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책길 걷기
2. 책은 무엇인가

 


  《샬롯의 거미줄》이라는 책을 쓴 엘윈 브룩스 화이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뉴욕에 머물면서 쓴 《여기, 뉴욕》(숲속여우비,2014)라는 책이 있습니다. 1949년에 처음 나온 책이니 미국 뉴욕 모습을 1940년대 끝무렵 눈길로 바라보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머리말을 살피면, 1949년에 책을 펴낼 적에도 ‘달라진 뉴욕 모습’이 있어 글을 고쳐야 할까 망설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글을 쓰며 본 모습’과 ‘글을 쓴 뒤 달라진 모습’을 낱낱이 고칠 수 없다고 밝힙니다. “여기, 뉴욕”이라 했지만, 정작 책이 나온 뒤에는 ‘여기’에 ‘그것’이 없을 수 있어요. 이는 어디에서나 똑같습니다. 오늘날에는 재개발과 공사가 너무 잦아, 어제와 오늘 사이에도 수많은 일이 벌어집니다.


  제주섬을 나들이를 한 뒤 누군가 여행책을 내놓습니다. 여행책을 쓴 분은 이녁이 즐겁게 제주섬을 누빈 이야기를 적습니다. 제주섬을 거닐거나 자전거를 달리거나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모습을 글로 쓰고 사진으로 찍습니다. 나들이를 마친 뒤 글을 쓰고 책으로 내기까지 여러 달이 걸리곤 하며, 여러 해가 걸릴 수 있습니다. 이동안 제주섬 모습이 달라집니다. 책이 나올 때만 하더라도 이 모습은 이대로였으나, 책이 나오고 이레가 지난 뒤, 또는 달포가 지난 뒤, 또는 한두 해가 지난 뒤 다른 모습이 되곤 합니다.


  책은 무엇인가요. 책은 어떤 모습을 담는가요. 책에 적은 이야기는 어떤 모습을 어떻게 그리는가요.


  2000년에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1999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1999년에 일어난 일을 적은 책을 읽어도 머릿속으로 어렴풋하게 그릴 뿐입니다. 1990년에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1989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1989년에 일어난 일을 적은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흐릿하게 그릴 뿐입니다.


  지나간 삶자락을 적바림하는 책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말하고 지나간 문화를 밝힙니다. 지나간 삶자락은 오늘날 어떤 뜻이 될까요. 어떤 빛과 값으로 우리 마음에 스며들 만할까요.


  모든 책은 언제나 헌책이 됩니다. 2014년 1월 1일에 나온 책이라 하더라도 1월 2일부터는 ‘옛이야기’입니다. 2015년 1월 1일에 돌아보아도 옛이야기요, 2024년 1월 1일에 돌아보아도 옛이야기입니다. 책으로 나올 적에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 묵은 이야기라 할 만합니다.


  모든 책은 새로 태어나면서 언제나 묵은 이야기를 담는데, 막상 우리들은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느끼고 ‘새로운’ 눈길로 삶을 배우곤 합니다. 꼭 1500년대 이야기를 읽거나 기원전 이야기를 읽어야 ‘옛 것을 바탕으로 새 것을 익힌다’는 매무새가 되지 않아요. 어느 책을 읽든 늘 ‘옛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눈길과 생각’을 느끼거나 얻거나 익힙니다.


  왜냐하면, 책으로 읽는 이야기는 우리가 스스로 겪지 못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닌 이웃과 동무(남)가 겪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책이란 내 이웃과 동무가 살아오며 겪은 이야기입니다. 책읽기란 내 이웃과 동무가 살아오며 겪은 이야기를 읽는 일입니다. 책읽기를 하면서 내 이웃과 동무가 살아오며 겪은 이야기를 눈여겨보고 귀여겨듣습니다.


