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 이야기 -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는 16가지 불교 철학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4
강호진 지음, 스튜디오 돌 그림 / 철수와영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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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73



그림을 읽는 눈

―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 이야기

 강호진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4.5.6.



  마음을 다스리는 까닭은 우리 마음이 아름다운 곳으로 흐르면서 삶을 빛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까닭은 우리 마음에 티끌이나 부스러기가 깃들지 않도록 하면서 따사로운 사랑이 깃들도록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느냐를 놓고 먼먼 옛날부터 무척 꼼꼼히 살피거나 헤아렸습니다. 아이 마음에 그려 넣는 빛에 따라 아이들이 하루를 받아먹고 삶을 가꾸기 때문입니다. 어린이한테 한국말을 옳고 슬기롭게 가르치면, 어린이는 이른 나이부터 한국말을 옳고 슬기롭게 써요. 어린이를 일찍부터 학원에 넣어 무언가 가르치려 하면, 어린이는 이른 나이부터 학원에서 무언가를 일찌감치 배우겠지요.


  예부터 어느 시골에서나 아이들은 낫질과 칼질을 일찍부터 합니다. 절구질과 방아질도 일찍부터 하고, 지게질이나 소먹이기를 일찍부터 해요. 늘 바라보던 일이요, 으레 곁에서 지켜보던 일이며, 어느새 어버이한테서 물려받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 불교에서 대승보살의 수행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 인욕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든 무작정 참는 미련한 견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경에 처해서도 스스로를 설득시킬 수 있는 지혜와 부분이 아닌 전체를 꿰뚫어보는 통찰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시작도 끝도 없는 이 세계에서 제가 어떤 모습과 어떤 이름으로 나고 죽길 반복해서 이 자리에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수없이 나고 죽길 반복하는 과정에서 너의 부모가 과연 한두 분이었겠느냐?” ..  (22, 27쪽)



  오늘날 어린이는 시험문제를 잘 풉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스마트폰을 잘 다룹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버스나 지하철을 잘 탑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연예인 이름이나 대중노래를 잘 외웁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운동경기 소식이나 인터넷게임 이야기를 잘 주고받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어린이는 무엇을 못 할까요. 오늘날 어린이는 무엇을 모를까요.


  아마 오늘날 어린이는 밥을 지을 줄 모르겠지요. 오늘날 어린이는 빨래를 손수 하거나 걸레를 쥐어 방바닥을 훔칠 줄 모르겠지요. 오늘날 어린이는 씨앗을 심거나 풀을 뜯거나 나무를 할 줄 모르겠지요. 오늘날 어린이는 지게를 지거나 칡넝쿨로 나뭇단을 묶을 줄 모를 테고, 오늘날 어린이는 노젓기나 그물엮기를 못 하리라 느낍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어린 동생이나 아기를 얼마나 돌볼 줄 알까요. 오늘날 어린이는 국을 끓이거나 김치를 담글 줄 알까요. 오늘날 어린이는 물레를 잣거나 베틀을 밟거나 바느질로 옷을 지을 줄 알까요.


  오늘날 어린이는 나이를 먹으면 편의점에서 알바를 한다든지 크고작은 심부름을 할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나, 스스로 삶을 짓는 일은 못 하리라 느낍니다. 남이 시켜서 일을 한 뒤 돈을 벌 수는 있어도, 스스로 흙과 풀과 나무와 물을 만지면서 삶을 가꾸지는 못 하리라 느껴요.



.. 불교는 전생의 업이나 윤회를 영원불변한 절대적인 체계로 바라보고 그것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러한 윤회와 업력의 틀을 어떻게 타파하고 벗어날 것인가를 고민하는 종교입니다 … 불자에게 관음보살의 성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여자라고 답할지도 모릅니다. 설화나 불교 영험담에서 관음보살은 여자의 몸으로 자주 나타날 뿐만 아니라 불화나 조각상에서도 통통한 살집,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 치렁거리는 목걸이와 팔찌 등을 차고 있어 여자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대승보살 조각상의 원형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보살은 아름답고 수려한 남성을 표현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대승에서 성별은 의미가 없습니다 ..  (77, 82쪽)



  강호진 님이 쓴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 이야기》(철수와영희,2014)를 읽습니다. 강호진 님은 절집에 있는 그림마다 어떤 이야기가 서렸는가를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쉽고 알맞게 풀어냅니다. 그냥 그린 그림이란 없고, 아무 뜻이 없이 그린 그림이란 없다고 밝힙니다. 그림마다 깊고 너른 속뜻이 있고, 그림마다 온갖 숨결과 노래가 있다고 보여줍니다.


