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진은 ‘찰칵(스냅)’입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119] 김태한, 《김태한 사진집》(열화당,1993)

 


  모든 사진은 ‘찰칵(스냅)’입니다. ‘스냅사진(snap寫眞)’ 말풀이를 찾아보면 “변화하는 장면을 인위적으로 연출하지 않고 재빨리 촬영하여 기록한 사진”이라고 하는데, 이 말풀이를 따르든 안 따르든 어떠한 사진이든 ‘찰칵(스냅)’이 아닐 수는 없습니다.


  어느 사진은 ‘찰칵(스냅)’이 아니기도 하다고 여긴다면, 왜 어느 사진은 ‘찰칵(스냅)’이 아닌가를 가만히 따져 보셔요.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 왜 모든 사진이 ‘찰칵(스냅)’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헤아려 보셔요.


  먼저, 말풀이대로 생각합니다. ‘달라지는 모습을 따로 꾸미지 않고’ 찍는 사진이 스냅사진이라 하는데, 어떤 모습을 연출한다(꾸민다) 하더라도 사진으로 찍으려 하는 사람은 ‘연출한 모습 가운데 어느 한 가지’입니다. 곧, 스스로 찍으려 하는 모습에서 벗어나도록 연출할(꾸밀) 수는 없어요. 스스로 연출한 모습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이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재빨리 찍’습니다. 다만, 누군가는 ‘재빨리 찍’는 겨를이 1초일 수 있고 1시간일 수 있어요. 하루나 이틀이 걸릴 수도 있겠지요. 열 해나 서른 해를 기다려 사진 한 장 얻는 이가 바라보기에는 1시간을 기다리든 하루를 기다리든 ‘아주 짧은 겨를’입니다. 곧, 어떻게 찍든 모든 사진은 ‘재빨리’ 찍는 사진이요, ‘내가 찍고 싶은 모습에서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찍는’ 사진이 돼요.


  다음으로, 말풀이에서 홀가분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진이든 ‘있는 그대로’를 찍습니다. ‘없는 모습을 만들어’ 찍을 수 없어요. 내가 어떤 모습을 ‘따로 꾸민다(만든다/연출한다)고 할 때’조차, ‘꾸며진 모습 그대로’를 찍지, ‘꾸며진 모습에서 더 달라지는 모습’을 찍지는 않아요. 모델 ㄱ을 이곳에 놓고 모델 ㄴ은 저곳에 놓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놓은 모습 그대로’를 찍어요.


  곧, 어느 사진이든 그예 ‘사진’입니다. 패션사진을 찍든 다큐사진을 찍든, 모든 사진은 사진이에요. 패션사진은 다큐사진이 되기도 하고, 다큐사진이 거꾸로 패션사진이 되기도 해요.


  바라보는 눈에 따라 달라지거나 나누는 사진이 아닙니다. ‘쓰는 자리’에 따라, 이 사진은 패션사진으로 쓰고 저 사진은 다큐사진으로 쓸 뿐입니다. 이렇게 찍기에 패션사진이 아니고, 저렇게 찍어야 다큐사진이 아니에요. 어떻게 찍든 모두 ‘사진’이에요. 이렇게 찍거나 저렇게 찍거나, 어떻게든 찍은 사진을 쓰는 사람이 어느 자리에 쓰는가에 따라 ‘패션사진’이나 ‘다큐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을 뿐입니다.


  이리하여, ‘추상사진’과 ‘구상사진’도 따로 없습니다. 스스로 찍는 사진이 추상사진이라고 말한달지라도 ‘추상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사진을 찍는 사람 눈에 구상으로 드러난 모습’이요 ‘사진을 읽는 사람 마음에 구상으로 그려지는 모습’이에요.


