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아이 38. 2014.4.15. 등꽃아이



  등꽃이 피었다. 늦여름부터 가으내 등나무 줄기가 얽혀 도서관 창문을 다 가린다 싶더니, 봄에는 등꽃이 찰랑찰랑 빛난다. 등꽃을 보면 등나무 줄기가 휘휘 뻗는 일을 미워하지 못한다. 치렁치렁 고운 등꽃을 한 줄기 따서 큰아이한테 건넨다. 예쁘장한 등꽃줄기를 들고는 좋아서 노래를 한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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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꽃은 눈부시게



  탱자꽃이 눈부시다. 하야말갛게 피어나는 탱자꽃은 이른 봄날 새하얀 꽃잔치를 벌이다가 저무는 봄꽃나무와 사뭇 다르게 눈부시다. 봄꽃나무는 이른봄에 사람들 눈을 환하게 틔우는 꽃송이를 베푼다면, 탱자꽃은 봄이 무르익는 푸른 물결이 우리 숨결을 시원하게 어루만지는 빛이 얼마나 눈부신가를 알려주지 싶다.


  하얀 꽃잎이 팔랑거리는 탱자나무 줄기와 가시는 푸르다. 탱자꽃이 피고 질 무렵 땅바닥에서는 딸기넝쿨이 퍼지면서 딸기꽃이 피고 진다. 탱자꽃이나 딸기꽃을 보려고 마실을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 텐데, 탱자꽃과 딸기꽃은 새벽빛을 부르고 저녁빛을 밝힌다. 아침저녁으로 봄들에 고운 손길을 흩뿌린다. 4347.4.2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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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려고 만드는 책



  모든 책은 읽히려고 만든다. 아름답구나 싶은 이야기를 알뜰살뜰 담아서 널리 읽히려고 만든다. 삼백 권을 찍는 책은 삼백 사람한테 읽히려는 뜻으로 만든다. 그러나 삼백 사람한테만 읽히고 싶지 않다. 삼백 사람을 비롯하여 삼천 사람과 삼만 사람한테 아름다운 넋을 나누어 주면서 함께 즐기고 싶다. 삼천 권을 찍는 책은 삼천 사람한테 읽히려는 뜻으로 만든다. 그러나 삼천 사람한테만 읽히고 싶지 않다. 삼천 사람을 비롯하여 삼만 사람과 삼십만 사람한테 아름다운 숨결을 베풀면서 같이 누리고 싶다.


  삼백 사람한테 읽히려고 찍은 삼백 권이 때로는 삼백 사람은커녕 서른 사람한테 가까스로 읽힐 수 있다. 삼천 사람한테 읽히려고 찍은 책이 삼천 사람은커녕 삼백 사람한테 겨우 읽힐 수 있다. 그렇지만, 서른 사람이 알아보았고 삼백 사람이 사랑했다. 서른 사람 손길을 타며 즐겁게 피어나고, 삼백 사람 눈길을 받으며 살가이 노래한다.


  오늘 읽히는 책이 있다. 모레 읽히는 책이 있다. 어제 읽힌 책이 있다. 먼 앞날에 읽히는 책이 있다.

  누가 알아보는가. 누가 사랑하는가. 어떻게 알아보는가. 어떻게 사랑하는가. 책을 읽히려는 손길에는 얼마나 넓고 깊은 사랑이 깃드는가. 책을 읽으며 즐겁게 웃는 손길에는 얼마나 기쁘며 반가운 꿈이 자라는가.


  오랫동안 읽히지 못한 채 먼지만 곱게 내려앉은 책을 바라본다. 살살 쓰다듬는다. 책에 내려앉은 먼지가 내 손가락과 손바닥에 까맣게 묻는다. 이 먼지는 무엇일까. 이 고운 책먼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오늘 치운 책먼지는 며칠 뒤 다시 내려앉을까. 오늘은 누군가 책먼지를 닦아 주었으나 몇 해 지나도록 다시 책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을까. 4347.4.2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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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끈은 낡지 않다



  눈으로 바라보면서 낡다고 생각하면 낡은 끈이 된다. 눈을 감고 손으로 살살 어루만지면서 끈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면 끈이 된다. 끈은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손에 쥐어 한 쪽씩 넘기면 그예 책이 된다. 낡은 끈으로 묶은 낡은 책이라고 여기면 그예 낡은 책이 된다.


