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가는 소리


  두 아이 이를 고치면서 ‘이 가는 소리’를 다스리려고 애쓴다. 치과에 가기 앞서까지 큰아이 ‘이를 가는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아이가 고단할 적에 이를 가는구나 하고만 여겼다. 이제는 아이가 이를 갈 적마다 곧바로 잠에서 깨어 아이 볼을 토닥이면서 “이는 예쁘게 그대로.” 하고 말한다. 밤마다 열 차례 즈음 잠에서 깨어 이렇게 이 말을 읊는다. 간밤에는 얼추 십 분이나 이십 분마다 깨어 이 말을 읊었지 싶다. 도무지 잘 수 없어 부시시 일어나니 새벽 세 시. 그래도 다섯 시간은 누웠네. 재미있다면, 도무지 자다 깨다 하기 힘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 뒤 두 시간 동안 큰아이가 이를 갈지 않는다.

  큰아이가 아직 갓난쟁이였을 적에는 삼십 분마다 기저귀를 갈았다. 작은아이는 큰아이와 달리 밤오줌을 자주 누지 않았다. 작은아이는 한두 시간에 한 차례 기저귀를 갈면 되었다. 큰아이가 이를 언제쯤 갈지 않을까 헤아려 본다. 큰아이가 스스로 이를 예쁘게 그대로 두면서 새근새근 잠을 폭 들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4347.7.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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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 삶에 지친 한 남자와 일곱 천사의 이야기
리 캐롤 지음, 오진영 옮김 / 샨티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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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65



우리 집은 바로 이곳

― 집으로 가는 길

 리 캐롤 글

 오진영 옮김

 샨티 펴냄, 2014.6.30.



  우리 집은 늘 이곳입니다. 저곳도 그곳도 아닌 이곳입니다. 이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저쪽도 그쪽도 아닌 이쪽입니다. 저 먼 나라가 아닌 바로 이곳에 우리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는다고 할 적에도 먼 곳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예배당이나 성경에서도 하느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곳, 그러니까 내 가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내 하느님을 내 가슴에서 찾고, 너는 네 하느님을 네 가슴에서 찾습니다.



.. “나는 오직 당신이 보고 싶은 대로만 보일 거예요, 마이클 토마스. 나는 원래 인간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나를 소개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모든 천사가 남성은 아니에요. 사실 우리에겐 성별이 없어요. 날개도 없고요.” … “당신은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요. 마이클 토마스.” 천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아름답게 보이나요? 당신의 참된 모습을 한번 봐야 해요! 언젠가는 보게 될 거예요.” ..  (25, 30쪽)



  언제부터일는지 모르겠으나, 꽤 먼 옛날부터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 하나하나는 모두 하느님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라 하는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된 뒤에는, 이 어른을 두고 하느님이라 일컫는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이런 말이 참 아리송했어요. 아이들을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면, 어른들도 똑같이 하늘처럼 섬겨야 맞아요. 하늘과 같은 아이들이 자라 하늘과 같은 어른으로 살아야 맞아요.


  나한테는 우리 집 아이가 하느님과 같습니다. 아니, 나로서는 우리 집 아이한테 깃든 ‘네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내 이웃 아이라면 이웃 어버이가 돌보는 아이한테서 ‘그 아이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가슴속에 깃든 님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언제나 사랑이요 평화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가슴속에 깃든 님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언제나 싸움이나 겨루기나 미움입니다.


  오늘날 흐름을 보셔요. 한국 사회나 경제나 교육이나 정치나 문화가 어떤 모습인가요? 사랑인가요? 평화인가요? 아닐 테지요. 한국에서 으레 보는 모습은 싸움이나 겨루기나 미움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이라는 나라는 아이를 아이 그대로 바라보지 않을 뿐 아니라, 어른한테도 어른인 숨결 그대로 마주하지 않는 셈입니다.



