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랑 놀자 24] 길장사



  가게를 내어 장사를 하는 이웃이 있습니다. 가게를 내지 못하고 길에서 장사를 하는 이웃이 있습니다. 가게를 낼 만한 돈과 살림이 되기에 가게를 내고, 가게를 낼 만큼 돈과 살림을 갖추지 못했으니 길에서 장사를 합니다. 길을 갑니다. 길을 가는 사람은 길손입니다. 길손은 길에서 길밥을 먹습니다. 길밥을 먹으려고 길에서 장사를 하는 길장수꾼을 찾습니다. 길장수꾼은 길손한테 길장사를 합니다. 들에서는 들일을 하고 바다에서는 바닷일을 하듯이, 길장사를 하는 이웃은 길일을 합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지만 씩씩하고 꿋꿋하게 길 한쪽에서 빙그레 웃고 노래하면서 길을 밝힙니다. 이 길에 길빛이 감돌고 길노래가 흐릅니다. 길장사를 하는 길사람은 서로 길벗이 됩니다. 4347.4.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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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비에 쓰러진 갓꽃



  납작하게 엎드린 채 살그마니 고개를 내미는 들꽃이 있다. 껑충껑충 높이높이 꽃대를 올리는 들꽃이 있다. 저마다 새끼를 낳는 모습이 다르다. 저마다 씨앗을 퍼뜨리는 길이 다르다. 들풀 가운데 갓과 유채는 퍽 남다르다 할 만큼 꽃대를 높이높이 올린다. 어른 키보다 높게 꽃대를 올리곤 한다. 맨 밑둥은 무척 두껍다. 아이들이 갓풀이나 유채풀이 꽃대를 높다라니 올린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노라면 꼭 나무라고 느낄 만하다. 옥수수도 그렇고 해바라기도 그렇다. 아이들한테는 옥수수와 해바라기는 나무와 같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가 내리니 꽃대만 높다라니 올린 갓풀 몇 포기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 쓰러진 갓풀과 갓꽃을 바라본다. 높은 줄기와 두꺼운 밑둥을 보자니, 뿌리가 참 얕다. 이렇게 뿌리는 얕게 내면서 키는 그리 높게 올리나. 설마 쓰러지려고 키가 자라는 풀은 아닐 테지.


  풀 가운데에는 제법 두툼하다 싶은 갓꽃이 쓰러지니, 갓꽃이 쓰러진 자리에서 돋던 풀이 모조리 눕는다. 쓰러진 갓꽃을 들어 풀이 없는 자리로 옮긴다. 돌나물도 쑥도 몽땅 넘어갔다. 사람 눈으로 보자면 작은 풀끼리 넘어지고 깔린 모양새인데, 개미나 진딧물이나 무당벌레 눈으로 보자면 숲에서 우람한 나무가 쓰러지면서 작은 나무가 몽땅 넘어간 모양새가 되겠구나 싶다.


  갓꽃에 깔려 드러눕고만 풀은 어찌 될까. 커다란 갓풀줄기를 치웠으니 다시 씩씩하게 일어설 수 있을까. 풀은 한 번 밟히면 꼿꼿하게 다시 서고, 두 번 밟히면 누운 채로 살다가, 세 번 밟히면 그예 죽는다고 한다. 우리 집 풀은 어찌 될까. 한 번 깔렸으니 꼿꼿하게 다시 설 수 있을까. 갓꽃은 조금 더 버티었으면 씨앗을 맺을 수 있었을 텐데, 안쓰럽다. 4347.4.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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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52] 사월에 내리는 비

― 봄비에 젖은 나뭇잎



  사월비가 내립니다. 봄은 비가 잦은 철은 아니나, 꼭 알맞게 비가 오는 철입니다. 겨울에 딱딱하게 굳은 땅을 봄비가 녹입니다. 녹은 땅에 알맞게 촉촉한 기운이 흐르도록 때 맞추어 비가 내립니다. 봄비가 내리면서 곳곳에 둠벙이 생기고, 논에 물이 고입니다. 이때에 개구리는 새로 깨어나고 알을 낳을 수 있습니다. 개구리한테 새 숨결을 불어넣는 봄비입니다. 풀잎도 나뭇잎도 봄비를 맞으면서 한결 싱그럽습니다. 볕만 드리우면 몇 가지 풀은 살짝 억척스레 올라옵니다. 이때에 봄비가 한 줄기 훑으면 억척스럽던 풀은 고개를 꺾습니다. 나무는 봄비를 먹으면서 줄기와 가지가 굵습니다. 이른봄에 꽃을 피웠다가 일찌감치 꽃송이를 떨군 나무는 열매가 잘 익도록 물을 듬뿍 빨아들입니다. 그야말로 지구별 들과 숲에 싱그러우면서 새로운 빛을 베푸는 봄비입니다.


  봄비를 안 반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봄비는 온갖 숨결을 살리는 빗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올봄 사월에 한국에 커다란 일이 터졌습니다. 바다에서 배가 한 척 가라앉았습니다. 참 많은 아이들이 바닷속에 잠겼습니다. 바닷속에 잠긴 아이들을 건져야 할 텐데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가냘픈 아이들을 건지는 일이 힘겹습니다.