  추상을 찍어 추상이 아니고, 구상을 찍어 구상이 아니에요. 구상사진이 가장 추상사진다울 수 있으며, 추상사진이 가장 구상사진다울 수 있어요. 왜냐하면, 모두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김태한 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듯 내놓은 《김태한 사진집》(열화당,1993)을 읽습니다. 김태한 님은 처음 사진을 배우고 찍고 가르치고 나누려 할 때에 무척 힘들었다고 해요. 사진책 머리말에 “사진인은 방황했다.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할는지를 몰라 우왕좌왕했다. 평론가도 없었다. 선배도 수를 헤아릴 정도다. 그때 사진을 하는 사람은 한국사단이 선구자라 할 만하다. 처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은 평가받을 때가 없었다. 그래서 길은 하나였다. 그것은 해외국제사진전에 출품하여 평가를 받는 방법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어떠할까 생각해 보셔요. 오늘날 여느 어버이를 생각해 보셔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아이키우기’를 가르치는 적이 없어요. 어느 교사도 학생한테 ‘너희가 말야, 아이를 낳아서 키울 때에는 이렇게 슬기로운 길을 걸으며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아름답단다’ 하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교과서로도 없고 시험문제에도 안 나와요. 그런데, 모든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고 대학교를 마치며 회사원이 되거나 말거나 월급쟁이가 되든 가게를 차리든, 이러고서 짝꿍을 만나 아이를 낳잖아요. 사랑놀이 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나 어버이조차 없어요. 아이들은 그저 저희끼리 알음알이로 사랑놀이를 즐기다가는 아이를 낳아요. 그러고는 처음으로 ‘아이키우기’를 맞딱뜨려요. 이제는 인터넷으로 뒤질 수 있고 책을 찾아 읽을 수 있다지만, 인터넷 자료와 책이 있다 하더라도, ‘처음으로 맞딱뜨리는 아이키우기 앞에서 헤매거나 길을 잃는’ 어른들이 참 많아요. 그렇지만 다들 이래저래 용을 쓰기도 하고 애를 쓰기도 하면서 아이를 돌보고 사랑해요. 지식은 없어도 마음이 있고, 정보가 없어도 사랑이 있거든요.


  사진을 찍는 사람도 이와 같구나 싶어요. 지식으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마음으로 찍는 사진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든, 내가 꿈꾸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든, 내 마음이 움직일 때에 찍어요. 아무 때나 수도 없이 단추를 누르지 못해요.


  사진을 차츰 찍으면서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서 스스로 무언가 깨달아요. 아하, 사진을 찍을 때에는 내 마음이 움직여야 할 뿐 아니라, 나 스스로 사진을 좋아하고 즐길 뿐 아니라, 사진기로 바라보는 모습을 모두 사랑할 수 있어야 하네, 하고 깨달아요.


  김태한 님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진은 스냅 사진이다. 그래서 스냅 사진을 기피하였다. 이쯤 되고 보니 자기 자신의 나아갈 방향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사진만 보면 이것은 누구 사진이라는 것을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사진 경향은 추상적인 사진으로 정했다.” 하고 말합니다.

 


  열 아이를 낳을 때에 한 아이는 싫어할 수 있을까 궁금해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 모든 손가락은 저마다 사랑스럽습니다. 내 아이 모두 사랑스럽고, 이웃 아이 모두 사랑스럽습니다. 내가 아는 아이들이든 내가 모르는 아이들이든 모두 사랑스러울밖에 없어요. 곧, 김태한 님이 스냅사진을 싫어한다고 대놓고 말한다 하더라도 ‘정작 싫어할’ 수는 없어요. 모든 사진이 ‘찰칵(스냅)’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이렇게 밝히며 ‘추상사진’을 찍는다 하더라도, ‘찰칵(스냅)’하는 단추질 없이는 어떠한 사진도 태어나지 않아요. 복사기에 몸뚱이를 얹든 인화지만으로 사진을 만들든 ‘바로 이 한때(결정적 순간)’이 사진으로 깃들어요. 바로 이 한때에 찰칵 하고 거치지 않으면 아무런 사진이 태어나지 않아요.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진은 ‘바로 이 한때’를 찍고 ‘찰칵’으로 이루어져요.


  김태한 님은 “나는 사진의 프램 속의 세계에 집중했다. 소재로는 보통의 것, 무시된 것, 의미가 없는 것을 선택했다. 즉 벽, 거리의 보도, 철제품 등 이제까지 사람들이 애용하였으나 지금은 버려져서 돌보지 않는 것.” 하고 말합니다. 참말 적잖은 분들이 이와 같이 ‘많은 이가 등돌린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해요. ‘사람들한테서 사랑 못 받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려고 해요.


  그렇지만, 다른 이가 이런저런 등돌려지거나 사랑 못 받는 모습을 사진으로 안 찍는다고 할 적에 내가 이런저런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바로 누구보다 ‘나한테서 사랑을 받고 눈길을 받는’ 모습이 돼요. 내가 사진으로 찍으면서 ‘널리 읽히고 알려지며 사랑받는’ 모습으로 거듭나요. 나로서는 이것저것 ‘따돌려진 모습을 따스하게 바라봐 주며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나조차 들여다보지 않거나 나마저 눈여겨보지 못한 모습이 매우 많아요. 어쩌면, 내가 찍는 모습은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은 모습’이 아니라, 그저 ‘내가 눈여겨보며 사랑해 주는 모습’이지 않을까요. 따돌려지거나 안 따돌려지거나 하는 금이란 처음부터 없지 않을까요.