.. “대답은 당긴 가슴속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와야 해요. 그리고 당신을 비롯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해야 해요.” … “당신의 의도가 현실을 바꾸고 있는 거예요.” … “인간이 깨달음을 얻는 데는 기본 원칙이 있지요. 우선 자신을 먼저 신경 쓰고, 그렇게 자신의 영적 여정을 존중하다 보면 주위 사람에게도 그런 일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거예요. 한 사람의 의도는 항상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치니까요.” ..  (31, 34, 66쪽)



  아이들 가슴속에 깃든 빛이 하느님인 줄 알아차린다면,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몰 수 없습니다. 거꾸로, 아이들 가슴속에 깃든 빛이 하느님인 줄 알아차리기에, 이 아이들이 앞으로 이룰 사랑과 평화를 거스르고자, 아이들 가슴속에 깃든 하느님을 지우려는 제도권교육을 밀어붙일 수 있어요. 사회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과 정치가 모두 쳇바퀴 같은 틀에 갇혀야, 비로소 권력이 생기고 자본주의가 불거지며 종교를 세울 만해요. 사람들이 우루루 예배당에 몰려들어야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커집니다. 사람들이 아이들을 그저 학교와 학원에 집어넣어야 사회권력과 문화권력이 활개를 칩니다.


  곰곰이 따질 줄 아는 머리와 가슴이 있다면, 우리 스스로 언제나 빛이요 님이며 하늘이기에, 우리가 우리를 스스로 제대로 읽는 하루를 누리면서, 삶을 날마다 새롭게 지을 수 있습니다. 내가 빛이니 늘 스스로 밝습니다. 내가 님이니 언제나 스스로 아름답습니다. 내가 하늘이니 노상 스스로 즐겁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처럼 깨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좀처럼 빛을 바라보려 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나 아닌 다른 데에서 찾기만 합니다. 예배당에 끝없이 갇히려 하고, 성경에 끝까지 얽매이려 합니다. 학교에 안 가면 바보가 되는 줄 알지만, 정작 학교에 가기 때문에 바보가 됩니다. 사회에 내 몸을 맞추지 않으면 따돌림받는 줄 알지만, 정작 사회에 내 몸을 맞추려 하니까 따돌림받습니다. 책을 읽거나 대학교까지 마쳐야 지식을 쌓아 똑똑해지는 줄 알지만, 정작 책을 읽거나 대학교까지 마치기에 지식이 무엇인지 더 모를 뿐 아니라 더 ‘안 똑똑해’집니다. 돈을 벌어야 살림을 꾸릴 수 있는 줄 알지만, 정작 돈을 벌고 또 벌어도 자꾸 돈만 더 벌려고 할 뿐, 살림을 꾸리거나 이웃사랑이나 두레는 하지 못합니다.



.. “우리에겐 과거나 미래가 없어요.” … “지식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존재할 수 없어요. 빛이 있는 곳에 비밀은 있을 수 없고, 빛은 지식의 탐구를 통해 진리가 드러날 때 생겨나죠.” … “당신은 기회가 왔을 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마이클 토마스. 그래서 스스로 교훈을 배워야 했죠.” …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건 그들과 함께한 순간의 에너지 때문이지 옛날의 물건 때문이 아니에요.” … “신은 거짓말을 하지 못해요. 신은 무언가를 싫어할 수 없어요. 신은 사랑밖에는 할 수 없으므로 사랑이라는 범위 바깥에서 공평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요.” ..  (80, 90, 111, 112, 218∼219쪽)



  리 캐롤 님이 쓴 《집으로 가는 길》(샨티,2014)을 읽습니다. 이 책은 스스로 안 깨달으며 바보처럼 톱니바퀴가 되어 제도권 사회에 노예처럼 길들여진 사람이 스스로 굴레에서 헤어나오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보처럼 길든 사람은 언제 굴레에서 헤어나오려 할까요? 언제일까요? 바로, 죽음을 앞둔 때입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두 손에 쥐었다’고 여긴 것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손에 쥐지 않았고 쥘 수조차 없은 줄 깨닫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었으니 아무것도 못해요. 그냥 죽을 뿐이에요.