  내 삶은? 내 삶은 스스로 글을 쓰지 않아도 내 마음과 몸에 아로새겨요. 가만히 지난날을 떠올리면, 스스로 ‘내 삶 읽기’가 됩니다. 어제 무엇을 했고 조금 앞서 무엇을 했는가 떠올려 보셔요. 차근차근 걸어온 내 삶을 돌아볼 적에는 나 스스로 지난날 어떻게 했는가를 하나씩 그리면서 ‘내 삶을 스스로 새롭게 읽어 오늘 누리는 하루를 새삼스레 바라볼’ 수 있어요.


  스스로 어제를 되짚을 적에도 책읽기입니다. 마음속에 내 지난날 삶을 찬찬히 아로새겼으면, 내 마음속에는 ‘내 삶을 적은 책’이 알뜰살뜰 있는 셈입니다. 종이책에 얹은 이야기는 내 이웃과 동무가 살아온 나날을 적은 셈입니다.


  책은 무엇인가 하면 삶입니다. 자서전처럼 손수 내 삶을 글로 옮긴 책이 있습니다. 자서전이 아닌 책은 이웃과 동무가 저마다 이녁 삶을 글로 옮겼지요. 책은 삶이기에, 책을 읽으면 언제나 삶을 읽습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삶을 씁니다. 삶을 글로 쓰는 까닭은, 내 삶을 남한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 삶을 글로 옮기면서 이웃과 동무하고 어깨를 겯고 함께 나아갈 길을 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겪은 삶을 글로 옮겨서 이웃과 동무한테 알립니다. 서로 삶을 한결 깊이 들여다봅니다. 저마다 겪은 새로운 삶을 차곡차곡 나눕니다. 슬기롭게 살아갈 길을 책(삶)에서 얻습니다. 종이책을 읽을 적에도 슬기롭게 살아갈 길을 얻고, 말로 이야기꽃을 피울 적에도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얻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을 차분히 되짚을 적에도 사랑스럽게 살아갈 길을 얻어요.


  엊그제 이웃한테서 《학교 참 멋지다》(북뱅크,2014)라는 그림책을 선물로 받았어요. 우리 집 아이들한테 읽히라는 뜻에서 이웃이 선물로 보내 주었습니다. ‘학교가 얼마나 멋지다고 책이름을 이렇게 붙였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 그림책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글을 쓰고 일론 비클란드 님이 그림을 넣었어요. 스웨덴 아이들 삶이 환히 드러나는 빛깔 고운 그림책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오빠가 어린 동생과 함께 학교에 가서 겪은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어린 동생은 오빠 혼자 다니는 학교를 늘 궁금해 했고, 오빠는 아무렇지 않게 동생을 학교로 데리고 가서 담임교사와 동무한테 동생을 소개해요. 동생은 오빠 곁에서 하루를 지내며 학교란 어떤 곳인지 지켜봅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 보았어요. 초등학교 1학년인 오빠나 형이나 누나나 언니가 어린 동생을 데리고 학교에 오면, 담임교사와 동무들은 어떤 모습일까 퍽 궁금해요. 교칙 위반이라고 하려나요? 고등학교 1학년인 오빠나 형이나 누나나 언니가 꽤 어린 동생을 데리고 학교에 오면, 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요. 이때에도 어린 동생은 “학교 참 멋지다” 하고 느낄 만할까요? 교사와 동무는 아이한테 학교 소개를 찬찬히 하면서 수업도 함께 받도록 할 수 있을까요?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이웃나라에서 태어난 책을 즐겁게 만납니다. 이웃과 우리는 저마다 어떤 삶을 일구면서 사랑을 속삭이는지 생각에 잠겨 봅니다. 4347.3.3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름이와 함께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 한 권 알아보는 눈길

 

 