  김태한 님은 “사진이론서적을 구하기 힘들어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일본을 내왕하면서 책을 사모았다. 교단에서 학생을 바라보면 사진의 메카니즘이 너무나 급격하게 발달함으로써 학생들은 귀중한 것을 뺏들어 버렸다. 만약 사진의 메카니즘이 좀더 천천히 발달하였으면 학생들은 좀더 훌륭한 것을 찾았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또 많은 학생들은 셔터를 누르는데 이상한 흥미를 나타내나 표현성에 대해서 고려하는 학생은 적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하고 말합니다. 더없이 맞는 이야기로구나 싶은 한편, 다른 한편으로 바라보면 ‘새 기계’를 발돋움한 사람은 ‘사진기를 만들’고 ‘사진을 찍’는 어른입니다. 어른 스스로 더 빠르게 바뀌고 더 많이 바꾸었어요. 어른 스스로 삶을 재빠르게 옮겨요. 아이들(대학생)은 이 흐름에 맞추어 스스로 재빠르게 달라질밖에 없어요. 어른 스스로 느긋하게 즐기지 않는 삶인데, 아이들만 느긋하게 즐기라 할 수 없어요. 어른 스스로 새 기계를 자꾸 내놓고, 기계 솜씨를 더 눈부시게 바꾸려고 용을 써요. 아이들 또한 새 기계에 더 손뼉을 치고, 더 낫다 하는 새 기계에 마음을 빼앗길밖에 없어요.


  그러고 보면, 이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내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나는 내 사진을 찍고, 내 나름대로 사진을 읽으며, 내 깜냥껏 사진을 말하면 돼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대서 내가 그 말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책에 이런 사진흐름 저런 사진역사가 적혔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아이들(대학생)한테 가르쳐야 하지 않아요. 그저 내 삶길과 같이 내 사진길을 걸어가면 즐겁습니다. 내 사랑길을 아끼며 내 사진길을 보살피면 기뻐요. 내 꿈길을 다스리면서 내 사진길을 갈고닦으면 아름답습니다.


  모든 사진은 ‘찰칵(스냅)’입니다. 모든 사진은 사랑입니다. 모든 사진은 삶입니다. 모든 사진은 꿈입니다. 모든 사진은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진은 웃음이요, 눈물이고, 빛이며 그림자입니다. (4345.11.10.흙.ㅎㄲㅅㄱ)

 


― 김태한 사진집 (김태한 사진,열화당 펴냄,1993.9.10.)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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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밥풀꽃입니다. 11월 8일에 활짝 피어난 시골꽃이에요. 도시에도 이 꽃은 많이 피지요.)

 

..

 

 꽃을 읽다

 


  골목마실을 할 적에 참 많은 분들이 골목꽃을 알아보지 못한다. 제법 커다란 꽃그릇에서 빨갛고 노랗고 파란 꽃송이가 피어올라도, 꽃그릇 하나 놓인 골목집은 커다란 골목 가운데 아주 작은 점이고, 골목동네는 커다란 도시에서 아주 작은 섬과 같아서일까.


  골목마실을 하면서 골목 틈바구니에서 예쁘게 피어나는 골목꽃을 생각없이 발로 밟는 분이 제법 많다. 어른 손바닥만큼 꽃송이가 올라와야 알아볼까. 어른 손톱만큼 되는 노란 민들레조차 알아보지 않고 밟는 분이 참으로 많다. 아이 새끼손톱보다 작은 괭이밥풀꽃이라든지 봄까지꽃이라든지 별꽃은 거의 아무렇지 않게 밟고 만다.


  시골을 찾아온 도시내기라고 다르지 않다. 가끔 논둑이나 숲길을 함께 거닐며 바라보면, 도시 분들은 으레 유채꽃이든 갓꽃이든, 또 엉겅퀴꽃이든 자운영꽃이든, 또 들꽃이든 풀꽃이든 마음쓰지 못한다. 부추꽃을 본 도시내기는 얼마나 될까. 감자꽃이나 진달래꽃은 알아볼 테지만, 장미꽃과 동백꽃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보면서 예쁘게 들여다보는 도시내기가 너무 적다. 그러니까, 도시에서는 장미잔치를 할 테지만 동백잔치를 하지 못한다. 벚꽃잔치를 하지만 매화꽃잔치라든지 살구꽃잔치나 복숭아꽃잔치 이야기는 듣지 못한다.


