공항에 뒤지지 않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네. 여기 공항을 만들어도 좋겠지. 그치만 산리즈카는 이미 충분히 국익에 기여한 땅이여.” (144∼146쪽)


  오제 아키라 님 만화책 《우리 마을 이야기》(길찾기,2012) 셋째 권을 읽습니다. 일본 산리즈카 마을사람은 뒤늦게 삶과 삶터를 깨닫습니다. 처음에는 ‘일본 여느 흙일꾼’처럼 ‘나라가 시키는 대로 살면 그만’인 듯 여기던 나날이었습니다. 나라가 ‘엉뚱한 정책’을 펼쳐 흙일꾼이 고향을 잃게 하는 일이란 없으리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란, 일본 흙일꾼한테 일본이라는 나라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젊거나 어린 사내를 모두 싸움터에서 총을 들고 이슬처럼 사라지게 하던 나라예요. 이웃나라를 동무나라로 여기지 않고 식민지로 삼게 해서 괴롭히도록 내몰던 나라예요. 먼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라를 다스리던 이’들은 으레 땅따먹기 싸움을 벌여 ‘착한 흙일꾼’한테 낫이나 쟁기 아닌 칼이나 방패를 휘두르게 했어요.


  곧, 예나 이제나 ‘나라를 다스리며 정책을 펼친다고 하는 이’들은 전쟁 미치광이라 할 만한 사람이에요. 오늘날에는 ‘경제를 살린다’는 이름을 내세워 시골 들판과 멧자락과 냇물을 뒤엎어 ‘돈벌이’에만 사람들 마음이 빼앗기도록 등을 떠밀어요. 더 많은 사람들한테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공항을 짓는다며 고향을 잃어야 하는 사람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더 많은 사람’이 아닌 ‘도시사람’한테 도움이 되고, 또 도시에서도 ‘돈과 이름과 힘을 가진 사람’한테 도움이 되는 ‘경제발전’이나 ‘나라발전’이지 않던가요. 공항을 지으려 하면 참말 도시 가까이 지을 노릇이요, 발전소를 지으려 해도 도시 곁에 지을 노릇 아니던가요. 도시사람이 도시 둘레에 공항이나 발전소나 공장을 짓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 “대학에 가라 요시코. 장남인 내가 보낸다.” “오빠.” “돈이 없다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땅을 팔고 떠나고 있어. 농사꾼을 그만두고.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땅을 돈으로 바꾸는 것도, 사수하는 것도, 자신들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 선택하는 길이야. 동생을 대학에 보내지도 못한다면, 꿈이나 생활을 희생해야만 한다면, 이 싸움에 의미는 없다! 차라리 땅을 팔아버리는 게 나아. 요시코, 대학에 가서 너의 꿈을 이뤄. 그런 것을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거니까!” (164∼165쪽)
- “뎃페이, 뭔 일 있냐?” “나, 나 잘 모르겠어. 그 할머니는 혼자 그 작은 오두막에서, 해님을 친구 삼아 살고 있는데. 그 할머니랑 비교하면 다들, 다들 엄청난 부자잖아!” (189쪽)


  따뜻이 품는 가슴일 때에 아이들은 어버이나 어른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습니다. 따뜻이 품는 가슴일 때에 이웃은 서로 사랑을 나눕니다. 따뜻이 품는 가슴일 때에 어깨동무가 되고 씨동무와 길동무와 삶동무가 됩니다.


  나라를 다스리건 지자체를 다스리건, 우두머리 자리에 있는 분들이 따뜻이 품는 가슴이 아니라 한다면, ‘나라사람’이나 ‘마을사람’ 가슴에 피멍이 드는 짓을 서슴지 않으며 저지르고 맙니다. 여느 공무원이건 크고작은 회사에서 일하는 월급쟁이 회사원이건, 누구나 따뜻이 품는 가슴일 때에 서로를 보듬고 나라와 마을과 살림집 모두 사랑으로 보살필 수 있습니다.