  모든 책은 돈으로만 살 수 없다. 돈을 들인대서 모든 책을 사들일 수 없다. 새로 나온 책이라면 새책방에 주문을 넣으면 집에서 택배로 얼마든지 받는다. 그러나 판이 끊겨 사라진 책은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판이 끊겨 사라진 책을 사고 싶다면, 이 책을 건사한 누군가 헌책방에 즐겁게 내놓는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무도 헌책방에 책을 내놓지 않으면, 판이 끊어진 책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책방지기는 책손한테 책을 판다. 새책방에서는 새책을 파고 헌책방에서는 헌책을 판다. 어느 책방에서는 책을 판다. 새책방에서는 늘 똑같은 책을 팔고, 헌책방에서는 늘 다른 책을 판다. 왜냐하면, 새책방에 놓는 갓 나온 책은 모두 똑같은 책이다. 아직 누구 손길도 타지 않은 새책은 모두 똑같다. 책손 손길을 탈 적에 비로소 다른 책이 되고, 다 다른 책손이 다 다른 넋으로 읽고 삭히는 동안, 다 똑같던 책에 다 다른 숨결이 깃들면서 다 다른 이야기로 피어난다. 그래서 헌책방에서 다루는 헌책은 똑같은 책이 한 가지조차 없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에 따라 다 다른 즐거움을 누리며 읽은 책이니까.

 

  책을 한 권 알아본다. 책을 한 권 알아본 사람은 책을 한 권 장만한다. 책을 장만한 날 곧바로 끝쪽까지 다 읽을 수 있다. 바쁜 일이 있어 이레쯤 묵힌 뒤 읽을 수 있다. 사 놓고 깜빡 잊은 나머지 한 해가 지나서 읽을 수 있다. 장만하고서 곧바로 읽으려고 손에 쥐었다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구나 싶어 덮은 뒤, 열 해나 스무 해 지나서야 펼치니 비로소 머릿속에 쏙쏙 들어올 수 있다.

 

  책은 읽힐 적에 새책이다. 책은 누군가한테 읽히면서 비로소 새책이 된다. 열 해를 묵든 백 해를 묵든, 알아보는 눈길이 없으면 모든 책은 그저 묵은 책일 뿐이다. 먼지가 쌓이고 더께가 앉으면서 헌책이 되면, 책은 책으로서 제 빛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러다가 누군가 이 책 한 권을 알아보고는 살며시 집어서 가만히 넘기면, 모든 헌책은 새책이 된다. 새롭게 빛나고 새삼스레 눈부시다.

 

  모든 책은 태어나면서 헌책이 되지만, 모든 책은 읽히면서 새책이 된다. 모든 책은 책꽂이에 꽂으면 헌책이 되나, 모든 책은 손에 쥐어 읽으면 새책이 된다. 4347.4.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시골빛

 

 

삼월 첫무렵 복복 오르는

쑥잎을 바라보며 웃는다

너희를 언제부터 뜯어서

냠냠 먹을까.

 

쑥이 오르기 앞서 돋은

갈퀴덩굴과 갓잎을 톡톡 끊어

일곱 살 네 살 두 아이와

아침저녁 먹으며

빙그레 생각한다

우리 집 마당 돌나물도

곧 물오르고 통통히 굵어

신나게 먹을 테지.

 

삼월 이십구일에

우리 집 헛간에

올들어 첫 거미줄 나타났다.

날파리 몇 걸렸다.

새끼손가락으로 고운 거미줄

톡 건드린다.

이제 보름쯤 지나면

저 태평양 가로질러

제비들 무리지어 춤추듯

처마 밑으로 깃들겠구나.

 

 

4347.4.2.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밤을 지새우며 쓴 시

 

 

  밤을 지새우며 시를 쓴다. 신안으로 마실을 와서 압해다리 건너 목포에 있는 여관에서 묵는 지난밤,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내 마음을 건드리는 빛은 무엇인가 가만히 드러누워 생각에 잠긴다. 지나온 마흔 해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하고 곰곰이 돌아본다. 어제 낮 문득 한 가지를 생각했다. 나는 지난 마흔 해에 걸쳐 이것저것 마음밭에 담는 배움길을 걸었구나 싶다. 앞으로도 이 배움길은 씩씩하게 걸어가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배움길은 배움길로만 그치지 말고, 내 이웃과 동무한테 꿈과 사랑을 속삭이는 이야기길로도 꾸릴 수 있어야겠다고 느낀다. 이야기길이요 책길이요 노래길이 되어야 아름답겠지.

