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책이 있다

 


  여기에 책이 있는데 어디를 보니? 코앞에 있는 책은 왜 안 쳐다보고 자꾸 저 먼 데만 바라보니? 네 앞에 있는 책부터 보렴. 네 앞에 있는 책을 살뜰히 볼 수 있을 적에 비로소 저 먼 데에 있는 책을 알아볼 수 있어. 네 발밑에서 자라는 풀을 알고 느끼며 뜯어서 먹을 줄 알 때에, 비로소 밭을 가꾸어 푸성귀를 돌볼 수 있어. 밭을 가꾸어 푸성귀를 돌볼 때에 바야흐로 숲에서 자라는 모든 풀이 얼마나 상큼하고 푸르며 싱그러운가를 알 수 있어.


  책은 여기에 있어. 책은 바로 네 가슴에, 네 마음속에, 네 눈빛에, 네 온몸에 있어. 스스로 빛이 되어야 책을 읽지. 스스로 빛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책을 읽겠니. 스스로 빛이 되지 못하면 어떤 책을 손에 쥐더라도 사랑과 꿈을 읽어내지 못해. 스스로 빛이 될 적에는 어떤 책을 손에 쥐어도 사랑과 꿈을 깨달으면서 맞아들이지.


  훌륭하다는 책을 내 손에 쥔다 한들 읽을 수 없어. 스스로 훌륭해야 비로소 훌륭한 책을 알아보면서 받아들여. 스스로 사랑스러워야 비로소 사랑스러운 책에서 흐르는 사랑빛을 알아채고는 받아먹어.


  온 사랑 담아서 쓴 책은 온 사랑으로 읽을 때에 어깨동무를 하지. 온 사랑 담아서 쓴 책을 줄거리훑기만 하거나 대학입시교재로 삼아서 들여다보면 무엇을 얻을까. 내가 바로 책이고, 풀 한 포기가 바로 책이요, 바람 한 줄기가 바로 책이야. 책은 바로 여기에 있어. 4347.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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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과 일곱 살

 


  일곱 살이 된 큰아이는 새해 첫날 아침에 “나 이제 일곱 살 되었어?” 하고 묻는다. 지난해에는 “나 여섯 살 아니야. 다섯 살이야!” 했고, 그러께에도 “나 다섯 살 아니야. 네 살이야, 네 살!” 하던 아이인데, 일곱 살이 되니 나이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셈일까. 네 살이 되는 작은아이는 나이를 놓고 딱히 생각이 없다. 작은아이더러 세 살이라 하면 그러려니 네 살이라 해도 그러려니, 백 살이라 해도 그러려니 한다. 작은아이는 아직 스스로 몇 살이라고 말할 줄 모른다. 4347.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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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빛 읽는 손길

 


  박노해 님이 쓴 시를 읽던 고등학생 때인 1992년 여름날이었다. 기계를 하도 만지다가 손그림이 모두 지워져 그만 주민등록증 새로 고칠 적에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를 보고는 숨이 멎었다. 문득 궁금해서 사포로 손그림을 긁어 보았다. 책상이나 벽이나 바닥에 손가락과 손바닥을 질질 문대어 보았다. 칼로 살살 살점을 잘라 보기도 했다. 날마다 한두 시간쯤 철봉을 잡고 턱걸이와 뒤돌아넘기를 해 보았다. 손그림은 웬만해서는 지워지거나 벗겨지지 않는다. 언제나 무엇이든 손으로 쥐고 잡고 만지고 하는데, 손그림은 그야말로 씩씩하게 열 손가락마다 다 다른 모양새로 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머니 아버지와 제금나서 따로 산 지 스무 해가 넘은 오늘, 내 손그림을 새삼스레 들여다본다. 첫째 아이를 낳고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 날마다 수없이 기저귀를 빨래하고 다리고 걸레질을 하고 물을 만지고 아이들 쓰다듬고 하면서 손그림이 살짝 무디어지곤 했다. 칼이나 낫에 벤 손가락이 아물면서 손그림이 살짝 울퉁불퉁 바뀌기도 한다. 그렇지만 빨간 물 묻혀 척 찍으면 손그림이 번듯하게 나온다. 손그림이 사라질 만큼 되자면 손으로 얼마나 일을 많이 해야 했을까. 손그림이 사라진다면, 맨손으로 무언가 잡을 적마다 자꾸 미끄러져 얼마나 힘들면서 고단할까.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손그림이 무디어질까. 글을 많이 쓰는 사람도 손그림이 지워질까. 책짐을 많이 나르는 사람이나, 헌책방에서 책먼지를 쉴새없이 닦는 사람도 손그림이 살짝살짝 뭉그러질까.