  작은 들꽃 하나 들여다보지 못하고, 작은 들꽃에 서린 이야기를 읽지 못한다면, 이 땅 이 나라 이 마을에 있는 ‘이름 안 알려진 작고 여린’ 사람들 목소리와 이야기 또한 못 듣거나 못 읽는 셈이라고 느낀다. ‘이름난’ 몇몇 사람들 ‘이름난’ 몇몇 책은 읽을는지 모르나, 아름다운 삶과 어여쁜 사랑과 아리따운 꿈이 깃든 ‘작은 풀꽃과 풀꽃 같은 사람’, 또 ‘작은 들꽃과 들꽃 같은 사람’ 목소리와 책은 얼마나 가까이하려나.


  그런데, 풀꽃은 도시내기가 저를 알아보지 못한대서 서운해 하거나 슬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풀꽃은 너르며 조용한 시골이 좋아 풀꽃끼리 옹기종이 어깨동무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니까. 들꽃은 도시내기가 저를 알아채지 못한대서 안타까와 하거나 밉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들꽃은 따사롭고 넉넉한 시골이 기뻐 들꽃끼리 알콩달콩 얼크러지면서 재미나게 살아가니까.


  작은 사람들은 작은 사람들끼리 작은 보금자리를 이루어 재미나게 살아간다. 여린 사람들은 여린 사람들끼리 사랑 어린 마을을 일구며 즐겁게 살아간다. 작은 보금자리에는 신문이 없다. 사랑 어린 마을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신문을 안 읽고 신문기자도 없으나, 집집마다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훤히 안다. 텔레비전을 안 보고 방송기자라든지 지식인이라든지 학자라든지 교수라든지 작가라든지 아무도 없으나, 네 철 날씨를 알고 아이들 보살피는 따순 손길을 고이 물려줄 줄 안다. (4345.11.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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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시골들 마음

 


  따스한 남녘땅 시골마을 논은 거의 다 빕니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빈논에 여러 풀싹이 돋습니다. 논둑에는 온갖 풀꽃이 피어납니다. 사람이 씨앗을 심어도 풀줄기가 오르고, 사람이 씨앗을 심지 않아도 풀꽃송이 피어납니다.


  풀잎은 햇살을 먹고 바람을 마십니다. 풀꽃은 사랑을 먹고 꿈을 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요. 사람은 어디에서 어떤 삶을 일굴 때에 가장 맑고 환하게 빛날까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마음 됩니다. 풀을 바라보며 풀마음 됩니다. 가을을 느낄 적에 가을마음 됩니다. 너른 들판에 한 포기 두 송이 올라오는 빛깔을 느끼며 새로운 마음 됩니다. 두 팔 활짝 벌려 큰숨을 들이켭니다. (4345.11.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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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을 바라보다 -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삶
엘린 켈지 지음, 황근하 옮김 / 양철북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정갈한 시골숲이 키우는 사랑
[시골사람 책읽기 001] 엘린 켈지, 《거인을 바라보다》(양철북,2011)

 


  시골마을에 가을이 흐드러집니다. 시골사람은 가을이 되어 가을을 삶으로 읽습니다. 도시에서는 가을이 어떻게 찾아올까요. 이른바 ‘백화점 가을 에누리 광고 걸개천’으로 가을이 찾아올까요. 텔레비전 날씨 방송에서 ‘이제 가을입니다’ 하는 말을 읊어야 가을이 찾아올까요.


  어느 도시를 가나 가을이 되어도 무엇이 얼마나 가을다운지 느끼기 어렵습니다. 넘치는 ‘자동차 배기가스’를 조금이나마 줄이려고 길가에 심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떨구고, 청소 일꾼이 힘겹게 은행잎을 모아 푸대에 담는 모습으로 가을이 찾아올까요.


  가을은 무엇보다 시원스러운 바람입니다. 새벽과 밤에는 좀 스산하달 수 있으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산들산들 살랑살랑 고운 바람이 붑니다. 가을바람에는 무르익는 곡식 내음이 물씬 뱁니다. 마을마다 나락을 베어 길가에 널고는 햇볕으로 말릴 적에는 그야말로 온 고을이 나락내음으로 물듭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나락내음으로도 배가 부릅니다. 햇살은 따사롭습니다. 어느 풀밭에 드러누워도 솔솔 잠이 잘 오고,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다닙니다.


  가을이 되면 잎이 지고 꽃도 시든다지만, 가을이 되어 피는 꽃이 있습니다. 가을에 노랗게 피어 숲과 논둑을 밝히는 꽃이 흐드러지고, 나무마다 발그스름한 감알이 꽃송이처럼 여물고, 노르스름한 유자가 꽃덩이처럼 알찹니다.