 

  간밤에 시를 두 꼭지 쓴다. 시는 언제나 저절로 샘솟는다. 원고지를 붙잡는대서 시가 태어나지 않는다. 하루하루 즐겁게 누리며 아름답게 밝힌 이야기가 있으면, 어느 날 문득 소나기처럼 퍼붓기도 하고 보슬비처럼 눈가를 적시기도 하며 안개처럼 하얗고 포근하게 감싸기도 한다.

 

  새날이 밝는다. 날밤을 지새운 적이 마흔 해 삶 가운데 거의 하루조차 없는데, 이렇게 밤에 잠들지 못하고 지새운 적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굳이 떠올린다면, 스물두 살 적이던가, 강원도 양구에서 군인으로 있어야 하던 데, 강릉 앞바다에 잠수함을 타고 나타났다던 북녘 군인을 잡아야 한다면서 깊은 숲속에서 이레 동안 잠을 못 자면서 매복을 해야 한 적 있다. 스무 살 적, 갓 군인이 되어 이등병을 달고 자대에 가서 하루만에 뛰어야 하던 한겨울 훈련에서 열여덟 시간 동안 1초조차 못 쉬고 숲길을 걸으며 밤을 꼴딱 새운 적 있다.

 

  누가 억지로 시켜서 밤을 새운 두 차례 빼놓고, 나 스스로 잠을 못 이룬 날은 오늘이 처음인가. 아니다. 아니로구나. 큰아이를 낳고 세이레가 되기까지 고작 두 시간밖에 못 잤는걸. 큰아이가 백날을 맞이할 때까지 마흔여덟 시간밖에 못 잤는걸. 그렇구나. 밤을 지새운 적이 아예 없지 않구나. 아무튼, 지난밤에 홀가분한 넋으로 시를 썼다. 4347.4.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글쓰기 삶쓰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드림모노로그 2014-04-02 15:09   좋아요 0 | URL
마흔을 넘어가는 나이는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희망보다는
살아온 날을 곱씹어보는 나이인가 봅니다...그래서 불혹이겠지요.
과거를 통해 세상살이에 혹하지 않을 때, 어른이 되는 나이말이지요 ...
글을 읽고 나니 괜시리 마음이 쓸쓸해집니다..^^

파란놀 2014-04-03 05:53   좋아요 0 | URL
가끔은 쓸쓸하게 홀로 생각에 잠기면서
삶과 하루를 아름답게 돌아보면서
다시금 즐겁게 기운을 낼 수 있지 싶어요.

드림모노로그 님 하루에 언제나
고운 빛이 드리우기를 빌어요.
 
홍도와 흑산도 빛깔있는책들 - 한국의 자연 217
고동률 / 대원사 / 199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 삶읽기 160

 


섬에서 빛나는 삶과 꿈
― 홍도와 흑산도 (빛깔있는 책들 301-35)

 고동률 글

 박보하 사진

 대원사 펴냄, 1998.7.25.

 

 

  전라남도에 신안군이 있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 알던 신안은 신안 바닷가에서 옛배를 길어올려 지난날 유물과 유적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어릴 적에는 흑산도라든지 홍도가 신안군에 있는 섬인 줄 몰랐습니다. 그 먼 바다까지 배를 타고 찾아갈 일이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해 보곤 했습니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내 삶이라,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여덟아홉 시간을 간다는 백령도를 헤아리면서, 흑산도나 홍도는 얼마나 뭍에서 먼 섬일까 하고 그려 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인천 앞바다에 있는 장봉섬에서 여러 해 일했습니다. 장봉섬 한쪽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옹암분교에서 분교장을 맡으셨습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1988년부터 섬학교 교사로 계셨고, 세 해였지 싶은데, 섬학교 일곱 아이와 지내다가 분교가 문을 닫아야 하면서 다시 뭍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어머니와 형과 함께 배를 타고 장봉섬에 갈라치면 두 시간이나 두 시간 반쯤 걸렸습니다. 물결이 높게 치는 날에도 배를 탔고, 출렁출렁 흔들리는 배에서 어머니는 곧잘 멀미를 하셨습니다.