  불교에서 다루는 여러 이야기를 두루 헤아렸으면, ‘절집 그림’을 누구나 읽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불교 경전이나 책을 두루 읽었다 하더라도, 절집 그림을 모두 슬기롭게 읽을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절집 그림이든 예배당 그림이든 골목집 그림이든, 그림을 읽으려면 그림을 읽는 눈이 있어야 해요. 삶을 읽고 사람을 읽으며 사랑을 읽는 눈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림을 읽을 수 있습니다.



..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인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 이 이야기는 항시 문수보살을 곁에 두고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우리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곁에 늘 있지만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문수보살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들 삶 속에서 하찮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누군가가 바로 문수보살입니다 … “아무리 작은 악일 지라도 짓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다 행하라.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 “세 살 아이도 아는 말이지만, 팔순 노인도 실천하기엔 어려운 말이라오.” ..  (90, 129, 156쪽)



  그림은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림으로 어떤 지식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까닭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그려서 나누는 까닭은 이웃(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도 천주교도 개신교도 천도교도 지식이나 종교라는 틀에 갇힐 때에는 삶을 밝히지 못합니다. 어느 믿음이든 ‘종교’가 아닌 ‘삶’이라는 자리에서 이웃과 손을 맞잡고 함께 웃는 노래가 될 때에 이야기로 피어납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어머니가 지어서 차리는 밥이란 ‘영양소’가 아닌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마련해서 끓이는 국이란 ‘영양소’가 아닌 ‘사랑’이에요. 아이와 함께 노는 어버이는 아이와 ‘놀아 주지’ 않습니다. 어버이는 아이와 ‘함께 놀’ 뿐입니다.


  빼어나거나 훌륭한 이슬떨이가 있어서 어리숙한 사람을 깨우치거나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면서 숨결입니다. 다 함께 흙을 가꿉니다. 다 같이 살림을 꾸립니다. 서로서로 돕고 아끼면서 보금자리를 이룹니다. 손에 손을 모아 두레와 품앗이를 해요. 마음에 마음을 보태어 마을을 이루어요.



.. “만일 그대가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 불교를 비방했다면 주인의 명령에 잘 따르는 개와 다름이 없고, 그대 스스로의 의지로 비방을 하였다면 잘 알지도 못하고서 비방한 것이니 스스로를 크게 속인 것입니다.” … 불교의 수행자는 마치 연꽃처럼 꼭 세속의 환경을 벗어날 필요가 없다는 것, 즉 그 마음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상징입니다 … 《유마경》은 또 정토 또한 별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바로 이곳이 정토가 된다는 뜻입니다 ..  (135, 149, 170쪽)



  학교교육은 대학입시를 바랄 때에 ‘교육’이 아닙니다. 학교교육은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가꾸도록 이끌 때에 ‘교육’입니다. 대학입시를 이끄는 학교는 굴레이거나 쳇바퀴입니다. 회사원이 되도록 이끄는 학교는 감옥이거나 노예제입니다.


  불교는 무엇이고, 종교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절집 그림은 무엇일까요. 왜 종교는 사람들 눈을 어둠으로 가릴까요. 왜 슬기는 사람들 눈을 빛으로 밝힐까요.


  《유마경》 그림이 이야기하듯이 수행자는 어디에서나 수행을 합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흙을 일구면서 언제나 수행입니다. 경전을 읊을 때에 수행이 아닙니다. 절집에 머물 적에 수행이 아닙니다. 경전을 읊거나 절집에 머물 적에는 훈련을 하겠지요. 훈련을 하는 까닭은 삶을 짓는 힘을 얻고 싶기 때문이겠지요.


  절집 그림은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이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서 삶을 짓는 힘을 스스로 얻도록 돕는 빛을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삶을 가꾸면서 빙그레 웃고 어깨동무하는 기쁨을 나누도록 돕는 빛을 살며시 이야기합니다. 4347.6.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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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138] 이웃과 함께



  네가 웃으면서 내가 웃고

  내가 노래하면서 네가 노래하는

  이웃과 함께.



