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카놀이 1 - 함께 부르니 즐거워



  누나 따로 동생 따로 불던 하모니카였다가, 이제 둘이 함께 부는 하모니카가 된다. 일곱 살과 네 살이 어우러지는 가락은 어떤 노래가 될까. 둘은 서로 어떤 소리를 귀로 담고 눈으로 들으며 머리와 가슴과 온몸에 빛을 내뿜을까. 네 살 산들보라도 머잖아 누나처럼 하모니카를 불면서 살몃살몃 발을 구르거나 춤을 출 수 있으리라 본다. 4347.6.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놀이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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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보라도 하모니카 불 테야


  하모니카를 불며 춤추는 누나를 보니 산들보라도 하모니카를 불고 싶다. 아이가 둘이니 하모니카도 둘. 누나는 작은 하모니카를 쓰고 동생은 큰 하모니카를 쓴다. 누나는 꽤 익숙하게 하모니카를 불고, 동생은 후후 바람을 내뿜느라 바쁘다. 4347.6.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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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름벼리는 하모니카 춤추기


  일산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노는 사름벼리한테 작은 하모니카를 꺼내서 건넨다. 사름벼리가 아주 어릴 적에 선물받은 하모니카이다. 아무 데나 굴리지 않도록 늘 내 가방에 건사해서 들고 다니다가, 이제 일곱 살이요 사름벼리 가방이 따로 있으니 스스로 건사하라면서 물려준다. 사름벼리는 ‘내 하모니카’라고 말하면서 신나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른다. 4347.6.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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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마음


  누군가한테 무엇을 물으려 할 적에는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내 생각을 ‘심어’서는 안 됩니다. 물으려 했으니 물어야지요. 누군가한테 무엇을 묻는다고 할 적에는 서로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주고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녁 눈길과 마음을 먼저 듣고 나서, 나는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말할 노릇입니다.

  “바다에 오니 좋지?”와 같은 말은 묻는 말이 아닙니다. “바다에 오니 어때?”와 같은 말이 묻는 말입니다. “그 사람 참 나쁘지?”와 같은 말은 묻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 어때?”와 같은 말이 묻는 말입니다.

  아이들한테 “너는 어머니가 좋아? 아니면 아버지가 좋아?” 하고 말한다면, 이런 말도 묻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좁은 틀에 가두는 덫일 뿐입니다. 아이들 마음을 알고 싶다면 “너는 어머니 어때? 아버지는 어때?” 하고 말해야지요. 묻는다고 하는 사람이 ‘생각한 지식’을 심으려 할 때에는 서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도 거북하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실마리를 풀지 못합니다.

  묻는 마음은 알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물을 적에는 언제나 실마리가 함께 태어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쟁은 나쁘지요?” 하고 말한다면 이 말은 이대로 끝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좋지요?” 하고 말할 때에도 이 말은 이대로 끝입니다. 더 없습니다. ‘나쁘다’나 ‘좋다’는 말로 스스로 못을 박으면서 읊는 말이니 아무것도 새롭게 태어나지 못합니다.

  “전쟁은 무엇인가?”라 말하거나 “사랑은 무엇인가?”라 말할 때에 비로소 생각이 자랍니다. 전쟁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거나 살피면서 생각이 자랍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스스로 돌아보거나 되새기면서 생각이 큽니다.

  제대로 물을 수 있어야 제대로 바라봅니다. 제대로 묻지 못한다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제대로 묻는 마음이란, 제대로 삶을 가꾸려는 마음입니다. 제대로 묻는 몸가짐이란, 제대로 길을 찾으면서 빛을 밝히려는 몸가짐입니다.

  “삶은 좋은가, 또는 나쁜가?” 하고 못을 박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못을 박는 일은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삶은 무엇인가?” 하고 스스로 물으면서, 스스로 삶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나한테 삶은 무엇이고, 내 이웃한테 삶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생각해야 제대로 압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못박기(가치판단·정의·규정)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전쟁은 나쁘다”와 같은 말은 지식(죽은 기록)은 될 수 있어요. “사랑은 좋다”와 같은 말도 지식(죽은 종교)이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이 되는 말은 생각을 낳지 않으니, 왜 ‘나쁘거나 좋은가’를 깨닫지 못한 채 머릿속에 가득 쌓입니다. 왜 ‘나쁘거나 좋은가’를 알아차리지 못하기에, 스스로 전쟁이나 사랑과 마주했을 적에 이것이 어떻게 나쁘거나 좋은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바르게 바라보지 못해요.