  따뜻이 품는 가슴이 아니기 때문에 경제성장율은 높아져도 사랑이나 믿음이나 꿈은 자꾸만 자취를 감춥니다. 따뜻이 품는 가슴이 아니기 때문에 학력이 높아진다지만 입시지옥이 이어질 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노예처럼 쳇바퀴질을 하는 사람만 늘어납니다. 따뜻이 품는 가슴일 때에, 시험성적을 놓고 동무들끼리 피가 튀기도록 다툼질을 할 수 없습니다. 따뜻이 품는 가슴일 때에, 시골마을 한복판에 송전탑을 세우거나 발전소를 짓겠다며 밀어붙일 수 없습니다. 따뜻이 품는 가슴일 때에, 국가보안법이란 벌써 사라졌을 테지요. 따뜻이 품는 가슴일 때에, 군대도 감옥도 경찰도 모두 사라지고, 젊은 넋 누구나 흙과 숲과 바다와 냇물을 아끼며 즐길 줄 아는 멋스러운 목숨을 환히 빛낼 테지요. (4345.9.13.나무.ㅎㄲㅅㄱ)

 


― 우리 마을 이야기 3 (오제 아키라 글·그림,이기진 옮김,길찾기 펴냄,2012.3.31./8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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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버릇과 삶버릇
[말사랑·글꽃·삶빛 27] ‘물방울’과 ‘땡땡이’

 


  시는 문학입니다. 수필도 소설도 문학입니다. 시나 수필이나 소설, 또 희곡 모두 ‘말’로 빚는 문학이요, ‘말’로 이루는 예술이며, ‘말’로 드러내는 삶이에요. 그래서 어느 갈래 어느 문학이라 하더라도 말을 어느 만큼 슬기롭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빛깔이 달라져요. 말을 어느 만큼 아름답게 보살피느냐에 따라 무늬가 달라져요.


  시와 수필을 쓰는 신달자 님이 쓴 시집 《열애》(민음사,2007)를 읽다가, 58쪽에서 “아파트 일 층인 내 방 창에는 / 녹음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 사월부터 연둣빛 땡땡이 무늬가 어른거리더니 / 서너 달 지나며 창은 짙푸린 비단으로 출렁거렸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시와 수필을 쓰는 신달자 님은 ‘땡땡이 무늬’라는 말투를 시에 고스란히 담습니다. 신달자 님은 1943년에 경상남도 거창에서 태어나셨는데, 한창 일제강점기로 한겨레 누구나 한국말 아닌 일본말을 쓰고 일본 문화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국민’이 되는 학교교육을 받던 무렵이에요. 신달자 님을 둘러싼 어른들은 모두 일본말을 쓰셨겠지요. 해방이 되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일본 말투와 말버릇을 털지 못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런 말투와 말버릇은 곳곳에 그대로 남았어요. ‘땡땡(点点, てんてん)’은 숱한 일본 말투와 말버릇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국말로 하자면 ‘방울방울’이에요. 물방울이든 이슬방울이든 ‘방울’입니다. 방울을 무늬처럼 수없이 그리기에 ‘방울방울’ 모양이고, 일본사람은 이 모습을 바라보며 ‘점과 점이 수없이 모였다’ 해서 ‘点点’이라는 한자로 적으면서 ‘てんてん’이라고 읽어요. 이 소리값이 ‘텐텐’, ‘땡땡’이 되고 한국사람은 뒤에 ‘-이’를 붙여 ‘땡땡이’라고 써요.