  그냥 죽으면 어찌 될까요? 흙으로 갈까요? 몸뚱이는 흙으로 갈는지 모르나, 요새는 우리 몸뚱이가 흙으로 가지도 못해요. 이곳저곳 온통 막개발 막공사가 퍼지는 사회에서, 사람 몸뚱이는 흙으로 못 가고 한 줌 재가 될 뿐입니다. 그러면, 몸에 깃들던 넋은 어디로 갈까요? 갈 곳을 잃어요. 예배당에 얽매였던 사람이라면 예배당에서 시킨 대로 얌전히 저승 한쪽에 드러누운 채 ‘언젠가 찾아올 하느님’을 기다립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바로 우리 가슴에 있고, 우리 모두 스스로 하느님이니, 우리한테 찾아올 하느님은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늘 잠든 몸이면서 마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노예이면서 톱니바퀴 노릇만 합니다.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조차 깨닫지 못하면, 똑같은 삶을 다시 되풀이해요. 똑같은 삶을 다시 되풀이하면서 괴롭게 지내다가, 다시 죽음 문턱에서 ‘내가 왜 살지?’ 하고 묻지만, 다시 죽고 다시 태어나면서 두고두고 고단한 흐름이 이어지기만 합니다.



.. “인체의 모든 세포에 신을 자각하는 의식이 있어요. 그래서 세포 하나하나가 깨달음과 사랑을 경험할 수 있고, 진동의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거죠.” … “마이클, 내가 치유하도록 허락하지 말고, 치유 자체가 이루어지도록 허용해 봐요.” … 그는 신을 사랑했고 교회가 신성한 곳이라고 느꼈지만, 그는 늘 자신이 목자를 따르는 양이라는 소리만 들었다. 그 어떤 교회의 교사도 그에게 인생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 ..  (123, 125, 188쪽)



  이야기책 《집으로 가는 길》은 모든 실마리를 밝히지는 않습니다. 아주 작은 한 가지만 건드립니다. 내 가슴속에 깃든 빛과 님과 하늘을 스스로 바라보지 않고, 느끼지 않으며, 깨닫지 않을 적에는 내 삶이 무너질밖에 없다는 대목 한 가지를 건드립니다. 더없이 작은 조각 같은 지식입니다만, 바로 이 작은 조각을 참된 지식으로 품을 수 있을 때에 눈을 뜹니다. 이 작은 조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눈을 뜨지 못합니다.


  눈을 뜰 때에 집으로 갈 수 있고, 눈을 뜨기에 보금자리를 사랑할 수 있으며, 눈을 뜨는 날부터 삶을 새롭게 엽니다. 눈을 뜨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가시방석이면서 고단합니다. 눈을 뜨지 않기에 ‘사랑할 만한 보금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눈을 뜨도록 스스로 마음읽기를 하지 않으니, 새로 찾아오는 아침에 새로운 웃음으로 노래하지 못하고 자꾸 ‘지겹다’고 여깁니다. 4347.7.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이 책을 읽고 무언가 느낄 수 있다면, 무언가 느끼기 어렵다면, 《아나스타시아》(블라지미르 메그레) 일곱 권과 《람타 현실창조를 위한 입문서》(제이지 나이트)와 《람타 화이트북》(제이지 나이트)을 꼭 읽어 보기를 바랍니다. '아나스타시아'와 '람타'를 슬기롭게 마주할 수 있다면, 삶을 가꾸는 빛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다스리는가를 제대로 익혀서 하루를 밝힐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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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아이 165. 2014.6.29. 여름이 온 책읽기