  내 일과 남 일은 따로 없다고 느껴요. 이웃이 아픈데 나 또한 안 아플 수 없지 싶어요. 이웃이 즐거우면 나 또한 안 즐거울 수 없구나 싶어요. 아름다운 책이 곁에 있기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먹고 나누면서 마음을 달래는구나 싶어요. 아름다운 이웃이 둘레에 있기에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고 속삭이면서 마음을 가꾸는구나 싶어요. 느긋하고 따사로운 하루가 지나갑니다. 4347.6.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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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언제나 곧게 잇는 삶



  오늘날 시골에서 삼월이 되면 무엇을 할까요? 사월이 되거나 오월이 되면, 또 유월이 되거나 칠월이 되면 무엇을 할까요?


  오늘날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분이라면, 또 오늘날 시골에서 늙은 어매와 아배가 흙일을 하는 분이라면, 달마다 무엇을 하는지 알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시골에서는 다달이 그 달에 맞게 ‘농약을 골라서 뿌립’니다. 일본 영화 〈기적의 사과〉를 보면, 일본에서는 능금밭마다 헛간에 ‘달마다 뿌릴 농약 일람표’를 붙이고는 이대로 척척 농약을 뿌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굳이 일본 영화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다 알 만합니다. 한국에서도 능금밭이건 배밭이건 포도밭이건 달마다 뿌리는 농약이 골고루 있어요. 어느 열매는 스물 몇 가지 농약을 친다 하고, 줄이고 줄여도 열 몇 가지 농약을 쳐야 한다고도 합니다.


  곰곰이 따지면, 우리가 먹는 열매는 능금이나 배나 포도는 아니지 싶어요. 우리가 먹는 알맹이는 딸기나 수박이나 참외가 아니지 싶어요. 우리는 온갖 농약을 먹고, 갖가지 항생제를 먹으며, 수많은 비료를 먹는구나 싶어요.


  유월로 접어든 시골에서는 모내기로 바쁩니다. 그러나 ‘모내기가 바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시골에서는 손모를 내지 않고 기계모를 내기 때문입니다. 모를 심는 기계를 타는 일꾼하고 ‘모심개(이앙기)’라는 기계만 바쁩니다. 기계로 논을 갈고, 기계로 논을 삶으며, 기계로 모를 심는 오늘날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시골에서는 오월이든 유월이든 논노래를 듣지 못합니다. 오늘날 시골에서는 오월과 유월에 귀가 찢어지도록 시끄러운 기계 소리만 듣습니다. 게다가 시골 할배는 으레 경운기를 몹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걸어서 들일을 가는 시골 할배는 아주 드물어요. 소를 몰며 들일을 하려는 시골 할배는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도날드 홀 님이 쓴 글에 바바라 쿠니 님이 그림을 그린 《달구지를 끌고》(비룡소,1997)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997년에 나왔고, 미국에서는 1979년에 나왔습니다. 이 그림책은 지난날 미국 시골에서 ‘시골사람’이 달마다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를테면, “4월에 농부가 깎아 두었던 양털 한 자루. 농부의 아내가 베틀로 짠 숄. 4월에 농부가 깎은 양털을 물레에 자아 털실을 만들고, 그것을 베틀에 짠 숄이지(4쪽).” 하고 이야기해요.


  그림책 《달구지를 끌고》는 책이름 그대로, 깊디깊은 숲속에서 살아가는 네 식구 가운데 ‘아버지’가 달구지에 짐을 잔뜩 싣고 도시로 물건을 팔러 다녀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네 식구는 한겨울에는 단풍나무 단물을 얻어서 졸이고, 삼월부터 시월까지 바지런히 온갖 일을 합니다. 달에 맞는 일을 합니다. 철에 맞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네 식구는 일을 하며 힘들다거나 고되다거나 지겹다고 여기지 않아요. 그저 이녁 스스로 삶을 누립니다.


  먹을 만큼 거둡니다. 먹고 남는 것을 달구지에 싣고 도시에 내다 팝니다. 가만히 따지면, 숲집에서 살아가는 네 식구는 굳이 도시에 가지 않아도 돼요. 열흘에 걸쳐 천천히 걸어서 도시로 가고, 다시 열흘에 걸쳐 천천히 걸어서 시골 숲집으로 돌아오는데, 도시에서 사오는 물건이란 기껏 ‘사탕 한 꾸러미’입니다. 무쇠솥 한 벌, 주머니칼 하나, 바늘 몇을 더 장만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굳이 도시까지 나가서 사지 않더라도 시골 숲집에서 스스로 만들 수 있습니다.