 

  인천항을 떠난 배는 장봉섬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섬에서 통통배가 마중을 나옵니다. 섬에서 내릴 사람은 통통배로 갈아탔습니다. 섬에 있는 포구는 아주 작거든요. 큰 배가 닿을 수 없어요. 포구에서 내려 여러 짐을 짊어진 채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용케 경운기를 만나면 짐칸에 얻어 탑니다. 하염없이 걸어야 할 적에는 흙먼지 날리는 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도라지꽃을 보았습니다. 섬에서 자라는 도라지는 어린 내 키를 훌쩍 넘도록 크게 자랐고, 호미로 도라지를 캐서 뿌리를 잘 씻은 뒤 벗기면 날로 먹어도 맛있고 무쳐도 맛있는 나물이 되었습니다.

 

 

.. 홍도와 흑산도의 아름다운 자연미와 특이한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느끼려면 많이 걷고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  (109쪽)

 

 

  국민학교를 갓 마친 나는 옹암분교 아이들을 만나서 함께 놀 수 있었으나, 어쩐지 수줍고 부끄러웠습니다. 섬아이는 살갗이 아주 까맸고, 도시인 인천에서 온 내 살갗은 허얬습니다. 허연 살갗 때문에 더 섬아이하고 마주하지 못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섬에서 한 달쯤 지내면 내 허연 살갗도 제법 까무잡잡 타곤 했어요.

 

  섬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섬에서 어떤 공부를 할 수 있었을까요. 섬에서 읽는 책은 무엇이었을까요. 섬에서 보는 하늘과 섬에서 걷는 길은 어떤 빛이었을까요.

 

  여름방학을 맞이하면 으레 섬에서 지내는데, 우리 식구는 아버지와 함께 지내려 찾아오지만, 다른 이들은 섬에서 놀려고 찾아옵니다. 작은 분교가 있는 작은 숙소에서 네 식구가 지내는데, 그때에는 잘 몰랐지만, 여름방학 때 아버지가 인천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까닭을 요즈막에 새삼스레 돌아보곤 합니다. 방학이라고 인천으로 돌아가면, 여름철에 섬으로 놀러오는 이들이 분교 건물에 함부로 들어와서 어지럽히거나 유리창을 깨거나 쓰레기를 운동장에 버리거나 해요. 운동장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놀이꾼이 있기도 하고, 병을 아무 데나 던져서 깨뜨리기까지 해요. 그러고 보니, 섬에서 머무는 동안 쓰레기를 줍거나 빈병을 갈무리하기도 했습니다.

 

 

.. 유람선 선장의 홍도와 바다 사랑은 끔찍하다 못하여 처절하기까지 하다. 관광객이 무심코 담배나 휴지를 바다에 던졌다가는 망신도 보통 망신을 당하는 게 아니다. 목청 큰 선장은 집 방바닥에 침을 뱉을지언정 바다에는 먼지 하나 털어내지 말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  (15∼16쪽)

 

 

  그리 크지 않은 섬에 있던 아주 조그마한 분교는 곧 문을 닫습니다. 분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섬에서 가장 큰 학교로 먼길을 다녀야 합니다. 이 아이들은 중학교를 다니려고 인천으로 하숙을 나왔을까요. 아니면 그대로 섬에 남아 섬사람으로 지낼까요.