  여름은 풀내음으로 느낀다. 풀빛이 짙푸를 때에 비로소 여름이로구나 하고 느낀다. 햇볕이 따가우면서 바람이 시원할 적에 참말 여름이네 하고 느낀다. 그리고, 우리 집 큰아이가 어깨를 다 드러내는 치마를 즐겨입는 모습을 보면서, 아하 그야말로 여름이군 하고 깨닫는다. 여름아이가 여름빛을 물씬 풍기면서 마루에 앉아 시원하게 책을 누린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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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아이 164. 2014.6.6. 읽어 준다



  네 살 동생이 그림책을 하나 집어 무릎에 펼친다. ‘할머니’ 이야기가 흐르는 그림책이다. 일곱 살 누나가 이를 알아보고는 동생한테 다가앉는다. 동생은 그림만 거꾸로 펼친 채 휙휙 넘기지만, 누나는 “보라야, 누나가 책 읽어 줄게.” 하면서 글을 하나하나 또박또박 읽어 준다. 동생은 누나가 한 장씩 넘기며 들려주는 목소리를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는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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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눈빛 22. 더 나은 곳은 꼭 있다


  요즈음 여러모로 떠도는 사진을 볼 적마다 으레 고개를 갸우뚱하곤 합니다. 구도나 노출이나 작품성이나 예술성 같은 대목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빈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거나 움직이는 빛은 좀처럼 모르겠습니다. 중견이나 원로라는 분이 내놓은 작품이든, 새내기이거나 나라밖에서 뛰는 분이 내놓은 작품이든, ‘모양’을 잡고 ‘빛깔’을 맞추기는 하는구나 싶으면서도, ‘이야기’를 엮거나 ‘빛’을 담지는 않는구나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실마리는 쉽게 찾을 만합니다. 사진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진처럼, 그림이나 글이나 노래나 춤도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도시와 문화와 문명과 예술도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대학교와 학문과 이론도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꾸 잊는구나 싶어요. ‘대단한 것’을 잊거나 잃는 채, ‘안 대단한 것’을 대단하게 여긴다든지 ‘안 대단한 것’에 대단히 크게 얽매이는구나 싶어요.

  사진을 찍기에 더 나은 곳은 꼭 있습니다. 이를테면, ‘어머니’를 사진감으로 삼겠다고 한다면, 내 어머니를 느낄 만한 곳이나 내 어머니가 지내는 곳이나 내 어머니가 태어난 곳이 ‘사진을 찍기에 더 나은 곳’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 어머니만 있지 않아요. 너희 어머니가 있고 저분 어머니가 있습니다. 이웃 어머니와 지구별 어머니가 있어요. 하나하나 따진다면, 지구별 어디에나 어머니가 있으니, 지구별 어디에서나 찍는 사진이라 하더라도 ‘어머니를 찍는 사진’이 됩니다.

  ‘풍경’을 사진감으로 삼겠다고 한다면, 풍경을 느낄 만한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풍경을 느끼면 될까요. 어떤 풍경을 담으면 될까요.

  풍경은 스튜디오에서 만들 수도 있습니다. 풍경은 골목동네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 풍경은 도시 한복판에서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풍경은 내 마음속에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은 곳은 꼭 있습니다. 더 나은 곳은 바로 내가 살아가는 곳입니다. 더 나은 곳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더 나은 곳은 바로 나 스스로 사랑을 느끼면서 삶을 누리는 곳입니다.

  사진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대단한 것’은 바로 우리 삶입니다. 우리 사랑이 대단합니다. 우리 넋이 대단합니다. 우리 마음과 꿈과 생각이 대단합니다.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무엇이 대단하고 무엇이 안 대단한지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진을 찍으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마다 ‘삶을 누리려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삶을 먼저 즐겁게 누리셔요. 이러면서 흐뭇하게 웃는 마음바탕으로 사진기를 손에 쥐셔요. 이론은 안 배워도 되고, 유학은 안 가도 되며, 전시회는 안 열어도 돼요. 사진을 기쁘게 사랑하고 아름답게 껴안으셔요. 4347.7.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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