  손가락과 손바닥에 손그림이 있어 책을 손에 쥔다. 손가락에 손그림이 있으니 얇은 책종이를 살몃살몃 붙잡아 찬찬히 넘긴다. 책을 읽는 손길은 어떤 이야기를 얻고 싶을까. 책을 살피는 손길에는 어떤 빛이 서릴까. 책빛은 우리들한테 어떤 노래가 될까.


  종이를 만지면서도 책빛을 읽는다. 나무를 심거나 돌보면서도 책빛을 읽는다.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며 아이를 품에 안으면서도 책빛을 읽는다. 박노해 님은 공장에서 함께 기름밥 먹는 동무와 이웃을 바라보면서 책빛을 읽었을 테지. 우리는 모두 언제나 엄청난 책빛을 읽고 나누는 이웃들이다. 4347.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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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95] 놀이

 


  흙일은 흙놀이, 들일은 들놀이.
  글쓰기는 글놀이, 그림그리기는 그림놀이.
  살면서 하는 일은 살면서 누리는 놀이.

 


  어른들은 일하고 아이들은 놀이합니다. 어른들은 땀흘려 일하고, 아이들은 땀흘려 놀이합니다. 흙을 만지건 물을 만지건, 어른들은 늘 일이고, 아이들은 언제나 놀이입니다. 아기를 돌보건 밥을 짓건, 어른들은 늘 일이며, 아이들은 언제나 놀이입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어른은 으레 일이 되고 창작이 되며 작품이 돼요. 그러나, 아이들은 글놀이와 그림놀이예요. 어른들은 전문직업으로서 가수가 되려 하지만, 아이들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놀아요. 곰곰이 돌아보면, 우리 어른들 삶은 삶일이기 앞서 삶놀이라고 느껴요. 놀 줄 알 때에 일하고, 놀 수 있을 때에 살가이 어깨동무하면서 일하는구나 싶어요. 4347.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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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림놀이] 종이 살려쓰기 그림 (2013.12.28.)

 


  큰아이가 그림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나서 가위로 오린다. 종이인형을 갖고 놀겠단다. 큰아이한테 “벼리야, 그림종이 그림은 오리지 말아야지. 따로 오리는 종이가 있잖아. 빈 우유곽을 오려서 쓰면 되는데, 왜 그림종이를 오리니.” 하고 이야기한다. 큰아이가 종이인형 자리만 빼고 버리려는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 종이가 아깝다고 느낀다. 네 아버지 어릴 적에는 이만 한 종이조각조차 몹시 아끼면서 썼는데. 그래, 끄트머리를 살려서 다른 그림을 그려 볼까? 아이가 종이를 오려 종이인형 만들듯이, 나도 뭔가 오려서 쓸 그림을 만들어 보면 되겠네. 큰아이가 한손에는 연필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호미를 쥔 모습을 그린다. 종이가 작으니 웃몸만 그린다. 그러고는 종이배에 탄 모습으로 한다. 종이배는 하늘을 날고 무지개를 탄다. 별과 달이 반짝반짝 빛나며 우리 아이를 반긴다. 아버지가 쪽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던 큰아이가 ‘제 모습’을 그리니 거들겠다면서 예쁜 빛깔을 입혀 준다. 다 마무리를 짓고는 가위로 잘라, 벽에 붙인 아이들 그림과 사진 사이에 살짝 끼운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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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4-01-01 21:39   좋아요 1 | URL
아니.. 정말로 저 그림을 따님이 그린거에요?? 와~ 그림 잘 그리네요.. 게다가 똑똑하기까지.. 자리가 모자라니까 저렇게 반짝거리는 생각을 하는군요~^^

파란놀 2014-01-01 21:57   좋아요 1 | URL
쪽그림은 제가 그렸어요 ^^
그 그림에서 종이배 자리만 큰아이가 빛깔을 입혔습니다 ^^

아이하고 곧잘 그림놀이를 하는데
그런 그림놀이 가운데 하나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