  “농부의 가족 모두가 만든 양초. 아마 섬유로 짠 리넨 천. 농부가 직접 쪼갠 널빤지. 농부의 아들이 부엌칼로 깎아 만든 자작나무 빗자루(6쪽).”를 달구지에 싣고 나가서 판다고 해요. 농사꾼 아저씨는 도시로 나가서 달구지에다가 소까지 모두 팔고 맨몸으로 돌아온다고 해요.


  아하, 그렇군요. 어린 소가 자라니 늙은 소는 도시에 파는 셈이로군요. 시골살이에 알맞게 살림을 줄인 셈이로군요. 숲살이에 걸맞게 살림을 도시 이웃한테 나누어 준 셈이로군요.


  도시에서 지내는 사람은 ‘단풍나무 단물’을 손수 졸여서 먹을 수 없습니다. 도시에는 나무도 없고 나무를 벨 수도 없으니, 시골사람이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은 널빤지를 사야 합니다. 도시에서는 양배추나 감자를 심을 땅이 없으니, 시골사람이 심어서 거둔 양배추나 감자를 사다가 먹어야 합니다.


  참말 도시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참말 도시사람은 시골사람 없이 어떻게 먹고살는지 궁금합니다. 시골에서 시골사람이 흙을 일구어 곡식과 열매를 거두지 않으면, 도시사람은 모조리 굶겠지요. 대통령도 굶고 시장도 굶어요. 공무원도 굶고 회사원도 굶어요. 의사도 판사도 교수도 학자도 기자도 모두 굶어야 합니다. 도시에서 아무리 내로라하고 으쓱거린다 하더라도, 시골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밥을 안 먹고 살 수 있는 도시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러면, 오늘날 한국은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 봅니다. 한국에서 시골지기는 어떤 대접을 받고, 한국에서 도시지기는 어떤 곳에 우뚝 서서 시골지기를 내려다보거나 깔보는지 헤아려 봅니다.


  한국에서 정치를 하는 이들은 시골지기한테 한 마디도 묻지 않고 자유무역협정을 맺습니다. 한국에서 행정을 하는 이들은 시골지기한테 한 마디도 듣지 않고 쌀값을 세우고 농협을 거쳐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를 거두어들입니다. 한국에서 경제개발을 하는 이들은 시골지기한테 한 마디도 여쭙지 않고 4대강사업을 밀어붙입니다.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할는지요. 경제성장은 얼마나 해야 할는지요. 공장은 얼마나 지어야 할는지요. 고속도로와 발전소는 언제까지 늘려야 할는지요. 왜 자꾸 아파트만 때려지어야 할는지요.


  언제나 곧게 잇는 삶이 아니라면, 삶빛이 피어나지 못합니다. 날마다 새로우면서 언제나 곧게 잇는 삶이 아니라면, 삶꽃이 돋아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바람을 마십니다. 우리는 모두 물을 들이켭니다. 우리는 저마다 밥을 먹습니다. 우리는 늘 햇볕을 쬡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흙을 밟습니다. 그렇지만, 학교와 사회와 방송과 인터넷과 책에서는 ‘바람·물·밥·해·흙’을 옳게 보여주거나 바르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스스로 어떤 삶을 일구면서 아이들한테 어떤 꿈을 물려주는지 아리송합니다.


  “3월이 되자, 농부의 가족은 단풍나무에서 수액을 받아 끓이 끓여 졸여서 단풍나무 설탕을 만들었어(32쪽).” 하고 이야기하는 그림책을 살며시 덮습니다. 우리는 삼월에 하는 일과 유월에 하는 일을 얼마나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4347.6.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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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57] 딸기알 함께 먹는 이웃
― 딱정벌레와 애벌레와 개미와


  해마다 오월을 맞이하면 우리 식구는 들딸기 먹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날마다 들딸기를 실컷 먹던 어느 날, 며칠쯤 바깥마실을 하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면, 누군가 우리 들딸기밭에 몰래 들어와서 ‘덜 여문 딸기’까지 모조리 훑어 가져갑니다.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그리고 올해에도 이런 일이 되풀이됩니다. 아이들과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다녀오느라 여러 날 집을 비우니, 우리 들딸기밭에 며칠 나가지 못하는데, 꼭 이 즈음 누군가 모조리 훑습니다.