  이 봄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이 봄비는 무엇일까요. 이 봄비는 내려야 할 때에 내리는 비입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가라앉은 배는 가라앉지 말아야 하는데 가라앉은 배입니다.


  시골에서는 비를 맞으며 땅을 갑니다. 이 비와 함께 땅을 갈아야 푹푹 잘 들어가고 깊이 갈리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는 이 비를 기다리며 씨앗을 심고 모를 냅니다. 고춧모를 심든 토마토 모를 심든 오이 모를 심든, 이 비가 내리기를 기다려 여러 가지 씨앗을 심고 모를 냅니다.


  봄에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사월에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사월은 씨앗을 심는 달이기에, 사월에 씨앗을 심지 않으면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밥을 얼마든지 굶겠다고 한다면, 밥을 안 먹고 견디겠다고 한다면 사월에 비가 안 내리기를 바랄 수 있겠지요.


  빗물은 초피꽃을 적십니다. 빗물은 느티꽃을 적십니다. 빗물은 가시나무 꽃을 적시고, 장미나무 꽃을 적십니다. 빗물은 우리 온몸을 적시고 우리들 마음을 살살 달래면서 내립니다. 온 땅에 푸른 빛이 짙도록 북돋우는 사월비입니다. 기쁜 마음에도 아픈 마음에도 푸른 숨결이 감돌 수 있기를 빕니다. 4347.4.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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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제 삶터를 사진으로 찍는다. 제 삶터가 아니라면 사진으로 찍지 못한다. 제 삶터가 아닌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겉스쳐 지나가는 기운이 물씬 흐른다. 처음 발을 디디는 곳이기에 내 삶터가 안 될 수 없다. 오래도록 눌러앉은 데라서 내 삶터가 될 수 없다. 스스로 사랑하고 좋아하며 아끼는 마음이 될 때에 비로소 ‘내 삶터는 어디인가?’ 하는 물음에 스스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나고 자란 곳을 찍어야 가장 잘 찍지 않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며 아끼는 곳을 찍어야 가장 잘 찍는다. 이 골목을 알거나 저 동네를 알기에 더 낫거나 멋지거나 아름다운 사진을 낳지 않는다. 마음속에 기쁨과 웃음과 사랑과 눈물과 노래가 있을 때에 이야기 한 자락 살포시 담으면서 아름다운 사진을 낳는다. 사진책 《북촌》은 어떤 넋으로 찍은 사진을 그러모았을까. 4347.4.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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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나의 서울
한정식 지음 / 눈빛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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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소리 듣는 책읽기



  영화 〈어거스트 러쉬〉를 이틀에 걸쳐 두 차례 본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인터넷으로 살펴보니 ‘씨네21’이라는 잡지에 어떤 전문비평가가 매긴 평점이 나온다. 10점 만점에 5점이란다. 독자평점은 10점 만점에서 9점이라고 나온다. 그나마, 이 영화를 놓고 기자나 전문비평가나 영화평론가가 매긴 점수는 ‘씨네21’이 하나 있고, 거의 없지 싶다.


  그러면 나는 영화 〈어거스트 러쉬〉에 점수를 얼마쯤 주는가? 글쎄, 나는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즐겁게 본 영화에 왜 점수를 줄까? 그저 ‘즐거운 웃음’과 ‘즐거운 눈물’이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일곱 살 큰아이와 함께 두 차례 볼 수 있던 만큼, 10점 만점에서 9.5점을 주고 싶다. 0.5점은 영화 끝자락에서 조금 더 마음을 쓰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깎는다.


  어쨌든, 영화 〈어거스트 러쉬〉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주인공인 열두 살 어린이가 ‘소리를 듣’고 ‘소리에 웃’으며 ‘소리를 노래하’는 이야기가 흐른다. 아이는 소리를 사랑한다. 아이는 소리에서 빛을 찾는다. 아이한테 찾아드는 소리는 아이 어버이가 들려주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아이 마음속에서 퍼져나오는 소리요, 온 우주에서 흐르는 소리이기도 하다.


  어제와 오늘 빗소리를 듣는다. 빗물이 우리 집 처마를 따라 흐르다가 줄줄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빗방울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를 듣고, 비가 오니 온 들과 논과 숲에서 개구리가 깨어나 왁왁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 빗줄기 사이로 먼 멧자락에서 소쩍새 우는 소리까지 듣는다.


  아아,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가. 나는 이 밤에 개구리 노래와 소쩍새 노래와 사월비 노래를 들으면서 도무지 잠들지 못한다. 이 아름다운 소리가 가슴을 적시고 후벼파며 어루만지기에 즐겁게 웃고 운다. 그러나, 두 아이가 나를 기다린다. 두 아이를 먼저 재우는데,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아버지 언제 와요? 곧 와요? 얼른 와요. 같이 자요.” 하고 부른다. 나는 아이들 사이로 파고들어 자야 한다. 나는 아이들 사이에서 달게 꿈나라로 접어들어 아이들과 웃고 노래하련다. 비가 흐르고, 노래가 흐르며, 사랑이 흐른다. 작은 초피꽃에 떨어진 빗방울을 바라보며 가슴이 찡한 하루였다. 4347.4.2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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