  1944년에 태어난 내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로 마흔 해를 일하시고는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셨어요. 내 아버지 사는 충청북도 음성으로 아이들과 마실을 가서 내 아버지가 모는 자동차를 얻어 탈 때면, 어디에 차를 대거나 좁은 길을 빠져나올 때,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오라이’라고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는 자동차에 기름을 넣을 때에도 ‘만땅’이나 ‘이빠이’라고 말합니다. 내 아버지조차 이런 일본 말투와 말버릇을 쓰니 잘못이라거나 슬프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시를 쓰는 신달자 님이든 내 아버지이든, 오늘날 할머니와 할아버지 또래를 이루는 분들은 어둡고 고단한 나날을 보내면서 ‘얄궂은 말버릇’이 너무 짙게 몸과 입과 머리와 혀와 마음에 아로새겨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예요. 당신 스스로 ‘아이들 앞에서 이러한 일본 말투를 함부로 쓰면 안 되는 줄 알’아도 입으로는 어느새 술술 이러한 말투가 흘러나와요.


  내 아버지도 ‘오라이’나 ‘이빠이’ 같은 일본 말투뿐 아니라 ‘땡땡이’라는 일본 말투를 쓰시겠지요. 그렇지만 나와 내 옆지기는 이러한 일본 말투를 안 씁니다. 나는 한국 말투를 쓰고 싶어요. 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아끼고 싶어요. 우리 집 두 아이한테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쓰는 어버이로서, 아이들이 언제나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예쁘게 들으면서 삶을 곱게 빛낼 수 있기를 빌어요. 좋은 말버릇으로 좋은 삶버릇을 익힌다면 참으로 아름답겠지요. 맑은 말버릇으로 맑은 삶버릇을 들인다면 더없이 어여쁘겠지요.


  사월부터 연둣빛으로 빛나며 어른거리는 무늬라면 ‘방울방울’이요 ‘동글동글’입니다. ‘물방울’이며 ‘둥글둥글’이에요. 때로는 ‘탱글탱글’이나 ‘통통’ 같은 느낌말로 나타내 볼 만하겠지요. ‘탱글탱글 고욤알 같은 무늬’라든지 ‘통통 튀는 물방울 같은 무늬’처럼 말할 수 있어요. (4345.9.1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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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2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12 1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전거쪽지 2012.8.31.
 : 자전거 손질하러 읍내마실

 


- 시골마을에서 자전거를 손질하기는 몹시 힘들다. 좀 깊이 들어간 시골자락이라면 더 힘들다. 스스로 손질하고 돌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내 자전거를 손질하러 읍내 자전거집으로 가 보기로 한다. 갈아야 할 부속이 있고, 두 아이를 태우고 읍내까지 15킬로미터 길을 달려 버릇해야, 고흥 이곳저곳 신나게 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한여름도 늦여름도 모두 저무는 가을 어귀이기에 날이 좋다. 바람도 살랑살랑 분다. 이런 날은 삼십 킬로미터쯤 달려도 괜찮겠지. 물과 먹을거리를 챙긴다. 수레는 여러 가지 챙길 자리가 넉넉해 좋다. 다만, 아이 둘과 수레와 짐을 기운차게 끌 수 있다면야 좋다.

 

- 첫 고개 비봉산 기슭을 오른다. 아이 둘 태우고 몇 차례 넘어서 그런지 오늘은 가뿐하다. 가뿐하네, 하고 생각하면서, 나이와 자전거는 그리 대단한 일 아니라고 느낀다. 스스로 즐길 줄 아느냐가 대단한 일이 되리라.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추스르면 된다. 마음을 좋게 돌보고 몸을 사랑스레 보살피면 된다.

 

- 봉서마을과 봉동마을, 또 고당마을을 지나며 비로소 내리막이 된다. 뒷거울을 보니 작은아이가 어느새 잠들었다. 집에서 개구지게 놀더니 기운이 다한 듯하다. 너는 아버지가 고갯길을 영차영차 오르는 줄 아느냐 모르느냐.