.. 캘리포니아 만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고래 종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지만, 그것이 단지 먹이 때문만은 아니다. 고래들이 이곳으로 돌아오는, 혹은 긴수염고래의 경우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조용하다’는 것이다 ..  (63쪽)


  전라남도 아랫녘이라 할 고흥은 가을로 물듭니다. 군청과 포스코에서는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고흥 시골마을에 ‘화력발전소’를 끌어들여 목돈을 만지려고 했지만, 시골마을 사람들은 아름다운 시골흙에서 정갈한 먹을거리를 얻고, 어여쁜 시골바다에서 깨끗한 먹을거리를 누립니다. 돈 몇 푼 때문에 ‘도시 한복판에는 들이지 않는 위험·위해시설’을 시골 한복판에 들여놓을 까닭이 없습니다. 발전소도 고속도로도 공장도 골프장도 없는 고흥은 한국땅에 몇 안 되는 푸르게 빛나는 예쁜 시골마을입니다. 천 억 아닌 천 조를 주더라도 맑은 바람과 밝은 햇살과 고운 물을 즐길 수 없어요.


  바다에서 살아가는 젖먹이짐승 고래는 ‘첫째, 먹이가 넉넉한 곳’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먹이가 넉넉하더라도 시끄러우면 살아가지 못해요. 고래는 군함이나 고기잡이배에서 쏘는 저주파 소음 때문에 귀청이 찢어져서 죽기까지 해요. 고흥 나로섬에는 우주기지가 있는데, 우주기지에서 로켓을 쏘면 어마어마하게 큰 진동이 생겨 여러 날 바닷물고기가 송두리째 사라져요. 고래가 고흥 앞바다까지 찾아오는지 안 찾아오는지, 바닷속을 샅샅이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으니 모를 노릇이지만, 나로섬에서 로켓을 쏘면 숱한 바닷물고기와 함께 고래는 이곳으로 올 생각을 안 할 테지요.


  생각해 보면, 고흥 앞바다는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이에요. 들판은 누렇게 익고, 하늘은 파랗게 빛나며, 한겨울에도 씩씩하게 잎사귀 틔우는 동백나무랑 후박나무는 푸르게 빛나면서, 맑은 바닷물은 파랗디파랗습니다.


  곧, 이 시골마을은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합니다. 한국땅은 대륙과 붙은 반도라 하는데, 고흥은 한국땅에서도 반도입니다. 고흥사람 아니면 고흥으로 들어올 일이 없고, 고흥사람 스스로 자동차 몰아 여기저기 돌아다닐 일이 드뭅니다.


.. 고래들은 내가 발견한 바로는 지극히 헌신적인 어미다. 그들은그래야만 한다. 그 넓은 바닷속에는 새끼를 쉬게 하거나 먹일만한 안전한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고래는 보통 24년 7개월 정도 어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어떤 종은 어미 역할이 평생을 가기도 한다 ..  (14쪽)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는 일흔 살 나이에 ‘젊은이’ 소리를 듣습니다. 여든 살 나이에 씩씩하게 들일을 합니다. 아흔 살 나이에도 꿋꿋하게 바닷일을 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도시로 나가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 일꾼 노릇 하는 아이들한테 ‘깨끗한 시골 먹을거리’를 보내 줍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이라 하는 목숨은 ‘늙어서 죽는 날’까지, 또는 ‘늙고 늙어’도 새끼(아이)를 돌보는구나 싶어요.


  그렇겠지요. ‘자식 부양 의무’가 아닌, ‘사랑’으로 아이를 낳아 품고 돌보니까요. 아름다운 시골에서 살아가며 아름다운 사랑을 날마다 숲에서 읽고 숲에서 느끼며 숲에서 새롭게 쓰니까요. (4345.11.10.흙.ㅎㄲㅅㄱ)

 


― 거인을 바라보다,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삶 (엘린 켈지 글,황근하 옮김,양철북 펴냄,2011.4.29./13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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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골에서 식구들과 다 함께 살림을 꾸린 지 이태가 된다.

이태째를 맞아

새 글을 하나 '시골 인터넷신문'에 쓰기로 한다.

 

하룻밤 꿈꾸며 생각을 가다듬어 나온

새글 이름은

"시골사람 책읽기".

 

시골사람이 읽을 만한 책을 골라

짤막하게 느낌글로 써 보자고 다짐한다.

 

http://www.ghnews.net/

 

이곳에 이 글을 쓰려 하는데

다음주부터 올라올 수 있을까.

뭐, 시골 인터넷신문에 글을 띄우더라도

알라딘서재에도

글은 함께 걸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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