 

  이제는 장봉섬 옹암분교 마지막 분교장이던 우리 아버지를 떠올릴 마을 어른은 아무도 없지 싶어요. 분교가 문을 닫고 몇 해 뒤 장봉섬을 찾아와서 부러 분교까지 혼자 걸어온 적 있는데, 그사이 분교는 모든 유리창이 깨지고 모든 물건이 사라졌으며 모든 것들이 어지럽게 되고 말았습니다. 작은 운동장 축구골대마저 쓰러지고, 국기게양대는 넘어졌으며, 운동장 곳곳은 빈 술병과 고기 구워 먹은 시꺼먼 잿더미가 춤추고 이곳저곳에서 오줌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나중에 다시 열기를 바라며 학용품도 공책도 교과서도 그 교실에 그대로 두었는데 어느 하나 남아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지내던 관사도 아주 엉망진창이 되었어요. 관사 지붕에 고추를 널어 말리면서 바다를 하염없이 내다보던 일이 아스라히 떠오릅니다.

 

 

.. 삼층석탑과 석등을 가림은 물론 뿌리가 굵어지면서 석탑을 기울게 한 것이다. 팽나무뿐만 아니라 인간도 훼손에 일조를 하였다. 나름대로 보존하려는 의도였겠지만 바닥을 온통 시멘트로 바르고 주변에 돌담을 쌓아 석등과 석등 주변은 원형을 거의 잃었다 ..  (61쪽)

 

 

  여행이란 무엇일까요. 피서란 무엇일까요. 관광이란 무엇일까요. 도시 손님은 누구인가요. 모두들 맑고 깨끗하며 싱그러운 시골로 찾아가서 맑은 바람과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을 텐데, 시골에 온갖 쓰레기를 잔뜩 버리고 도시로 돌아가면, 시골은 어떡해야 할까요. 도시에서 가져온 것들을 지져 먹든 구워 먹든 즐겁게 누릴 노릇이지만, 빈병도 쓰레기도 과자봉지도 귤껍질도 몽땅 도시로 가져가서 치워야 옳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시골사람은 도시사람 뒷자리를 치우는 일꾼이 아니거든요. 시골사람은 시골마을을 돌보고 가꾸면서 사랑하는 숲지기인걸요.

 

  고동률 님 글과 박보하 님 사진으로 빚은 예쁘고 작은 책 《홍도와 흑산도》(대원사)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1998년에 처음 나온 책인데, 요즈음에 새로운 판이 나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2014년 눈길로 바라보자면 1998년에 나온 책에 실린 이야기는 참 오래되고 아스라한 옛모습으로 여길 만합니다. 참말 이 책에 나온 이야기와 다르게, 그동안 아주 많이 달라졌거든요. 뱃길은 더 빨라졌고, 온갖 위락시설은 더 늘었으며, 집도 건물도 길도 아주 많이 바뀌었습니다.

 

 

.. 예전에 비하여 지금의 생활은 많이 윤택해졌다. 자식들 대학 보내고 목포 등지에 집을 장만하여 두기도 한다. 생활이 어느 정도 윤택해지면서 어부의 자식들은 고기 잡는 일을 대물림하지 않고 있다. 지긋지긋하기만 한 섬을 떠나 육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 시작한 것이다 ..  (90쪽)

 

 

  이런저런 추억에 잠길 생각으로 《홍도와 흑산도》를 읽지는 않습니다. 이웃들한테 이 작고 예쁜 책을 아스라한 옛생각에 잠기라는 뜻으로 읽으라 말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이 책을 찬찬히 펼치면서 넘기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가꾸는 삶이란 무엇인지 천천히 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곰곰이 새기며 읽고 사진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저마다 꿈꾸는 사랑이 어떻게 빛나는가 하고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삶이란 어디에서 아름다울까요. 삶은 누가 가꿀까요. 삶을 이루는 사랑은 어디에서 태어날까요. 삶을 밝히는 꿈은 누가 곱다시 보듬을까요. 책을 살살 쓰다듬으면서 덮습니다. 4347.4.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사람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