 

- 포두면을 달린다. 내리막이 좋다. 포두면 소재지를 지나면 바야흐로 오르막이 천천히 펼쳐진다. 여기부터 읍내까지 오륙 킬로미터 비스듬히 오르막이다가는 포두면에서 고흥읍으로 바뀌는 고갯마루 언저리에서는 꽤 가파른 오르막이 된다. 잠든 작은아이가 안 깨기를 바라며 씩씩하게 장수마을 지나 호형마을 넘어가는 고갯마루를 달리는데 가쁜 숨이 턱에 닿는다. 그냥 더 달리느냐 쉬느냐 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살짝 쉬기로 한다. 나는 안 쉬고 고갯마루를 넘을 수 있지만, 수레에 탄 아이는 햇볕을 고스란히 쬐며 고갯길을 천천히 지나야 한다. 목이 타리라. 마침 작은아이도 잠에서 깬다. 두 아이한테 물을 먹이고 주전부리를 조금 준다. 나는 숨을 고르려고 물을 마시지 않는다.

 

- 고갯마루를 넘으니 살 만하다. 오르막을 지나며 다리가 굳는다면 내리막을 달리며 다리가 풀린다. 고갯길은 고개라서 천천히 달린다. 내리막은 내리막이니 시원스레 싱싱 달린다. 올라가기란 얼마나 오래 걸리며 힘든가. 내려가기란 얼마나 빠르며 수월한가. 멧자락 타는 사람은, 또 무언가 목표를 세우며 달리는 사람은, 왜 더 빨리 더 높이 오르려 할까. 더 빨리 내려오고 싶어서 그렇게 높이 올라가려고 할까. 얼마를 올라갈 수 있든 스스로 즐겁지 않다면,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하나도 안 반가우리라 느낀다.

 

- ‘박지성공설운동장’ 알림판을 본다. 이제 읍내에 거의 다 왔다. 축구선수 박지성이 고흥사람이라며 공설운동장 이름에 ‘박지성’을 넣는다. 고흥에는 김일체육관도 있고, 천경자미술관도 있다. 다만, 이런저런 이름을 붙이기는 하되 얼마나 문화와 예술과 삶을 곱게 맺거나 잇는지는 잘 모르겠다. 고흥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와 푸름이와 어린이가 고흥에 뿌리내리면서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마련하는 정책이나 모습은 거의 안 보인다. 모두들 서울에 있는 대학교나 회사나 공장으로 가려 한다. 시골 고흥에 남아 시골살이를 누리며 시골마을을 알차며 튼튼히 일구려는 젊은 빛은 잘 안 보인다.

 

- 자전거집에 닿는다. 자전거를 손질한다. 오래된 손잡이를 간다. 하도 오래되어 고무가 다 녹던 옛 손잡이를 뗀다. 여덟 해째 내 손과 하나되어 숱한 길을 달린 손잡이여, 이제 고이 쉬려무나.

 

- 읍내 과일집에 들른다. 몇 가지 먹을거리를 장만한다. 슬슬 집으로 돌아간다. 아까 내리막이던 길은 오르막이 된다. 오르막이던 길은 내리막이 된다. 길가에 잠자리와 나비 주검이 매우 많다. 자동차를 모는 이들이여, 잠자리와 나비가 당신 찻머리와 유리창에 부딪혀 얼마나 많이 숨을 거두는 줄 아는가. 당신 차바퀴에 사마귀와 메뚜기와 방아깨비와 개구리와 뱀이 얼마나 많이 밟혀 숨을 거두는 줄 아는가. 작은 짐승과 벌레들 주검을 내 자전거까지 밟지 않으려고 비껴 달리느라 애먹는다.