  2004년에 처음 나오고 2014년에 여러 쇄를 찍은 책은 어떤 책일까. 낡은 이야기를 담은 책일까 새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일까. 1994년에 처음 나온 뒤 더 찍지 못했기에 1994년에 나온 대로 내 앞에 놓인 책은 어떤 책일까. 1974년에 처음 나오고 2014년에 새로 찍은 책은 어떤 책일까.


  많은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해서 앞으로도 꾸준히 찍는 책이 있다. 몇몇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하기에 한 번 찍고 나서 다시 못 찍지만, 헌책방에서 애틋한 손길을 받는 책이 있다. 책은 책을 읽는 사람 몫이지, 책 몫이 아니다. 책은 그저 책으로 있을 뿐이요, 우리들이 책에 빛과 값과 넋과 숨결을 불어넣는다. 책에 깃든 이야기는 글쓴이 몫이 아닌 읽는이 몫이다. 글쓴이는 이녁 온 사랑과 꿈을 이야기로 엮어 책으로 묶는다. 읽는이는 글쓴이가 바친 사랑과 꿈을 이야기로 읽을 뿐 아니라, 읽는이 나름대로 새로운 빛과 숨결을 불어넣으면서 새로운 이야기로 짓는다.


  낡은 끈이 낡은 까닭은 낡았다고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다. 끈이 끈인 까닭은 그저 끈으로 마주하면서 아끼기 때문이다. 헌책도 없고 새책도 없다. 모두 똑같은 책이다. 종이로 빚은 책과 종이에 앉히지 않고 마음에 담는 책은 모두 똑같은 책이다. 4347.4.2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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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4.4.16.

 : 노란 물결 사이를 달린다



- 아침에 순천을 다녀온다. 신안에서 순천 헌책방 〈형설서점〉으로 찾아오는 분이 있어서 함께 만난다. 헌책방 아저씨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고흥으로 돌아온다. 우리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는 없기에 이웃 봉서마을 앞을 지나가는 군내버스를 탄다. 봉서마을부터 집까지 걸어서 온다. 대문을 여니 아이들이 “아버지 왔다!” 하고 외치면서 마당으로 내려온다. 아이들을 안고 쓰다듬다가, 이 아이들을 데리고 자전거마실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도서관으로 옮길 짐을 수레에 싣는다. 도서관까지는 자전거를 끌고 간다. 작은아이는 수레에 앉고 싶으나 짐이 있으니 앉을 틈이 없다. 도서관에 짐을 내려놓고 수레에 태우고 샛자전거에 앉힌다. 자, 유채꽃 가득한 들길을 달리자.


- 바람이 제법 세게 분다. 바람결에 꽃내음이 물씬 묻어난다. 센 바람을 맞받으면서 발판을 빨리 굴리지 않는다. 찬찬히 발판을 밟는다. 천천히 꽃을 바라보고 꽃내음을 맡는다. 천천히 들길을 가로지른다.


- 면소재지를 찍은 뒤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아이는 수레에서 잠든다. 큰아이는 유채꽃 들길을 걷고 싶다 말한다. 나도 자전거에 내려서 큰아이와 함께 걷는다. 걷다가 쉬고 또 걷다가 쉰다. 일부러 천천히 걷고 일부러 선다. 한창 무르익는 노란 꽃물결이 곱다. 해마다 봄에, 사월에 맞이하는 어여쁜 빛이다. 올해 사월이 지나면 이 유채꽃은 모두 저물 테지. 마을마다 논을 갈고 논삶이를 하느라 부산하겠지. 바람소리만 흐른다. 새소리는 얼마 흐르지 않는다. 낮에 봉서마을부터 동백마을로 걸어오는 길에 제비 여섯 마리를 들판에서 보았지만, 그뿐 더는 볼 수 없다. 지난해에 마을마다 헬리콥터로 항공방제를 엄청나게 해대면서 제비가 거의 다 죽었기 때문일까. 제비들이 농약바람에 견딜 수 없으니 이곳으로는 오지 말자고 서로 얘기했을까. 너른 들판을 아이와 함께 거닐면서 제비춤을 볼 수 없으니 몹시 서운하고 쓸쓸하다.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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