  날마다 바구니를 그득 채울 만큼 들딸기를 많이 거두던 들딸기밭이 텅 빕니다. 우리 마을에서 어떤 분이 이렇게 우리 들딸기를 모조리 가로챘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함께 누리거나 같이 즐기는 마음이 없는 모습을 읽습니다.

  씨가 말랐을 뿐 아니라, 들딸기넝쿨이 많이 짓밟혀 더 나기 어려운 자국을 살펴봅니다. 덜 여문 들딸기까지 따더라도, 이제 막 영글려 하는 넝쿨은 그대로 두어야 할 텐데, 이런 넝쿨까지 그예 짓밟은 자국을 보면 부아가 치밀기보다 안쓰럽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런 몸가짐이 되었을까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런 매무새가 되었을까요.

  군데군데 들딸기알이 몇 남습니다. 벌써 들딸기를 마지막으로 맛보는 셈인가 서운하지만, 아이들한테 몇 알이라도 맛보게 하려고 찬찬히 살펴봅니다. 그런데, 몇 안 남은 들딸기알마다 딱정벌레와 애벌레가 잔뜩 달라붙습니다. 개미도 달라붙습니다. 그래, 그렇지. 이 들딸기알은 사람만 먹지 않아. 너희들 딱정벌레도 먹고 애벌레도 먹으며 개미와 진딧물도 먹지. 풀숲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웃이 함께 먹지.

  벌레가 앉아서 단물을 빨아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봅니다. 이 아이들이 들딸기알 먹는 모습을 보니, 이 아이들을 휘휘 털어서 훑을 수 없습니다. 이 아이들이 먹을 작은 들딸기알조차 모조리 훑었으니, 풀벌레는 얼마나 서운하며 슬플까요. 예부터 콩을 석 알씩 심을 적에 사람은 한 알만 먹도록 한다고 했지만, 풀벌레가 먹을 들딸기알을 조금도 남기지 않는 오늘날 시골사람 손길은 어떤 빛이 될는지 다시금 곱씹습니다. 4347.6.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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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6-08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딸기인가요

파란놀 2014-06-08 09:35   좋아요 0 | URL
네, 산딸기라고 할 수 있어요.
뭐, 그래도 좋은 들밥
잘 먹으셨기를 바라는데,
덜 여문 것까지 다 훑은 까닭은
효소로 담그거나 술을 담그려는 목적 때문이지 싶어요.
그러니 한 알이라도 더 훑어서 몽땅 가져가려고 했겠지요 ^^;;

하늘바람 2014-06-08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못됐네요
 

자리공꽃 책읽기


  자리공꽃이 핀다. 우리 도서관 풀숲에 한 포기, 또는 한 그루 올라온다. 이 자리공은 어떻게 이곳까지 퍼졌을까. 바람 따라 씨앗이 날렸을까. 농기계나 짐차에 씨앗이 달라붙어 이웃 논으로 퍼졌다가, 다시 이곳까지 왔을까. 어느 모로 보면 생뚱맞다 싶은 데까지 퍼진 자리공이다. 이 아이는 앞으로 어찌 될까. 더 퍼질까. 더 번질까. 더 뻗을까. 아니면, 다른 풀이 자리공은 더는 기운을 내지 못하도록 휘감거나 덮을까.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를 어마어마하게 들과 숲에 퍼부은 지 쉰 해가 넘는다. 새마을운동이 휘몰아친 뒤부터 이 나라 시골이 무너진다. 새마을운동은 아직 수그러들지 않는다. 독재정권 깃발을 나부끼던 이가 권력을 휘어잡다가 총알에 맞아 죽었으나, 이녁 딸이 커서 새롭게 대통령이 되면서 새마을운동 깃발은 더 기운차게 펄럭인다. 이 나라 시골에서 농약과 비료가 사라질 낌새는 보이지 않고, 석유 쓰는 기계에만 기대는 농업은 잦아들지 않는다.

  자리공을 베거나 자리공이 자라던 자리에 끔찍한 농약을 퍼붓는대서 자리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시골사람 스스로 흙일을 바꾸어야 자리공이 사라질 수 있다. 땀방울과 사랑을 흙에 담을 때에 이 땅에 걸맞을 풀이 자란다. 꿈과 노래를 들과 숲에 들려줄 적에 이 땅에 알맞을 풀이 돋는다. 무당벌레 한 마리가 자리공꽃에 앉아 볼볼볼 기면서 꽃가루를 먹는다. 무당벌레한테는 새삼스럽다 싶은 꽃가루맛일 테지. 4347.6.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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