 

- 포두면 길두리 끝자락에 선 ‘POSCO 패밀리수련원’ 안내팻말을 본다. 아주아주 자그맣게 세운 안내팻말은 뭘까 궁금하다. 안내팻말 구실을 하자면 커다랗게 세워야 하지 않나. 거의 안 보이도록 작게, 또 자잘한 글씨로 세운 안내팻말은 무얼까. 포스코 회사는 포항사람이 반대해서 포항에 지으려 하던 화력발전소를 전남 고흥과 해남에 나누어 지으려는 정책을 꾀하는데, 이 ‘포스코 패밀리수련원’과 화력발전소 정책은 서로 어떻게 이어졌을까. 도시사람은 도시에서 쓸 전기를 도시에 발전소를 세워서 써야지, 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해맑은 시골마을 한복판에 화력발전소를 세우고 송전탑을 끝없이 박으려 할까. 포항은 발전소 공해가 없어야 하고, 고흥이랑 해남은 발전소 공해가 있어도 되나. 해맑은 시골마을 한복판에 화력발전소와 송전탑이 서면, 이제 도시사람은 김도 바지락도 꼬막도 조개도 해삼도 멍게도 전어도 복어도 갑오징어도 장어도, 또 유자도 석류도 서숙도 유기농곡식도 더는 먹을 수 없는 줄 모르는가. 시골마을 물과 바람과 흙이 더러워지면, 도시사람 먹을 모든 것이 더러워지는 줄 모르는가.

 

- 작은아이는 다시 잠든다. 큰아이도 아주 졸린 눈치이지만 졸음을 꾹 참는다. 집에 닿는다. 두 아이 태운 자전거는 삼십 킬로미터 길을 두 시간 동안 달렸다. 잘 달렸다. 집부터 발포 바닷가까지는 칠 킬로미터이니까, 아이들 데리고 바다로 마실 다녀오는 길은 한결 수월할 수 있겠지. 아이들아, 다음에는 바다로 데려가 줄게. 오늘처럼 읍내 다녀오는 길은 괜히 자동차하고 많이 부대껴야 해서 썩 재미나지 않았을는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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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2.9.11.
 : 가을바람 가을내음

 


- 면소재지 우체국으로 간다. 바다 건너 저 멀리 호주로 책을 부치려고 간다. 우표값이 만오천칠백 원인가 나온다. 참 값싸다고 느낀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는데 딱 만오천 얼마밖에 안 나오니까. 아이들을 자전거수레에 태우려는데, 큰아이가 저기 나비 있다고 말한다.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데 저기라고만 말한다. 가만히 보니, 자전거 옆 길바닥에서 팔랑거리기만 할 뿐 날아가지 못한다. 틀림없다. 우체국에 들른 어느 자동차한테 받혀 다친 나비이다. 사람들은 나비이든 잠자리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자동차를 달린다. 우체국 앞에 자동차를 멈출 때에도 나비가 받치거나 말거나 살피지 않았겠지. 겉보기로는 성하지만 몸속으로는 망가졌으리라. 슬픈 나비를 살며시 쥔다. 나비가 팔딱거리지도 못한다. 아이들한테 자 나비 보렴 하고 말한 뒤, 부디 기운내어 다시 훨훨 날 수 있기를 빌어, 하고 마음속으로 노래한 뒤 풀숲에 예쁘게 내려놓는다. 나비는 풀숲에서 날개를 쫙 펼치고는 비로소 한숨 돌렸다는 몸짓으로 쉰다.

 

- 우체국 볼일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볕과 바람 좋은 가을날, 좋은 내음과 바람을 쐬면서 아이들하고 들길과 멧길을 달리고 싶다. 집에서 미리 길그림을 살피고 나왔는데, 오늘은 이웃 청룡마을과 미후마을을 한 바퀴 돌고 돌아갈까 싶다.

 

- 면소재지 보건소 옆 오르막을 탄다. 길가에 석류나무 줄줄이 자란다. 누가 심어 기르는 나무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누가 길가 공유지에 석류나무를 심었을는지 모르지. 이 길가 나무들이 우람하게 자라 그늘을 드리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르막을 천천히 천천히 오른다. 노래를 부른다. 처음에는 오르막을 오를 적에 숨이 가쁘기만 했는데, 이제는 나긋나긋 노래를 부를 만하다.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 할까? 뭐, 그래도 좋다. 수레에 탄 두 아이가 아버지 노래를 들으며 멧길을 천천히 오르며 즐겁다는데, 누가 무어라 한들 대수로우랴.