  꽃은 무엇일까요? 숲은 무엇일까요? 도시는 무엇일까요? 농약은 무엇일까요? 남이 적어 놓은 ‘죽은 지식’에 기대어 머릿속을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삶일 때에는 하루가 어떻게 찾아올까요.

  스스로 생각하면서 바라보아야 해요. 스스로 생각하면서 바라보고 느껴야 해요. 스스로 하루를 새롭게 빚어야 해요. 언제나 오늘을 새롭게 맞이하면서 삶을 가꿀 수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날마다 스스로 물어야지요. 날마다 스스로 삶을 묻고 사랑을 물으면서 이야기를 길어올려야지요. 4347.6.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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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 중국집에서



  긴 바깥마실을 마치고 아이들과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큰아이가 시외버스를 몹시 고단하게 여기기에 이번에 인천에서 고흥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기차를 탄다. 그런데 영등포에서 탄 무궁화 기차는 고속기차를 먼저 보내야 한다면서 자그마치 이십 분이 늦는다. 순천 기차역에서 순천 버스역으로 걸어가고, 순천 버스역에서 시외버스로 갈아타서 고흥에 닿으니 저녁 일곱 시 반. 이번에는 큰아이가 멀미를 하지 않아 고마운데, 두 아이 모두 배가 고프겠다. 읍내에서 바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갈는지, 밥을 먹고 군내버스 막차를 타고 집으로 갈는지 생각하다가, 밥을 먹기로 한다. 졸음을 털지 못한 아이들을 안고 얼른 뒤 중국집으로 간다. 밥과 국이 있는 곳으로 갈까 싶기도 했지만, 중국집에서 가락국수하고 달걀밥을 시켜도 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식구가 으레 가던 중국집은 문을 닫고 순대국집으로 바뀌었다. 버스역 건너편 중국집에 갔더니 주방장 아저씨가 병문안 가셔야 한다며 밥은 못 시키고 짜장면만 두 그릇 시킨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생각한다. ‘그래, 다 괜찮아. 아이들이 짜장면 먹은 지 제법 되었지? 모처럼 짜장면만 먹으면 되지.’ 중국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미안하다면서 밥 한 그릇을 덤으로 준다. 짜장면 양념에 밥을 비벼서 큰아이와 작은아이를 먹인다. 차를 오래 탄 탓인지 아이들이 얼마 못 먹는다. 나도 얼마 못 먹는다. 웬만해서는 밥을 안 남기고 다 먹는데, 아니 밥을 남기는 일이 없는데, 차마 다 비우지 못한다.


  밥을 남긴 아이가 ‘칸쵸’ 과자를 찾는다. 시외버스를 내린 뒤 버스역 가게에서 이 과자를 보고는 먹고 싶단 말을 했는데, 밥을 남기고서 다시 과자를 얘기한다. 그래, 네 마음에서는 밥보다는 그 과자가 떠오르고, 밥은 넘어가지 않아도 과자는 넘어간다는 소리로구나. 아무튼 과자를 장만한다. 버스표를 끊고 저녁 여덟 시 막차를 타고 집으로 간다. 집에 닿아 아이들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니 아이들도 몸과 마음이 많이 풀리면서 졸음이 확 쏟아졌지 싶다. 토닥토닥 재운다. 곧 잠든 아이들은 과자를 사 놓았어도 ‘과자 먹을 생각’을 못 한다. 이튿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과자 생각을 다시 해낸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아이들과 집까지 씩씩하게 돌아가는 일만 헤아리느라 힘을 아끼면서 사진을 한 장도 안 찍었다. 읍내 중국집에 닿아서야 비로소 ‘아이들과 움직이는 삶’을 두 장 사진으로 담았다. 집에 닿아서도, 이튿날이 되어서도 사진기를 손에 쥘 생각을 한참 못 했다. 4347.6.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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