 

- 땀이 송송 돋을 즈음 오르막이 끝나는구나 싶더니 또 오르막이 나온다. 왼편으로 멧기슭에서 풀을 뜯는 까만염소와 소가 보인다. 오, 이곳에서는 짐승을 들에 풀어놓고 기르네. 그러고 보니, 소우리와 염소우리가 꽤 있어도 소똥이나 염소똥 냄새가 거의 안 나는구나. 큰아이가 염소와 소를 보더니 둘레에 있는 커다란 우리를 가리켜, “저기 소집 있네.” 하고 말한다. 맞아, ‘우리’이기 앞서 ‘집’이야.

 

- 이제 슬슬 봉서마을로 빠지는 길이 보여야 하는데 마땅한 길이 안 보인다. 어쩌면 마을을 가로질러서 고개 하나 넘어야 하는지 모른다. 모른다. 그래, 모르니 그냥 달리자. 멀리 돌아가도 다음에 잘 달리면 되지. 다음에 다시 길을 익히면 되잖아. 자전거를 천천히 밟으며 한손을 죽 뻗는다. 바람아, 바람아, 가을바람아, 내 오른팔에 와닿으며 노래를 불러 주렴. 이제 왼팔을 뻗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쥔다. 바람아, 바람아, 들바람 가을바람아, 내 왼팔에 와닿으며 고운 내음을 풍겨 주렴. 큰아이는 수레에 앉은 채 아버지를 따라한다. 미후마을과 장촌마을을 지나고 보니 마복산 가는 길로 접어들고 만다. 오늘 꽤나 애먹을 고개를 넘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고단하지는 않다. 즐겁게 넘어 주지, 뭐. 자전거를 세운다. 저기 팔영산부터 부는 가을 들바람이 우리한테 와닿는다. 무르익는 벼마다 벼내음이 왈칵 풍긴다. 구수하게 익는 벼내음이란! 바로 가을내음이구나! 바야흐로 좋은 가을노래로구나!

 

- 자전거를 세우고 노래를 부르며 두 팔을 죽 뻗은 채 가을바람 들내음을 맡는데, 뒤에서 군내버스 한 대 휭 하고 지나간다. 군내버스 일꾼이랑 손님들은 우리 세 식구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려나. 관광객으로 여겼을까? 따지고 보면 관광객이기도 하다. 마을사람이면서 관광객이다. 우리 아이들은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에 가기보다, 이렇게 아버지나 어머니하고 들길이나 멧길을 거닐거나 달리면서 가을을 한껏 들이마시도록 할 때에 훨씬 좋다. 아이도 좋고 어버이도 좋다. 좋은 시골에서 살아가니까 좋은 시골바람을 쐰다. 맑은 시골에서 살아가기에 맑은 시골햇살을 쬔다. 고운 시골에서 살아가는 만큼 고운 시골길을 실컷 누린다.

 

- 세동마을 오르막을 달린다. 처음 이 오르막을 달리던 때에는 허벅지가 터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이 둘 태우고 노래까지 부르면서 오르막을 한갓지게 오른다. 뭐랄까, 오르막을 허둥지둥 빨리 오르려는 생각을 버린 뒤부터, 어느 오르막이든 그리 힘들지 않다. 기울기가 10도가 되는 오르막조차 땀을 줄줄 빼면서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더러 “아버지 힘내셔요, 하고 말해 주렴.” 하고 읊는다.

 

- 작은아이는 가을햇살 받으면서 잔다. 큰아이도 어느새 잠든다.작은아이는 오른쪽으로 머리를 기대로 큰아이는 왼쪽으로 머리를 기댄다. 예쁜 아이들이 예쁜 마을을 예쁜 바람과 햇살 누리면서 달린 끝에 사르르 잠든다. 나도 졸립다. 차근차근 마지막 마복산 오르막을 오른다. 고당마을부터는 내리막이 된다. 봉동마을과 봉서마을을 지나 우리 동백마을로 접어들 때에는 다시금 오르막이 되지만, 다리힘은 수월하다. 집에 닿아 후박나무 그늘에 아이들을 한동안 둔다. 우리 다음에도 또 이웃마을 달리기를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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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고흥 시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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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는 책

 


  ‘책을 말하는 책’이 요즈음처럼 유행이 되어 자주 나오는 적은 없었다. 사람들 누구나 책을 손쉽게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글도 즐겁게 쓸 수 있으니까 ‘책을 말하는 책’이 유행처럼 나올까? 그러나 그렇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책을 말하는 책’이 유행처럼 나오는 까닭은 오직 하나이다. 요즈음 이러한 책은 ‘돈벌이가 될 만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책을 말하는 책’을 바지런히 그러모으며 읽었다. 이제는 거의 들여다보지 않고 사지도 않는다. 예전에는 그야말로 ‘책을 말하는 책’이 매우 드물었다. ‘책읽기’나 ‘글쓰기’를 말하는 책마저 아주 드물었다. 그렇지만 요즈음은 책읽기나 글쓰기를 말하는 책 또한 아주 봇물처럼 쏟아진다. 왜? 돈벌이가 될 만하니까.


  초등학생과 중학생과 고등학생한테는 대학입시를 앞둔 논술시험 교재로 쓰이도록 이 같은 세 갈래 책이 쏟아진다. 대학생한테는 취업을 앞둔 면접 교재로 쓰이도록 이 같은 세 갈래 책이 쏟아진다. 여느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사람들한테는 교양을 북돋운다든지 상식을 늘린다든지 가벼운 읽을거리가 되어 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골에서 흙 만지며 살아가는 사람이 읽을 만한 ‘책을 말하는 책’은 없다.


  그런데 말야, 참 알쏭달쏭한 일이란, 《테스》를 스스로 읽어야 《테스》를 알지, ‘《테스》를 읽은 느낌을 다룬 글이 모인 책’을 읽는들 《테스》를 느끼거나 알 수 있을까. 스스로 《테스》를 읽지 않고 ‘《테스》를 읽은 느낌을 다룬 글이 모인 책’을 읽을 때에 《테스》를 알게끔 아주 빼어나거나 훌륭하게 쓴 ‘책느낌글’은 있을까. 있다면 몇이나 있을까. 이와 같은 글이 있다면 이 글은 책느낌글이 아니라 오롯이 문학이다. 새로 태어난 문학이다.


  요즈음 유행처럼 나오는 ‘책을 말하는 책’은 하나같이 ‘자기계발’ 갈래에 들 만하다고 느낀다. 참말 도시사람 누구한테나 ‘자기계발 잘 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말하는 책’이기 일쑤이다. ‘책을 말하는 책’에서 다루는 책은 이 책이나 저 책이나 엇비슷하다. 평론가가 다루는 책이 이 평론가이든 저 평론가이든 하나같이 엇비슷하듯, ‘책을 말하는 책’을 쓴다는 사람 또한 ‘스스로 이녁 삶을 새롭게 일구는 사랑스러운 책’을 읽으며 ‘책을 말하는 책’을 쓰지는 못하기 일쑤이다.


  밥을 말하는 책을 쓴다고 생각해 보라. 꽃을 말하는 책을 쓴다고 생각해 보라. 어떤 책을 쓰겠는가? 내가 맛있게 차려서 먹는 밥 이야기를 쓰겠는가? 남들이 보기에 멋스럽거나 예뻐 보이는 밥 이야기를 쓰려는가? 내가 좋아하는 꽃 이야기를 쓰려는가? 남들이 예쁘다고 할 만한 꽃 이야기를 쓰려는가? (4345.9.1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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